정당한 분노 - 때로는 분노가 우리의 도덕률이 될 때가 있다
조병준 지음, 매그넘 사진 / 가야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이미 오래전, 낯선님에게 선물 받은 이 책은 늘 눈에 밟히는 곳에 꽂혀 있었다. 그렇게 책등만을 훑었고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체 아저씨’만을 보곤 꽂아두기 일쑤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여태 난 몰랐었다.『따뜻한 슬픔』의 저자인 조병준 시인이 여태 책 속에서 분노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고, 매그넘의 사진이 실려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랬다. 난 그저 ‘체 아저씨’가 커다랗게 표지를 장식하고 있던 것에만 관심을 쏟았을 뿐이었다. 그저 난, 책 제목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몰라도 너무 몰랐고 바보가 따로 없었다.  


세상의 모든 성현들이 분노하지 말라고 가르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화를 다스리지 못하면 사람이 다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분노해야 할 때가 있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을 때,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냉철해진 머리로 생각을 해도 그 분노가 정당한 분노일 때,
불의의 부패와 부도덕이 인내의 한계를 넘었다고 머리가 아니라 몸이 비명 지를 때,
그럴 때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때로는 인내가 아니라 분노가 우리의 도덕률이 될 때가 있다.
불의와 부패와 부도덕이라는 이름의 탱크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할 때,
약하디 약한 살과 피만 가진 인간이 그 앞을 막아설 수 있는 힘은 분노뿐이다.
..  


∥본문 中∥

『정당한 분노』는 조병준 시인이 매그넘의 사진들 중 우리네 분노를 자극할, 분노를 불러일으킬만한 사진들을 골라 글을 단 책이다. 조금은 과격한 구호(?)를 외치며 마치 1인 시위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혹은 거짓을 ‘정정당당’, ‘합리’, ‘사실’이라고 왜곡·조작·조장하는 이들에 당당히 맞서는 소수정예의 정당한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선봉에 선 자의 절규 혹은 외침이랄까. 금방이라도 게릴라부대를 조직해 적(?)들을 응징하러 떠날 것만 같은 조병준의 분노가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 그런 책이 아닌가 싶다.  


피와 눈물. 피는 금세 마를지 몰라도 눈물은 그렇게 빨리 마르지 못한다. 어떤 기억에는 시효 소멸이 없고, 그리하여 어떤 눈물은 생이 끝나는 날까지 흐를 수밖에 없다.(p42) 

 

어쩌면 언제든 슬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삶은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 없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아픔·슬픔·눈물 앞에서 당당하게 함께 슬퍼할 수 있고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서는, 그런 연습을 하지 않고서는 생이 부려놓은 오묘한 퍼즐을 완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때론 들끓는 피가 아닌 가슴을 녹이는 눈물이 강인한 생명과 더불어 정당한 분노를 진정으로 ‘정당한 것’으로 만들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 울고 있을 때, 고통을 호소하고 있을 때 다가가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것이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그 생물학적 본능을 잃어버렸다. 허가 받은 집에 살면서 허가 받지 않은 집이 철거되는 건 그저 타인의 개인적인 불행일 뿐이라고 외면한다.(p87)  


한 강의 소설『눈물상자』를 보면 ‘눈물단지’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가 나온다. 어쩌면 그 아이가 흘리는 ‘순수한 눈물’은 우리가 잃어버린 그 생물학적 본능이 아닐까. 아이가 간직하고 흘리는 그 순수한 눈물이란 ‘자기가 울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면서 흘리는······ 특별한 이유가 없지만,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이유들로 인해 흘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물(『눈물상자』; p17)’이다. 또한 ‘세상의 모든 눈물이 태어나기 전의 눈물······ 세상의 모든 눈물이 죽은 뒤의 눈물······ 세상의 모든 눈물들 사이에 고인 눈물······ 그 눈물에 닿는 것만으로, 아무리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마음도 천천히 녹기 시작(『눈물상자』; p26)’하는 눈물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순수한 눈물을 잃어버린 셈인지도 모른다. 그림자 눈물샘마저 말라버려 울고 싶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는 깡마른 몸에 새하얀 머리칼, 흰 모자를 쓴, 옷과 구두마저 모두 흰색인 노인(『눈물상자』에서 눈물을 사려는 할아버지)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순수한 눈물을 가진 아이가 할아버지를 보듬어 어루만지며 위로하던 순간, 평생 동안 말라있던 그림자 눈물샘이 녹아내리던 장면을 기억한다. 이처럼 우리는 잃어버린 생물학적 본능을 되찾는 것과 더불어 순수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

『따뜻한 슬픔』의 조병준과『정당한 분노』의 조병준이 과연 동일 인물인가, 하고 어리둥절했다. 느낌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을 정도니까. 물론 그가 가진 예리하고 예민한 감수성이 이 두 책에서 다른 방식 혹은 화법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일지라. 글 구석구석까지 그의 분노는 식을 줄 모른 채 서려있다. 정당한 그의 분노는 정말이지 어느 애니메이션에 등장한다는 악마의 열매인 ‘이글이글 열매’를 먹은 것 마냥 활활 타오른다. 온몸의 핏대를 죄다 세워가며 ‘전심전력’하고 있음이 고스란히 전해질만큼 강하고 짙은 분노를 뿜어낸다.  


덧붙여, 조병준은 사진에 관한 물음 하나를 남겼다. 화려하고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하고 익숙한 ‘빛의 초상’을 찍을 것인가, 아니면 ‘불온한 초상’ 그 그림자를 찍을 것인가. 앞으로 그의 사진이 은근히(?) 기대된다. 


**

나는 매년 한여름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싹할 만큼 시린 여름을 만나곤 한다. 대체로 음악과 영화 그리고 책을 통해서 계절을 역행한다. 가슴을 울리는 영화 한 편이 내 여름날의 피서지가 되기도 하고, 잔잔한 파도처럼 살포시 밀려와 거대한 해일처럼 변하는 좋은 음악이 ‘아이스케키’가 되기도 한다. 올여름,『정당한 분노』덕분에 그런 시린 여름을 보냈다. 마치 소름서리(?)라도 맞은 것처럼.

감정선이 민감한 것도 같고 무딘 것도 같은 나에게 들쑥이는 이런 감정선의 변덕은 마치 마른장마 속에서 당당하게 피고 지는 소름꽃(?)을 방불케 한다. 그것이 좋든 아니든 간에 앞으로도 오래도록 만발하기를 바라는 어리석음 한 줌 남겨보는, 깊어가는 밤이다. 


‡‡‡‡‡‡‡‡‡‡‡‡‡‡‡‡‡‡‡‡‡‡‡‡‡‡‡‡‡‡¨¨주워 담기¨¨‡‡‡‡‡‡‡‡‡‡‡‡‡‡‡‡‡‡‡‡‡‡‡‡‡‡‡‡‡‡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구걸이 ‘직업화’된 사회에서는 대개 ‘검은 손’이 걸인들의 뒤에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인도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어느 가이드북에서는 여행자들에게 끔찍한 사실을 알렸다. 어린아이들을 부모에게 돈을 주고 사서 불구로 만들어 구걸을 내보내는 일도 있다는 것이었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그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의 장애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멀쩡한 아이를 불구로 만들어 구걸을 내보내는 인간. 인간의 사악함에는 한계가 없다.(p124~p125) 

 

말 그대로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미국의 총기 난사 사건들을 접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초강대국 미국의 업보를 생각하게 된다. 무주공산이 아니라, 엄연히 원래 주인들이 살고 있던 땅에 쳐들어가 총으로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세운 나라였다. ‘살인하지 말라’는 자기네 종교의 계명을 어겨야했던 백인 이주민들에게는 자기 합리화 또는 정당화의 논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정당방위! 무단 침입한 강도가 자기 가족과 재산을 지키겠다며 달려든 집주인을 총으로 쏴죽이고 정당방위를 외친 것이다. 불행하게도, 인류의 역사는 그처럼 황당무계한 ‘정당방위’의 연속이다. 아비가 지은 죄를 자식이 갚는다? 총으로 일어선 나라 미국의 국민들은 언제 어디서 갑자기 날아오는 총알에 맞아 쓰러질지 모르는 지옥을 살아간다.(p175~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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