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넘어 - 대학등록금 1000만 원, 청년실업 100만 명, 사회의 오해와 무관심
조성주 지음 / 시대의창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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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무얼 바라 겨우 숨만 쉬고 있나. 나락으로 떨어지고 떨어져도 바닥은 보이지 않는 그런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28년을 함께 살아도 나는 나를 모르고’ 그렇게 살아가는 듯하다.『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넘어』는 지금 나를 비롯한 20대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무엇이 문제인가, 20대들은 어떻게 이 절망(?)을 극복해나가야 할 것인가 등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책이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책을 읽었다가는 중간부터는 짜증(?)이 폭발하는 듯했다. 끄트머리에 가서는 ‘아, 이게 뭔가요!’라는 생각까지 든, 아무튼 좀 복잡한(?) 책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절망의 트라이앵글’은 대학등록금 1000만 원, 청년실업 100만 명, 사회의 오해와 무관심이다. 대학등록금 문제를 필두로 해서 현재 20대들이 처한 상황을 여러 자료를 통해 분석하고, 청년실업의 궁극적인 원인(?)과 청년실업을 바라보는 세대와 계층 간의 시각차에서 발생하는 오해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치권내 인사(?)들이 바라보는 20대들의 정치적 성향의 편견과 오해, 통일에 있어서 20대들이 취하고 있는 태도(?) 등에 대해서도 담론을 통해 풀어나가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은 내게 그리 신선한 책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볼만한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현재 20대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사회적 시스템, 제도, 정책 등등을 들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신선한 책’은 아니라는 것. 나름 해결책도 제시하고 있는데, ‘그래서, 어쩌자고?’ 저자에게 되물어야 할 정도로 해결책이 참 거시기(?)한 것 같다. 조금 시건방지고 오만하게 말하겠다. ‘당신이 제시한 해결책, 그 말, 나도 할 수 있다!’

저자가 ‘연대’를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세대 간의 연대와 정치권과 20대의 연대 등을 강조하면서 연대만이 절망의 트라이앵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연대하자는 말이 시덥잖게 들린다기보다 그냥 연대하자고 말하는 게 다라서 멀뚱멀뚱했다고 할까.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는 연대를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이를 힘 있게 받쳐줄 만큼 그가 분석해놓은 문제점(대학등록금, 청년실업, 오해와 무관심)은 너무 식상하고 연대를 강조하기엔 좀 빈약한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저자가 말하는 그 20대에 속한 백수다. 내가 뭘 알겠는가. 저자가 나보다는 많이 배웠고 머리도 좋을 테니 그러면 그런 줄 알고 따라야지. 하지만 만약, 저자가 나처럼 찌질한 백수생활에 어느 정도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고, 거의 ‘달관’의 경지까지 이른 처지와 위치에서 이 책을 집필했다면 어땠을까? 해결책을 ‘연대’로 들고 나가야지 하면서 문제제기를 과연 대학등록금이나 청년실업 등으로 잡았을까? 내 생각에는 아니올시다! 자신도 현재 20대들과 다를 바가 없는 시절을 지냈고 충분히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하면서도 연대에 대한 접근 방식이 조금은 빗나간 게 아닌가 싶은 게 찌질한 백수인 내 생각이다.

잘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연대란, 저자처럼 사회적 시스템과 제도·정책적인 병폐의 관점에서 본 ‘한계적 트라이앵글’을 가지고 이뤄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조금은 성급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해결책을 골몰하는 것에서 그쳤다면, 나름 괜찮은 책이라 할 만하지만,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너무 뜬구름 잡기 식이 아닌가. 연대를 강조하는 여러 학자들이 많다. 예컨대, 강수돌 교수라든지 한홍구 교수, 윤구병 님(?) 등등의 주장을 보면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연대에 대한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들에 비해 이 책의 저자는 좀 성급하고 조금은 빈약하고, 설득력도 조금 떨어지지 않나 싶은 생각이다.

또 조금 아쉬웠던 점은 너무 쉽게 20대 젊은이들의 성향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말하는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분석해서 얻은 결과를 가지고 20대들의 특성을 도출하고 있는데 조금 위험한 발상이 아닌가 싶다. 달리 보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위치한 20대들의 성향을 잘 분석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깊이는 좀 얕다는 느낌이다. ‘절망’이라는 단어만 해도 그렇다.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 또한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절망이란 저자가 말하는 생존 혹은 생활욕구의 불충분만을 가지고 논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물론 인간으로써 기본욕구이자 가장 우선시 되는 욕구가 생존욕구라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게 다는 아니라는 것이다. 절망이라는 것은 단순히 생존욕구의 불충분, 단순한 감정의 패닉상태가 아니다. 이는 현실을 이탈한 의식의 세계로부터 도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젊은 세대가 앓고 있는 ‘병’의 근원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라 의식화한 이상향에 대한 ‘비전 없음’에 대한 좌절인 것이다. 저자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가지고 문제를 분석해서 해결책으로 연대를 들고 나왔다. 세대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부족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좀 더 건방지게 달려보자. 진정으로 20대들이 앓는 절망의 근원을 끄집어냈나, 되묻고 싶다. 나는 저자가 다분히 감정에 대한 호소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에 대한 호소와 감성을 자극하고 불러일으키는 것은 명백히 다른 것이다.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무 말 않고 그저 20대 젊은이들의 고충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문제해결을 위한 첫걸음은 ‘말하기’가 아니라 그저 묵묵히 ‘듣기’로부터 시작된다는 단순한 이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소통하자고 했던가? 그럼, 저자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게~~요?

고등학교 때 배구동아리를 했었다. 그때 대회 일정이 잡히고 연습을 하기 위해서 선배들에게 연락해야 할 일이 생겼다. 주장이었던 내가 무턱대로 전화를 넣었는데, 죄다 그냥 끊더라는. 그렇게 몇 번을 하다가 7대 선배(나는 13대) 왈, 절차를 밟아라! 그렇다. 절차를 밟고 수순에 따르라는 것. 내 한 대 위로 연락을 취하고 거기서 또 한 대위로 이어가는 그 과정과 절차를 말했던 것이다. 소통과 연대를 실현하자고 했던가. 그럼 절차를 밟아라! 일단 입 닫고 먼저 들어라, 고 말하고 싶다. 표면적인 문제가 아니라 젊은이들 내면의 상처를 먼저 찾아내고 보듬지 않고는 그네들을 움직일 수 없다. 젊은이들의 생각, 가치관, 정체성 그로 인한 혼란을 이해할 수도 잠재울 수도 없다. 하물며 소통과 연대는 오죽하겠는가.

진중권의『레퀴엠』에 보면, 미시마 유키오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사무라이 존재 미학에 대한 그의 확신은 ‘시대적 착오’에 부딪혀, 즉 변화된 시대가 요구하고 주도세력(젊은이)의 인성을 간파하지 못한 결과 할복이라는 유종의 미(?)를 낳았다는 것. 여기서 인성은 작게는 세대의 특성과 결부시켜 볼 수 있다. 세대의 특성 혹은 정체성은 이 인성의 이해노력 여하에 따라 소통의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만약, 대한민국의 20대들에게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면, 그들과의 소박하지만 대의를 위한 연대를 원한다면, 젊은이들의 내면에 휘몰아치는 생각과 감정들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겠나.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 20대들에게 함께 고민하면서 젊은이들의 정체성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네들의 인성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모든 문제해결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생각하는 젊은 세대는 오늘을 사는 세대다. 미래를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기성세대들과는 조금 다른 성향을 보인다는 말이다. 굶어 죽으면 어떡하지? 이런 생존에 대한 위협 따위에 쉽게 절망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성을 갖고 있는 듯하다. 자유에 익숙한 세대이면서 그에 대한 속박은 선전포고와 같다. 묵묵부답의 극단적인, 자폐적으로까지 보이는 성향을 띄는 세대다. 그걸 가지고 냉소주의니 무관심하니 하는 것은 좀 우습지 않나 싶다. 젊은 세대가 갖고 있는 열정, 꿈, 그 힘을 믿고 응원하지는 못하더라도, 너무 쉽게 배제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젊은 세대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해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생활에 대한 힘겨움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열정과 꿈과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뭘 알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 세대에 속한 한 사람이다. 내 말이 옳든 그르든 간에 내가 하는 말은 20대들이 하고픈 많은 말의 편린정도는 된다고 본다. 소통과 연대를 이끌어내고 싶은가? 우리를 진정으로 돕고 싶은가? 그렇다면 감정의 호소 따위는 버렸으면 좋겠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가 궁금하다. 즉,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불확신과 불분명으로 앓고 있는 환자나 다름없다.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하기를 원한다면, 절차를 다시 밟아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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