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영 - A Day : 25현 가야금 연주집
조문영 연주 / 드림비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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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조문영의『A Day / 25현 가야금 연주집』의 감상이 쓰고 싶어졌다. 여태 햇귀님께 선물 받은 후로 몇 달 동안을 아침·저녁으로 들어왔으면서도 단 한 줄도 써내려가지 못했던 느낌을 쓰고 싶어졌다. 엉뚱하게도 오늘 아무 생각 없이 영화『황진이』를 보고는 이렇게 됐다. 영화 속에 삽입된 곡을 찾아 웹을 뒤지고 뒤지다가 ‘25현 가야금’이라는 공통분모를 발견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영화를 보면서 내 마음 속에 남은 짧은 감상이 이 앨범의 첫 곡 제목과 잇닿아 있었기에 때문이기도 하다.  


「슬픈인연」은 영화가 남긴 여운을 이어간다. 기구한 삶, 가련한 사랑의 운명으로 엮인 영화 속 ‘놈이’와 ‘황진이’는 그 관계의 사실성 진위를 떠나 가혹하고 시리디 시린 현실에서 신음하는 연인이다. 서로를 바라면 바랄수록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연, 그네들이 이 곡을 통해 다시 살아난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Green Sleeves」는 왠지 ‘그립다’는 느낌으로 충만하다. 중간 중간 통통 튀는 듯 한 선율은 조금은 행복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리운 무엇인 것처럼. 시인 조병준은 슬픔과 슬픔이 잇닿은 체온으로 슬픔을 이긴다고 했다. 사진가 이홍석은 외로움과 외로움이 서로를 보듬으며 외로움을 이긴다고 했다. 아무래도 이 곡은 그리움과 그리움이 서로 뒤엉켜 잠시나마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사무치는 그리움을 잊게 하는 듯하다. 

 

한참을 그리움을 쫓아 내달렸다. 그러다 어느 둔덕에 누워 밤하늘을 밝히는 달과 그 속에 찬란히 수놓아진 별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나를 본다.「따오기」는 그렇게 나를 잠시 쉬게 한다. 어느 봄날의 옅은 밤인 것 같기도 하고 초여름 혹은 가을의 밤인 듯도 하다. 그곳에 누워 산들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그 아름답고 옅은 밤하늘을 눈을 감은 채 맞고 있다. 평온함! 딱 그렇다.

 

「거친 길로의 여행」을 들으면서 예전에 어느 프로그램에서 가수 하림이 나와 연주하던 아이리시 휘슬이 떠오른 건 단순히 우연한 일이었을까. 케이스를 보니 하림이 참여한 곡이다. 아이리시 휘슬과 잰걸음을 닮은 가야금의 선율의 조화. 나는 둔덕을 박차고 일어나 달렸다. 놈이도 황진이도 낙원의 섬을 향해 내달리는 것만 같은 환영이 펼쳐진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걸 느낀다. 그래도 왠지 웃는 낯이 어울리는 곡이다. 아슬아슬한 긴장을 틈타 달아나고 또 달아나는, 그런 아이러니한 스릴감이랄까.

 

놈이가 말한 그 낙원의 섬에 들어선 것일까. 몸은 조금 전까지의 팽팽한 긴장을 잃었다. 하늘하늘 꽃잎이 나리는 듯하다. 말장난 같지만「4월 이야기」는 영화『4월 이야기』처럼 줄지어 벚꽃이 만연한 낙원의 섬으로 인도한다. 그렇게 한없이 편안하고 아름다운, 놈이의 말처럼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살 수 있는 곳, 서로 도와가며 그저 행복한 시간만을 허락하는 곳, 그런 낙원의 섬이 있다면, 그곳에 들어선 기분이 꼭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에 ‘소가 된 게으름뱅이’가 되어도 좋을 만큼······  


만약, 그 낙원의 섬에서 생활하게 된다면 아마「여우비 오던 날」이 전하는 템포감이 일상의 속도가 아닐까 싶다.「4월 이야기」가 무한한 게으름조차 허락하고도 남을 무엇이라면,「여우비 오던 날」은 ‘아, 심심하군!’ 하고서 섬 곳곳을 가뿐하고도 여유로운 걸음으로 둘러보는 듯 하달까. 이런저런 열매를 먹으면서 이 아름다운 섬을 둘러보다, 전제덕이 전하는 하모니카 연주를 들으며 새로운 삶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평온의 시간과 같은······ 

 

이런! 황진이가 깊은 험난한 산을 오른다. 길도 나있지 않은 그런 바위산을 오르고 올라 깎아지는 벼랑 끝에 서 있다.「바람의 전설」은 놈이의 유골함을 들고 산을 오르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렇게 벼랑 끝에 선 황진이는 놈이의 유골함을 안은 채 지난 날 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어릴 적, 기생이 되기 전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바깥세상을 구경시켜준 놈이를, 그날 난생처음 나가본 저잣거리에서 아름답게 피어오르던 연등을 떠올린다. 한줌의 재로 품에 안긴 놈이를 안고 황진이는 그렇게 벼랑에 선 채로 하염없다.  


이젠 보내야 한다. 사랑했던, 죽어서도 곁을 지키겠다던 놈이를 바람에 맡기고 바람이 되어라, 그래서 내가 언제고 바람과 함께 일어나고 바람과 함께 잠들 수 있도록 바람이 되어라, 한다. 자연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모든 것은 마음이 없어 상처받지 않는댔으니 앞으로는 그리 살아야 한다, 고 놈이를 바람에 실어 보낸다. 그 마지막 의식은 슬프면서도 조금은 비장한,「겨울안개」에 녹아난다. 이네들의 이별의식에 내가 어울릴 법한 곡을 정할 수만 있다면, 나는 이「겨울안개」를 정갈하게 바칠 것이다.  


황진이는 그 후로 어찌 되었을까. 내가 말하는 황진이는 다분히 영화의 연장으로써 존재하는 황진이를 말하는 것이다. 놈이를 바람에 묻고 되돌아온 일상에서 그녀는 어찌 보낼까.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제 삶을, 이제는 놈이의 삶까지 짊어진 그녀가 비구니라도 되었을까.「축제」. 어쩌면 그녀는 바람이 되어 돌아온 놈이와 함께 죽는 날까지 축제를 즐기듯 여생을 만끽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바람으로 되살아 온 놈이가 밀쳐냈을 것이다. 계절마다 놈이는 그녀에게 한 아름씩의 온갖 싱그러운 향기를 실어다 주었을 것이다. 위선의 탈바가지를 벗기려는 고약한 놀이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 나날이 축제와 같으니까. 아마도, 그랬을 것만 같으니까.  

 

*

좋은 음악은 마음으로부터 울린다. 귀를 통해 전해지는 게 아니라 기억조차 닿지 않은 곳에서 그 파장은 잔잔히 일게 마련이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나를 휘감아 도는 울림을 알아챘을 땐 이미 늦은 후이다. 언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는지도, 벌써 몇 번째 반복해서 들었는지도, 아니 벌써 몇 날이 몇 달이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시간이 공간을 가둬버리는 듯 하달까.  

 

**

책을 읽고 감상을 적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편이다. 하지만 음반과 영화를 듣고 본 후 그 감상을 적기란 아직도 익숙지 않다. 책은 한 번을 읽고도 어중이떠중이 같은 감상을 잘도 써내려 가는데 몇 달씩이나 줄곧 들은 음반은, 감흥에 젖어 수차례 다시보기를 한 영화는 어째서 단 한 줄도 써내려가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곰곰 해보지만 답은 언제나 무음과 무성, 무형이기만 하다.  


사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게 정답인지도 모른다. 마치 소설가들이 첫 문장에 고심하고 고심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아니면 벅차오르는, 그 알 수 없는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밀물처럼 내 속으로 들어와 나를 헤집어 놓고는 썰물 때면 언제나 나만 홀로 남겨진 그런 기분이랄까. 세상천지가 낯설어 그대로 주저 앉아버리고만 싶은 심정이랄까.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내 혼을 홀딱 빼놓고 나를 헤집어 놓는 이런 음악이, 이런 영화가 군더더기 없이 그저 ‘좋다’고 느낄 뿐임을 안다는 것. 평론가들이 산산이 부셔놓았든 네티즌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놓았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넋을 놓고 몇 십분 몇 시간을 멍하니 있어도 지난 시간이 아깝지 않다고 느낄 뿐, 그거면 족하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음악과 영화를 소화하는 방식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쉽사리 감상을 써내려가지 못하는 이유인지도. 어쩌면 이런 내 소화방식은 늘 내 부끄러운 부분들과 닿아있기에 감상은 곧 내 치부를 들추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망설여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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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샬롯 2009-06-14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리 악기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굉장히 아름답겠습니다.

ragpickEr 2009-06-15 08:09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저는 잘 몰라요~ 헤헤.. 그냥 우리 악기로 연주하는 걸 들으면 뭔가 스멀스멀~ 희안한 감정이..^^* 이히히~

좋은 날 되셔요~!! 고맙습니다..

교자만두 2009-12-30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인 님의 감수성이 부러워요..제가 같은 음악 듣는다고 이런 감성을 풀어낼 수는 없을텐데..그래서 레인 님께 감사합니다. ^^때론 소설가와 시인이 부럽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넘어서 그들의 존재가 감사할 때가 있어요. 나는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는 걸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빚어내니까요. 그 분들께 감사한 마음처럼 레인 님께도 감사해요. 글 너무 잘 봤습니다.^^

ragpickEr 2009-12-30 23:43   좋아요 0 | URL
우아한 냉혹님^^*
아..^_^;; 그냥..마구마구 적어내려 간 것 뿐인걸요..^^*;;이렇게 저를 부끄럽게 만드시다니요..ㅋㅋ

맞아요!! '나는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는 걸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빚어내'는 그네들의 존재가 참으로 고맙지요..^^*

재미난 건요..그저 생각나는대로 끄적였을 뿐인데..다른 누군가에겐 그 낙서가 아주 와닿을 수도 있다는.. 뭐 그런 것 같아요..^^*;
엉뚱한 낙서 읽어주셔서 고맙기만 합니다! ^^*; 으흐흐~

교자만두 2009-12-30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국악과 졸업한 선배가 있어서 좋은 곡으로 CD만들어 주셨어요.ㅋ 국악 음반 선물하고 싶어서 언니한테 부탁했는데, 선물하기 전에 들어 보니 나도 너무 좋아서...언니, 저도 한 장...ㅎㅎ 듣다가 또 선물하고 싶은 사람 생겨서 또 한 장 굽고..영리 목적은 아니었지만...어쩌다 보니 불법 CD 대량 유통시켜 버렸네요...=.=;;;핑계지만...그게....시중에 그런 CD가 없어서..ㅠ.ㅠ

ragpickEr 2009-12-30 23:45   좋아요 0 | URL
우아한 냉혹님^^*
와우~! 얼마나 멋진 곡이길래 불법유통을..ㅋㅋ
(사실은..저도 그런 적이 있어요..ㅋ 시중에 유통되지 않는 국악동요..를 우연찮게 발견(?)해서 몇 장 스윽~꾸워서 돌렸다는..^^*;;)

쉿! 이건 비밀유지가 필요한 듯하네요..^^* ㅋㅋ

교자만두 2009-12-30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게 용서될 것만 같은...좋은 날이네요..전요 이번 크리스마스 때 그랬어요..모든 미움이 사라지면...진짜 올해는 산타가 오셨나 봐요...근데 크리스마스 지나고 다시 복귀ㅠ.ㅠ

ragpickEr 2009-12-30 23:46   좋아요 0 | URL
우아한 냉혹님^^*
오늘 좋은 날 보내셨나봐요? ^^* 후훗..
산타..^^* 아직 안 돌아갔을 것 같은데요? ^^*

모쪼록 좋은 생각 많이 받아들이시는 내년이 되시길 바라봅니다!! ^^*
파이팅입니다!! ^^* 이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