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인간
알도 팔라체스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연기 인간』

알도 팔라체스키 (지음) | 박상진 (옮김) | 문예출판사 (펴냄)

희곡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는 않으나 읽는 내내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가볍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가벼움으로 정의하는 페렐라는 벽난로 꼭대기 굴뚝위에서 33년을 존재하다가 내려왔다. 페나, 레테, 라마 세 노파가 피웠던 불로 인해 생겨나고 세 노파가 나누던 이야기를 들으며 전쟁에 대해, 사랑에 대해, 철학에 대해 배웠으나 페렐라는 그것들이 아무 쓸모도 없는 지식이라고 말한다.

연기로 이루어진 인간 페렐라는 굴뚝 아래로 내려와 장화를 신고 세상에 나아간다. 그의 등장으로 세상은 떠들썩해지고 사람들은 세 노파의 이름을 따서 그를 '페렐라'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메시아처럼 추앙한다.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도 않았고 메시아가 전할 법한 메세지가 없는데도 말이다. 페렐라는 세상의 모든 것이 신비로운 '순수' 그 자체일 뿐이다.

많은 여인들이 페렐라의 앞에 와서 자신들의 지나온 사랑을 얘기한다. 사람들은 그를 닮기 위해 같은 연기 색깔의 옷을 입고 연기를 기리는 축제와 무도회를 개최하고 연기의 가벼움을 칭송했지만 이 모든 숭배가 돌변하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궁정 하인 알로로가 자신도 페렐라처럼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 연기 인간이 되고자 스스로를 불태우는 일이 벌어지고, 이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경악하지만 페렐라는 알로로의 죽음은 자살일 뿐이라고 말한다.

"가볍게 되는 건...... 좋은 일 입니다만...... 하지만...... 이 사람은 제가 보기에 자살하려던 거였습니다! 가벼워진다는 것...... 가벼운 것과는 달리, 이 사람은 자살한 겁니다...... 같은 게 아닙니다." (- 연기 인간, 본문 200페이지)

알로로의 최후에 대한 페렐라의 무관심 혹은 냉소적인 반응으로 사람들의 추앙은 비난과 공격으로 일변했다. 페렐라의 가벼움은 닮고 싶은 것에서 제거되고 격리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페렐라의 등장에 너도나도 사랑과 존경을 보내던 그 마음에 군중 심리가 작용했듯이 재판에 회부되어 판결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파도처럼 떠밀리는 군중 심리일 뿐이다. 군중심리는 때로 진실을 은폐하고 조작하며 여론이라는 어마어마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이 힘을 이용하기 위해 불씨에 부채질을 하듯 군중 심리를 만들어 내려는 정치인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재판 중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변론의 시간에도 페렐라는 "나는 가볍습니다."만을 반복한다. 오로지 벨론다 후작 부인만이 자신도 가볍다고 말하며 페렐라를 변함없이 옹호하고 그의 곁을 지킨다. 페렐라가 갇힌 오두막 감옥에 벨론다 후작 부인의 요청으로 설치된 벽난로를 통해 페렐라는 사라진다. 사람들과 그를 연결해 주었던 장화와 사람들이 한때 그에게 요청했던 법전만을 남긴채.

페렐라를 닮고 싶은 욕망, 사랑을 이루고 싶은 욕망, 권력을 향한 욕망, 경제적인 부와 성공을 향한 욕망, 욕망, 욕망. 끝없는 욕망이 우리를 점점 더 무겁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라톤 국가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50
플라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플라톤 국가』

플라톤 (지음) |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펴냄)

 

 

정의, 이데아, 영혼론, 동굴의 비유, 이상국가, 철인정치, 지혜자...

서양철학의 토대를 만든 핵심 개념의 시작

- 플라톤 국가, 표지글에서

 

<플라톤의 국가>는 그의 저서들 중 10권의 분량으로 10년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플라톤의 저서는 시기에 따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뉘며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주변의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보통 '대화편'으로 불리며 <플라톤 국가> 또한 대화편으로 구성된 중기 작품이다. 초기에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대변자 역할을 했지만 중기에는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철학을 대변하고 후기의 저서들은 중기에 선보인 여러 이론을 좀 더 추상적인 수준에서 논의한다.

플라톤과 같은 명문가의 자제들은 정치로의 입문이 거의 정해진 코스였다. 그러나 플라톤이 두 형과 달리 정치가 아닌 철학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계기는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처형이 주요했다. 아테네의 민주 정권에 의해 불의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처형되는 스승의 죽음이 정치와는 거리를 두게 만든 것이다.

 

10권으로 구성된 <플라톤 국가>에서 다루고 있는 이론은 정치철학, 윤리학, 인식론, 존재론, 영혼론, 교육론, 예술론 등 광범위하다. 그러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치철학을 논의로 부각시켜 윤리학과 비교, 대조시키면서 '정의'라는 큰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막대한 부를 가졌기 때문에 남을 속이거나 빚진 것을 갚지 않는 등의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이 보람이었다"는 부유한 상인 케팔로스의 얘기로 논의는 시작된다. 폴레마르코스는 "친구에게는 이로운 것을, 적에게는 해로운 것을 돌려주는 것"이 정의라 하고,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역설한다. 글라우콘은 "강자가 취하는 이득이 아닌 사회의 대다수가 지키기로 협약한 것"을 정의라고 한다.

정의란 그 자체로 좋은 것, 그 자체로는 좋지 않으나 좋은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도 좋은 것, 그 자체로도 좋고 수단으로서도 좋은 것 3가지 중에 건강과 지식처럼 그 자체로도 좋고 수단으로서도 좋은 것이 진짜 정의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하고 있다.

 

제목만 본다면 '국가가 나아갈 길'이나 '올바른 국가는 어떠한 모습일지'가 논의의 중요 쟁점일 것 같지만 <플라톤 국가>에서 치중하고 있는 것은 개인의 윤리이다.

소크라테스가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국가는 칼리폴리스이다. 칼리폴리스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철인정치가 필수이다. 교육을 통해 권력과 명예를 탐하지 않는 절대 선의 존재인 철인에 의해 다스려지는 국가인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혹은 플라톤의) 이러한 이론과 주장을 그대로 현대에 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칼리폴리스는 군대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시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플라톤이 <플라톤 국가>를 통해 훌륭한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밝히고 싶었던 것은 '정의'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덜의 저서인 <정의란 무엇인가>가 세계적인 성공을 이룬 것은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그만큼 뜨겁다는 것일테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고민은 계속되어 왔다. 정의란 무엇인가?

 

<플라톤 국가>를 통해 플라톤이 보여주는 여러 이론들이 현대인들에게 그다지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학문의 시작에 플라톤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예를들면 덧셈 뺄셈을 배우지 않고는 미적분도 함수도 할 수 없듯이 말이다. 플라톤이 결국 궁극적으로 얘기하고 싶어하는 것은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도 개인의 윤리가 있어야만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 - 스티븐 핑커의 역사 이론 및 폭력 이론에 대한 18가지 반박
필립 드와이어.마크 S. 미칼레 엮음, 김영서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

필립 드와이어, 마크 s 미칼레 (엮음) | 김영서 (옮김) | 책과함께 (펴냄)

스티븐 핑커의

역사 이론 및 폭력 이론에 대한

18가지 반박

-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 표지글에서

표지에 있는 문구를 보고 호기심과 함께 선입견도 생겼다.

'스티븐 핑커의 성공에 학자들이 질투한 거 아니야?'. 그렇게 반쯤은 방어적인 태도로 '당신들의 질투에 절대로 동조해주지 않겠다!'며 읽기 시작한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는 중반부를 넘어가며 '이럴수가!' 라는 탄성을, 마지막 페이지 완독후에는 이 책을 발견하고 읽은 나를 스스로 칭찬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즐기고 계속하는 각자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책을 통한 지식의 습득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독서를 함에 있어 무조건적인 습득보다는 비판적 책읽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번에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를 읽으며 거듭거듭 절실하게 깨달았다. 몇 해전 감명깊게 읽었던 <지금 다시 계몽>과 읽지는 못했지만 본문에서 수없이 거론되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 대한 비판은 내가 그간 해온 독서가 비판적 독서가 아니었음을 반성하게 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인지도 있는 학자이자 작가인 스티븐 핑커의 저서들, 그의 주장 그리고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통계와 사실들을 '설마?'하는 의심과 여과없이 받아들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성, 교육, 문명과 과학의 발전으로 세상이 살기 좋은 곳으로 나아가고 인간 또한 폭력에서 비폭력으로 나아가는 선한 존재라는 것을 믿고 싶었던 본능이 크지 않았을까. 폭력은 무지와 야만이라고 이해되기 쉽기 때문에 폭력이 감소 되어가는 것이 곧 문명화되고 있다는 것이라는 스티븐 핑커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말하자면 믿고 싶은대로 보았던 것이다.

스티븐 핑커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제시한 자료와 통계는 편향, 오용되었고 취사 선택되었다. 실재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암수 범죄와 폭력은 무시되었고 다소 제국주의적인 관점에서 소수 민족과 유색 인종에게 가해젔던 폭력의 역사 또한 가볍게 지나치거나 무시되었다. 결론을 정해놓고 자신의 결과에 이르도록 거기에 맞춰가는 논거와 자료제시를 통해 이분법적 사고로 독자들을 이끈것이다.

스티븐 핑커는 폭력이 감소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폭력의 범주를 전쟁에 제한한다. 문명화 되어갈수록 폭력은 줄어들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문명화시킨다"라는 명목으로 가해졌던 식민지 전쟁의 역사는 어찌 설명할 것인가! 중앙집권식 국가의 등장과 부상으로 폭력이 감소되었다고 했지만 공권력과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고문과 처형, 전쟁 또한 무시되었다.

마약 관련 범죄와 고의적인 성병 감염 전파, 어린아이들과 여성을 대상으로 한 드러나지 않은 성범죄, 동물과 자연에 가해진 학대와 훼손 등은 스티븐 핑커의 폭력에 정의되지 않았다. 근현대에 이른 폭력은 감소된 것이 아니라 은폐되고 다양해졌으며 드러나지 않은 암수 범죄는 그 수를 짐작할 수조차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잔혹한 폭력의 역사는 사회적 강자들, 주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합리화되고 포장되었으며 스티븐 핑커가 인용한 통계와 자료에서는 고의적으로 보이는 기록의 누락도 있다.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에는 핑커의 주장에 대한 반박, 핑커 개인에 대한 비난, 핑커의 책은 널리 읽히고 유명세를 타는 반면 전문 역사학자들의 책은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 등도 보인다. 일반 독자로서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는 즐거움과 더불어 가져야할 비판적인 시각의 부재를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분야를 막론하고 책을 읽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필독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라스무스 평전 - 광기에 맞선 이성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민영 옮김 / 원더박스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라스무스 평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정민영 (옮김) | 원더박스 (펴냄)

에라스무스가 원하는 것은 평화, 평화뿐이다. 어느 편에도 들지 않고 비켜서 있겠다는 것, 평온뿐이다.

"나는 나의 평온을 원한다."

- 에라스무스 평전, 본문 중에서

에라스무스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보다는 얼마전 읽었던 발자크 평전과 같은 저자인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더 이끌려 읽게 되었다. '동일한 저자가 맞나?'싶게 분위기가 사뭇 달라 다소 당황하기도 했지만 저자의 자전적인 이야기나 허구의 소설이 아닌 실제 인물의 평전이니 오히려 그것이 더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이제사 든다.

'의지의 자유', '생각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에라스무스가 유일하게 증오하던 것이 이성에 반하는 정신인 광신이었다. 지식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인정받지 못하고 카톨릭의 영향이 거의 유일했던 중세시대에 종교인이었음에도 광적인 믿음 대신 대립과 마찰없이 자신의 자유를 획득하는 자세는 당대의 극단적인 종교인들의 눈에 곱게만 보여졌을리 없다. 교황과 루터의 종교개혁 사이에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립적인 그의 태도는 공격받기도 쉬웠다. 자유를 추구하는 에라스무스에게 결정은 어느 쪽이더라도 구속이었을테다.

중립을 지키는 그의 태도가 어찌보면 극단의 우유부단함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후텐의 부탁을 거절하는 방법조차도 빙빙돌려 하는 그의 어법에 가슴이 답답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교황과 카톨릭의 부패를 개혁하고자 했던 루터마저도 광기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변화되어 간 것을 보면 허약하고 과민한 신체조건까지 가졌던 에라스무스가 취할 수 있었던 자기만의 방어법이었을 수 있겠다란 이해도 된다. 공격적인 비판과 파괴적인 폭력보다는 해학과 조소로 종교개혁에 대한 요구를 <우신예찬>을 통해 세상에 얘기한다. 글을 통해 세상의 인정을 받고 권력자들이 그를 얻기 위해 애쓴다. 아무래도 박쥐처럼, 철새처럼 지조없이 구는 인사들보다는 중립을 지키는 자의 한마디가 더 큰 힘을 가질테니 말이다.

에라스무스의 뜻에 따르면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 인간애를 생각하는 사람은 어떠한 이데올로기와도 결탁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이념은 그만의 주장에 따라 헤게모니 싸움을 벌이기 때문이다.

- 에라스무스 평전, 본문 130페이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이해하고 타협하는 삶. 분리가 아닌 결합을 장려하던 에라스무스였으니 서로 자기 편에 끌어들이려하는 난장판 속에서 그토록 추구했던 자유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신체적인 조건과 성격 등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던 루터와의 관계도 계속되서 거론된다.

루터에게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종교였고, 에라스무스에게는 인간이었다.

- 에라스무스 평전, 본문 162페이지

평온을 원했던 에라스무스의 중립을 세상은 가만 놔두지 않았다. 공격하고 비난했다.

나치를 피해 망명을 해야했던 츠바이크가 에라스무스 평전을 통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에라스무스의 중립 그 자체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광기와 극단, 폭력 등에서 휩쓸리지 않은 에라스무스가 아니었을까. 그 혼돈의 시대에서도 평화와 화합을 바랬던 그를.

에라스무스의 시대에도 있었고, 츠바이크의 시대에도 존재했던 폭력과 혼돈이 과연 지금은 없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속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3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펴냄)

소녀의 오해가 불러온 젊은 연인들의 비극. 그리고 이를 되돌리려는 한 소설가의 평생에 걸친 지난한 속죄!

- 속죄, 표지글에서

어린이집에서 두 아이의 다툼끝에 한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의 이유를 물으니 자기가 친구를 때려서 (실수가 아님) 맞은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했는데 맞은 친구가 "괜찮아"라고 해주지 않아 울었다는 것이다. 그림책 지도사로 어린이집에 봉사를 다니던 선생님께 들었던 실제 사례이다.

잘못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보다 가해자에게 면죄부처럼 주어지는 피해자의 용서가 강요되고 있는 사례는 생각보다 많다. 심지어 피해자는 용서하지 않았는데 가해자는 "더 높은 분께 용서받았다"고 하는 웃지 못할 일들도 있다. 피해자는 고통의 순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십 년 혹은 그보다 오랜 시간을 매분 매초 고통 속에서 죽음같은 삶을 사는데 가해자는 속죄를 통해 용서받았다며 평화를 얻는 모순이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

속죄의 두 연인, 세실리아와 로비의 비극은 브라이어니의 상상력에서 시작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평생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갔다고 하지만 그 속죄는 누구를 위한 속죄일까. 결국은 저지른 잘못을 용서받고 싶은, 그로 인해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 않았을까.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많은 일들 중에 증명하기 어려운 진실보다 믿고 싶은 것을 진실이라 우기는 일들로 인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남의 얘기이기만 할까.

브라이어니의 오해는 철없는 어린아이의 상상력이 보태어진 점도 있지만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질서와 상황이 자신의 통제 아래에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도 한 몫 했다. 사촌들과 함께 하기로 했던 연극 '아라벨라의 시련'의 주도권이 롤라에게 넘어가는 듯하자 연극을 없던 일로 해버리는 독단, 로비가 세실리아에게 전해달라던 편지를 먼저 뜯어보는 일, 롤라가 당한 숲에서의 비극을 위로하며 느끼는 우월감 등이 브라이어니의 이런 성격을 드러낸다. 엄마 에밀리는 롤라에게서 그토록 혐오하는 여동생 허마이어니의 모습을 보았지만 어째서 브라이어니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을까. 사람들은 저마다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일까.

브라이어니가 로비를 범인으로 몰아버린 자신의 죄를 속죄하겠다며 간호사가 된 일도 마냥 곱게 보아지지는 않았다. 속죄는 응당 피해자에게 가장 먼저 해야될 행동이 아닌가 말이다.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신의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고 난 뒤 잃을 것이 거의 없을때 하는 속죄의 진정성을 믿어주어야 할까? 무거운 죄의식으로 남아있던 세실리아와 로비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자신의 상상력과 소설 안에서 이어놓고 덜어놓은 브라이어니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 싶지 않다.

그는 그애를 용서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입은 영속적인 피해였다.

- 속죄, 본문 338페이지

평생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품은채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육체가 병드는 것보다 훨씬 깊은 상처로 정신과 영혼이 병들고 삶이 피폐해지는 여러 이유 중 하나다. 로비의 인생은 외부로부터 베인 상처와 자신 내부의 비수로 베이는 결코 낫지 않을 상처를 가진채 살아가게 된 것이다.

모든 잘못에는 마땅히 반성과 속죄가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 속죄에 용서가 반드시 주어져야 할까?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 목격자가 엉뚱한 사람인 로비를 가해자로 만들어버린 일은 로비의 인생 뿐만 아니라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영혼도 함께 파멸시켜 버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범인의 정체는 '헉!'하는 입틀막의 반전을 주었다. 그리고 그 반전을 뛰어넘는 또 한번의 반전도!

미투로 세상이 뜨거울때 너도나도 경쟁하듯 했던 미투로 억울한 가해자가 되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요즘 출간되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신작들에 점점 기대감이 커진다. 감동과 재미, 소설과 현실의 접점이 빛나는 수작 <속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