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 (일러스트판)
브램 스토커 지음, 페르난도 비센테 그림,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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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cula 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지음) |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펴냄)

여름만 되면 쏟아지는 공포영화와 드라마, 소설은 무더위를 씻어줄 오싹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공포를 즐기는 이들에게 계절은 의미가 없다. 요즘 공중파 채널에서 매주 방송중인 <심야괴담회>의 인기가 계절에 상관없이 꾸준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시월에 접어들며 갑작스레 쌀쌀해진 날씨는 바람소리마저 스산하다. '휘이잉~' 소리를 내며 거칠게 불어대는 바람소리를 배경음향 삼아 읽게 된 열린책들의 일러스트판 <드라큘라>는 재독을 후회하지 않게 번역도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본문의 내용과 어울리는 일러스트들이 눈도 호강시켜주는 일석이조의 기쁨을 주었다.

제 육신이 그렇게 죽으면 여러분들은 잠시도 지체하지 말고 제 몸에 말뚝을 박고 머리를 자르세요. 제게 안식을 주고 싶다면 그보다 더한 일을 하셔도 돼요.

여보, 내가 누군가의 손에 죽음을 맞아야 한다면 그것이 가장 사랑하는 남자의 손이 되게 해주세요.

-열린책들 <드라큘라> 본문 556,557페이지

공포소설, 환상문학의 고전인 <드라큘라>는 여주인공 미나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일반적인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겁에 질려 위험을 자초하고 쉽게 해결될 일도(본인의 의도는 아니지만) 꼬아버리는 등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하기는 커녕 일행에게 짐이 되고 마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나 <드라큘라>에 등장하는 미나는 전혀 다르다. 함께하는 다섯 남자와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을 용기와 대담함, 정의로움과 희생, 강한 정신력 그리고 지혜를 모두 갖춘 사랑 가득한 여성이다.

아서, 모리스, 수어드, 판 헬싱, 조너선 하커 그리고 미나. 이들을 하나로 만들어 준 계기는 루시의 죽음이다. 세 남자로 부터 청혼을 받고 행복해 하던 루시의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다. 트란실바니아에서 런던으로 무대를 옮긴 드라큘라의 제물이 된 그녀는 사랑하는 이와의 결혼을 코앞에 두고 미스터리한 죽음을 맞는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 판 헬싱의 노련함과 지혜로움이 없었다면 세상이 맞을 피의 비극은 더 크고 길었을지 모른다. 루시의 죽음에 대한 복수와 미나의 구원을 위해 시작된 추격전은 정의의 승리로 끝났지만 숭고한 희생을 피할 수는 없었다.

조금씩 변해가는 미나를 데리고 추격을 하는 판 헬싱의 결단은 어른으로서의 책임감과 희생정신을 보여주었다. 미나 역시도 정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정신력으로 버텨내는 모습에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과 우정. 흔한 말이지만 위기와 유혹 앞에서 변질되기 쉬운 감정이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드라큘라를 쫒는 이들의 변치않는 사랑과 우정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시작은 사랑하는 여인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이 구한 것은 스스로의 값진 영혼과 세상이었을 것이다. 불멸의 삶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강취하는 드라큘라는 시대를 달리하며 다른 형태로 우리들 중 하나로 스며들었는지 모른다. '나'를 위해 '너'를 착취하는 그릇된 모습으로.

거듭되는 외전과 외전의 외전, 등장 인물에 대한 재해석이 더해지며 오히려 원작이 어떤 내용인지 알기 어려웠던 <드라큘라>. 원작의 결말이 궁금하다면 페르난도 비센테의 일러스트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쁨을 함께 누려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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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간 열린책들 세계문학 3
알베르 카뮈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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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간

알베르 카뮈 (지음) | 김화영 (옮김) | 열린책들 (펴냄)

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

-<최초의 인간> 본문 203페이지

알베르 카뮈를 두고 부조리와 반항의 작가라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의 부재로 극심한 가난을 겪어야했던 어린시절과 결핵을 앓으며 인생의 구비구비 굴곡진 세월을 살아내야 했던 카뮈의 삶을 알고나니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부조리와 세상을 대하는 반항을 어렴풋이 알것도 같다.

<최초의 인간>은 카뮈가 사망하던 당시의 교통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자필 원고가 출간된 것이다. 미완성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도 다듬어지지 않고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꽤 있다. 동일인물의 이름이 중간에 바뀌어 버리기도 하는 등 거친 날것의 느낌이 있다. 부록으로 수록된 낱장들을 보니 첨부하고 깊이있게 들어가려는 의도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 싶다.

작품 속 자크 코르므리와 알베르 카뮈는 매우 닮았다. 자크를 통해 카뮈 지신을 그대로 녹여낸듯이 자전적인 요소가 많다. 자신의 얘기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 불운한 사고가 아니었더라면)자신의 얘기를 덜어내게 되었을까.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 아버지가 죽음에 이른 나이보다 더 나이를 먹어버린 아들은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의 청춘이 가엽다.

자크에게 베르나르 선생님이 계셨던 것처럼 어린 카뮈에게는 제르맹 선생님이 계셨다.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극한의 가난에서 집안의 독재자였던 할머니를 설득하고 다른 삶의 기회를 열어주신 참 스승이시다.

어린 자크가 학교에서 뮈노즈와의 싸움에서 느낀 것은 남을 이긴다는 것은 남에게 지는 것 못지않게 쓰디쓴 것이기 때문에 전쟁이란 좋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훗날 카뮈가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과도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자크는 베르나르 선생님의 도움으로 중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지만 방학이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하는 상황에 놓인다. 가난때문에 일을 구해야하는 그가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학업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난때문에 숨겨야 하는 사실은 카뮈가 느꼈던 부조리중 하나가 아니었을런지.

<이방인>과 <페스트>로 널리 알려지고 폭넓은 사랑을 받아온 카뮈. 초고가 아닌 완성작으로 <최초의 인간>이 발표되었다면 세상은 또 한번 그를 주목했을지 모른다. <이방인>과 <페스트>와 어깨를 견주거나 혹은 뛰어넘거나. 가난으로 마주해야 했던 세상의 부조리들과 전쟁으로 빼앗긴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로 인해 카뮈가 가지게 되었을 전쟁의 시각을 엿보았다. 초고의 미완이 아닌 완성작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접을 수가 없다.

각자의 인생에서 누구나 최초의 인간일 수 밖에 없다. 내 인생에서는 내가 그 인생을 사는 최초의 인간이 아니던가.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의 친구들과 함께 읽는 함유도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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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과 분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80
윌리엄 포크너 지음, 윤교찬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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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과 분노

윌리엄 포크너 (지음) | 윤교찬 (옮김) | 열린책들 (펴냄)

난 처음과 끝을 봤단다.

시작을 봤는데, 이제 끝도 봤단다.

-<고함과 분노> 본문 448페이지

부모의 물리적 부재는 아이에게 채우기 어려운 공허감을 주지만 그에 못지 않게 정신적, 정서적 부재도 결핍을 만든다. 시대의 흐름에 동화되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며 과거의 시간에 머무르는 콤슨 가의 몰락은 작게는 개인의 파괴, 크게는 미국 남부 가정의 파괴라는 상징을 보여주었다.

<고함과 분노>는 4개의 장으로 각기 다른 화자가 이야기를 펼친다. 마지막 장은 3인칭으로 서술되지만 콤슨 가에서 평생을 함께 한 하녀 딜지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첫 장은 콤슨 가의 막내 벤지가 화자로 등장하는데 시간의 흐름이 현재와 과거로 들쑥날쑥 점핑하며 물음표 가득한 시작을 한다. 하지만 벤지의 정신연령이 3살 정도에 머물러 있고 말을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나니 소설의 구성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윌리엄 포크너의 <고함과 분노>를 읽으며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린 것은 나 뿐이었을까? 떠오르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 시공간을 점핑하는 <고함과 분노>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을 사용한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을 생각나게 했다.

<고함과 분노>의 4개의 장에서 화자는 각기 다르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사람은 콤슨 가의 장녀이자 둘째인 캐디이다.

지능도 낮고 말도 할 수 없지만 벤지는 냄새로 모든 것을 안다. 벤지에게 누나 캐디는 어머니 캐롤라인이 채워주지 않은 모성을 보여주는 사랑 그 자체다.

엄마 캐롤라인은 콤슨 부인으로 불리우기 보다는 처녀적 성인 배스콤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벤지에게 친정오빠의 이름을 따서 처음 지어주었던 모리라는 이름을 정신지체가 있다는 이유로 빼앗아 벤지로 개명할 정도로 결혼전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자기 연민에 빠져 살며 제이슨 만을 자식으로 인정하는 엄마와 술에 젖어 사는 무능한 아버지 사이에서 콤슨 가 자녀들의 몰락은 불 보듯 뻔했는지 모른다.

장남 퀜틴에 대한 콤슨 씨의 기대와 희망은 퀜틴의 자살로 무너진다. 퀜틴은 여동생 캐디에 대한 마음을 근친상간으로 여기며 괴로워 하지만 이들이 직접적으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대목은 없다. 아마도 가족간의 관계와 애정에 갈증이 있던 퀜틴이 무분별한 성생활을 하는 캐디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함께 가족애와 이성애를 혼동하지 않았을까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본다.

캐디의 이미지가 벤지에게는 엄마를 대신한 모성애, 퀜틴에게는 이루어지지 못한 가족애라면 제이슨에게는 타락한 매춘부일 뿐이다. 돈만 밝히는 제이슨이 악당처럼 나오지만 그의 상처와 피해의식이 보이는 듯 하다. 캐디와 허버트와의 결혼으로 자신에게 보장되었던 탄탄한 직장이 캐디의 혼전 임신이 들통나 없던 일이 되어버리고 콤슨 가의 농장은 형 퀜틴의 학비로 팔아버린 마당에 형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책임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마차를 몰던 러스티의 장난에 울부짖는 벤지를 위해 제이슨이 보인 결말부의 행동은 그의 내면에는 그가 했던 말과는 다른 따뜻함이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리고 엄마처럼 콤슨 가의 아이들을 길러낸 딜지. 시작과 끝을 모두 보았다는 그녀의 말이 메아리처럼 가슴에 맴돈다. 출판사마다 제목이 다른 The Sound and the Fury. Sound가 뜻하는 것이 번역 과정에서 온전히 전해지지 않기 때문인가 보다. '아무 의미없는 괴성', 윌리엄 포크너는 그것을 의도했다는데 분노를 표출하는 콤슨 가 4남매의 고함은 저마다 달랐다.

도입부인 첫 장은 어려웠지만 뒤로 갈수록 몰입감과 매력이 넘치는 소설이다. '엄치척' 하고 싶은데 왜 엄지가 두개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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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반
헨리 반 다이크 지음, 차영지 옮김 / 내로라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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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반

헨리 반 다이크 (지음) | 차영지 (옮김) | 내로라 (펴냄)

걸림돌이라고만 생각했던 순간까지도 목적의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 꼭 필요한 순간이었던 것을 어렴풋 깨닫게 된 것이다.

-<아르타반> 본문 119페이지

목적의 본질과 수단 중 더 중요한 것들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다. 한치 앞을 보느라 바빠 보다 멀리를 내다보지 못하고 처음의 목적을 잊은채 엉뚱한 곳에서 헤매인다.

한 집안의 가장은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일터로 향한다. 가족의 부양이라는 것이 결코 먹고 자고 입는 의식주에만 해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들이 주는 따뜻함과 가족들간의 연대, 화목, 사랑이라는 본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이 되어질 뿐이다. 그러나 더 많이 벌기 위해 가족과의 시간을 줄이고 나아가 마음의 거리까지 멀어진다면 수단 앞에 본질은 퇴색하고 만다.

꿈을 위해 공부하는 청소년들도 꿈을 위해 수단이 되어야 하는 학업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본질은 사라지고 수단만이 남는 현실은 어른이 되어서도 길을 잃고 헤매는 미아를 만든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동방박사 일행과 동행하고 싶었던 아르타반이 길을 떠난 후 만나게 된 사람들의 어려움을 모른척 지나쳤더라면 그의 여행이 33년이나 걸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여정을 함께하자고 권유했던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은 바빠서, 여행을 하기엔 나이가 많아서, 종교의 본질과 달라서 등의 여러가지 이유로 아르타반과 함께하기를 거절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떠났던 아르타반의 길은 예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그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르타반은 헛된 노력과 의미없는 고행의 길을 걸었던 것일까.

사파이어, 루비, 진주를 품고 떠났던 길. 예수가 아닌 병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쓰인 보석들이

처음 마음 먹었던 여행의 본질에서 멀어졌다 말할 수 있을까. 선택의 순간에서 아르타반이 내린 결정이 종교인이 보여야할 종교와 신앙의 진짜 본질임을 생각한다면 보석들의 가치는 본연의 가치보다 더 귀하게 쓰였음이 틀림없다.

신앙적 기대와 실천적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던 아르타반의 선택은 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었다. 예수의 처형일에 마지막 남은 보물 마저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쓴 아르타반에게 과연 신은 서운함이나 분노를 보였을까.

본질보다 수단과 방법, 보여주기 위한 겉치레에 더 치중하다보면 본질에 닿기는 커녕 애초에 닿으려하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잊을 수 있다. 아르타반이 찾아 헤맨 것은 나사렛 가족의 아이가 아니라 별로 상징되는 구원자였듯이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고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의 관점에서 교훈을 주는 아르타반의 이야기는 종교를 벗어난 삶의 모든 부분에서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각자의 삶 속에서 추구하는 갈망은 다르지만 선한 삶, 행복이라는 본질은 같지 않을까? 본질을 추구하기 위해 행하는 방법 자체에 스스로를 옳아매는 어리석은 집착을 하고있지는 않은지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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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클 사일러스
조셉 셰리던 르 파누 지음,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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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클 사일러스

셰리던 르 파누 (지음) |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펴냄)

자신의 믿음이나 신조를 남에게 강요하거나 책임을 지울때 그 책임을 희생으로 감당해야 하는 이들의 고통은 생각보다 흔하다.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강요와 은근한 가스라이팅은 자식의 입장에서는 짊어지기 힘든 무게의 기대와 중압감 때로는 죄책감에 휘청거리기도 한다.

동생 사일러스에게 씌워진 혐의가 무고라 믿으며 가문의 복권을 위해 유언을 남긴 아버지 오스틴으로 인해 모드가 치뤄야 했던 희생처럼 말이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복종하며 살아온 모드는 아버지의 명령과도 같은 유언을 거부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유언집행자인 닥터 브라이얼리와 커즌 놀리스의 우려가 단지 노파심에서 우러나온 걱정 뿐이었다면 좋았겠지만 평판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사일러스에 대한 세간의 평판에 오스틴이 자신의 아집을 버리고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난날의 과오를 참회한다며 은둔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엉클 사일러스. 그의 운둔이 자의적이었다면 그 참회의 진정성에 실낱같은 믿음을 가져보기라도 하련만 그 고립 또한 의도와는 다른 교류의 단절이었기에 그를 향한 타인들의 등돌림이 더욱 크게 느껴질 뿐이었다. 엉클 사일러스의 젊은 날의 초상화를 보고 수려한 외모에 쉽게 마음을 열고 의도된 친절에 순진하게 속는 모드를 마냥 비판하기는 어렵다. 현실의 우리도 깔끔하고 잘생긴 이성에게 더 잘 끌리며 그런 범죄자들의 손쉬운 표적이 되는 사건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기도 하지만 사람이 환경을 지배하기도 한다. 순수하고 착한 마음을 잃지 않았던 모드는 타인을 향해 내민 손과 선의가 바로 자신에게 되돌아오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공격적이기만 하던 메그가 모드를 은인으로 여기며 변화하고 야생마같던 밀리도 모드를 만나 변화했다. 모드는 그들에게 새로운 인적환경이 되어 준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드도 솔직함을 무기로 내세우며 모드를 몰아붙이는 사일러스에게는 저항하지 못했다. 솔직함이 미덕이라고만 알 뿐 또다른 형태의 폭력이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솔직함으로 위장한 거대한 음모가 있다는 사실도.

엉클 사일러스의 말과 행동은 자신의 목적으로만 직진할 뿐, 고민이나 죄책감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일러스의 음모와 뻔뻔하기까지한 범죄가 더 소름끼치게 다가온 데에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의 범죄와 친인척, 가족, 이웃으로 부터 당한 끔찍한 범죄가 지상파의 뉴스를 오르내리는 일이 드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 <엉클 사일러스>를 보곤 806페이지에 이르는 두께에 덜컥 겁부터 먹었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아마 8060페이지라도 읽었을걸? 재미는 두께의 중압감을 이겼고 특히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모드에게 닥친 급박함과 절박함이 절정에 치닫았다. 소설 속 허구와 현실의 사실들이 교차되며 <엉클 사일러스>의 재미를 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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