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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가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배반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 황가한 (옮김) | 문학동네 (펴냄)
그리고 내가 뭘 해야 할지를 깨달았다. 말하자면 이제 고향에 돌아갈 때가, 집에 가서 내 불안을 가라앉히고 나의 무심함에 대한 용서를 빌 때가 된 것이었다.
-<배반> 본문 365페이지
살아가면서 겪게되는 많은 만남과 이별들 가운데 배반이라고 할 만한 이별은 그 중 얼마나 될까. 배반의 의도는 없었다 하더라도 당하는 입장에서 상처받았다면 그것은 배반일까, 아닐까. 아니면 반대로 상처줄 의도를 가지고 한 떠남이 상대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면 이것은 배반일까, 아닐까.
인도인 남편에게 버림받은 레하나와 레하나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영국남자 마틴 피어스의 이국적인 사랑이야기로 시작된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배반>은 제 3자의 시선에서 전개되고 그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된 과정은 자신의 상상으로 유추해낸 것이라는 라시드의 고백과 함께 1인칭으로 전환된다.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배반>에는 여러 형태의 배반이 등장한다.
레하나가 겪은 두번의 배반. 첫 남편인 아자드는 잠시 다녀온다며 자신의 본국인 인도로 돌아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요즘 표현으로 친다면 잠수이별쯤 되려나) 처음 본 순간 힘들게 돌아온 남편이라 여겼던 마틴 피어스와의 몸바사로의 사랑의 도피도 그가 떠나왔던 곳, 영국으로 돌아가며 그녀 역시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민과 레하나의 손녀 자밀라의 사랑에도 배반이 존재한다. 아민이 떠날까봐 두렵다고 호소하는 자밀라에게 "난 절대 당신을 떠나지 않을거야"라고 아민은 진심으로 맹세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별의 원인이 변심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자밀라가 받았을 상심과 상처에 아민은 자신의 행위를 배반이라 여기고 자책한다. 아민과 자밀라의 사랑에 배반을 당했다고 느낀 것은 자밀라만이 아니다. 모든 기대에 부응하는 장남이 동네 추문을 달고 다니는 연상의 이혼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모에게도 배반이었을테다. 그리고 독립적인 인생을 살아온 그의 부모가 자식의 사랑 앞에 보인 기성세대의 고정관념도 아민에게는 배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가인 압둘라자크 구르나가 얘기하고 싶었던 배반은 라시드를 통해 보여진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전혀 조짐도 없던 때에 떠난 라시드의 영국 유학은 독립과 혁명으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린 잔지바르의 혼란으로부터 라시드를 떼어 놓았다. 라시드는 폭력의 위험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는 가족을 걱정하면서도 영국에서 정착하는 삶을 택한다. 이전까지는 여행의 가운데 부분, 집에 돌아가기 전에 어떤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삶에서 이방인으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잔지바르로 돌아가지 못하는 라시드의 삶에 작가 자신의 처지를 담아 가족을 배반하고 나라를 배반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른바 엄친아였던 아민이 (당연히 이루리라 여겼던) 모두가 기대하던 삶을 살지 못하고, 바보같다고 놀림당하던 파리다가 이슬람권의 다른 여성들과 달리 사랑도 이루고 시인으로 성공한 걸 보면 어쩌면 삶이 우리를 배반하는 것일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잠시 해본다. 사랑이야기라고 읽기 시작했다가 좀더 무거운 주제로 끝난 것이 감상적 행복을 준 작은 배반이기도 했다. 이런 배반은 늘 찬성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