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데스의 유산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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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데스의 유산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 문지원 (옮김) | 블루홀6 (펴냄)

형사님에게는 가족과 법 중 뭐가 더 중요할까요?

-<닥터 데스의 유산>본문 365페이지

십여 년 전에 둘째를 낳고 한 달째 되던 날이었다. 첫 예방접종을 맞히러 방문했던 보건소에서 사후 장기 기증 동의 신청 안내 문구를 보고는 망설이지 않고 동의서에 신청을 했었다. 거창한 박애정신이나 이타심으로 했던 일은 아니었다. 심장의 좌측과 우측을 막아줘야할 막이 없어서 출생 후 폐호흡을 하게 되면 24시간 안에 사망하게 될 거라던 둘째 아이에게 일어난 기적이 감사해 무엇이라도 하고픈 마음이었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 그 얇은 막에 결정되기도 하는 것처럼 그 둘 간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다.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의료인의 사명감으로 국경없는 의사회의 소속으로 외국으로 떠났던 닥터 데스가 환자들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목도하고 검은 의사가 되어 돌아온 것도 죽음의 존엄이 생명의 존엄에 비해 덜하다 여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닥터 데스의 유산>에서 죽음을 원했던 환자들 처럼 나도 종말기 환자가 된다면 어떤 선택이 하고 싶어 질까?

스스로 생을 마감하거나 안락사를 선택하거나 연명 치료를 거부하는 것 모두 적극적이냐 소극적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자살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연명 치료 거부 신청을 고려중이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대답은 비슷하다. 적극적으로 생을 마감하지는 않겠지만 연명 치료 거부는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인이 아닌 가족이 당사자라면?' 대답이 달라진다. 어떻게 해서라도 하루라도 더 살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은 끝내고 싶으면서 가족의 고통 앞에선 자식의 도리를, 부모의 도리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이지 않을까.

안락사의 결정을 본인이 아닌 주변의 가족들이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살인이다. 하지만 반대로 환자의 동의없이 이루어지거나 환자의 뜻과 어긋나는 연명치료는 과연 누구를 위한 생명의 연장일까? 이렇게 이어가는 생명에도 존엄이 있을 수 있을까?

반전의 제왕이라 불리는 나카야마 시치리. 그의 반전을 짐작하며 닥터 데스의 존재를 유추해 보았다. 범인을 알고나면 맥이 탁 풀려버리는 보통의 미스터리와는 달리 시종일관 닥터 데스와 이누카이 형사의 치열한 심리전과 철학 가득한 질문들이 독자들에게 숨 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죽음의 의사라 불렸던 '잭 케보키언'이라는 실존의 인물을 간접 등장시키며 안락사를 소설 속 단순 소재에 그치지 않고 사회를 향해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

닥터 데스를 쾌락 살인자라 부르며 혐오스러워 하는 아소 반장,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멈춰주고 싶었던 가족들과 환자 본인. 누구의 선택이 정답일지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안락사가 합법인 나라가 여럿 있다. 생의 마지막을 존엄하게 끝내고 싶은 시한부의 환자들이 병의 끝자락에서 많이 입국한다는 티비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의 선택을 자살 혹은 살인이라고 지탄하기만 해야 할까?

예정된 죽음 앞에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기 어려울 지경에 다다른다면, 우리가 지키고 싶은 것은 법일까, 존엄일까? 살 권리와 죽을 권리. 어느 권리가 더 귀하고 무거운지를 누가 정하는가?

"범인은 잡았지만 죄는 못 잡았어." 이누카이의 말이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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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시대를 기억하다 - 사회적 아픔 너머 희망의 다크 투어리즘
김명식 지음 / 뜨인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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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시대를 기억하다

김명식 (지음) | 뜨인돌 (펴냄)

기억이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면 다양한 방향에서 흘러온 지류는 한 방향의 강한 본류에 묻혀 커다랗고 힘센 일반적인 정체성에 묻히거나 밀려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글, 사진, 영상, 조형물 등으로 기록하여 기억하는 것입니다.

-<공간, 시대를 기억하다>본문 106페이지

수백, 수천 년전의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들이 역사라는 이름의 기록으로 남으면 당대의 아픔은 후세에게는 단순한 '사실'로만 기억되기 쉽다. 망각과 오해, 왜곡없이 사실로 남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다행이려나?

라제통문에 대한 오해가 그러하다. 삼국시대의 역사만을 떠올리기 십상이었던 라제통문의 실상은 일제강점기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책의 시작부터 충격에 가까웠다. 노근리 쌍굴다리를 소개하며 인기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대입시켜 설명하니 이해도는 더 높아졌다.

외국의 경우에는 사고와 사건으로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도심 한 가운데나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에 건립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혐오시설이라며 지역 내 건립에 반대하고 도심 한복판 노른자 땅의 땅값을 계산하느라 외진 곳에서 잊혀지는 곳이 많다. 타인의 고통보다 나의 손해가 더 크게 느껴지는 이기심 속에 잊혀지며 다시 없어야 할 슬픔은 그렇게 반복되었다. 1971년 대연각 호텔 화재, 1993년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 백화점 붕괴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침몰까지. 피할 수 있던 사고가 아니라 처음부터 생기지 말았어야 할 인재다. 반복되는 사고는 이기심이 빚어낸 망각도 한 몫 했다.

독립운동가의 동상은 뒷골목으로 밀려나고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휘호는 보존되고 있는 사실을 지하의 독립운동가들이 안다면 피를 토할 노릇이다.



 

삼일절을 삼점일절이라 읽는 아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뼈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가운데 일상으로 끌어오려는 노력이 빛나는 곳도 있다. 바로 안국역이다. 이런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장소를 일상에서 더 많이 보고싶다.

건축의 내용은 건축물의 표면이 아닌 공간이라는 말이 쉽게 와닿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것을 시각적으로 한번에 이해시켜 주는 건축물이 있다.




한가운데 심초석과 가장자리 기초석만 남은 황룡사 9층 목탑을 비어있는 공간으로 경주타워가 부활시킨 것이다.

도시의 화려한 야경보다 더 아름다운 이 장관을 보러 언젠가는 꼭 가보리.

완벽했다.

지식과 재미, 반성과 감동. 모든게 녹아 있는 책을 만났다.

아픈 역사를 꺼내어 감동과 비애를 억지로 쥐어짜내는 그런 책들과의 비교를 감히 거부한다.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차례를 훓어보며 조심스럽게 내용의 흐름을 짐작했던 마음은 몇 페이지를 읽으며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저 장소에 직접 가보고 싶다'는 열망만을 남겨 놓았다. 뇌와 영혼과 마음이 모두 배부른 독서였다.

<공간,시대를기억하다>는 <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의 후속편이라고 한다. 순서는 바뀌었지만 이 감동 그대로 전편을 읽으며 이어 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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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 나사의 회전 미래와사람 시카고플랜 시리즈 6
헨리 제임스 지음, 민지현 옮김 / 미래와사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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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헨리 제임스 (지음) | 민지현 (옮김) | 미래와사람 (펴냄)

'헨리 제임스'란 이름이 낯익다 했더니 <여인의 초상>을 읽었구나. 전혀 다른 작가의 책을 만난 듯 <나사의 회전>과 <여인의 초상>에서 같은 작가의 느낌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등장인물들의 심리에 접근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일까?

영화, 드라마 등으로 끊임없이 재탄생한 최초의 공포 심리 소설이라는 뒷표지의 글처럼 공포와 심리가 잘 어우러져 마치 블라이의 모두를 숨죽이며 지켜보는 듯 했다.

"어린아이가 등장해서 섬뜩한 긴장감을 한층 고조시켜 준다면, 아이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긴장감이 두 배로 고조되겠죠!"

-<나사의 회전> 본문 10페이지

동화책에서 "옛날 옛날에~"로 시작되는 할머니의 얘기는 화로불을 앞에 두고 시작된다. 밤이 주는 고즈넉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불이 주는 빛과 따뜻함처럼 공포와 흥미라는 대조적인 느낌이 무서운 이야기에 더 끌리도록 하는지 모르겠다. 더글러스와 일행들이 밤이 되자 난롯가에 모여앉아 고인이 남겼다는 원고를 읽게 된 것처럼 말이다.

더글러스가 원고를 읽기 시작하는 부분에서 화자는 원고를 작성했다는 가정교사의 시점으로 전환된다.

영화와 드라마로 끊임없이 재탄생할 만한 부분이 많다. 삽화 하나 없이도 마치 블라이에서 그들의 공포를 근거리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머리속에 그려진다. 영화 <디 아더스> 외 많은 공포영화에도 영감을 준 원작이라고 하니 읽는 독자에 따라 다양하게 결론 지을 수 있는 열린 결말이 그 공포에 힘을 보태는 것 같다.

아이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서 긴장감이 두 배로 고조된다는 얘기를 초반에 던져 주었지만 이 아이들의 존재가 사악함인지 순진한 피해자인지는 알 수 없다. 이름조차도 한 번 불려지지 않은 이 아이들의 가정교사의 주장만으로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유령과 그녀의 짐작만으로 그녀가 느끼는 공포와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믿어야 하겠지만 오로지 그녀의 말 뿐이라 그녀 자체가 공포스럽기도 하다.

순진한 두 아이의 영혼을 노리는 유령이 정말 존재하는걸까, 아니면 순진한 척하는 두 아이의 교활하고도 사악함이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 의식에 사로잡힌 가정교사를 시험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녀는 정신분열증의 증세로 환각을 보는 것일까?

마일스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이유도 끝내 밝혀지지 않고 플로라가 가정교사인 그녀를 잘 따르다가 두려워하며 거부하는 일, 그로스 부인이 처음에는 가정교사의 말에 동조하며 수긍하다가 그녀로부터 아이들을 떼어놓는 일까지 상황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우왕좌왕 하게 만든다.

유령을 처음 목격했던 일은 사실이라 쳐도 유령들이 아이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가정교사인 그녀의 짐작 뿐이다.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고 했지만 플로라는 오히려 그녀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녀의 품 안에서 마일스의 심장이 멈췄다.

결말 뿐만이 아니라 모든 상황과 복선이 열려있다. 읽는 이에 따라 어떻게 결론을 내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완벽한 공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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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제르미날 1~2 - 전2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에밀 졸라 지음, 강충권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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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2

에밀 졸라 (지음) | 강충권 (옮김) | 민음사 (펴냄)

이제하늘 한가운데에서 찬란히 빛나는 4월의 태양은 분만하는 대지를 따뜻하게 덥히고 있었다. (중략)머지않아 그들이 발아한 싹은 대지를 터뜨릴 것이었다.

-<제르미날 2> 본문 357페이지

3월의 어느 추운 겨울 날 르 보뢰에 도착한 에티엔이 이 곳에서 겪게 되는 일련의 일들은 평범하다고 할 수 없다.

상대적 빈곤이 아닌 절대적 빈곤의 처참함과 그 빈곤의 이유가 나태와 게으름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절망감.

당연한 권리를 갖지 못한 이들에게 그 권리를 요구할 수 있음을 알려주고 그들과 모든 것을 함께 한 에티엔이 최종적으로 느꼈을 감정은 감히 상상하지도 못하겠다. 다만, 본문 마지막 페이지를 통해 작가 에밀 졸라는 희망을 암시하고 꿈꾸고 있다는 것을 짐작해 볼 뿐이다.

몽수에서의 파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고, 부모를 잃은 자들은 슬픔을 오래 누릴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남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그들이 그토록 거부하고 저주하던 갱도의 어둠으로 다시 내려간다. '이렇게는 못살겠다' 울부짖던 그때보다도 더 못한 대우를 받으며 그래도 살아야 하기에 그마저도 다행이라 여기며 목숨을 부지할 길을 찾는다. 과연 그것이 목숨을 부지할 길인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카트린이 샤빌과 에티엔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샤빌에게로 항상 되돌아갔던 것은 벗어날 수 없는 대물림되는 가난과 변화되고 싶은 희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한다. 다른 여자아이들도 그렇게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라는 반복되는 숙명에 적극적인 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지만 샤빌과 에티엔의 대결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에티엔의 편에 서서 희망을 가져보고 싶은 마음을 비친다. 카트린은 소녀에서 진정한 여자가 되고 사랑하는 에티엔의 곁에서 눈을 감으며 죽음 이후에야 숙명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이익의 기회로 삼고 정치적 도약의 기회로 삼는 이들은 비단 엔보 사장과 몽수의 일부 광부들의 얘기만은 아니다. 그러나 서로 남탓을 하며 대립과 싸움을 하던 광산촌의 모두가 광산 매몰이라는 사고를 함께 극복해나가며 하나가 되고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는 모습에서 새롭게 싹틔울 희망을 보았다.

지금 우리의 현실과 소름끼치도록 닮은 몽수의 비극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이 단순한 우화소설이 아니듯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도 단순한 노동 소설은 아니리.

몽수의 비극에 절절히 함께 아픈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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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트레이 귀공자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5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이미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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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트레이 귀공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 이미애 (옮김) | 휴머니스트 (펴냄)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알고보면 나쁜 사람 없다" 등 인간의 본성과 마음에 대한 여러 격언이 있다.

티비 공중파를 오르내리는 험악하고 혐오스러운 범죄의 죄인들도 그들의 성장기를 조사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불우하고 학대받은 경험이 존재하고, 가해자이기 이전에 피해자였던 시절이 있었음을 간혹 보게 된다. 그럴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성경구절의 한 문장이 인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 불우한 시절은 커녕 넘치는 편애와 모든 것을 누린 지체높은 신분의 밸런트레이 귀공자가 있다. 준수한 외모와 뛰어난 노래실력, 타인의 사랑을 받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연기력까지 모든 것을 가진 그가 딱 하나 가진 것이 없다면 그것은 '선함'이다.

인생을 살아가며 크고 작은 결정의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지만 그에 따르는 결과는 오직 신만이 아실 뿐이다. 그 결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던지 새롭게 시작할 것인지는 또다시 본인의 선택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하였던가? "잘 되면 내 덕이고 안 되면 조상탓이다"라고 하였던가? 순전히 자기의 모험욕을 채우려 아버지와 동생 헨리의 조언과 걱정을 뒤로하고 고집을 피워 나간 전쟁이었음에도 꿈꾸던 화려한 승리 대신 도망자로 살아야하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제임스는 자신이 겪어야 했던 불운의 모든 탓을 동생 헨리에게 퍼붓는다. 형제 간의 피로 물든 복수는 그렇게 '네 탓'에서 시작되었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타인을 이용할 뿐인 밸런트레이 귀공자 제임스와 대조적으로 모든 것을 감내하고 견디는 헨리는 아내와 아버지로 부터도 지지와 공감을 얻지 못하고 따돌려지는 듯한 분위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매켈러라는 충직한 하인이 없었다면 헨리가 그 긴 시간 외로움과 오명에 버틸 힘이 있었을까. 형을 죽였다는 자책으로 불안정해진 정신은 형의 생존을 알게 되며 기뻐하기 보다는 더욱 더 불안해지고 만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조여드는 형 제임스의 집요한 괴롭힘은 헨리의 재정적 파탄과 가족 내의 불화, 안전의 위협까지 그를 놓아줄 의사가 전혀 없으니 말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거듭되는 복수는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모든 매력을 가진 밸런트레이 귀공자가 선함까지 갖추었더라면 듀리스디어 가문은 다시없을 번영을 누렸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을 돌리고도 남을 만큼 연기력도 출중하지만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복수심이라는 목적으로만 움직이는 밸런트레이 귀공자는 일종의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한다. 형 제임스를 상대하는 헨리의 태도는 순응에서 대립으로 점차 변해가지만 한번도 형의 그늘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형을 대신한 책임감을 보일때도, 형을 상대하며 똑같이 복수심에 불타오를 때에도.

복수심은 양날의 검이다. 상대를 베려는 난도질에 결국 자신도 상처입는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매컬러가 힘들어했던 이유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존경하고 사랑했던 주인 헨리가 점차 무너지며 제임스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으니 말이다.

복수 후에 남는 것은 파멸. 그 복수가 승리이든 패배이든 양날의 검을 쥐었던 자신도 만신창이가 되어버리고 마는 파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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