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셉션 - Incepti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왠만하면 읽지 마세요!!


인셉션 미니멀리즘 포스터 : http://www.slashfilm.com


'팽이는 돈다. 약간 비틀비틀. 그래도 돈다.'

오래된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데커드'가 과연 레플리컨트(합성인간)인지 아닌지 딱 그 모양새다. 감독이 맞다라고 한다면 맞는 것이고, 아니라한다면 아닌 것이다. 그 뿐이다. 물론 감독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처음 상영된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데커드'가 레플리컨트라고 밝혔지만 말이다.

'크리스토퍼 놀란'감독의 『인셉션』은 플롯이 완벽할수록 재미가 반감되어지는 구조이다. 따라서 싹둑싹둑 화면에 가위질을 할 때 마다 논리적 구성에 대한 비논리적 상황이 증폭되어지고 관객은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뭔가 비어있는 구멍을 메꾸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영화 시나리오의 가장 큰 줄기는 과연 한 사람의 마음을 바꾸게 만들 수 있느냐이다. 물론 어떤 정신이 이 사람 머리속에 숙주처럼 기생하여 마음을 정복하거나 상시적으로 조종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작은 씨앗만 무의식속에 몰래 뿌려놓으면 된다. 의도된 행동을 하기 전에 무의식 속의 그 씨앗에 스위치가 켜지기만 하면 된다.

아주 멋진 아이디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 씨앗을 어떤 식으로 뿌려놓느냐이다. 다른말로 하면 기억의 조각이 어떻게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게 만드는 지이다.

영화상 무의식속으로 잠복해 들어가 벌이는 활동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무의식속에 잠재되어있는 정보를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의 파편을 무의식속에 심어놓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현상이 꿈이라는 작용이다. 무작정 머리속으로 들어가 휘젓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꿈이라는 프로토콜을 가동하여 그 안에서 나름의 브라우징을 한다. 하지만 꿈으로 들어가며 보여줘야만 하는 일련의 철학적 과정이나 물리적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몇가지 과정들에 대한 것들을 내 방식으로 상상해야만 했다.

이 영화의 특징은 공간 계층(layer)과 무의식 계층의 혼잡이다. 더우기 한 사람이 표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또 다른 사람의 꿈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매력적인 부분이다. 혼잡하긴 하지만 나름 순서가 있다. 공간 계층은 시간을 창조하며, 무의식의 계층은 물질을 창조한다. 공간만 만들어지면 의식이 시간을 만들어 일종의 가상현실이 된다. 또 무의식에 파편화되어있는 기억의 조각들은 물질로 재현된다.

흥미로운점은 논리가 필요없는 아니 비논리조차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무의식의 세계를 조정함으로써 현실의 인과율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환원적 논리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꿈에서 나타나는 공간비약시간비약은 감독의 의도대로 앞서 말한 계층으로 분할하여 황당한 개꿈이 아니라 이야기가 진행되는 깨고 싶지 않은 꿈으로 바꾸어 놓았다.


Inception Maze by ~jcm-amorim


꿈속에서 전혀 다른 공간으로 또 시간으로의 비약은 빈번하다. 일례로 집의 현관문을 열었더니 공동묘지가 보인다는 것은 공간이 수직적으로 계층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나뉘어짐을 의미한다. 시간비약도 마찬가지이다. 더 깊은 과거에서 얕은 과거로 흘러오기 다반사다. 다시금 또 다른 깊이의 과거로도 도약한다.

감독은 이런 비약들을 수직적으로 단계적으로 분할함으로써 산뜻하게 선보였다. 그런데 시간의 분할에서는 일종의 프로토콜이 수행된다. 그것은 바로 현실 시간의 분주(demultiply)이다. 다시말해 감독은 시나리오에서 무의식의 세계조차 시간에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계층화시켜버린다. 분주[각주:된 현실의 시간을 무의식 세계의 시간으로 사용함으로써 말이다. 이런 환원론에 대한 이야기는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와 상관없이 현실속 다른 프레임으로 얼마든지 변환할 수 있다. 현실의 프로토콜은 무의식 세계와 맞닿아 있는 톱니바퀴이자 하늘에서 내려뜨린 동아줄이다.

가령 우리는 밥과 국을 먹고, 또 반찬을 먹지만 우리안에 있는 또 다른 우리들 그렇지만 나와는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전혀 다른 본질들인 세포의 레벨에서는 당분을 먹는다든지, 비타민을 흡수한다든지, 탄수화물, 단백질을 섭취한다. 심지어 원초적 세포 단계에서는 전자 한 개, 나트륨 원자, 칼륨 원자 한 개들이 들락날락한다. 그것들만의 타임라인에서 말이다. 우리는 그 전자나 원자를 다루기 위해 고기도 먹고, 빵도 먹고, 술도 먹는다. 이것은 의식과 무의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여전히 현실의 시간에 의존한다. 현실의 시간을 분주함으로써 말이다.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프로그래밍조차도 다르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클럭이며, 전원이다. 시간으로써 공간을 제어한다.

무의식 세계에 걸친 프로토콜의 끈을 잡는 순간, 현실과 가상세계에 맞물린 톱니바퀴들을 돌아가게 만들고  이런 프로토콜의 작용으로 인해 그 이전의 계층으로 복귀된다는 프레임은 실로 즐거운 이야기이지만 신선하다고는 말 할 수 없다. 눈 먼 시계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눈 뜬 시계공의 이야기이다. 원숭이가 타자기를 치자마자 멋진 글이 나온다는게 아니라, 철저하게 숙련된 소설가가 나름의 지식으로 타자기를 쳐야만 멋진 글이 나온다는 이야기이다. 불확실성에 의존하며 카오스적인 상황이 수반되는 <쥬라기 공원>[각주:이 아니라, 치밀한 논리와 교묘한 트릭을 이용한 <오션스 일레븐>에 가깝다.

그래서 이 영화의 플롯(구성)은 내가 상상했던 것이 아니다. SF적이기라기 보다는 단순 액션물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꿈 설계자(아키텍처)이다. 하지만 영화속 역할 설명은 불친절하다. 이야기를 만들지 않았다기 보다는 너무나 잘라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무의식과 꿈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무의식은 말 그대로 백지의 세상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의 세상에서 꿈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세계에 퍼져있는 기억이라는 씨앗(감정이나 느낌)을 불러(load)와 비어있는 공간에서 꿈이라는 프로토콜을 통해 그 씨앗을 이미지화 시키고 물질화시킨다. 무의식이 공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꿈이라는 프로토콜이 의식이 깃든 공간을 만들어낸다. 즉, 무의식은 파편화된 기억들의 씨앗이 이곳저곳에 널부러져 있는 조각모음 되지 않은 혼잡한 상태이다.

꿈 설계자는 조각모음을 얼마나 잘했느냐에 따라 더 치밀한 물질화된 세상을 구현할 수 있다. 물론 그 세상은 여전히 가상이다. 그러니까 꿈 설계자는 일단 표적이 되는 사람의 뇌 속의 비어있는 다른 영역을 확보하고 그곳에서 의식의 세상을 만들어놓고, 표적이 일단 경험하게 함으로써 무의식속에 표적 스스로가 씨앗을 심는다.

그러니까 꿈 설계자는 무의식으로 들어가게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할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역할인 것이다. 표적이 활보할 수 있는 논리적 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이다.

다만 영화속에서는 이러한 것 보다는 이전 계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복귀 프로토콜, 일명 '킥'을 얼마나 치밀하게 설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이 역시 현실에서 분주된 혹은 제1단계 꿈에서 분주된 시간의 동기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영화상에서는 약물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로 점프하고, 설계 프로토콜에 의해 꿈 주인의 기억 파편을 의식의 세계로 불러온다. 이렇게 함으로써 꿈에 접속한다.

그런데 두번째 점프와 세번째 점프는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지는걸까. 그때도 당연히 약물을 주입한다. 그런데 문제는 꿈에서의 약물은 실제 약물이 아니다. 꿈속에서의 물질은 그 공간에서는 실제로 느껴지지만 결국 외부 관찰자 시각에서는 그 약물마저 가상이 된다.. 모든 것이 허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약물은 처음 제조할 때 이미 시간 간격까지 생각하고 만들어낸 것일까? 그러니까 일정 시간이 지나면 프로토콜의 또 다른 작용으로, 킥을 준비할 인원(1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시금 다음 단계의 꿈으로 접속하는 듯 하다. 즉, 꿈이 주는 랜덤한 시공간을 꿈 설계자가 준비한 고정된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동일한 시공간으로 바꾸기 위해(혹은 랜덤한 꿈으로의 진입을 막기위해) 그들은 다시금 프로토콜에 접근하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이 프로토콜은 여전히 현실에서 준비했을 공산이 크다.

내 생각은 이렇다. 원래 꿈의 단계는 1단계 밖에 없다. 더 깊숙한 공간으로의 침투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꿈속에서는 뭐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다. 다시말해 랜덤한 공간으로 점프한다던지 조종할 수 없는 어떤 현상에 봉착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설계된 꿈이란 이런 카오스적인 상황을 미리 막고 또 변수를 확실히 줄여주는 것, 그래서 꿈에서 다른 꿈으로 예정된 점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게 내 상상이다. 최대한 계획된 그리고 고정된 액자식 꿈의 완성이 바로 영화에서 보여주는 꿈의 단계별 설정이 되는 것이다.

영화속에서 감독은 이러한 꿈 설계자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해주지 않는다. 다만 공간을 창조하고 가상의 물질을 창조한 새로운 차원의 공간을 만든다는 이야기만 할 뿐이다. 꿈 설계자가 만든 공간은 심지어 차원마저도 만들어낸다. 앞쪽의 건물과 도로들이 일어나서 수직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그 도시를 가로지르는 자동차라든지 사람들은 그러한 변화에도 놀라지 않는 것은 꿈 설계자가 이미 신과 같은 공간을 창조할 수 있는 권한(authoirity)을 얻었다고 보면 무방하다. 4차원 속에서 3차원을 볼 수 있지만 3차원에 속해있으면서 4차원을 볼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럼에도 영화속 꿈 설계자의 활동은 미미하다.

따라서 완벽한 꿈 설계자일 수록 완벽한 공간을 창조하며 <다크시티>에서처럼 건물이 불쑥불쑥 생긴다든지, 또 건물과 공간이 사르르 사라지게 할 순 없다. 그런 일이 있다면 이미 꿈 설계자로서는 부적격자니까 말이다. 따라서 영화속 꿈 설계자가 완벽해지면 완벽해질수록 영화상에서 볼거리가 밋밋해진다. 최소한 인셉션의 프로세싱 과정을 시각적으로 어떤식으로든 표현했다면 정말 좋았을텐데.

꿈 설계자 다음으로 중요한 꿈의 방어기재의 역할이 미미하다. 방어기재야 말로 이 영화의 또 다른 백미이다. 하지만 방어기재의 표현은 사실 너무나 평범하다. 총들고 쏘는 일차원적인 방어만 할 뿐이다. 먼저 이 방어기재들이 있는 공간은 논리가 필요하지 않는 가상공간에 있음을 알아야한다. 그 말은 방어기재들은 주어진 자원을 최대로 활용해야한다. 방어기재들은 이미 꿈 자체이기 때문이다. 가령 땅이 꺼지게 만든다든지, 아니면 공간을 뒤틀리게 한다든지 말이다.


타임라인 http://www.slashfilm.com/2010/07/27/infographic-inception-timeline/


우리가 흔히 아는 꿈에서의 비논리적 상황은 꿈 속에서 아는 것이 아니라, 꿈을 깬 후에 안다. 그러니까 꿈 속에서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도 특별한 일이 아니다. 꿈 설계자는 비록 가상현실이지만 최대한의 노력으로 완벽한 논리적 공간을 창출해야 하며, 꿈속 방어기재는 설계자의 의도와는 반대로 역시나 최대한의 노력으로 비논리적 공간을 창출해야 한다.

즉, 이 영화는 논리적 공간과 비논리적 공간의 충돌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영화속 플롯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큰 틀은 꿈이지만 표적이 최대한 그 상황을 현실적 그리고 논리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꿈을 깨도 꿈을 꿨는지 몰라야된다. 단지 무의식속에 가지고 있는 정보만 뺐길 뿐이다. 그런데 꿈을 깬 후에 꿈이라고 느끼면 말이 안되기에 최대한 현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표적이 꿈에서 느끼게 해야한다. 아무튼 현실로 돌아왔을때 모든 것이 없었던 일처럼 평화로와야하고 나중에 인과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스위치만 동작하면 되기에 영화가 쉽지는 않다.

영화는 SF이지만 영화 플롯은 <오션스 일레븐>과 별 다를바 없다. 얼마나 정교하느냐가 중요하지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는 좋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들어내면 들어낼수록 현실적 장치로 회귀될 뿐이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본다.

사실 아쉬운점을 길게 적어내려가긴 했지만, 괜찮은 영화다. 왜냐하면 관객들에게 논리적이지만 비논리적인 어떤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딱 말이되게끔만) 관객들의 머리를 계속 쥐어짜기 때문이다. 어떤 글에서는 관객을 향한 감독의 인셉션이라고도 표현한 것을 보았다.

이 영화의 한계는 <매트릭스>이다. 내 짧은 식견으로 아무리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감독이나 배우들의 권위가 올라가도 매트릭스를 넘을 순 없다. 아니 매트릭스, 그 아래 단계까지만 가도 대단한 성공이다. 매트릭스가 대단한 것은 영화 자체(그러니까 컨셉트)를 넘어 하나의 플랫폼으로까지 진화해 버린 점이다. 기독교, 불교, 네트워크, 과학, 가상현실, 정보통신, 양자역학, 심리학 등등 어떤 카테고리를 넣어도 왠만큼 설명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절주절 길게 떠들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딱 한 줄이다.

"매트릭스가 각성이라면, 인셉션은 각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td montreal 2010-08-0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많은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군여

쿼크 2010-08-01 23:45   좋아요 0 | URL
사실 영상보다는 대화에 집중해야하는 영화같아요... 물론..저는 자막에 집중... 사실 제 글은 잡설이라 뭐 영화 내용하고는 별로 상관없어요...
 
거인들의 생각과 힘 - 과학과 왕립학회 이야기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자연철학과 자연과학의 걸죽한 향연. 이 책을 한마디로 얘기해본다면 그렇다. 너무나 걸죽하다. 이야기라는 수프를 한 수저 뜨자 걸죽한 묘한 덩어리들이 바닥까지 죽 느려뜨려진다. 너무나도 걸죽해서 (나에게는) 먹기도 전에 질리고, 느끼했다. 어렵다는 감상을 떠나서 매우 압축적인 각각의 글 꼭지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생각을 따라가기에도 벅차다. 이 책은 20명의 과학 저술가 혹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연구하는 영역안에서(어쩌면 영역밖을 넘어서) 펼쳐졌던 하지만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과학사에 종종 등장하는 거인들은 뉴턴 이전 시대의 거장들이다. 거인이 어디에서부터 등장했는지 잠시 다른 책을 살펴본다.

   
  "내가 더 멀리 보아왔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오(If I have seen fa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아이작 뉴턴은 1676년에 로버트 훅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사실 그것은 광학에서의 발견에 대한 언급이었을 뿐, 좀더 중요한 중력 이론이나 운동 법칙에 관한 것이 아니었지만, 과학을 비롯한 문명 전체가 그 이전에 이루어진 성과 위에 새롭게 구축되는 일련의 누적적인 진보라는 것을 밝혀 주었다는 점에서 적절한 언급이었다...(중략)...

스티븐 호킹 편저,『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중 서문에서 발췌, 까치, 2006.
 
   

『거인들의 생각과 힘』은 스티븐 호킹이 편저한 책의 발췌문에서 표현한 것처럼 우리 세계를 이룬 누적적인 과학의 진보의 과정을 여러 에세이들로 묶은 책이다. (인용문의 굵은 글씨나 밑줄은 내가 임으로 한 것임..) 그러니까 도대체 누적적인 진보가 뭘까? 그에 대한 답은 '경험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사고실험을 통한 결과를 대화로 풀어가며 내 생각, 니 생각 어떻게 꿰어보고, 또 반론해보고 나름대로 결과를 유추해내는 것이 아닌, 한마디로 보고 듣고 수행한 일에 대하여 보고서로 작성하고 그 보고서를 돌려 다른 사람에게 읽히고 그와 유사한 일에 대해 또 같이 사유해보고 기록하는 요즘말로 일련의 과학을 수행하는 초기 버전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과학적 지식을 모으는 것이 아닌 과학적 지식을 만드는 일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이 책은 기록에 대한 증언이다.

서론은 '빌 브라이슨'이 썼는데 왕립학회란 어떤 곳인지 개략적으로 설명을 한다. 빌 브라이슨이 말하는 왕립학회는 먼저
'비국수적이고 중립적인 국제적인 단체로 회원 자격으로는 과학적 성실성과 창의성을 우선적으로 꼽으며, 3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권위를 자랑하는 단체'쯤으로 요약된다. 빌 브라이슨의 서문을 읽어보면 과학적 통찰과 영감 혹은 사실의 발견보다는 그런 것들을 이룬 사람들에게 더 애정을 보인다. 왕립학회에서 발굴한 과학적 사실보다는 발굴의 과정에 다양한 의견을 내었던(물론 발굴자를 포함한) 그 사람들의 삶의 투쟁(학문적 투쟁)이 곧 왕립학회의 역사라는 의미이다. 그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낸 결과물은 단지 하나의 보답물쯤으로 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보답물인 실험기자재들을 포함한 자료들은 아주 중요한 역사적 보물로 왕립학회에서 보관하고 있다.

앞서 중립적 단체라 함은 왕립학회(Royal Socity)라는 단체명에 왕이라는 정치적 지칭어가 들어갔음에도 런던을 붙여 놓음으로써 중립적 위치로 돌린다는 의미로 풀이한다. 즉, 영국 왕립학회가 아닌 런던 왕립학회가 정식명칭이다. 이 학회 멤버들은 요즘 말로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V 프로그램의 VJ들이다. 이상하거나 희귀한 사건이 벌어지면 일단 회원들을 보내 조사하게끔 하고 보고서를 받는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자면 왠지 코믹쪽 요소가 보인다. 그 고전적 VJ들의 과정의 이야기가 곧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이며, 또 현대의 VJ들 그러니까 현재 왕립학회 멤버인 과학자들의 이야기도 실려있다. 이러한 허무맹랑을 좇는 상황을 '마거릿 애트우드'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비교하여 들려준다. 미친짓같이 보이지만, 결국엔 미친짓은 아니라는 소리이다.

왕의 시대에는 신의 이름으로 민중위에 군림한다. 신이 만들어낸 모든 현상들은 왕이 알고 있어야 하며, 왕에 의해서 이름 지어진다. 물론 그 이전에 일련의 이런 과학적 발견이나 물질의 발견은 왕의 이름으로 헌상되어지는 것이 관례이다. 그렇다고 왕 스스로가 이름짓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왕과 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럴듯한 이름 붙여지며, 우주의 기초가 되는 사상에 맞추어 이름 지으려 노력한다. 합리주의적 철학이나 경험주의적 철학과 같은 사상을 바탕으로 그들은 우주를 규정하고 세상을 규정하고 왕의 권위를 세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레베카 뉴버거 골드스타인'의 <이름에 담긴 뜻은?> 이라는 꼭지에 실려있다.

'사이먼 샤퍼'의 <전기를 가진 대기> 이야기는 당시 최첨단 기술인 피뢰침에 관련한 이야기이다. 벼락을 맞아 불에 탄 건물을 조사하던 중 그 건물이 최첨단 기술이었던 피뢰침이 설치된 건물이었음을 알게된다. 사람들은 지적 미로에 빠져버렸다. 피뢰침 자체가 번개의 피해에서 자유롭게 해준다는 생각이 틀린 생각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에서부터 너무나 뾰족하면 의외로 부작용이 생겨 번개를 불러온다는 의구심까지 불러 일으키는 골치아픈 문제로까지 번졌다. 사실 왕립학회는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의 이론을 수용했다. 더구나 그의 논리적 이론과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실험은 왕립학회 멤버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이었고 프랭클린에게 메달과 왕립학회 회원 자격까지 수여하였다. 이제 하나의 반증이 나타남으로써 피뢰침에 대한 의구심이 곧 미국인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제 미국과의 전쟁에 군수품을 공급하던 군수원에도 이러한 보고가 들어갔고, 전면적인 재조사에 들어간다.

재밌는 것은 번개를 피하기 위해서는 번개를 불러들이는 회로를 설치해야한다는 딜레마이다. 이 딜레마를 극복하는 것을 '프로메테우스적 자유'라고 불렀는데, 이 자유를 얻기위해서는 또 그만큼의 내포된 위험성에 노출되는 이중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프로메테우스적 과학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런 원칙에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실험을 고안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는 것이 밝혀졌다. 일부 지역과 사람들만 신뢰할 수 있었다...(중략)...대법원장은 '과학의 문제에서 과학자의 주장에는 과학자만이 답변을 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문제는 누가 '과학자'인가를 결정하고, 위험스러운 프로메테우스적 과학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였다. 타이탄이 불을 훔치고, 그에 대해서 지독한 벌을 받은 것은 자유 탐구와 그에 대한 벌칙을 뜻한다. 여성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는 1794년에 프랑스 혁명에 대한 훌륭한 논평에서 '성직자들이 엄청난 강요의 구조를 세워놓은'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녀는 오히려 '우리는 인간이 더욱 지혜로워지면 아무 생각도 없이 서로에게 더 큰 행복을 제공하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서 그녀의 딸인 메리 셸리가 과학적 야망과 그것의 두려운 결과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등장한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의 부제가 바로 「현대의 프로메테우스(The Modern Prometheus)」였다.

『거인들의 생각과 힘』중에서, p.161~162.
 
   

사실 간단하게나마 다른 이야기의 꼭지들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너무나 방대해져서 '리뷰'라는 목적에도 맞지 않게 되어버린다. 물론 내가 완벽히 소화한 것도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이 책은 읽는다고 해서 그러니까 독자의 눈이 흰 바탕의 검은 글자들을 따라간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머리속에 이미지화 되는 그런 책이 아니다. 문자를 이미지화 시키기에도 독자의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거인들의 생각과 힘』은 한 권의 책이지만, 과학 이슈를 담은 과학잡지를 보는 듯 하다.  그만큼 읽을거리, 생각할거리를 던져준다. 특별한 최신 이론을 소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과학자들을 소개함으로써 흔히들 지나치기 쉬운 과학사의 틈새를 메꿔준다. 사실 이 책은 당장 우리에게 어떤 지적 욕구를 채워준다기 보다는 다른 과학서적의 독서에 도움을 주는 배경 지식을 깔아준다. 20여편의 에세이에 등장하는 소재는 다양하다. 천문학, 우주론, 광학, 생물학, 진화론, 비행역학, 지질학, 화석학, 양자역학 등등으로 말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DNA를 발견한 과학자를 우리는 안다. 또 X선을 발견한 사람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DNA를 X선으로 찍은 사람은 누구일까? 뭐, 이렇게 직관적인 물음으로 시작하는 책은 전혀 아니지만, 읽다보면 알아서 스스로 정보를 조합할 수 있다. 참, 답은 '빌 아스트버리(FRS 1940년)' 이다. 여기에서 'FRS 1940년'이란 Fellow of the Royal Socity의 약자로 1940년에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얼마전에 『막스플랑크 평전』을 읽었다. 그 책은 독일의 근대 과학사를 이야기하는데, 이 책은 영국의 과학사 특히 왕립학회를 통해 펼쳐지는 과학사를 들려준다. 두 권의 책에서 서로의 대척점은 없을지라도 그만큼 개인적, 단체적, 국가적으로 얼마나 과학에, 학문에, 지식에 힘을 쏟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지 느끼게 한다.

음, 우리는 어떨까. 우리도 과학의 증언에 힘을 쏟고 있겠지.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스 플랑크 평전 - 근대인의 세상을 종식시키고 양자도약의 시대를 연 천재 물리학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이미선 옮김 / 김영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막스 플랑크 평전>을 보았다.

 
다른 책들은 젖혀두고 이 책만 보았는데 쉽진 않았다. 이 책은 과학자라는 신분을 지닌 한 인간의 삶이 세상에 어떻게 귀속당하여 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격변의 시대상을 막스 플랑크라는 지식인의 눈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개인이 대중으로 또 국가라는 하나의 거대한 몸통('몸체'라고 쓰고 싶기도 하다)으로 점점 흡수당하여 획일화되는 부자연스러운 세상이었다. 마치 파란색 잉크병에서 잉크 입자만 뽑아내려 하듯, 생각과 사상의 엔트로피가 제거되어가는 세상. 개인의 자유도가 하나씩 떨어져나가는 세상. 모든 정보의 통로가 막혀있는 세상. '히틀러'라는 고유명사가 보통명사화 되어가는 그런 세상. 히틀러라는 단수 명사가 복수 명사가 되어가는 세상이었다. 곳곳에서 히틀러들이 작용하는 세상이었다.

 당시대의 작용자는 전쟁이었다. 어디든 전쟁이 있었고, 누구든 전쟁을 피해다닐 순 없었다. 막스 플랑크도 예외일 순 없었다. 책을 읽어보면 그는 참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이 그의 삶을 야금야금 집어 삼키는 와중에도 연구와 학회일 그리고 독일의 물리학 성과를 위해 열심히도 뛰어다녔다. 삶의 곳곳에 물리학의 장막을 쳐두고 그안에서는 최대한의 자유와 긍지를 누리려고 하였다. 물리라는 장막을 걷기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구소 동료, 그리고 가족들이 장막을 걷어치우고 저 포연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결국엔 막스 플랑크도 장막을 걷을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틈에 나치를 위한 어용 물리를 해야했고, '하일 히틀러'를 외쳐야만 했다.

 세상은 참 쉽게 바뀌어갔다. 어렵게 표현하면 격변이었고, 쉽게 말하면 생기는 족족 망해버리는 시기였다. 막스 플랑크는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가 통치하고 있을 무렵 태어났다. 얼마후에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왕이 황제로 등극을 했고, 그 후 손자인 빌헬름 2세가 황제 자리를 이어받았다.
동시에 독일은 세계 강대국과 발맞추어 제국주의로 돌아섰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제국주의는 몰락(황제가 네덜란드로 도망갔다)하였다. 사회민주당에 의해 '바이마르공화국'이라는 별칭을 가진 민주공화정이 탄생하였지만, 우익이 한 쪽으로 표를 몰아주는 바람에 히틀러가 총리가 되어 정권에 발을 걸칠 수 있었다. 얼마 뒤에 대통령이 죽고, 총리만 남은 독일은 시간을 멈추었고, 나치당이 제1여당이 되어 더 이상 정치적 변모는 하지 않게 된다. 대통령과 총리를 조합한 '총통'에 오른 히틀러는 본격적인 독재정치로 들어선다. 이 히틀러를 총통으로 모신 나치는 글로벌화를 위해 제 3제국 건설 착수에 들어간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알다시피 제 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프로이센의 유산, 공화국의 유산, 나치의 유산 이 모든 것이 싹 쓸려버린다. 패전국이라는 도장을 찍은 곳도 베르사유 궁전이었다(일명 베르사유 조약).

 19세기부터 과학계 전반은 뉴턴이 곳곳에서 본격적으로 분해되는 시기였다. 분해되는 만큼 과거의 거인들에게 이어받았던 뉴턴의 철학적 유산은 곳곳에 뿌려졌다. 행성간의 힘의 법칙은 전기와 자기의 힘과 장의 법칙으로 나타났으며, 광학은  뉴턴이 프리즘으로 빛을 나눴던 것 그 이상의 영역(가시광선 영역을 더 벗어난)으로 확장되어 분광확이라는 학문으로 진화되어갔다. 스펙트럼을 통해 드러난 새로운 원자들의 존재는 화학을 분자나 원자의 시각 수준에서 들여다보게끔 하였다. 뉴턴이 곳곳에 작용하는 과학계였지만 결국엔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적 관점으로 이동하였다.

 힘을 넘어선 에너지라는 개념의 완성이었다.   
  

 

   
 


에너지의 특성을 이해하려면, 먼저 세계의 사건들 및 과정들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공간을 가로지르는 물체의 운동이 지닌 특성이며, 다른 하나는 열의 특성이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운동을 기술하려는 노력은 17세기 말이 되어서야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그 뒤 놀라울 정도로 오랫동안 씨름한 끝에 과학자들은 마침내 열의 특성을 밝혀내는 데도 성공했다.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였다.  


<'갈릴레오의 손가락' 중에서... P. 142~143>

 
   

막스 플랑크의 양자가설은 현재의 양자역학의 토대가 되었다. 그 해가 딱 떨어지는 1900년 이다. 기존 물리학에 고전이라는 단어가 붙어버림으로써 또 같은 의미로 현대물리가 태동함으로써 과학사라는 타임라인에 시간적 분할이 이루어진 듯하지만, 실은 공간적 분할이었다. 우주가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로 나뉘고 당시 우주를 지배하는 언어는 새로이 나뉜 틀을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러렀다.

  당시까지 설명할 수 없었던 현상중의 하나는 흑체복사를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뜨거운 물체(모든 전자기파를 흡수한 이상적인 물체를 흑체라 한다)에서 방출되는 (그러니까 관측된) 빛의 스펙트럼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보이긴 하는데 말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이론적인 내용이야 다른 책들을 보면 될터이다.
아무튼 드디어 실마리를 얻었다. 막스 플랑크가 해낸 것이다. 빛을 믹서기로 갈아버린 것이다. (물론 믹서기라는 단어에 혼동을 할 터이지만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끄집어 내었다.) 그러니까 믹서기로 진짜 갈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종의 상징적 행위로 보면 된다. 가령 사과가 100개 있다고 하자. 사과를 하나, 둘, 셋,... 이렇게 셀 수 뿐이 없다. 그런데 생각을 달리하면 다른 식으로도 셀 수 있다. 사과를 몽땅 믹서기에 넣고, 갈갈이 갈은 뒤 1리터 짜리 그릇들에 담으면 하나, 둘 이렇게 개체로 세던 방식(그러니까 한마디로 무게 또는 질량인 kg이나 g으로 세던 방식)을 단위가 리터인 부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총 질량이 얼마인가가 될 사과 100개가 몇 리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부피로 측정가능하게 되었다. 막스 플랑크가 내놓은 플랑크 상수가 한마디로 이런 믹서기 역할을 한다. 빛을 작용양자 플랑크 상수에 비례시켰더니 에너지(흑체에서 방출되는 관측된 빛의 스펙트럼)로써 측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빛의 진동수(Hz)를 에너지(J, 줄)로 재해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갈려서 액체가 된 사과즙은 연속적 값이 아닌 불연속적인 값을 보인다는데에 문제가 있었다. 마치 1리터, 2리터 이렇게 말이다. 1.5리터는 될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그냥 그런것이 그때 알아낸 자연의 진리였다. 이런 불연속적인 값으로 인해 고전물리에서 현대물리로 도약하였다.  

   
 
에너지와 시간이 만들어낸 산물은 어떤 우연한 배열이 아니다. 이러한 물리학적 기본량의 조합을 '작용'이라고 한다. 따라서 h는 가끔 '작용의 플랑크 양자' 혹은 '작용양자'라고도 불린다. 이를 통해 자연 안에 존재하는 근원적이며 본래적인 틈(Lucke)이 자세히 설명된다. 그것은 에너지가 아니라 작용 즉 에너지와 시간이 만들어낸 생산물이다.

<'막스 플랑크 평전' 중에서... P. 136>
 
   

 

플랑크는 그때 필요한 상수 h를 작용양자라 불렀는데, 후세에 플랑크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작용'이라는 물리적 의미는 앞의 사과의 예를 들어 '그램(g)을 리터(L)로 조합 시킨다'는 의미이다. 진 동수 Hz는 사실 시간단위이며 에너지는 그 자체로 에너지 단위이기에 에너지와 시간이 만들어낸 생산물로 표현한 것이다. 플랑크는 이런 불연속적인 에너지, 즉 에너지 알갱이들을 '양자(Quantum)'로 부르자는 제안을 하게 된다. 쉬운 의미로 '한 스푼'쯤 된다.

  결정론적 인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존의 철학관에 의하면 태양이 있음으로 해서 지구는 미래로 달려가지만 결국엔 이 모든 것이 신의 의도와 맞물려 결정되었다. 태양, 지구, 다른 별들의 궤도는 결국 일상이라는 루틴을 만들어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또 가을, 겨울을 겪다보면 다시 봄이 온다는 우주의 결정론적 인식은 농업 생산이라는 삶의 과제이자 인류의 큰 숙명이었다. 또 이런 원인과 결과에 따른 명제를 착실히 수행한 결과 농업 생산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키고 다른 수단으로도 삶이 영위될 수 있다는 기계론적 관점 또한 더불어 확장되었다. 그것은 바로 힘의 사용이었다. 빛을 전기로 받아들이고, 말의 힘을 엔진으로 대체시켰다. 그런데 이 모든 관념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플랑크는 새로운 이론으로 학계를 놀래켰지만 권위를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실험결과에 맞추어진 듯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대적 합리성이란 권위였지, 대중을 위한 쉬한 이해와 같은 것과는 멀었다. 그러니까 권위를 인정받는다는 뜻은 권위자들이 인정한다는 의미이고 그것이 바로 시대의 대중성이었다. 아무튼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또다른 권위자들에게 이해가능한 설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런 양자도약을 기존의 고전물리의 틀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지만, 이미 나침반의 바늘은 새로운 곳만 가리켰다.

 당시에는 전쟁이 시대적 작용자였다. 전쟁은 권위자의 명령에 따라 진행되고 멈추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대중성이었다. 민중들의 동의없이 공화정에서 전쟁을 치루기란 쉽지 않다. 대중성은 과학계에도 몰아닥쳤다. 한마디로 대중을 위한 과학, 그리고 (독일이 과학의 중심에 있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국가를 위한 과학이 필요한 때였다. 대중의 이해를 위한 간결화(simple)가 필요한 때였다. 플랑크는 이를 위해 또 다른 발견을 하기에 이른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다. 그의 두번째 발견은 '아인슈타인'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등장함으로써 플랑크의 물리적 기반(양자이론)을 확고히 해주었으며, 더불어 '대중의 관심'도 집중되었다. 그리고 후에 등장한 '슈뢰딩거'까지. 이 두 명의 과학자는 '대중성'과 '간결성(파동방정식이라는)'이라는 시대적 명제에 답을 하였다.

 문제는 시대가 시대였다는 것이다. 시대적 합리성 혹은 합법성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양자역학이라는 물리적 이론이야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철학적 순수성은 보장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이나 슈뢰딩거부터 외국인이지 않던가. 순수성은 혈통으로 번져갔고, 막스 플랑크는 정치적인 것과 정치적이지 않은 것들이 내뿜는 중력을 혼자서 감당하려 하였다. 정치적이지 않은 것에는 물리학이라는 학문이 걸려 있고, 정치적인 것에는 가족이 걸려 있다. 그는 버텨가며 물리학의 장막속에 있으려 하였지만 결국엔 장막이 들춰져 버렸다. 물리학계는 나치계가 점거해버렸다. 그렇다면 가족은? 큰 아들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터에서 죽었고, 작은 아들은 히틀러 암살 사건으로 유명한 '발키리 작전'에 연루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같은 날 사형 당한다. 비극적인 개인사이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막스 플랑크 평전>은 흥미롭다. 또 어렵다. 흥미로운 부분은 플랑크의 개인사이며, 어려운 부분은 역시나 물리학과 관련된 부분이다. 역사와 물리라는 두 거점을 왕복하는 이 책은 사실 아쉽기도 하다. 물리에 관한 부분에서는 좀 더 쉬운 참고서적이 필요할 듯 싶다. 짧은 책 안에 그것도 전체가 아닌 일부에만 물리학을 펼쳐 놓으려 하니 들락날락 거리는 수많은 물리학자들과의 연계도 쉽게 이어지지도 않고, 또 개념들마저 압축시켜 놓으니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물론 읽는 독자의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로 읽히겠지만 말이다. 플랑크의 개인사 관련 부분은 흥미로운 부분도 많지만, 이 역시 역사라는 실로 묶여 있기에 시간적, 공간적 이해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것도 역시 개인차에 따라 다르겠지만.

 불리한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시 물리학계를 받쳤던 막스 플랑크. 아틀라스는 제우스와의 전쟁에서 져 그로인해 천계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천공을 들고 있어야만 하는 벌을 받지만, 막스 플랑크는 다른 이유로 평생 동안 물리학을 떠받쳤다. 그 이유는 오직 자기가 원해서이다. 물론 세계적 물리학의 완성에 다가서기 보다는 독일 중심의 물리학을 원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이유로 인종이 다르다고, 성별이 다르다고 사람들을 배척하진 않았다. 순수한 목적이라는 것은 없겠지만 물리학에 도전했던 그 정신만은 순수함에서 나왔다고 본다.

어쨌든 한 개인이 어떻게 물리학과 역사를 쉼없이 왕복하고 있는지 과감없이 보여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PS.

1. 이 책에 쓰여져 있는 물리학적 개념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자역학의 개념보다는 그것 보다 더 근원적인 것들, 그러니까 에너지와 열에 대해서 좀 더 확실히 이해하여야만 한다. 개인적으로 이 평전을 읽으면서 '피터 앳킨스'의 <갈릴레오의 손가락>을 참고했다. '과학의 10가지 위대한 착상들'이라는 부제에서 보여지듯이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열, 에너지, 엔트로피, 양자와 관련 기본적 개념들을 그나마 쉽게 다룬다. 이 책 역시 추천하는 책이다.


2. '<막스 플랑크 평전>을 쓴 저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또 다른 책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추천하는 책인데 이 책은 사고실험과 관련한 책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실험을 할 수 없는 것들을 머릿속에서 돌리는 사고실험 관련 책이다. 하지만 분량은 많지 않아 오히려 <갈릴레오의 손가락>을 더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의 힘 - 조선, 500년 문명의 역동성을 찾다
오항녕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술술 읽혀대는 우리 역사관련 책들을 읽으면 다분히 사건 위주였던 기억이 난다. 사건 위주가 아니라면 역시나 인물 위주이다. 대부분의 조선사는 실록을 참고로 만들어질테니 인물(특히 왕..) 위주로 책 내는 것이 용이할 것이다.  사건이나 인물 중심으로 단조롭게 풀어나가는 책은 에피소드와 에피소드의 연관성 그러니까 역사의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의 논리적 구도를 읽어내기란 상당히 어렵다. 이러한 구도를 모른다면 조선의 역사는 알아도 조선에 대해서 알기는 쉽지 않다. 사건이나 인물을 텍스트라 한다면 텍스트를 가리키고 있는 모든 것들은 콘텍스트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의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콘텍스트가 생략 되어 있다. 역사 읽기란 텍스트를 읽는다기보다는 콘텍스트를 읽는 것에 가깝다. 콘텍스트는 하나의 텍스트에 대해 과거 이곳 저곳을 훑어 놓은 것이다.

콘텍스트를 읽는다는 것. 이것은 문학 읽기와도 닮았다. 책속에 들어있는 텍스트로 된 여러 조합들을 건져내다 보면 어느덧 결말에 닿아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문학 속 인물을 그려보는 것 만으로 책읽기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어내는 자신을 투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결말에 닿아있다'라는 의미는 가령 소설 속 주인공이 해피 엔딩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결말이 (주인공을 벗어나 나 자신에, 혹은 우리 사회에) 지금도 유효한가 아닌가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역사도 그렇다. 조선시대에 이미 결과로써 드러난 몇가지 결론들이 지금은 형태를 바꾸어 다시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를 느껴야 하지 않을까.

얼마전에 읽은 오항녕의 '조선의 힘'이라는 책과 비교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렸을때 읽었던 하나의 문장을 예로 든다. 물론 이 문장은 내 임의대로 꽤 축약시켜 놓은 것이다.

"세조는 조카 단종을 내쫓은 후, 왕위를 차지하였으며 단종을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 했던 여러 신하들을 고문하여 죽였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은 죽임을 당하였고 그의 아내와 딸은 모두 노비로 만들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계유정난'으로 부른다. 이게 텍스트이자  콘텍스트의 실마리이다.

첫번째 콘텍스트는 바로 노비에 대한 것들이다. '조선의 힘' 첫 장이 조선의 문치주의에 대한 이야기인데 노비제도는 문치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로 볼 수 있다. 문치주의는 단순히 문을 숭상하고 기리려는 정책이 아니다. 문치주의는 바로 관료정치 특히 조선시대 택군을 실현시켰던 신하들의 권력의 무게에 의미를 둔다. 문치주의의 꽃인 '경연'은 왕과 신하들이 모여 옛 문장이나 성현의 말씀을 서로서로 물으며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이 왕을 교육시킨다는 의미가 크다. 신하들이 왕을 교육시킨다는 것. 이것을 좀 더 넓게 보면 조선의 왕은 신하들이 꿈꾸는 나라를 대표하는 대표이사쯤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왕은 신하들이 누릴 수 있는 이권에 직접적인 개입을 할 수 없다. 이권을 줄이기 위해 명령을 해도 그 명령을 받는 사람 자체가 또한 관료이기 때문이다. 물론 왕 자신도 더불어 꽤 많은 혜택을 보는 것도 사실이다. 신하들의 이권이 커지게 되다보면 관료주의는 다시 과거로 회귀하게 된다. 관료주의는 바로 (고려때의) 귀족주의를 극복한 조선의 정치적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귀족주의를 가장한 관료주의는 노비제도를 타파할 수 없는 것이다. 노비야 말로 욕심에 물든 관료주의를 지탱한 거대한 자원이다. 그러니까 법제적으로 양천제(양인층과 천민층만을 구별한 제도)의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반상제(양반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가 더욱 더 치밀해져가고(이 치밀함으로 인해 결국엔 노비의 숫자가 줄어들게 만들긴 하지만), 이것이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적 모습의 영양분을 제공한다. 노비제도는 결국 조선이 망할 무렵에 가서야 조금씩 혁파된다. 영조(노비 쫓는 기관인 '노비추쇄관 폐지' 그리고 '노비종모법' 시행)와 정조(노비 쫓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 노비추쇄법 폐지)를 지나 순조때에 이르러서야 공노비가 폐지되고, 고종때에는 노비세습법이 폐지가 되며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갑오개혁(고종, 1894)으로 공,사노비의 해방이 이제서야 법제적화 되었다. 갑오개혁도 사실 개혁을 요구해오는 일제에 내정간섭을 위한 빌미를 주지 않기위해 스스로 개혁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을 뿐 절반은 어쩔 수 없는 타의적인 개혁이었다. 결국 문치주의는 양지에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또한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었다.

물론, 책에서는 문치주의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본다. 맞는 말이다. 나의 경우에 그림자인 노비제도를 적었지만, '조선의 힘'에는 '실록'이라는 엄청 밝은 부분이 들어가 있다. 어쨌든 문치주의가 가진 그 양면성이 조선을 풍부하지만 누구에게는 가혹한 그런 나라로 만들었다. 심지어 신하인 그들 자신에게조차도 가혹함을 맛보게 했으니 말이다.

다시 윗 문장으로 가서 두번째 콘텍스트를 정해본다. 그것은 '단종'과 관련한 것들이 다. 단종은 세종의 손자이자 세종의 아들인 문종의 아들이며, 수양대군인 세조의 조카이다. '조선의 힘' 마지막 장인 8장이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나도 몰랐었는데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먼저 단종은 폐위되었으므로 왕이 죽은 뒤에 받는 '묘호(종이나 조로 끝나는...)' 를 받을 수 없다. 연산군이나 광해군도 묘호가 없다. 그렇다면 단종이라는 묘호를 받기전에는 뭐라 불리웠을까. 바로 '노산군'으로 불리었다. 또 재밌는 것은 '연산군'에 들어있는 '산' 그리고 '광해군'에 들어있는 '해'와 같은 글자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한다. '노산군'에도 '산'이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언제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제대로 된 '묘호'를 받게 되었을까? 물론 사육신과 생육신의 명예회복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8장에 들어있는 이야기이다. 정답은 바로 숙종 24년의 일이다. 그러니까 단종이 영월땅에서 어린나이에 단명을 한 이후 243년 후에 일어난 일이다. 자그만치 강산이 24번이나 바뀐 뒤에 말이다. 그만큼 조선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 모든 것이 기억되고 문제로서 제기되는 이러한 사항이 바로 또 다른 문치주의의 긍정적인 부분이다. 덧붙여서 '정종(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의 묘호도 숙종때에 받았다.

세번째 콘텍스트는 '세조'와 관련한 것들이다. 이는 두번째 콘텍스트인 '단종'의 또 다른 얼굴이다. 세조는 누구나 알다시피 세종의 아들이다. 세종은 누구인가. 집현전을 설치한 대왕이다. 그렇다면 집현전은 어떤 곳인가. 이게 가장 중요한데, 집현전 학자들이 아닌 집현전이라는 공간을 제시한 것은 바로 세조의 일터였다는 의미에 무게를 두고 싶어서이다. 바로 이곳에서 세조는 아니 수양대군은 야망을 꾸었다. 세종은 학문을 중요시했던 왕인데 그의 아들들 그러니까 세자로 지명되지 않은 여러 대군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재능들을 국가를 위해 쓰라고 공부도 시키고 일도 시킨것이다. 그럭저럭 평생동안 놀고 먹는 만고땡이 될 수 있는 대군들을 말이다. 세종 자신은 어떤가. 국가를 위해 자신의 아비인 태종을 위해, 백성을 위해 일을 하고 싶어도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만이 재능을 펼칠 수 있음을 부러워하지 않았던가. 그런 세종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재능을 펼쳐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수양대군은 야망을 펼치고 싶어했다는 것이 후에 비극으로 나타났지만 말이다. 결국 세조는 집현전을 통해 정치 세력을 키우는 일을 하게 된다. 신하들에게 평판도 높아지고 말이다. 얼마뒤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조카인 단종에게 선양받지만 찬탈과 크게 다를바 없다.  집현전은 바로 혁파된다. 자신이 부정한 음모를 꾸몄던 곳을 놔둘 수는 없는 일. 결국 집현전은 혁파되고 수양과 관계되어있지 않은 수많은 집현전 학자들 또한 죽음을 당하거나 쫓겨났다. 그 빈자리를 채운 공신들이 훈구파라는 이름으로 등장을 하게 되었다. 이 훈구파는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였는데 즉, 노비 만들기의 재능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농민을 노비로 바꾸는데 일등 공신이다. 이는 다시 첫번째 콘텍스트인 '노비'를 돌아보게 한다.

재밌는 것은 세조가 훈구파를 불러들였다면 임진왜란 당시의 왕이었던 선조는 또한 사림의 시대를 시작한 왕이었다. 정확히는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등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사림과 훈구의 반목속에 다시 '단종'이 등장하니 그것은 김종직의 '조의제문' 이 실록에서 발견된 일 때문이다. 다시 첫번째 콘텍스트에서 등장한 문치주의의 꽃 '실록'이 엄청나게 어두운 그림자로써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보면 안될 실록을 본 것이다. 누가? 연산군이. 결국 무오사화로 연결됨으로써 훈구파는 엄청난 정치적 학습을 하게된다. 맘에 안들면 왕의 이름으로 처단할 수 있다는. 결국 이런 학습을 너도나도 하게 되었고. 그 뒤에 쭉쭉 이름만 다른 사화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후에 가서는 왕도 학습하게 된다. 그 왕이 바로 숙종인데 사림이 계속 분화된 여러 갈래를 요리조리 바꿔 타가며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였다. 왕이 타지 않은 갈래에 있는 신하들은 환국이라는 이름하에 저세상 사람들이 되어갔고 말이다. 서인이라든지 남인 동인 결국 이런 갈래길의 중심에는 왕이 있었다.

'정종'과 '단종'의 묘호를 올린 숙종때에 일어난 것 중에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를 뒤흔들만한 것은 대동법의 시행이다. 이것마저 풀어쓰면 너무 길어질까봐 쓰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광해군때 처음으로 시도된 대동법이 그 뒤 100여년 동안 잠자고 있다가 숙종때부터 다시 꿈틀거리며 시행되니 그 유명한 '상평통보'가 시중에 쫙 깔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결국 이는 조선의 경제 구조를 뒤흔들게 되었고 이는 (도망)노비들이나 (도망)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게된 또 하나의 동인이다.

리뷰로 쓴다는 것이 너무나 길어져 리뷰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후딱 정리해본다.

사실 또 다른 콘텍스트로는 사화속에서 살아남은 사림이 자신들의 이상적인 학문으로 선택한 '성리학과 관계된 것들' 이 있다. 이는 중국과는 또 다른 성리학으로 조선땅에서 전개가 된다. 웃긴것은 '이황' 때문이기도 하며 덕분이기도 하다. 어쨌든 양명학이 중국땅에선 활개를 치지만 조선땅에선 활개를 치지 않게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다른 왕과 달리 다른 시각(조선을 다시 왕의 나라로 만들려는)으로 자신의 위치(왕이긴 하지만 서울 말고 다른 곳(화성)에서 새로이 시작하려는)를 보게 된 정조는 새로운 세력을 물색하게 되었고 후에 이들은 실학이라는 바탕을 마련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조의 급격한 개혁은 정조의 죽음 이후로 위정자들에 의해 자취가 지워지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세도정치로 이뤄지게 된다.

보는 입장에서 역사란 재밌다. 양반의 위선을 한 몸으로 느낀 '이하응'은 결국 자신이 살고자 세도정치를 이용하게 되었고, 세도정치로 인하여 자신은 왕이 될 수 없었지만 결국 세도정치로 인하여 자신의 아들은 왕이 된다. 이하응이 바로 '흥선대원군'이며 아들이 바로 '고종'이다.

다시 앞에서 언급한 문장을 써본다.

"세조는 조카 단종을 내쫓은 후, 왕위를 차지하였으며 단종을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 했던 여러 신하들을 고문하여 죽였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은 죽임을 당하였고 그의 아내와 딸은 모두 노비로 만들었다."

이 한 문장속에 얼마나 많은 콘텍스트들이 숨어 있는지 나도 '조선의 힘'을 읽으면서 놀랐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예전에 읽었던 여러 조선 관련 내용들이 내 머릿속에서 번뜩이며 되살아났다.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들이 많은지라 다시금 책을 펼쳐들고 좀 더 정확히 리뷰를 쓸 수는 없었지만 내가 적어간 내용이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거란 생각이다.

다시 윗 문장을 살펴보면 가장 드러나지 않고 잘 숨어있는 콘텍스트는 바로 재밌게도 텍스트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저 문장속에서 꼭꼭 숨어있는 단어가 바로 '실록'이라는 의미이다. 실록은 기록이니까 말 그대로 텍스트로 말한 것 뿐이다. 수양대군의 조카인 단종이 죽은 뒤에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묘호를 받기까지 243년이 걸렸다. 그러니까 243년 동안 신하들은 어떻게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실록은 조선인들에게도 단순히 역사책이 아니다. 문치주의이기도 했지만 실록 자체가 거대한 국가의 통치 과제다. 그들이 실록을 뒤져가며 현재와 끊임없이 비교해가며 뭔가를 끄집어 내고 있었다는 것.

그것은 마치 이것과 같다.

조선은 기록되기 위해 존재했다라는 것. 기록되지 못하면 조선은 그것으로 끝일 뿐.
(재밌는 것은 그렇게 기록된 실록을 왕들은 제대로 볼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정조는 왕들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일기를 기록한다. 그것이 '일성록'이다. '일성록'은 실록보다 더 직접적인 기록이다.)

역사를 생각하면 독일의 과학자 '베게너'가 주장한 '대륙이동설' 이 생각이 난다. 어제와 비교한 오늘을 보면 변화는 없는 듯 보이지만 무수한 시간이 지난뒤에 보면 거대한 땅 덩어리, 대륙은 엄청난 물리적 변화를 겪어있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 땅이 그 땅이다. 위치만 바뀌어있을 뿐 여전한 그 땅이다.

역사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어제와 오늘 별다른 변화는 없지만 한참 지난 뒤에 보면 엄청난 제도적 경제적 사회적 변화가 지난 뒤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사람일이라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과거의 사람이나 오늘날의 사람이나 별반 다를 것 없다.

PS>
1. 글이 너무 길어졌다. 글 줄이는 것도 능력이라고 위에 열거한 콘텍스트 관련 내용을 빼려다 아쉽기도 해서 집어넣었다. 그래서 글이 지루한 티가 난다. 그럼에도 다시 간략히 이 책 '조선의 힘'에 대한 감상을 적어본다.

이 책은 조선이라는 텍스트를 가리키는 몇가지 콘텍스트를 이야기한다. 그 첫번째가 문치주의이며 다음이 실록, 그리고 다음이 법제화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그 다음의 대동법이나 성리학까지 모두 조선을 이루는 제도와 관련되어 있다. 마지막에 단종을 내세우며 역사바로 세우기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세종이 문치주의를 이상향으로 국가 건설에 시동을 걸었지만 그 문치주의를 이어받을 문종과 단종이 왕이 되고 얼마 안되어 죽게된다. 개인적으로 문종의 이른 죽음은 조선의 방향을 크게 틀게 되는 요인으로 생각하고 있지만(문종은 자신의 이상국을 실현하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책을 보았는가. 모든 지식을 익히고 그래서 책을 덮은 그 순간 그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쨌든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함으로써 조선은 이성계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리셋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조선의 제도사와 끝까지 맞물려있다. 또한 저자(오항녕)가 주장하는 콘텍스트가 다른 이(이덕일)의 콘텍스트와 어떻게 다른지 예전 한겨례에서 설전했던 글이 부록같이 포함되어 있다. 노론사관과 관련한 이야기인데 몇가지 사안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흥미롭다.

개혁이란 것은 꽤 흥미로운 것이다. 훈구파가 여러 사화를 통해 그 얼마나 많은 사림파들의 피를 흘리게하였는가. 수많은 사림파들의 죽음에도 결국 사림들은 정치적 승리를 이끈다. 숙종 때에 사림파 서인의 노론이 결국은 가장 꼭대기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그 사림들을 죽였던 훈구파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갔는가? 결국은 시간이 흘러가며 훈구파도 사림파화 되어 간 것이다. 훈구들도 시간이 흘러가며 사림화가 되어 갔지만 그 전에는 훈구파에게 사림파는 숙적이었다. 훈구파들은 운명을 이겨 보려 했던 것. 나이를 못속인다고 하지만 역사에서는 시간을 이길 수는 없다. 개혁이란 그 시간이 되기 이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이뤄내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이 개혁이란 것도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안에선 또 다르게 읽힌다.

2.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성삼문을 비롯한 단종 복위파들을 죽음으로 이르게 만들었다. 단종 복위파의 가족들 또한 죽음을 당했는데 세조는 그들의 아내와 딸들만은 노비로 만들어 다른 공신들에게 성노리개로 주었다. 성삼문의 아내와 딸 또한 마찬가지로 이름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다른 공신들의 성노리개로 주었다 한다. 이 내용을 읽었을때 나에게는 꽤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래서 세조가 더 재수없는 왕으로 문종과 단종은 자신의 능력을 펴보지도 못한 비운의 왕으로 기억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 - 2012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한달전쯤에 극장에서 2012를 보았는데, 그날 대충 블로그에 감상을 적었었다. 우선 뼈대만 적어놓고 수정하려 하였는데, 그 뒤 손도 안대고 있다 어제 아바타 리뷰 올려놓는김에 이것도 그냥 올려본다. 한달전에 봤지만 왠지 까마득한 이 느낌...2012는 좀 불편하게 봤다. 자리가 불편했다기 보다는 내용이 좀 불편했다...그래도 몰아치는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웃더라. 이거 걸작인데 하며...

            

2012를 보고 왔다. 한마디로 지구가 부글부글 끓어 리셋되어버린다는 내용. 리셋되는 만큼 CG의 영향은 거룩하다. 요즘 할리우드 대작 영화를 보면 돈 값은 하는 듯 하다. 내용이야 어떻든 러닝타임이 다들 길어 극장안에서 좀 더 오래 뻐딜 수 있게 되었다. 영화속 격정이 한차례 지나가면 따땃하니 잠이 솔솔오면서 몸이 나긋해진다. 등과 맞닿아 있는 진동의자가 나긋한 몸에 주기적으로 안마도 해주고...

나갈 때쯤 교훈도 하나 얻을 수 있다. 지구는 리셋되도 쪼다(등신, 혹은 루저)같은 놈들은 여전히 박멸되지 않고 쪼다짓 한다는 것을... 또 하나, 같은 과학자라도 정치가와 연계되어있는 과학자는 살더라는. 뭐 이렇게는 적었지만 단편적인 것일뿐...

소니 픽쳐스에서 제작해서 그런지 그놈의 바이오 제품이 등장하는데, 기묘한것이 영화상에서 노트북이나 모니터 화면을 보는 내용에서는 나는 무의식중으로 브랜드를 확인하고 있었다. 또 SO*Y인가? 혹은 또 V*IO하며...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게임을 보고 있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는데에 있다. 비행기나 자동차가 장애물(무너져가는 빌딩들, 파손되어 있는 자동차들, 도망치는 사람들, 화산재 등등...)을 피하는 장면은 격한 역정(땅이 솟거나 꺼지는 와중...)속에서 2D 비행기 슈팅 게임을 보는 듯 했다. 또 다양한 탈것들도 마련되어 있다. 비행기도 몰다보면 업그레이드도 되고, 암튼 착실히 득템해야 게임의 최종판까지 갈 수 있는 확률이 커지게 되는 구조이다. 주위의 NPC들과 가급적 많은 대화를 해보고 중요한 정보는 항시 체크. 그래야만 필수 아이템을 얻든지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특히 맵은 필수로 챙겨야함.

영화는 사실상 글로벌 경제의 위기를 말 그대로 '글로벌'의 물리적 위기로 치환해서 보여준 듯. 심화된 양극화의 끝을 말이다. 궁금한 것은 'ship'에 탄 하급 기술자들은 계속 하급 기술자이고, 정치가는 여전히 정치가이고, (아랍)왕자나 (영국)여왕은 계속해 초지배계층일까? 객관적 잣대로 보면 피라미드 위로 갈수록 위의 계층은 대단히 생산성이 낮게 보이던데...화폐 가치는 이미 제로인 상태일테고...계급화라는 질서를 정리하는 몫은 살아남은 정치가의 숙명일까?

극장을 나오면서 뒷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또 영화속 'ship'이 우주를 향해 나아갔다면 아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처럼 이야기의 구조가 흘러가게 되지는 않을까하는...

암튼, 뒷생각만 가득하니 머리에 이고 극장을 빠져 나왔다.

"뭔 놈의 대사들이 그리 긴지...." <-- 잘 봐놓고...딴 소리...


PS> 근데 마야인들의 정체는 도대체 뭐야? 얘네들 무서...예전에는 해리슨포드가 외계인(크리스탈 해골과 관련...)의 자취를 추적하게 만들더니, 이번엔 지구의 롤러코스터화를 예견하고...

얼마나 대단하길래 수천년전에 벌써 21세기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위해 떡밥들을 그리 뿌려댔는지...

대단 대단... 남은 떡밥 또 없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