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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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 한줄기 새지 않는 캄캄한 밤을 묘사하는 데에는 글로 나타내는 것이 최적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다거나 손짓, 발짓해가며 밤을 표현하는 데에는 제약이 따른다. 어둠을 표현하기로는 글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 단어의 궤적으로 어둠 안을 비춰가며 샅샅이 훑어내기에 그렇다. 빛도 색깔도 형체도 무엇 하나 분간할 수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은 에두르는 언어 묘사로 충만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글이라는 것은 결국 작가가 지닌 단어의 나열이다. 즉 단어야말로 작가가 고심하여 고른, 최전선에 투입되는 무기이다. 종종 강력한 단어가 장착된 책을 만나면 뭔가를 발굴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시 말해 '헤르타 뮐러'의 「마음짐승」은 글보다는 문장, 문장보다는 언어조각(=단어)에 힘을 쏟아내는 책이다.

  작가는 독재시대라는 어둠을 나른하면서도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그럼에도 이야기라는 통으로 읽었다기보다는 언어의 조각 엮음으로 읽었다. '헤르타 뮐러'는 자신이 겪었던 어둠의 실체를 보이기 위해, 어둠안에 퍼져있는 공포의 냄새를 알리기 위해 보편적 언어에 숨을 불어넣어 자신만의 언어조각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의 조각 조각을 엮은 글이
「마음짐승」이고
「숨그네」이다(물론 그녀의 다른 작품도 그럴 것이다). 「숨그네」는 몇 달 전에 읽었고, 그녀의 다른 작품들은 읽어보질 않았다.
 

'마음짐승' 첫 페이지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져, 에드가가 말했다."
<p. 7>
그리고 글의 끝, 마지막 페이지의 끝 문장은 이렇게 맺는다.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져, 에드가가 말했다."
<p. 309>
 
  마치 고리처럼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을 읽고 처음으로 되돌아가 또 한번 읽었다. 다시 읽어야만 첫 페이지의 첫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 처음 읽을때에는 무슨 의미인지 새길 필요없이 지나쳤지만, 다시 읽어보니 확연히 작가의 심정이 들어온다.
머릿속에 풀이 자란다. 말을 하면 풀이 잘린다. 침묵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제멋대로 두번째, 세번째 풀이 계속 자란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운이 좋다.
<p. 8>
  여기에서 풀이란 누구나 자유롭게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나 사상이다. 생각을 한다는 것을 무성히 자라나는 풀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말을 하면 김매는 것이고, 누군가 사상을 통제하면 그런 풀들이 무참히 짓밣힌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이 의미심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운이 좋다." 이 의미는 자신이 받은 죽음의 번호를 내팽겨쳤다는 뜻이다. 운좋게 망명함으로써 말이다. 그럼에도 지난 과거의 일을 함부로 떠들수 없음을 은연히 내비친다. 그래서 '헤르타 뮐러'는 머릿속 김을 매기 위해 이 소설을 썼나 보다.

  다시 읽음으로써 미안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다시 한번 고통을 받는다. 몇몇은 죽
음을 향해, 몇몇은 망명을 향해 내달린다. 다시 읽어낸 문장 속에선 죽음이, 새로운 삶이 중요하지 않았다. 한 문장 한 문장 안에 들어있는 응축된 감정, 싸늘한 공간, 생생한 인물이 중요했다. 난 그녀가 이 소설을 쓰면서 공포스러웠던 당시 상황에 몸을 움찔거렸다기보다는 아찔한 추억을 더듬어 내려오며 주변 인물들이 그리워 눈물지었을 거로 생각한다.

  「마음짐승」안에 묘사된 독재체제가 공포스러웠냐 하면 솔직히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내가 방금 뱉은 '솔직히'라는 단어는 작가의 의도와 상반될 때야만 그 의미가 유효할 것이다. 따라서, 바로 전에 언급한 문장안에서 '솔직히'라는 단어를 지운다. 재차 언급해본다면, 「마음짐승」 안 에 묘사된 독재국가가 공포스러웠냐 하면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체제와 관련하여 공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체제의 치사함과 얍삽함, 그리고 더러움만을 내비친다. 치사한 놈들이 조종하는 사회를 담담히 써 내려갈 뿐이며, 주인공은 말려 죽이려드는 통제에 순순히 따르지 않을 뿐이다. 기숙사 동료 롤라가 자살하자 국가는 죽은 이의 당원 자격을 박탈하였고,  더불어 대학에서도 제적시켰다. 이 얼마나 치사한 짓인가. 롤라는 성폭행 당하였는데도 말이다. 산 자도 죽은 자도 도구일 뿐. 이런 세상은 공포스러운 세상이 아니라 더럽고 치사한 세상이다. 공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국가 시스템이 사적인 부분을 침범하면서까지 권한을 행사하는 더럽고 치사한 세상 말이다. 한마디로 사적 생활은 없는 세상. 언어유희를 부리자면 정말 '투명한 세상'인 것이다.

  공포스러운 세상은 동시다발적 죽음이 만연한 세상이다. 혐오와 증오의 세계는 주위 사람들의 순차적 죽음이 대기하고 있는 세상이다. 죽음이 누적되어가듯이, 감정의 찌꺼기 또한 가슴 한 켠에 응어리지며 쌓여만 간다. 결국 살아남은 자는 시대를 기억하고, 그 사람들 중 누구는 당시대 사람들의 숨소리를 기록한다. 숨멎음까지도. 이 슬픈 기록은 작가 마음속 짐승을 해소시키려는 작용일 수 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마음속에서 짐승이 자라고 있다는 그 절묘한 표현은 독재시대 누구나 예외일 수 없는 답답하지만 슬픈 침묵의 시대를 대표한다. 속에선 짐승이 울부 짖지만 겉으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일상을 보내야만 하는 침묵과 무덤덤의 시대.

           
<표지를 벗긴 책이 예뻐서 사진을 찍어봤음...>

  작가는 침묵의 시대를 언어의 미끈거림과 아름다움으로 포장한다. 역설적이다. 하지만 침묵을 강요 당할 수록 생각은 복잡해진다. 이 모든 것은 작가의 심리적으로 복잡했던 경험과 관계있다. 스스로에게 무수히 많은 말을 하였지만 밖으로 내뱉는 말은 몇 없다. 그래서 소설「마음짐승」에서는 대화는 있지만 대화체로 표현하지 않은 듯 하다. 그러니까 큰 따옴표가 없다. 또 생각을 나타내는 작은 따옴표도 없다. 대화와 생각 모두 같은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이 모든것은 하나의 문장안에 고스란히 숨겨져있다. 읽다보면 대화이고 생각이다. 독재시대를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중인 듯하다.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최소한의 챕터를 구분하는 숫자 표시마저 없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통짜로 하나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모양새다. 마치 날짜 없는 일기 모음과 같다. 그만큼 소설에서 벗어나 사실적 글쓰기로 보이지만 표현의 유려함으로 인해 사건의 객관적 진술보다는 주관적 색체가 강하다. 그만큼 사물을, 사건을, 인물을 보는 콘트라스트(대비)의 차이가 나타난다. 사실과 은유가 섞여있어 주인공은 마음에 강력한 지배를 받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비관적 삶과 그에 대한 저항과 순응이 카드패 섞여 있듯이 교차되어 진행된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마음짐승이 커 나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마음짐승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콘트라스트이다. 나를 기준으로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 그 콘트라스트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마음속에서 키우는 짐승도 자라난다. 그럼에도 외부로 분출시킬 수 없음이 답답하고 안타깝다. 내면의 세계에서는 결코 마음짐승을 죽여낼 수 없다. 머릿속에서 자라는 풀과 가슴 언저리에서 자라는 마음짐승, 이 또한 당시에 견뎌내야만 했던 인생의 무게였으리라.

  이 소설을 읽기도 전에 제목만 보고서 떠오른 또 다른 소설이 하나 있다. 국내 소설이다. 바로 윤대녕의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이다. 여기서 '호랑이'는 헤르타 뮐러의 '마음짐승'과 닮아있다. 두 책의 큰 차이점은 윤대녕의 소설 속 주인공은 '호랑이'를 낚기 위해 낚시질을 하지만, 헤르타 뮐러는 아예 망명의 이름으로 자신의 세계를 떠난다. 시대가 두 소설 속 주인공을 나락으로 몬 것은 분명하지만 윤대녕의 주인공은 여전히 공간 속을 활보하며 (마지막엔 제주도라는 공간에서) 인간관계를 통해 내면에 입은 상처를 어느 순간 치유하지만, 헤르타 뮐러의 주인공은 망명이라는 수동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일탈한다. 따라서 상처는 여전히 내면에 남아 있고, 사실상 극복하기엔 벽이 너무 높다. 작가의 말대로 자신은 운이 좋았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광고와는 달리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정말로 시대의 공포가 만였했을 망정 헤르타 뮐러는 자신의 언어로 중화시켰기 때문일 듯. 지금은 작가에게 한낱 기억 일부로써, 추억의 단편으로써 남아 있을 수 있겠지만, 마음짐승이 할퀸 가슴의 상처는 그녀를 때때로 당시 독재시대로 언제든지 불러들일 수 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도 그녀는 운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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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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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주인공은 '나', 계급은 대위. 다른 이들은 '이 대위'로 부른다. 가진급 상태. 소속은 육군본부 정치졍보국. 상관은 육본 파견대 정치정보국장을 맡고 있는 '장 대령'.

6.25.전쟁이 터지고 같은 해 9월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 그 기세를 타고 내륙으로 뚫고 들어가 즉시 서울 점령, 그리고 10월 둘째 주, 평양을 탈환한 상황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장 대령이 정보를 가져왔다. 북한군이 평양을 빠져 나가면서 목사 열네 명 중 열두 명을 총살하고 단 두 명만을 살려 보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국제 뉴스에 올릴 좋은 선전 자료가 된다는 이유로 주인공인 '나'에게 뒷조사를 시킨다. 주인공인 '나', 이 대위는 주변을 탐문하면서 조사를 시작한다. 신을 믿으면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살아나온 두 목사는 어떤 사람들일까?

굉장한 정보를 얻었다. 믿을 수 없는 정보. 순교자로 이름을 올린 12명의 목사가 죽음을 목전에 둔 그 상황에서 목사들은 영혼의 지도자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섰다는 정보. 이 대위는 사건의 바닥에 접근할수록 사건의 정황을 뒤집을 수도 있음을 알아챈다.

2.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려움에 처하면 상황 반전을 모색한다. 그런데 어떤 방법도 찾을 수 없을 때 기적을 갈구한다. 소설 「순교자」는 6.25 전쟁이라는 정치적, 군사적 대립속에서 방황하는 개인과 군중을 그린다. 가장 큰 뼈대는 기적적으로 공산당원에게서 살아난 목사가 어지러운 사회속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 아니 어떻게 해석 되어야만 하는지를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전광석화처럼 그려나간다. 소설의 배경은 6.25전쟁 당시이지만 실은 누가 점령하든 점령군에게 환영 일색 박수 갈채를 보내야하는 일률적인 해석만을 강요하는 편향적인 사회이다.

3. 대부분의 목사들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신의 개입'을 바랬다. '신의 개입'은 기적에 대한 직접 진술이다. 신의 손길이 처형장에 미치기를 원했다. 하지만 신이 강림했다는 어떤 낌새도 없었다. 그 순간 목사들은 자신의 알량한 목숨이 신의 것이라고 주일마다 내뱉었던 그 맹세에 허망함을 느꼈을 터. 신이 배반했는지 신을 배신했는지는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죽어가는 그 순간에 신을 더 이상 부르짖지 않았다는 그 사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신을 향한 기도는 공산당들을 향한 애걸로 바뀐다. 더불어 신에 대한 항명으로 침묵하는 목사마저 생긴다.

공산당원에게 애걸하는 그 순간 목사들이 믿고 섬기는 마음속 신의 자리에서 신은 사라지고 총 든 공산당원이 대신 들어선다. 하지만 단 한 명의 목사만이 총 든 자를 짐승의 위치에 놓고 호통을 친다. 총구가 어딜 향해 있건 상관치 않았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들에게 애원하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신의 자리는 신만이 있을 수 있다. 목사에게 호통을 받은 총을 든 공산당원은 목숨을 애걸한 다른 목사들과는 달리 이 목사의 저항에 흥미를 느끼고 목숨을 살려 준다. 미쳐버린 목사도 살려준다. 정말 신의 개입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끝까지 신을 믿은 자는 흔히들 말하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4. 목숨을 잃은 자와 목숨을 구한 자 사이에서 신의 논리를 읽을 순 없다. 아니 신이 애초에 논리를 가질 필요나 있을까. 반대로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은 논리가 있다. 이제 그 논리 싸움이 후속 이야기로 펼쳐진다. 인간의 논리, 그럴 듯 하지만 결국엔 이득을 많이 가져가는 계산법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는 것, 인간사에서 보편적이고 최상인 논리이다.

5. 평양 신도들은 당연하게도 죽은 열두 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높여 부르기 시작한다. 다만 죽은 목사들이 마지막 자리에서 행했던 믿음에 대한 부정 행위는 숨겨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살아 돌아온 목사는 걸리적거린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말의 의구심은 없다. 어떻게 선과 악으로 뚜렷이 나눠진 세상에서 복잡다단한 진실이 덩굴처럼 얽혀있단 말인가. 공산당에게 죽은 목사와 그들 손에 살아 돌아온 목사, 이 둘 중 누가 더 신을 진정으로 섬겼다고 보이는가. 누가 더 좋은 목사인가. 답은 뻔하다.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믿지 않겠는가.

6. 군중과 종교, 거기에 이들의 심리를 전쟁에 이용하고자 했던 군대. 각자의 위치에서 최상의 답만을 본다. 인간의 역사를 발전시켜온 동인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이 가진 의심이다. 의심속에는 선과 악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 선한 의심이나 악한 의심 그 자체가 없다는 의미이다. 의심 그 자체로는 중립이다. 의심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다. 따라서 의심을 어떻게 일소시키는지도 중요하다. (소설속에서 얘기하는) 관찰만 하는 신의 논리에서 보면 최상의 의심 해소는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혹은 시간속에 묻혀두는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난다. 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동일시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논리에서는 어떻게 의심을 해소하는가. 그것은 바로 정치적 공격과 방어 사이에서 맺은 암묵적인 동의이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7. 이 소설의 특징은 결말이라는 부분이 없다는 점이다. 전쟁은 진행중이고 또 급격하게 변해가는 중이다. 다시말해 잠시 전쟁의 포연이 살짝 걷히고 난 뒤, 평양에서 목사들을 총살시키는 이런 사건이 있었고, 다시금 북한군과 중공군이 합세하여 남하하자 목사들의 죽음은 수많은 죽음 속에 묻힌 것이다. 수많은 죽음. 그렇다. 당시 서부전선 또한 여전히 이상 없을 뿐.

8. 앞서 결말이 없다고 했는데, 사실 내가 읽은 이 소설의 결말은 다시금 앞을 가리킨다. 그것은 장대령의 죽음이다. 평양을 탈출한 주인공 '나'는 장대령의 부음을 장대령 친구인, 예전에 '군목(군대목사)'이었던 '고 목사'에게 듣는다. 장 대령의 죽음을 알리는 군대에서 보낸 편지 한 통. 그 속엔 장 대령이 첩보 활동을 하다 장렬히 산화하였다고 쓰여있다. 이렇게 또 인간사에서 또 한 명의 영웅(혹은 순교자)을 알린다.

9. 연극 같은 소설.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에 힘들이 실려있다. 마치 서로 자신의 논리가 맞다는 식으로, 무대 밖 관객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관객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들의 논리는 탄력을 얻는다. 물론 끄덕이는 관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의 논리를 선택한 관객의 숫자만 늘어갈 뿐 진실 규명과는 관계 없다.

이 소설이 왜 연극 같을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등장인물들의 대사에 힘이 들어간 소설이기도 하거니와, 소설 속 배경이 평양임에도 북한 사투리, 더 엄밀히 말한다면 평양 사투리가 울리지 않는다는 점이 흡사 외국 작품의 연극을 국내의 연기자들이 우리말로써 공연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의 마지막 몇 장이 할당된 해설을 읽어보면 된다.
『「순교자」가 'The Martyred'라는 제목으로 뉴욕에서 출판되어 나온 것은 1964년이다.』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출간이, 그것도(물론 당연하게도) 영문으로 먼저 나왔단다. 6.25. 전쟁이 끝난지 10년 조금 지나서 영문으로 책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영문으로 이 책을 냈고, 다시 역자(도정일)가 한글로 번역을 하여 이렇게 번역서를 낸 것이다. 다시금 번역 재판을 냈음에도 북한 사투리를 살리지 못한 것이 좀 아쉬운 부분이다. 북한(평양) 사투리를 어느 정도 살려냈다면 한국 독자들에게 사실적이고 좀 더 실감나는 독서가 되지 않았을까라고 소설 외적인 부분 또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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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00: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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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 The Man from Nowher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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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환상적인 소설 한 편 잘 보았다. 소설이라구? 사실 영화이다. 그럼에도 난 이 영화 「아저씨」를 소설로 읽은 듯한 느낌이다. 영화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점중 하나는 페이지를 넘기는 주체이다. 영화는 영상을 감독의 속도로 넘겨주지만 소설은 내가 직접 나의 속도로 책장을 넘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난 내 의지로 영상을 넘긴듯하다. 속도감이 있고 지루할 틈이 없다. 쉴새없이 넘겨지는 말없이 행해지는 액션들과 주인공인 차태식의 캐릭터에 매료되는 바쁜 와중에도 면면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예상해보기도하고, 악당들을 처치할 정의의 매질을 나름 설정해보기도 하는 등 하나의 거룩한 이야기를 얼음장처럼 굳은 자세로 읽어댔다. 이런 느낌은 도대체 뭔가.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장면마다 혹 옆 사람이 나의 과도한 감정 분출을 느끼지 않았을까 눈치가 보일 정도로 감정 조절이 힘들었다. 물론 나도 옆 사람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해받기도 하였다.  

                   

판타지라는 염료통에 담가놨다 이제 막 건져낸 듯한 느낌. 간만에 말초신경들이 왁자지껄 소통을 해대는 이 느낌. 감독은 어떤 관객 계층을 표적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영화 제목 그대로 '아저씨'계층? 아니면 앞에서 팔랑대는 원빈이라는 조각미남에 빠져 환각으로 초대된 '아가씨'계층? 또 아님 보통의 '아저씨'와 살고 있는 '아줌마'계층? 마지막으로 쇼핑 목록에 '옆집 아저씨'를 올리고 부모에게 졸라댈 '꼬맹이 숙녀' 계층? 물론, 마지막 꼬맹이 숙녀들은 관객의 표적과는 거리가 멀테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이기에.

이 영화는 아저씨든 아줌마든 아가씨든 할 것 없이 나름 각기 속해있는 계층에 맞게 적절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아저씨는 꼬꼬마 시절 꿈속에서나 꾸었을 법한 악당을 완전무결하니 제압해대는 액션과 세상을 이미 관조하고 있는 무표정한 표정에서, 아줌마와 아가씨는 이유 불문, 의미 불명 무조건적인 기사도 정신에 매몰된 한 남자(연하든 연상이든)가 구원하러 와 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에서 판타지를 읽는다. 그러기에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 누구든 현실이 아닌 영상속에서 자신만의 판타지 세계를 구축하느라 정신없을 거라는 생각이다. 다만 피튀기는 영상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건지는 개인차가 분명 있을 것이다.

어렸을 적, 비슷한 전율을 느낀 영화가 있었다. 그것은 '스티븐 시걸' 형님의 「복수무정2」. 지금 보면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겠지만 어린 마음에 주인공인 '스티븐 시걸'이 거대하게 보였다. 마음만 먹으면 어느 누구도 제압할 수 있는, 한 능력하는 능력자. 거기에 액션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고 유유자적 그럼에도 절도있는 강세로 탁탁 쳐내고 꺾어치고 날려버리고 주위에 널려있는 사물을 모두 무기화할 수 있는 무심한 한 남자. 전반적 내용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진지 오래지만 그 액션만은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아저씨」에서 원빈의 액션도 그렇다. 세상을 지배하는 시스템과는 동떨어져 있으나, 그 시스템을 경멸하며 약자를 괴롭히는 조폭들에겐 일말의 동정심도 소비하지 않는 무심한 표정의 한 남자. 내일이라고는 없고 오직 오늘만을 살고 있는 한 남자. 그리고 세상의 한 쪽 구석에 차려진 전당포를 운영하는 이 남자. 그를 세상안으로, 시스템안으로 불러들인 조폭들은 처절함만이 남게된다.

이 영화는 나에겐 정말 대단한 두 시간여를 보내게 했지만 조금 성에 차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형사들. 영화속 형사들은 80년대. 자신이 곧 법이라는 관념에 파묻혀 자신들도 엑스트라이지만 역시나 엑스트라들을 깔보는 듯하는 촌스런 형사들이다. 나름 간간히 웃음 포인트를 친절하게 알려주지만 영화속 잔당들이나 처리해야할 촌스런 운명을 거룩한 국가적 사명으로 인식한다. 대표적 예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맡은 박두만 형사. 형사에겐 시민은 없고 (국가)기관만 담고있는 전형적 80년대스런 기풍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영화의 흐름을 자신들이 끌어가려고 부던히 노력한다. 물론 이 노력은 시나리오상에서 이미 약속된 노력이지만.

악당은 90년대. 어떻게 보면 거대 조폭 집단같지만 다른쪽에서 보면 삼류 양아치들 모임. 그래서 원빈이 맡은  누구나의 아저씨 '차태식'의 세련됨과는 균형이 맞질 않는다. 잔혹성으로 '차태식'과 보조를 맞추려하지만 그래도 영화가 진행할수록 그들 또한 촌스러움이 물씬 풍긴다. 따라서 감독이 '차태식'과 위상은 전혀 다르지만 무게감은 유사한 태국 배우 '타나용 윙트라쿨'을 섭외하여 '람로완'역을 맡긴 것에는 영화의 균형미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시나리오에서도 차태식(원빈)과 람로완(타나용)의 근접 격투는 영화의 질을 한 층 높였다. 

                   

람로완과 차태식의 결투. 가장 눈길을 끄는 장면이다. 감독 또한 공을 많이 들였으리라. 영화 전체적으로 차태식은 감정에 이끌려 세상속으로 나오고 감정에 이끌려 사건 해결사 역할을 하지만, 장면 장면마다 그는 감정을 절제하고 있다. 감정의 절제는 단순하게도 임무로 환원한다. 스스로 꼬마 아가씨 '정소미'를 구하기 위한 임무를 설정한 뒤 몇년만에 가장 의무적인 오늘을 보내려 한다. 그리고 그의 두뇌 회전은 빨라진다. 따라서 어떤 의미로 보면 차태식은 여전히 감정에 젖어있지 않다. 그럼에도 람로완과 대결할때 차태식이 이빨로 람로완의 손등을 물고 아마도 뼈를 끊어놨다든지 신경을 끊어놨다든지 한 그 행위에선 가장 격정적 감정이 차태식을 지배하고 있을 때이다. 그리고 이미 싸울 수 없는 지경에 놓인 람로완을 파파파팍... 가슴팍을 칼로 찔렀다 뺐다를 순식간에 여러번 하는 그런 행위야 말로 하나의 감정 주파수만이 최절정을 치는 순간이다. 관객과 배우는 그 주파수로 완벽하니 동조를 이룬다. 오직 이 장면에서만이 장르가 바뀐다. 가장 액션스러운 장면으로 가득하지만 액션에서 드라마로 전환된다. 현란하지만 의미없이 그냥 지나치는 동작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그려지는 여운을 불러온다. 따라서 잠시나마 '정소미'를 구하기 위한 임무의 경로에서 벗어나 자신과 람로완의 격투의 완성을 매듭짓는 드라마틱한 미학적 장면으로 잔상을 남긴다. 잔인한 듯 보이지만 잔인하지 않는, 차태식이 발동한 것이 아니라 람로완이 영화 처음부터 기다려온 복선의 완성이다.

영화 장면들속에서 시종일관 지배했던 람로완의 강렬한 눈빛이 차태식에 의해 죽어가면서 자신의 재능이 차태식의 재능에 미치지 못함을 억울하다는 듯 이럴리 없다는 듯이, 눈동자가 미묘하게 풀려나가는 그 순간 차태식은 보너스 스테이지를 끝내고 다시 영화로 복귀한다. 아마 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들까지도 매료됐으리라. 난 이 장면에서 판타지의 최절정, 마지막 전율을 느꼈다.

영화속에서 나에게 특이하게 인식된 장면이 있다. 원빈이 머리깎는 장면인데, 원빈은 세상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대화도 없고 소통도 없는 부류이다. 남의 이목을 끌려고도 하지 않고 가급적이 아니라 정말 조용조용하게 산다. 하지만 전당포를 통해 여전히 세상과 경제적 셈을 하며 먹거리를 해결한다. 영화속 등장 인물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 인물이지만 유독 관객에게는 잘 보이려 애쓴다. 뭐, 감독의 의도이겠지만, 그리고 여성 관객을 향한 배려이겠지만, 그래도 영화속 인물이 유독 신경쓰는 것은 영화 밖 관객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굉장히 스타일리쉬하는데 80년대, 90년대 홍콩 느와르 영화속 배우들이 창조한 트렌치 코트 스타일과는 달리 영화속 공간이 21세기 공간임을 관객들에게 계속 어필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솔직히 영화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시대적 상징들이 절묘하게 섞여져 왠지 이것저것을 가져다 쓴 잡스런 영상을 풍기기에 그렇다.

꼬마에게도 아저씨, 양아치에게도 아저씨, 누구에게나 아저씨로 불리지만 아저씨는 정체성의 의도적 봉인이다. 세상속 드럽고 걸죽한 사건을 위한 잠복이다. 영화속에서 왜 정체성이 봉인이 되어야하는지 과거 경로만 훑어볼 뿐이다. 특수부대 요원에서 지저분한 도시 뒷골목의 전당포 주인으로의 변신은 세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자의적 몸부림이지만 온갖 세상 물품을 만져야만 하는 그의 직업 특성상, 특히 뒷골목의 전당포는 더더욱, 어쩔수 없이 사건을 불러들이는 의도된 위치선점이다. 따라서 기다렸다 치고 다시 빠지는 순환적인 흐름을 가지는 하나의 시리즈로 진화할 수 있다고도 생각된다. 이 부분이 내가 가장 소설스럽게 읽혀졌던 부분이다. 그럼에도 감독이 차태식을 경찰의 손에 넘기는 것으로 시나리오를 끌고 갔다는 것은 조금 아쉽다. 왜냐하면 형사는 사건의 마무리를 짓는 요소가 아니라 사건 속 잔당 처리이며 불합리한 영화의 논리를 애매모하게라도 마무리 지으며 다음 스테이지로 인도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차태식에겐 전직 요원이었던 동료도 있지 않은가. 이 또한 활용할 수 있는 장치이다. 따라서 일회적인 요소로 끝맺음도 가능하지만 다른 이야기로의 전환도 가능하다. 차태식은 전당포에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누군가 맡긴 어떤 물건에 지저분한 사연이 담겨있기를 기대하며...

그래서 차태식이 내년에 8.15 특사로 풀려나 여전히 그의 판타지 이야기를 진행시켰으면 좋겠다.

PS>
- 정말 오랜만에 두 번 보고 싶은 한국 영화를 만났다.
- 이 포스팅의 제목 'image turner'는 이야기가 재밌어 계속 다음 장으로 넘겨대는 그런 소설을 뜻하는 'page turner'에 변형을 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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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 The Man from Nowher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관객을 얼어붙게 만든다. 시종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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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전3권 세트 - 한국만화대표선
박흥용 지음 / 바다그림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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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동그란 원과 같은 만화.

희망도 절망도 없는 만화. 그렇게 열려있는 만화이다.

우리라는 보통내기들은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계속 앞을 보면 나아가려 한다. 세상이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발짝이라도 떼려 노력한다. 하지만 때론 넘어지고 자의든 타의든 뒷걸음질도 쳐보다가 또 운좋게 쓰리 세븐이 나와 순식간에 휙 앞으로 점프도 한다. 그럼에도 한 발 한 발 떼기가 쉽지많은 않다. 같은 평지라도 우리는 사실 등반하는 기분을 느끼며 인생이라는 끝없는 오르막을 넘으려 한다. 중력을 이겨보려 하지만 중력을 이겨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근력을 키운다. 그렇게 나이만 먹어간다.

어느 누구는 이 세상이 원이라는 것을 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평지가 아니라 뭔가 새롭게 바꿀 수 있고, 다시 부활 할 수 있는 동그란 세상이란 것을 안다. 그렇기에 뭔가를 시도해본다. 삶의 근력을 쓰는 순간 그 누군가는 동그란 세상에서 한 바퀴, 두 바퀴 이렇게 셈을 한다. 비록 쳇바퀴 인생이지만 매번 같은 원이 아님을 안다. 그렇게 깨우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항상 긴장한다. 세상의 조그마한 변화에도 반응하려 노력한다. 힘이 있으면 바꾸려고도 시도한다.

소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원 밖에 있다. 세상을 관조한다. 자신이 원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의 눈은 원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원 안에 뛰어들기도 하고 원 밖으로 뛰쳐 나가기도 한다. 순전 제 맘이다. 그럼에도 이런 소수의 사람은 끝없는 평면의 세상에서, 회전하고 있는 원안의 세상에서 한 사람 한 사람 건져낼 능력이 있다. 건져낼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 얼마되지 않은 이 사람들의 숙명이다.


2. 하나 더하기 하나는 항상 둘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 계산일 뿐이고 세상은 그리 똑부러지지 않는다. 더구나 혼란스럽기까지 하다면 가장 위에 있는 놈 말씀이 곧 법이다. 따라서 혼란스러운 세상일수록 법을 지배하기 위해 아우성을 친다. 세상을 가질 필요도 없다. 법과 제도만 자신의 수중에 들어오면 된다. 그래서 잘난 세상일 수록 법과 제도를 어느 한 군데에서 독점하지 못하도록 이중, 삼중의 제어장치를 마련해 놓는다.

못난 세상도 이중, 삼중의 제어장치를 마련해 놓을 수 있겠지만, 조금 더 수고스러운 작업을 해야한다. 몰래 개구멍 하나 만들어 놓는 것이 그 수고스러운 작업이다. 이 개구멍은 눈에 잘 안 뜨인다(눈에 뜨이게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경우 사람들 눈을 감게 만든다). 개구멍을 지나려면 온갖 개떡같은 똥폼을 잡아야 하지만 일단 통과하면 허세는 작살이다. 이때 보인 허세를 동경한다면 개떡같은 놈이다. 아니 개똥이다. 그런 개똥들의 질퍽이는 똥폼을 봐야한다.

3. 주인공 견주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그는 반쪽 인간이다. 나머지 절반을 취할 수 있다. 견주는 처음엔 타의로 후엔 스스로 개새끼(견자)가 되어 세상의 똥폼들을 보고 다닌다. 성장하면서 그가 깨닫는 철학은 '개새끼이지만 개구멍으로는 들락거리지 않는다.'쯤?
 
견자도 인간이다. 욕심이 있고 욕정이 있고 욕구가 있다. 욕심과는 싸우고 욕정은 경계하며 욕구는 추구한다. 이것이 만화 속에 드리워진 작가의 철학이다. 견자의 속내에 자리잡은 욕심은 '이몽학'(출세욕)이고 욕정은 '백지'(여자)이며 욕구는 '황정학'(스승)이다. 견자가 절반짜리 인간이기에 그는 나머지 비어있는 반쪽을 채워야 한다. 그가 선택한 반쪼가리는 이몽학도 백지도 아니다. 눈먼 장님이자 침술과 칼잡이에 능숙한 역시나 반쪼가리 인생을 걷고있는 스승 황정학이다.

황정학이 양의 인간이면 견자는 음의 인간이다. 황정학은 양반이지만 장님으로 태어나 역시나 3류 인생을 맛보지만 후에는 즐기는 인물(그래서 양의 인간)이고 견자는 멀쩡한 신체를 가진 댕기동자이지만 서출이기에 3류 인생을 예약한 인물(그래서 음의 인간)이다. 하지만 개떡같은 세상엔 단순한 논리마저 먹히지 않는다. 쩜오 더하기 쩜오는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쩜오이다. 정확히는 쩜오들이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쩜오는 0.5를 가리킴. 쩜오를 자칭하는 대표적 인물로 박명수. 요즘엔 쩜이던가?)

4. 개새끼로 불렸을 당시 견자는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 스승 황정학을 만나기 전까지는. 황정학을 만나면서 가슴속 언저리에서 뜨거움을 느꼈고 백지를 만나면서 차가워야함을 배웠다. 그는 황정학을 통해 무한 평면일 것 같은 세상이 둥그런 원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결국엔 원 밖에도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결국 개새끼가 금강산 호랑이로 탈바꿈을 한다. 물론 자칭 개쌔기는 여전하지만. 견자의 라이벌 이몽학은 원이라는 세상에서 점프만 하면 새로운 위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인물이다. 견자는 스승을 통해 원 밖에서 세상을 볼 줄 아는 식견을 늘렸다. 따라서 이몽학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건낸 동맹을 무시한다. 견자가 보기엔 이몽학이 만들려는 세상 역시 여전히 똑같은 원 안의 쳇바퀴 세상에 불과했을 수 있다.

5. 결말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열린 결말이다. 견자는 세상을 관조한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 뛰어들지 어떨지 모른다. 따라서 닮고 싶어하는 황정학을 통해 견자의 삶을 유추해 볼 수 밖에 없다. 또 사실적으로 유추하려면 역사를 끌어오면 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후 세상의 주인이 바뀌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아무튼 이몽학은 그렇게 사라졌을 것이다.


6. 이 책을 읽고난 후에 내린 결론. 그것은 우연성에 녹아있는 필연성이다. 이 만화를 읽다가 떠오른 만화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히카루의 바둑(or 고스트 바둑왕)」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과 「히카루의 바둑」은 많이 닮아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표현한 작품으로 말이다. 전지적 작가의 시점, 혹은 현실계에서 신의 관점으로 바라봐지게 된다. 스승 황정학과  제자 견주의 만남은 우연이지만, 그 둘의 인연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만화속에서 작가가 보인다. '신의 한 수'는 시대적 공간과 시간, 그리고 두 인물이 처한 상황의 오묘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히카루의 바둑」을 간단히 소개해본다.

 히카루라는 소년이 용돈벌이를 위해 할아버지댁을 찾는다. 그 용돈벌이는 다락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오래된 물건을 파는 일. 히카루는 우연히 오래된 바둑판을 보게 되고, 바둑판 위에 쌓여있는 한 줌의 먼지를 털자마자 헤이안 시대때 군주의 바둑 스승이었던 '사이'의 혼령을 끌어낸다. 혼령은 히카루의 정신속으로 녹아들고, 바둑의 'ㅂ'자도 모르는 히카루는 '사이'의 도움으로 신예 바둑 기사로 이름을 날리며 성장한다. '사이'의 바둑과 히카루 자신의 바둑 사이에서 점차 성장하게 된 히카루는 이름있는 바둑 기사들의 관심을 얻게 되고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정점에 와서 바둑 혼령인 '사이'는 자신이 왜 현생에 나와 히카루를 성장시키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는 현생에 왜 불려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이'는 자신이 히카루를 깨닫게 하기 위한 신의 장치임을 알게 되고 히카루가 성장하면 할 수록 '사이'는 점점 희미해짐을 느껴간다. '사이'가 말없이 갑자기 사라진 뒤 '히카루'는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였던 '사이'가 보고 싶어 미친듯이 '사이'를 찾으며 울부짖는데...

'사이'는 사라지면서 그 자신도 깨닫게 된다. 자신은 히카루를 위한 '신의 한 수'이며 또한 옜적 누군가는 '사이'를 위한 '신의 한 수'였으리라는 것을. 우연성안에 포개져있는 필연성. 후에 히카루도 이 이치를 깨닫고 '사이'가 사라진 후 내던졌던 바둑알을 다시 잡게된다는 슬프지만 해피한 내용...

「히카루의 바둑」에서는 히카루가 구름이며, 히카루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에도 시대의 혼령인 '사이'는 바로 달을 가리킨다. 결국 이 만화 또한 히카루라는 구름이 달을 벗어나는 그 시점이 만화의 최고 정점이 된다. 물론 두 만화가 조금 다르다면 '사이'도 점차 철학적으로 완성되어져간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보다는 좀 더 상호적이다. '사이'는 이를 깨닫기 위해 천년을 기다리긴 했지만.

7.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조금 불편했던 것은 바로 만화속 이야기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작가의 손바닥위에서 머리 굴리고 있는, 그리고 교훈 한 조각 얻으려고 하는 내가 비쳤기 때문이다. 이 완벽한 인연, 만남을 어떻게 생각해야하는지. 만화속 세상은 개새끼(견주) 중심으로 돈다는 점. 모든 설정이 견주를 키우기 위한 비합리적 장치들이라는 것이 약간은 오글거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무리 만화라지만 만화를 그리고 있는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신의 한 수'는 '작가의 한 수'로 대치된다. 아무튼 짧은 이야기임에도 매우 정밀하며 압축적으로 표현해낸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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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sseau 2010-08-19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읽고 계시는 책 목록중 '국화와 칼'은 일본질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답니다.

쿼크 2010-08-20 14:41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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