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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 푸른역사 / 199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만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이유가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것처럼 정신병 때문이라면, 아버지 영조는 아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 뒤주에 가두어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정신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자식을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아버지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또한 비행 때문이라면 태종 이방원이 그랬던 것처럼 세자를 폐하여 지방으로 내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사조세자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의문의 출발점이었다.
< 머리말 中>
우리 나라의 역사를 보면 슬픈 역사가 많다. 가끔 그런 역사들을 읽어보면 정말 화딱지가 머리꼭대기에 나앉을 정도로 열을 받기도 한다. 정말 바보같은 사람들의 역사같이도 느껴진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어렸을때부터 영웅들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문화를 다양하게 발전시키고 학문을 수련하는 그런 학자들이 아닌 피바람이 몰아치는 산야에서, 시커먼 광풍이 몰아치고 집어삼킬듯한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에서 그렇게 싸워 승리하고 전사해간 그들이 더 그리운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우리의 역사속의 수많은 난중에서 우리의 역사를 기술한 책들이 모두 소실되어졌다면,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슬픈역사를 먼 과거의 신화마냥 귀로서 들어야만 했다면, 아니 먼 과거의 슬픈역사가 있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다면, 우리는 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까? 아님..우리 역대의 조상들을 더욱 더 빛나게 기리고 있을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비극을 알기에 슬픔을 알기에 우리는 더 강해졌고, 더욱 더 우리 땅과 우리네 사람들에 대해 더 강한 애착을 보여줬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너무 오버해서 극단적으로 몰고가는 시각들도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어찌됐든 우리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우리는 역사를 지켜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사도세자의 고백>>을 보고 또 애꿎은 나의 가슴만 아파왔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이기에..그리고 진실에 어느정도 다가섰다고 느껴졌기에 마음이 애렸다. 이 책이 물론 진정한 진실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이덕일'씨도 어차피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논리는 빈 곳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이 든다. 물론 사소한 반론도 낼 수 없을 정도로(기껏 해보았자..예전에 '한중록'을 읽은 사실뿐 '사도세자'와 '영조', 그리고 '정조'에 대해선 교과서에 배운게 전부다. 그 썩을놈의 '탕평책'--물론 '탕평책을 욕하는 것은 아니다.--뿐이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게 없지만, 이 책은 모르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설득하거나 그러진 않는다. 다만 그때의 정황을 저자의 깔끔한 논리로 풀어보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세자'는 뒤주에 죽었다. 왜 죽었는가..이 단순한 의문이 그 당시의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의 추악한 모든 면들을 보여준다. 노론, 서론, 남인,서인 등등..서로의 당을 못잡아 먹어서 안달난 사람들의 정치..이것이 이면적인 원인으로 보이지만, 결국 조선은 하나의 잘못된 관습으로 문을 닫게 만든것이다. 바로 '씨'다. 왕들의 '씨'. 이 책에서 '삼종의 혈맥'이라는 내용이 책 초반부에 나온다.
삼종이란 영조보다 앞선 효종, 현종, 숙종 세 임금을 뜻하며, 혈맥이란 그 세 임금의 피를 이은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삼종의 혈맥'이라는 말에는 이 세 임금의 왕위 계승이 정당하다는 자기 방어 논리가 담겨 있었다. 이렇듯 왕위 계승에 대한 자기 변명이 필요하다는 것은, 바꿔 말해 효종부터 숙종으로 이어진 왕위 계승이 정당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깔려 있음을 뜻한다.
이런 자기 방어 논리는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 일가의 비운에서 비롯되었다. 원래 인조의 왕위는소현세자가 잇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왕위를 계승한 인물은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었다. 그가 바로 삼종의 혈맥의 시조가 되는 효종이다. ........(중략)...... 조선시대에 맏아들과 둘째 아들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맏형은 둘째 이하에게 거의 아버지와 같은 대접을 받았는데, 이는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종법에 명시된 하나의 성문법이었다....(중략).....
--p. 23--
어차피 조선은 그 탄생자체부터 정당하지 못했으며, 결국 그때 이성계가 뿌린 씨는 조선 500년의 역사내내 조선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게 만드는 그러한 괴물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왕들 옆에서 보좌해주는 그 신하들도 '조선'이라는 같은 배를 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각자 스스로가 '사공'이었다고 생각했었나보다. 이 책을 읽고 내가 더욱 기운이 빠진 것은 그때의 상황이나 지금의 상황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국가엔 '국민'이 있지만, 정치엔 '국민'이 없는 이 상황..
이 책을 읽고 과연 왕들이 국가에 제대로 신경이나 썼었나싶다. 물론 백성에 신경을 쓴 왕들은 어찌보면 이러한 '왕위 계승에 관한 정당성'에서 한결 자유로울 수도 있기에 그만큼 '성군'의 정치를 했다고도 보여진다. 하지만, 자신이 '왕위 계승의 정당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렇다면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단순한 비판자의 성격을 넘어 '적'으로서 혹은 '반란자'로서 규정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슬픈 조선의 역사이다. 그리고 조선의 뿌리이자 조선이 뿌린 씨앗이며, 결국 조선이 걷어들일 '열매'였던 것이다.
이 책을 읽기전에도 가끔 조선은 '정조'이후로 무너졌다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은 '정조'가 마지막 희망이었고, 마지막 기회였다. 만약 '사도세자'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영조가 부렸던 욕심을 줄여 '사도세자'에게 왕권을 넘겼다면, 글쎄..역사는 아무도 모른다. 조선에서 마지막 북벌을 계획했던 '사도세자'가 조선을 또다른 전쟁으로 몰아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엔 가정이 없다. 아무도 모른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외친 '정조'.. 그도 결국 젊은 나이에 스러졌다. 독살설이 가장 대두되고 있지만, 아무튼 이 왕도 자신의 계획을 이룩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그리고 이런 죽음 이면에는 눈을 옆으로 흘기며 비열한 듯 입꼬리를 올리고 기묘한 미소를 지은 자들이 분명이 있다. 조선은 결국..그 앞날을 어쩌면 예견할 수도 있는 대목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칼바람을 물리치며 지켜왔던 종각은 결국 지하에서 수많은 선왕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너져 내리고 있던 것이다.
이 책을 한번쯤은 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이 책을 보면 열을 받게 될 것이다. 모르겠다. 열을 안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마음만은 편치 못할 것이다. 이 책을 보며 덮어버리고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들의 계략이 싫었다. 욕심이 싫었다. 어처구니없는 그들의 실정이 싫었다. 하지만, 그래도 역사는 흐른다. '사도세자'가 죽는 그 순간까지 수없이 많은 덮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접으며, 끝까지 읽었다. 나는 '정조'를 기다렸다. '정조'는 나의 구원군이었다. 하지만, '정조'도 그렇게 가는 것을 보며..마음이 더욱 쓰라려왔다. 어찌보면 나도 똑같을 지도 모른다. '정조의 피의 복수'를 기다렸으니까.. 하지만, 이 책에선 무협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처럼 통쾌하게 나오진 않는다. 왜냐하면..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는 사실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금증이 들었다. 조선은 과연 '왕권이 강한 국가'였나?...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덧붙임>
1. 이 책은 구판인 <푸른역사> 출판사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현재..<휴머니스트>출판사에서 재출간되어 판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