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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화질 세트] 요츠바랑! (전12권)
아즈마 키요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3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아빠 미소를 짓게 하는 힐링 코믹스. 이북으로도 봐도 괜찮게 보이네요.. 보고 싶은 분은 할인할 때 구매해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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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ub(이펍) 제작 테크닉 - 전자책 전문가 이광희에게 배우는
이광희 지음 / 비엘북스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작년 가을 크레마를 예약구매를 통해 들였다. 하지만 불안정한 시스템으로 인해 몇 번의 멘붕을 겪었고, 여러 차례의 펌업을 통해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 불안정한 부분은 극복되었다. 이로 인해 크레마를 바라보는 시각이 꽤 애매하게 되었는데, 일단 좋게 생각하면 이런 신세계가 있냐며 좋게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나쁘게 생각하면 꼴도 보기 싫을 정도까진 아니어도 가끔 짜증을 유발한다. 그래서 좋게 좋게 생각해야한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이북은 아직 요원하다. 컨텐츠는 말할 것도 없고, 얼마 되지 않은 이북도 발로 만든 뷰어기로 인해 100%의 완전한 이북으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종이책의 질감은 느낄 수는 없지만 휴대성과 같은 편리함이 이북을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인데, 종종 읽는 도중 독서의 방해를 받곤 한다. 단순히 가독성의 문제를 넘어서 편리성이라는 장점을 지우고 오히려 불편함을 일부러 심어놓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이북의 또 다른 장점은 독자가 수정을 하기 쉽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법복제를 방지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넣은 DRM은 독자가 이북을 수정할 수 있도록 하는 접근성을 막아놓았다. 결국 독자가 생산자가 되어 직접 만든 이북에 한해서 이러한 접근성이 유효하다.


은 전자책을 내고 싶어하는 작가(프로든, 아마추어든간에) 뿐만 아니라, 이북을 또 다른 읽는 수단으로 읽고 싶어하는 별도의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충분히 따라하기 쉽게 만들어진 책이다.


다만, 이 책은 자신이 직접 이북을 만들어 애플의 '아이북스'에 등록하는 것이 최종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때문에, 맥용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sigil'이라 한다. '시길'이라고도 많이들 읽고 있지만, 또 다른 저자가 쓴 책을 읽어보면 시길이 아니라 '시즐'로 읽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시길'이든 '시즐'이든 우리는 이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이 프로그램은 맥용 뿐만 아니라 윈도우용으로도 오픈 소스로 제작되어 무료로 배포하고 있고, 책에 나오는 맥용 프로그램과 거의 같기 때문에 별 무리없이 윈도우에서도 똑같이 적용이 가능하다. 두려울 것은 하나도 없다. 물론 귀찮기는 하다.


epub는 웹의 페이지를 표현하는 html과 거의 같다. 따라서 html의 코드를 가지고 표현해야 하는데 sigil은 코드를 다루는 창(코드 뷰) 뿐만이 아니라 워드프로그램과 같은 뷰 화면을 제공하기 때문에 초보들이 쉽게 이북을 만들 수 있다.


이북의 가장 큰 요소는 1. 책 표지 만들기 2. 메타데이터 만들기 3. 목차 만들기 4. 본문 만들기로 나눌 수 있다.


책 표지는 구글 이미지 검색으로 구할 수 있고, 자신이 만들거나 가지고 있는 이미지 파일로 만들 수 있다. 메타데이터는 프로그램의 입력 창에 써 넣으면 된다. 가령 책의 작가나 출판사, 책 제목, 출판일자 같은 내용을 입력하는 창에 각각 써 넣으면 된다. 목차도 역시 태그를 쓰면 큰 어려움 없이 대제목, 중제목, 소제목을 만들 수 있으며, 본문은 자신의 자료를 긁어, sigil의 북뷰어 창에 복사하면 된다. 그리고 저장하면 끝!!이다(물론 파일확장자명을 epub로 놓고 저장..).


이렇게 어렵지 않은 몇 단계를 거치면 자신만의 이북이 완성되는데, 사실 이것은 단순히 아마추어가 만든 책일 뿐이다. 프로가 만든 책 처럼 만들기 위해서는 폰트도 넣어야 하고(폰트를 넣지 않으면 이북리더기에서 제공하는 폰트로 보여진다), 또 책의 형식을 그대로 가져오기 위해서 css를 사용하기도 해야한다. 즉, 일일이 책의 디테일을 설정할 필요없이 하나의 페이지에 여러 코드를 집어넣고 필요할 때 가져다 쓰는 모듈과 같은 기능을 수고스럽지만 만들어야 한다. 넓게는 책의 레이아웃에서부터 작게는 폰트의 디테일한 설정까지 우리가 웹에서 보는 것과 유사한 코드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물론 아마추어는 이런거 안해도 꽤 그럴듯한 모양새로 뽑아져 나오지만, 뷰어에 따라서 다르게 보일 수 있으므로, 세세한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대부분의 뷰어들이 발로 만들어져 있어서 자신이 꼼꼼하게 코드의 문법을 익히고 세세하게 적용한다 하더라도 뷰어는 깡그리 무시하는게 다반사다. 심지어 이탤릭체나 굵은 글씨를 지원하지 않는 버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책에 나온데로 따라하다 보면, 꽤 그럴듯한 이북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단순한 아마추어 독자일 뿐이고, 따라서 자신의 자료를 이북으로 만들어 보기만 해도 한없는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다. 나름 방대한 자료를 대략 300그램정도 되는 휴대용 기기에 넣고 다닐 수 있다.


자신이 뭔가를 읽어대는데 천부적 재능?이 아닌 집착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위키피디아를 구현할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이 책에 나오지 않는 보편적인 이북 쓰임새이다. 


위키피디아는 pdf로 제작할 수 있는 툴이 있는데, 작년에 epub로 퍼블리싱할 수 있는 툴까지 포함되었다. 따라서 위키피디아를 통해 검색한 자료를 몇 번의 클릭만으로 epub로 된 이북을 다운 받을 수 있다. 좋은 점은 검색어를 통해 들어간 웹 페이지에서 하이퍼링크로 연결되어 있다면, 그 부분도 다른 챕터로 이북을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림설명 : 위키피디아의 왼쪽 메뉴의 '인쇄/내보내기'의 하위 메뉴 '책만들기'를 선택하면 된다.>


예를 들면, 검색창에 '찰스 다윈'을 친다면 위키피디아의 '찰스 다윈' 창이 뜰 것이고 그곳에 있는 내용을 통해 epub로 퍼블리싱할 수 있지만, 한 발 더 나아가 '진화론'에 대한 하이퍼링크 부분에 오른쪽 마우스를 누른다면, '진화론'의 페이지도 찰스 다윈의 하위 쳅터로 생성시킬 수 있다. 반대로 진화론 페이지에서 찰스 다윈을 하위 챕터로 만들 수도 있다. 하이퍼링크가 연결되어 있지 않는다면, 또 다른 검색어를 통해 가령 '뉴턴'이라 쳐서  뉴턴 페이지로 들어간 다음 또 다른 챕터로 만들 수 있다. 이미지도 알아서 들어간다. 


<그림설명 : 링크가 걸려있는 부분에서 마우스 오른쪽을 클릭하면 이렇게 '추가하기' 메뉴가 뜬다.>


이렇게 만들어진 epub파일을 그대로 리더기로 볼 수도 있겠지만, 혹 자신이 좀 더 만지작 거려 완성도 있는 이북을 만들고자 한다면, 앞서 설명한 sigil을 컴퓨터에서 불러와 책 내용을 편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굳이 책이 아니어도 몇몇 정보를 조합하여 자신의 작은 전자책을 만들어 볼 수 있다.


   

<그림설명 : 위키피디아 '찰스 다윈'을 이북으로 제작. 오른쪽은 책 표지, 왼쪽 목차는 다른 페이지를 챕터로 추가한 것.>



중요한 것은 그래도 최소한의 코드를 다룰 수 있어야 하고, 또 아는 만큼 책의 만듦새는 점점 그럴듯 해진다.


이북리더기가 없더라도, 컴퓨터를 통해 이북뷰어를 설치하여 볼 수 있고, 또 최종 결과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꼭 컴퓨터에도 이북리더기를 설치하여 좀 더 완성도 있는 자신만의 이북을 만들어보자...

(컴퓨터용 이북뷰어는 크레마뷰어, 어도비 디지털 에디션(단, 한글은 깨져보임), FBReader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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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3 1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변호사 논증법 -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4가지 실전 논리
최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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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읽었던 탈무드의 한 꼭지가 생각난다. 그 내용은 대충 이렇다.

바다를 유유히 가로지르는 유람선에 한 랍비가 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랍비를 알아본 어느 여행객이 랍비에게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정말로 신은 존재하는겁니까? 나는 신을 봐야만 믿겠소."
랍비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 여행객을 데리고 유람선 객실 밖으로 나왔다.
"저기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한번 쳐다보십시오."
여행객은 랍비의 말대로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아니, 저렇게 이글거리는 태양을 어떻게 쳐다볼 수 있습니까. 너무 눈부시지 않습니까?"
랍비는 여행객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소. 신께서 만드신 태양조차도 잠시나마 쳐다볼 수 없는데, 어찌 신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까?."

이 한 토막의 글을 보고 정말 무릎을 친 적이 있었다. 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 랍비의 재치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 논증법」이라는 책을 읽었다.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4가지 실전 논리'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제목에 달려있는 '변호사'라는 단어에서 '필승'의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나지만,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쟁점마저도 마치 타인의 변호사가 된 것 마냥 중간자의 위치에서 합리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함을 이른다. 이것을 저자는 '자비로운 해석의 원칙'으로 이끌어냈고, 더불어 '역지사지의 원칙'과 한데 묶어 '변호사 논증의 네 가지 원칙' 중 첫 번째 원칙으로 삼았다. 이 원칙은 논쟁의 문을 여는 열쇠이자 논쟁을 합리적으로 이끌어가는 바탕이다.

논쟁은 번듯한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의 운용과도 같다. 아무리 변칙적인(거칠거나 뜸을 들이는) 운전을 하여도 철로 위를 벗어나면 안된다. 철로 위를 벗어나는 순간 기다리는 것은 끔찍한 사고이다. 그렇다고 이 책은 안전 운행이나 (목적지를 가기 위한) 네비게이션 기능과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물론 이기기 위한 논쟁의 최종 목적지는 자신의 주장이 상대에게 먹히는 것이다. 자신만의 논증으로 이루어진 '주장'이라는 기차를 운행하여야 하지만, 엉뚱한 곳에 도착했다고 논쟁 자체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기는 논쟁'에서 '이기다'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논쟁꾼들이 건네는 대화의 맥락은 '주장'이라는 기차가 달릴 철로를 의미하는데, 어쨌든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말하는 바는 '오직 철로 위를 달리는 것만 생각하자'이다. 같은 의미로, 어떻게 하면 철로를 벗어나지 않는가에 대한 궁리이기도 하다.

저자는 논쟁에 이기기 위한 방법을 네 가지로 압축해 놓았다.

첫째는 앞서 언급한 '자비로운 해석의 원칙 + 역지사지의 원칙'이고,
둘째는 '근거 제시의 원칙 + 근거 확인의 원칙'이며,
셋째는 '입증의 책임 원칙 + 입증의 권리 원칙'이고,
넷째는 '논점 일탈 금지의 원칙'이다.

이 네 가지의 원칙들은 사실 합리적 논쟁을 이루는 뼈대이다. 결국 '이기기 위한' 논쟁은 이들 뼈대에 어떤 논증을 통해 살점을 붙여가느냐가 요점이다. 반대로 논증이 잘못되었다면, 그러니까 엉뚱한 살점이 뼈대에 붙어있다면, 이는 '논리적 오류'로써 결국 위 네 가지 원칙 중 최소 하나의 원칙에 위배된다. 따라서 논쟁을 하다 '논리적 오류(Logical Fallacy)'를 발견했다면 논리적 오류를 정정하기 위해 무슨 원칙에 위배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해당 원칙에 위배되지 않게 바꾸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저자가 책에서 쉬운 예제들을 통해 줄곧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기차는 자신이 설파할 주장이며, 기차에 딸린 칸들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증이고, 기차가 달리고 있는 철로는 자신의 주장을 이끄는 맥락이며, 논쟁은 이 모든 것을 조합한 기차의 운행과도 같다. 즉, 어느 것 하나라도 무너진다면 논쟁이든, 설득이든, 대화든 허공속에서 부서진다. 물론 재건할 수는 있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처음에 언급했던 탈무드의 한 꼭지를 살펴보자. 여담이지만 어렸을 때 읽은 아동용 탈무드에서 생각나는 이야기는 이 꼭지 뿐이다. 그만큼 어린 나에게 강렬했던 듯하다. 위에서 랍비는 신을 보여주라는 여행객의 물음에 신이 아닌 태양을 언급하였다. 그 뒤에 여행객의 반론이 없기에 랍비의 현명함과 재치를 드러내며, 교훈적인 인상을 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지만, 사실 여행객은 어리둥절 했을 것이다. 즉, 기차가 철로를 이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행객 입장에서는 맥락이 무너졌으며, 그 결과 랍비는 논리적 오류를 드러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큰 논리적 오류는 '논점 일탈의 오류'이다. 논점 일탈에는 주제 관련성과 증거 관련성이 있는데 특히 증거 관련성 논점 일탈로 볼 수 있다. 다시금 랍비는 태양을 신이 만들었다는 증거를 보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국 전체적으로 저자가 언급한 네 가지 원칙 중, 신의 존재와 관련해서는 '근거 제시의 원칙'을 위배하였으며, 태양과 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근거 확인의 원칙'을 위배함으로 말미암아,  여행객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자비로운 해석의 원칙'과 '역지사지의 원칙'을 위배하였다. 또한 '논점 일탈 금지의 원칙'에도 위배되었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지적할 수 있다. 여행객이 신에 대해 입증하라고 한 것부터가 '역지사지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냐고 말이다. 그 말에도 일단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논쟁이라는 것이 일단 받고 치는 것이므로 여행객이 던졌던 난처한 질문을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신의 존재와 관련하여 여행객에게 메뉴얼 성격을 띤 답변을 할 수도 없다. 메뉴얼적인 답변은 이미 대중에 공개되었을테고, 그 답변을 깰 수 있는 논리가 이미 돌아다니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메뉴얼적인 답변을 일단 내놓고 반응을 살필 수는 있다. 어쨌든, 이 이야기에는 랍비의 답변에 대한 여행객의 반론이나 반응이 없다. 그래서 여행객은 오류를 저지를 여지조차 가지질 못했다. 그래서 여행객은 무례하게 물어보지 않은 이상 특별히 오류를 저질렀다고 볼 수는 없다.

대부분의 논쟁에서 과연 상대방을 설득시키고 교화시켜 자기편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할까? 논쟁에서 졌다고 자신의 의견을 쉽게 바꿀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논쟁을 할까. 타깃은 구경꾼이다. 중간자적 입장에 서있거나, 상대쪽 깃발 아래 서 있긴 하지만 농도가 옅은 이들이다.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논쟁이 절차적으로 논리적으로 문제없이 잘 이루어져서 한쪽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논쟁에서 진쪽의 진영에서 우리가 졌으니 그쪽 의견을 백분 수렴하겠다, 전향하겠다, 이렇게 말할까. 물론 장기적으로는 그럴 개연성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따라서 토론 프로그램 시청자나 참여하기 위해 들린 시민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토론을 하는 것이다. 결국 단 둘이서 하는 토론은 별 의미도 없다.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냥 대화로 마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너무나 목맬 필요 없다는 것이다. 즉, 논증에 대한 과정이야 말로 가장 중요하다. 이 과정에 오류가 없다면 논쟁에서 이기는 확률이 커진다. 일단 논쟁이 시작되면 반복되는 공격과 방어만이 있다. 공격 루트는 다양하며, 방어는 이 루트를 봉쇄하는 데에 있다. 공격자가 다른 루트로 바꾸게끔 하고, 봉쇄를 하여 또 바꾸게 하고 더 이상 바꿀 루트가 없을때까지 방어해야 한다. 물론 공격자가 도중에 허점을 보이면 자신이 방어자에서 공격자로 돌아설 수 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공격자에서 방어자로 입장이 변화된다. 그렇다면 이 책이 말하자고 하는 것은 뭔가. 수많은 오류에 대해 공부해서 철두철미하게 상대의 오류를 잡아내거나 나의 오류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에 앞서 위에서 언급한 '따라서 '이기는 논쟁'에서 '이기다'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부분을 다시 꺼내 든다. 변호사가 이긴다는 것은 변호사 의뢰인이 진실을 말했다는 뜻일까. 이것은 희망사항이다. 변호사의 논증이 먹혔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 된다. 진실과는 다르다. 하지만 변호사가 이기기 위해서 논리학을 완벽하게 깨우치고 있을까? 이 역시 그렇지 않다. 그는 의뢰받은 사건의 해당 분야 혹은 연관 분야에 대한 공부를 꼼꼼히 했을 것이다. 즉, 논증은 논리학속에서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건 분야를 연구하는데서 탄탄해진다. 다만 논리는 연구했던 것을 강렬하고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관련 분야의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을 우선 꼽는다. 그리고 상대의 말을 잘 들으라는 것이 두 번째다. 상대에게도 배울 점이 있으며, 또 상대의 말을 우선 경청함으로써 자신이 논쟁해야 할 방향을 설정해 준다. 효과적인 논증이 가능해진다. 상대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 이는 저자의 원칙 중 첫 번째 '자비로운 해석의 원칙 + 역지사지의 원칙'과도 상통한다. 즉, 자비로움이나 역지사지는 상대를 배려하는 것 같지만 결국엔 자신에게 열린 마음을 제공한다. 결국 '이긴다'는 것은 논쟁에서 승리한다는 것도 있지만, 논쟁에서 지더라도 남는 게 있고, 배운 것이 분명 있다는 의미이다. 변호사도 그렇지 않은가. 변호에 졌다고 바로 문닫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수수료가 적어질 뿐이다. 물론 계속 지면 심각해지겠지만.

이 책은 일반인 교양서적으로써 훌륭하다. 논리학은 그 개념이 어렵게 생각되어지기도 하고, 또 접해보기 쉽지 않은 분야인데 좋은 예들로 풀어 설명하니 개념이 쉽게 이해된다. 꼭 논리학의 개념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재미로 쉬엄쉬엄 읽어나가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재미있고 쉽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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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전3권 세트 - 한국만화대표선
박흥용 지음 / 바다그림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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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동그란 원과 같은 만화.

희망도 절망도 없는 만화. 그렇게 열려있는 만화이다.

우리라는 보통내기들은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계속 앞을 보면 나아가려 한다. 세상이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발짝이라도 떼려 노력한다. 하지만 때론 넘어지고 자의든 타의든 뒷걸음질도 쳐보다가 또 운좋게 쓰리 세븐이 나와 순식간에 휙 앞으로 점프도 한다. 그럼에도 한 발 한 발 떼기가 쉽지많은 않다. 같은 평지라도 우리는 사실 등반하는 기분을 느끼며 인생이라는 끝없는 오르막을 넘으려 한다. 중력을 이겨보려 하지만 중력을 이겨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근력을 키운다. 그렇게 나이만 먹어간다.

어느 누구는 이 세상이 원이라는 것을 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평지가 아니라 뭔가 새롭게 바꿀 수 있고, 다시 부활 할 수 있는 동그란 세상이란 것을 안다. 그렇기에 뭔가를 시도해본다. 삶의 근력을 쓰는 순간 그 누군가는 동그란 세상에서 한 바퀴, 두 바퀴 이렇게 셈을 한다. 비록 쳇바퀴 인생이지만 매번 같은 원이 아님을 안다. 그렇게 깨우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항상 긴장한다. 세상의 조그마한 변화에도 반응하려 노력한다. 힘이 있으면 바꾸려고도 시도한다.

소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원 밖에 있다. 세상을 관조한다. 자신이 원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의 눈은 원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원 안에 뛰어들기도 하고 원 밖으로 뛰쳐 나가기도 한다. 순전 제 맘이다. 그럼에도 이런 소수의 사람은 끝없는 평면의 세상에서, 회전하고 있는 원안의 세상에서 한 사람 한 사람 건져낼 능력이 있다. 건져낼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 얼마되지 않은 이 사람들의 숙명이다.


2. 하나 더하기 하나는 항상 둘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 계산일 뿐이고 세상은 그리 똑부러지지 않는다. 더구나 혼란스럽기까지 하다면 가장 위에 있는 놈 말씀이 곧 법이다. 따라서 혼란스러운 세상일수록 법을 지배하기 위해 아우성을 친다. 세상을 가질 필요도 없다. 법과 제도만 자신의 수중에 들어오면 된다. 그래서 잘난 세상일 수록 법과 제도를 어느 한 군데에서 독점하지 못하도록 이중, 삼중의 제어장치를 마련해 놓는다.

못난 세상도 이중, 삼중의 제어장치를 마련해 놓을 수 있겠지만, 조금 더 수고스러운 작업을 해야한다. 몰래 개구멍 하나 만들어 놓는 것이 그 수고스러운 작업이다. 이 개구멍은 눈에 잘 안 뜨인다(눈에 뜨이게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경우 사람들 눈을 감게 만든다). 개구멍을 지나려면 온갖 개떡같은 똥폼을 잡아야 하지만 일단 통과하면 허세는 작살이다. 이때 보인 허세를 동경한다면 개떡같은 놈이다. 아니 개똥이다. 그런 개똥들의 질퍽이는 똥폼을 봐야한다.

3. 주인공 견주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그는 반쪽 인간이다. 나머지 절반을 취할 수 있다. 견주는 처음엔 타의로 후엔 스스로 개새끼(견자)가 되어 세상의 똥폼들을 보고 다닌다. 성장하면서 그가 깨닫는 철학은 '개새끼이지만 개구멍으로는 들락거리지 않는다.'쯤?
 
견자도 인간이다. 욕심이 있고 욕정이 있고 욕구가 있다. 욕심과는 싸우고 욕정은 경계하며 욕구는 추구한다. 이것이 만화 속에 드리워진 작가의 철학이다. 견자의 속내에 자리잡은 욕심은 '이몽학'(출세욕)이고 욕정은 '백지'(여자)이며 욕구는 '황정학'(스승)이다. 견자가 절반짜리 인간이기에 그는 나머지 비어있는 반쪽을 채워야 한다. 그가 선택한 반쪼가리는 이몽학도 백지도 아니다. 눈먼 장님이자 침술과 칼잡이에 능숙한 역시나 반쪼가리 인생을 걷고있는 스승 황정학이다.

황정학이 양의 인간이면 견자는 음의 인간이다. 황정학은 양반이지만 장님으로 태어나 역시나 3류 인생을 맛보지만 후에는 즐기는 인물(그래서 양의 인간)이고 견자는 멀쩡한 신체를 가진 댕기동자이지만 서출이기에 3류 인생을 예약한 인물(그래서 음의 인간)이다. 하지만 개떡같은 세상엔 단순한 논리마저 먹히지 않는다. 쩜오 더하기 쩜오는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쩜오이다. 정확히는 쩜오들이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쩜오는 0.5를 가리킴. 쩜오를 자칭하는 대표적 인물로 박명수. 요즘엔 쩜이던가?)

4. 개새끼로 불렸을 당시 견자는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 스승 황정학을 만나기 전까지는. 황정학을 만나면서 가슴속 언저리에서 뜨거움을 느꼈고 백지를 만나면서 차가워야함을 배웠다. 그는 황정학을 통해 무한 평면일 것 같은 세상이 둥그런 원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결국엔 원 밖에도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결국 개새끼가 금강산 호랑이로 탈바꿈을 한다. 물론 자칭 개쌔기는 여전하지만. 견자의 라이벌 이몽학은 원이라는 세상에서 점프만 하면 새로운 위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인물이다. 견자는 스승을 통해 원 밖에서 세상을 볼 줄 아는 식견을 늘렸다. 따라서 이몽학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건낸 동맹을 무시한다. 견자가 보기엔 이몽학이 만들려는 세상 역시 여전히 똑같은 원 안의 쳇바퀴 세상에 불과했을 수 있다.

5. 결말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열린 결말이다. 견자는 세상을 관조한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 뛰어들지 어떨지 모른다. 따라서 닮고 싶어하는 황정학을 통해 견자의 삶을 유추해 볼 수 밖에 없다. 또 사실적으로 유추하려면 역사를 끌어오면 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후 세상의 주인이 바뀌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아무튼 이몽학은 그렇게 사라졌을 것이다.


6. 이 책을 읽고난 후에 내린 결론. 그것은 우연성에 녹아있는 필연성이다. 이 만화를 읽다가 떠오른 만화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히카루의 바둑(or 고스트 바둑왕)」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과 「히카루의 바둑」은 많이 닮아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표현한 작품으로 말이다. 전지적 작가의 시점, 혹은 현실계에서 신의 관점으로 바라봐지게 된다. 스승 황정학과  제자 견주의 만남은 우연이지만, 그 둘의 인연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만화속에서 작가가 보인다. '신의 한 수'는 시대적 공간과 시간, 그리고 두 인물이 처한 상황의 오묘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히카루의 바둑」을 간단히 소개해본다.

 히카루라는 소년이 용돈벌이를 위해 할아버지댁을 찾는다. 그 용돈벌이는 다락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오래된 물건을 파는 일. 히카루는 우연히 오래된 바둑판을 보게 되고, 바둑판 위에 쌓여있는 한 줌의 먼지를 털자마자 헤이안 시대때 군주의 바둑 스승이었던 '사이'의 혼령을 끌어낸다. 혼령은 히카루의 정신속으로 녹아들고, 바둑의 'ㅂ'자도 모르는 히카루는 '사이'의 도움으로 신예 바둑 기사로 이름을 날리며 성장한다. '사이'의 바둑과 히카루 자신의 바둑 사이에서 점차 성장하게 된 히카루는 이름있는 바둑 기사들의 관심을 얻게 되고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정점에 와서 바둑 혼령인 '사이'는 자신이 왜 현생에 나와 히카루를 성장시키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는 현생에 왜 불려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이'는 자신이 히카루를 깨닫게 하기 위한 신의 장치임을 알게 되고 히카루가 성장하면 할 수록 '사이'는 점점 희미해짐을 느껴간다. '사이'가 말없이 갑자기 사라진 뒤 '히카루'는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였던 '사이'가 보고 싶어 미친듯이 '사이'를 찾으며 울부짖는데...

'사이'는 사라지면서 그 자신도 깨닫게 된다. 자신은 히카루를 위한 '신의 한 수'이며 또한 옜적 누군가는 '사이'를 위한 '신의 한 수'였으리라는 것을. 우연성안에 포개져있는 필연성. 후에 히카루도 이 이치를 깨닫고 '사이'가 사라진 후 내던졌던 바둑알을 다시 잡게된다는 슬프지만 해피한 내용...

「히카루의 바둑」에서는 히카루가 구름이며, 히카루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에도 시대의 혼령인 '사이'는 바로 달을 가리킨다. 결국 이 만화 또한 히카루라는 구름이 달을 벗어나는 그 시점이 만화의 최고 정점이 된다. 물론 두 만화가 조금 다르다면 '사이'도 점차 철학적으로 완성되어져간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보다는 좀 더 상호적이다. '사이'는 이를 깨닫기 위해 천년을 기다리긴 했지만.

7.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조금 불편했던 것은 바로 만화속 이야기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작가의 손바닥위에서 머리 굴리고 있는, 그리고 교훈 한 조각 얻으려고 하는 내가 비쳤기 때문이다. 이 완벽한 인연, 만남을 어떻게 생각해야하는지. 만화속 세상은 개새끼(견주) 중심으로 돈다는 점. 모든 설정이 견주를 키우기 위한 비합리적 장치들이라는 것이 약간은 오글거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무리 만화라지만 만화를 그리고 있는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신의 한 수'는 '작가의 한 수'로 대치된다. 아무튼 짧은 이야기임에도 매우 정밀하며 압축적으로 표현해낸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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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sseau 2010-08-19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읽고 계시는 책 목록중 '국화와 칼'은 일본질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답니다.

쿼크 2010-08-20 14:41   좋아요 0 | URL
^^"
 
[프랭클린플래너] 캐주얼플래너 데일리-25절(1Day 1Page) - 네이비

평점 :
절판


검정과 파랑 구매했는데, 가죽 표지도 맘에 들고, 깔끔하면서도 양도 많아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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