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관심 있어 하는 건 의식, 마음, 감정, 자유의지, 인공지능, 로봇, 뇌, 신경과학, 인지과학, 마음철학, 계산(연산, 전산), 번역, 번역비평, 번역비판, 논쟁, 토론, 창발, 개념, 음역 문제, 맞춤법 문제, 비문 문제 등등 따위다. 해서 누리꾼 중 어떤 분이 이런 소재·주제·논제를 다루는 글이 있으면 무척 기대를 품고 흥미롭게 다가가서 읽는다. 한데 여태까지 정말 만족할 만한 글은 그닥 발견하지 못했다.

 

[제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잘난 척한다는 둥, 그럼 니가 한번 써보라는 둥 따위의 반응들은 정말 수준 낮은 피장파장의 지독한 오류를 저지르는 것에 불과하다. 예컨대 국대 축구팀의 한심스런 졸전, 한국 축구의 온갖 고질병을 다 보여주는 어떤 경기를 보고 신랄하게 까는 팬들이 있다고 치자(스포츠 기사 댓글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례다). 그럼 그 팬들이 국대 선수들보다 공을 더 잘 차고 국대 감독보다 더 수준 높은 전략가여서 까는(깔 수 있는) 것일까? 비판하는 그들한테 그럼 니가 선수하고 니가 감독해봐, 이런 따위 비아냥이나 역공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하나 마나 한 질문이고 들어보나 마나 한 대답이다. 요컨대 축구팬들이 선수들보다 잘나서 감독들보다 뛰어나서 시시콜콜 비판하고 까는 건 아니지 않느냐 이런 말이다. 축구팬이라면 축구 실력, 축구 이해에 대한 수준고하를 막론하고 아무나 맘껏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필자가 국내 누리꾼들, 학자들 글을 비판하는 것도 필자가 그들보다 더 잘나고 더 수준 높아서 그러는 것은 결코 아니고 단지 그들의 한 독자로서 얼마든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란 얘기다. 이런 견해는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들)도 마찬가지 아니냔 말이다. 제발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의 제기나 비판을 좀 쿨하고 대범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일까?]

 

최근 인공지능과 의식을 다룬 외국 학자들의 묵직한 책들이 몇 권 번역되어 나왔다. 한데 내가 살펴본 바로는 적어도 의식에 관한 부분만큼은 번역이 좋지 않아 보인다. 몇몇 번역서의 번역문은 매끄러운 편이랄 수 있는데, 그래서 오히려 인공지능과 의식 논의에 동원되는 각종 중요 개념과 논증의 세부 사항이 잘못 번역된 게 은폐돼 보인다. 예컨대 감정 · 느낌 · 정서 · 정동 · 감성 · 기분 등등 따위는 한 가지 원어(emotion)로 교차 표현되기도 하고 세밀하게 구별돼 각기 다른 원어(affect, emotion, feeling, sentiment, mood, etc.)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mind나 consciousness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많은 심리 개념들도 (즉 attention, awareness, self-awareness, cognition, introspection, mental, perception, sensation, sentience, wakefulness 등등도) 마찬가지다. 한데 관련 번역서 대부분은 이런 세밀한 수준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해서 이런 번역서를 읽은 국내 독자나 블로거들의 인공지능 논의나 의식 논의는 일종의 혼종(?)되거나 착종된 상태를 너무나 많이 보여준다. 인공지능이나 의식을 논하는 블로거들의 글을 읽을 때면 늘 기초·기본 개념부터 이해가 안 돼 있거나 심각한 혼종/착종 상태에 빠져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비판을 하자면 비유컨대 견적이 너무 많이 나와 엄두가 나지 않는 때가 많다. 참고로 밝히자면 내가 비판을 염두에 두고 있는 번역서들은 다음과 같다.

 

Bostrom, Nick (Sep 3, 2014). Superintelligence: Paths, Dangers, Strategi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Hardcover: xvi + 328 pages, Paperback: May 1, 2016, New Afterword & Partial Glossary added, xvi + 415 pages]

 

슈퍼인텔리전스 - 경로, 위험, 전략
닉 보스트롬 | 조성진 옮김 | 까치 | 2017-04-05
[반양장본 | 548쪽]

 

Dehaene, Stanislas (Jan 30, 2014). Consciousness and the Brain: Deciphering How the Brain Codes Our Thoughts. New York: Viking. [Hardcover: x~ + 336 pages, Paperback: Dec 30, 2014]

 

뇌의식의 탄생 - 생각이 어떻게 코드화되는가?
스타니슬라스 드앤 | 박인용 옮김 | 김영보 감수 | 한언출판사 | 2017-08-21
[584쪽]

 

Dennett, Daniel C. (Oct 1, 1991). Consciousness Explained. New York: Little, Brown & Co./Back Bay Books. [xiv + 511 pages, Paperback: Oct 20, 1992]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
대니얼 데닛 | 유자화 옮김 | 장대익 감수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3-10-07
[양장본 | 652쪽]

 

Dennett, Daniel C. (May 6, 2013). Intuition Pumps and Other Tools for Thinking. New York: W. W. Norton. [xiv + 496 + 2 color plates, Paperback: May 5, 2014]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 - 대니얼 데닛의 77가지 생각도구
대니얼 데닛 |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 2015-04-20
[반양장본 | 592쪽]

 

Koch, Christof (Mar 9, 2012). Consciousness: Confessions of a Romantic Reductionist. Cambridge, MA: MIT Press. [xii + 181 pages, Paperback: Mar 3, 2017]

 

의식 - 현대과학의 최전선에서 탐구한 의식의 기원과 본질
크리스토프 코흐 | 이정진 옮김 | 알마 | 2014-08-28
[양장본 | 352쪽]

 

Tegmark, Max (Aug 29, 2017). Life 3.0: Being Human in the Age of Artificial Intelligence. New York: Borzoi Books/Alfred A. Knopf. [xii + 364 pages, Paperback: Jul 31, 2018]

 

맥스 테그마크의 라이프 3.0 - 인공지능이 열어갈 인류와 생명의 미래
맥스 테그마크 | 백우진 옮김 | 동아시아 | 2017-12-06
[양장본 | 468쪽]

 

 

 

또한 이의를 제기하고 비판을 해도 객관적이고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글을 주관적·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례가 너무나 많다. 예컨대 니가 선수하고 니가 감독해보란 식으로 반발하거나, 니가 내 자존심을 건드렸어 하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붉으락푸르락 열폭(熱暴/劣暴)하거나, 듣보잡 잡소리 따윈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비판자를 무시하고 혼자서만 자기 주장을 줄창 고집하거나 하는 행태들 말이다. 이런 강성 감정주의자들과는 다르게 ㅎㅎ거리는 미소를 날리며 초연해 하는 달관한 고담준론가도 있다[대개 교수라는 직함을 지닌 분들이 그러는데 이런 분들은 오히려 가르친다(敎授)는 개념과 의미에 대한 성찰적 자각이 모자라는 분들이라고 본다]. 즉 명백한 객관적·분석적·탈감정적 이의 제기이고 논리적인 비판인데도 그걸 자기 자존심 침해나 감정적 공격, 지적 우월성 과시, 혹은 잘난 척으로 받아들이기 일쑤다. 나아가서 비판 댓글 삭제, 댓글 조회 차단, 자기 블로그 접근 차단, 페절, 페삭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칭타칭 지식공유자란 타이틀을 내건 분도 있다. 한데 가만 살펴보면 이런 분들 중에는 누구보다도 남들을 격렬하게 비판(이라기보다는 비난)해온 분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남들을 그렇게 비판(이라기보다는 비난)하면 자기자신도 남의 비판 대상이 된다는 걸 자각하고 인정하고 수용해야 마땅하다. 비판(자)의 기본이다. 한데 남을 신나게 비판(이라기보다는 비난)만 하다가 어디서 난데없이 역비판이 날아오면 그걸 쿨하고 수더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정 폭발, 자존심 폭발, 공격적 언어의 연쇄폭발로 이어지는 게 다반사다. 그런 일차원적 입출력식 반응 행태를 당사자 자기자신만 모른다. 지독한 자기모순이고 자가당착이다. 그런 블로거들과 친목을 다진 분들 중 어떤 분들은 그런 반칙 행위에 침묵하는 것으로 그치기도 하지만 어떤 분들은 그런 반칙 행위를 옳은 행위인 양 적극적으로 거들기까지 한다. 요컨대 그런 분들은 객관적 진리나 진실 싸움(즉 토론과 논쟁)을 파당적 친목 도모의 ‘세싸움’으로 여기는 분들이라 할 수 있겠다. 해서 그런 행태들이 자가당착적 오류나 불의가 명백한데도 그에 대한 (사적 친분 관계를 극복한) 냉철한 비판은 찾아보기 힘들다. 예컨대 남의 오역, 비문, 맞춤법 오류 따위를 비난하는 글 자체와 그런 글에 동의를 표하는 댓글들 자체에 오히려 오역, 비문, 맞춤법 오류가 넘쳐난다. 자기모순과 자가당착, 자기자각·자기성찰의 마비를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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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 2018-06-24 12: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지적 정말 감사합니다. 슈퍼인텔리전스 번역한 조 성진입니다. 복잡한 수식과 통계에 대한 내용때문에 번역할 사람이 모두 고사하시는 바람에 제가 손대게 되었는데, 솔직히 뒷부분의 인식론과 관련된 부분은 정말 어렵더군요. 제가 이과라서 내용은 참 어렵더군요. 못하겠다고 손을 들고 싶었지만, 여러분들의 자문을 받아서 간신히 말이 통하게 해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전문가가 보시기에 마뜩치 않은 모양입니다. 잘못된 점을 널리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qualia 2018-06-24 21:31   좋아요 1 | URL
조성진 번역가님, 댓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번역은 오역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오역을 단순한 오류나 실수로만 보지 말고 좀 더 나은 번역으로 가기 위한 필수적인 디딤돌이나 과정으로 보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해서 오역에 관한 논의를 기피할 것이 아니라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만 위에 열거한 번역서들은 검토할 내용들이 워낙에 방대하기 때문에 지극히 적은 일부분에 대해서만 제가 다룰 예정입니다. 그리고 번역비판/번역비평이란 것은 번역자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하는 상대적으로 편하고 유리한 작업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원전을 먼저 번역한 번역자분들이 훨씬 더 기여도가 크고 더 존경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반면 번역비판가/비평가들은 일종의 ‘뒷북론자’라고 할 수도 있죠. 아무튼 앞으로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번역 대화’가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신병질자한테는 정신병적 진단과 처방, 치료가 필요하다. 하나 마나 한 이 당연한 얘기를 재삼 반복하는 까닭이 있다. 예컨대 ‘미친놈’한테 ‘너 왜 자꾸 미친 짓하고 ××이냐 하는 식의 초보적·일차원적 오류를 일각에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그 정신병질자도 미친 짓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 비판자들 또한 똑같은 오류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 해서 나아지는 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기자각도 치료도 학습효과도 개인적 차원에서나 사회적 차원에서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비판자들이 역노이즈 마케팅에 일조하는 역효과를 내고 있다.

 

정신병질자는 자각 능력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사이코패쓰(psychopath, 사이코패스)가 도덕적·윤리적·공감적·감정이입적 자각 능력이 없는 것과 매한가지다. 해서 정신병질자나 사이코패쓰가 저지르는 도덕적·윤리적·양심적 죄악과 온갖 사회적 악행은 분명 비판과 처벌의 대상이지만, 비판과 처벌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론 그들의 출현과 죄악과 악행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해서 이런 정신병질자나 사이코패쓰한테 ‘너 왜 자꾸 그따위 미친 짓이냐’는 식으로 훈계하고 설교하고 비난하는 것은 거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의 미친 짓을 더 자극하고 그들을 더 일탈하게 만들 뿐이다. 마치 그들의 활활 타오르는 열정(?)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다. 한데 이런 새빨간 백주대낮의 오류를 한지식한다는 양반들이 거듭거듭 되풀이하고 있다. 물론 한두 서너 번의 훈계·설교·비난 정도는 대상자에 대한 경고와 사회에 대한 경계의 차원에서 의미가 있겠다. 하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분석적 진단과 적절한 처방과 근본적 치료를 개인적 차원에서나 사회적 차원에서 공동으로 강구해야 한다. 그래야 자각하고 치유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야 진정한 실효적 의미가 있다는 얘기다. 비판자들은 이 점에 초점을 맞춰 더 고민이 스민 사유를 제시해야 한다.

 

한데 이런 심층적·전향적·포용적·의사소통적 비판 태도와 시각은 거의 전무하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언어가 정신병질자/사이코패쓰의 심리와 언행을 드러내주는 거울상만큼이나 거칠고 적나라하다. 진정한 비판은 거의 없고 비난만이 흉흉하다. 정신병질자 혹은 사이코패쓰의 죄악과 악행이 결코 그걸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해서 정신병질자·사이코패쓰들이 측은한 것 못지 않게 입력/출력의 일차원적 반응만 열심히 계속 쏟아내고 있는 비난자들 또한 더없이 무엇무엇하게 보인다. 내가 보기엔 그건 이 사회 전체가 중증의 정신병질적 징후에 젖어 있는 걸 반영하는 것 같다. 저마다 그걸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라고 강변만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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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어구 ‘~하기 전까지’가 문법적 오류일까?

Qualia Mind님이 게시물을 공유했습니다.

 

Qualia Mind 위 댓글 중에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란 구문이 비문이라는 Namu Li 님의 언급이 있어서 한 자 적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와 같은 유형의 구문은 전혀 비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Namu Li 님의 비문이라는 주장은 독자들을 오도하는 주장이라고 봅니다. 비문이라고 주장만 하셨지 그것이 왜 비문인지, 구체적 논거에 기반한 분석과 설명은 거의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주장 자체가 애초에 옳지 않은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란 문구가 논란이 된 자초지종을 알려드리죠. 즉 일전에 Sarah Kim 님께서 국내 한 교수의 오역문을 찾아내 비판하는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Sarah Kim 님께서 제시하신 문제의 원문과 오역문, 그리고 Sarah Kim 님 자신의 수정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원문: Even before I met you I was far from indifferent to you.
문제의 오역문: 내가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당신에게 별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Sarah Kim 님 수정 해석: [나는] 당신을 만나기도 전에 이미 당신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어요].

 

한데 (위 오역문의 오역은 별개로 치고) Namu Li 님께서 한 가지 문법 오류만 지적하신다면서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란 문장은 비문이며 잘못된 언어 사용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아래 인용한 해당 댓글을 보시죠. 박문규 님께서도 Namu Li 님의 주장에 동의하신다는 취지의 답글을 다셨는데, 그것도 함께 참조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Namu Li 저는 한 가지 문법 오류만.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가 아니라 '당신을 만나기까지' 혹은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이 옳습니다. 어떻게 '전' '까지'라는 시점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잘못된 언어 사용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입니다.

 

박문규 Even before I met you는 Even과 뒤에 나오는 두 번 나오는 Ernest 라는 이름에 대한 호감을 생각한다면 만나기 전에도, 만나기 전부터 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나무님이 '전'까지 라는 시점에 대한 말씀에 동감합니다.
논문, 서적, 신문 등 출판물의 적확한 언어 사용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Namu Li 박문규 만나기 전부터, 전에는 등 다 옳은 표현이죠. 하지만 전까지는 비문일 수밖에 없어요.

 

위에서 보시다시피 Namu Li 님께서는 《어떻게 '전' '까지'라는 시점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하고 설의법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만 하셨지, 그런 시점이 왜 존재할 수 없는지, 이렇다 할 논거나 근거에 기반한 분석과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고/않고 계십니다. 게다가 오늘 저 위 댓글에서도 똑같은 주장을 거듭하시고 있습니다(오역 지적이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오역 지적과는 별개로 우리말 비문 관련 주장이 그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논할 것도 없이 애초에 그런 주장은 그른 주장에 불과합니다. 왜 그런지 다음을 보시죠. 위 해당 원문과 제 번역안을 제시하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원문: Even before I met you I was far from indifferent to you.
Qualia Mind 번역안: 나는/저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도 당신한테 무관심한 건 전혀 아니었어요.

 

위 원문에서 ‘Even before’는 강조 용법으로 쓰인 문구라 할 수 있죠. 해서 우리말에서 강조를 나타내는 보조사 ‘-도’를 덧붙여 번역해줘야 원문의 의미를 잘 반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Even before I met you’를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으로 번역하기보다는 ‘당신을 만나기 전에도’로 번역해줘야 강조의 의미가 살아난다는 것이죠. 이때 ‘전에도’를 ‘전까지도’로 얼마든지 바꿔줄 수 있고 그러면 강조의 의미가 더욱 살아난다고 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위에서 제가 제시한 번역안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가 그 뜻을 이해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음을 알 수 있죠.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가 비문이라는 주장은 정말 뜬금없기 짝이 없다고 봅니다.

 

사실이 이런데도 《'전' '까지'라는 시점[은] 존재할 수 [없다]》면서 ‘~하기 전까지’란 구문을 비문이라고 보는 건 앞 전(前)이라는 한자말의 뜻에 너무 얽매여 뭔가 역으로 잘못 추론한 탓이 아닌가 추정됩니다. 그 잘못된 추론을 밝히기 위해, 예컨대 ‘당신을 만나기 전과 후, 혹은 앞과 뒤’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해서 보기로 합시다. 먼저 ‘당신을 만난 때’를 당신을 만난 사건 E가 일어난 시점 t로 나타내기로 합시다. 그러면 그 시점 t를 기준으로 앞/전과 뒤/후가 갈리는 다음과 같은 그림은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다고 봅니다.

 

과거 시점 <------------- t -------------> 미래 시점

 

여기서 독자분들께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가정컨대 내가 과거엔 전혀 몰랐던 당신을 만난 시점을 t라고 할 때, 과연 ‘나는 시점 t에 이르기까지(도) 당신을 전혀 몰랐다’고 말한다면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당연하지만 논리적으론 틀린 것이 분명하죠. 왜냐면 엄밀히 말해 ‘시점 t에 이르기까지’란 표현은 당신을 만난 사건 E를 포함하는 시간적 표현이니까요. 즉 당신을 만나서 알게 된 사건 E를 포함하는 시간적 표현이기 때문에 당신을 전혀 몰랐다고 말한다면 앞뒤가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시점 t까지(도) 당신을 몰랐다’란 표현도 똑같은 논리로 옳은 표현이 될 수 없습니다. 해서 이런 모순을 제거하려면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즉 ‘전’이란 낱말을 반드시 끼워넣어야 논리적으로 옳은 말이 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당신을 만난 시점 t를 포함하지 않는 표현이니까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런 걸 부지불식간에 일상 화법에서 터득하기 때문에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당신을 전혀 몰랐다’란 표현이나, 반대로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도) 당신을 모르지는 않았다’란 표현을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흔하게 쓰고들 있는 것입니다.

 

해서 위와 같은 예시적 분석과 설명에 따른다면, ‘~하기 전까지’ 유형의 구문이 비문이라는 Namu Li 님(과 박문규 님)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고 오히려 오류임 분명히 밝혀졌다고 봅니다.

 


 

■ 위 댓글 출처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Sarah Kim 님의 페이스북 글)

https://www.facebook.com/sarah.kim.31542841/posts/10156444885868447 

 

■ 위 논쟁이 시작된 Sarah Kim 님의 페이스북 글과 그에 대한 논자들의 견해

https://www.facebook.com/sarah.kim.31542841/posts/10156393828888447

 

■ Qualia Mind의 Namu Li 님 견해에 대한 비판 댓글을 공유한 글

https://www.facebook.com/qualia2/posts/437132580052563

https://www.facebook.com/qualia2/posts/444750555957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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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Mind님이 Waga Jabal Kyonshik님의 게시물을 공유했습니다.

 

Qualia Mind 중의법적 문장 해석법 혹은 작가의 말장난에 대한 대처법이랄까요. 아랫글은 신견식 님의 윗글과 해석/번역 논란 참여자분들의 댓글 견해에서 힌트를 얻어 쓴 글입니다. 제 견해는 참여자분들과 약간은 같기도 하고 약간은 다르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논란이 된 이언 매큐언(Ian Russell McEwan)의 『넛셸 Nutshell』에 나오는 한 대목과 문학동네 측 번역문을 제시하고 시작하죠.


[···] in heavy rains the drains, like dependable banks, return their deposit with interest; in summer, like bad banks, they stink.
[···] 배수구는 폭우가 쏟아지면 믿을 만한 은행처럼 원금에 이자까지 쳐서 돌려주고 여름에는 나쁜 은행처럼 악취를 풍긴다.

위 원문의 뼈대와 원뜻을 추리자면 다음과 같다고 봅니다.

in heavy rains the drains return their deposit with interest; in summer they stink.
(폭우가 쏟아지면 하수구는 더욱 불어난 퇴적물을 쏟아내고, 여름엔 악취까지 풍긴다.)

즉 알고 보면 이언 매큐언은 위와 같은 뼈댓글에다가 두 개의 대립적 삽입구 ‘like dependable banks’와 ‘like bad banks’만 끼워넣었을 뿐이란 얘기죠. 그런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독자와 번역가들을 좀 애먹게 하는 수사적 기교를 부렸다는 얘깁니다.

즉 ① 동형이의어·동음이의어·다의어(구)를 이용한 말놀이, ② 그 말놀이나 말장난을 통한 중의법 구사, ③ 유사하거나 동일한 발음 성분을 동원한 리드미컬한 운율 구사, 이렇게 대략 세 가지 종류의 글재주를 부렸다고 볼 수 있는데요. 한데 저자의 이런 수사법에서 해석상 핵심적인 단어는 다 아시겠지만 the drains와 banks인 것 같습니다. 뼈대 문장의 주어인 the drains에 (그 하수구 혹은 하수로의 구성 요소의 하나인 하수둑을 의미하는 동시에 은행이란 전혀 다른 뜻을 의미하는) banks라는 동형이의어·동음이의어·다의어를 엮어서 다중적 의미나 울림을 꾀한 것이 핵심이란 얘기죠. 즉 저자는 위 삽입구 두 개를 뼈대 문장과 결합해 우리한테 다음과 같은 대립적이고 다중적인 의미를 연상하도록 해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래와 같이 정리해봤습니다. 함 보시죠.

⑴ the drains/하수구, 하수로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들

• dependable banks - 튼튼한 둑, 홍수에 무너지지 않는 둑
• bad banks - 부실한 둑, 허술한 둑
• deposit - 퇴적물, 오폐물
• deposit with interest - 홍수로 불어난 퇴적물이나 쓰레기 더미
• stink - 악취, 하수구 냄새

⑵ banks/은행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들

• dependable banks - 믿을 만한 은행, 건실한 은행
• bad banks - 부패한 은행, 부실 은행
• deposit - 예금
• deposit with interest - 이자가 붙어 불어난 예금
• stink - 부패한 은행의 금융 비리 냄새

보셨겠지만 『넛셸 Nutshell』 원문에서 앞뒤 문맥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위와 같은 요약 정리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원문의 대립적·중의적 삽입구 ‘like dependable banks’와 ‘like bad banks’에서 각각의 banks를 어느 하나의 특정한 의미로 단정하고 고정하는 해석은 불합리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혹은 작가의 의도를 빗나가는 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죠. 바꿔 말해 앞의 banks나 뒤의 banks 모두 은행이나 둑 둘 다를 의미한다고 보는 해석이 훨씬 더 합당하다는 것이죠. 그게 중의법적 문장을 해석하는 더 타당하고 합리적인 동시에 문학적인 방법이라 봅니다. 작가가 동형이의어·동음이의어·다의어(구) 따위로 중의법을 구사하는 목적 중 하나는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수사적 효과를 노리는 것이니까 앞과 뒤 두 banks에 두 가지 의미를 다 집어넣었다고 보는 게 당연하다는 얘기지요. 해서 위 원문 해석/번역 논란에 관해 견해를 보여주신 분들 중, 앞의 banks는 뭐고 뒤의 banks는 뭐다라는 식으로 단정하고 특정하는 분들의 주장은 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봅니다. (물론 이런 중의적 해석법을 실제 번역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겠습니다만...)

요컨대 작가들의 말놀이나 말장난을 통한 중의법 구사 목적 중 하나는 독자나 번역가들을 골탕 먹이는 데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골탕 먹이다라고 쓰고 읽는/해독하는 재미를 준다라고 읽...) 그래야 자신의 문학적 권위를 높이고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다고 내심 계산하기도 한다는 것이죠. 해서 이런 작가들의 수법에 대처하는 독자/번역가들의 자세 또한 곰곰 생각해봐야 할 듯합니다. 즉 골탕을 먹지 않으려면 한 가지 뜻으로만 단정하고 고정하는 경직된 해석법은 되도록이면 피해야 된다는 것이죠.

 


 

■ 이언 매큐언의 『넛셸』

 

 

 

■ 위 이언 매큐언의 말장난/중의법 해석에 관한 논란글들

 

Sarah Kim 님 페이스북 글 :

https://www.facebook.com/sarah.kim.31542841/posts/10156391168568447

https://www.facebook.com/sarah.kim.31542841/posts/10156395707403447

 

신견식(Waga Jabal Kyonshik) 님 페이스북 글 :

https://www.facebook.com/waga.jabal/posts/10213592547722438

 

Qualia Mind 페이스북 글 :

https://www.facebook.com/qualia2/posts/437610853338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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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Mind Namu Li 님, Sarah Kim 님, 박문규

오스카 와일드의 원문: Even before I met you I was far from indifferent to you.

문제의 오역문: 내가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당신에게 별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Sarah Kim 님 해석: [나는] 당신을 만나기도 전에 이미 당신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어요].

위 댓글에서 Namu Li 님께서 ‘전까지’라는 시점이 존재할 수 없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는데요. 제 생각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문법[적] 오류”이고 “잘못된 언어 사용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라고 하셨는데요. 수긍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전까지’라는 시점이 존재할 수 없다는 취지의 주장만 하셨지, 그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납득할 만한 추가 설명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Namu Li 님 주장과는 달리 ‘전까지’라는 시점은 충분히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선 위에 제시된 영어 원문과 그 번역문·오역문과는 별개로 우리말 용법의 범위에서만 논의하자면, 《~하기 전까지 무엇무엇했다/하지 않았다》 투의 문장은 기본적으로 전혀 문법적 오류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흔히 쓰는 관용적 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다음을 보시죠.

① 철수는 밥 먹기 전까지 무척 배고팠다.
②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 그들은 완전 오해하고 있었다.
③ 그의 설명이 있기 전까지 그들은 그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④ 그가 진실을 밝히기 전까지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다.

위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얼마든지 말이 되고, 누구나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죠. 모두 ‘~하기 전까지’가 문법적으로 완전히 적법하게 사용된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위 사례 각각에서 ‘~하기 전까지’의 시점이 어떤 시점이냐고 누군가가 누군가한테 묻는다면, 과연 대답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요? 기본적인 언어 이해력과 의미 파악력만 있다면 누구나 쉽게 대답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사례인데 말이죠.

따라서 이런 적법한 용례에 비춰볼 때, ‘~ 하기 전까지’라는 시점이 존재할 수 없다는 Namu Li 님의 견해는 근거가 없다고 봅니다. 또한 그건 문법적 오류이고 잘못된 언어 사용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이며 비문이라는 주장도 거의 설득력이 없다고 봅니다. 

 

 


 

 

■ 문제의 오역문 출처 :
강준수 안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논문 -「오스카 와일드의 경계 넘나들기: 『진지함의 중요성』」, 『현대영어영문학』 제57권 4호(2013년 11월) 17-30쪽. 

 

■ 위 오역문을 찾아내 비판한 Sarah Kim 님의 페이스북 글 :
https://www.facebook.com/sarah.kim.31542841/posts/10156393828888447

 

■ 참고 : 위 Sarah Kim 님의 글에 많은 분들이 댓글로 의견을 밝히셨는데요. 그중 Namu Li 님께서는 우리말 어구 ‘~하기 전까지’가 문법적 오류이고 잘못된 언어 사용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이며 비문이라는 주장을 하셨어요. 한데 제 판단에 그건 잘못된 주장이라고 봅니다. 해서 제가 Namu Li 님 주장에 반론했는데요. 그 반론 댓글이 바로 윗글입니다. 이 반론 댓글을 제 페이스북에도 올렸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facebook.com/qualia2/posts/437132580052563

 

■ 오스카 와일드의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 번역(수록)본 [위 오역문과는 직접 관련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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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가 비문이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
    from 마음―몸―시공간 Mind―Body―Spacetime 2018-04-21 10:32 
    Qualia Mind님이 게시물을 공유했습니다. Qualia Mind 위 댓글 중에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란 구문이 비문이라는 Namu Li 님의 언급이 있어서 한 자 적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와 같은 유형의 구문은 전혀 비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Namu Li 님의 비문이라는 주장은 독자들을 오도하는 주장이라고 봅니다. 비문이라고 주장만 하셨지 그것이 왜 비문인지, 구체적 논거에 기반한 분석과 설명은 거의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