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렌더링 이미지처럼 삼성 폴더블폰이 길쭉한 막대형이라면 백퍼 실패한다. 세로로 길쭉하기만 하고 폭은 좁아터진 화면에서 뭘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기존 스마트폰에서 볼 수 있는 영상보다 큰 영상을 볼 수 있겠는가? 뭔 생산성 있는 작업을 할 수 있겠는가? 태블릿의 넓은 화면을 그보다 작은 스마트폰에 구현한다는 게 폴더블폰의 기본 개념이고 발상인데, 고동진 사장의 《펼쳐진 상태에서 태블릿과 동일하다면, 소비자들이 왜 이것을 사겠는가?》 하는 발언은 뭔가 이상한 발언이다. 혹시 삼성 폴더블폰이 길쭉한 막대형이라서 선제 쉴드치는 건가?
2018-09-05 16:37:10

 

삼성 '폴더블 스마트폰’ 11월에 공개되나
ZDNet Korea | 기사입력 2018-09-05 15:11
지디넷코리아 이정현 기자(jh7253@zdnet.co.kr)
http://www.zdnet.co.kr/ArticleView.asp?artice_id=20180905130524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5&oid=092&aid=0002145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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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아래로 접는 방식은 그닥 의미가 없다.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유출된 렌더링 이미지를 보면 위아래로 펼친 모습이 길쭉한 막대형이던데 그딴 식으로 세로로 길쭉하기만 하고 좁아터진 화면 가지고 무슨 생산성 있는 작업을 할 수 있겠는가? 제발 삼성에서 그런 뻘짓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2014년에 선보인 시제품 이미지처럼 좌우로 접는 방식이 가장 인간공학적이다. 왜냐면 우리가 공책에 뭘 쓰거나 책을 읽을 때 항상 좌우로 펴거나 접기 때문이다. 그리고 펼쳤을 때 최소한 8인치 이상은 돼야 의미가 있다. 그 이하는 폴더블폰 개념의 의미가 없다.

2018-09-05 16:08:17

 

폴더블폰 각축전 펼쳐진다...삼성전자, 11월 공개 ‘포문’
기사입력 2018-09-05 14:13
데일리안 이호연 기자 (mico911@dailian.co.kr)
http://www.dailian.co.kr/news/view/737405/?sc=naver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5&oid=119&aid=000228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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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들의 말(주장) 혹은 번역론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번역가는 자신이 한 말을 자신이 뒤집는다. 번역가의 말(주장) 혹은 번역론은 성립할 수 없다. 그게 번역가의 존재 방식이고 번역 행위의 필연적 귀결이다. 이런 원리를 모르고 혹은 망각하고 번역론 운운해봤자 말짱 헛소리에 불과하다. 번역가들처럼 동어반복을 반복하는 헛소리꾼도 드물다. 그 소리가 그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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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is not concerned with things – certainly not ‘in themselves’ – so much as with things-in-the-making, in James’s famous phrase.
― Brian Massumi,『Politics of Affect』(Polity, 2015), p. viii

그것[진행 중인 변형의 과정으로서의 세계]는 사물들things과는 ― 물론 ‘그 자체로서’ ― 무관하며, 제임스의 유명한 구절이 말하듯이, 형성-중-인-사물과도 관계가 없다.
― 『정동정치』(조성훈 옮김, 갈무리, 2018), 11쪽

 

 


→ 위 번역은 Aidan 님께서 올바로 지적하셨듯이 완전한 오역이 맞다고 봅니다.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와 정동(affect) 개념 전문가가 저런 오역을 했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번역가도 실수하지 않을 수 없긴 합니다만, 위와 같은 비교적 평이한 문장을 오독하고 오역하다니 좀 충격적인 건 사실입니다.

한데 ‘not A so much as B’ 구문은 Aidan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B만큼 A는 아니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런 식으로 번역할 경우 직역투라서 좀 부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죠. 해서 우리가 중고딩 시절에 배웠듯이 ‘A라기보다는 오히려 B다’라는 식으로 번역해야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위 인용문은 다음과 같이 옮겨야 올바르고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것[진행 중인 변형의 과정으로서의 세계]은 사물들things보다는 ― 즉 ‘사물들 자체’보다는 ― 오히려 제임스의 유명한 구절에 나오는, 형성-중인-사물들과 관계가 있다.

위와 같은 뉘앙스 외에 Aidan 님께서 지적한 추가 사항들 관해선 모두 동의합니다. 눈썰미 뛰어난 지적과 분석이라고 봅니다. 특히 사물들 자체(things-in-themselves)는 칸트의 용어 물자체(thing-in-itself)의 복수형으로 읽어야 한다는 지적과, 그것은 형성-중인-사물들(things-in-the-making; things-in-the-formation)과 대구적으로 쓰였다는 지적은 독자들한테 참신한 깨달음을 주는 지적이라고 봅니다.

한데 조성훈 번역가가 ‘things-in-the-making’을 ‘형성-중-인-사물’로 옮겼는데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어들을 이어주는 하이픈(이음표, 붙임표)을 우리말 표기 방식이나 조어법에 맞지 않게 썼다는 것입니다. 즉 ‘things-in-the-making’은 서양 철학자들의 철학 용어 조어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이픈 연결형 철학어/개념어’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런 걸 우리말로 번역·표기할 때 서양식 혹은 영어식 형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분명히 있지만 일단 여기에선 논외로 하겠습니다만, ‘things-in-the-making’을 하이픈 없이 옮기면 ‘형성 중인 사물들’인데, 이걸 하이픈 개수를 곧이곧대로 반영해 ‘형성-중-인-사물’로 옮긴 것은 굴절어인 영어와 교착어(첨가어)인 우리말의 차이점을 고려하지 못한 잘못된 번역·표기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in-’은 ‘-중인-’으로 번역·표기해야 우리말 조어법에 맞지 ‘-중-인-’으로 하면 전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관형사형 어미라 할 수 있는 ‘-인’은 교착어인 우리말에서는 단독으로 쓰이지 않기 때문에(쓰일 수 없기 때문에) ‘-in-’에 해당하는 ‘-중인-’을 ‘-중-인-’으로 분리해 번역·표기하는 것은 적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하이픈 연결형 철학어/개념어인 ‘things-in-the-making’을 영어식 형태를 반영해 번역·표기할 경우엔 ‘형성-중인-사물들’ 혹은 ‘형성-중-사물들’로 해야 그나마 우리말 조어법에 맞는다는 것입니다.

Aidan 님께서도 이 점을 인식하셨는지는 몰라도 위 비판글에서 ‘things-in-the-making’을 번역서와는 다르게 ‘형성-중인-사물’로 표기하셨네요. 평소에 하이픈 연결형 서양 철학 용어들의 적절한 번역에 비판적 관심이 있어서 한번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아무튼 Aidan 님의 위 번역 비판글 덕분에 좋은 생각의 기회를 나눌 수 있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 댓글은 원래 ‘not A so much as B’ 구문의 오역에 대해서만 짧게 쓰려고 했던 것인데요. 쓰다 보니 길어져서 먼댓글 형태로 제 알라딘 블로그와 페이스북에도 올립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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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가 딸리니까(달리니까) 인신공격을 하고 나온다.
오류를 따져 물으니까 감정 싸움을 걸고 나온다. 

 

어떤 출판사 편집자분이 “~하기 전까지” 유형의 구문이 비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렇다 할 근거나 논거 제시는 없었다. 그러면서 그런 구문을 쓰는 사람들을 엉터리라는 취지로 격렬하게 비난해댔다(이 역시 감정의 오류다). 그런 출판사 편집자분을 다른 몇몇 분들도 거들고 나섰다. 그러나 그들 역시 납득할 만한 근거나 논거 제시는 거의 없었다. 막연한 강변만 반복할 뿐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그들은 터무니없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었다. 해서 (평소에 비문 문제에 관심이 많던) 필자는 그분들의 주장이 왜 말이 되지 않는지 상세히 분석해서 옳고 그름을 가렸다. 그러나 그들은 필자의 분석적 비판을 인정도 수용도 하지 않았다. 그것까진 좋았다. 

 

문제는 그들이 근거 박약한 어거지 주장 오류 이외에 인신공격 오류라는 치명적 오류를 저질렀다는 점이다. 한국어 문법에 관한 객관적·분석적·논리적 논쟁(즉 진리·진실 싸움)을 사사로운 감정 싸움이나 자존심 싸움, 파당적 ‘세싸움’으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필자가 그들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고 객관적·분석적·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비판했기 때문에 그들이 감정적으로 발끈했다는 것이다. 그건 토론과 논쟁의 기본 개념조차 없는 말 그대로 무개념스런 반지식인·반지성인적 행태라 할 수 있다. 자신들의 주장을 논파한 필자의 논증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면, 그걸 감정적으로 할 게 아니라 객관적·분석적·논리적으로 조목조목 역반박하거나 재반박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토론과 논쟁이 얼마나 심화되고 얼마나 좋은 긍정적 결과를 낳겠는가 말이다. 더불어 지적인 유대도 논쟁자들 쌍방 간에 깊어질 수 있다. 한데 그들은 그런 건 전혀 제시하지도 시도하지도 않았다/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문제에 대한 비판을 중복하지 말라는 둥, 긴 댓글은 달지 말라는 둥, 당신 블로그에나 그런 글 적으라는 둥 상식 이하의 갑질(?)을 부렸다. 게다가 논쟁 댓글들 일부를 차단하거나 블라인드 처리까지 했다. 명백한 비신사적 반칙행위(unfair play, non-fair-play)다. 한술 두술 더 떠서 그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했는지 건설적인 토론·논쟁 대신 감정 싸움을 걸고 나왔다. 즉 ‘입고수’라며 느닷없이 상대방을 비아냥대고 나선 것이다. 이런 행태가 과연 바람직한 행태일까? 현실에서 상대방 얼굴을 맞상대하면서도 저런 저열한 언사를 그는(그들은) 과연 던질 수 있을까? 아무런 거리낌도 부끄러움도 없이?

 

또한 필자의 번역비판 비판글에 대한 그들의 오독과 아전인수, 견강부회, 자기합리화, 중고딩 논술 수준도 안 되는 문해력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영문 오독·오역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양반들이 터무니없는 국어 오독·난독을 밥 먹듯이 한다. 비문과 맞춤법 오류도 전매특허처럼 남발한다. 그런 저열한 수준으로 번역비판이 어떻고 저떻고 왈가왈부한다는 건 주제넘은 오지랖이 아닐까 한다. (노파심에 덧붙인다. 필자가 모 님의 번역비판 자체를 계속하지 말라고 했는가? 필자의 글에 그런 구절이나 주장이 있는가? 문해력 발휘해서 남의 글을 제발 똑바로 읽었으면 좋겠다/읽기를 바란다. 사실을 말하자면 필자는 그 모 님한테 오래 전에 편지까지 써서 번역비판을 적극 지지한다고까지 했다. 지금도 지지는 변함없다. 하지만 필자는 그의 ‘비판 방식과 태도’엔 문제가 있다고 처음부터 생각해왔더랬다. 해서 개인적으로 편지도 써서 그 점에 대한 재고를 간접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더랬다. 한데 요즘 그게 더욱 심화되는 것 같아 그걸 전향적·성찰적으로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직접적 비판글을 공개적으로 쓰기에 이른 것이다. 당신들은 그의 비판 방식과 태도가 아무 문제 없다고 보는가? 이런 식의 문제 제기를 한 것인데 왜들 다 삼천포 빠지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선 다음에 따로 또 논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요즘 시중에서 한국인들 문해력이 어떻고 핵심과 요지를 파악하는 능력이 저떻고 개탄을 하더라. 그렇게 한국인들의 문해력과 독해력을 걱정하고 비판하는 입장이라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오독과 난독, 아전인수, 견강부회 따위를 비판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비판 앞에서 (페친 등등) 친분 따지고 인맥 따지면 진정한 비판이 가능키나 하겠는가? 또한 인문학 위기 타령이 요즘 유행인데, 인문학 위기는 돈(정부 지원)이 없어서 오는 게 아니라고 본다. 진정한 비판과 논쟁이 실종된 데서 온(오는) 것이다. 과연 문해력·독해력 개탄하고 인문학 위기 타령 읊조리는 지식인들 중에 소위 말해 자기 진영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이 과연 있는지 의문이다. 예컨대 어떤 한 진영 내에서 누굴 비판하고 어떤 논제에 대해 논쟁을 걸면 그 당사자는 눈 밖에 난다. 어처구니없게도 왕따를 비판하는 지식인 자신들이 그를 왕따시키고 눈엣가시로 본다. 별종이라면서 이상한 눈길로 보고 색안경을 끼고 본다. 진영·파벌·패거리 따위로 조각난 한국 지식인 사회의 지독한 자기모순이다. 한국 사회가 이러니 진정한 논쟁은 가뭄에 콩처럼 드물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처럼 정체되고 께느른해 터진 사회가 없다. 진정한 비판과 논쟁이 여기저기서 터져 웅덩이에 괸 물처럼 정체된 한국 사회를 한바탕 두바탕 뒤집어놔야 발전할 텐데 비판과 논쟁을 기피·금기·경원시하니 발전은커녕 퇴보할 수밖에 없다. 당신들이 노래 부르는 문해력 퇴보 개탄과 인문학 위기 타령이 그걸 역증명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와 반대로 비판과 논쟁이 활발한데 뭔 소리냔 반박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당신들이 말하는 비판과 논쟁은 진영 논리에 쩔은 (소위 말해) 일방적 비난질이나 당파적 패거리 싸움이지 진정한 비판과 논쟁은 아니라고 본다. 철저하게 친분·연줄·인맥·혈연·학연·지연 따위로 나뉘고 갈라져 객관적 진리나 진실, 도덕적·윤리적 정당성, 합리적 이성 추구와는 거리가 먼 파당적 이해득실만을 그악스럽게 챙길 뿐이고 끼리끼리 무조건 덮어주고 화이팅해주는 게 그 무슨 비판이고 논쟁이냔 말이다. 작년과 올해 페북 공동체에서 목도한 인공지능을 둘러싼 어떤 논쟁 아닌 논쟁과 사회적 이슈에 관한 어떤 논쟁 아닌 논쟁도 딱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채 파당적 이해관계에 따라 극명하게 패가 나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런 건 비판과 논쟁이 결코 아니다. 한국 페북 커뮤니티와 지식계·학계는 정치판과 다를 게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개나 소나 모두 비판 가능한 공공의 적이나 어떤 사회적 희생양이나 미친 짓을 계속하는 피에로 따위에만, 즉 손쉬운 대상에게만 유난히 독설의 핏발을 세우는 비판자·비난자는 의심스러운 법이다/의심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과연 그런 유형의 독설가가 자기 패거리 동료들의 잘못에도 똑같은 수준의 핏발을 세울 수 있을까? 필자는 그런 공명정대한(?) 사례를 여태껏 본 적이 없다. [···]

 

요컨대 안으로 향하는 내부 비판이 거의/전혀 없다는 게 문제란 얘기다. 내부 논쟁이 거의/전혀 없다는 얘기다. 제3자의 시각으로 보면 오류가 분명하고 비합리·비정상·불의·반칙행위가 분명한데도 친분·연줄·인맥·혈연·학연·지연에 묶여 리그 안의 동지·동료·친구·선후배·제자·스승 등의 잘못은 모른 척하거나 용인하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거들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불편부당한 참다운 지식인·지성인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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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우 2018-05-18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흠... sarah kim 님 페북 가끔 들어가는데...

좀 이해가 안되는게

댓글 달리는게 싫으면 페북을 왜하는지... 참...

암튼 너무 힘쓰지는 마시길... ㅎㅎ

2018-05-18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