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뇌, 생각하는 기계
제프 호킨스 & 샌드라 블레이크슬리 지음, 이한음 옮김, 류중희 감수 / 멘토르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공대생이 책을 쓰면 이렇게 되는 법이지.
가연 (이메일 보내기) l 2015-06-08 02:52
http://blog.aladin.co.kr/760670127/7585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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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님, 깊은 생각거리를 주는 글이네요.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가연 님 글에는 상당히 의문스러운 부분이 적어도 두 군데는 있어 보입니다. 즉 윗글에서 가연 님은 제프 호킨스(Jeff Hawkins)가 ⑴ 좀비(zombies) 개념을 오용하고 있으며, ⑵ 의식과 기억에 관한 사고 실험 논변에서도 커다란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요. 바로 이 두 가지 비판에서 오히려 가연 님이 오류에 빠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Hawkins, Jeff with Sandra Blakeslee (2004). On Intelligence: How a New Understanding of the Brain Will Lead to the Creation of Truly Intelligent Machines. New York: Times Books. [viii + 261 pages] 

 

저는 번역서 『생각하는 뇌, 생각하는 기계』를 입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원서 『On Intelligence』에서 해당 부분을 찾아 읽어봤는데요. 가연 님의 신랄한 비판과는 전혀 다르게 제프 호킨스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논변을 전개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⑴ 좀비 논변 부분과 ⑵ 의식/기억 사고 실험 논변 부분을 한국어판에서는 어떻게 번역해놨는지 모르겠지만, 영어판 『On Intelligence』의 해당 부분에서만큼은 이렇다할 오류를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즉 저는 오히려 가연 님이 전개한 제프 호킨스 비판에 커다란 오류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것이 가연 님의 오독 때문인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번역자의 오역 때문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지만, 가연 님의 제프 호킨스에 대한 두 가지 비판만큼은 오비판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1. 좀비 개념과 좀비 논변

 

먼저 가연 님이 제프 호킨스가 좀비 개념 오용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부분을 인용해보죠. [밑줄과 굵은 글자는 인용자]

 

특히 이 책의 저자는 현대 심리철학적 논제에 대하여 상당히 무지하다는 것을 책에서 드러내고 있는데, 책에서 글쓴이는 이렇게 대략 밝힌다. "난 좀비라도 괜찮아요" 어느 세미나에서 어느 뇌과학자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하는 이야기이다. 그 뇌과학자는 감각질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이에 대하여 당신이 그런 내밀한 감각을 부정하지는 못하지 않느냐, 라고 이야기하지만, 저자는 그런 논의를 깔끔하게 무시해버린다. 그 말이 바로 위의 말이다.

 

심리철학에서 마음에 관한 논의 중, 메리의 방과 좀비 논변, 역전 감각질 논변에 기능주의에 일격을 가한 퍼트남의 다수실현논변은 꽤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혹시 알고 싶은 사람은 구글링해보면 알 것이고 - 요즘 인터넷이 너무 발달해서 좋다 - 여기서 좀비 논변을 조금 끄적거리자면 1. 나는 내가 의식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것을 안다. 2. 그런데 다른 사람도 그럴까? 이다.

 

아마 저자가 심리철학적인 베이스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저런 식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니 공학도가 책을 쓰면 이렇게 되는 법이다. 어디서 좀비를 듣기는 들었으니 이야기는 하는데, 의식에 대한 예로는 정말 오용하고 있는 부분이다. 좀비 논변은 먼저 내가 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라는 점에서 전제를 두며, 글쓴이처럼 의식이 없는 좀비, 그래도 괜찮슴, 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 인용문에서 가연 님은 제프 호킨스가 “현대 심리철학적 논제에 대하여 상당히 무지하다”거나, 의식의 “내밀한 감각”적 측면에 대한 논의를 깔끔하게 무시해버린다거나, 좀비 개념을 오용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사실과 전혀 다른 듯합니다. 왜 그런지 다음을 봅시다.

 

제프 호킨스는 『On Intelligence』 제7장 「CONSCIOUSNESS AND CREATIVITY」의 소항목 ‘WHAT IS CONSCIOUSNESS?’에서 한 영국 여성 신경과학자와 의식에 관해 논쟁했었던 일화를 소개합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신경과학자는 우리의 놀랍고도 신비로운 주관적 경험, 즉 경이로운 의식의 수수께끼를 결코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제프 호킨스는 신경과학적으로 충분히 해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즉 의식의 수수께끼에 대한 과학적 해명가능성/불가능성을 놓고 논쟁했던 것인데요. 이 논쟁 과정에서 신경과학자가 “당신은 어떻게 아름다운 세상을 느끼는 우리의 주관적 의식을 부정할 수 있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제프 호킨스는 신경과학자가 이원론적 의식 개념에 빠져 있다고 판단하고 “나는 (당신이 상정하는) 그런 의식적 존재가 아니다. (당신 기준에 따르면) 나는 좀비일 것이다.” 하는 취지의 대답을 합니다. 즉 제프 호킨스는 신경과학자가 은연중 전제한 이원론적 의식 개념을 강하게 부정한다는 취지로 저런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프 호킨스는 좀비(zombies) 개념을 전혀 오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좀비 개념은 이원론자들이 영혼이나 의식의 실체적 존재를 논증하기 위해, 그리고 물리주의가 그르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서 고안하고 써먹어온 개념이었지만, 동시에 물리주의자들도 이원론자들을 논박하기 위해서 역으로 써먹어온 양면적 특성을 지닌 개념/존재입니다(Kirk 2015). 좀비 개념의 이런 역설적/양면적 본질에 주목한다면, 제프 호킨스가 뇌과학자와의 논쟁에서 자신을 “의식이 없는 좀비”라고 표현했던 것은 일종의 역설적 반론이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즉 이원론자나 신비론자들이 상정하는 신비로운 실체(mysterious entity)로서의 의식이나 마법적 소스(magical sauce) 같은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견해를 역설적으로 강하게 나타낸 발언이라는 것이죠. 이런 좀비 개념 구사는 전혀 오류가 아니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연 님이 제프 호킨스가 좀비 개념을 오용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은 오히려 가연 님의 완전한 오류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2. 기억 지우기 사고 실험

 

다음, 가연 님이 제프 호킨스가 의식과 기억에 관한 사고 실험 논변에서도 커다란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한 부분을 분석해 봅시다. 먼저 해당 부분을 아래에 인용합니다. [밑줄과 굵은 글자는 인용자]

 

사고 실험에서 의식이 사실상 기억에 의존한다, 라는 것을 밝히려하는 것에도 상당한 오류가 있다. 본인의 틀, 모델을 어떻게든 적용하려고 발버둥쳤겠지만, 사실 이야기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 만큼 간단하지는 않다. 그의 사고 실험은 이렇다. 우리가 버튼을 눌러서 어제의 기억을 몽땅 지울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의 당신은 의식이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기억이 지워진 이후의 당신은 이제 어제 내가 의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신하지 못하게 된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실 그른 논변이다. 어제 지워진 것은 어제의 기억이지 어제의 의식이 아니다. 이미 기억과 의식을 같은 거라고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제대로 된 결론이 나오지가 않는다. 어제의 나는 의식이 있었다. 오늘의 나는 의식이 있다. 어제의 기억이 사라졌더라도 어제의 나는 의식이 있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는가? 잘 읽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위에서 가연 님은 제프 호킨스가 상당한 오류를 저지르고 있고 그른 논변을 펼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제프 호킨스는 의식과 기억에 관한 사고 실험 논변에서도 꽤 설득력 있고 정합적인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이에 대한 가연 님의 비판이 왜 오류인지를 밝히려면, 먼저 제프 호킨스가 의식 개념을 어떻게 보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프 호킨스는 의식(consciousness)을 자기자각(self-awareness, 줄여서 자각)과 감각질(qualia), 두 가지 범주로 나눕니다. 자각 범주의 의식은 일상적 의미의 의식으로서, 예컨대 “어제 나한테 인사도 안하고 그냥 지나치던데, 그거 의식하고 있었던 거야(conscious; 알고 있었던 거야)?” “당신 지난밤에 침대에서 굴러떨어졌었는데 그거 의식했었어(conscious; 알고 있었어)?” “잠잘 때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지(not conscious; 모르지).”와 같은 사례에서처럼 내적으로 어떤 행동/언행/생각 따위를 알아차리고 있는 심적 상태라고 제프 호킨스는 설명합니다. 이와 달리 감각질 범주의 의식은 감각작용(sensation)에 동반하는 주관적 느낌들로서 뇌에 들어오는 감각 입력(sensory input)과는 독립돼 있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자각 범주의 문제는 비교적 쉬운 문제인 반면, 감각질 범주의 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구분법을 전제한 뒤, 조건 한 가지를 더 덧붙입니다. 즉 제프 호킨스는 자각 개념보다 서술적 기억(declarative memories) 개념이 일상적 의미의 의식 개념을  더 잘 포착할 수 있다면서 자각 개념을 서술적 기억 개념으로 대체해 논변을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제프 호킨스의 이런 의식 접근법은 철학자 데이빗 차머스(David J. Chalmers)와 네드 블락(Ned J. Block)의 접근법과 비슷합니다. 알다시피 데이빗 차머스는 의식 문제를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로 나누었고, 네드 블락은 의식을 정보접근 의식과 현상적 의식(access consciousness and phenomenal consciousness),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해 제시했습니다. 이들의 이런 이분법은 심리철학은 물론이고 신경과학과 인지과학에 매우 유용한 이론적 틀을 가져다줬고 커다란 발전을 불러왔습니다. 추측컨대 제프 호킨스도 데이빗 차머스와 네드 블락의 의식 이분법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호킨스-차머스-블락의 의식 이분법이 서로 너무 유사하니까요(Block 1995, 2007, Chalmers 1995, 1996, Gennaro 2006, Van Gulick 2014).]

 

따라서 제프 호킨스의 사고 실험 논변을 제대로, 올바르게, 비판하려면, 제프 호킨스가 의식을 두 가지 범주로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선 안 됩니다. 왜냐면 제프 호킨스가 기억 지우기(memory erasure) 사고 실험 논변에서 다루고 있는 의식은 두 가지 범주 가운데 자각 범주 (즉 서술적 기억들) 한쪽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감각질 범주의 의식은 사고 실험 대상에 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감각질 범주는 따로 떼어내 자각 범주, 즉 서술적 기억들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제프 호킨스가 사고 실험에서 고안한 기억 지우기(memory erasure) 장치는 서술적 기억들(declarative memories)만을 지우는 장치입니다. 이 장치는 스위치 조작으로 현재의 뇌 속 뉴런과 시냅스 상태를 과거의 한 시점으로 되돌려서, 현재에서 그 시점까지의 서술적 기억들을 모두 지울 수 있는 장치입니다. 만약 이게 가능하다면 서술적 기억으로서의 의식, 다시 말해 자각 범주의 의식은 일정 부분 삭제가 가능하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사고 실험의 피험자는 삭제된 과거를 전혀 자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즉 삭제된 과거를 전혀 의식하지(be conscious of) 못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과거 기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니까 당연한 소리죠. 따라서 이런 조건적 의미에서는 자각적 의식이 서술적 기억과 같다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해서 제프 호킨스는 의식의 한 측면이 서술적 기억과 동일하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의식의 다른 측면인 감각질 범주는 이 사고 실험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제프 호킨스는 감각질 범주의 의식을 자각 범주의 의식과 구별해 별도로 다른 접근법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제프 호킨스의 기억 지우기 사고 실험 논변은 상당한 타당성과 설득력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논리적 정합성에서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연 님은 위 인용문에서 제프 호킨스의 사고 실험 논변에 상당한 오류가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른 논변이라는 겁니다. “어제 지워진 것은 어제의 기억이지 어제의 의식이 아니다. 이미 기억과 의식을 같은 거라고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제대로 된 결론이 나오지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런 지적이 얼마나 잘못된 오독이고 오비판인지 확실하게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제프 호킨스는 저런 식으로 의식 개념을 두루뭉술하게 뭉뚱그려 말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상, 지금까지 분석하고 살펴본 바와 같이, 가연 님의 제프 호킨스 비판에는 심각한 오독과 오류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다만, 이런 오독과 오류가 순전히 가연 님한테서만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On Intelligence』 한국어판에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오역 때문에 발생한 것인지, 둘 다 해당하는 것인지, 저로서는 아직 판단할 길이 없습니다. 도대체 한국어판을 어떻게 번역해놨길래 이런 심각한 오독/오해/오류가 발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References

 

Block, Ned J. (1995). "On a Confusion about the Function of Consciousness."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18: 227-247.

 

Block, Ned J. (2007). Consciousness, Function, and Representation: Collected Papers, Volume 1. Cambridge, MA: MIT Press. [viii + 636 pages] 

 

Chalmers, David J. (1995). "Facing Up to the Problem of Consciousness." Journal of Consciousness Studies 2: 200-219.

 

Chalmers, David J. (1996). The Conscious Mind: In Search of a Fundamental Theory, (Philosophy of Mind Serie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xviii + 414 pages]

 

Gennaro, Rocco J. (2006). "Consciousness".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James Fieser and Bradley Dowden (Eds.). URL = <http://www.iep.utm.edu/consciou/>. 

 

Hawkins, Jeff with Sandra Blakeslee (2004). On Intelligence: How a New Understanding of the Brain Will Lead to the Creation of Truly Intelligent Machines. New York: Times Books. [viii + 261 pages]

 

Kirk, Robert (2015). "Zombies".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ummer 2015 Edition). Edward N. Zalta (Ed.). forthcoming URL = <http://plato.stanford.edu/archives/sum2015/entries/zombies/>.

 

Van Gulick, Robert (2014). "Consciousness".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pring 2014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plato.stanford.edu/archives/spr2014/entries/consc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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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06-21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연 님께서 제 글에 응답하시는 글을 올리셨네요.
논쟁은 논쟁자들이 주고 받는 비판과 반박의 추이가 중요한데요.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아래 주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밝힙니다만, 저는 가연 님께 사과합니다.
제 어조가 거칠어서 가연 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이건 제 서투름이고 잘못입니다. 거듭 미안합니다.

퀄리아님에게, 답이 늦어 죄송합니다만.l마이페이퍼
가연 (이메일 보내기) l 2015-06-21 00:28
http://blog.aladin.co.kr/760670127/7606577

qualia 2015-07-08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연 님께 사과한 것은 감정적 측면의 사과입니다. 제 비판에 감정적 요소가 개입했다고 가연 님께서 강하게 반론하시는 것 같아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사과한 것입니다. 즉 논쟁 상대방인 가연 님께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닌가 하는 책임을 느꼈기 때문에 즉각 사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은 제프 호킨스의 논변에 대한 가연 님의 오독과 오해와 오류 여부였습니다. 이것은 분명 객관적 사실 판단의 문제입니다. 주관적/감정적 태도로 대응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약간의 해명을 하고자 합니다.

가연 님께선 제 글 가운데 “심각한 오독/오해/오류”라는 구절을 두고 격투기에서와 같은 “삼단 콤보 필살기”를 굳이 쓸 필요가 있었겠느냐 하시면서 상당한 유감을 표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저 구절은 글자 그대로, 가연 님께서 제프 호킨스를 잘못 읽었기 때문에 (즉 오독했기 때문에), 제프 호킨스에 대한 오해가 발생했고, 그 오해에 근거해 전개한 가연 님의 반대 논변은 오류일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의 축약 표현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오류 발생의 절차적 단계를 사실 그대로 축약해 표현한 것뿐입니다. 즉 그것은 객관적 사태에 대한 객관적 기술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표현을 주관적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객관적/논리적 비판의 강도를 주관적 비난의 과잉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요? 저런 객관적 기술을 가리켜 “격투기”니 “삼단 콤보 필살기”니 하는 수사가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런 객관적 기술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밝히고 싶다면, 역시 객관적 어조와 태도로 반론하면 될 일일 뿐입니다. 이런 절차를 외면하고 객관적 사실 관계를 주관적 이해 관계로 받아들여 감정을 토로하는 것은 또 하나의 오류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연 님의 반박글을 읽으면서, 주관적 문제는 차치하고 객관적 문제에 관한 한, 가연 님의 반론에 수많은 오류가 노정돼 있는 것을 보고 상당한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 오류들을 일일이 분석해 가연 님뿐만 아니라 제3자/독자분들을 납득시키려면 장문의 글을 써올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은 사과가 먼저라고 생각했고 반론은 뒤로 미루기로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가연 님께서 추가적인 논쟁은 필요도 없고 대응도 하지 않겠다는 듯 일방적으로 선언하셨기 때문에 (또한 저보고 직접 그런 ‘무익한 일’은 하지 말라는 투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반론할 의욕이 꺾여버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현 상황은, 예컨대 이쪽에서 오류를 지적했더니 저쪽에서 반론을 펴며 역으로 이쪽의 오류를 지적하고 나온 형국입니다. 즉 제프 호킨스의 논변/주장을 두고 양쪽에서 거의 정반대의 해석을 하면서 대립하고 있는 형국이란 것입니다. (단,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객관적/논리적 대립 측면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주관적/감정적 대립 측면을 말하는 것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이런 대립 상황은 의식(consciousness) 있는 존재한테는 뭔가 불편한 상황이랄 수 있습니다. 즉 논리적 모순이나 불합리한 논증을 아무런 규명 없이 방치하는 행태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 같은 것 말입니다. 만약 이런 최소한의 불편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의식(consciousness)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좀비 의식(zombic consciousness)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참고로 애초에 이 댓글은 가연 님 블로그 글 「퀄리아님에게, 답이 늦어 죄송합니다만.」에 올린 댓글이었음을 밝힙니다. 그런데 논쟁의 추이를 알리는 댓글이 이곳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해서 가연 님 글에 올린 댓글을 이곳에도 올립니다.

qualia 2015-08-30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가로 이어진 가연 님의 반박 댓글과 표젯글을 뒤늦게 읽어봤습니다. 다소 흥미롭긴 합니다. 참고가 될 것 같아 아래에 가연 님 댓글과 표젯글 주소를 적어놓습니다.


가연 님 댓글 :
하아, 기어코 답변을 하게 만드...
http://blog.aladin.co.kr/760670127/7606577#C2471337


가연 님 표젯글 :
하아, 그것 참.. 퀄리아님, 무익하다고 한 이유는.
http://blog.aladin.co.kr/760670127/7639484


가연 님 댓글 :
하루를 답변을 기다렸...
http://blog.aladin.co.kr/760670127/7639484#C2471789


가연 님 댓글 :
설마 설마 했는데..
http://blog.aladin.co.kr/760670127/7639484#C2471930
 
개기는 녀석들을 위한 표준어 정리


저는 개인적으로
“이건 인정해주길 바래요
“뭘 더 바래?”
바랠바래야지
“내 진심만은 알아주길 바랬어
“설렘과 바램으로 부풀었었는데”와
같은 경우에 쓰이는 기본형 “바라다”의 비표준 활용형도
표준어로 인정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인정해주길 바라요
“뭘 더 바라?”
바랄바라야지
“그가 내 진심만은 알아주길 바랐어”와
같은 표준 활용형은 오히려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실생활 대화에서 저렇게 쓰이는 경우는 꽤 드물다고 할 수 있죠. 
거의 모두들 “인정해주길 바래요/뭘 더 바래?/바랠 걸 바래야지/진심만은 알아주길 바랬어” 따위로 쓰잖아요.

제 생각엔 “바라다”가 “바래다”로 변해 대체 활용되는 현상은
단순히 비표준적/비문법적인 오류가 개입된 활용 현상만은 아니라고 봐요.
아직까지도 우리말 문법에는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은
혹은 우리말 언어학자/문법학자들이 주목하지 않았거나 파악하지 못한
음운 현상/언어학적 기제/문법적 규칙 등등이 많다고 봅니다.
그런 밝혀지지 않은 현상/기제/규칙 따위가
저런 비표준적 활용 현상을 일으킨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기본형 “하다/되다” 등등이
“공부를 하라”
“공부를 해라”
“공부를 했다”
“사람이 되라”
“사람이 돼라”
“사람이 됐다”
등등으로 활용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죠. 

위와 같은 경우, 기존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은 기본형 “하다”가 “하라”(○)와 “해라”(○)로 이중 활용되는 걸 허용하고 있죠. 반면 기본형 “되다”가 “되라”(×)와 “돼라”(○)로 이중 활용되는 건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되라”는 또 경우에 따라 허용과 불허를 넘나듭니다.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이 무쟈게 복잡하죠). 또한 “공부를 했다”(○)나 “사람이 됐다”(○)는 허용하는 반면, “공부를 핬다”(×)나 “사람이 됬다”(×)는 허용하지 않고 있죠. 이런 비일관성이 우리말 문법에 비일비재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문법적 비일관성이 “바라다”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표준어 활용 지침에도 나타난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즉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국립국어원에서 제시하는 “바라다”를 적법하게 활용하는 언어학적/문법적 근거와, “공부를 핬다/사람이 됬다”를 틀린 용법으로 규정하고 “공부를 했다/사람이 됐다”를 맞는 용법으로 규정하는 언어학적/문법적 근거가 서로 모순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국립국어원의 표준어 규정에는 과거 시제 선어말 어미 “-았/었-” 성분을 결합한 “하였다”와 “되었다”를 “했다”와 “됐다”로 축약해 사용하는 것이 적법하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이런 문법 규칙을 “바라다”가 “바래다“로 바뀌어 “바래/바래요/바래야지/바랬어” 따위로 활용될 때는 적용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죠. 오히려 국립국어원 측은 기본형 “바래다“와 그 활용형들을 방언이나 잘못된 것으로 치부해 인정하지 않고 있죠. 대신 “바라다”와 그 활용형들만 인정하고, 표준어 규정과 맞춤법 규정에 따라 써야만 한다고 정해놨습니다. 즉 “바라다”의 어근 ‘바라’에 선어말 어미 ‘-아-’를 결합한 ‘바라아-’를 축약 법칙에 따라 ‘바라-’로 줄이고 여기에 다시 여러 어말 어미를 결합해 “바라/바라요/바라야지/바랐어” 따위로 써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별도 표준어로 인정하는 “바래다”는 방언인 “바래다”와는 다른 말로서 (1) 볕이나 습기를 받아 색이 변하다, (2) 볕에 쬐거나 약물을 써서 빛깔을 희게 하다, 이런 뜻으로만 쓴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판단으로는 말/언어의 자연스런 활용 현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해서, 그 밑바탕에 근원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언어 활용 기제를 정확히 밝혀내, 그 자연스런 근원적 기제에 따라 활용되는 말들도 (다시 말해 일반 언중이 폭넓게 사용하게 된 비표준어들도) 적법하고 표준적인 것으로 선별 ·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전향적 시각에서 보면 “바라다”가 “바래다”로 바뀌어 “바래/바래요/바래야지/바랬어” 따위로 활용되는 사례도 얼마든지 표준적 사례로 인정할 수 있다는 얘기죠. 해서 우리 언중들은 오래전부터 “바라다“와 “바래다“를 복수 표준어로 인정해주길 ‘바래왔던’ 것이죠.

 

하지만 우리의 ‘바램’과는 다르게 이번 국립국어원의 《2014년 표준어 추가 사정안 발표》에는 “바래/바래요/바래야지/바랬어” 등등에 대한 전향적 고려가 없어서 아쉬웠습니다(그렇지만 표준어로 인정하는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아무튼 국립국어원 측에서 내놓은 “바라다/바래다”의 활용법에 관한 기존의 규정과 설명은 인위적으로 정립한 문법에 억지로 끼워맞춘 듯한 측면이 많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이것 말고도 국립국어원 측의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에는 이런저런 논란점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죠.

참고로, 위와 같은 제 논리에 따르자면 표준어 “설레다/설렘”에 대응하는 비표준어 “설레이다/설레임”도 얼마든지 표준어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아마도 실생활 대화에서는 “설레이다/설레임”이 훨씬 더 널리 쓰일 것입니다.

위 사안은 논란의 여지가 아주 많은 사안이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 중간 정리하는 차원에서 간략히 적어본 것입니다. 그러나 저 또한 아직 국어 문법을 잘은 모르기 때문에 오류를 저질렀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좀 더 깊이 논의할 숙제로 남겨놔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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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8-23 2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준말만 생각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어떻게든 쓸 수 있는데
`바래다`가 ˝빛이 바래다˝라는 뜻이 워낙 세기 때문에
`꿈을 바라다`를 나타내는 `바라다`를 `바래다`로도 쓰는 일은
아마... 아주 힘들리라 느낍니다 ^^;

qualia 2015-08-26 02:00   좋아요 2 | URL
숲노래 님, 의견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의견은 현대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바라다’의 변형 ‘바래다’를 문맥과 상황에 따라 아주 많이 쓰고 있다는 관찰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의견은 일종의 변형 ‘바래다’가 표준말 ‘바라다’와 같은 뜻을 나타내는 낱말로서 공존하고 있는 현상/현실을 그것 그대로 반영하고 기술한 것이란 얘기죠. 현대인들의 언어 생활을 잘 살펴보면 쉬운 발음 선호 현상이나 특정한 어감 선호 현상 따위 때문에 ‘바라다’보다는 ‘바래다’를 쓰는 경우가 많이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형태와 뜻과 문법도 바뀌어가지 않을 수가 없겠죠. 그렇다면 표준어 ‘바라다’의 변형 ‘바래다’가 21세기 들어 현대인들 사이에 아주 많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언어학자/문법학자나 언어연구소/문법연구소 등등은 외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언어 현상/현실을 받아들여 공식화하는 절차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제가 판단컨대 표준어 ‘바라다’의 변형 ‘바래다’는 이미 그런 주목을 받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언어학자/문법학자나 언어연구소/문법연구소 등등은 밥먹고 놀고만 있다고밖에 할 수 없는 겁니다.

숲노래 님, 저한테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ccsajaksks 2016-09-07 17: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바래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기 때문에 복수표준어로 인정되면 좋겠다는 것은 이해하겠으나 예시가 부적절하네요
일단 이중활용이라는 말을 처음 봅니다 됐다는 되다에 -았/었을 붙여 되었다로 활용된 후 되어가 축약되어 됐이 된 것이지 이중으로 활용된 것이 아닙니다 했다도 하다에 불규칙 -여가 붙어 하였다로 활용된 후 하였이 했으로 축약된 것이구요 이중활용이 아니라 보았다가 봤다로 축약되는 것과 같은거죠
바래, 바램은 원형 바라다에 -아,-았이 붙고 난 후에 축약된 형태가 아니기때문에 문법적으로 틀린게 맞습니다
-하다로 끝나는 모든 단어가 -여로 불규칙활용되는 것처럼 -라다로 끝나는 단어가 모두 -래로 활용되면 불규칙활용으로 인정 할 수도 있겠으나 자라다처럼 자래, 자램으로 활용하지 않는 단어들이 있기 때문에 표준어로 인정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설레이다는 활용의 문제가 아니라 사동표현이 아닌 것에 사동접사 -이를 잘못 썼기때문에 틀립니다
-이는 먹다 -> 먹이다 처럼 어떠한 행동을 시켰을 때 붙이는 것이고 누군가가 설레게 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설레는 것이기 때문에 설레이다가 아니라 설레다가 맞습니다 설레이다라는 말 자체가 없고 설레다 설레었다 설렜다 설렘으로 활용됩니다

qualia 2016-09-07 20:17   좋아요 2 | URL
tjwus 님,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tjwus 님께서 반론하신 사항들에 관해선 앞으로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국어 문법은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미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분석해서 비판해주신 점 거듭 고맙습니다.

과객4 2016-10-05 00: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검색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많이 쓴다`라는 것 자체가 합리성을 보장해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현재만을 기준으로 보면 규정을 바꾸는 게 편할지 모르지만 미래의 잠재적 한국어 사용자(한국어는 한국인만 쓰는 언어가 아니죠)의 수를 생각하면 불규칙 활용은 적을수록 좋다고 봅니다. 바래를 인정해야 하는 근거는 오직 `익숙함` 뿐인데 그건 막상 적응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qualia 2016-10-11 12:57   좋아요 2 | URL
과객4 님, 촌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과객4 님의 위 논리는 그 논리 자체만으로는 충분히 성립 가능하다고 봅니다. 다만 제가 위에서 전개한 논리에 대한 완전한 반박 논리로는 좀 미흡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점에 대해 조목조목 분석해서 답변드리고 싶습니다만, 우선은 제가(제 주장이) 모자란 점이 무엇인가 살펴보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저한테 생각할 수 있는 논점을 던져주셔서 거듭 고맙습니다. 답글을 늦게 드려서 죄송하고요~.

국립 2020-04-27 2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한국어 문법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이 많은데, 실생활에서 ‘설레다/설렘‘보다 ‘설레이다/설레임‘이 훨씬 더 널리 쓰인다고 ‘설레이다/설레임‘도 표준어로 삼자고 하는 것은 ‘젖이나‘를 [저지나]보다 [저시나]로 발음하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에 [저시나]로 발음하는 것도 허용하자는 것과 같은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요?

qualia 2020-06-20 21:33   좋아요 0 | URL
국립 님, 제시하신 비유가 그닥 잘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범주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설레다/설렘”에 대응하는 비표준어 “설레이다/설레임”이 언중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사용돼가고 있는 사례와 “젖이나”라는 말의 발음 사례가 [저지나/저시나]로 양분돼 나타나는 사례는 비교 자체가 다소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앞의 사례는 표기와 발음 양 측면 모두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례인 동시에 그 발생 빈도가 언어학자나 문법학자의 발상의 전환이나 심층적 연구를 요청할 만큼 큰 사례인 반면에, 뒤의 사례는 표기 측면에선 거의 발생 빈도가 0에 가깝고 발음 측면에선 [저지나]와 [저시나]의 각각의 실제 발생 빈도가 어떤지 거의 알려진 게 없는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앞의 사례와 뒤의 사례를 엮어서 동등하게 비교하거나 비유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얘깁니다.

아무튼 저는 현단계 한국어 표기 체계나 문법 체계 등등이 매우 비논리적이고 너무 허술하고 구멍이 뻥뻥 뚫린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문제 의식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 의식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 “바라다/바래다” · “바람/바램” · “설레다/설레이다” · “설렘/설레임” 등등에서 나타나는 현대 언중들의 표기/발음 변화 양상을 좀 더 깊이 조사 · 분석하고, 그런 양상에 내재된 음운학 · 발음학 · 언어학 · 문법학적 기제와 기반을 밝혀 이론화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또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답글을 너무 늦게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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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조기홍 기자는 『21세기 자본』 한국어판을 비판하는 글에서 “자의적 문장수정의 문제”를 거론한다. 이 지점에서 조기홍 기자는 한국어판을 비판하기에 앞서 먼저 영어판의 문제점/오류를 지적한다. 그런 다음 한국어판도 영어판을 따라서 비슷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으며, 유사한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기홍 기자의 비판 자체가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해당 부분에서 영어판의 번역은 원저자/원전의 기본 의도/의미를 큰 오류 없이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의적 문장수정”이니 오역이니 하는 조기홍 기자의 주장이 오히려 오류라고 판단한다. 왜 그런지 좀 더 자세히 보자.

조기홍 기자는 원서 51쪽의 “La première évolution, représentée sur le graphique I.1(그림 I.1에 비친 첫 진화)”라는 문구가 영역본 23쪽에서는 “The US curve, shown in Figure I.1(그림 I.1에 비친 미국 곡선)”으로 둔갑했다고 비판한다. 얘긴즉슨 자의적 문장수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원서 53쪽의 “둘째 진화(La seconde évolution)”가 영역본 25쪽에서는 “둘째 유형(The second pattern)”으로 둔갑했다고 지적하면서 이것도 자의적 문장수정에 해당된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영어판을 저본으로 삼은 한국어판이 (영어판을 따라) 위 해당 문구를 각각 “도표 I.1의 곡선”과 “두 번째 패턴”으로 번역한 것 또한 자의적 문장수정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즉 영어판이나 한국어판 모두 해당 번역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 비판은 프랑스어 원전과 영어판의 앞뒤 문맥을 거두절미한 아전인수식 오비판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면 위에서 조기홍 기자가 문제삼는 부분은 프랑스어 원전의 머리말(Introduction) 가운데 두 소항목 “Forces de convergence, forces de divergence”와 “La force de divergence fondamentale : r > g”에 각각 나오는 부분인데, 이 부분을 앞뒤 문맥을 모두 고려해 읽어보면 문제의 “La première évolution”과 “La seconde évolution”은 두 개의 그래프 상에서 해당 곡선들이 각각 뻗어나간 양상/양태/모양을 가리키는 표현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서 문제의 핵심인 “évolution”은 진화론에서의 그 진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래프 곡선이 뻗어나간/전개되어 나간 양상/양태/모양을 가리키는 용어라는 것이다. 영어로는 “pattern”에 해당하는 것이랄 수 있다(“pattern”을 이때 “유형”으로 옮기는 건 빗나가는 번역이다. “양상”이나 “양태” 따위로 번역해줘야 적절하다).

영역자는 이런 의미를 바탕에 깔고 “évolution”을 상황과 문맥에 따라 적절하고도 다양하게 번역했다. 따라서 영어판에서 “évolution”을 “curve”나 “pattern”으로 번역한 것은 자의적 문장수정이 전혀 아니거니와 오역은 더더구나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영어판에서 “evolution”으로 번역해줘도 된다. 그러나 “évolution”과 “evolution”은 원래 어원적으로 진화라는 개념보다 먼저 전개/진전/발전/변화라는 뜻으로 시작된 단어다. 피케티는 이런 원래 의미로 저 단어를 구사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불어 “évolution”을 영어 “evolution”으로 번역한다 하더라도 상기의 문맥에서는 전개 양상 혹은 양태로 새기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조기홍 기자의 자의적 문정수정이라는 번역비판은 문맥적 고려를 상실한 거두절미 오류와 아전인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토마 피케티는 머리말에서 두 개의 그래프를 제시하고 있다. 즉 미국의 소득 불평등(L'inégalité des revenus aux États-Unis, 1910-2010; Income inequality in the United States, 1910-2010)을 나타내는 그래프와 유럽의 자본/소득 비율(Le rapport capital/revenu en Europe, 1870-2010; The capital/income ratio in Europe, 1870-2010)을 나타내는 그래프 두 개다. 이들 그래프를 보면 예의 소득 불평등과 자본/소득 비율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즉 피케티는 방대한 자료에 기초해 상기 항목들의 추이/전개/변화 양상을 시각적으로 아주 잘 표현해줬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두 가지 추이/전개/변화 양상을 설명하면서 피케티는 “La première évolution”과 “La seconde évolution”이라는 용어를 동원한 것이다. 또한 피케티는 상기한 위 두 소항목에서 “évolution”이란 단어를 모두 12차례나 구사하고 있다. 그런데 영어판 번역자 아서 골드해머(Arthur Goldhammer, 아써 골드해머)는 이 12차례 가운데 단 한 차례만 “evolution”으로 번역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탈리아어판도 살펴봤는데, 그 해당 번역자(Sergio Arecco, 세르죠/세르지오 아레코) 또한 단 두 차례만 “evoluzioni”와 “evoluzione”로 번역했을 뿐이다. 즉 두 번역자 모두 원전의 “évolution”을 진화론의 진화가 아닌 그래프의 곡선이 나타내는 추이/전개/변화 양상이나, 곡선 그 자체, 그래프/곡선이 드러내는 것, 표상하는 것, 지시하는 것, 따위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아래에 인용해놓은 해당 원문과 각각의 번역문을 확인해보면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 프랑스어 원문은 51-53쪽에 나오는 순서대로 인용한 것이다. 프랑스어판 원문과 이탈리아어판, 영어판 번역문을 각각 ⓕ, ⓘ, ⓔ로 나타낸다.

1 
ⓕ deux évolutions fondamentales
ⓘ due indicatori fondamentali
ⓔ two basic patterns

2
ⓕ Les évolutions indiquées sur ces graphiques ~
ⓘ Entrambe le rappresentazioni disegnano ~
ⓔ Both graphs depict ~

3
ⓕ ces évolutions renvoient à des phénomènes tout à fait différents
ⓘ queste rimandano a fenomeni del tutto diversi
ⓔ The phenomena underlying the various curves are quite different

4
ⓕ la première évolution concerne avant tout les États-Unis
ⓘ la prima riguarda innanzitutto gli Stati Uniti
ⓔ the curve in Figure I.1 represents income inequality in the United States

5
ⓕ ces deux évolutions et ces deux forces de divergence
ⓘ le due evoluzioni e quindi i due fattori di divergenza
ⓔ the two forces of divergence라고만 번역하고 ces deux évolutions 부분은 번역을 빼먹었음.

6
ⓕ Mais à ce jour ces deux évolutions saisissantes correspondent
ⓘ Per il momento, comunque, i due indicatori, di per sé impressionanti, corrispondono
ⓔ Thus far, however, these striking patterns reflect two distinct underlying phenomena.

7
ⓕ La première évolution, représentée sur le graphique I.1, indique la trajectoire ~
ⓘ Il primo indicatore, rappresentato nel grafico I.1, indica la curva ~
ⓔ The US curve, shown in Figure I.1, indicates ~

8
ⓕ Nous verrons que cette évolution spectaculaire correspond ~
ⓘ Vedremo che un’evoluzione tanto spettacolare ~
ⓔ I will show that this spectacular increase ~

9
ⓕ Cette évolution s'observe surtout aux États-Unis ~
ⓘ 해당 문장 번역 누락됨.
ⓔ This phenomenon is seen mainly in the United States ~

10
ⓕ La seconde évolution, représentée sur le graphique I.2 ~
ⓘ Il secondo indicatore, rappresentato nel grafico I.2 ~
ⓔ The second pattern, represented in Figure I.2 ~

11
ⓕ l’évolution à long terme de la répartition des richesses.
ⓘ la curva a lungo termine della distribuzione delle ricchezze.
ⓔ the long-run evolution of the wealth distribution.

12
ⓕ Le graphique I.2 indique l’évolution au Royaume-Uni, en France et en Allemagne de la valeur totale ~
ⓘ Il grafico I.2 indica la variazione, nel Regno Unito, in Francia e in Germania ~
ⓔ Figure I.2 shows the total value of private wealth [···] in Britain, France and Germany ~ (해당 용어 번역 누락됨)

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바와 같이 피케티가 구사한 “évolution” 사례 대부분은 “진화”라고 번역해줄 필요가 거의 없다. 물론 진화라고 번역해도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화라는 번역은 기껏해야 차선책밖에 안 된다. 상기 문맥에 더 잘 들어맞는 최선의 번역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선을 놔두고 굳이 차선을 택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데 조기홍 기자는 자신의 비판글에서 영어판 번역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오류/오역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건 한마디로 적반하장식 오비판이다. (적반하장은 넘 표현이 강한 것인데, 다른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일단 쓰기로 한다. 이건 내 잘못이다.) 적어도 맥락과 문맥을 살피지 못한 빗나간 비판이고, 지나친 침소봉대다.

즉 조기홍 기자는 오마이뉴스 번역비판 기사에서 “최근 번역된 <21세기 자본>의 한국어본은 이런 비극적 현실을 집약적으로 응축하고 있는 사례”이며, “다수의 역자가 참가하고서도 영역본의 오류도 바로잡지 못한 것은 21세기 대한민국의 문명사적 수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비극이다”라고 강하게 질타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조기홍 기자의 다른 비판 항목에는 많이 동의한다. 하지만 위와 같은 비판은 지나친 엄숙주의와 단죄주의의 표출이라고 본다. 우리는 남을 비판할 때, 완전무결하지도 못하고 완전무결할 수도 없으면서 완전무결주의의 잣대를 너무 엄격/엄숙하게 들이댄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도 결정적인 오류를 저지르면서, 즉 우리가 남을 비판할 때 우리 자신 또한 숱한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망각하고는, 상대방의 오류를 만인 앞에 폭로해 일도단죄해야 할 중죄처럼 준엄하게 꾸짖는다는 것이다. 이런 엄숙주의와 단죄주의는 의사소통적 대화를 차단한다. 비판/비평은 원래 대화의 요청이다. 번역비판/번역비평은 좀 더 나은 번역을 위한 대화와 논쟁의 요청이다. 엄숙주의/단죄주의로는 그게 어렵다고 본다. (나 자신 또한 얼마나 엄숙주의와 단죄주의에 빠져 있었던가. 돌아보면 쓴웃음 나오고 자조에 빠진다.)

참고로 나는 『21세기 자본』 한국어판은 아직 입수하지도 못했고 읽지도 못했다. 해서 영어판을 저본으로 했다는 한국어판 번역 상태가 어떤지는 거의 모른다(해서 조기홍 기자의 영어판 비판만 문제삼은 것이다). 근데도 『21세기 자본』에 평점 별 다섯 개를 주었다. 왜냐면 원저 『Le capital au XXIe siècle』과 영어판 『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가 전세계 학자들과 독자들한테 높은 평점을 받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좋은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불평등에 대한 피케티의 핵심 주장에 동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 평점을 한국어판 번역 상태에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어판에 대해서는 내가 아직 뭐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윗글은 오마이뉴스에 실린 조기홍 기자의 다음 글을 읽고 쓴 것이다.
피케티 <21세기 자본> 한국어판 번역, 이래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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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점이 온다 -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
레이 커즈와일 지음, 김명남.장시형 옮김, 진대제 감수 / 김영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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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유명한 물리학자이자 과학저술가인 폴 데이비스가 레이 커즈와일의 저서『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를 논평한 글입니다. 이 원문은 과학 주간지《네이처Nature》2006년 03월 23일자 421-422 쪽에 실려 있습니다. 레이 커즈와일의 저서『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출간에 맞춰 독자님들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원문을 번역해서 한번 올려봅니다.

폴 데이비스는 레이 커즈와일을 과학적 논증의 부실함과 오류를 들어 매우 냉소적으로 비판합니다. 그래도 저는 레이 커즈와일을 정말 좋아합니다. 미쳐야 미친다! 이토록 첨단 과학의 유토피아를 열광적으로 추구하는 한 “미치광이”가 또 있을까요?『지적 기계의 시대The Age of Intelligent Machines』에서『영적 기계의 시대The Age of Spiritual Machines』를 거쳐, 다시『특이점이 온다』의 시대로 과학 신앙에 미쳐 과학 천국을 줄기차게 부르짖어온 일편단심 과학의 광신도...과학의 미치광이... 미쳐야 미친다! 저는 이런 과학 미치광이 커즈와일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커즈와일의 예언은 필연적입니다. 폴 데이비스의 비판적 견해와는 달리 커즈와일의 광적인 상상 세계는 그것을 훨씬 더 초월해서까지 실현되리라 확신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제 생각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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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데이비스Paul Davies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 이론물리학, 우주론, 우주생물학)

 

컴퓨터가 우주를 접수하는 그날

 

현재의 정보처리능력의 기하급수적 증가가 끊임없이 지속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내가 학생 시절에 배웠던 다음과 같은 계산 하나가 생각난다. 만약 물리학 학술지들이 일정한 비율로 계속해서 늘어난다면, 20세기 말쯤에 가서 도서관의 서가는 그 학술지들을 소장하기 위해 빛의 속도로 확장돼 나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터무니없는 사례는 이른바 기하급수적 증가의 오류the exponential-growth fallacy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과학기술에서 이런 사례는 수두룩하다. 1969년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은 외계 행성으로 나아가는 작은 첫걸음으로 전지구적 찬사를 받았는데, 이는 2001년까지 거대한 달 기지 건설과 목성 탐사가 실현될 것이라는 아써 C. 클라크의 예측에 잇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우주과학기술의 현단계는 어떠한가). 2차 세계대전 뒤로 제조업 분야에 로봇공학이 빠르게 도입되면서 수십년 안으로 사이보그 도우미와 앤드로이드 군대가 출현할 것이라는 예측들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그 과학기술들은 난관에 부닥쳤거나 심지어 뒷걸음질치기까지 했다.

 

기하급수적 성장에 관한 핵심적 요점은, 그것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폭주하는 팽창의 조건들은 항상  특이하고 일시적인 것이다. (물론 팽창하는 우주는 가능한 예외이긴 하다). 그러나 이러한 온건한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래학자이자 저술가인 레이 커즈와일은 정보처리 분야에서의 기하급수적 성장, 나아가 기하급수적 성장 이론에 호소해 왔다. 물론 컴퓨터가 놀라울 만한 성능 향상을 거듭해 왔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텔의 공동창업자 고든 무어Gordon Moore는 컴퓨터의 정보처리 능력이 18개월마다 2배씩 늘어날 것이라고 30여년 전에 예측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예언은 지금까지 잘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커즈와일은 무어의 법칙이 마치 자연 법칙이나 되는 것처럼 그것에 근거하여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정보처리기술이 기존의 삶을 뒤바꾸고 넘어서게 해줄 근미래를 예측한다. 그는 낯익은 기존의 인간 문화가 무제한적인 컴퓨터 기술의 거센 물결 앞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는 절정의 시점을  ‘특이점singularity’이라 이름한다. 이 용어는 한 양의 변화 비율이 무한대가 되는 지점을 가리키는 수학적 특이점과 대체로 비슷한 것이다.

 

만약 정보처리에 관한 한 한계가 없다면, 어렵지 않게 그 놀라운 응용의 사례들을 생각할 수 있다. 무엇을 먹어야 할지 결정하는 것조차 귀찮다고? 그러면 한 떼의 나노 감지기로 당신의 내장을 검사하고 개인용 무선 통신망을 통해 자동으로 알맞은 영양소를 주문하시라. 죽음이 두렵다고? 그러면 알아서 척척 해주는 나노봇을 당신의 몸에 대량 투입해 늙어가는 당신의 생명체계를 계속 진단 복구 회춘케 함으로써 불로장생을 누리시라. 아니면 더욱 좋은 방법이 있다. 즉 당신의 마음을 사이버공간에 ‘올려주시라/전송하시라upload.’ 그곳에서 당신은 물리적인 몸에 얽매이지 않고 더 많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으리라. (번역안: download = 내려받기, upload = 올려주기, 올려넣기, 올리기)

 

문제는 이런 공상과학적인 생각이 진짜로 가능할 것인가가 아니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그 공상이 기반하고 있는 전제, 즉 정보처리 능력에서의 무제한적인 기하급수적 성장 이론이, 폭주하는 팽창의 다른 모든 사례를 결국에는 무력화시키는 엄격한 제한조건들을 과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컴퓨터 기술(계산/연산, computation)의 가속도적 성장이 서서히 멈추게 되리라는 하나의 명백한 논거는 자원의 이용가능성(가용성, the availability of resources)과 관련이 있다. 지구 자원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정보저장체계, 비트bit 생산체계의 가동에 남김없이 소진되었을 때, 과연 그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커즈와일에겐 이미 답이 마련돼 있다. 즉 우리가 우주로 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We”는 속명generic term이다. 즉 “우리”는 머지않아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우주적 발달 단계를 총지휘할 운명을 떠맡게 되는 지적 존재로서, 일종의 초수퍼컴퓨터superdupercomputers일 것이다.) 그러나 가차없는 기하급수적 법칙의 논리에 따라, 얼마 가지 않아서 자원에 굶주린 그 체계는 은하계를 가로질러 가속 팽창한 끝에 빛의 속도에까지 다다를 것이다. 도서관 서가의 물리학 학술지의 예에서와 같이 기하급수적 성장은 여기서 멈출 것이다. 아니, 정말로 그럴까? 커즈와일은 빛의 속도의 한계는 깨질 것이라는 착상을 들고 나온다. 그것은 단지 몇 세기 안에 전지전능한 초지능적 존재가 전 우주를 접수할 것이라는 현기증 나는 전망으로 이어진다.

 

이같이 들뜬 상상은 읽기에는 아주 즐겁지만, 왕창 에누리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커즈와일의 논증에서 가장 큰 허점은, 우리가 정보처리능력을 충분한 만큼 자유롭게 향상시켜 나간다면, 자연을 우리 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리라는 묵시적 가정이다. 태양계를 통제하겠다고? 단지 정보처리 속도를 몇 번에 걸쳐 2배씩만 높히시라. 그러면 태양계는 우리 손안에 들어올 것이다. 생명 창조는? 의식consciousness을 복제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은 더 값싸고 더 빠른 정보처리소자를 만드는 문제로 귀결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물리학의 법칙들은 그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일 것이다. 과학기술은 물리법칙을 써먹을 수는 있어도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정보처리의 속도와 양이 아무리 빠르고 많더라도 중력법칙을 일시 정지시킬 수는 없으며 영구기관을 만들 수도 없다.

 

커즈와일의 예측을 뒷받침하는 물리학에 관해 논하자면, 그는 불분명하거나 잘못 알고 있다. 컴퓨터 기술(계산)과 나노과학기술이 폭발적으로 성장함으로써 야기되는 엄청난 전력수요는 그에 동반하는 연료전지와 고온초전도체와 같은 전력생산 기술에서의 ‘수확 가속의 법칙law of accelerating returns’ 으로 충족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들이 기술적 문제에 부딪친다면, 까짓 것, 나노봇을 투입하기만 하면 해결 끝이다. 커즈와일은 선언한다. “에너지를 포함해서, 모든 과학기술은 근본적으로 정보기술이 될 것이다.”

 

커즈와일은 논란 많은 빛의 속도의 (증가) 문제에 관해, 전자기력의 세기를 표현하고 빛의 속도를 한 요소로 포함하는 미세구조상수fine-structure constant가 지난 60억년 동안 아주 조금씩 증가돼 왔으리라는 증거를 인용한다. 그러나 그 첫 증거는 호주의 뉴 사우쓰 웨일즈 대학교University of New South Wales의 존 웹John Webb과 그의 동료들이 행한 퀘이사(준항성) 스펙트럼선 분석에서 나온 것이지, 커즈와일이 말하는 것처럼 아프리카 가봉에서 발견된 오클로 광산의 천연원자로Oklo natural nuclear reactor in Gabon 연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설사 그 관측이 미세구조상수의 값을 조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고 해도, 그것이 빛의 속도는 증가시키면서 동시에 그밖의 모든 것은 불변수로 놔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인 즉슨, 그 조정은 미세구조상수 값의 감소를 포함할 것이며, 이것은 또 원자 수준에서의 정보처리 속도를 떨어뜨릴 것이고, 따라서 자기파기적임self-defeating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문적인 내용의 결함은 몹시 거슬리는 점이다. 하지만 이 책을 과학적인 학술서로 읽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이 책은 오로지 인간의 상상력만이 한계지을 수 있는 과학기술적 가능성의 끝간데를 마음껏 가로지르는 미래학적이면서 조금은 숨막히는 한바탕의 질주다. 커즈와일은 그의 미래전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위해 ‘특이점주의자singularitarian’라는 대단히 거창한 용어를 만든다. 만약 커즈와일이 옳다면, 우리는 모두 딱 29년이 지난 다음 특이점주의자가 되리라. 그럼 그때까지 버텨볼 일이다.

 

[원문 출처]

Davies, Paul (2006). When computers take over: A review of The Singularity is Near by Ray Kurzweil. Nature Vol. 440: 421-422 (the issue of 23 March 2006).

http://cosmos.asu.edu/publications/articles/TheSingularityIsNearMar06.pdf

http://www.nature.com/nature/journal/v440/n7083/full/440421a.html?foxtrotcallback=true

 

[참고] 폴 데이비스는 2006년 9월에 호주의 맥쿼리 대학교Macquarie University에서 미국의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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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특이점이 온다 -레이 커즈와일
    from 김재호의 디지털보단 아날로그 2009-06-21 21:39 
    특이점이 온다 - 레이 커즈와일 지음, 김명남.장시형 옮김, 진대제 감수/김영사 회사에 과학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이 책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앞으로 변할 미래 세계의 모습을 담은 책인데, 그리 멀지 않은 미래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변화를 예언하고 있어서 나는 사이비같은 이야기라 생각하고 한귀로 흘려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진대제의 열정을 경영하라라는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고는, 그가 쓴 다른 책이 없을까 하고 찾아봤는데 이 책이 떡하니 나오..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상 까치글방 150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지음, 박여성 옮김 / 까치 / 199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박여성 님이 번역한 『괴델, 에셔, 바흐』는 완전한 오역의 종합판입니다. 이런 불량 번역판을, 출간한 지 무려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찍어내고 있는 출판사와 번역자는 크게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번역자 박여성 님과 도서출판 까치 측에게 엄중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식인의 양심과 윤리가 아니더라도 흔한 세상의 상식에 비춰볼 때, 이런 불량 번역판을 자세한 내역을 모르는 독자들에게 계속해서 판매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양심적이고 반지식인적 행태입니다. 박여성 님의 번역판 『괴델, 에셔, 바흐』는 원문의 오독, 오역, 180도 정반대역, 비문이 책 전체에 걸쳐 수도 없이 넘쳐납니다. 따라서 이 번역판은 정상적인 독서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오직 자신의 지적 수준만을 탓하며 이 심오한(?) 번역판을 암호 풀듯 해독해 나가시느라 머리를 쥐어뜯으셨을 수많은 독자님들! 이제 이 번역판을 집어던지시길 감히 권합니다. 결코 우리 독자들의 지적 수준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래의 원전 『괴델, 에셔, 바흐』는 책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논증 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많은 논리적 추론 과정과 연쇄적인 논증 절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갖 학문의 경계선을 종횡무진하며 전개되고 있죠. 그런데 이렇게 맛물리고 엇물리고 겹겹이 중첩된 그물망 혹은 다중 고리의 논증 체계에서 번역이든 해독이든 첫 단추를 잘못 끼우게 되면, 우리는 그 순간부터 단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 독자들이 이 번역본을 읽다가 맞닥뜨리는 이런 골치가 지끈지끈거리는 독해의 어려움은 원전의 심오함 때문도, 우리의 부족한 지력 때문도 아닙니다. 바로 원저의 완벽한 논증 전개를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망쳐 놓은 불량 번역 탓이었던 것입니다. 원문의 의미를 180도 정반대로 오역한 곳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최악의 불량 번역문을 기진맥진 헤쳐나가는 순수한 우리 독자들이 진퇴가 불가능한 의미불통의 덫에 단단히 걸려들고 마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이미 알만한 분들은 이 번역본의 터무니없음을 다들 알고 있죠. 그러나 이 명백한 불량 번역판을 그냥 방치하고 있는 우리의 출판계, 나아가 소위 지식인들, 학계, 번역계는 도대체 어찌된 것입니까? 이것은 그냥 하나의 사소한 오역의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호프스태터의 원전이 우리에게 끼치는 학문적 영향력과 그 중요성은 우리의 소위 지식인들이 이 한국어판이 출간되었을 때 앞다투어 서평란을 만시지탄이니, 일대 사건이니 하며 찬사/감동/경외감 일변도로 채웠던 데서 잘 드러납니다. 그동안 우리의 지식인들은 현란한 지식의 향연이니 철학 문학 예술 과학의 왼갖 꽃봉우리들을 종횡무진한다느니 하면서 이 번역본을 현학의 전거와 과시로써 얼마나 많이 인용해 왔습니까? 게다가 서울대는 권장도서 100권 중 하나로 이 번역본을 선정해 열심히 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말이 되지 않는 엉터리 번역문과 악전고투하며 악순환의 두뇌 씨름을 벌이는 우리 독자들에게 『괴델, 에셔, 바흐』 불량 번역판이 끼치는 엄청난 손실과 해악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헛되이 소모되어 날아가 버리는 독자들의 지적 에너지와 귀중한 시간을 그 누가 보상할 것입니까? 거듭 말씀드리건대, 번역자 님과 출판사는 이제부터라도 이 불량 번역판을 하루빨리 모두 거둬들이시길 촉구합니다. 심각한 문제점을 통감하여 다시 번역하여 재출간하기로 했다면, 먼저 회수하는 것이 당연한 절차 아닙니까?

이 오역의 종합판은 "자비의 원리principle of charity"를 아무리 후하게, 아무리 정교하게 적용하여 읽어나간다 해도 선의의 독자들을 끝내는 배신하고 마는 불량품에 불과합니다. 거듭 해당 번역자와 출판사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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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2015-01-22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전 원서로만 봐서 몰랐습니다만, 번역 문제가 꽤 심각한가 보군요.
그간 지인 몇몇분들께 번역본으로 선물했었는데,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qualia 2015-01-22 23:11   좋아요 0 | URL
surlogic 님, 댓글 고맙습니다.

윗글은 제가 알라딘에 블로그를 만든 날에 써올린 것이군요. 사실 윗글 써올리고 난 뒤로 얼굴이 화끈거리고 쓴웃음도 나오고 자조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뭐 핵심적 주장 내용은 지금도 철회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 어조가 자못 심각/엄숙/엄정하고 비장하기까지(?)해서요;;;;;ㅠ 즉 경직된 엄숙주의와 단죄주의가 너무 생경하게 드러나고 있는 글입니다. 윗글 뒤로 저는 이런 경직된 자세에서 벗어나기로 했습니다(만 아직도 유연성/융통성/자기지시능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surlogic 님 덕분에 서툴렀던 지난날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했네요. 감사 드립니다.

닉네임 2015-01-23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qualia님 블로그를 살짝 구경하게 됐습니다.
제 쾌락 분야가 인공지능/인지과학인데, 이곳에서 많이 접할 수 있네요.

qualia 2015-01-23 22:26   좋아요 0 | URL
네, 저도 surlogic 님과의 댓글 대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기회가 되면 흥미진진한 인공지능/인지과학 얘기 나눌 날도 오겠지요.
우리나라 인공지능/인지과학 전문가들이 정말 탁월하고 흥미진진한 책을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대니얼 데닛, 미치오 카쿠, 레이 커즈와일, 닉 보스트럼처럼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