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서구의 단어 ‘liberal’혹은 ‘liberalism’이라는 단어를 自由라는 단어로 해석하였다. 自由라는 한자어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불교 용어를 참고해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는 억압되지 않는 것, 자기 스스로 권리를 향유하고 누리는 것에 대해 자유라는 이름을 명명하였다. 이로써 동아시아에서 자유라는 개념이 최초로 등장하였다. - <근현대 일본, 이토 히로부미 후쿠자와 유키치 이마니시 류 아베 신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4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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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보수정치 집단과 그들을 지지하는 지식인층도 현대 일본에있어서 가치가 결여되고 있는 점에 대해 초조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젊은층, 특히 안정된 생활로 연약해진 젊은 층이 표류하고 방향성을 잃는 듯이 보였다. 전직 해군 출신이자 다나카파와 가까운 나카소네 야스히로#윷출하는 1980년대 중반 총리가 되자 신민족주의를 고양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의 총리 재임 기간(1982~1987)과 연계된 민족주의에관한 선전은 오히려 구 민족주의와 더 유사하게 들렸다. 그 요소는 군주국의 가치, 황실제도의 숭배, 일본 정신의 독특성 등이었다. 이 요소들 중일부는 수년간 일본 교직원노조와 마르크스주의 식자층들이 기계적으로양산해낸 좌파 도그마에 대한 반명제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동시에그것은 부분적으로는 경제적 힘을 확대하는 것만이 유일한 정치적 목적이었던 국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서투른 시도이기도 했다. 또한 민족주의자들이 일본성의 정수를 응시한 것은 어설프지만 정치적 담론을바꾸어 보려는 것이었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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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 일터 - 당신을 위한 회사는 없다
데이비드 와일 지음, 송연수 옮김, 강수돌 감수 / 황소자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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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대리 책임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시키기 위해 대리인에게 가능한 한 통제권을 행사하지 않으려 한다(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보다 효율적인 경우에서조차). 이러한 상황은 훨씬 더 큰 문제로이어질 수 있다. 가령하청업체가 재정적으로 건실하다면(지불능력이있다면), 실수나 사고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을 고스란이 떠안게 된다.
이 경우 대기업은 법적 책임이 없지만 하청업체들은 상대적으로 높은가격이란 형태로 잠재적 비용 일부를 대기업에게 부담시킬 가능성이있다. 그런데 만약 하청업체가 재정적으로 부실하다면 곧 지불 불능"
상태가 된다. 게다가 자산이 거의 없는 탓에 경쟁력이 떨어지는 이들하청업체는 서비스 제공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기업은 지불 불능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대리인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 P264

무슨 거창한 경제이론이 아니다. 제2부에서 제시한 여러 사례의 특징을 찬찬히 떠올려보기만 해도 납득이 가는 이야기이다. 기지국 철탑, 석탄 채굴, 로지스틱스 산업에서 기업들은 대부분 규모가 작고 자본이 적으며 재정적으로 부실한 계약자들을 활용한다. 자본 총액과재원이 빈약하고 불안한 청소용역이나 홈헬스케어 산업에서 가맹본사들은 주로 최근 이주한 이민자들에게 가맹점 영업권을 판다.  - P264

이스터부룩 판사는 대리 책임 독트린 하에서 발생하는 유사 문제들을 예로 들며, 기업이 지불 불능 하청업체를 고용하려는 의도를 감안할 때 사적 이해와 공적 이해의 조율 차원에서 공동 고용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만약 자라테(레이즈의 인력 브로커)가 지불 능력이 있었더라면, 레밍턴(옥수수종자 회사)은 그에게 모든 노동자의 임금(최저임금과 초과근무 수당 포함)을 지급하고 주거와 같은 부가혜택 비용을보장하고도 이익을 낼 수 있을 만큼의 대가를 주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계약업체가 위험을 감수할 여력이나 개인적 자산이 없을 경우노동자들의 돈을 떼먹으려는 유혹을 받기 쉬우므로(자라테가 한 것처험), 주인 회사를 별도 고용주로 내세우는 것이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필수조치가 된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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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도 일본의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미노베 사건당시 서로 으르렁대던 두 파, 즉 황도파와 통제 있었다. 만주가의 책략가 이시하라 간지와 도조 히데키장군을 비롯한 통제파는서양처럼 총력전의 견지에서 미래를 내다봤다. 자본주의자와 관료에 대항해서 폭력적 반란을 계획하는 것은 그들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관료와 대기업과 협력하여 국가의 힘을 키우고 군사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황도파는 쇼와유신 같은 혁명을 원했다. 혁명을 통해 부패 자본주의자와 고쿠타이에 반대하는 적을 제거하고 신헌법 아래에서군사 독재를 수립하는 것이 그들이 바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불확실한 천황 체제의 수호자들은 항상 좌익의 반란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실제적 위협은 우익의 위협이었다. - P117

1935년 미노베 사건이 한창인 때에 정부 요직을 둘러싼 군의 다툼이 격렬했다. 통제파의 최고위 군 간부는 문제를 일으킨 황도파 장교들을 면직시켰다. 이 일로 그 간부는 무사도를 앞세워 습격한 청년장교에 의해 자신의 사무실에서 암살당했다. 일본에서 늘 있는 일이지만, 이 청년 장교들의 순수함은 대중 언론에서 널리 칭송받곤 한다. 이런 상황을 가라앉히기 위해 통제파의 가장 열성적인 지지자들은 만주국으로 파견되었다. 통제파는 자신들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린 것을 제외한다면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936년 2월 26일은 30년 만에 가장 심한 대설이었다. 바로 그 날 이른아침에 황도파의 하급 장교들은 봉기하기로 결정하였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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