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을 읽다 - 고전을 원전으로 읽기 위한 첫걸음 유유 고전강의 1
양자오 지음, 류방승 옮김 / 유유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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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일처제가 인류 진화의 핵심 고리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성선택의 동학도 그렇지만 사라시나의 음식물 운반가설과 직립보행의 관계에서도 그러하다. 수백만년의 진화에서 핵심적이었던 일부일처제가 역사시대에서 지배계급의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 일부다처제로 이어진 것은 또한 역설적이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도 유발 하라리도 엥겔스도 언급한 것처럼 농업혁명은 인류 진화의 방향을 틀어버린 아주 이상한 사건임에 틀림 없다.



수컷은 수공작의 크고 화려한 꼬리처럼 주로 2차 성징을 이용해 다른 수컷과 경쟁한다. 자연계의 이런 일반적인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예외가 인간이다. 인간 중에 뚜렷한 2차 성징을 가진 쪽은 여성이다. 동시에 인간은 발정의 조짐을 철저히 감춰 드러내지 않는다. 이 두 가지 현상은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서 한 가지만 단독으로 나타나면 유전되기 어렵고 자연선택 과정에서 도태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암컷이 발정을 감추기만 하면 수컷과 교배할 기회를 잃어 그 특성이 유전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2차 성징이 더해지면 전혀 다른 효과가 나타난다.
- < 종의 기원을 읽다, 양자오 지음, 류방승 옮김 > 중에서

여성은 장기간 나타나는 2차 성징을 이용해 남성에게 자신이 계속 발정 상태에 있다고 오해하도록 만드는 전략을 활용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의 특징은 젖가슴의 발육이다. - < 종의 기원을 읽다, 양자오 지음, 류방승 옮김 > 중에서

여성은 발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발정이나 심지어 임신 여부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 < 종의 기원을 읽다, 양자오 지음, 류방승 옮김 > 중에서

남성은 이런 현상으로 인해 공황 상태에 빠졌고, 유전에서 우세를 확보하기 위해 자기 여성을 관리한다는 또 다른 행위를 발전시켰다. - < 종의 기원을 읽다, 양자오 지음, 류방승 옮김 > 중에서

이처럼 생물계에 본래 없던 현상이 나타나면서 훗날 인간은 진화 과정 중에 엄청난 우세를 가지게 되었다. 여성은 이런 변화 때문에 남성을 최대한 양육 투자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남성은 생식 기회를 빼앗기지 않고 확실히 보장받기 위해 여성과의 생식 과정에 점점 더 많은 투자를 해야만 했다. 일단 양육 투자가 커지자 판돈도 커졌고 그러면서 남성은 자손이 잘 자라는지를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 < 종의 기원을 읽다, 양자오 지음, 류방승 옮김 > 중에서

가족관계는 남성에게 생식 기회를 보장해 주었을 뿐 아니라 특정 여성과의 생식 기회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씻어 주었다. 한편 여성은 가정을 통해 특정 남성이 양육 투자에 기꺼이 참여한다는 약속을 받으면서 남성이 아이와 양육 투자를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 < 종의 기원을 읽다, 양자오 지음, 류방승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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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멸의 인류사 -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사라시나 이사오 지음, 이경덕 옮김 / 부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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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니라는 흉기를 버린 인류는 평화롭게 지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후 인류는 대량살상의 역사를 만든다.

뇌의 성장에 필수적인 고기를 먹는 방향으로 인류는 진화했지만 농업혁명 이후 대다수가 고기 구경을 못하는 방향으로 역사가 전개되었다.

진화의 방향과 정반대의 양상이 역사시대에서 나타나는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집단끼리든 무리 내에서든 (침팬지) 수컷끼리의 싸움은 드물지 않게 상대를 죽일 정도로 매우 격렬하다.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 커다란 송곳니, 즉 엄니이다. 그런데 인류에게는 이런 엄니가 없다. - P58

약 700만 년 전에 침팬지류와 인류는 분리되었고 서로다른 진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침팬지류는 흉기를 계속갖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인류는 흉기를 버렸을까? 그것은 인류가 서로 위협하거나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다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상당히 온순한 존재가 된 것만은 틀림없다. - P60

수컷끼리의 다툼에서 격렬함의 정도는 무리 속 수컷과발정이 난 암컷(교미 가능한 암컷)의 비율과도 관련이 있다.
수컷끼리의 다툼이 격렬한 침팬지 무리는 5~10마리의  수컷에 암컷이 1마리인 비율이다. 반면 보노보의 경우에는 2~3마리의 수컷에 암컷 1마리로 수컷과 암컷의 비율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 P64

침팬지의 암컷은 발정기가 되면 성기 주변의 피부가 충혈되어 팽창한다. 팽창한 피부는 밖에서도 확실하게 보이기때문에 그 기간에는 암컷 주변에 많은 수컷이 모여든다. 이래서는 암컷과 오래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현재의 인간에게는 발정기가 없다. 어쩌면 초기 인류에게서도 발정기는 없었을지 모른다. 추측에 추측을 얹는 느낌이지만, 이미 초기 단계에서 발정기가 사라졌다면 수컷과 암컷의 비율이 1대 1에 가까워졌을 것이고 수컷끼리의 다툼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송곳니가 작아진 것도 설명이 된다. - P65

한편 소림이나 초원처럼 위험이 많은 환경에서는 개코원숭이처럼 집단생활을 하지 않으면 살기 힘들다. 그리고 집단생활을 하면서 일부일처의 형태로 짝을 이루는 건 어려운일이다. 인류 이외에는 없다. 집단생활을 하면서 짝을 만든것은 인류가 처음이다.
집단생활을 하면서 짝을 만드는 것과 직립해서 두 발로걷는 것 모두 다른 영장류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인류의특징이다. 그래서 어쩌면 집단생활 속의 일부일처제와 직립이족 보행은 서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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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멸의 인류사 -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사라시나 이사오 지음, 이경덕 옮김 / 부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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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과의 식물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특이한 진화를 했다. 초원에 살게된 인간은 이를 먹기 위해 어금니는 커지고 에나멜질이 두꺼워지고 앞니는 작아지는 방향으로 이빨이 진화했다.

셋째, 이빨의 형태이다. 만약 초원에서 살았다면 단단한것을 먹어야 했다. 볏과의 식물은 잎에 플랜트-오팔(식물규산체)이 함유되어 있어 거칠다. 또한 모래가 섞인 음식물을먹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음식물을 먹기 위해서는 커다란어금니로 잘게 으깨야 하는데 이때 치아의 표면이 마모된다. 그러나 삼림에서 과일 같은 것을 먹었다면 단단한 음식물을 먹을 필요가 없다. 커다란 어금니도 필요 없고 치아의표면이 마모될 일도 별로 없다. 아르디피테쿠스 라미스의치아를 조사해 본 결과 어금니의 크기가 작고 단단한 음식으로부터 이빨을 보호하기 위해 진화했어야 할 에나멜질도얇았다. 치아의 표면도 별로 마모되지 않았다. 역시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는 초원보다는 삼림의 음식물을 먹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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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멸의 인류사 -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사라시나 이사오 지음, 이경덕 옮김 / 부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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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언어로 학명이나 인체 기관명을 표현하는 이유는 죽은 언어여서 불변하기 때문이다.

학명을 라틴어로 한것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언어가 시대와 함께 변화한다는 것은 예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지만 학명은 몇백, 몇천 년이 지나도 계속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언어로 학명을 정하는 게 좋다. 그래서 이제 변화할일이 없는 죽은 언어, 즉 라틴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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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히코 요시카즈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보다 이 자를 처단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다니구치 지로의 도련님의 시대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인데, 사실 일본 좌익, 자유주의자들 관점에선 안중근이 차라리 야마가타를 처단했으면 좋았을거라고 말할 이유가 있다.

한국인 입장에선 비교도 안되게 더 유명할 수 밖에 없지만, 이토는 19세기 후반 특유의 근대 일본제국주의적 의미에선 자유주의적 성향도 꽤 있었고, 유연한 성향을 보였다. 반면 야마가타는 대외정책 뿐만 아니라 당장 근현대 일본 사람들 자신들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사회적 군국주의, 전체주의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국내 정치,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일본 사회구조의 형성에 있어서 근현대 일본인들은 야마가타의 영향력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느낄수 있었고 때문에 좌익, 자유주의나 그에 준하는 성향의 일본 사람들 입장에선 이토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더욱 악랄해 보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무위키에서...

야마가타를 반동주의자로만 보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그는 에도 바쿠후의 나날들을 그리워하기보다 위대한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일본의 변화를 환영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구적인 생각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의 스승 요시다쇼인처럼 그도 외국에서 배우는 것을 열망하여 유신 직후 1년간 유럽 여행에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그는 일본 헌법의 초안 작성을 위해 독일인 법률가를 고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화의영향력을 허용해 나라의 문을 열었을 때 생길결과에 대해 의식했다. 새로운 생각과 만나게 되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거나 저항할 수 있다고생각했다. 서구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야마가타는 민권운동이 대중의 불복종을 부추겼을 때 내무대신이었다. 그는 1880년대 초 총리였던 이토에게 ‘정당을 다루기 위한 엄격한 헌법 제정을 요청하였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국의 자주성보호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 P63

1882년 천황은 육군과 해군에게 야마가타가 초안을 잡은 교서를 내렸다. 그것은 현대 일본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서 중의 하나였다. 그교서는 모든 일본 육군과 해군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절대적 복종은 오로지 천황에게로 향한다.
나는 여러분의 최고 지휘자이다. 여러분들과의 관계는, 내가 여러분을 나의 팔다리로서 의지하고, 여러분들은 나를 여러분의 머리로 인정할 때 가장친밀한 관계가 될 것이다. - P64

천황의 군대는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그들은 천황의 정책에 의심을품지 않았고, 심지어 그에 대한 개인적 의견도 말하지 않았다. 야마가타의 목적은 군대에서 정치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천황의 의지를군대보다 더 높은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폭동을 예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과정의 결함은 50년 후에 명백히 드러났다. 반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군인의 유일한 의무가 신성한 군주에 대해서만 있었으므로,
천황의 의지를 묵살하는 민간 정치가에 반대하는 반역은 합법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1936년에 열렬한 파시즘 신봉자인 젊은 장교들이 황권에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내각 관료들을 살해한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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