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 질서는 동시에 친족 질서였습니다. 만약 이모와 외삼촌이 싸우면 어머니는 절대로 모른 척할 수 없고 외할머니와 심지어 아버지까지도 그 싸움에 관여하게 됩니다. 친족 간 네트워크가 분쟁 해결에 도움을 주는 것이지요. 가장 단순한 친족 질서의 기능입니다. 이런 틀에 근거하여 송나라에서 발생한 군주 시해 사건에 다른 나라들이 개입해 문제 해결에 협조하기로 했던 겁니다.

그런데 개입 방식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대국인 제나라가 회의를 소집하고 관련 국가들을 지정해 참가를 요구했습니다. 본래 친족 체계에 기반해 질서 회복을 꾀했던 형식이 이제는 패자霸者의 권력 행사 형태로 바뀐 겁니다. - <좌전을 읽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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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의 조약 위반과 수나라의 회의 불참은 모두 제나라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고, 제나라는 이에 강경한 태도로 응징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송나라는 수나라와 비교해 규모도 크고 지위도 높았기 때문에 수나라를 응징했을 때와 똑같은 방식을 사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실제로 송나라는 봉건 작위가 제나라보다 한 등급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제나라는 주나라 천자의 명의를 빌리기로 하고 송나라 토벌 작전에 군대를 보내 달라고 주나라에 요청했습니다. “선백이 합류했다”는 것은 사실 선백이라는 사람이 혼자 와서 세 나라 연합군과 회합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본래 제나라가 원했던 것은 주나라 천자의 군대가 아니라, 주나라 천자가 어떤 형식으로든 관여해 천자의 권위로 송나라를 압박해 주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불리해진 형국에서 송나라는 감히 천자의 군대와 맞싸우지 못하고 결국 투항하여 화의를 요청했습니다. ‘取成於宋’(취성어송)에서 ‘成’은 싸우지 않고 화의를 요청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훗날 패자가 행한 패권 행사의 원형이었습니다. 패자는 반드시 상당한 군사적 우세를 유지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무력으로 말 안 듣는 나라를 굴복시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명분상으로는 여전히 주나라를 존중했습니다. 실제로는 주나라 천자의 명의로 자신의 독립적 의지를 관철하면서 말이지요. 이것은 봉건 질서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타협을 이룬 방식이었습니다. - <좌전을 읽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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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제나라 패업의 시작이었습니다. 노나라를 제물이자 기초로 삼은 셈이었지요. 그런데 이때 추문과 미담이 동시에 생겨났습니다. 먼저 추문은, 똑같이 공자 규를 보필했던 소홀은 봉건 관례에 따라 주군과 함께 죽었는데 관중은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해 제나라로 붙잡혀 가는 쪽을 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미담은, 포숙아에게 사람을 알아보는 눈과 포용하는 도량이 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이었던 관중을 추천해 자기보다 더 높고 중요한 자리를 맡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 <좌전을 읽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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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몇 명의 제아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서슴지 않고 목숨까지 버렸던 춘추시대의 특수한 인격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좌전』에 비나 석지분여나 맹양처럼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인물이 숱하게 등장하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쉽게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결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비장감조차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목숨을 내던지는 희생정신은 춘추시대 특유의 산물입니다. 그 시대에는 한편으론 기존의 봉건 윤리 규범이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거대한 현실의 힘이 봉건적 환경을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봉건적 가치와 원칙을 고수하던 이들은 빈번히 힘들고 극단적인 시험에 직면했고, 그럴 때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이미 확실한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목숨을 바쳐 원칙을 지키는 강렬한 개성은 그 후의 역사에서도 간간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한나라 이후 중국 사회에서는 대체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중국인의 집단적 성격을 관찰할 때 확인하게 되는 핵심 변화 중 하나입니다. - <좌전을 읽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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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초나라는 또 다른 대국으로 방대한 무력을 보유했습니다. 또한 ‘무왕’이라는 시호를 보면 그 군주는 무예를 좋아하고 전쟁을 즐겼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노나라와 제나라의 군주는 모두 칭호가 ‘공’公이었지만 초나라 군주는 ‘왕’이었습니다. 사실 주나라 시대의 봉건 작위는 공, 후侯, 백伯, 자子, 남男 이렇게 다섯 등급으로 당연히 왕은 없었습니다. 왕은 천자의 칭호였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가장 남쪽에 치우쳐 있던 초나라는 봉건 작위 제도를 무시하고 참람하게도 스스로 왕이라 칭했습니다. - < 좌전을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다섯 등급인 봉건 작위 제도에 따르면 노나라와 송나라 군주는 공公, 위나라 군주는 후侯, 정나라 군주는 백伯 그리고 초나라 군주는 겨우 밑에서 두 번째인 자子였습니다. 그래서 『춘추』 경문에서는 기본적으로 정식 명칭을 사용해 송공宋公, 위후衛侯, 정백鄭伯 등으로 표기했습니다. 나중에 패업을 완성한 제나라와 진晋나라 군주조차 봉건 예의에 따르면 모두 후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춘추』에도 제후, 진후로 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좌전』은 시대적으로 나중에 글로 정리된 탓에 그 나라들이 스스로 등급을 높여 바꾼 호칭을 무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호칭 사용이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현상은 봉건 질서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병존했던 당시의 복잡한 상황을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 <좌전을 읽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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