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서주 시대의 것으로 간주되어 온 문헌들에 대해 우리는 경각심을 갖고 과연 어느 시대의 인물이 그런 주장을 했는지 살펴봐야만 합니다. 비록 엄밀한 이론은 아니지만 근대에 구제강顧頡剛이 『고사변』古史辯에서 제기한 ‘고사층루구성설’古史層累構成說은 여전히 우리가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 < 상서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구제강의 견해는 간단히 말해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에서 대대적인 고대사 창조 운동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당시는 대토론의 시대여서 다양한 의견이 무수히 쏟아져 나와 서로 경쟁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자기 의견의 신뢰도를 높여 논적을 제압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고대의 권위를 날조해 그것에 의지했던 것이지요. 또한 “옛것을 존중하고” “옛것을 숭상하는” 분위기에서 오히려 나중에 등장한 의견일수록 더 오래된 고대사의 권위에 의지하려 했다고 구제강은 설명합니다. - < 상서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시간적으로 더 오래된 인물, 사건, 사상일수록 흔히 더 나중에 창조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중국 고대사는 역방향으로 계속 더 오래된 내용이 보태졌지요. 이것이 바로 ‘고사층루구성설’의 기본 관점입니다. - < 상서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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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단계적 지식 체계가 후대 사람들의 생각과 관점을 얼마나 심하게 제한했을지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가 늦게 태어났다면 경과 전은 못 쓰고 소와 집해를 집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령 경과 전을 쓸 만한 학문적 깊이가 있어도 소와 집해를 쓸 수 있을 뿐, 옛사람의 경과 전과 주를 넘어설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옛사람이 말한 적이 없고 표현한 적이 없는 것을 후대 사람이 말하거나 표현할 수 없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말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단지 옛사람의 입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옛것을 존중하고” “옛것을 숭상하는” 것의 또 다른 면은 바로 “옛것을 조작하는”僞古 것에 대한 강한 유혹이었습니다. - < 상서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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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을 존중한 탓에 중국 문화는 일정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사람들이 “옛사람에게 의지해 말하는” 습관을 갖게 된 겁니다. 옛날 중국 문헌은 대부분 전주傳注 형식에 속합니다. 이것은 단계별로 고대 문헌을 해석하는 동시에 역시 단계별로 옛사람에게 의지해 말하는 형식입니다. ‘경經-전傳-주注-소疏’가 그 기본 단계인데, 전의 용도는 경을 해석하는 것이고, 주의 용도는 경과 전을 해석하는 것이며, 소의 용도는 경, 전, 주를 해석하는 겁니다. 이렇게 한 단계 한 단계 겹쳐지며 그 내부에서 해석의 권한이 명확히 안배되어, 아래 단계의 해석은 위 단계의 해석을 의심하거나 변경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옛것을 존중하여”尊古 “옛것을 숭상하는”崇古 데 이르렀고, 엄격한 권위적 지식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나중에 나온 지식을 오래되거나 먼저 나온 지식 아래 배치해 양자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은 아무리 똑똑하고 학문이 뛰어나도 주나 소, 집해集解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희 같은 대유학자도 송나라에 태어났던 탓에, 그가 중국 학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저작은 자신의 개인 저서나 어록이 아니라 고대 경전을 대상으로 집필한 집해였습니다. - < 상서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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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왕관학의 인문 정신에 반대하고 현실의 법률을 강조하며 백성에게 “관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以吏爲師고 요구하던 기풍은 결코 진나라의 짧은 십수 년 동안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진나라가 망한 뒤, 한나라 초기에도 수십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한무제가 “오직 유학을 높이고”獨尊儒術 나서야 한나라는 진정한 의미에서 진나라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뒤집고 본래의 주나라 전통을 계승하는 데 진력하게 되었습니다.

진시황 시대부터 한무제 시대까지 왕관학은 억압과 주변화 그리고 망각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한무제의 역사적 의의는 자신의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략에 의지해 한나라의 방향을 결정하고, 문제와 경제의 보수적이며 관망적인 태도에서 벗어난 데 있습니다. 그는 다시 왕관학의 전통을 껴안고 진시황과 상반되는 길을 걷기로 결정했습니다. - < 상서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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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패주의 출현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중요한 조건은 우리가 짧은 몇 년간의 『좌전』 기록을 읽은 것만으로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각국의 내란과 분쟁이 갈수록 빈번해지고 심각해진 데다, 변란의 성격에 있어서도 ‘나라 안’과 ‘나라 밖’ 그리고 ‘나라 간’의 경계가 모호해져 한 나라의 형제나 부자 사이의 분쟁 혹은 대부의 전횡이 봉건 친족 관계를 통해 다른 나라에 번지고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 제1차세계대전 발발 전의 유럽 형세와 비슷했습니다. 당시 합스부르크가, 호엔촐레른가, 로마노프왕조 등의 몇 개 가문이 서로 혼인을 맺고 견제하면서 비밀 외교 협정을 체결했지요. 그 결과 어떤 나라에 문제가 생기면 즉시 복잡한 연맹 협정을 통해 확산되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 뜻밖에 요원의 불길처럼 전 유럽을 휩쓸고 심지어 유럽 이외의 지역까지 태워 버린 제1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진 겁니다. - <좌전을 읽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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