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제사에서 존귀한 위치를 차지했던 신성한 문자가 주나라 때에 와서 왜 민가 가사를 베끼고 기록하는 데 쓰였는지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봉건제도의 운영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봉건영주와 봉건귀족은 봉국에서 편안히 거주하며 효과적으로 봉국의 백성을 관리하기 위해 당연히 그곳 사람들이 본래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아울러 그 중요한 자료를 대대손손 이어서 봉국을 다스리기 위한 참고 자료로서 보존하려 했습니다.
주나라 사람은 민가와 민정을 연결해, 민정을 잘 반영한 민가가 귀족이 봉국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채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시를 채집했을까요? 그 시대에는 녹음기가 없어서 소리를 기록할 방법이 막연했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민가를 배워 부르는 것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배워 부르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을 수 있고 기억력에도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기억은 시간이 가면서 마모되고 변조되기 마련이지요. 바로 이런 어려움 때문에 본래 신성한 의식에서만 쓰이던 문자를 가져와 그 소리를 흉내 내어 기록했을 겁니다.
이처럼 전통적인 견해가 아니라 오늘날의 역사적인 방식으로 『시경』의 유래를 새롭게 추론해 보았습니다. - < 시경을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