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화 하는 일본 - 동아시아 ‘문명의 충돌’ 1천년사
요나하 준 지음, 최종길 옮김 / 페이퍼로드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유신의 출발
- 차남 이하의 낮은 지위
- 근세 도시의 기능
- 악당의 출현 지역

우선은 농가의 시선에서 생각해봅시다. 몇 번이나 이름을 이야기한 하야미 아키라의 학설 가운데 세계적으로 알려진 ‘근면혁명론‘이 있습니다.

앞에서 논한 것처럼 생산 증대로 거둔 분량이 자신에게 남는다면 당연히 농민들은 더욱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더욱 부유해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에도시대를 통한 농촌 내의 변화를 살펴보면,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데 소와 말의 수가 줄어든 경우가 있습니다. 즉 근세일본의 식량증산이나 경제발전은(예를 들어 소와 말처럼) 생산성이 높은 기술에 투자하여 달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 소나 말을 이용한 것까지도 인간이 더욱 노력하여 일하는,‘투하 노동력‘의 증대에 의하여 달성된 것은 아닐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야미는 이 발견을 비교사적으로 부연하여 공장노동과 같은 제도적 혁신에 의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고 효율적인 노동방식을 가능하게 하는 신기술을 속속 도입하는 투하자본량의 증가로 지탱된 근대 유럽의 산업혁명 Industrial Revolution 에 비유해, 근세 일본의 경제발전을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 이라고 명명했습니다. - P108

삼남, 차남들은 은 재미가 없습니다. 살아있다고 한들 어차피 식객처럼 형님의 가사일돕기를 하고 형수나 조카(집안을 계승할 아들)에게 얼마간 멸시당하면서 먹여주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인생이기 때문에 장래에 대한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꽃 한 번 피우고 죽어볼까라는 기분이 듭니다.

이러한 무리들을 워킹푸어로 몰아넣어 (즉, 죽여 ) 사회의 안정을 유지한것이 에도나 오사카라는 거대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도시가 없었기 때문에불평분자의 억제가 불가능해지고 과잉인구가 일방적으로 체류하는 지역이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서일본. 따라서 유신의 첫발은 사츠마, 죠슈, 도사, 히젠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하야미 아키라의 해석입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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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신분제의 두 가지 유형 : 중국 대 일본
- 승자독식사회인 송나라 또는 자유지상주의 체제
- 명예와 부가 분리된 사회, 근세일본

지위의 일관성 또는 지위의 불일치 이론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 참조. 

한완상 교수의 오래된 논문도 발견했다.
SNU Open Repository and Archive: 韓國에 있어서 地位不一致와 社會意識

아이디어를 연결시키면 이 책도 관련 있을 것 같다




사회학 분야에서는 ‘정치적인 권력자가 경제적으로도 자산가이며 문화적으로도 우월자‘인 사회를 ‘지위의 일관성이 높은 사회‘라고 합니다. ‘어떤지표에서 우세한 지위를 점하는 사람이 다른 지표에서도 우세한 지위를 점하는사회‘이며, 까놓고 이야기하면 특정한 승리집단이 모든 것을 독점하고 ‘패자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사회입니다.

이것의 전형적인 형태가 근세의 중국입니다. 과거 합격자는 관료가 되어 정치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한편 종종 합격 전부터 하고 있던 지주나 상인으로서의 부업도(관료들과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점점 더 번성하고 뇌물이나 백성에 대한 착취나 ‘부역‘을 포함하여 경제적으로도 부를 이룰 수 있습니다. 또한 당연히 과거에 합격한 시점에서 문화적인 위신도 절대적이며, 머리가 좋을 뿐만 아니라 유교도덕을 체현한 인격적으로도 고매하고 더 높은 존재로서 서민의 기대를 받게 됩니다. 권력도 부도 위신도 모두 독점하는 겁니다. - P104

이에 대하여 근세일본이란 신분제 사회이면서 실은 ‘신분이 상위인 자가모든 것을 독점하고 아래인 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사회‘(지위의 일관성이 높은)가 아니라 ‘신분이 상위인 자가 명예를 가지고 아래인 자는 실리를 챙기는 사회‘(지위의 일관성이 낮은)였습니다.
우선 계층별로 보면, 정치적인 권력자는 무사였지만 사실 그들은 그리 부유하지 못했으며 경제적인 실익은 상인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 P105

이처럼 ‘어떤 분야에서는 승자인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서는 패자가 되는‘
도쿠가와 사회의 (지위의 일관성이 낮은) 신분제도의 존재형식을 ‘혼자서 독점하지 않고, 자기 주제를 아는 삶의 방식을 모두가 인식함으로써 상위자도 하위자도 서로 위로하고 안쓰러워하는 일본적 정서가 자라난 양보하는 미덕이 넘치는 공생사회‘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 P107

그러나 한편으로 동일한 사태를 완전히 반대로 ‘아무도 자기 충족을 할 수 없으며, 항상 뭔가를 타인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불쾌감을 가지고 우울하게 살아간 질퍽하고 음습한 사회‘였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을 취할지는 개인의 취미라고 할까 가치관이기 때문에 제가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후자처럼 느끼는 사람이 점차로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메이지유신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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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맬서스의 덫을 탈출한 이유

이렇게 해서 유럽에서는 가사의 시장화(집사나 가정부)에 의해 글자 그대로의 ‘독신귀족‘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귀족적인 인생설계를 가능하게 한영국, 아시아에서는 가족의 후계자를 한 사람으로 한정함으로써 역시 다산의 필요성을 줄인 일본이 최초로 ‘덫‘에서 빠져나와 근대화를 리드했다고 볼 수있습니다(Alan Macfarlane, 「ㅈㄴ日本』).

역으로 이 ‘덫‘에 걸려서 빠져나오지 못한 게 중국이겠죠. 중국의 혈족 네트워크는 어쨌든 낳고 낳고 또 낳아서 혈연자의 수를 늘리고, 그렇게 하다 보면 한사람 정도는 과거에 합격하든가 장사를 담당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나오고, 그렇게 하면 일족이 모두 기생할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인구증가가 필요한 국면(예를 들면, 시장의 확대)에는 적합하지만 억제에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중국과 대조적으로 일본의 ‘이에‘란 것은 부계 혈연에 집착하지 않는 체계로 자식을 낳지 못하면 양자를 들이는 편법도 있기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을 양자로 들이는 것은 일본인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으며, 유럽에서도 오랫동안 이상하게 여긴 관행입니다) 때문에 인구를 줄이는 데 적합합니다. 원래 대대로 정해진 가산을 상속하여 먹고 사는 세습제 사회에서 자식을 너무 많이 낳으면 집안이 파멸하기 때문에 자발적인 산이제한 관행이 보급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 P97

앞에서도 논한 것처럼 생산수단과 생산력(즉 세습된 토지)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가족이 너무 많이 불어나면 아사할 뿐이므로 에도 중기 이후의 농가에서는 기본적으로 ‘집안을 이을 사람‘ 이외의 남자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정말로 무능하지 않다면 장남이 뒤를 잇기 때문에 차남 이하는 신부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이마무라 감독 작품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리스케가 수간을 하는 장면까지 등장합니다). - P98

고도성장으로 조금씩 시대가 움직이고 있던 1957년에 발표된 <쌀*>은<푸른 산맥>으로 잘 알려진 이마이 다다시러 감독의 영화입니다. 가스미가우라 부근의 반농반어 촌락에 살고 있는 젊은남녀 청춘을 묘사하여 향수를 자아내는 영화지요. 여기에 이웃마을에 집단으로 헌팅 하러 가는 배 속에서 "장남이라고 하는 거야. 차남이라든가 삼남이라고 하면 어떤 아가씨도 상대해주지 않아"라는 충고 장면이 등장합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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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구조 - 인간의 선량함, 그 지속가능성에 대한 뇌과학자의 질문
김학진 지음 / 갈매나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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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세 신분제의 미스테리




말투를 바꾸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출판 미디어가 발전한 중국은 1000년경부터 머리가 좋은 서민들을 수험 경쟁에 열심히 참가시켜서 그 승자를 관료로 선발하는 채용 시스템을 개발했습니다.

 그러나 종이가 귀하고 인쇄기술도 없었던 동시대의 일본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섭정 · 관백을배출하는 것은 대대로 후지와라 가문‘이라는 식으로 통치기관 내부에서 상류계급의 집안끼리 직위를 나누어 가지고, 집안 내에서 후계자를 육성하는 교육시스템에 의존해서 관료를 채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후지와라 씨를 정점으로 하는 대귀족에 의한 관위의 가직화, 가산화가 진행되어 장원제와 물납경제에 입각한 귀족정치는 쇠퇴하기는커녕 두고두고 권세를 자랑합니다. - P43

인접한 중국에서는 근세부터 즉 송나라시대부터 신분제라는 것이 폐지되었습니다. 나아가 에도시대는 잘 알려진 대로 서적 문화나 인쇄출판업이 꽃핀 시대였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미디어의 측면에서도 송나라에 근접했다고 할까, 과거를 실시하려고 했다면 가능한 환경에 도달한 시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나라에서 600년이전에 없어진 신분제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밖에 할수가 없습니다.

에도시대의 신분제를 ‘당연하다‘고 취급하는 것은 일본인이 중국인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는 열등민족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하는 ‘자학적‘인 역사인식을 고백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래도 별로 상관없다고 한다면 그것도 좋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왜 근세의 일본인이 이 시기에 이르러 굳이 신분제 사회를 선택한 것일까를 자신의 언어로 설명해야만 합니다(‘새역모‘든 일교조든 과연 몇 명의 선생님들이 설명할 수 있을지 저는걱정입니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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