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화 하는 일본 - 동아시아 ‘문명의 충돌’ 1천년사
요나하 준 지음, 최종길 옮김 / 페이퍼로드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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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의 파탄으로서의 태평양전쟁

최근의 국제관계사가 주목하고 있는 점은 워싱턴 체제란 결국 대청제국해체와 중국대륙의 분열(1912), 러시아제국 붕괴와 소련 건국의 혼란 (1917),
독일제국의 종언과 약소화(1918) 라는 형태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는 세계 정치 행위자 수가 일시적으로 적어진 상황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사실상 미·영·일의 3개국밖에 없습니다(服部龍二, 『東了沙了國際環境の動ど日本外交』). - P187

그런데 그 이후에 국민당이 북벌에 성공하여 중국이 통일되고, 소련도 중공업화를 달성하고 각국의 승인을 받으면서 강대해졌으며, 독일에서도 히틀러 정권이 성립하여 군사대국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여 선택 사항이 증가하자 누구와 연합하고 누구와 싸우는 것이 득이고 실인지 "쇄국 하의 제약 외교"에 익숙해져 있던 일본인의 머리로는 처리하지 못할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정부 내부에서도 영미, 아시아파, 파쇼파, 소련파 등이 합종연횡을 반복하며 커다란 혼란에 빠지더니 결국 동아시아에 기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던 독일·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중국과 미국(마지막으로는 소련도)을 정면으로 적대시하는 최악의 조합을 선택해버린 결과, 대일본제국은 당연하게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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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화 하는 일본 - 동아시아 ‘문명의 충돌’ 1천년사
요나하 준 지음, 최종길 옮김 / 페이퍼로드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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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제국주의의 차이
- 식민지 흑자 적자 논쟁

 경제학자 슘페터도 구미 열강의 식민지 획득 경쟁은 ‘격세유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하였습니다(木谷), 『帝國主義世界ⓝ一體化). 원래 영토의 확대가 국익에 직결되는 것은 주요 산업이 농업인 경우에 한해서만 분명한 것으로 상공업 중심의 근대사회에 있어 식민지 경영이 흑자를 낼지 적자를 낼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통치비용의 증대 때문에 ‘자기 부담‘ 가능성도 높으며 자국 상품의 시장권까지 포함한다면 차라리영유하지 않는 편이 더 이익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여러 나라가 시대착오적인 식민지 획득에 광분한 것은 로마제국처럼 구시대의 행동양식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슘페터는 보고 있습니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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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화 하는 일본 - 동아시아 ‘문명의 충돌’ 1천년사
요나하 준 지음, 최종길 옮김 / 페이퍼로드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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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군국주의에 좌파가 적극 협력했다?
- 에도주의 = 사회주의
- 재에도화에 찬성한 좌파

하나는 일본인의 에도시대 지향으로 몇 번이고 말씀드린 것처럼 일본인은 에도시대적인 사회주의‘라면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에 전전의 쇼와시대에 합법적 사회주의 정당(무산정당)의 약진이 시작됩니다. 1932년의 선거까지는 매번 의석이 한자리 수에 지나지 않던 무산정당이 선거협력을 위해 대동단결하여 사회대중당이란 통일정당을 만든 적도 있었으며, 1936년의 중의원선거에서는 일약 22의석으로 급신장하여 1937년에는 분파인 일본무산당과합하여 실로 40석을 확보하여 정우, 민정 양당을 과반수 미달에까지 몰아붙여 캐스팅보트를 잡았습니다. - P174

즉 ‘전전의 어두운 시대‘라지만 선거 결과를 보면 일관되게 사회주의 정당이 성장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치명적인 약점은 ‘에도시대에는 의회가 없었던‘ 것으로 결국 그들은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기성정당이 아니라 군부와 연대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양대 정당보다 앞서서 당을 해산하고 대정익찬회에 결합할 때 사회대중당이 내건 것은 정말로 에도시대의 가직제와 동일한 직분봉공이었습니다. - P174

이러한 역사가 전후 오랫동안 논의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서 저는 사상사적으로 검토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전전 이래로 ‘가난한 사람은 자기 책임‘이라고 한 자유주의자에 대하여 ‘빈곤은 사회의 책임‘
임을 주장한 사회주의자는 ‘진보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만(공산당 등의 예외를 제외하고) 전시중에는 이 왼쪽의 사람들이 군부와 손을 잡고 에도시대와 같은 ‘반동적‘인 체제를 만드는 것에 공헌했습니다. 일종의 역설이 일어난 것입니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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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후

봉건제를 실시하면서 전국의 요충지나 거점에 파견한 중요 인사를 ‘후候’라고 합니다. 그들을 ‘여러 제諸’ 자를 앞에 붙여 제후諸侯라고 통칭했지요. 제후는 각자 자신의 영지를 다스렸습니다. 제후에게 분배된 토지는 사실 초기에는 일정 기간 맡아서 관리해보라며 주 왕실이 위탁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오랫동안 제후의 일족이 다스리면서 그들의 사유지가 되어갔고, 그에 따라 제후는 점차 독립된 국가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들을 ‘공公’이라고 불렀지요. 예를 들어 제齊나라의 군주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군주 문공文公, 서융의 패자라고 불린 진秦나라의 군주 목공穆公, 상 왕조의 부활을 꿈꾸었던 송宋나라의 군주 양공襄公 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공은 각 나라의 임금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럼 공자公子는 공의 아들이니 당연히 왕자겠지요. 그리고 왕실은 공실이라고 했습니다. -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임건순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6694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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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의 일관성이 높은 사회, 조선
- 요나하 준과 프리스틀랜드의 책을 함께 읽으면 좋음.



여기에서 우리는 도덕을 지향해야 할 자들이 왜 돈과 권력을 둘러싼 암투에 기꺼이 가담하는지를, 그리고 그와 같은 싸움의 강렬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또한 도덕 지향적인 메시지를 내놓는 자의 행동이 언제나 도덕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유교의 도덕이 권력 및 부와의 관계에서 성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 지향성 국가인 한국에서 도덕의 최고형태는, 도덕이 권력 및 부와 삼위일체가 된 상태라고 여겨지고 있다.
한국인이 이상으로 여기는 인생 또한 이 세 가지가 전부 구비된 상태이다. 즉 현세주의적인 유교에서 도덕이란 결코 사회와 고립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권력 및 부와의 융합과 반발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긴장하고 있다. 도덕은 권력이나 부와 결합되어 있는 것 자체만으로는 원래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지만, 권력과 부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손상될 수가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현실적으로는 거의 모든 도덕이 상처를 입고 있다. 그곳을 노리고 다른 세력이 굶주린 늑대들처럼 도덕 지향적인 공격을 해 온다. 권력이나 부와의 거리 차에 의해서 도덕 내용이 다양하기 때문에 공격하는 내용도 다양하며, 지칠 줄 모르고 파상적(波狀的)으로 계속된다. 바로 이것 때문에 한국의 도덕은 영원히 풋풋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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