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야 놀자
강풀 지음 / 문학세계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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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웹툰 작가 강풀의 영화이야기,
실제 그의 작품 몇개가 영화화 됐으니 영화인의 한명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도서관에서 잠시 앉아 집었고 몇페이지 읽었다 빌려와서 그날 저녁 다 읽어버렸다. 영화 원작과 강풀작가 특유의 위트가 섞여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 약간 늦게 읽은 것이 흠 아닌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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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역사
한스 큉 지음, 배국원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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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 - The Catholic Church (2003)의 번역판이다.

 

저자의 특이한 약력이 눈길을 끈다. 저자 한스 큉은 가톨릭 신부로서 교황의 무류설을 의심해서 오랫동안 몸 담았던 튀빙겐대학교 교수직을 박탈당한다. (지금도 신부, 일반인 자격으로 강의) 교회사 학자는 아니고 그냥 신학과 교수인 듯 하고, 번역자의 이력도 독특하다. 침례교 목사. 굳이 저자와 번역자의 공통점을 찾자면 교회 통합 에큐메니컬 운동과 종교철학자쯤 될 듯 하다.

 

책의 서론(p23)에서 저술 목적도 밝히고 있다. 1) 가톨릭 교회의 기본 정보 제공 2) 역사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비판 3) 개혁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구체적 도전

 

나의 태생상 기독교를 개신교의 관점에서 보고 있었다. 한 쪽에서만 보기에 관점이 편향적이지 않았나 궁금하였다. 개인적으로 가톨릭의 입장(비록 주류에서 약간 벗어난 학자이지만)에서 가톨릭을 평가하는 책을 옆에서 들여다 보는 의미가 있다.

 

몇 가지 초기 기독교인들의 생활을(지금의 상황으로는 예상하지 못한) 짐작해 볼 기회가 되었다.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였다는 것을 의심한다. 또한 베드로는 로마에서 죽었으나 로마의 감독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베드로는 로마 시민이 아니라, 잠시 방문한 갈릴리 지방의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초기 기독교의 중심은 로마가 아닌 예루살렘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 이었지, 수제자로 볼 수 없다. 당연히 당시 수제자라는 제도도 없었다

 

얌니아 의회(AD 90)은 예루살렘 성전파괴 직후에 열렸다. 이 바리새인들이 주축인 유대인 의회에서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하나는 기독교 이단에 대한 저주로 기독교인을 파문한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여러 분파 중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는 유대교의 한가지 분파였었다. 또 다른 하나는 구약 정경의 확립이다. 참고로 유대교의 구약과 개신교의 구약은 동일하다. 위경은 정경에 포함되지 않는다.

 

감독-장로-집사의 위계질서는 예수님 시대 때 제정했던 제도도 아니고,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나왔으며, 기독교에서만 고유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 다만 교회를 합리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생겨난 도구 형태로 기능적으로 유리함이 있다. 다만 사제들의 권력을 우상화하거나 유지 시키기 위해 이용되는 것이 문제이다.

 

베드로가 반석을 말하는 구절은 성경에 있으나, 전체 교회의 심판권이 로마 재판권에 있고 신의 뜻이라는 주장은 처음 나왔던 4,5세기 당시에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또한 교황을 통해 베드로가 직접 말씀하신다’(이는 중세 시대에 교황을 통해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로 변질)는 초기에는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이를 2세기 로마의 대주교를 베드로의 후계자로 확정된다문서로 근거 삼고 있으나 이는 5세기에 위조로 판명되었다.

 

레오1세부터 전통 교황을 시작이고, 그의 후계자들이 신학적, 정치적 사고의 이어 나갔다. 세상의 권력은 황제에게 있고, 영적 권리는 교황에게 있다. (세속에서부터 성직자를 분리) 영적 권리가 보다 우월하다(그래서 황제보다 교황이 위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 당시(6-7세기)엔 이런 논리가 인정 받지 못했고, 다음 교황인 비길리우스는 교리의 모순적 견해로 무시당했고(5차 공의회), 다음 교황 호노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6-8차 공의회). 당시엔 교황의 무류성은 없었다. 심지어 교황은 선출 된 후 황제로부터 승인 받아야 헸고, 검증 받아야 했고 폐위 당하기도 했다. 황제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띄고 특사로 보내지기도 했고, 임수를 잘 못 수행 할 경우엔 처벌 받아 감옥에서 죽기까지 했다(요하네스 1). 

 

초기 가톨릭은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엔 게르만 족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개종전 야만족이었던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도시의 파괴, 문화의 파괴로 황폐화 되었지만, 이들이 개종하면서 가톨릭의 강력한 지지자로 떠올랐다.

 

중세가 시작(6세기)되면서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나와 신비주의, 연옥, 수도원 운동을 펼친다. 그는 겸손하고 평등하게 교황직을 수행했으나, 이후의 교황들은 그레고리우스 보다 위압적인, 로와 황제 같은 레오1세의 전철을 따랐다. 군주적인 헌법과, 통치의 수장으로서 계급적인 교회를 이끌었으며, 그 결과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의 분열을 가져 온다. 이후 7세기 들어 이슬람의 약진이 시작된다. 기독교는 동서교회로 분열을 이룬 반면, 이슬람은 단순함으로 단합하여, 동로마제국을 약화 시키고, 반면에 프랑크 왕국이 새로운 번영을 이룬다. 이는 중심의 이동이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넘어 왔다는 의미이고, 교육 유산과 고대 문명을 계승할 유일한 문화 세력은 오직 가톨릭 교회뿐이라는 의미도 된다.

 

니롤라우스 1(9세기) 교황은 권력을 황제에게서 교회로 가져온다. 교황의 결정을 준수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한다. 이는 프랑크 왕국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로 분할되던 정치적 혼란했던 기간으로, 거짓 문서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는 <거짓 이시도르 교서(Pseudo-Isidorean Decretals)>로 알려진 거짓 문서이고, 종교개혁 이후에 거짓 문서로 증명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교황 권력의 강화로 이어진다. 이 문서를 근거로 이전에는 결여 되었던, 신학적, 법적, 정통성은 교황에게 새로이 부여되었다.

 

10세기는 암흑의 시기로, 교황과 대립교황(Anti-pope) (심지어 3명의 교황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 폐위와 즉위, 심지어 교황의 살해가 반복되던 시기이다. 그 결과 교황제도는 재구성된다. 이는 신약 성서의 규약이나 초기 천 년을 이어온 전통과는 상관없었으나,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세우기에 알맞은 형태였다.

 

13세기 초 인노켄티우스 3세로부터 로마 교황의 중앙 집권과 로마화의 정점을 이룬다(4차 라테란 공의회). 1) 중앙집권화 신앙, 법령, 규율, 조직이 교황에게 향하는 교회 2) 법제화 교회법과 교회법에 관한 학문에 바탕으로, 교회법에 따라 통치하는 교회이고, 교회법의 최고 심판자는 교황이 된다 3) 정치화 교회는 전세계를 지배한다. 최상의 지배세력이 된다 4) 군사화 호전적인 교회는 십자군운동 같은 성전을 수행한다 5) 교권주의화 독신주의 남자들로 구성된 교회는 결혼을 강제로 금지시켰다. 무조건적인 복종, 결혼의 포기, 공동생활을 요구하여, 일반신도와는 분리되며, 성직자만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는 교회를 구성하였다.

 

12세기 말, 교회의 결정에 반발하여 여러 이단 조직이 생겼다. 이를 근절하기 위해 종교재판(Inquisition)이 만들어졌다. 교회 법정을 통해 합법적으로 이단을 박해 한 것으로, 평신도가 이단으로 의심되면 개인적으로나 공개적으로 논의하지 않고, 단죄되었다. 더 나아가 자백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고문하기도 하였고, 이 권한은 종교재판관이 부여 하였다. 이는 계몽주의가 나올 때까지 지속되었다. 프란체스코(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맹활약하였으며, 이 수도회는 청빈, 겸손, 소박함을 방향으로 삼고 있으나, 인노켄티우스 3세의 방향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13세기에 이르러, 대학은 황제나 교황과 더불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어 내는 제3의 위대한 세력으로 떠 오르며, 권위와 전통보다 이성과 개념 분석을 더 많이 사용한다. 이 때 나온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신앙에 반대되는 이성을 재평가하였으며, 영적인 의미에 반대되는 직설적 의미, 은총에 반하는 자연, 기독교 도덕과 대조되는 자연법, 신학과 대조되는 철학, 기독교적에 대비되는 인간적인 것들로 재평가 한다. 이는 어거스틴의 신학을 수정하고, 시대에 맞게 개정했을 뿐, 비판하거나 대체하지는 못하였고, 아퀴나스 신학의 한계를 보여 줬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르틴 루터가 아니었다. 또한 11-12세기는 마리아 숭배 사상이 나타나 교황숭배주의와 결합하였고, 독신주의와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하였다.

 

기세등등 했던, 교황의 권세는 100여년이 지난 후 약화되었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프랑스 왕에게 잡혀 구금되었다가 죽었고, 이후 교황은 프랑스에서 나왔으며, 리옹에서 즉위식을 갖고(로마가 아니라) 아비뇽에 자리 잡고, 이후 70년간 유지하며(아비뇽 유수) 프랑스 왕에게 의존한다. 곧 프랑스가 유럽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주도세력이 되었다. 아비뇽의 교황청은 어마어마한 비용이 필요했으며, 전 유럽의 조세 강화, 수탈, 단절, 금융 권력이 되었고,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해 파문하고 추방하기도 한다. 이는 교황제도의 불신으로 이어졌다. 14세기말 무능력한 우르바누스 6세와, 이에 대항하는 클레멘스 7, 이 두 명의 교황 폐위와 새로운 제3의 교황 등 교황제도의 불신과 무능력은 극에 달한다.

 

르네상스가 시작될 무렵 바티칸 교회국가는 대규모 건설공사와 예술장려 활동을 통해 기독교의 수도 로마가 예술과 문화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알렸다. 이후 교황은 이탈리아인들이 계승하였고, 교회 갱신운동은 막고, 타락하기 시작했다. 교황 자신의 조카와 사생아를 등용하였고, 교화 가문들에 세습적 족벌 왕족의 형태를 띠어갔다. 르네상스의 교황들은 타락하였고(대표적으로 세가지 예, 식스투스 4세는 사촌 6명을 추기경으로 승진 시켰다. 인노켄티우스 8세는 자신의 사생아를 바티칸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치뤘다. 알렉산드르 6세는 사보나롤라를 파문하였고 화형에 처했다) 이로 인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탄생시켰다.

 

간단하게 종교개혁의 의미를 설명하고, 명료하게 정리한다. 또한 신학의 근본적 의미와 영원한 기준으로 (트리엔트 공의회, 반종교개혁, 스콜라철학, 과거 교부의 전승이 아니라) 성경, 복음, 초기 기독교 메시지에 동의하고 있다 (신부가 이 부분에 동의한다는 데에 이 부분에서 약간 놀랬음

 

루터가 내세운 신학적 교리로,

1) Sola scriptura – 전통, 법률, 권위에 반대한다(오직 성경)

2) Solus Christus – 신과 인간 사이에 수많은 성인들과 중재자들에 반대 (오직 그리스도)

3) Sola gratia – 경건한 종교적 행위, 업적, 노력에 반대 (오직 은혜), 이로 인한 Sola fide –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 (오직 믿음)

 

루터의 칭의는 가톨릭의 개혁을 공개적으로 촉구한 것으로, 복음 정신을 근거로 하는 개혁으로 교리의 재구성 보다는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적 삶의 갱신에 관한 개혁을 의미하는 것으로 (저자는 루터와 가톨릭의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한다), 이데 당시 타락한 교황 레오10세는 루터의 주장에 동의하거나, 스스로 개혁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고, 교회, 교황, 복음은 동일하다는 가정에 기초하여,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라로 대응하였다. (p164, 가톨릭의 교리 왜곡에 부정하는 이 부분에서 많이 놀람) 루터의 주장과, 심지어 루터의 칭의논리 발견에 엄청남 신학적 업적이라 찬사를 보내고, 면죄부 판매를 틀렸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루터의 공식적인 복원과 파문의 철회를, 더 나아가 교황의 속죄 고백과 일련의 회복조치를 촉구한다. (많이 놀람, 왜 교수직에서 쫓겨났는지 알겠다)

 

이후 발생한 반종교개혁의 중심에 트리엔트 공의회가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논의없이 교황청에서 원하는 대로, 성경, 교회 전통, 칭의, 성례전, 연옥, 면죄부 등의 교리가 정리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자의 신학적 문제 제기에 파문과 정죄로 응답하였고, 당시 부분적으로 공감되었던 실제적 문제들, 성만찬에서 포도주 나누기, 각 지방 언어로 예배 집전, 성직자의 결혼 문제 등도 심각한 논의 없이 거부하였다(앞선 두 가지는 3백년을 더 지나서 제2차바티칸 공의회 때 허용되었다). 이에 대한 결과로 개신교와 가톨릭은 다시 합쳐질 가능성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30년 전쟁 같은 물리적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제 한 시대가 끝났다. 종교개혁에서 촉발된 종교적 역동성은 거의 소진되었다. 종교는 전쟁의 지옥에서부터 탈출구를 제시하지 못했다. 기독교는 자신이 평화의 능력이 없음을 증명하였고, 그 결과 유럽 전체의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유대감을 비롯한 신뢰를 상실하였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결과, 세계와 종교의 분리과정, 즉 새로운 시대인 근대의 성격인 세속화 형성을 돕는 결과를 낳았고, 근대 시대 기독교는 문명세대의 주도권을 잃고 만다.

 

근대는, 원칙적으로 신의 은총이 필요하지 않는 상태에서, 국가는 백성과 정부 간의 협약의 결과가 되었다. 유럽은 더 이상 르네상스 이전처럼, 지나간 고대의 문명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 이성, 기술적 진보와 국가를 이용하여 방향을 잡고 나아간다. 따라서 근대 사회에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이나 교회의 사회의 영향력은 현저히 저하되고, 교회의 권력은 자주 무시된다.

 

갈릴레이에서 뉴턴으로 넘어 오면서 순수이론의 가설로 제시했던 새로운 세계관은 실험을 통해 증명하였고 확증되자 성경적 세계관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확실성의 기초는 사유하는 행위를 통해 경험되는 개인에 근거 삼게 되고, 이로서 원초적 확실성의 장소가 신에서 인간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중세나 종교개혁 때처럼 신에 대한 확실성으로부터 시작하여 나 자신의 확실성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확실성으로부터 신에 대한 확실성을 유추하게 되었다. 중세의 가톨릭 패러다임에서 최고의 권위는 교황이었고, 종교개혁 시절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으나, 근대적 패러다임의 최고의 권위는 이성reason이 갖게 되었다. 오직 합리적인 것만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었다. 이에 대해 교회의 반응은 검열, 종교재판, 파문, 화형, 징계, 금지였고, 급속히 교회와 사회는 분리되기 시작한다. 그 결과 가톨릭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주도권을 잃고 한 지역, 바티칸으로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이 후 이 책의 내용은 문명사로 이어진다. 이에 대하여 가톨릭은 무관심, 적개심으로 표출되고, 스스로 고립화된 보수화의 길을 가게 된다. 가톨릭은 시대에 따라 개혁하지 못하고 더욱 교황의 무류설에 따라 권력은 강화되며, 심지어 교황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나치의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동조(나치의 많은 주요한 인물들이 가톨릭 신자),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침묵 같은 역사적 오류를 저지른다.

 

비로소 요하네스23, 2차 바티칸 공의회에 가서야 종교 개혁과 계몽주의 및 근대의 패러다임을 통합하려 한다. 가톨릭 이외의 다른 교회 모임도 교회로 인정되고, 그동안 기피해 왔던 근대적 발전, 세속 사회, 과학,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다

 

책의 막판으로 갈수록(시대가 현대로 올수록) 교황을 거의 까고 있다. 2001년에 처음 출판된 책이니 당시 교황은 요한바오로 2세인데, 20세기 가장 모순된 교황으로 표현한다. 그 외에도 가톨릭의 문제를 다수 기록하고 있으나, 개인적으로 타종교에 대해 잘 모르고, 이러 쿵 저러 쿵 할 입장이 못되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저자는 요하네스 24(기대하는 의미에서)의 제3차 바티칸공의회를 열고 로마가톨릭주의에서 진정한 가톨릭 교회로 전환하여 참다운 보편적 교회로 이끌어 가길 바라고 있다. 결론으로, 교회의 미래를 위하여 제언으로 마치고 있다.

 

1) 교회는 과거로 돌아가선 안되고, 기독교 기원에 뿌리 내리고 현대의 임무에 집중하는 교회

2) 가부장주의를 타파하고 교회 직책과 봉사에서 여성을 받아 들이고 협력하는 교회

3) 배타성, 관료주의에 굴복하지 말고, 교회 일치 운동, 파문조치 폐지, 교파간 성만찬 교제, 다양한 목회 활동인정으로 범 교회 적으로 열린 교회

4) 포용적이고 포괄적인 교회, 각 국가 지역 지방 교회들에게 적절한 자율권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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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여페이지에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교회사와 온 문명사를 아우르고 있어 책이 다루고자 하는 영역을 매우 크고 넓었다. 또한 가톨릭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어 개인적 개신교도로서 차이점과 공통점을 구분하여 읽어 가자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사전 지식의 부족을 많이 경험하였다. 근세 이후의 세속사와 기술역사는 나름 알고 있었으나, 고대, 중세,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사는 생소한 부분이 많았다. 기초 지식을 찾아가며 더듬어 읽어 가서 새로운 것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아직 명확하게 정리된 것을 아니지만.

 

가톨릭 인물(특히 교황, 주교 등)에 관한 배경 지식이 거의 없고, 가끔씩 낯 설은 가톨릭 교리 용어가 튀어나와 생소했다. 대부분 짐작으로 이해했다 치고 넘어 갔다. 그렇다 해도 전체 문맥을 헝클어트리거나 맥락을 무너트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저자는 가톨릭의 아웃사이더 학자로 (특히 교황 무류설 주장) 근본 원리의 근거로 하는 가톨릭 역사서가 정론인지 저자의 의견인지 일부 혼동되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명확한 논리로 자신의 근거로 교황을 까기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마치 소설 원문을 읽지 않고 소설 비평으로 원문을 추론하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의 안목과 평가를 통해 내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같이, 가톨릭 교회의 역사를 통해 개신교의 역사가 어떻게 비춰지는가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참고로 (내가 보기에) 루터에 대해선 후한 평가이고, 칼뱅에 대해선 박한 점수를 주었다. 물론 가톨릭 내부는 아주 가혹한 점수를 준다.

 

어차피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사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동일한 역사를 가지므로 이해를 돕는 참고서 역할을 하였다. 교회사를 아는 것이 구원을 얻고 못 얻고의 문제는 아니지만, 알고 있는 교리의 형성과정을 본다면, 지식의 측면과 이해의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책 근대부분에서 교회사와 문명사가 대비되고, 그 중에서 교회의 역할이 구별해 내는 구성으로, 그 당시 시대와 교회가 영향을 주고 받았던 자잘한 지식들로 당시 시대적 상황을 갸름해 볼 수 있었다. 교회가 주류에서 밀려나고 세속화가 가속화된 원인과 배경에 대해선,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가장 큰 수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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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셋 몸 작품집
서머셋 모옴 지음, 이호성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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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셋 몸의 8가지 중단편을 모아 놓은 책이다.

<척척박사> <편지> <약속> <삼십육계 줄행랑> <비> <최후의 심판> <메이휴> <개미와 베짱이>

 

이 중단편을 읽고 발견한 몇가지 공통점은,

(1) 주인공 대다수가 불륜 관계가 있다. 특히 관심사가 되는 여주인공은 거의 그렇다.

(2) 인간의 위선을 다루고 있다. 겉모습이 멀쩡해 보인다고 멀쩡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3) 일반 대중들이 알고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뒤에 무지막지한 진실이 감춰져 있다.

(4) 책의 막판에 반전이 있다. 책의 마지막 줄을 다 읽기 전까지 긴장을 늦추면 안된다.

(5) 주로 남녀 관계를 다루고 있다.

(6) 작기의 이름이 '몸'이라 그런지 인간의 육체가 주요한 소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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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 개정판 크로노스 총서 10
패트릭 콜린슨 지음, 이종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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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관점에서 종교개혁을 바라보는 책이다. 가톨릭의 의견보다 개신교 쪽의 의견에 치우친 느낌이다. 하기야 종교개혁이 1000여년 동안 문명 세계를 지배하던 가톨릭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온 개혁이기 때문에, 더군다나 성공한 개혁이기 때문에, 책의 결론으로 당연한 귀결일 수 있다.

 

우리가 부르는 단어인 종교개혁은 영어로 (대문자) Reformation인데, 영어 단어에는 종교라는 의미는 빠져 있다. 우리는 종교개혁으로 번역하여, 언어의 한계로 인해, 범위를 종교 분야에만 한정 시켰다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Religious’ reformation 같은 단어로 부르지 않는 의미는, 비록 종교 분야에서 시작하였지만, 그만큼 사회적인 파장이 종교 이외의 분야에,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서부 중부 유럽의 거의 모든 방면까지 영향을 미친 개혁이었고, 시대적으로 볼 때도 중세의 시대를 마치는 마침표가 됨과 동시에, 근대 시대로 시작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올해는 종교개혁 500년이 되는 상징적인 해 인데, 종교 분야에만 (특히 개신교에서만)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이에 종교개혁이 아닌 대개혁으로 부르자는 분도 계시는데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보다 먼저, 14세기에 시작했던 르네상스 Renaissance가 문화적인 면으로만 한정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책의 내용을 접하다 보니, 그동안 마르틴 루터가 중세 사람이었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 수도사였고, 신학교수였기 때문에, 종교는 그의 사고의 중심이었고, 처음이자 나중이었을 것이다. 비텐베르그 성당의 문에 면벌부에 대한 95개의 반박문을 붙일 때 조차, 아마 그도 일이 이렇게 커질지 몰랐을 것이다. 이 책은 루터 이전에도 가톨릭과 사회 개혁에 대해 불만과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개혁을 비롯한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났지만, 루터의 개혁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주변의 환경이 큰 작용을 했었다. 이전의 개혁에 비해 루터는 사회 불평등이나 교황의 윤리적인 문제가 아닌 가톨릭 교리를 지적했던 것과, 인쇄술의 발전, 사회 불만의 팽배,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입지 약화, 루터의 뜻을 강력히 지원했던 선제후의 정치적인 위치와 판단력이 바로 그것이다.

 

결론적으로 (책의 내용에도 나와 있지만) 가톨릭과 개신교와의 차이는 명백해 진다. 특히 인간은 위상에 대하여, 신의 형상을 한 인간의 창조가 계속 앞을 향해 진척되다가 그리스도의 인간 구원 속에서 영광스럽게 완성된다(가톨릭).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비천한 창조물로서, 신의 압도적인 은총 없이는 버러지에 불과한 존재(개신교). 결코 큰 집과 작은 집의 관계 따위로 나눌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이후 칼뱅이 나타나 기독교의 교리는 공고해 지고, (루터파와 나눠진다) 가톨릭 쪽에서도 로욜라의 예수회 같은 반종교개혁(가톨릭의 자체 개혁과 같은 말)이 일어나 세력이 각각 구분된 후 (별 정통성 없어 보이는) 트리엔트 공의회로 인해 두 개의 종교로 확정되어 갈라선다.

 

역사학의 관점에서 종교개혁을 바라본 책이라, 기독교 내부에서 보던 것과 다른 정보도 제공해 준다. 정교회(칼레톤파와 비칼레톤파)의 차이도 배울 수 있었고, 대립교황이란 단어도 처음 배웠다. 특이한 영국의 종교개혁, 오델로 같은 신구교 정부의 빈번한 정권 교체, 초기 신앙 교육을 담당했던 인쇄물, 농민전쟁의 배후, 성상파괴운동 등의 내용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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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노스 총서 10번, 개정판이 나와 있다. 실제로 읽은 책 (구판, 도서관에서 빌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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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교회사다 : 진리의 보고 - 초대교회사 편 이것이 교회사다 시리즈
라은성 지음 / 페텔(PTL)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초기 기독교 핍박 -> 공인(밀라노칙령) -> 성장(정교유착) -> 타락

예수님 이후 초기 기독교의 공인과 성장까지 역사에 관한 책이다. 히브리 지방 한 민족의 종교에서 문명권의 주류 종교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스펙터클하게 펼쳐진다.

 

교회의 창립 기념일 때마다 (아마 한국의 모든 교회가 그럴 것이다) 설교의 주제가 된다. 교회를 세우신 목사님께서 교회 개척하실 때 어려울 때부터, 중간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지금 자리잡고 성장 할 때까지 간증으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 한 교회를 세우시기까지 개입하시고 역사하신 내용을 마치시고 찬양하며 끝을 맺는다. 하나님께서는 한 교회에도 이렇게 개입하시고 인도하시는데, 지역의 한 종교에서 시작하여 핍박 받으면서도, 결국 공인 받고, 세계사 속에서 중심이 되기 까지, 또 지금 전세계에 퍼지기 까지 얼마나 많이 간섭하시고 역사하셨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박해 받는 초기엔 교회를 유지하는데 까지만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신비주의나 내세를 향한 믿음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즉 교리를 정립한다 던지, 교리의 발전까지 기대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공식적인 종교로 공인되고 나서부터 본격적인 양적 질적 성장이 이루어 지기 시작한다. 대중화를 이루지만, 점차 믿음이 믿음으로만 그치지 않고, 출세의 지름길이 되고, 정교(政敎)가 유착화 되면서 결과적으로 타락하게 되었다. 공인이 되는 것과 동시에 우수죽순 이단도 나오게 되고, 이단과 정통을 구분하기 위해, 교리 논쟁이 시작되고, 정통의 교리가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초대교회사인 이 시기가 논리의 보고(寶庫), 교리의 보고, 진리의 보고인 동시에 이단의 보고도 되었다. 어둠을 봐야 빛의 소중함을 알 듯, 반면교사로서 이단은 정통 교리를 정립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이 책은 초기 교부들만큼이나 이단의 창시자들에게도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초대교회사는 교리를 정립했던 많은 초기의 교부들이 소개된다. 일일이 소개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다양하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적인 것은, 교부들의 믿음과 지금 우리의 믿음을 비교하자면,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림없는 수준이다.

 

수도원 운동으로 초대기독교사는 끝을 맺고 있다. 그 다음엔 중세 기독교사로 연결될 것이다. 수도원 운동은 순종과 절재의 면에서 장점이 있다. 하지만 신비주의와 이기주의로 쉽게 빠질 수 있는 단점도 있다. 서로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만,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사람들속에서 살아야 한다. 악영향(유혹)은 이겨내고 선한 영향력은 주변에 끼쳐야 한다. 분리된 삶은 한계가 있다. 그것을 구별해 낼 수 있는 분별력(영적 분별력)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교리공부, 올바른 성경공부가 반드시 필요하고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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