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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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인 지적인 크레타 출신 주인공이 갈탄 광산을 경영하기 위하여 크레타로 들어가는 배 편을 기다리다가 50대 중반인 마케도니아 출신 그리스인 조르바를 항구에서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크레타 섬은 오랫동안 터키의 지배를 받았고, 자긍심이 강하여 그리스에 속해 있지만 그리스인으로 불리기 보단 크레타 출신으로 불리기를 더 좋아한다는 역사적 배경을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 소설은 1인칭 주인공/관찰자 시점으로 진행된다.

 

주인공인 나는 갈탄광의 주인이고 지성을 가졌지만, 뛰어난 감성을 지니고 많은 경험에서 터득한 지식으로 판단하고 외향적인 조르바는 서로 좋아하고 많은 부분을 공감하는 사이이다. 나와 조르바는 반대 성향을 가졌고, 나이 차이도 나지만, 사랑과 우정에 관한 이야기가 기본 플롯으로, 자동 운송장치의 설치, 만난 퇴역한 가수 부불리나, 과부, 살투르(악기), 감정을 표현하는 춤, 타락한 수도원과 수도승, 그 사이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대화는 주로 존중과 막말체가 공존하며, 이들 서로 간에 믿음이 있고, 존경이 있다. 주인공의 관심사엔 도덕과 신, 신앙과 불경함 사이를 오고 간다. 기독교(아마 정교)를 바탕으로, 부처가 언급되기도 하고 동양사상도 언급된다.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주인공과 달리, 직관이 우세하고, 경험과 실무가 뛰어난 조르바는 많은 일을 해결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머리와 가슴으로 반응하여 해결하는 일에 대해서, 글을 쓴다던가 사색을 한다던가 하는 일은 실생활의 문제들, 특히 직접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데 그리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먹물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해석하면 될 것 같다.

 

실제로 작가 니코스 카잔카키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을 주인공으로 조르바를 통해 배우게 된 사실에 대해 자신의 관점으로 풀어 나간다. 작가는 철학(베르그송, 니체)과 고행하는 수도승, 기독교와 불교로 세상의 진리를 찾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 하였으나, 그가 찾아낸 건 진정한 자유로운 영혼인 조르바였다. 어록으로 조르바의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새끼손가락 하나가 왜 없느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새끼손가락이 자꾸 거치적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도끼로 내려쳐 잘라 버렸어요.>

<하느님요? 자비로우시고 말고요. 하지만 여자가 잠자리로 꾀는데도 이거 거절하는 자는 용서하시지 않을걸요. 거절 당한 여자는 풍차라도 돌릴 듯이 한숨을 쉴 테고, 그 한숨 소리가 하느님 귀에 들어가면, 그자가 아무리 선행을 많이 쌓았대도 절대 용서하시지 않을 거라고요>

<도 닦는 데 방해가 된다고 그걸 잘랐어? 이 병신아, 그건 장애물이 아니라 열쇠야, 열쇠.>

<결혼 말인가요? 공식적으로는 한 번 했지요. 비공식적으로는 1천 번, 아니, 3천 번쯤 될 거요. 정확하게 몇 번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닌 거 봤어요?>

<확대경으로 보면 물속에 벌레가 우글우글하대요. , 갈증을 참을 거요, 아니면 확대경을 확 부숴 버리고 물을 마시겠소?>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 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려.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전에 알바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어떤 작가(미술)님이 극찬과 함께 강력한 추천으로 읽었는데, 나는 그냥 보통이었다. 개인적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를 추구하고, 자유 분방한 연예를 그다지 즐기지 못하다 보니 그다지 공감대를 느끼지 못하겠다. 기대가 너무 커서였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읽는 독자의 마음이 심난하여, 중요한 건 모두 흘려 버리고 자투리만 몇 게 건져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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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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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1932년에 쓴 소설로, 그 당시의 세계관으로 본다면, 작가의 매우 뛰어난 통찰력이 돋보인다. 우리는 80여년이 지난 지금 일부 합당한, 그런 사회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소설의 이해를 돕는 몇 배경 지식들

* 서기 2600년이 시대 배경이다.

*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입실론 계급 –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고정되어 있다. 알파는 사회 지배계급, 베타는 행정계급 중산층, 감마는 하류층, 델타와 입실론은 일부러 기형으로 만들어 단순작업을 담당한다. 이들은 수천 개체의 일란성 쌍둥이로 인공부화소에서 태어난다.

* 신파블로프법 – 지속적인 반복학습과 수면학습을 통해 주입식 지식을 강요한다.

* 대전쟁, 세계정부 – 핵전쟁으로 문명세계는 멸망하고 새로운 단일정부가 등장한다. 작가가 집필했던 1932년엔 이런 개념이 아직 없었으리라.

* 새로운 기원 AF(After Ford) – 대전쟁 이후 들어선 지배자. 독재자 Ford는 일괄생산방식을 도입한 자동차왕 포드에서 따왔다. 컨베이어 시스템을 타고 병 안에서 아기들이 자라고 출산하는 것이 이야기 기반이 된다.

* 섹스 – 자손의 번식 목적이 아니라 단순한 즐거움 일 뿐이다. 이곳은 극단적인 자유연애 시대이다.

* 소마 – 마약성분에 종교성도 포함되어 있어 안락함을 준다.

* 멋진 신세계 – 세익스피어의 템페스트 5 1장에서 따온 제목이다

* 등장인물

 - 무스타파 몬드 – 총통, 지배자

 - 버나드 마르크스 – 주인공이다. 이름만 보고도 그가 완벽한 이 세계의 파괴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린다 – 존의 어머니, 사고로 문명세계에서 떨어지게 되어 존을 낳게 된다.

 - 존 – 혼혈(야만인), 기본적인 인간 본성을 추구하는 평범한 인간, 그러므로 여기선 문명사회의반사회인이 된다.

 

* 계급사회 – 개인의 자질이나 노력이 아닌,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정해지고,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계급이 고착화 되는 것 본다면, 현재의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완전히 허구로 몰아 갈 수 없을 것 같다. 단지 책에서는 부모 없이 계급이 정해지는 출발만 일부 다를 뿐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영어 유치원, 영재학교 등, 부모의 경제력 차이가, 다시 말해 선행학습을 할 수 있고/없고의 차이가 특목고 등 좋은 고등학교 등 상급학교 진학과 직결되고, 이들에게 유리한 대학입시로 계급이 결정 지어지고, 입학 서열에 의한 대학에서의 차이가 이미 사회의 계급이 결정되고, 학자금 대출과 고학으로 간신히 마치는 학생과 어학연수를 다닌 학생들의 소위 스펙 차이, 고시보다 로스쿨의 차이가 부의 대물림은 물론 학업의 대물림 되는 현실인 지금, 또한 급여와 복지혜택의 차이가 큰 중소기업과 대기업 입사자로서 사회의 첫걸음부터 불평등한 구조로 순차적으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을 본다면 한 개인의 노력만 가지고는 거대한 큰 틀을 깨는 것이 그리 쉽지 못하다. 그 고착화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느껴질 지경이다.

 

과학의 발달은 인류의 행복과 번영을 꿈꾸지만, 이 책에서 보여주는 극단적인 문명 발달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이 모든 것을 누리고 살고 있는 알파, 베타 계급들은 인지 하지 못한 채 길들여진 행복을 누리며 잘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육체적 쾌락을 즐기며, 혹시 어려운 사건이 있다면 소마를 먹고 지나가면 그 뿐이다. 이 길들여진 규칙과 교육으로 느끼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문명이라는 이름 속에 아무 탈없이 극단적인 쾌락을 추구하면서 인생을 즐기며 살면 그 뿐인 것이다. 이들 낙원에는 너무나 안정되어 생활의 안정, 질병도 없고, 늙어 가는 것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규칙이나 교육 역시 새로운 것을 알기 위한 방법이 아닌,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기 위한 교육일 뿐이고, 과학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어려움을 극복하고 느끼는 희열도 애초에 없다.

 

유일하게 우리와 닮아 있는 등장인물인 야만인 존은, 이 문명사회에 동화되지 못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세뇌된 교육을 받지 않아 인간의 본성을 추구하고 있어서 이다. 그렇기에 관심을 불러 모으지만, 그 사회에서 받아 드릴 수 없는 문제를 일으킨다. 존 이외엔 세상이 완벽하게 잘 돌아가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것도 반사회적인 곳에서 무한의 대중에게 그만의 방식으로 저항한다. 땀 흘린 노동의 삶을 더 가치 있게 느끼는 혼자 사는 것으로 책은 끝마친다. 그가 알고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세익스피어 전집에서 나온다(1932년도에 영국 작가가 쓴 책이다).

 

작가는 신, 문명, 순결, 인간의 의지, 행복 등 일상 생활의 거의 모든 것을 <신세계>의 관점에서 재정의 한다는 점에서, 통찰력이 돋보인다. 하지만, 책에서도 그렇지만, 21세기를 가는 나에게도 만족스러운 접점을 찾지 못한다. 우리가 낙원을 꿈꾸지만 이런 식의 낙원은 아니지 않겠는가. 세뇌되고 교육된, 본능이 거세된 행복이 진짜로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인가 하는 점이다. 과학, 문화의 발달에 대한 가치는 비판 의식을 가지고 계속 고민하면 찾아가야 할 숙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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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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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죄로 15년 형을 받고 정치범 수용소에 있는 이반 데니소비치(슈호츠)의 기상 부터 자기 전까지 하루가 한 권의 책이 되었다. 마치 내가 하루를 산 것처럼 실감난다. 껴입은 지저분한 옷이나 추위같은 주변 환경에 대한 묘사가 현실감 있게 뚝뚝 떨어진다. (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대표작인지 알겠다)

 

단지 하루를 지났을 뿐인데, 수용소라는 조그마한 공간 안에, 하나의 사회가 돌아간다. 점심 식사때 식당 배식자를 속여 죽 한끼를 더 먹었고, 벽돌쌓기를 즐겁게 해 냈으며, 동료에게 도움을 줘 소시지 하나를 얻어 먹은 자그마한 행운이 따라줬던 슈호츠에게 내일도 오늘과 비슷한 또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수용소니 그 안에 죄수가 있고, 죄수마다 사연이 있고, 점호가 있고, 간수가 있고, 독방이 있고, 그 안에 권력이 있고, 눈치가 있고, 작업이 있고, 경쟁이 있었다. 밖에서 볼 때 그들의 삶은 별일 아닌 듯하지만, 나름 한 무더기의 죄수들이 정해진 규칙 속에서 잘 적응하며, 편법을 이용하며 어려움 속에 살고 있고, 이런 일들이 모아져 또 하루가 되었다. 고생스러운 생존 속에 또 다른 삶이 있었다.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은 위키백과에 설명된 소개로 대신한다.(캐릭터에 대해 더 잘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B%B0%98_%EB%8D%B0%EB%8B%88%EC%86%8C%EB%B9%84%EC%B9%98%EC%9D%98_%ED%95%98%EB%A3%A8

 

과거 공산주의 독재국가 였던 러시아 반체제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실감나게 독자에게 전해준 간접 경험이다. 러시아 문학 특유의 묵직함은 등장인물 속에 투영되어 있으며, 외부 감시, 사상과 투쟁에 대한 환경은 가혹한 추위에 대한 은유로 잘 묻어나오고 있다. 주인공 한사람의 눈으로 본 하루의 물리적으로 짧은 이야기 지만, 몰입도 최고이고, 묘사력 최고 이다. 작가의 사상이 언어로 녹아져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 된다는 것은, 우리가 같은 경험을 하지 않더라도, 한편의 영화를 통해 느끼는 시각적 경험보다 훨씬 깊이가 깊은, 상상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게끔 하는 간접경험의 좋은 고전 문학작품으로 기억될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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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순 - 2014년 제3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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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이라는 영예는 작가에게 유명도와 좋은 타이틀을 가져다 주겠지만 <몬순>은 약간 실망이었다. 아마 기대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차라리 수상 작가의 문학적 자서전 <타인의 삶>이 많은 것을 깨닫고, 주변을 다시 되돌아 보게 만드는 훨씬 좋은 단편 이었다. 아마 어쩌면 <이상문학상>은 노벨문학상 처럼, 작품이 아닌, 작가에게 주는 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 만의 독특한 작품세계, 항상 불안으로 몰아가는 주변 상황과, 안 좋은 기억을 기여코 끄집어 내어 좋은 기분도 불쾌하게 만드는 도구, 중간 중간에 복선을 함정처럼 움푹 파놓고 나중에 보면 왜 거기 있었는지 깨닫게 되는 구성, 이야기를 풀어 가는 방식은 주목을 받을 만 하다. 주변 환경에 대한 설명은 단문으로 짤막하게 서술되고, 감정을 설명할 땐 무지 길어진다. 훨씬 잘 맞는 거 같다. 단문은 객관적으로 느껴지고, 속도감이 느껴진다. 문장의 길이가 길어지면 물리적인 숫자만큼이나 비슷하게 생각의 길이가 길어지고 넓이가 깊어진다.

 

개인적으로 다른 아홉 가지 우수상 수상작 중 손홍규씨의 <기억을 잃은 자들의 도시>와 조해진씨의 <빛의 호위>, 윤이형씨의 <쿤의 여행>도 대상만큼이나 좋았다. 특히 <기억을 잃은 자들의 도시>는 소재가 좋았다. 심사위원들에겐 평면적이라는 평이었지만, 다른 이야기 거리를 아주 많이 만들 수 있어 다른 작품에 사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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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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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러시아에서 소련으로, 스탈린시대 공산화되는 과정을 그린 대표적인 풍자 문학이다. 서수남 하청일 아저씨의 노래 <동물농장>, 닭장 속에는 암탉이, 꼬끼오~ 하는 노래와는 별 상관 없어 보인다.

 

책에 대해서 이야기는 많이 들어 보있지만 직접 읽어 본건 처음이었다. 책은 특성상 문학성 보단 당시 시대의 풍자와 상징성으로 평가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상징성을 지닌 등장 인물은 읽으면서 감이 오지만, 정리는 위키백과가 제일 잘 되어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B%8F%99%EB%AC%BC%EB%86%8D%EC%9E%A5

 

풍자 문학은 문학성은 떨어질 수 있지만, 상징성 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문학은 허구를 바탕으로 하기에,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처벌을 받을 만한 내용을,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소설이라는 특성상 빠져 나갈 수 있는 구멍을 제공함으로써, 만일 문제가 생겼을 경우 둘러 댈 수 있다는 핑게로,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나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 것으로 자위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풍자 문학에게 면죄부를 쥐어 지는 것은 아니다. 금서로 묶인다던지,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가능성은 다분하다.

 

중요하지만 모르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이 책<동물농장>은 스탈린 주의에 대한 풍자이지, 공산주의에 대한 풍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가만 있으면 평안한 이데롤로기 안에서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다. 많은 부분 실제로 작품을 접한다던가, 알고 보면 겉에서 보던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을 내포하고 있는데, 마치 예고편만 보고 영화 전체를 판단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이 책의 작가 조지 오웰은 죽을 때까지 사회주의자로서, 볼세비키 혁명이후 스탈린에 대한 비판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러시아 사회주의는 독재와 전체주의로 타락했고, 그 타락을 막지 못한 체제로 부터의 사회주의는 다시는 회생할 수 없다'가 그의 본래 주장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제체로 넘어 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한다던가, 제정시대의 회복을 원한다던가, 서유렵 방식의 시민혁명을 지지한 것도 아니었다. 바로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건설할 기회를 잃은 것을 대해 스탈린을 비난하기 위해, 풍자한 책이 바로 이 <동물농장>인 것이다. 차라리 트로츠키와 멘세비키 쪽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소설인 것이다. 그 근거로 책 마지막에 나폴레옹과 돼지들이 술과 카드놀이 하며 인간들과 어울리는 장면, <누가 누구이고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 할 수 없었다> 라는 장면에서 사회주의의 소멸상태를 보여 준다. 다른 한가지는, 많은 동물들이 나폴레옹에게 학살 당한 후에, 남은 동물들이 농장 뒤켠에 올라가 <우리가 이럴려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닌데>라며, 슬픔과 회의에 잠기는 대목에서 다른 목적이 있었음을, 그리고 그 목적을 성취해 내지 못했다는 것을 표출하는 것이다. 작가는 1940년대에 이미 소비에트 체제의 소멸을 본 것이다.

 

갑자기 러시아 혁명이 궁금해 찾아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누구이고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 할 수 없었다 - 나폴레옹과 돼지들이 술과 카드놀이 하며 인간들과 어울리는 장면

우리가 이럴려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닌데 - 많은 동물들이 나폴레옹에게 학살 당한 후에, 남은 동물들이 농장 뒤켠에 올라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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