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2015년 1월 인문 / 사회 과학 / 예술 신간 "읽고 싶어요"

 

[사회 과학]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부제: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세대의 정체)

후루이시 노리토시(지은이), 이언수(옮긴이), 민음사

 

사토리시대의 사토리는 '득도'를 뜻한다.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하다니, 득도를 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장기침체 속 젊은이들은 프리터로 전락했고 식물남, 건어물녀가 등장했다. 일본 영화가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주제가 많은 것도 장기침체의 영향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소소한 곳에서 행복을 찾기 대가다. 그렇기에 행복하다.

 

저자는 젊은이들이 절망 속에서도 '짱돌'을 들지 않는 이유를 '나름'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 짱돌도 희망이 있어야 든다. 이미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은 내일도 희망이 없음을 알기에 그저 지금 행복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침제는 시작됐고, 계급의 아래축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은 절망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장그래'라는 인식까지 퍼져있다. 많은 유명인사들이 '행복은 마음먹기에 따라 온다'고 말한다. 사토리세대처럼 되라는 말일까? 이들의 소소한 행복은 정말 마음 속 깊이에서 오는 행복일까? 아니면 마지못해 느껴야만 하는 행복일까.

 

저자가 직접 많은 젊은이들을 만나며 책을 썼다 한다. 실제로 청년들을 만나 이야기하며 한국 청년층을 분석했던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이 떠오르기도 한다. 환상 속의 젊은이가 아닌 실제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에서 안심된다.  

 

 

 

비굴의 시대

박노자(지은이), 한겨레출판

 

수사가 필요할까. 박노자의 신간이다. 목차를 훑어보니 흥미로운 대목들이 많다. '젊은 백수들에게', '대한민국에 보수는 없다', '미국은 어떻게 보수화되었는가', '좌파 민족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혁명가에게 애국이란 없다'. 마음에 드는 소제목부터 읽어도 좋을 듯하다.

 

세월호 이후의 대한민국은 그 이전과 달라야 한다는 인식은 모두가 어렴풋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나빠져 간다. 그동안 책과 칼럼으로 한국 지식인들이 '한국인이기에', 혹은 '주류 지식인이기에' 보지 못했던 관점을 제시했던 박노자다. 세월호 이후의 대한민국에 대한 수많은 진단과 분석이 범람하는 지금, 박노자는 어떤 진단과 분석을 내렸는지 읽어봄 직하다.

 

 

 

절제의 형법학

조국(지은이), 박영사

 

대한민국의 2014년 12월 마지막 주는 '절제하지 못한 사법'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시기라고 평가될 수도 있다. 헌정 사상 초유의 정당해산 심판으로 사법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온 세상에 드러냈다. 사법에 대한 글과 성찰이 필요한 시기다.

 

이슈와 맞물려 읽을 수 있는 법관련 서적이 나왔다. 서울대 로스쿨교수이자 이제는 유명인사인 조국 교수의 신간이다. 사형, 낙태, 체벌, 간통, 혼인빙자간음, 군형법, 통신보호비밀법, 국가보안법까지 논란이 되는 형법에 대해 다룬다. 

 

다루는 주제들을 훑는 동시에 한국의 중요 이슈들이 떠오른다. 잔인한 범죄가 공개된 후 뒤따라오는 '사형 시키라'는 목소리, 학생과 선생님의 싸움, 터키 방송인 에네스 카야가 불러들인 간통죄 논란, 그 어느때보다도 컸던 군대 개혁의 목소리, 노회찬 의원의 동작을 출마로 인해 다시 오르내렸던 통신보호비밀법, 정당해산판결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소당한 진보당 당원들. 하나하나 한국의 이슈와 맞닿아 있지 않는 것이 없다. 

 

이슈를 떠올리며 읽을 수 있기에 법과 친근하지 않은 이들도 관심을 갖고 읽을 수 있을 듯 하다. 논술을 쓰거나 가르치는 이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같다.     

 

 

[만화-교양만화]

 

오무라이스 잼잼 5

조경규(지은이), 씨네북스

 

무려 '교양'만화로 분류돼 있는 <오무라이스 잼잼>. 조경규 작가의 <팬더댄스>가 재미있긴 하지만 교양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팬더댄스>의 엉뚱함과 함께 음식에 대한 역사와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읽을 수 있는 오무라이스 잼잼을 읽어야 한다. 팬더댄스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더 나아가 만화를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싫어할 리 없는' 만화다.

 

오무잼 5권에는 다음 웹툰 98화 '변신 크림 스프'부터 117화 '식빵은 오토 프레데릭 로웨더씨가 만드셨다'가 담겨있다. 특별히 추천하는 에피소드는 시중의 크림스프도 아웃* 스프 못지않게 변신시키는 조리법이 담겨져 있는 98화와 표지에도 나와있는 103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그곳 토루코 라이스'편이다. 딸에 대한 찡한 사랑과 작가 특유의 사랑표현방식을 보여주는 111화 '사이다처럼 자라주려무나' 역시 감동적이다.

 

이미 다음 웹툰으로 오무라이스 잼잼을 만났다하더라도 책으로 간직할 필요성이 있다. 잘보이는 책장에 꽂아 놓고 수시로 읽어 각 음식의 에피소드를 외우면 좋다. 식사를 할 때마다 절로 떠오르는 음식 역사 덕분에 같이 식사하는 친구에게 잘난 척할 소스들이 무궁무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박웅현의 도끼와 카프카의 도끼]

 

꼭 인문학 열풍 때문이 아니라도 종종 이런 류의 책에 손이 간다. 이런 류의 책이란 지식 소매상 같은 책이다. 쉽게 말하면 책에 관한 책. 물론 저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퀄리티는 크게 달라지므로, 유혹에 빠지는 것이 꼭 나쁜 결과를 부르지 않을 때도 있다. (가령 이현우의 <아주 사적인 독서>나 정희진의 <정희진처럼 읽기>와 같은 책이 그랬다.)

 

책에 관한 책의 유혹에 빠지는 이유는 게으름이다. 하나하나 가시를 발라가며 책을 읽지 않고도 통통한 속살만 쏙 빼먹을 수 있을 거란 유혹은 강렬하다. 우등생의 노트를 빌리기 하면 그날은 일단 뿌듯한 것처럼 이런 책을 읽으면 일단 뿌듯하다. 하지만 양념통닭도 제 손에 들고 온갖 양념을 묻히며 먹어야 제 맛이듯, 누군가가 살을 발라 입에 쏙쏙 넣어주는 것은 편할 진 몰라도 제대로 된 맛을 느끼긴 어렵다.

 

게으름을 제외하고 이런 책을 골랐다면 인문학 열풍 때문일까? 이제는 인문학 열풍이 지나 ‘인문학 열풍 까기’의 유행까지도 지난 것 같다만, 이 책을 읽고 나선 꼭 해야 하는 이야기다.

 

두 글이 있다.

 

1.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냐.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1904년, 1월 카프카.

-<책은 도끼다>, 박웅현, 129p

 

2. 우리는 다만 우리를 깨물고 찌르는 책들을 읽어야 해.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자네가 쓰는 식으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라고는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정히 행복할 것. 그렇지만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오스카 폴라크에게, 1904년 1월 27일 수요일.

-<카프카의 편지 100선> 18p

 

두 글 모두 도끼가 등장하나 두 도끼는 다른 도끼다. 첫 번째 글에서 박웅현이 말하는 도끼는 위협적이지 않다. 오히려 꽁꽁 언 얼음을 단 한 번에 쩍하고 깨버리는 상쾌함, 거기에 따라오는 행복까지 연상된다. 카프카가 쓴 편지에서 ‘도끼’는 위협이다. 재앙 같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같은, 자살 같은 도끼. 널따란 바다에 표류해 작은 얼음조각에 의지해 버티고 있는 데, 그걸 깨버리는 도끼다. 행복감은커녕 불쾌와 불편함을 넘어 공포를 느낀다.

 

‘인문학 열풍’이라 불리는 것의 인문학은 카프카의 도끼가 갖는 속성보다 시장의 속성과 가깝다. 인문학을 가지고 광고를 만들었다는 박웅현에게서 그 속성이 잘 드러난다. (스티브 잡스를 이길 사람은 없겠지만.) 시장에서 승리하고 1등을 할 수 있게 알려주는 학문을 우리는 경영학이라 불렀다. 이제는 이를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경영학의 ‘자기계발’이 촌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경영학의 수단으로 전락한 인문학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대학에서 자신이 다니던 과가 없어질 위기에 놓인 학생들과 그 선생들 외에 몇이나 있을까.

 

2003년 이후 대학의 전체 학과 수는 16% 늘었으나 인문학과는 43개 이상 통폐합됐다. 인문학 주전공에 또 다른 인문학을 복수전공한 나로서는 진짜 인문학은 대학에서 죽었다고 생각한다. 경영학의 탈을 쓴 인문학만이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영화의 스토리처럼 진짜 인문학은 가짜에 의해 어딘가에 갇혀 있었지만 가짜는 거리로 나가 활개를 쳤다. 하지만 모두가 말랑말랑하고 위협적이지 않은 그를 사랑한다니, 걘 가짜라고 외치기도 뻘쭘한 상황이다.

 

한창 인문학 열풍이 불 때 이런 책을 읽는 것이 아무것도 읽지 않는 것보단 낫지 않느냐고, 가이드 역할도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생각난다. 물론 가이드는 필요하다. 하지만 가이드의 말이 전부라면 곤란하다. 강의를 들은 이들 중 몇 명이나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까는 의문이다. 책을 읽고 스스로의 거친 생각을 말하기보다 저명인사의 평가를 듣고 나서야 입을 뗄 줄 알며, 강의실에 앉아 ‘Entertain us’의 자세로 웃고 떠들다 인문학을 읽었다는 이들에게 드는 반감은 어쩔 수가 없다.

 

사실 누군들 도끼에 찍히고 싶을까. 스스로가 찍히기보다, 박웅현의 도끼처럼 수단으로서 도끼를 갈망할 것이다. 도끼에 찍힐 대상이 ‘나 자신’이냐, 내가 깨뜨리고 싶은 ‘대상’이냐에 따라 진짜와 가짜가 구별된다고 말하고 싶다.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것, 그것은 쉽게 만나기도 어렵고 말랑말랑하지도 않다. 이런 의미에서 임마누엘 칸트는 철학이 전쟁이라고 말했다. 전쟁에서 지든 이기든 그 이전의 삶과 같을 수 없고, 모두가 끔찍해지기 때문이다.

 

안다. 카프카의 도끼 같은, 칸트의 전쟁 같은 인문학은 설 자리가 없다는 걸. 전쟁을 치르자는 과격분자들이 언제나 소외당하듯 말이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의 시대. 이제 가짜를 가짜라고 말하는 사람은 ‘싸가지 없는 놈’ 취급당하기 일쑤다. 진짜와 함께 곳간에 처박혀 울 것이냐, 가짜와 함께 거리를 쏘다닐 것이냐. 우리는 모든 보기가 암담한 선택지에 놓여있다.

 

 

 

---------------------------------------

-올해 몇 권을 읽었느냐, 자랑하는 책 읽기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 일년에 다섯 권을 읽어도 거기 줄 친 부분이 몇 페이지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34p)

-앤디 워홀의 캠벨 통조림: 시릴 코널 리가 저널리즘은 한 번만 고민하는 것이요 문학은 다시 보는 것으로 정의한 데 따르면, 통조림은 저널리즘적(액체를 담은, 한번 쓰고 버릴 용기)이었다가, 워홀이 액자에 넣음으로써 문학 반열(벽에 진열하고 반복해서 관람하는 것)으로 격상된 셈이었다. (알랭 드 보통) 115p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빌리면,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삭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린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성에 의해 우리는 지성있는 사람이 된다. (알랭 드 보통) (118p)

-거지가 질투하는 대상은 백만장자가 아니라 좀더 형편이 나은 다른 거지다(버트런트 러셀) (120p)

-프루스트는 신문기사를 싫어했다. 모든 문맥을 빼버리고 말하기 때문.
신문 읽기라고 불리는 가증스럽고 음란한 행위는 지난 24시간동안 우주에서 일어난 모든 불행과 재앙들, 5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전투, 살인, 파업, 파산, 화재, 독살, 자살, 이혼, 정치인들과 배우들의 잔인한 감정을 그런것들에 신경도 쓰지 않는 우리를 위해 특별히 흥분되고 긴장되는 아침의 오락거리로 변형시키며, 이것은 카페오레 몇 모금과 대단히 잘 어울리게 된다.

그 반대의 이야기도 있다. <리진>이라는 소설은 신경숙 김탁환 두 작가가 썼다. 신문 어딘가에 짧은 기사 한 줄이 나왔다. 조선주재 초대 프랑스영사를 지낸 사람이 궁중무희와 함께 귀국해 살다가, 그 궁중무희가 자살을 했다는 기사였는데 이 짧은 한 줄이 소설이 된 것. (장주네의 하녀들) / 신문과 소설의 차이(131p)

-마르셀 프루스트: "언어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언어를 공격하는 것뿐입니다" (135p)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느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192p)

-연민으로 사랑을 시작해 한없이 작아진 남자. 밀란 쿤데라는 이 사랑이야말로 진자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연민, 즉 동정심은 타인의 불행을 함께 겪을 뿐 아니라 환희, 고통, 행복, 고민과 같은 다른 모든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감정이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가장 최상의 감정이라는 겁니다. (249p)

-바람기는 다른 말로 ‘다른 생에 대한 동경’이에요. 다른 곳에 더 나은 인생이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동경이죠. (280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먹는 존재 1 - 담박한 그림맛, 찰진 글맛 / 삶과 욕망이 어우러진 매콤한 이야기 한 사발
들개이빨 지음 / 애니북스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현실에서 만난다면 절대 친구하고 싶지 않은 주인공의 조금은 까칠한 먹방. 마음이 깨끗하여 화가 없는 이들은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음. 하지만 화가많고 언제나 불만으로 궁시렁거린다면 속씨원함을 느낄 수 있다. 심야식당처럼 훈훈하지도, 오무라이스잼잼처럼 음식퀄리티가 뛰어난 건 아니지만 '존재'에대한 사유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춫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종석의 문장 한국어 글쓰기 강좌 1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쓰기 서적계의 '사전'과 같은 책. 처음부터 죽 읽어도 좋고, 책꽂이에 모셔두었다가 한 챕터 한 챕터 들춰봐도 좋다. 읽고 나서 문장보는 눈이 승격되고 문장을 쓸 때도 조심조심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전 친구는 연애가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동안 연애는 눈길도 주지 않던 친구라 의아했다. 월춘(?)준비를 늦게라도 시작하려는 건가, 생각해봤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고양이였다. 천식이 있는 남동생이 전역을 하고 키우던 고양이를 시골집에 맡겨 둔 상태였다. 애정을 쏟던 ‘동물’이 사라지니, 그 곳엔 다른 대상, ‘남자 인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동물을 기르는 것과 연애를 하는 것의 공통점이라면 나의 일상을 어떤 대상에게 바치는 일, 나의 애정을 쏟는 일이다. 종종 거기에 따르는 책임감은 소홀히 대하는 사람들을 본다. (친구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이건 어쩌면 마크 롤랜즈가 책에서도 말했던 행복의 양가적인 모습을 모르고 행복을 그저 어떤 감정이라고 치부하는 데에서 나오는 태도, 혹은 무식함이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다. 마크 롤랜즈에 따른 행복이라면 그를(사람이든 늑대든 고양이든) 생각하면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포함해,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슬픔과 혹은 내가 먼저 그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등이 뒤섞인 상태일 것이다. 

 

복잡한 행복을 아는 것은 그 행복을 책임질 첫 번째 단계다. 이후는 이것을 알고도 책임을 질 수 있을거냐 하는 문제다. (지엽적으로 독서모임도 그렇다. 독서모임의 모집 글을 보고 ‘내가 찾던 스터디에요’라며 반가움에 메일을 보내는 것은 감정적이다. 쉬운 일이다. 행복이라고 말하기엔 미안할 정도의 모임이지만 이 모임에서도 어느 정도 감정적인 행복을 제공받을 거란 기대로서 지원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하나둘씩 카톡을 보내오기 시작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분명 일주일에 책을 한 권 읽고 글을 쓰는 것은 책임감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프린트를 하고, 지하철을 타고 등등. 귀찮아지기 시작한다.)

 

찰나의 행복에 따르는 더 긴 시간의 책임감과 불안함. 그것을 견디는 자에게 감정의 행복은 찾아온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나의 늑대’를 안락사 시킨 것은 나를 헷갈리게 만든다. 행복은 어려운 일이다. 내 친구는 연애를 시작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