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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가운데

 

앙드레 지드가 알려줬듯 나에게 현대판 현자인 학자 혹은 작가들이란 매일 바라보는 저녁과 아침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쓴 류동민 씨 역시 현자의 역할을 했다. 서울에서 나고 평생을 서울에서 살았던 나지만, 책을 읽고 바라본 서울은 또 다시 새로운 곳이었다. 서울이라는 보통명사가 하나하나의 지역과 특징적 건물들로 나뉘어 구역화되오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는 서울을 4가지 구역으로 나눈다. 배제의 공간, 물신의 공간, 남겨진 공간, 사라지는 공간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특징이 곳곳에 숨어있다높고 낮은 등고선이 뚜렷하다는 것과 각각의 장소에 투영된 욕망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 공간을 만들고 서울을 만든다.

배제의 공간: 누구는 들어가고 누구는 못 들어가고

11표는 소비자의 시대를 맞아 11표로 행사되고 있다.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 즉 소비하는 인간이 되지 못하면 배제 당한다. 이 원리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곳이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커피전문점이다. 커피 한 잔의 값이 입장권의 가격인 셈이다. 저자의 말처럼, 소비자의 권리는 주어진 테두리 안에서’(39p), 가격을 지불한 한도 안에서의 자유’(40p)가 주어지는 곳이다. 코엑스몰, 대형서점, 백화점과 같은 유사 공간은 입장권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소비하는 것에 따라 자신이 규정되는 호모 콘수무스의 공간이긴 마찬가지다.

 

 

호모 콘수무스가 되도록 강요당하는 공간, 쾌적한 매장과 압도적인 물량의 상품들은 마치 당신이 소비하는 것을 통해서만 당신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속삭이는 듯하다.(...)거시적으로는 그 소비자 정체성의 강제된 규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미시적으로는 더욱 그것에 탐닉할 수밖에 없다. (45p)

 

얼마 전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주차장 요원에게 이른바 갑질을 시전한 모녀의 말이 떠오른다. 모녀 중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은 주차장 요원에게 소리를 지르며 내가 여기서 얼마를 썼는데!”라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바로 이 목소리가 호모 콘수무스의 것이었으리라.

 

물신의 공간: 물건 그 이상의 것을 사는 곳

호모 콘수무스는 물건을 사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때문에 상품은 결국 물신화된다. 상품을 사는 동시에 그 상품의 이미지를 사게 된다는 말이다. 값을 더하더라도 스타벅스나 애플의 제품을 사는 이유를 떠올리면 된다. 코스트코나 롯데월드같이 그곳에서만 살 수 있는 물건들이 있는 곳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물건을 사는 일은 곧 취향이 되고 여가가 된다.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지점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구입하는 것은 물건 뿐 아니라 여가라는 분석이다. 여가란 노동시간이 아닌 것이다.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쓰는 시간들, 예를 들어 출퇴근 시간, 직무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교육 시간, 필수적인 휴식시간, 가사노동의 시간이다. 대도시에서 노동하고 먹고살기란 점점 힘들어진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데아로서의 여가는 불가능해진다. 스쿠버 다이빙을 하거나 스키를 타거나 여행을 가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시간이 여가화된다. 밥을 먹는 시간, 쇼핑을 하는 시간이 여가가 된다는 것이다.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준비가 여가로 포장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코스트코와 롯데월드는 어떤 의미에서는 샴쌍둥이 같은 존재다. 쇼핑의 여가화, 다시 여가의 쇼핑화. 그리고 배제의 원리에 기초한 문화적 상징 혹은 물신에 이르기까지.(60p)

 

 

남겨진 공간과 사라진 공간: 높은 공간을 위해 사라지는 낮은 공간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과잉자본의 위기를 해소하려는 목적에서 건조 환경(built environment), 즉 자연환경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환경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남아도는 자본이 수익성을 찾기 위한 출구로서 도시공간을 끊임없이 재편성하려 든다는 것이다.(109p)

 

몇 년을 살다시피 했던 홍대라도, 홍대에서는 자신만만하게 술 약속을 잡기 어렵다. 어떤 술집이 마음에 들어 친구들과 함께 가려해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가게 때문에 유명해진 거리에서도 가게는 쉽게 헐린다. 홍대뿐이랴. 이제는 한두 달 동안 찾아가지 않으면 가게가 사라질까 조마조마한 곳이 서울에 여러 군데다. 개인들의 가게는 헐리고 기업체가 세운 건물들만 즐비하다. 이 원리는 대학가도 마찬가지라, 대학가 주변이라고 물가가 싸다는 것은 이미 옛말이다.

 

 

 

헐리고 사라진 공간에는 기업이 지은 높고 큰 아파트와 교회, 상점가가 들어선다. 높게 크게 지어진 아파트와 교회들은 이 공간 속 사람들에게 안전과 위안을 준다. 얼마 전 대치동의 어느 아파트에서 배달노동자들에게 승강기를 이용하지 못하게 한 사건은 이 공간이 우아한 배제의 논리’(111p)로 돌아가며, 이 공간이 제공하는 안전과 위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12p) 안쪽의 위안이 더 커지는 만큼 건물의 높이도 올라가고 벽도 단단해진다.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유: 학력자본과 시초축적

이렇듯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진 서울 곳곳에서 누군가는 높고 넓으며 안전한 곳으로, 누군가는 낮고 좁으며 위험한 외곽으로 간다. 높고 넓은 곳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중산층에서 탈락됨을 의미한다’.(183p) 저자는 이를 학력자본의 축적으로 생긴 불평등과 약탈에 의한 축적 때문이라고 말한다. 학력자본 만으로는 목표권력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지금 한국사회는 굳이 피케티를 들먹이지 않아도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중 하나다.

 

불평등한 사회를 설명하는 용어 중 시초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이 있다. 이 용어는 원래 자본주의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부지런하게 노력한 사람이 부자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는 신화적 설명 방식을 가리킨다.(221p) 하지만 저자는 현실은 태초의 부지런한 이가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태초에 약탈한 이가 부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서울처럼 급격하게 팽창하며 발전한 도시의 공간을 기획하고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의 권리와 이익을 빼앗아 부를 쌓는다. 직접적으로 남의 재산을 탈취하는 것은 소유권이 확립된 시장경제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도시 전체가 집단적으로 누려야 할 이익이 특정인들에게 귀속된다면, 사회적 생산력의 성과를 개인이 자신의 것으로 누린다는 점에서 결국 그것은 착취가 된다. (222p)

 

저자는 책 안에서 내내 서울을 산책하며 관찰하는 시점을 취한다. 종종 정치사회학적 분석을 내는 학자들은 훈계를 하거나 멘토를 자처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와는 거리가 있다. 그 이유는 어쩌면 저자가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급진적 견해를 가진 이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지금 시스템 안에서 서울이 작동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고 밝힌다.

 

도시권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꼭 반자본주의 투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력의 원활한 재생산이 그 자본주의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굴하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삶 혹은 먹고사는 것 때문에 생겨나는 비굴함을 최소화하는 것은 평등주의적 열망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것을 통해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281p)

 

이런 저자이지만 지금 서울을 작동시키는 원리들, 배제와 물신, 안전과 안위만을 바라는 태도는 공공적 도시권 확보를 위한 길과는 멀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원래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도시로 모였다. 그러나 그들을 도시에 머물게 만드는 것은 높은 삶의 질이다.” 서울의 작동방식을 깨달은 사람들은 서울을 바꾸려 할까, 떠나고 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영화 <유브 갓 메일>(You’ve got mail, 1998)에서 조의 유명한 대사. "스타벅스가 왜 있는주 알아요? 아무것도 결정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커피 한 잔을 사면서 적어도 여섯 가지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거에요. 크기는 숏으로 할까 톨로 할까? 연하게 진하게? 디카페인으로 할까? 그러니 사람들은 2.95달러를 내고 커피 한 잔을 사는 게 아니라 자기가 누군지를 결정하는 거에요,"(38p)

굿이 코엑스몰보다는 재래시장에서 ‘진짜 사람 냄새가 난다’라는 식의 감상은 냉정하게 말해 착각이거나 복고적 향수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우리가 백화점에서 만나는 점원들도 대부분 자영업자나 파견근로자며, 그 경제적 지위가 재래시장 상인보다 결코 우월하다고만 볼 수도 없다. (46p)

대학 캠퍼스에 새로 생기는 하드웨어들은 이른바 인기 학과나 단과대학에 집중되고 그 안에서도 인문학 같은 비인기 전공 분야는 소외된다. 하드웨어는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하면서도 ‘불필요한’ 인력에 대한 투자는 최소화한다. 겸임교수, 강의교수 등 온갖 딱지 가 붙은 이름으로 비용이 저렴한 비정규직 교수 인력을 확대하기도 한다. (118p)

충격과 공포. 원래 기습작전을 가리키는 군사용어다. 슬라보예 지젝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운영원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한 바 있다. 주체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도록 만드는 시스템, 여기에서 두려움의 핵심은 경쟁에서 탈락할 것이라는 예감이다. (122p)

카를 슈미트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라고 했다던가. 내부적으로는 공동체적 이타심을 강조하지만 외부의 집단에 대해서는 심한 배타적 태도를 취하는 것, 교회를 기업 경영에 비유한다면 모험 정신이나 이노베이션은 오히려 여기에서 나온다. (131p)

백화점 명품관 뒷골목의 폰샵(pawn shop, 전당포)은 베블렌(Thorstein Veblen)이 말하는 ‘금전적 경쟁(pecuniary emulation)’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장소다. 금전적 경쟁은 베블렌의 저작 <유한계급론>의 중요한 이론적 기둥을 이루는 개념이다. ‘ emulation’이라는 영어단어는 흔히 경쟁으로 번역되지만 ‘흉내 내기’라는 뜻도 담겨져 있다. 모든 경쟁은 남보다 앞서서 이기겠다는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욕망으로부터도 기인하지만, 남을 따라하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소극적이고 수도적인 욕망에 기인하는 바도 크다. (206p)

사실 명품은 돈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위신재다. 전근대의 신분제 사회에서 정치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은 꿈꿀 수 없던 것, 근대 부르주아사회에서도 경제적 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은 넘볼수 없었던 것, 그랬던 것을 이제 돈만 주면 살 수 있다는 것은 어쨌거나 시장의 민주적 기능인 셈이다.(207p)

배제의 원리 때문에 삶은 더 힘들어진다. 발레리 줄레조는 <아파트 공화국>에서 아파트 경비노동자는 마치 전근댓화의 하인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다. ‘간단히 말해 이들은 경비원 이상이었다. 그들은 봉사를 의무로 저임금에 고용된 하인들이다’(263p)

대중에게 ‘빵과 서커스’만 주면 된다는 권력자들의 고전적 지혜는 여기서도 작동한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의 광범한 보급은 긍정적인 기능도 있지만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서커스 기능도 틀림없이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토니오 네스리나 마이클 하트같은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무장한 다중(multitude)의 혁명적 역할에 상당한 기대를 거고 있는 듯하지만, 바로 그 다중이 언제든지 국수주의나 마초적 동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은 분명한 현실이다. (2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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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출판된 신간들에 비해 1월에 출판되는 책의 수가 확 줄어든 느낌적느낌.

그 와 중에 눈길을 빼았는 몇권의 책이 있었으니.


 

 

 

 

 

1.

 

며칠 잠잠해지긴 했으나 최초(확실하지 않다. 이미 IS대원 중 한국인이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다.)의 한국 IS대원이 탄생할까 마음 졸였던 시간이었다. 터키로 여행을 간 후 실종된 김군의 이야기가 보도된 후, 한국사회와 IS를 잇는 연결고리가 생긴 것은 아닌 지 불안해졌다. 앞으로 IS와 관련된 소식을 많이 듣게 될 것같다.

 

책 소개에 적힌 바와 같이 "맥락없이 보도되는 중동 등 이슬람권 분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책이 필요했다. 저자는 후기를 통해 "9.11 테러 이후 이슬람 무장 세력의 활동에 대해 체계적으로 소개된 책이 국내에 없다는 현실에 놀랐다"고 말한다.

 

사실 방대하고 복잡한 중동의 역사와 종교 분파, 분쟁은 마음 먹고 공부하지 않는 이상 이해하기 어렵다. 여지껏 '마음을 먹을' 상황이 아니었던 게다. 중동, 종교 전쟁, 테러는 남의 나라 일이라고만 여겨왔으니. 이 책의 등장은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이슬람 전사'와의 연결고리가 생겼다는 알람인지도 모르겠다.    

 

 

2.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논술공부를 하는 이들이 그냥 못지나치는 카피가 있다. "쟁점으로 읽는", "OO vs OO" 같은 것. 이슈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정리해 놓은 책들은 논술을 공부하는 이들이 지나치지 못하는 종류다. 물론 각 저자의 원본 텍스트를 읽는 것이 모범적일테지만 수험생이라도 친구도 만나고, 연애도 하고 그래야지 않겠나. 이런 책들은 우리의 시간을 절약시켜주는 감사한 존재다.

 

어떤 주제로 맞짱토론을 벌이는지 대진표를 살펴보자. 몇가지 흥미를 끄는 시합이 있다.

 

Issue 3 선진국의 노령화 추세는 심각한 문제인가?
[그렇다] 피트 엔가디오, 캐럴 매틀랙, <세계의 노령화>
[아니다] 랜드코퍼레이션, <인구 내파>

Issue 8 지구온난화의 위협은 실재하는가?
[그렇다] 데이비드 비엘로, <과학의 현황 : 최악의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넘어>
[아니다] 리처드 S. 린드젠, <지구온난화는 없다>

Issue 14 세계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의 실패를 의미하는가?
[그렇다] 가츠히토 이와이, <자본주의의 타고난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세계 금융 위기>
[아니다] 다니 로드릭, <개봉박두 : 자본주의 3.0>

Issue 17 종교 및 문화 극단주의는 세계 안보를 위협하는가?
[그렇다] 후세인 솔로몬, <종교 극단주의 시대의 세계 안보>
[아니다] 시블리 텔하미, <미 하원 군사위원회에서의 증언 : 테러리즘과 종교 극단주의의 관계>

Issue 19 중국은 차세대 초강대국으로 떠오를 것인가?
[그렇다] 슈지 야오, <중국은 정말 차세대 초강대국이 될 수 있을까?>
[아니다] 프래넙 바드헌, <중국과 인도가 초강대국? 너무 빠르다>

 

하. 이미 공부를 마친 느낌이다. 이렇게 상반된 입장을 정리해 준 책을 습득하면 후배녀석이 깨끗이 정리해 준 요점 노트를 겟(get)한 기분이다. 읽지 않아도 이미 뿌듯한 이 기분. 이 책의 다른 버전은 과학기술과 기업윤리에 대한 상반된 입장정리인데, 아무래도 국제이슈처럼 넓직한 이슈가 흥미를 끌기에 용이하다.

 

3.

 

백욱인 교수와 몇몇 저자가 함께 쓴 <속물과 잉여>를 읽고 백욱인 교수의 위트 있으면서도 절제가 보이는 말투가 마음에 들었다. 최근의 디지털 흐름에 대해 잘 읽히면서도 신경질적이지 않으며 깊이도 갖춘 글을 읽고 싶었는데. 반가운 신작이다. 힙스터스러운 최근 사례부터 학술적으로도 풍부한 인용, 인터넷 글쓰기 특유의 패러디를 이용한 유머까지 기대된다.

 

4.

 

<인지자본주의>의 조정환 선생님이 낸 신작 제목에 조금 의아했다. "예술인간의 탄생". 이 주제가 지금의 사회 구조를 설명하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곧 앤디 워홀의 그 유명한 말이 떠올랐다.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15분간 유명해질 수 있다"는. (앤디 워홀이 나중에 이 말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찍어준 사진사가 한 말이라 덧붙인 적 있다.) 본래 방송이 발달하며 범죄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보도되는 것을 보고 한 말이라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자신을 쉽게 드러낼 수 있고 타인을 드러내는 것도 거리낌없는 우리 시대에 잘 어울리는 명언이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사회는 반대로 예술가가 되지 못한 이들을 슬프게 만든다. 저자 인터뷰를 읽어보니 꾸준히 정치철학을 다뤘던 저자가 왜 '예술인간'을 이야기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게 됐다.  

다중은 매일매일 예술가이기를 강요받고 있고 그것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예술가로 단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과정의 미적·예술적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예술가화를 강제하고 재촉하고 촉진합니다. 창조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임금도 없다는 것이 신경제의 논리입니다. (조정환 인터뷰 중) 

예술인간이 되길 강요받은 현대인들이 취해야할 태도는 어떤 것인지, 이전의 전작과의 관련성을 어떻게 드러나는 지 차근히 읽어봐야 할 것같다.

 

5.

1월에 출판된 교양만화는 2권밖에 조회되질 않는다. 지나칠까 싶었지만 그 중 한권이 눈에 띤다.

 

해부학자도 생소하고, 만화를 그리는 의사도 생소하다. 평소 의학용어는 미국드라마 'House M.D'에서 접한 것이 전부이지만..의학이야기라도 만화라면 읽을 수 있다. 만화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아무리 어려운 주제도 만만하게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아마 앞서 쓴 4권의 책보다 가장 먼저 읽게 될 책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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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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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쇼펜하우어는 삶을 의미 있게 보려는 낙관적인 노력을 기만이라고 했다. 노력을 통해 얻는 행복을 거지가 손에 넣은 푼돈에 비유하기까지 했으니. 원래 인간의 삶은 비참하기에 아무렇지 않게 삶의 허무를 인정하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가르침이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쓴 후루이지 노리토시에 따르면 일본 젊은이들은 가장 훌륭한 쇼펜하우어 주의자가 아닐까. 그들은 미래가 지금보다 나아질 것 같지 않기에 지금, 여기행복하다고 말한다. 이 기묘한 절망-행복은 모순적이지만 거짓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이제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혹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134p,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저자인 노리토시는 일본 젊은이들이 절망-행복을 느끼는 또 다른 이유를 동료라고 말한다. 그저 비슷한 연령층이기에 모두 다같이 젊은이들로 묶일 수 없는 개성 강한 일본의 젊은이들은 비슷한 개성을 가진 동료들과 함께한다. 그들이 행복한 첫 번째 이유가 미래에 나아질 기미가 없어서인 것처럼 두 번째 이유도 내향적인 젊은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내향적이고 소극적인 동료지향은 일본의 히트 만화까지 결정짓는 요소가 됐다.

 

 

▲<원피스> 23권의 엔딩.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왼팔의 이것이 동료의 증표다. 출항~!!!”이라고 외치는 밀짚모자 해적단의 선장 루피의 대사로 마무리되는 장면. 이 장면은 수많은 원피스팬들의 눈물샘을 터뜨린 컷 중 하나다.

 

판매 부수 누계가 2억 부를 돌파한 현대판 성서 <원피스>에 흐르는 사고방식은 동료를 위해서로 요약될 수 있다. <원피스>의 인물들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동료들에 대한 헌신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있다. 뚜렷한 적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는 그 세계에서, 루피(19, 후샤 마을)일행은 끝을 알 수 없는 동료 찾기를 이어간다. 현실의 젊은이들도 사정은 루피일행과 마찬가지다. (140p, 같은 책)

 

책에서 예시를 드는 <원피스>뿐 아니라, <나루토>, <블리치>, <은혼>, <20세기 소년> 등 일본에서 최고로 히트한 만화책들의 주제는 동료와 함께 떠나는 모험이다. 현실의 젊은이들도 동료로 행복을 이어가는 것은 변함없지만 그들의 동료지향의 약점인 내성적인 성격을 보완하는 모험이 더해졌기에 완벽한 판타지인 셈이다. 물론 소년만화라는 장르의 전통적인 설정이기도 하지만 최근까지도 끊임없이 같은 설정이 각광받고 2억부 판매라는 비현실적 인기를 끄는 것은 젊은이들의 이러한 특성과 연결 짓는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문제는 이 동료지향이 가져다준 지루함이다. 현실의 동료들은 <원피스>의 해적단처럼 매일매일 새로운 나라로 떠난다든지 흥미로운 적을 만나 동료로 영입한다는 등의 이벤트가 없다. 처음에 동료들끼리 모이면 아무 것도 안하고 같이 있기만 해도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그 밥에 그 나물들은 지루함을 느낀다.

 

동료지향이 불러온 지루함을 타개하기 위해 불끈불끈한 그들의 행동반경은 월드컵 응원부터 시작해 사회봉사활동 등으로 넓어진다. 책에 소개된 한 청년은 친구들과 함께 캄보디아에 학교를 세우는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이들의 모임은 월드컵’, ‘캄보디아에 학교 세우기를 지나 ‘3.11 후쿠시마이후 원전모임으로까지 확장됐다. 노리토시는 동일본 대지진이야말로 사회지향적 성향을 지닌 젊은이들에게는 기다리던사건이었다고까지 말한다. 한 나라의, 아니 세계의 큰 비극까지 자신들의 불근불끈함을 풀 하나의 이벤트로 여겼다는 노리토시의 분석은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이다.

 

(원자력 발전 반대 시위에 참여한 젊은이는) 마치 축제를 즐기는 기분으로 고엔지 주변을 행진할 것이다. 그렇게 행진을 마치고 나면 꽤 피곤해질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 성취감을 얻고 돌아갈 것이다. 적어도 원자력 발전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는 방법은 되었을 것이다. (254p)

 

이러한 분석은 사회참여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사회정의구현’, ‘더 나은 세계를 위해같은 슬로건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다. 자신의 토요일을 동료들과 함께 보내기위한 수단 중 하나로 원전모임을 선택한 젊은이들에겐 말이다. 결국 사회정의보다 자신의 주말을 위해, 동료들과의 시간을 위해 이벤트로 활용되는 참사에 대해선 충격적이라 봐야할지, 이유가 무엇이든 사회참여를 했으니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지 헷갈리게 된다.

 

결국 이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정말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흡수하는 것은 정책담당자와 사회적 이벤트 메이커들의 몫일지도 모르겠다. 노리토시는 이를 위해 젊은이들이 살고 있는 가깝고 친밀한 세계(친밀권)사회라는 커다란 세계(공공권)를 제대로 이어줄 필요가 있다고 주문한다. 결국 젊은이와 세계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느닷없이 중국 공장에서 발생한 농민공 착취라는 사회문제를 접하더라도,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스마트폰 사용자에게 지금 당신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을 제조한 공장에서 노동자가 연속 자살을 하고 있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라는 방식으로 정보를 제공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222p

 

노리토시는 수십년간 쌓여온 일본의 문제를 풀기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한 번의 혁명이 아닌 각각의 제도를 정비하고 차근차근 바꿔나가는 노력이라고 말한다. 국가 기능의 상실과 경제불안 같은 문제들은 단지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간단히 풀리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은 일본사회가 느슨한 계급사회로 탈바꿈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으로 끝이 난다. 저자가 제안하는 젊은이의 세계와 사회라는 세계를 잇는 연결고리를 만들 세력의 부재를 느낀 것일까. 한국에 똑같이 적용하기엔 적잖이 다른 일본의 젊은이론이지만 책 속 그의 제안은 한국 정치세력에게도 유효한 충고가 될 것이다.

 

 

 


 

 

세대론이 사회에서 유행하게 되는 때는 계급론이 현실성을 잃었을 때다. 세대론이라는 것은 본래 매우 억지스러운 이론이다. 계급, 인종, 젠더, 지역 등 모든 변수를 무시하고, 부유층도 빈곤층도, 남성도 여성도, 인본인도 재일 한국인도 그 밖의 외국인도 모두 한데 뭉뚱그려, 그저 ‘어떤 연령’에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젊은이’라고 일괄해 명명해 버리기 때문이다. 76p

젊은이론이 결코 마무리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사회학에서 말하는 ‘가령(加齡)효과’와 ‘세대효과’의 혼동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본인이 늙어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 뿐인데, 이것을 마치 ‘세대의 변화’ 혹은 ‘시대의 변화’로 착각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착각은 ‘젊은이론’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이 약해졌다’고 지적하는 대부분의 논의 역시, 이 현상으로 설명 가능하다. 86p

만약 "젊은이가 소비를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싶다면, 젊은이들에게 불평을 늘어놓기 전에 먼저 일본의 출생률을 이렇게까지 저하시킨 정책 담당자, 그리고 이런 정책을 지지한 당시의 국민들에게 책임을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경우에 일단 과거의 자신부터 탓해야 할 것이다. 126p

행복한 젊은이들의 정체는 ‘컨서머토리’라는 용어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컨서머토리란 가지 충족적이라는 의미로, ‘지금 여기’라는 신변에서 가까운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을 말한다. 136p

1990년대 이후, ‘중산층의 꿈’이 무너짐과 동시에 ‘기업’의 정식 구성원이 되자 못한 젊은이가 증가했다. 그런 와중에, 컨서머토리한 생활을 이어 갈 수 있는 젊은이가 지속적으로 증가했던 것이다. 더구나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불리는 1990년대 이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생활 만족도가 상승하고 있다. 여기서 현대의 젊은이가 행복을 느끼는 이유로 새로운 보조선 하나를 더 제시해 보려고 한다. 바로 ‘동료’다. 138p

사람들이 행동을 시작하고, 그것이 대규모 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 바로 그들이 지닌 가치관이나 규범의식이 침해당했을 때라고 볼 수 있다. 218p

‘내 주변 세계가 변할지도 모른다’라는 위기감이 사회적인 행동으로 분출한 것이다. 219p

20대 젊은이들의 생활만족도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벌써 일본의 젊은이들이 어느 정도 ‘농민공화’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304p

이대로 간다면 일본은 ‘느슨한 계급 사회’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일등 시민’과 ‘이등 시민’의 격차는 점진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일부 ‘일등 시민’은 국가와 기업의 의사를 결정하는 데 분주할 테지만, 다른 수많은 이등시민은 태평하게 하루하루의 삶을 소일하는 그런 구도가 만들어질 것이다. 3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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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바꿈 - 탈핵으로 바꾸고 꿈꾸는 세상
탈바꿈프로젝트 엮음, 히로세 다카시 외 지음 / 오마이북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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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핵발전소라는 주제가 아직도 어려운 당신에게, <탈바꿈>

 

알고는 있었다. 들려오는 말처럼 원자력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도, 싸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것. 환경을 파괴한다는 것까지도. ‘탈핵이라는 가치에는 동의했지만 구체적으로 탈핵에 대한 이런 저런 공방을 들으면 뭐가 옳고 그른 소리인지 헷갈렸다. 20113월의 후쿠시마 사고 이후 너무나 많은 핵관련 뉴스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후쿠시마 이후 대략적으로 핵발전소가 위험하단 것을 감지했지만 핵관련 기사에 난무하는 전문 용어와 숫자들 때문에 겁먹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사소한 것들부터 헷갈리기 시작한다.

 

#5. 핵발전소? 원자력발전소랑 다른 건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똑같다. 같은 것을 지칭하나 다른 언어로 말할 때, 언어는 정치적이다. 장애가 없는 사람과 장애를 가진 사람을 비교할 때 누군가는 정상인/장애인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비장애인/ 장애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장애인과 비교하여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이를 정상인이라고 말할 때, 이는 장애를 가진 것은 비정상이라는 전제를 둔 것이다. 핵발전소를 원자력발전소라고 말할 때, 이는 원자력이 핵을 이용해 만드는 에너지라는 것을 숨기는 수단이 된다. <탈바꿈>의 첫 페이지는 이를 드러내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 책에서는 원자력발전소를 핵발전소라고 표기합니다. 핵발전소는 원자력이 아니라 핵에너지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원자로나 원전처럼 관행으로 굳어진 경우는 부분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탈바꿈 4p

 

탈핵의 가치에 찬성하면서도 원자력발전소라는 용어를 쓰는 이들도 많다. 핵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라는 용어가 같다는 것을 몰랐을 수도, 그저 관행을 따라 써왔을 수도 있다.

 

#4. 한국에서 터질까?

2013년에는 최근 14년간의 연평균 지진 발생횟수의 두 배에 달하는 지진이 일어났다. 하나, 지진이 많아졌다.

둘, 지진 위험 지대인 영덕-경주 일대에 핵발전소가 몰려있다. 부산과 울산, 경주를 이은 고리, 월성, 동해안 일대에 총 18기의 핵발전소가 가동 예정이며 이 인근 30km반경에 400만명이 넘는 인구가 몰려있다.

셋, 수명 완료된 원전이 2호나 운영 중이고 전체 원전 23기 중 절반이 2028년에 수명이 만료된다. 그만큼 노후된 원전이다. 지진지대 위에 그 노후된 원전이 서있다는 것이다. 특히 월성원전과 신월성원전은 국내에서 가장 약한 내진설계로 30년 전 토목건축 기술로 건설됐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공포스럽지 않은가? 여기에 핵발전소 사고 대비가 미흡한 한국의 상황까지 더해진다. 방사선 비상계획 구역은 벨기에 10km, 미국 16km, 일본 30km인 반면 한국은 3km이며 구호소가 수용할 수 있는 인구 수는 극히 적다. 핵발전소 가까이에 구호소가 위치하기도 한 곳도 있다. 방사능방재훈련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 핵발전소 사고는 발생하기만 하면 사고가 아닌 참사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예견된 인재’. ‘사고를 참사로 만드는 구조’. 세월호 이후 모든 재난에 따라붙는 수사다. 핵발전소 사고야 말로 예견되고 있는 참사다

 

#3. 방사능 걱정하다 보면 도대체 뭘 먹을 수 있나? 그냥 대충 먹자?

일본산 물고기, 식품뿐 아니라 국내산 녹차에서 발견된 세슘, 2013년 국정감사때 공개된 블루베리 등의 베리류에서 검출된 세슘, 어묵, 맛살, 소시지, 가다랑어 포 등 가공식품까지......도처에 널부러진 위험은 오히려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방사능은 외부 피폭뿐 아니라 내부피폭 또한 위험하다. 방사능으로 피해를 입은 우크라이나에서는 피폭의 80~95%가 음식으로 인한 내부피폭이었고 먹이사슬에 의한 방사능 농축이 심각했다.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은 얼마나 농축된 방사능을 먹는 걸까.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뭘 먹느냐’ ‘먹고 그냥 일찍 죽어같은 농담까지 익숙해 졌다. 하지만 찾아보면 독자적인 방사능 기준치를 마련해 정밀검사 결과를 공개하고 검사시설을 마련하고 식품을 제공하는 생협(생활협동조합)이 꽤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생협 한살림이 그렇다. 최근 생협들은 인터넷 쇼핑몰도 개장했기에 인터넷으로 둘러보고 손쉽게 배달시켜 먹을 수 있다. 밖에서 나가 사먹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집밥에서만큼은 내부피폭 걱정을 덜을 수 있다.

 

#2. 원전사고, 먹거리만 조심하면 방사선 노출 걱정은 안해도 되나?

자주 건강검진을 받는 것이 건강을 관리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건강검진엔 의레 엑스레이, CT촬영이 포함된다. 병원을 옮기기라도 하면 며칠 전 했던 검사를 또 받기도 한다. 하지만 가슴 엑스레이 정면 1회에는 0.02밀리시버트, 암 정밀검진 시 복부/골반 CT촬영은 10밀리시버트의 방사능에 노출된다. 일반인의 연간 선량한도는 1밀리시버트다.

 

방사능에 노출되는 것은 안정량이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 노출된 양만큼 비례하여 암 발병률이 높아진다. 암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 암 발병률을 높이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엑스레이나 CT촬영이 아닌 초음파 혹은 MRI검사로 대체할 수 있다면 대체하고, 불필요한 검사는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1. 해결책은 개인이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것이다?

결국 핵발전 중심의 에너지 시스템을 바꿔나가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를 위해 '개개인'이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것이 관건이라는 해결책은 어딘지 의심스러웠다. ‘내가 에너지 소비를 줄인다고 정말 뭐가 달라질까?’하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스스로 핵에너지 시스템 전환을 위하여 생활 속에서 이를 실천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관건은 아니다. 에너지 절약의 주체는 개인보다 정부와 기업이 되어야 한다.

 

 

에너지 효율 개선과 절약의 핵심 주체는 개인과 가정이 아니라 정부와 기업이 되어야 한다.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은 소소한 수준이며 개인은 갖춰진 에너지 시스템에서 게 벗어날 수 없다. 우리나라 전력 소비의 절반 가량은 제조업이 차지한다. 주택용은 20퍼센트 이하에 불과하다. -탈바꿈, 183p

 

 

많은 에너지 관련 글에서 해결책은 ‘1인당 전력 사용량을 줄이라는 충고로 끝나곤 했다. 하지만 한국은 민간 전력 사용량이 적지만 1인당 전력 사용량은 높게 나타난다. 그렇기에 종종 많은 글에서 개인이 스스로 전력 사용량을 줄이라는 결론이 나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한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을 주택용과 산업용으로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왔다. 나라 전체로 보면 1인당 에너지 소비는 칼럼에서 보듯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보다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주택용 소비와 산업용 소비를 구분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주택용 전력 소비량은 2010년 기준으로 1,240kwh. OECD 평균 2,448kwh의 절반 수준이다. 이에 반해 일본의 1인당 주택용 전력 소비량은 2,384kwh를 사용한다. 민간에서의 전기 사용은 일본이 한국에 비해 2배나 높다. 한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는 일본의 1.5라는 둥 에너지 소비가 높게 인식해 온 것은 한국의 산업용 전력 소비량이 OECD나라 중 세계 4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인당 에너지 소비가 높으니 에너지를 절약하자는 주장은 주체의 문제를 혼란시킨다. 다시 한 번, 에너지를 절약할 주체는 민간이 아니라 정부와 기업이다.

 

Tip : 이를 외울 방법은, 복습, 또 복습하는 것이다. 탈핵의 가치에는 찬성해왔으나 반대파(?)의 끊임없는 질문이 두려워 입을 막고 있던 당신이라면 <탈바꿈>을 국어사전마냥 자주자주 들춰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미국 스리마일 섬 핵발전소 사고에 조사단으로 참여한 사회학자 찰스 페로(Charles Perrow)는 핵발전소 사고를 비롯한 국가적 재난들을 `정상 사고`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보통 사고가 비정상적이 상황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만 핵발전소와 같은 첨단 복합시스템에는 구조, 조직, 건설에 사고 가능성이 이미 내재해 있다는 뜻이다. (65p)

방사선량이 어느 수준까지 누적된 후에야 암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방사선에 노출되면 아무리 적은 성량이라도 그 수준에 비례하는 확률로 암이 발생할 수 있다. 노출되는 방사선량이 0일때만 암 발생 확률만 0이라는 결론이다. (1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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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이마고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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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와 <하우스>의 평행이론

올리버 색스의 1985년 작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는 내내 미국 의학 드라마 <하우스>의 장면들과 겹쳤다. 데이비드 쇼어의 의학드라마 <하우스>(House M.D.)는 천재이자 우울증환자인 괴팍한 진단의학과 의사의 이야기다. <하우스>의 시작이 2004년이니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와는 20년의 시차가 있다. 그러나 책의 세련됨 덕분인지 머리 속에서 두 작품을 ‘평행이론’을 적용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소재가 의학이라는 기본적인 공통점을 넘어 두 콘텐츠가 겹쳐진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질병을 환자의 ‘이야기’로부터 풀려는 접근이 그렇다. ‘질병을 처음으로 병력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본 사람은 히포크라테스’라고 책이 말했던 바와 같이 히포크라테스의 관점을 공유한다는 말이다. 이들은 환자 자체를 어떠한 병의 증상처럼 대한다.

 

보통 의학에 관련된 이야기는 '병'이 그들의 삶을 바꾼 원인이거나 결과가 된다. 병을 얻어 사람이 변하거나, 그들의 삶이 어떠했기 때문에 병에 걸렸다는 식이다. 그러나 두 작품에 나오는 환자들은 병이 그 환자의 정체성이며 병과 함께 사는 이들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쓴 올리버 색스가 신경학 전문의인 것과 <하우스>의 그레고리 박사가 특이한 질병만을 고치는 진단의학 전문의인 것도 두 작품이 갖는 차별성에 기여하는 듯하다.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올리버 색스의 문장이 옛것임에도 세련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비유와 상징에 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문장 곳곳에서 철학을 인용한다. 니체, 쇼펜하우어, 흄, 프로이트와 같은 철학자뿐 아니라 각종 문헌들을 넘나들며 환자의 케이스에 적용한다. 드라마 <하우스> 역시 비유와 상징을 이용한 대화와 철학적 명언이 난무하기로 유명하다. 심지어는 <하우스 박사와 철학하기(원제: House and Philosophy: Everybody lies)>라는 철학안내서까지 출판됐다.

 

책을 사면 하우스가 자주 쓰는 빨간 머그도 줬나보다. 출처는 Yes24.

 

내용과 형식의 공통점 때문인지 각 에피소드의 모양새도 닮았다. 매독에 걸려 조증이 걸린 할머니의 에피소드는 <하우스>의 시즌1 에피소드8에 등장하는 할머니와 같다. 그 둘의 차이점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는 할머니 스스로 이를 ‘큐피드병’으로 진단해 의사를 놀라게했지만 <하우스>에서는 닥터 그레고리가 선수를 친다. 환자인 할머니가 “색깔도 더 구별 잘되고 음악도 너무 더 잘 들려요. 난 82세이고 다른 할머니들이랑 카드놀이나 해야하는데 엉덩이가 깜찍한 남자를 보면 눈을 뗄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자마자 “매독입니다.”하고 명쾌한 진단을 내려버린다.

 

그 외에도 환상에 시달리는 환자(<아내>-‘회상’, ‘억누를 길 없는 향수’)에 관한 에피소드는 <하우스>의 시즌5 에피소드15 ‘unfaithful’에서 예수의 환상에 시달리는 신부의 이야기와 겹치며, 얼굴인식에 장애를 가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p선생은 <하우스> 시즌 5의 세 번째 에피소드 ‘Advers events’의 왜곡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증세와 비슷하다. 하나하나 매치하자면 거의 모든 에피소드를 드라마에서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유사성을 띤다. 물론 환자의 병명은 달라도 비슷한 증상과 인물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드라마 <하우스>의 시즌5 에피소드 3에 나오는 왜곡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그림.

 

이렇게나 유사한 두 작품이지만 인상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바로 저자인 의사와 그레고리 의사와의 차이다. <하우스>의 그레고리 박사는 훌륭한 의사인 동시에 고칠 수 없는 환자다. 그레고리 박사를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중 하나의 에피소드로 끼워넣어도 전혀 무리가 없다. 그는 제 2부 ‘과잉’의 에피소드 ‘익살꾼 틱 레이’뒤 편에 들어간다면 딱 알맞을 환자 케이스다. 투렛 증후군으로 인해 틱 장애를 앓고 있는 레이는 증상이 일어나는 시간동안에만 천재적인 드러머가 되고 뛰어난 운동선수가 된다. 그가 처방받는 약물에 의해 ‘정상적인’ 상태가 되면 그는 그저그런 인간이 되버린다. 그렇기에 그는 이 병이 ‘자신에게 그것이 재능인지 저주인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하우스>의 그레고리 박사는 교통사고 이후 수술로 허벅지 근육을 잃은 뒤 끊임없는 진통제(마약 성분의 바이코딘)에 중독되어 있는 우울증 환자다. 하지만 바이코딘 중독으로 인한 만성적인 예민함과 우울증이 주는 현실감각은 그가 ‘천재 의사’로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가 바이코딘 대신 새로운 약물의 도움을 받으며 진통이 사라지려고 하는 시기, 의학 능률이 떨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스스로 ‘비참한’ 상태에 있는 편이 의사로서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상태임을 알게 된다. 그레고리는 스스로 환자로 남는다. 틱 환자 레이는 말한다.

 

틱 증상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 다음엔 뭐가 남나요? 전 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겁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188p)

 

반면에 <아내>의 저자 올리버 색스는 이상적인 의사다. 그는 모든 환자를 소개할 때마다 사랑스러운 수사를 늘어놓는다. ‘지적인’, ‘재능있는’, ‘멋진’과 같은 수사들이 심각한 질병을 갖은 환자들에게 붙는다. 그는 환자 이전에 사람을 사랑하는 의사임이 분명하다. 병은 너무나 멋진 사람에게도 예외없이 찾아온다는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올리버 색스가 바라보는 병은 불행으로만 여겨지는 병이 아닌 또 하나의 정체성으로서의 병이다. 책의 마지막 역자의 후기가 와닿는다.

 

만일 그가 병 자체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렇게 진한 감동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병보다는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적인 의사이기 때문에 이 책과 같은 걸작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4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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