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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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달관세대’개념이 들어오게 한 일본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세대론을 다룬 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책은 ‘세대론은 허구다’라는 주장으로 시작된다. 그는 “세대론이 사회에서 유행하는 때는 계급론이 현실성을 잃었을 때”라고 일갈한다. 책은 100페이지 가량을 세대론을 비판하는데 쓴다.

 

 

세대론이 사회에서 유행하게 되는 때는 계급론이 현실성을 잃었을 때다. 세대론이라는 것은 본래 매우 억지스러운 이론이다. 계급, 인종, 젠더, 지역 등 모든 변수를 무시하고, 부유층도 빈곤층도, 남성도 여성도, 인본인도 재일 한국인도 그 밖의 외국인도 모두 한데 뭉뚱그려, 그저 ‘어떤 연령’에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젊은이’라고 일괄해 명명해 버리기 때문이다. 76p

 

젊은이론이 결코 마무리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사회학에서 말하는 ‘가령(加齡)효과’와 ‘세대효과’의 혼동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본인이 늙어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 뿐인데, 이것을 마치 ‘세대의 변화’ 혹은 ‘시대의 변화’로 착각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착각은 ‘젊은이론’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이 약해졌다’고 지적하는 대부분의 논의 역시, 이 현상으로 설명 가능하다. 86p

 

일본 인구 구조에 변동이 생겨 더 이상 자동차가 팔리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제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없는 문제다. 그러나 자동차의 판매 부진을 젊은이들의 심리 변화로 몰아가면, 아직 만회할 수 잇는 기회가 생긴다. 따라서 자동차 판매 대수와 관련된 현상을 “젊은이들은 자동차에 관심이 없다”라는 말로 일축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상당히 영리한 판단이다. 왜냐하면, 일단 자동차 회사로서는 당분간 안심할 수 있고, 광고 회사나 자칭 ‘젊은이 마케터’에게도 할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88p

 

어쩌면 ‘젊은이론’은 젊은이라는 이름을 빌려 쏟아 낸 사회 비판이 아니었을까? 본래 ‘젊은이’는 그 실체가 있는 듯하면서 또 없는 듯한 존재, 즉 애매한 대상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젊은이는 쉴 새 없이 교체된다. 따라서 젊은이론이 바뀐다고 해도, 아무도 이 점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식의 ‘교체’를 환영한다. “이것이 새로운 젊은이다”라고 하면서 말이다. 90p

 만약 “젊은이가 소비를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싶다면, 젊은이들에게 불평을 늘어놓기 전에 먼저 일본의 출생률을 이렇게까지 저하시킨 정책 담당자, 그리고 이런 정책을 지지한 당시의 국민들에게 책임을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경우에 일단 과거의 자신부터 탓해야 할 것이다. 126p

하지만 한국에서 세대갈등은 허구가 아닌 실제처럼 여겨진다. 기업에서는 장년층의 정년연기와 청년층의 고용을 상반되는 개념으로 보고, 최근 불거진 국민연금 논란은 정치권이 세대론을 부각시킨 사례다. 다수의 피부양자가 소수의 부양자에게 무임승차한다는 시선이다.

 

문제는 무임승차자가 아니라 좌석 자체가 극도로 한정된 현실인데, 정치권은 이를 세대론으로 가린다. 최근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50%로 상환하겠다는 의제에 정부는 “후세대에 1702조원의 세금폭탄을 안기는 것”이라 발표했다. 하지만 이 1702조원은 연금가입자들이 추가로 받게될 수령액이며 정부의 이 계산도 상식과는 동떨어져 있음이 밝혀졌다.

 

1702조원은 소득대체율(가입자 평균소득 중 연금수령액 비중)을 50%로 올릴 경우 가입자들이 추가로 받게 되는 돈, 즉 연금수령액이다. 소득대체율 인상 시 더 낼 돈이 아니라 연금 가입자들이 입게 될 혜택의 규모인 것이다.

 

 (...) 이는 소득대체율을 50%, 보험료율을 10.01%로 올렸을 때 기금이 2060년 소진된다고 추계한 시나리오를 전제로 하고 있다. 기금 소진 후엔 그 시점의 전체 근로세대에게 보험료를 부과해 노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노인인구가 많기 때문에 근로세대 부담이 너무 커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출산율 제고 등 추가 보완책 없이 현행 제도(보험료율 9%, 소득대체율 40%)를 그대로 운영해도 2060년 기금 소진 후 보험료율은 21.4%로 치솟는다. 소득대체율과 무관하게 기금이 소진되면 미래세대는 ‘폭탄’을 떠안게 돼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보험료율을 기금 소진 직전까지 동일하게 유지한다는 정부의 가정 자체가 현실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김연명 중앙대 교수는 “2060년을 전후해 기금 소진 상황을 연착륙시키려면 (소진 이전에) 장기간에 걸쳐 보험료를 순차적으로 인상해 갈 수밖에 없다”며 “2061년부터 갑자기 보험료를 20%로 인상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가정이며, 그 어떤 연금학자도 이런 식의 운영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 적 없다”고 말했다.

(출처: 경향신문 ‘1702조’는 세금 아닌 ‘연금 추가 수령액’… 아전인수 해석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10203&artid=201505102153485)

 

국민연금의 운용자가 오히려 국민에게 불안감을 조성했다. 또한 세대갈등을 완화해야 할 주체인 정치권이 오히려 세대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세대갈등론은 단기적 정치전략으로 유효할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부작용을 낳는다. 앞서 말했듯 세대갈등론은 진작 중요한 세대갈등의 원인을 가린다. 자리를 늘리라는 요구를 해야할 승차자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기 때문이다. 독일의 정치철학자 크리스토프 부터베게는 세대 갈등론을 ‘선동적 허위선전’이라고 말한다.

 

독일의 정치학자 크리스토프 부터베게를 인용해 세대 문제는 불평등 문제를 희석하기 위한 ‘사회정책적인 데마고기(선동적 허위선전)’라고 말한다. “사회국가의 축소를 도모하는 세력이 ‘세대형평성’을 통해 자신들의 정책적 주도권을 정당화한다. 세대형평성 논의의 정치적 효과는 비단 사회국가의 축소뿐이 아니고 불평등한 권력, 재산, 지배관계 대신에 세대를 사회갈등의 원인으로 상정함으로써 기존의 불평등한 구조를 ‘은폐’하는 것”이라고 부터베게는 주장한다.

 (출처: 한겨레 신문 “세대간 투쟁은 허구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587420.html)

 

세대를 넘어 가로지른 한국 사회의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 먼저다. 정치권과 언론이 부추기는 세대론은 달이 아닌 손가락만 보라고 지시하는 꼴이다. 세대갈등론에 휘둘려 사회적 분배라는 과정을 무임승차자에 대한 시혜로 바라보는 시선을 거둘 때다. 국가의 복지제도는 세대간의 교환이 아니 축소될 경우 결국 모든 세대에게 손해로 돌아가는 사회의 필수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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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무라이스 잼잼 - 경이로운 일상음식 이야기 오무라이스 잼잼 1
조경규 글.그림 / 씨네21북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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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먹더라도 `오무라이스 잼잼`의 에피소드가 생각나게 만드는 중독 만화. 그만큼 에피소드에 선택된 음식이 일상적이기도 하고, 비유가 탁월하기도 하다. 귀여운 인물 그림체에 비해 징그러울 정도로 정교한 음식그림도 중독성에 일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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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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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는 모든 노력, 만들어야 할 작품이라는 능동적 형상 아래 사람들이 문학에 빠질 때부터, 다시 말해 문학에 자신을 바칠 때부터 문학이 요구하는 희생, 고집을 느리게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이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일까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483p

 

책의 제목에서 짐작하듯 이 책은 롤랑 바르트가 1980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강의의 녹취록을 풀어놓은 것이다. 강의 제목은 소설의 준비였다고 한다. 수많은 개념들과 철학자와 문학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과다하게 언급되는 이 강의의 제목을 조금 더 그럴듯하게 지어보자면 하이쿠와 프루스트가 될 것 같다. 이 책이 다루는 소설을 쓰기위해 준비해야할 것은 크게 두가지로, 하이쿠가 뜻하는 메모하기와 프루스트, 메모하기긴 글로 이행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가장 앞서 인용한 롤랑 바르트의 말이 이 책이 다루는 소설을 쓰기 위한 수많은 준비를 표현한 문장이다. 몇몇 키워드 중, ‘만들어야 할 작품능동적 형상을 꼽아본다. 이 두 키워드는 책을 관통하는 하이쿠와 프루스트로는 바르트가 이상적이라 생각했던 작품의 정신을 알 수 있고, ‘소설의 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이 왜 쓰려고 하는 지를 알려준다.

 

만들어야 할 작품

이 책을 읽어나가기 힘든 이유가 책의 앞부분에 몰려있다. 아주 간략히 말하자면,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만들어야 할 작품은 짧게는 일본의 하이쿠의 정신을 가졌고, 길게는 프루스트의 정신을 가진 것이다. 책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앞부분에서 롤랑 바르트는 하이쿠에 대해 놀랄 정도로 세심하게 다룬다. 요새 말로 그는 하이쿠 오타쿠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만들어야 할 작품은 하이쿠와 프루스트였지만 그가 하이쿠에만 골몰하는 것처럼 보인 이유는 기억력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나는 지금 내 약점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억력입니다. 기억하는 능력 말입니다. 옳건 그르건 간에 내가 좋아하는 소설은 기억의 소설이며, 글을 쓰는 주체의 어린 시절, 삶에서 회상된 재료들과 더불어 구성되는 사실들을 바탕으로 한 소설입니다. 프루스트는 기억으로 자기의 소설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기억의 소설입니다. 48p

 

바르트는 자신이 왜 하이쿠를 좋아하는 지를 직접 설명하는 것은 덧없는 일(76p)(‘욕망을 설명하는 것은 덧없기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하이쿠와 프루스트의 공통점이 있기에 바르트는 이를 욕망하는 것 같다. ‘사토리’(깨우침)를 기술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이쿠는 기억의 순간을 잡는 일, 그의 용어로 사토리’(깨우침)의 순간을 기술하고, 프루스트는 깨우침(마들렌)이 확장을 가져온다(85p)는 차이가 있다.

 

미로의 은유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챕터, 1978년부터 1979년에 진행한 바르트의 세미나 녹취록이 시작되기까지 하이쿠에 대한 이른바 덕후질은 계속된다. 하이쿠를 만드는 질료이자 하이쿠 그 자체인 메모하기에 대한 설명과 각종 하이쿠와 관련한 개념들이 즐비하다.

 

능동적 형상

종종 독서행위를 섹스에 비유하는 것을 들은 적 있다. 글쓰기 욕망을 가진 이들 대다수가 독서의 짜릿함에서부터 욕망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독서를 하며 각종 이유로 오르가즘을 느꼈던 이들은 이를 잊지못하고 독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글쓰기 욕망도 이곳에서부터 시작이다.

 

이 출발점은(글쓰기 욕망) 다른 사람들이 집필한 몇몇 텍스트들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쾌락, 기쁜, 환희, 충족의 감정입니다. 나는 읽었기 때문에 씁니다. 229p

 

명쾌하다. 왜 나는 쓰고 싶은 사람인가에 대한 답이 제시된다. 읽었기 때문에 쓴다. 또한 그 읽음에 나에게 쾌락을 주었기에 계속 읽는다. 그것은 섹스와도 같다.

 

이 텍스트는 나를 애무합니다. 그리고 이 애무는 매번 내가 이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효과를 발휘합니다. 일종의 영원한, 신비스러운 열기입니다. 사랑의 욕망은 진정한 충족입니다. 왜냐하면 내 사랑의 대상, 즉 이 텍스트는 수천의 다른 가능성 중에서 내 개인의 욕망에 부응하기 위해 있기 때문입니다. 229p

 

인간에게 욕망이 당연한 것처럼, 읽음에서 쾌락을 느낀 이가 글쓰기 욕망을 가진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래서 바르트는 이렇게 질문한다. “어떻게 작가들보다 독자들이 더 많을 수 있을까요?”(242p)

 

계속 독자로 남으면서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애무를 계속 받으면서도 절정의 섹스를 시도하지 않는 것과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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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 윌컴퍼니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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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내한공연을 하는 퍼렐 윌리엄스는 2013년 로빈 시크의 ‘Blurred Lines’을 만들고 함께 불렀다. 한국에서도 초-히트한 ‘Blurred Lines’는 2015년 초 1970년대 활동한 마빈 게이의 ‘Got to Give It Up’을 표절했다는 평결을 받았다. 곡을 만든 퍼렐은 노래를 부른 로빈 시크와 함께 마빈 게이의 유족에게 730만 달러, 한화로 약 82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퍼렐은 마빈 게이를 존경하며 그의 노래를 많이 들었지만 이 곡을 쓰며 특정 곡을 차용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 UTUBE 에 올라온 로빈 시크의 'Blurred lines'와 마빈게이의 'Got to Give It Up’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동영상. 함 들어보고 판단해보세용.

 

 

퍼렐의 사례뿐 아니더라도, 대중예술 혹은 예술의 영역에는 언제나 표절의 위험이 떠돌고 있다. 표절 시비에 휩쓸린 예술가들은 종종 ‘오마주’(Hommage)를 주장한다. 자신이 존경하는 아티스트에 대한 존경을 담아 작품을 바치는 ‘오마주’와 '표절'의 경계는 흐릿하기만 하다.

 

"창작은 기득권이 아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프랑스 국립박물관연합의 편집책임자로 활동한 미술사학자 카롤린 로슈(Caroline Larroche)의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는 이러한 표절에 대한 시비를 무마시키는 듯하다. 책의 부제가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라는 것만 보아도 명작을 ‘모방했어도’ 명작이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소개에서 역시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가 <눈과 마음>에서 한 말을 인용하여 표절, 혹은 ‘베끼기’의 문제에 관용을 보인다. “창작은 기득권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것이며, 정해진 수명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7p) 메를로 퐁티의 이 말처럼 어떠한 예술적 영감을 먼저 내보였다고 해서, 이후에 그와 비슷한 작품을 만든 사람에게 ‘표절딱지’를 붙이는 것은 어쩌면 기득권의 횡포일지도 모르겠다.

 

 

미술사를 가로지르는 스승과 제자들

이 책은 14세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모방한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최후의 만찬>부터 시작해서, 1970년 파리에서 일어난 ‘쉬포르-쉬르파스’ 운동(미국 추상주의 및 사물을 원래 용도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식의 창작을 추구하는 신사실주의의 영향으로 시작된 운동)의 계보까지 미술사를 종횡무진으로 다룬다.

 

 

 

 ▲책의 차례. 200여편의 작품이 주제나 화풍 별로 나누어져 있다.

 

 

시대에 상관없이 명가들은 모두 스승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켈란 젤로는 젊은 시절 데생을 그릴 때 지오토의 벽화를 본보기로 삼았으며, 렘브란트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다른 작품을 베껴 그리는 작업을 그림 공부의 중요한 기초로 놓았단다. 앙투안 와토는 루벤스가 주장한 미의 기준을 그대로 물려받아 쓰기도 했다.(5p)

 

 

전 시대의 화가를 존경하여 모방하는 여러 사례 중에서도 특히나 재미있는 부분은 역시 현대 예술로 들어온 후다. ‘패러디’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단순히 주제를 차용하는 것이 아닌, 존경하는 화가의 작품을 비틀어보기도 하고 자신만의 개념을 창조해 덧붙이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이는 역시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이다. 앤디 워홀의 <최후의 만찬>(1986)은 15세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찍어냈다’. 책은 앤디워홀의 <최후의 만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앤디워홀의 <최후의 만찬> 시리즈를 두고 원작의 권위를 파괴하고 그 의미를 왜곡하는 행위로 해석하는 것은 워홀이 얼마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지를 몰라서 하는 얘기일 것이다. 실제로 워홀의 작품은 인물들의 성격과 심리를 더욱 명확히 보여주었으며, 이로써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지닌 심오한 인간미를 십분 확인시켜주는 공을 세웠다. (16p)

 

 

 

 

 ▲앤디 워홀의 <최후의 만찬>

 

200편의 작품을 다루니 한 편 한 편의 꼼꼼한 설명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현대 예술 작품은 작품보다 해설이 길어지는 경향이 생길 수밖에 없음에도 설명은 간략하다. 아무래도 이 책의 주제가 작품해설보다는 ‘작품들의 계보를 확인하는 것’, 다시 말해 수십 년 혹은 수 세기의 간격을 두고 세상에 나온 작품들 간의 ‘혈연관계’를 밝히는 것(7p)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술계 가족들 이모저모

현실의 가족들 중에서도 그렇지만, 카롤린 라로슈가 들려주는 미술계 ‘가족 이야기’에서도 딱! 보기만 해도 닮아 가족인 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보아도 ‘얘네가 가족이라고?’하는 의문이 남는 이들도 보인다.

 

 

사실 대부분의 가족은 딱! 보면 티가 난다. 13세기부터 유행했던 기독교 성화를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 시모네 마르티니, 산드로 보티첼리, 라파엘로, 장 푸케, 알브레히트 뒤러, 파르미자니노, 시몽 부에 등 ‘성화 패밀리’가 대표적이다. 성화의 주제는 성모와 예수, 삼미신, 세례 요한 등 성서 인물부터 시작해 현실의 권력들, 즉 황제나 귀부인을 그린 그림들까지 비슷한 화풍을 따른다.

 

 

 

 

 ▲16세기 페테르 파울 루벤스부터 20세기 막스 에른스트까지.

 

보자마자 가족인줄은 모르겠지만, 특징 하나로 엮이는 가족들도 있다. 죽음을 관한 그림이 그렇다. 이 그림들에는 해골이 꼭 등장해 가족임을 살포시 드러낸다. 미술사에서 17세기부터 ‘바니타스’(vanitas)라는 특징적인 정물화 장르가 그렇다. ‘바니타스’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전도서의 문구를 주제 삼은 문구로, 해골을 정면에 내세운 정물화가 많다. 필리프 드 상파뉴의 <바니타스 혹은 인생에 대한 알레고리>, 로히드 반 데르 바이덴의 <브라크 가문의 세 폭 제단화>, 하르멘 스텐베이크의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알레고리>등이다.

 

 

같은 형제지만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은 해골을 정면으로 내세우지 않아 언뜻 보면 같은 가족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하지만 두 형제가 위풍당당하게 자신들의 소유물을 드러내며 서있는 사진 아래로, 해골이 아주 비스듬하게 배치되어있다. 이 형제들의 계보는 현대까지 살아남았다. 안느 푸아리에&파트릭 푸아리에의 <바니타스>는 설명 없이는 가족인 지 알수 없으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럴듯한 사례다. 500프랑 짜리와 200프랑 짜리 지폐를 믹서에 갈아 제작한 이 작품은 돈데 대한 헛된 욕심 때문에 파멸로 치닫고 있는 세상과 예술이 투기의 동의어가 되어버린 이 시대를 고발한다고(76p) 한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가족의 얼굴을 보고도, 가족이라는 설명을 들어도 믿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어색한 조합은 아무래도 챕터 ‘흰 바탕 위의 흰 정사각형’에 나오는 15세기 플랑드르의 로히르 반 데르 바이덴과 20세기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와의 관계일 것이다. 작가 스스로도 고백한다. 사실 이들 사이에는 바이덴이 그린 <머리쓰개를 쓴 여인의 초상>의 매력적인 ‘흰 천 조각’이 말레비치의 <흰 바탕위의 흰 정사각형>을 연상케 하는 점 외에는 아무런 연관서이 없다(194p)고. 하지만 여인의 얼굴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는 이 천조각은 말레비치가 보여줄 흰색의 신비함을 예고한다(196p)는 이유로 가족으로 묶여있다.

 

 

 

 

 

▲ 로히드 반 데르 바이덴의 <머리쓰개를 쓴 여인의 초상>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흰 바탕 위의 흰 정사각형>, 프랑수아 모를레의 <중첩과 투명 : 뒤 사각형 0~90도, 앞 사각형 20~110도>

 

이 책은 대충 누구네 가족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외의 구성원을 찾아보고 싶을 때 궁금증을 풀어주기도, 의외의 구성원을 찾아 기분 좋은 놀라움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가족 없이 홀로자란 아티스트인줄 알았지만 많은 이의 영향을 흡수한 이들도 알 수 있다. 미술계 작품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해설해주지는 않지만, 큼직한 도판과 깔끔한 설명으로 잘만들어진 족보를 본 기분이다. 그래서 이 책은 상시 옆에 두고 꺼내볼 국어 ‘사전’같은 책이라기 보다는 가끔 먼지가 쌓일 때마다 쓱쓱 닦으며 꺼내볼, 족보에 가깝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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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연대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시간 연대기 -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의 모든 것
애덤 프랭크 지음, 고은주 옮김 / 에이도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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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유독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싫어하는 친구가 있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기다리기 싫어서란다. ‘기다림을 싫어하는 사람은 인간의 한 유형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많아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을 싫어한다.

인간관계라든지 인생에서 수많은 시기에 찾아오는 기다림이 주는 것과는 달리, 대중교통의 기다림은 끝이 있다. 전자에서는 기다림 자체가 싫다기보다, 기다려봤자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이 기다림이 무용지물되지는 않을까하는 불안함이 크다. 그에 반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생기는 기다림은 몇분 후에 끝날 것임을 아는데 왜 이리 진절머리 나게 싫은 것일까? 답은 시간의 성질에 있다.

 

 ▲기다리기 싫어.

 

현대 사회에서 시간은 나의 관리의 영역안에 들어서며 이는 곧 효율성과 관련된다. 현대인의 착각 중 꽤 큰 것이 시간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교통을 기다리는 그 시간만큼은 나의 관리 영역에 들어가지 않는다. 어쩔수 없이, 하염없이, 무조건 나는 기다려야 한다. 다른 이들과 똑같이, 플랫폼에 서서 시간을 때우며 말이다. 효율성 없이 말이다. 애덤 프랭크의 <시간 연대기>는 이러한 시간에 대한 역사서이자 철학서이다.

 

책의 삼분지 이는 시간과 물리학, 우주론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지만 시간에 대한 인문학적, 철학적 성과를 설명하는 위주로 훑어도 의미있다. 물리학과 과학에 흥미가 없는 독자라면 책의 꽤 가치있는 많은 부분을 뛰어넘어야 할 것이기에, 저자는 미리 흥미를 잃지말라며 용기를 북돋운다.

 

고등학교 과학시간을 떠올리면서 자신에게는 물리학을 이해하는 직관이 전혀 없다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자 엘리자벳 스펠크는 달리 본다. 스펠크는 아주 어린 아이들조차도 물리적 사물의 움직임을 분명하게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의 삶이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아이들은 사람과 사람 이외의 생물, 무생물의 속성들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이 고체, 중력, 관성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점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직관 물리학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8p)

 

이처럼 어떠한 고정관념이나 독자들이 쉽게 할 법한 생각을 물리학과 우주론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책 전반에 흐른다. 보통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인문학이나 철학으로 풀 때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색다르게 풀어낸 셈이다. 물리학에 기본적인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물리학의 전반적 내용을 정리할 수 있고, 인문학적 성찰까지 짚어볼 수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시간에 대한 현대사회의 통념을 보자. 현대 사회에서 시간이 곧 성과임을 주창하는 분석은 이미 제러미 리프킨이 언급했다.

 

제러미 리프킨은 자신의 책 <시간 전쟁>에서 이렇게 썼다. 효율성이 도입되면서, 현대의 시간 운영 방식이 완성되었다. 효율성은 중요한 가치인 동시에 방법이다. 가치 측면에서 효율성은 모든 인간이 시간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사회적 기준이 된다. 방법 측면에서 효율성은 물질적 진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효율성이 시간을 사용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알려준다. (467p)

 

 

▲<시간전쟁>은 한국판으로 없는 듯. 외국 도서도 품절.    

 

시간은 내 안에 있고 완벽히 통제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반대다. 지금 우리가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개념, 그 개념은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고 인간이 시간을 통제한 날들보다, 시간이 인간을 통제한 역사가 더 길다.

 

지금같이 시계라는 개념이 널리 퍼진 것은 거의 14세기가 지났을 무렵이다. 책에 따르면 1393년 무렵에 유럽의 많은 도시들에 최신식 장치가 설치되었다고 한다.(120p) 지금과는 달리, 시계가 생기면서 권력은 사람들은 관리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마치 시계에 따라 움직이는 노예처럼 움직였다.

 

종탑이 경제적 정치적 활력의 직접적인 상징으로 변모한 것 역시 물질이 개입하며 제도와 서로 얽힌 것을 보여준다. 14세기에 밀라노의 갈바노 피아모(Galvano Fiammo)는 이렇게 썼다. “종을 자기 마음대로 울릴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도시를 쉽게 지배할 수 있다.” 1179년 프랑스 에스댕에서 지방 권력에 대항해 반란에 가담한 소작농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종을 울렸을 때, 플랑드르의 백작은 그에 대한 응징으로 종탑을 무너뜨렸다. 종은 시간을 지배했고, 시간은 새로운 도시경영을 좌지우지했다. 126p

 

이러한 경향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맞아 더욱 심해졌다. 산업혁명기에는 곧 시간이 돈으로 환산되던 시기이기에, 노동자들이 허투루 보내는 시간은 곧 자본가들의 돈으로 흘러나간 것이다. 그렇기에 영국 혁명기 당시에 시간 감시관이라는 직업이 있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현대에는 사라졌지만 종종 이 시간 감시관이 현대인 스스로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어서 필요없어진 직업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시간을 활용한 삶, 즉 자기계발의 시초가 이미 기원전 7세기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아직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의 많은 역사기록과 주석, 극장 역시 그리스 문화가 시간의 질서를 잡는 섬세한 감각을 가진 문화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간의 질서는 기원전 7세기 농민 시인 헤시오도스가 쓴 <노동의 나날>에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헤시오도스의 책은 농경기법과 지침이 반씩 섞여있다.

 

앤서니 애브니에 따르면, <노동의 나날>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산악지역에서 농사를 지을 때 질서 있고 체계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법을 노래하는 시를 담은 고대의 자기계발 서적이나 다름없다. (...)헤시오도스의 시는 우리에게 힘들지만 정직한 노동을 하는 것만이 철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인들이 스스로를 구언하고 세상의 완전한 명망을 미리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이야기한다. 80p

 

 

 

기원전 7세기, 혹은 시계가 막 생겨난 유럽의 14세기, 시간시간이 돈이 되었던 18세기의 영국, 그리고 시간에 대한 물리학이 고도로 발전된 지금에 이르기 까지. 평범한 인간들의 삶은 무엇이 달라졌을까. 시간에 따라 노예처럼 살고, 시간에 의해 지배받는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달라진 것이라고는 이전의 인간들과는 달리 현대인은 스스로 시간을 관리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부려진다는 점 뿐이다.

수백년이 지난 후 시간을 설명하는 물리학과 우주이론들은 발달할 것이다. 그때마다 문화는 변할 것이다. “문화는 문화적 제도를 뒷방침 하기 위해서, 또 문화를 조직하는 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항상 우주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477p)라는 저자의 마지막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시간에 의해 노예처럼 부려지는 인간의 삶의 본질적 양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더 큰 착각으로 더 어리석어지지 않을 것만을 기대할 뿐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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