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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 효과 - 《80/20 법칙》리처드 코치의 새로운 시대 통찰
리처드 코치 & 그렉 록우드 지음, 박세연 옮김 / 흐름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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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왜 '낯선 사람'일까? '낯선 사람'이란 '약한 연결(Weak Links)'을 의미한다. '약한 연결'이란 사소하고, 산만하고 무작위적이고, 피상적이다. 이는 가족이나 친한 친구로 구성된 '강한 연결'과 대조된다. 약한 연결이 강한 연결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부탁하면 적극 도와주려고 나서는 가깝고 친밀한 사람보다,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지내는 사람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사이로 구성된 강한 관계보다 그저 알고 지내는 지인, 또는 몇 번밖에 보지 못한 사람과 관계가 사회 발전에 더 크게 이바지한다. (64쪽)

“강한 연결이 아닌 약한 연결을 통해서 정보가 확산 될 때 많은 사람을 거치면서 더욱 광범위한 사회 영역으로까지 뻗어 나갈 수 있다.” 새로운 정보나 아이디어를 얻으려면 강한 연결로 얽혀 있는 원을 뛰어넘어 네트워크상에서 멀리 떨어진 다양한 원과 연결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약한 연결’이다. 약한 연결은 네트워크에서 존재하는 허브와 허브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는 유일한 통로이다. (66쪽)

슈퍼커넥터는 네트워크 속에서 활동하는 구성원을 연결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그들이 하는 가장 창조적인 기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일이다. 모든 네트워크는 슈퍼커넥터에 의해 좌우한다. 실제로 우리 사회를 더 작게 만들고, 멀리 떨어져 있거나 서로 상이한 사회적 조각을 잘 연결함으로써 구성원이 풍부한 자원을 더 쉽게 공유할 수 있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세상의 흐름과 시장의 전략, 기업 정책에 관한 폭넓은 정보를 바탕으로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큰 영향력을 미치며 사회적 위상을 계속 강화한다.

“훌륭한 아이디어는 네트워크와 허브를 통해 성공한다.” 아이디어는 반드시 조직이 필요하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지지자로 구성된 조직, 허브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268쪽) 우리 사회에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풍부한데, 이를 실현할 조직이 부족하다. 아이디어만으로는 부족하다. 성공을 위해서는 아이디어를 널리 퍼뜨릴 수 잇는 열성적인 ‘소비자’를 발굴해야 한다.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아이디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이를 이해하고 활용하기 위해 투자해야 하는 비용보다 커야만 한다.

아이디어가 성공을 거두자면 사용자가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이를 활용하기 위한 비용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 이익의 가치를 높이는 반면 누구나 쉽게 그 이익에 접근하도록 해야 한다.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다양한 가치를 ‘한 마디로 압축’하는 일이다. (270쪽)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이디어를 가지고 와서, 이를 상황에 맞게 변영함으로써 얼마든지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조할 수 있다.

저자의 “네트워크는 풍요로운 미래를 위한 대안일까?”라는 마지막 질문은 답을 할 수 없다. 이 거대한 세상이 동시에 작은 세상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잘 어울리며 도전을 자극하는 허브를 선택해야 한다. 또한 다양한 사람과 계속해서 연결을 만들어내는 구성원으로서 움직여야 한다. 

원제는 《Superconnect: The Power of Networks and the Strength of Weak Links》를 《낯선 사람 효과》로 바꾸었다. 책을 읽어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 이유는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원제와 번역서 제목 중에서 책의 내용을 더 잘 전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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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1 09: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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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2014 세계경제의 미래
해리 S. 덴트 & 로드니 존슨 지음, 권성희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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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경제를 전망하는 책은 너무나 많다. 특히 경제가 불황 조짐을 보이면 너도나도 전망하는 말과 글이 난무한다. 저자는 인구통계학을 통한 소비분석이라는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2012 년부터 2015년 사이, 길게는 2020년 초까지 대불황이라 불리는 경제 위기가 올 것이다. 과도한 부채가 초래한 경제 위기가 장기 불황으로 이어간다. 저자는 "역사상 최대의 신용 버블과 부동산 버블이 꺼지면서 부채 축소과정이 이어질 것이다. 경기 부양책은 완벽한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모든 투자자산의 가치가 나락에 떨어지면서 극한의 디플레이션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성 장이 둔화하고 디플레이션이 나타나는 추운 겨울이 한동안 지속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말은 앞으로 10년을 버터 내면 2020년 이후에는 새로운 대호황이 오리라는 것이다. 짧게는 2년, 길게는 10년 이후를 생각하고 투자 전략을 세워야 한다. 내일도 가늠할 수 없는데 1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하나. 겨울은 봄이 멀지 않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지금은 춥디추운 겨울, 그러므로 곧 봄이다. 얼마나 겨울이 오래 지속되느냐겠지만. 이런 점에서 한정된 한국어 제목 《2013-2014 세계 경제의 미래》보다는 원제는 《The Great Crash Ahead》가 책의 내용을 직관적으로 알려준다. 왜 이 제목을 선택하였는지 의구심이 든다.

추운 겨울 움츠린 개구리가 경칩에 뛰어오르듯 앞으로 다가올 봄을 혁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불황은 어떤 이에게는 추운 겨울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을 포함하여) 기업은 침체기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만 고민하지 말고 수년간의 디플레이션이 끝난 뒤 찾아올 기회도 함께 살피라 말한다.

저자는 기업은 지금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고 말한다. 사업을 매각하여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현금을 확보하거나 '경제의 겨울'이 지나면 경쟁이 줄어든 시장에서 시장 지배력과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잘 버티면서 대비하는 것이다. 비슷한 말이지만 현재 사업을 하고 있다면 즉각 처분하고 일찍 은퇴하거나 지금 사업을 접고 '경제의 겨울'과 수많은 기업의 파산 때문에 수혜 입을 것으로 기대되는 사업을 시작하라.

개인이 대처해야 할 사항도 기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대폭락을 대비해 자금을 보전해야 한다. 재정 건전성을 확보해야 한다. 디플레이션 때는 임금이 낮아지고 소득에서 부채 상환 비용이 차지하는 비용이 커져 생활 수준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이런 상황은 대출과 관련해 다른 기회를 제공한다. 디플레이션 때문에 빚을 지는 게 불리해진다면 반대로 똑같은 이유로 돈을 빌려주는 것은 좋은 투자가 된다. 그렇다면 현금확보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로 귀결된다. 금값에 관한 충고는 신중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금과 은은 인플레이션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지 디플레이션 회피 자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을 믿건 아니든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선 것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 예측서가 그러하듯 설령 잘못된 예측을 하더라도 책임은 독자의 몫이다. 그들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책을 읽는 이가 있고 만드는 이도 있는 세상이 재미있다. 재미있는 세상에 나도 한 몫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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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1 09: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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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적 금융 사회 - 누가 우리를 빚지게 하는가
제윤경.이헌욱 지음 / 부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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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 나라를 예속시키는 방법은 하나는 칼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빚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이 나와 직접 연관이 없는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와 다르게 "채무자 그 진짜 이름은 '노예'"는 '아 그렇구나!'라는 공감한다. '한때 자유인'이었던 우리는 이미 '빚의 노예'이다. 페달을 멈추면 바로 쓰러져 버리는 '빚'이라는 달리는 자전거를 타고 있다. 초조함과 불안감을 안은 채 우리는 쉴 새 없이 페달을 밟아야 한다.

'투자는 자기 책임'이다. 모든 투자 실패는 투자자의 몫이다. '내 탓' 논리는 그간 금융회사가 언론과 합작한 반복 학습 결과이다. 금융회사가 망하면 큰일이고 개인의 피해는 '내 탓'이라는 금융소비자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금융회사를 살리기 위해 금융 소비자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금융회사의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고, 비효율적이며 불법인 도덕적 해이에 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는 금융회사(기관)의 탐욕과 약탈 행위이다.

"빚, 피할 수 없다면 현명하게", "좋은 빚 활용해 수익률을 높여라", "빚을 얻을 수 잇는 것도 자산", 빚도 관리하면 자산이 됩니다", "잘 얻은 빚은 재산이다", "지혜로운 빚테크", 부자들은 돈 벌기 위해 빚진다", "꽉 막힌 은행 대출 빚테크로 뚫는다" 등 언론이 '빚 권하는 사회'에 적극 권장하고 있다. 금융권, 언론 그리고 정부가 협작(합작이 아니다)해 우리에게 빚을 강요한다. 마치 빚을 얻지 않으면 마치 이 시대에 살지 못하는 사람처럼 벼랑으로 몰고 있다.

더는 "약탈적 금융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각하고, 분노하고, 연대하고 당당하게 외쳐야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한 금융이어야 한다. 약탈적 금융이 어떻게 우리 삶을 억압하고 약탈하는가를 알려준다.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약탈적 금융의 족쇄를 풀어야 한다. 오직 자각한 대중만이 풀 수 있다.


현상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정작 어떻게 관한 해답은 부족한 점이 아쉽다. 그럼에도 벌어진 상황이 자신의 '도덕적 해이'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임을 자각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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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자기계발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800년대 초반 영국 맨체스터 주변은 온통 흰색 자작나무나방 투성이였다. 자작나무의 흰색 줄기에 앉으면 잘 눈에 띄지 않는다는, 당연한 이유 때문이다. 반면 당시에도 아주 드물게 검은색 자작나무나방이 있었지만 보이는 족족 새들의 먹잇감이 됐다. 하지만 1848년 무렵이 되자 검은색 나방이 다수 발견되고 흰색 나방은 줄었다. 그 사이 맨체스터가 엄청난 속도로 산업화됐고, 공장에서 뿜어내는 매연이 자작나무를 검게 물들였기 때문이었다. 어제의 보호색이 오늘은 치명적 약점이 됐다.

오스트리아의 저명 유전학자인 저자 헹스트슐레거는 "미래의 위험에 대처하려면 평균을 버려라. 그리고 개성을 키워라." 저자가 말하는 '개성'이란 '다름' '다양성'으로 풀이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어떤 문제를 만나면 "작년엔 어떻게 했어?" "지난번에 어땠어?"하고 과거에서 예를 찾는다. '평균'에서 답을 구하는 것. 하지만 맨체스터의 예에서 보듯 급변하는 환경 속의 미래 위험에 대해 '평균'은 무용지물이 된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선 '개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유전학자임에도 '유전 vs. 환경' 논쟁, 즉 '재능은 타고나느냐, 노력으로 길러지느냐' 논쟁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대신 '개성'을 화두로 던져놓고 200여쪽을 채워간다.

유전학, 의학 지식을 동원한 저자에 따르면 인간의 유전자는 약 2만5000개. 그런데 파리는 1만2000개, 히드라는 2만개, 물벼룩은 3만개, 양배추는 10만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아직 종(種)을 유지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유성생식 덕분이다. 즉 항상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에서 유전자를 물려받음으로써 유전자의 다양성을 넓혀온 덕분에 온갖 환경적 변화에도 멸종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또 모든 인간은 유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개별자의 존재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평균은 없고 개성만 있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재능이란 없다. 성과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다빈치, 모차르트, 아인슈타인 등 창의적 천재의 경우도 그들의 성과 덕분에 거꾸로 그들의 창의성이 주목받는다는 이야기다.

저자의 결론은 "유전자는 연필과 종이일 뿐 역사는 우리 자신이 쓴다"는 것. 또 "엘리트는 창조적인 사람이다. 평균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개인'은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엘리트다. 이 엘리트는 숲 속 공주의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범인(凡人)들에겐 용기를 북돋워주는 말이다. 고정관념을 혁파하는 데 주력하느라 개성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는 부족하다.

하지만 '좋은 아이' '좋은 학교' '좋은 직장'같은 '평균'에 대한 신화가 지배적인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 많은 책이다.



이 평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두 인물은 핵무기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던 장본인들이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 제작 실현의 가능성을 알렸고 핵무기 개발의 초기에 관여했다. 또 오펜하이머는 미국이 핵무기 개발을 목적으로 창설했던 로스앨러모스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실제로 원폭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에도 개입했다.

그 러나 이 책이 두 사람의 물리학적 업적이라든가, 전쟁에 관여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인 저자 위버(84)는 오히려 자신의 전공 분야를 살짝 벗어난 앵글로 두 사람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의 관점은 “아인슈타인도 오펜하이머도 단지 개인에 불과했을 뿐이며, 그들이 이룬 이른바 ‘업적’에는 배경과 환경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둘에게 덧씌워진 ‘물리학의 천재’라는 수식어에서 벗어나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 환경에 주목한다. 아울러 두 사람의 “생활과 인격”이 그 환경 속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살피고 있다.

저자에 따르자면 두 사람은 시대의 산물이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이라는 고전적 물리학이 한계에 부딪힌 시점에 등장했다. 말하자면 아인슈타인이 특정한 업적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업적이 필요한 역사적 장면에 그가 도착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대중이 아인슈타인에게 품고 있는 “성자와 같은 느낌”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한다. “아인슈타인은 1·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히틀러와 스탈린의 잔인함을 직접 목도”했기에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거나 억눌린 사람들을 대변하는 행위, 혹은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로서의 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는 얘기다.

저 자는 아인슈타인보다 25세 연하인 오펜하이머가 미국의 애국주의와 결합했다고 진단한다. 그것은 오펜하이머 개인의 기질과도 상통했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오펜하이머는 아주 인간적인 사람, 민감한 사람, 애국적인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제자까지 배신할 정도로 국가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했던 인물”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생전에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보이기만 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국가의) 모든 명령을 수행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애국주의자였으며, 바로 그런 태도의 연장선에서 “분명한 (국가주의적) 논리에 근거해 핵을 비롯한 군사정책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아인슈타인과 달리 스스로에게 확고한 믿음이 없었던 오펜하이머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공간을 (외부에서) 찾고자 노력했다”며 “오펜하이머의 애국심은 개인의 야심과 뒤엉켜 있었다”고 진단한다.

“뛰어난 물리학자가 필요한 바로 그 시점을 만났기에” 역사적 인물로 자리했다는 관점은 그다지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이 책이 그 부분에만 집중했다면 별다른 흥미를 유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책에서 상당 부분을 할애해 ‘개인의 기질’이라는 측면에서 두 사람을 읽어낸다.

일단 두 사람은 유대인이라는 자신들의 혈통에 대해 매우 다른 입장을 보인다. “스스로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고 살았던”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도 확고했다. 그는 미국에서 유대인들이 세운 첫 대학인 브랜다이스 대학의 설립에 깊숙이 관여했고, 초기에는 시오니즘에 대항했지만 훗날에는 오히려 적극 참여한다. 저자는 이를 “독일에서 자라면서 반유대주의를 직접 겪었던 경험”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반면에 오펜하이머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했다. “미국의 유대인들이 때때로 반유대주의를 겪긴 했지만, 백인이라는 큰 틀에서 동류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저자에 따르자면, 확신이 지나쳐 때로는 고집불통이기도 했던 아인슈타인은 “스스로 외로운 사람”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물리학계의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의 개인적 성향은 단순히 학문적 영역에서뿐 아니라 정치적 영역에서도 똑같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신이 설립에 관여한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과 브랜다이스 대학의 경우처럼, “아인슈타인은 애초에 자신이 원했던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는 과감히 협력의 끈을 잘라 버리면서 고립을 자초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결국 “아인슈타인의 명성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더욱 고립시켰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반면에 오펜하이머는 “이론물리학자로서의 ‘순위’를 자신의 가치를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로 인식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이 그를 “과학자로서뿐 아니라 위대한 인간으로도 존경한다”며 높이 평가했던 것과 달리, 오펜하이머는 선배에 대한 존경과 질시를 동시에 품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책에는 그와 관련해 여러 증거들이 등장한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사망 10주기를 맞았던 1965년, 오펜하이머가 했던 발언이 결정적이다. “젊은 시절 그가 쓴 논문들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지만 오류투성이였습니다. 이를 수정해 출판하는 데 10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류를 수정하는 데만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으니 참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쯤이면 저자의 입장이 명확해진다. 오펜하이머에 대한 그의 총괄적인 평가는 꽤 냉정해 보인다. “그는 교향악단의 지휘자였다. 특정한 환경에서는 아주 훌륭한 지휘자였다. 그러나 작곡가의 위대함에는 이르지 못했다.” 반면에 아인슈타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설명하기 쉽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아인슈타인은 (19세기의) 모차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20세기의 과학 발전을 이끈 작곡가다.”



소자본 창업 컨설팅 전문가인 '창업전략연구소' 이경희 소장에게 망하는 창업자의 망하는 이유 중 가장 공통적인 하나의 이유를 주문했더니 주저 없이 '준비'라고 답했다. 김연아 선수의 성공은 수천, 수만 번 넘어지는 과정의 준비를 통해 통달의 기술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동네 푸줏간을 내더라도 '상권, 사람, 상품, 유통, 전문식견, 자본 등'에 대한 포괄적인 준비 없이 그저 욕심만 내며 덤볐다간 망하기 십상이란다.

이런 충고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일 중 대표적인 것이 자신이 100% 알지 못하는 분야의 사업에 뛰어 드는 것'이라는 시중의 속설과도 맥락이 통한다. 특히 이 사람의 특징은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자만과 고집으로 주변인과 경험자들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 물론 사업의 성공에 도움이 되는 교육이나 세미나도 돈 낭비, 시간 낭비일 뿐이라며 무시하기 일쑤다. 그리고 결국에는 망한다.

'주부의 가게 사이치'는 일본의 작은 온천 도시 변두리에 있는 80평 규모의 반찬 슈퍼마켓이다. 도시 인구가 5천 명이 채 안 되는데도 주변에 대형 할인점이 속속 들어서면서 경쟁은 날로 치열해져 간다. 그럼에도 사이치는 '줄 서서 먹을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다. 물론 사토 게이지 사장의 경영기법이 매우 기발하되 지극히 합리적인 탓이다. 그런 그도 처음에는 절망에 빠질 만큼 어려웠었다. 갖은 노력에 남다른 발상과 경영기법이 보태져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필자가 보는 사토의 비결은 '배짱, 절제, 메모, 인본주의'로 압축된다. 자신의 라이벌은 인근의 반찬가게가 아니라 '전국의 주부'다. 그녀보다 맛있게, 위생적으로, 싸게 반찬을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다. 직원의 친절 기준은 경쟁 가게가 아니라 주변의 모텔이다. 모델에 들른 고객이 자신의 가게에 오므로 모텔보다 더 친절하지 않으면 불친절한 가게가 되기 때문이다. 매출과 순수익보다 품질과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삼는 절제, 거기서 나오는 공존의 인간존중철학. 무엇보다 사토 사장의 압권은 '아날로그 수첩'으로 대변되는 메모의 습관이다. 사이치의 모든 경쟁력은 바로 꼼꼼한, 기술적(?) 메모에서 나온다. 과연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


12월은 출간은 미루어서인지 눈에 띄는 이 분야(경제/경영) 신간이 없다.


참조 :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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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9 20: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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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에 대한 노왁의 의문은 이렇다. 자연이 선택한 적자(The Fittest)가 생존해 그 유전자를 후대에 퍼뜨리는 것이 진화론의 골자라면, 생명의 세계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피를 튀겨야 하는 전장인가.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표현대로 자연은 “피 칠갑을 한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는가. 세상은 온통 갈등의 장인가.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를 먼저 떠올려보자. 두 공범이 잡혀 따로 취조받는다. 네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 둘 다 죄를 시인할 경우, 한쪽만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 등이다.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하면 검사가 둘에게 중죄를 물을 근거가 없어 2년형을 받는다. 이것은 둘이 서로 협력하는 경우다. 둘 다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하면 둘은 중죄로 기소되지만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3년형을 받는다. 이것은 둘이 서로 배신하는 경우다. 한쪽이 배신하고 다른 쪽이 협력하면 배신한 쪽은 1년형을, 협력한 쪽은 4년형을 받는다. 두 범인은 사전에 협력을 모의할 수 없다. 보수 행렬(payoff matrix)이라고 불리는 선택의 표를 그려볼 때,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면 ‘배신’을 택해야 한다. 즉 둘 다 3년형이다. 상대방의 ‘선의’를 믿고 침묵을 지켰다가는 4년간 감옥에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자연 선택 역시 배신을 지지한다. 진화론의 언어를 쓰자면 “협력자는 항상 배신자에 비해 낮은 적합도(번식률)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범인이 협력해 2년형을 받고 풀려나는 수는 없는 걸까. 사실 생명은 최선의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생물이 갈등을 접고 때론 협력한다는 것은 다윈의 딜레마였다.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인간의 이타적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침팬지·사자·개미·벌의 세계에서도 종종 이타적인 행위와 협력이 관찰된다. 다윈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를 통해 풀어보려 했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1976)에서 진화의 주체는 종이 아니라 유전자이기 때문에, 종 전체의 보호를 위해선 개체의 이타적 행위가 나타날 수 있다고 봤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뒤 노왁은 변이, 선택이라는 진화의 두 가지 규칙에 협력이라는 세 번째 규칙을 덧붙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먼저 ‘죄수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우선 ‘직접 상호성’이다. “내 등을 긁어다오. 그렇다면 나도 네 등을 긁어주겠다”로 요약될 수 있는 이 방법은 생물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코스타리카의 흡혈박쥐를 조사해 보니, 밤 사이 충분한 피를 마신 박쥐는 사냥에 실패한 동료에게 자신이 빨아낸 피를 토해서 먹였다. 덕분에 매일 밤 몇 퍼센트의 성인 박쥐와 3분의 1가량의 어린 박쥐들은 피 한방울 사냥하지 못하지만, 굶어죽는 개체는 거의 없었다. 흥미로운 건 박쥐가 과거에 자신에게 피를 나눠줬던 박쥐에게 피를 더 잘 준다는 사실이다.

‘간접 상호성’은 “내 등을 긁어다오. 그러면 너의 선행을 본 누군가가 네 등을 긁어줄 것이다”로 표현할 수 있다. 직접 상호성이 개인의 경험에 기반한다면, 간접 상호성은 다른 사람의 경험까지 고려한다. 집단 내 ‘평판의 힘’에 의지해 이기심을 제어하는 것이다. 간접 상호성은 영토와 인간 관계가 확장된 대규모 사회가 출현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간 게임’은 우리의 협력이 특정 공간을 전제할 때 더 잘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조미료나 공구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평소 안면을 익힌 이웃에게 더 쉽게 빌릴 수 있다. 이는 생명의 기원을 상상할 때도 적용된다. 비유기체 화학물이 유기체 화학물로 전환된 것은 매우 우발적이고 특정한 장소에서만 가능했다.

‘집단 선택’은 협력이 개체가 아니라 그보다 상위인 집단의 이익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진화생물학자들은 집단 선택 개념을 이단시했으나, 최근 와서는 조금씩 받아들이는 추세다. 배신자들은 개체 수준에서는 승리하겠지만, 배신자들만 모인 집단은 협력자들로 이뤄진 집단을 이길 수 없다. ‘혈연 선택’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옛말로 요약된다. 혈연 관계가 강한 이들과는 협력하기가 쉽다.

사실 협력 없이 생명은 존재할 수 없었다. 단세포 생명체들이 가깝게 어울려 하나처럼 작용하다가 고등세포가 됐다는 이론이 있다. 반면 암세포는 협력이 아닌 배신을 택한 대표 사례다. 엄청난 수준의 협력을 통해 형성된 복잡한 신체에서 암세포는 증식이라는 자신의 목적만 위하다가 신체 전체를 위험에 빠트린다.

그러나 세포나 동물의 협력을 통해 인간 사회를 설명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공격성, 이타성 등을 진화론으로 설명하는 사회생물학이 현실의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돼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의 문명은 단세포 생명체 수준의 협력을 뛰어넘는 그 어떤 수단을 통해 이룩됐다.

노왁은 인간이 가진 그 수단을 설명한다. 가장 강력한 것은 언어다. 그는 “언어의 탄생은 지난 6억년 동안 발생한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사건”이라며 “이는 최초의 생명체가 등장하면서 시작된 진화의 전개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인간 이전 생명체는 DNA나 RNA 등 화학적 유전물질로 정보를 교환했고, 원숭이 · 새 · 벌 역시 ‘언어’를 사용한다지만 그것은 인간의 언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다. 반면 노왁은 “우리가 언어를 창출했다고 믿고 싶겠지만, 이는 앞뒤가 바뀐 주장이다. 언어가 우리를 창출했다”고까지 말한다.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인간의 뇌 역시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영어 사용자를 조사해보면 여섯 살짜리 아이가 1만3000개 어휘를 쓴다. 1세부터 7세까지 익히는 인간의 단어 학습 속도를 계산하면 깨어있는 90분마다 한 단어를 배우는 셈이다. 큰 뇌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출산에도 위험하지만, 큰 뇌가 언어 사용을 도운 덕분에 인간의 삶은 더욱 정교해졌다. 무작정 공격이 아니라 말을 통한 협력이 가능해진 것이다.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역시 협력을 증진시키는 한 방안이다. ‘공유지의 비극’ 게임은 죄수의 딜레마를 변형한 것이다. 농장주 사이에 공유 목초지가 있을 때 농장주는 자신의 가축을 굳이 이곳에 풀어놓아 목초지를 과잉 이용한다. 그렇게 하면 목초지가 황폐해져서 누구에게도 이득이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노왁은 오늘날의 기후 변화도 이 같은 이유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인류가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을 유지한다면 지구가 큰 위험에 처할 테지만, 그럼에도 연비가 낮은 차를 타거나 물을 펑펑 흘려보내는 이들이 많다. 지구의 위기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전하고, ‘간접 상호성’에서 언급된 ‘평판의 힘’을 이용해 이런 행동을 자제시켜야 한다. 도요타의 인기 많은 하이브리드 자동차 프리우스는 쉽게 눈에 띄는 디자인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난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는 시민이야”라는 점을 홍보해 평판을 유지시키는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전 세계 현인의 말을 살피면 ‘도덕체계의 황금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네가 네 이웃에게 바라는 존재, 너도 그런 존재가 될지어다”(그리스 철학), “네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기독교),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여기는 그런 것들을 남에게 결코 해서는 안된다”(힌두교), “누구도 너를 해하지 못하게 하려거든 누구도 해하지 말라”(이슬람교), “네가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유교) 등의 격언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수학자가 최신의 게임이론을 동원해 현대의 진화생물학을 파고들어 얻어낸 아이디어가 옛 현인의 가르침과 비슷하다는 것은 지적인 짜릿함을 전한다.

노왁은 게임이론과 진화생물학의 결합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중 독자를 의식한 듯, 자신의 학문 여정, 현대 과학의 발전을 위해 애쓴 동료들의 에피소드, 학문 세계의 별스러운 전통도 흥미롭게 전한다. 미국의 학자 조지 프라이스는 한계에 갇혀 있던 게임이론을 자연 선택에 적용하는 업적을 보인 인물이지만, 예수의 말을 직접 들었다고 주장한 순간부터 학문 대신 사회사업에 몰두했다. 알코올 중독자를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는 결국 가산을 탕진한 뒤 자살했다. 인간의 이타성, 선함이 과연 존재하는지 결국 알아내지 못한 채로 말이다. ‘공유지의 비극’ 게임을 처음으로 설계한 가렛 하딘은 애덤 스미스식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개인은 결국 공동선을 파괴할 것이라고 봤고, 생태계가 “태어나는 모든 생명을 감당할 만한 여유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안락사를 지지했던 하딘과 그의 아내는 62번째 결혼기념식을 마친 직후 자살했다.

책의 제목은 <초협력자>(Supercooperators)지만, 정작 ‘초협력자’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다. 단지 인간은 ‘직접 상호성’ ‘간접 상호성’ 등 협력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을 모두 사용하는 유일한 종이기에, ‘초협력자’라고 불릴 수 있다고 말하는 정도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은 지금까지의 분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앞으로의 염원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좋겠다.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요즘 대선 정국의 가장 뜨거운 유행어가 된 경제민주화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밝힌 <한국 경제론의 충돌>도 함께 읽어볼 만하다. 저자는 오랫동안 재벌 타파를 외쳐 온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벌 옹호론자로 찍힌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유력 경제학자인 그의 발언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박정희 체제의 유산에 대한 평가에 있어 긍정적인 장 교수 그룹이 자본과 노동의 계급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희박한 탓에 중요 경제 이슈에 혼선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장 교수와 뜻을 같이 하는 그룹이 노동 세력의 주적을 금융자본으로 겨냥하면서 신자유주의 지배 세력에서 재벌을 제외시켰다는 점을 근본문제로 지적한다.

 

 

 

 

“전통 경제학 수치로만 따져 오늘날 지구촌은 엄청난 경제성장으로 중세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부유해졌어요. 그런데 지금은 집 한 채 사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고, 부부가 1년 내내 맞벌이해야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어요. 그것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이런 경제학은 버려야 합니다. 이제 경제학은 윤리학 생물학 심리학 지구과학까지 포괄하는 거대 담론이어야 합니다.”

한국은행에서 화폐 발행 실무를 총괄하는 조군현씨가 경제학의 새 이정표를 제시하는 책을 번역해냈다. 세계적인 진보 경제학자 2인이 쓴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실체를 고발하고 새로운 경제 시스템 창안을 역설한다.

“전통 경제학자 계산에 따르면, 근대기 이전 중세 때 보통 농부 한 사람이 연평균 15주 정도 일하면 1년 동안 생활하는 데 필요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0년 동안 유례없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중세의 소작농들보다도 더 죽어라고 일해야 살 수 있다.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그는 특히 척박한 경제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전 세계 인구 중 30억명이 하루에 2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고, 가장 잘산다는 미국조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절대빈곤자가 4000만명”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세계 상위 1%의 부자들은 57%의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을 합한 것보다 많이 벌고 있으며, 이런 부의 불평등이 계속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조씨는 “애초(애덤 스미스 등의) 경제학은 소수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했다”면서 “이런 불합리한 현대 경제학은 새로운 경제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GDP(국내총생산)로 대변되는 ‘경제성장’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됐다”면서 “현대인들이 무의미한 ‘경제성장’으로 ‘삶의 질’을 맞바꾸는 것은 비효율적이며 지구 자원만 낭비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진정한 경제학이란 “우리가 갖고 있는 자원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어야 한다”면서, “이 책은 GDP를 공해, 질병, 천연자원 고갈 등의 사회·환경적 비용을 뺀 ‘참경제발전지수(GPI)’로 대체하자”고 제시한다.

 

 

도대체 왜 어떤 사람들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하는 걸까.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중대 변수가 아니라면 무엇이 성공을 결정하는 걸까. <80/20 법칙>의 저자인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 리처드 코치 등이 쓴 <낯선 사람 효과>(원제 'Superconnect')는 그 비결을 '본능적으로' 네트워크를 잘 이해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에서 찾는다.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것은 연결이 많은 것보다도 올바르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며 저자들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 '약한 연결'이라고 말한다. 미국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가 1970년대 초반에 지적한 대로, 지인들과의 '약한 연결'은 단지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각각의 밀집된 덩어리(강한 관계)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다. 약한 관계가 부족한 사람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그룹에서는 정보를 거의 얻지 못하고 오직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얻는 지엽적이고 개인적인 정보만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우리 주변에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사회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풍부한 사회적 연결을 기반으로 가치 있는 유용한 정보에 쉽고 빠르게 접근하는 그들은 '슈퍼커넥터'이며, 그들이야말로 현대사회의 '진정한 엘리트'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슈퍼커넥터는 엄청난 인맥을 가진 유명인이 아니다. 많은 사람을 알고 있어야 하지만 좋은 첫 인상으로 친근감을 주고 아무 대가 없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외향적이고 카리스마 넘치고 매력적이기보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평범한 스타일이다.

'약한 연결'을 잘 이해한다면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도 유용할 지도 모른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체로 돈을 버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인ㆍ외부인과의 약한 연결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래서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자본, 외부 기업들로 이어진 약한 연결을 공동체 속으로 풍부하게 주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저자들은 책에서 약한 연결의 유용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들을 포함해 기업을 사고 파는 사업 과정에서 성공한 사례를 잔뜩 늘어 놓는다. 그러면서 찰리 채플린이 '모던타임스'에서 그렸던 초기 산업사회와 달리 '우리에게는 자신의 의지대로 허브(연결망)를 옮기거나 또는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허브를 만들 수 있는 권리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장점이자 맹점이 바로 이 대목이다. '어떤 종류의 허브가 자신에게 잘 어울리고, 어떤 형태의 허브에 자신이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도전과 실패의 과정을 거치면서 깨달아가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외부상황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한 허브에서 다른 허브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저자들의 주장은, 그들에게는 가능했을지 모르겠으나 대단한 열정과 노력, 지혜와 의지를 갖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가능해 보이지만 실은 불가능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난해 출간 이후 미국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됐다. 저자 코리 로빈이 분석한 보수주의가 기존 학설이나 일반적 관점과 달랐기 때문이다. 홉스와 하이에크를 같은 테이블에 놓고 보수주의와 반동주의, 반혁명주의를 한 범주에 놓은 분석틀이 논쟁의 이유였다. 한 예로 18세기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주의가 2008년 미 대선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나왔던 세라 페일린의 급진 대중주의적 보수주의에 닿아 있다는 주장이 논쟁을 촉발했다. 원제는 '반동의 정신(Reactionary Mind)'. 로빈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보수주의 이념은 반동적이지만, 그 이념의 자주성이나 힘을 대수롭지 않게 본 게 아닌데도 보수주의자들이 '정신 나간 반동(Mindless Reactionary)'으로 잘못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로빈의 “보수주의자들은 예외 없이 반동과 반혁명에 투신했다”는 주장은 쟁점이 

로빈은 18세기의 버크에서 21세기의 네오콘까지 3세기에 걸친 보수주의를 개관한다. 조소나 당위론이 아니라 진지하게 반동의 속성을 지닌 보수주의의 기원과 현재를 분석한다. 보수주의는 프랑스혁명에 대응하면서 생긴 반혁명의 반동적 이념이다. 로빈이 보기엔 자유방임론자이건, 파시스트이건, 전통주의자들은 모두 반동적 충동을 가슴 속에 품고 있다. 그 충동이 그 세력들을 단합시켰다.

보수주의에 대한 일반적 관점이나 생각을 봐야 할 것 같다. 작은 정부와 자유에 대한 신념, 또는 변화에 대한 신중함, 점진적 개혁이나 덕의 정치에 대한 믿음? 로빈은 이런 것들은 단지 보수주의 부산물이며 수시로 변할 수 있는 양태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여긴다. 더 근본적인 보수주의 뜻은?

로빈은 이렇게 정의한다. "보수주의는 바로 사람들이 상급자들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 특히 사적 영역에서 자유를 얻는 것에 대한 반대다." 프랑스혁명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도 사적인 뇌관으로 격발된 것이다. 그것은 가정, 공장, 현장에서의 권리와 지위에 대한 다툼이었다. 로빈은 "해방의 진정한 주제는 사적 영역에서 권력의 향배"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버크는 프랑스혁명을 큰 위협으로 봤다. 명령과 복종의 의무 관계가 역전되는 것이 문제였다. 버크가 대중에게 절대로 양보할 수 없던 것은 "권력, 권위, 지도력을 나누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대중은 "국가를 관리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는 1919년 미국 시애틀 총파업 때 나타났다. 노동자들은 법과 질서 유지를 포함한 기초적인 공공서비스를 제공했다. 시애틀 시장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은 폭력과 무정부 상태를 억제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능력이야말로 큰 위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로빈은 프랑스혁명, 노예해방, 여성해방과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 운동 같은 투쟁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권력 배치의 변경이라고 규정한다. 보수주의는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적 도전에 대응해 자신의 원칙을 재조정"하며 반동의 원칙과 입장을 세워나갔다. 특권의 조그만 일부를 나눠주고, 대중이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점진적으로 인정했다. 가족, 공장, 현장에서 유사 귀족으로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통념과 달리 보수주의자들은 구체제에 대해서도 신랄했다. 프랑스혁명에 반대한 정치학자 메스트르도 구체제의 세 기둥인 귀족제, 교회, 군주제를 비판했다. 버크는 혁명을 경탄했다. 시민들이 마리 앙트와네트를 침실에서 끌어내 그녀와 가족을 앞세워 파리로 행진한 일이 일종의 장엄함을 성취한 것이라고 봤다. 보수주의자들은 때로 좌파의 전략, 혁명이나 개혁의 이념과 전술을 흡수했다.

이 모든 비판과 경탄, 수용은 우파를 재건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 시도는 현대에서 우익 대중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로빈은 우익 대중주의 역할을 "수많은 군중을 모아 위세를 과시하면서도, 권력이 진정 공유되거나 분배되지는 않도록 단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로빈은 이런 말도 했다. "평민인 척 하는 것은 보수주의자들의 무기고에 소장된 최고의 무기다."

책 1부에서 반동적 이념의 여러 갈래와 흐름을 살핀 로빈은 2부에서 우파의 폭력 과잉 문제를 들여다본다. 로빈은 보수주의의 폭력이 "결코 일탈적인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보수주의) 전통 그 자체의 구성요소"라고 말한다. 예컨대, 로널드 레이건은 1982년 12월 과테말라 대통령이자 민간학살로 악명이 높았던 리오스 몬트를 만난 뒤 “대단한 인격자”라고 평가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전쟁을 증오한다고 주장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폭력 때문에 슬퍼하거나 부담스러워하거나 괴로움을 겪기는커녕 그것에 의해 활력을 얻어왔다"고 로빈은 말한다. "지배가 장엄할 수 있다. 그렇지만 폭력은 더욱 장엄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좌파의 거대한 사회운동을 물리치기 위해 20세기에 등장한 현대 보수주의의 향배는 어떨까. 로빈은 하이에크의 "(자유시장의 방어는) 그것이 가장 번성할 때 정체된다"는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전망한다. "가시권 내에서 보수주의는 이미 그 목표를 달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것은 퇴장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그렇게 할지, 퇴장하는 길에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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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6 1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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