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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초반 영국 맨체스터 주변은 온통 흰색 자작나무나방 투성이였다. 자작나무의 흰색 줄기에 앉으면 잘 눈에 띄지 않는다는, 당연한 이유 때문이다. 반면 당시에도 아주 드물게 검은색 자작나무나방이 있었지만 보이는 족족 새들의 먹잇감이 됐다. 하지만 1848년 무렵이 되자 검은색 나방이 다수 발견되고 흰색 나방은 줄었다. 그 사이 맨체스터가 엄청난 속도로 산업화됐고, 공장에서 뿜어내는 매연이 자작나무를 검게 물들였기 때문이었다. 어제의 보호색이 오늘은 치명적 약점이 됐다.

오스트리아의 저명 유전학자인 저자 헹스트슐레거는 "미래의 위험에 대처하려면 평균을 버려라. 그리고 개성을 키워라." 저자가 말하는 '개성'이란 '다름' '다양성'으로 풀이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어떤 문제를 만나면 "작년엔 어떻게 했어?" "지난번에 어땠어?"하고 과거에서 예를 찾는다. '평균'에서 답을 구하는 것. 하지만 맨체스터의 예에서 보듯 급변하는 환경 속의 미래 위험에 대해 '평균'은 무용지물이 된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선 '개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유전학자임에도 '유전 vs. 환경' 논쟁, 즉 '재능은 타고나느냐, 노력으로 길러지느냐' 논쟁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대신 '개성'을 화두로 던져놓고 200여쪽을 채워간다.

유전학, 의학 지식을 동원한 저자에 따르면 인간의 유전자는 약 2만5000개. 그런데 파리는 1만2000개, 히드라는 2만개, 물벼룩은 3만개, 양배추는 10만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아직 종(種)을 유지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유성생식 덕분이다. 즉 항상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에서 유전자를 물려받음으로써 유전자의 다양성을 넓혀온 덕분에 온갖 환경적 변화에도 멸종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또 모든 인간은 유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개별자의 존재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평균은 없고 개성만 있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재능이란 없다. 성과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다빈치, 모차르트, 아인슈타인 등 창의적 천재의 경우도 그들의 성과 덕분에 거꾸로 그들의 창의성이 주목받는다는 이야기다.

저자의 결론은 "유전자는 연필과 종이일 뿐 역사는 우리 자신이 쓴다"는 것. 또 "엘리트는 창조적인 사람이다. 평균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개인'은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엘리트다. 이 엘리트는 숲 속 공주의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범인(凡人)들에겐 용기를 북돋워주는 말이다. 고정관념을 혁파하는 데 주력하느라 개성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는 부족하다.

하지만 '좋은 아이' '좋은 학교' '좋은 직장'같은 '평균'에 대한 신화가 지배적인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 많은 책이다.



이 평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두 인물은 핵무기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던 장본인들이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 제작 실현의 가능성을 알렸고 핵무기 개발의 초기에 관여했다. 또 오펜하이머는 미국이 핵무기 개발을 목적으로 창설했던 로스앨러모스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실제로 원폭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에도 개입했다.

그 러나 이 책이 두 사람의 물리학적 업적이라든가, 전쟁에 관여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인 저자 위버(84)는 오히려 자신의 전공 분야를 살짝 벗어난 앵글로 두 사람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의 관점은 “아인슈타인도 오펜하이머도 단지 개인에 불과했을 뿐이며, 그들이 이룬 이른바 ‘업적’에는 배경과 환경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둘에게 덧씌워진 ‘물리학의 천재’라는 수식어에서 벗어나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 환경에 주목한다. 아울러 두 사람의 “생활과 인격”이 그 환경 속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살피고 있다.

저자에 따르자면 두 사람은 시대의 산물이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이라는 고전적 물리학이 한계에 부딪힌 시점에 등장했다. 말하자면 아인슈타인이 특정한 업적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업적이 필요한 역사적 장면에 그가 도착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대중이 아인슈타인에게 품고 있는 “성자와 같은 느낌”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한다. “아인슈타인은 1·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히틀러와 스탈린의 잔인함을 직접 목도”했기에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거나 억눌린 사람들을 대변하는 행위, 혹은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로서의 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는 얘기다.

저 자는 아인슈타인보다 25세 연하인 오펜하이머가 미국의 애국주의와 결합했다고 진단한다. 그것은 오펜하이머 개인의 기질과도 상통했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오펜하이머는 아주 인간적인 사람, 민감한 사람, 애국적인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제자까지 배신할 정도로 국가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했던 인물”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생전에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보이기만 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국가의) 모든 명령을 수행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애국주의자였으며, 바로 그런 태도의 연장선에서 “분명한 (국가주의적) 논리에 근거해 핵을 비롯한 군사정책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아인슈타인과 달리 스스로에게 확고한 믿음이 없었던 오펜하이머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공간을 (외부에서) 찾고자 노력했다”며 “오펜하이머의 애국심은 개인의 야심과 뒤엉켜 있었다”고 진단한다.

“뛰어난 물리학자가 필요한 바로 그 시점을 만났기에” 역사적 인물로 자리했다는 관점은 그다지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이 책이 그 부분에만 집중했다면 별다른 흥미를 유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책에서 상당 부분을 할애해 ‘개인의 기질’이라는 측면에서 두 사람을 읽어낸다.

일단 두 사람은 유대인이라는 자신들의 혈통에 대해 매우 다른 입장을 보인다. “스스로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고 살았던”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도 확고했다. 그는 미국에서 유대인들이 세운 첫 대학인 브랜다이스 대학의 설립에 깊숙이 관여했고, 초기에는 시오니즘에 대항했지만 훗날에는 오히려 적극 참여한다. 저자는 이를 “독일에서 자라면서 반유대주의를 직접 겪었던 경험”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반면에 오펜하이머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했다. “미국의 유대인들이 때때로 반유대주의를 겪긴 했지만, 백인이라는 큰 틀에서 동류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저자에 따르자면, 확신이 지나쳐 때로는 고집불통이기도 했던 아인슈타인은 “스스로 외로운 사람”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물리학계의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의 개인적 성향은 단순히 학문적 영역에서뿐 아니라 정치적 영역에서도 똑같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신이 설립에 관여한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과 브랜다이스 대학의 경우처럼, “아인슈타인은 애초에 자신이 원했던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는 과감히 협력의 끈을 잘라 버리면서 고립을 자초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결국 “아인슈타인의 명성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더욱 고립시켰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반면에 오펜하이머는 “이론물리학자로서의 ‘순위’를 자신의 가치를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로 인식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이 그를 “과학자로서뿐 아니라 위대한 인간으로도 존경한다”며 높이 평가했던 것과 달리, 오펜하이머는 선배에 대한 존경과 질시를 동시에 품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책에는 그와 관련해 여러 증거들이 등장한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사망 10주기를 맞았던 1965년, 오펜하이머가 했던 발언이 결정적이다. “젊은 시절 그가 쓴 논문들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지만 오류투성이였습니다. 이를 수정해 출판하는 데 10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류를 수정하는 데만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으니 참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쯤이면 저자의 입장이 명확해진다. 오펜하이머에 대한 그의 총괄적인 평가는 꽤 냉정해 보인다. “그는 교향악단의 지휘자였다. 특정한 환경에서는 아주 훌륭한 지휘자였다. 그러나 작곡가의 위대함에는 이르지 못했다.” 반면에 아인슈타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설명하기 쉽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아인슈타인은 (19세기의) 모차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20세기의 과학 발전을 이끈 작곡가다.”



소자본 창업 컨설팅 전문가인 '창업전략연구소' 이경희 소장에게 망하는 창업자의 망하는 이유 중 가장 공통적인 하나의 이유를 주문했더니 주저 없이 '준비'라고 답했다. 김연아 선수의 성공은 수천, 수만 번 넘어지는 과정의 준비를 통해 통달의 기술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동네 푸줏간을 내더라도 '상권, 사람, 상품, 유통, 전문식견, 자본 등'에 대한 포괄적인 준비 없이 그저 욕심만 내며 덤볐다간 망하기 십상이란다.

이런 충고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일 중 대표적인 것이 자신이 100% 알지 못하는 분야의 사업에 뛰어 드는 것'이라는 시중의 속설과도 맥락이 통한다. 특히 이 사람의 특징은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자만과 고집으로 주변인과 경험자들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 물론 사업의 성공에 도움이 되는 교육이나 세미나도 돈 낭비, 시간 낭비일 뿐이라며 무시하기 일쑤다. 그리고 결국에는 망한다.

'주부의 가게 사이치'는 일본의 작은 온천 도시 변두리에 있는 80평 규모의 반찬 슈퍼마켓이다. 도시 인구가 5천 명이 채 안 되는데도 주변에 대형 할인점이 속속 들어서면서 경쟁은 날로 치열해져 간다. 그럼에도 사이치는 '줄 서서 먹을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다. 물론 사토 게이지 사장의 경영기법이 매우 기발하되 지극히 합리적인 탓이다. 그런 그도 처음에는 절망에 빠질 만큼 어려웠었다. 갖은 노력에 남다른 발상과 경영기법이 보태져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필자가 보는 사토의 비결은 '배짱, 절제, 메모, 인본주의'로 압축된다. 자신의 라이벌은 인근의 반찬가게가 아니라 '전국의 주부'다. 그녀보다 맛있게, 위생적으로, 싸게 반찬을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다. 직원의 친절 기준은 경쟁 가게가 아니라 주변의 모텔이다. 모델에 들른 고객이 자신의 가게에 오므로 모텔보다 더 친절하지 않으면 불친절한 가게가 되기 때문이다. 매출과 순수익보다 품질과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삼는 절제, 거기서 나오는 공존의 인간존중철학. 무엇보다 사토 사장의 압권은 '아날로그 수첩'으로 대변되는 메모의 습관이다. 사이치의 모든 경쟁력은 바로 꼼꼼한, 기술적(?) 메모에서 나온다. 과연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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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은 출간은 미루어서인지 눈에 띄는 이 분야(경제/경영) 신간이 없다.


참조 :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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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9 20: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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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에 대한 노왁의 의문은 이렇다. 자연이 선택한 적자(The Fittest)가 생존해 그 유전자를 후대에 퍼뜨리는 것이 진화론의 골자라면, 생명의 세계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피를 튀겨야 하는 전장인가.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표현대로 자연은 “피 칠갑을 한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는가. 세상은 온통 갈등의 장인가.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를 먼저 떠올려보자. 두 공범이 잡혀 따로 취조받는다. 네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 둘 다 죄를 시인할 경우, 한쪽만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 등이다.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하면 검사가 둘에게 중죄를 물을 근거가 없어 2년형을 받는다. 이것은 둘이 서로 협력하는 경우다. 둘 다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하면 둘은 중죄로 기소되지만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3년형을 받는다. 이것은 둘이 서로 배신하는 경우다. 한쪽이 배신하고 다른 쪽이 협력하면 배신한 쪽은 1년형을, 협력한 쪽은 4년형을 받는다. 두 범인은 사전에 협력을 모의할 수 없다. 보수 행렬(payoff matrix)이라고 불리는 선택의 표를 그려볼 때,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면 ‘배신’을 택해야 한다. 즉 둘 다 3년형이다. 상대방의 ‘선의’를 믿고 침묵을 지켰다가는 4년간 감옥에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자연 선택 역시 배신을 지지한다. 진화론의 언어를 쓰자면 “협력자는 항상 배신자에 비해 낮은 적합도(번식률)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범인이 협력해 2년형을 받고 풀려나는 수는 없는 걸까. 사실 생명은 최선의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생물이 갈등을 접고 때론 협력한다는 것은 다윈의 딜레마였다.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인간의 이타적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침팬지·사자·개미·벌의 세계에서도 종종 이타적인 행위와 협력이 관찰된다. 다윈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를 통해 풀어보려 했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1976)에서 진화의 주체는 종이 아니라 유전자이기 때문에, 종 전체의 보호를 위해선 개체의 이타적 행위가 나타날 수 있다고 봤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뒤 노왁은 변이, 선택이라는 진화의 두 가지 규칙에 협력이라는 세 번째 규칙을 덧붙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먼저 ‘죄수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우선 ‘직접 상호성’이다. “내 등을 긁어다오. 그렇다면 나도 네 등을 긁어주겠다”로 요약될 수 있는 이 방법은 생물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코스타리카의 흡혈박쥐를 조사해 보니, 밤 사이 충분한 피를 마신 박쥐는 사냥에 실패한 동료에게 자신이 빨아낸 피를 토해서 먹였다. 덕분에 매일 밤 몇 퍼센트의 성인 박쥐와 3분의 1가량의 어린 박쥐들은 피 한방울 사냥하지 못하지만, 굶어죽는 개체는 거의 없었다. 흥미로운 건 박쥐가 과거에 자신에게 피를 나눠줬던 박쥐에게 피를 더 잘 준다는 사실이다.

‘간접 상호성’은 “내 등을 긁어다오. 그러면 너의 선행을 본 누군가가 네 등을 긁어줄 것이다”로 표현할 수 있다. 직접 상호성이 개인의 경험에 기반한다면, 간접 상호성은 다른 사람의 경험까지 고려한다. 집단 내 ‘평판의 힘’에 의지해 이기심을 제어하는 것이다. 간접 상호성은 영토와 인간 관계가 확장된 대규모 사회가 출현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간 게임’은 우리의 협력이 특정 공간을 전제할 때 더 잘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조미료나 공구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평소 안면을 익힌 이웃에게 더 쉽게 빌릴 수 있다. 이는 생명의 기원을 상상할 때도 적용된다. 비유기체 화학물이 유기체 화학물로 전환된 것은 매우 우발적이고 특정한 장소에서만 가능했다.

‘집단 선택’은 협력이 개체가 아니라 그보다 상위인 집단의 이익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진화생물학자들은 집단 선택 개념을 이단시했으나, 최근 와서는 조금씩 받아들이는 추세다. 배신자들은 개체 수준에서는 승리하겠지만, 배신자들만 모인 집단은 협력자들로 이뤄진 집단을 이길 수 없다. ‘혈연 선택’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옛말로 요약된다. 혈연 관계가 강한 이들과는 협력하기가 쉽다.

사실 협력 없이 생명은 존재할 수 없었다. 단세포 생명체들이 가깝게 어울려 하나처럼 작용하다가 고등세포가 됐다는 이론이 있다. 반면 암세포는 협력이 아닌 배신을 택한 대표 사례다. 엄청난 수준의 협력을 통해 형성된 복잡한 신체에서 암세포는 증식이라는 자신의 목적만 위하다가 신체 전체를 위험에 빠트린다.

그러나 세포나 동물의 협력을 통해 인간 사회를 설명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공격성, 이타성 등을 진화론으로 설명하는 사회생물학이 현실의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돼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의 문명은 단세포 생명체 수준의 협력을 뛰어넘는 그 어떤 수단을 통해 이룩됐다.

노왁은 인간이 가진 그 수단을 설명한다. 가장 강력한 것은 언어다. 그는 “언어의 탄생은 지난 6억년 동안 발생한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사건”이라며 “이는 최초의 생명체가 등장하면서 시작된 진화의 전개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인간 이전 생명체는 DNA나 RNA 등 화학적 유전물질로 정보를 교환했고, 원숭이 · 새 · 벌 역시 ‘언어’를 사용한다지만 그것은 인간의 언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다. 반면 노왁은 “우리가 언어를 창출했다고 믿고 싶겠지만, 이는 앞뒤가 바뀐 주장이다. 언어가 우리를 창출했다”고까지 말한다.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인간의 뇌 역시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영어 사용자를 조사해보면 여섯 살짜리 아이가 1만3000개 어휘를 쓴다. 1세부터 7세까지 익히는 인간의 단어 학습 속도를 계산하면 깨어있는 90분마다 한 단어를 배우는 셈이다. 큰 뇌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출산에도 위험하지만, 큰 뇌가 언어 사용을 도운 덕분에 인간의 삶은 더욱 정교해졌다. 무작정 공격이 아니라 말을 통한 협력이 가능해진 것이다.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역시 협력을 증진시키는 한 방안이다. ‘공유지의 비극’ 게임은 죄수의 딜레마를 변형한 것이다. 농장주 사이에 공유 목초지가 있을 때 농장주는 자신의 가축을 굳이 이곳에 풀어놓아 목초지를 과잉 이용한다. 그렇게 하면 목초지가 황폐해져서 누구에게도 이득이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노왁은 오늘날의 기후 변화도 이 같은 이유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인류가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을 유지한다면 지구가 큰 위험에 처할 테지만, 그럼에도 연비가 낮은 차를 타거나 물을 펑펑 흘려보내는 이들이 많다. 지구의 위기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전하고, ‘간접 상호성’에서 언급된 ‘평판의 힘’을 이용해 이런 행동을 자제시켜야 한다. 도요타의 인기 많은 하이브리드 자동차 프리우스는 쉽게 눈에 띄는 디자인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난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는 시민이야”라는 점을 홍보해 평판을 유지시키는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전 세계 현인의 말을 살피면 ‘도덕체계의 황금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네가 네 이웃에게 바라는 존재, 너도 그런 존재가 될지어다”(그리스 철학), “네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기독교),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여기는 그런 것들을 남에게 결코 해서는 안된다”(힌두교), “누구도 너를 해하지 못하게 하려거든 누구도 해하지 말라”(이슬람교), “네가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유교) 등의 격언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수학자가 최신의 게임이론을 동원해 현대의 진화생물학을 파고들어 얻어낸 아이디어가 옛 현인의 가르침과 비슷하다는 것은 지적인 짜릿함을 전한다.

노왁은 게임이론과 진화생물학의 결합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중 독자를 의식한 듯, 자신의 학문 여정, 현대 과학의 발전을 위해 애쓴 동료들의 에피소드, 학문 세계의 별스러운 전통도 흥미롭게 전한다. 미국의 학자 조지 프라이스는 한계에 갇혀 있던 게임이론을 자연 선택에 적용하는 업적을 보인 인물이지만, 예수의 말을 직접 들었다고 주장한 순간부터 학문 대신 사회사업에 몰두했다. 알코올 중독자를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는 결국 가산을 탕진한 뒤 자살했다. 인간의 이타성, 선함이 과연 존재하는지 결국 알아내지 못한 채로 말이다. ‘공유지의 비극’ 게임을 처음으로 설계한 가렛 하딘은 애덤 스미스식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개인은 결국 공동선을 파괴할 것이라고 봤고, 생태계가 “태어나는 모든 생명을 감당할 만한 여유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안락사를 지지했던 하딘과 그의 아내는 62번째 결혼기념식을 마친 직후 자살했다.

책의 제목은 <초협력자>(Supercooperators)지만, 정작 ‘초협력자’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다. 단지 인간은 ‘직접 상호성’ ‘간접 상호성’ 등 협력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을 모두 사용하는 유일한 종이기에, ‘초협력자’라고 불릴 수 있다고 말하는 정도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은 지금까지의 분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앞으로의 염원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좋겠다.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요즘 대선 정국의 가장 뜨거운 유행어가 된 경제민주화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밝힌 <한국 경제론의 충돌>도 함께 읽어볼 만하다. 저자는 오랫동안 재벌 타파를 외쳐 온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벌 옹호론자로 찍힌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유력 경제학자인 그의 발언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박정희 체제의 유산에 대한 평가에 있어 긍정적인 장 교수 그룹이 자본과 노동의 계급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희박한 탓에 중요 경제 이슈에 혼선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장 교수와 뜻을 같이 하는 그룹이 노동 세력의 주적을 금융자본으로 겨냥하면서 신자유주의 지배 세력에서 재벌을 제외시켰다는 점을 근본문제로 지적한다.

 

 

 

 

“전통 경제학 수치로만 따져 오늘날 지구촌은 엄청난 경제성장으로 중세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부유해졌어요. 그런데 지금은 집 한 채 사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고, 부부가 1년 내내 맞벌이해야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어요. 그것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이런 경제학은 버려야 합니다. 이제 경제학은 윤리학 생물학 심리학 지구과학까지 포괄하는 거대 담론이어야 합니다.”

한국은행에서 화폐 발행 실무를 총괄하는 조군현씨가 경제학의 새 이정표를 제시하는 책을 번역해냈다. 세계적인 진보 경제학자 2인이 쓴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실체를 고발하고 새로운 경제 시스템 창안을 역설한다.

“전통 경제학자 계산에 따르면, 근대기 이전 중세 때 보통 농부 한 사람이 연평균 15주 정도 일하면 1년 동안 생활하는 데 필요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0년 동안 유례없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중세의 소작농들보다도 더 죽어라고 일해야 살 수 있다.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그는 특히 척박한 경제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전 세계 인구 중 30억명이 하루에 2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고, 가장 잘산다는 미국조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절대빈곤자가 4000만명”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세계 상위 1%의 부자들은 57%의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을 합한 것보다 많이 벌고 있으며, 이런 부의 불평등이 계속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조씨는 “애초(애덤 스미스 등의) 경제학은 소수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했다”면서 “이런 불합리한 현대 경제학은 새로운 경제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GDP(국내총생산)로 대변되는 ‘경제성장’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됐다”면서 “현대인들이 무의미한 ‘경제성장’으로 ‘삶의 질’을 맞바꾸는 것은 비효율적이며 지구 자원만 낭비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진정한 경제학이란 “우리가 갖고 있는 자원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어야 한다”면서, “이 책은 GDP를 공해, 질병, 천연자원 고갈 등의 사회·환경적 비용을 뺀 ‘참경제발전지수(GPI)’로 대체하자”고 제시한다.

 

 

도대체 왜 어떤 사람들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하는 걸까.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중대 변수가 아니라면 무엇이 성공을 결정하는 걸까. <80/20 법칙>의 저자인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 리처드 코치 등이 쓴 <낯선 사람 효과>(원제 'Superconnect')는 그 비결을 '본능적으로' 네트워크를 잘 이해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에서 찾는다.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것은 연결이 많은 것보다도 올바르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며 저자들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 '약한 연결'이라고 말한다. 미국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가 1970년대 초반에 지적한 대로, 지인들과의 '약한 연결'은 단지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각각의 밀집된 덩어리(강한 관계)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다. 약한 관계가 부족한 사람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그룹에서는 정보를 거의 얻지 못하고 오직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얻는 지엽적이고 개인적인 정보만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우리 주변에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사회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풍부한 사회적 연결을 기반으로 가치 있는 유용한 정보에 쉽고 빠르게 접근하는 그들은 '슈퍼커넥터'이며, 그들이야말로 현대사회의 '진정한 엘리트'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슈퍼커넥터는 엄청난 인맥을 가진 유명인이 아니다. 많은 사람을 알고 있어야 하지만 좋은 첫 인상으로 친근감을 주고 아무 대가 없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외향적이고 카리스마 넘치고 매력적이기보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평범한 스타일이다.

'약한 연결'을 잘 이해한다면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도 유용할 지도 모른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체로 돈을 버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인ㆍ외부인과의 약한 연결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래서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자본, 외부 기업들로 이어진 약한 연결을 공동체 속으로 풍부하게 주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저자들은 책에서 약한 연결의 유용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들을 포함해 기업을 사고 파는 사업 과정에서 성공한 사례를 잔뜩 늘어 놓는다. 그러면서 찰리 채플린이 '모던타임스'에서 그렸던 초기 산업사회와 달리 '우리에게는 자신의 의지대로 허브(연결망)를 옮기거나 또는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허브를 만들 수 있는 권리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장점이자 맹점이 바로 이 대목이다. '어떤 종류의 허브가 자신에게 잘 어울리고, 어떤 형태의 허브에 자신이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도전과 실패의 과정을 거치면서 깨달아가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외부상황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한 허브에서 다른 허브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저자들의 주장은, 그들에게는 가능했을지 모르겠으나 대단한 열정과 노력, 지혜와 의지를 갖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가능해 보이지만 실은 불가능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난해 출간 이후 미국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됐다. 저자 코리 로빈이 분석한 보수주의가 기존 학설이나 일반적 관점과 달랐기 때문이다. 홉스와 하이에크를 같은 테이블에 놓고 보수주의와 반동주의, 반혁명주의를 한 범주에 놓은 분석틀이 논쟁의 이유였다. 한 예로 18세기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주의가 2008년 미 대선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나왔던 세라 페일린의 급진 대중주의적 보수주의에 닿아 있다는 주장이 논쟁을 촉발했다. 원제는 '반동의 정신(Reactionary Mind)'. 로빈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보수주의 이념은 반동적이지만, 그 이념의 자주성이나 힘을 대수롭지 않게 본 게 아닌데도 보수주의자들이 '정신 나간 반동(Mindless Reactionary)'으로 잘못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로빈의 “보수주의자들은 예외 없이 반동과 반혁명에 투신했다”는 주장은 쟁점이 

로빈은 18세기의 버크에서 21세기의 네오콘까지 3세기에 걸친 보수주의를 개관한다. 조소나 당위론이 아니라 진지하게 반동의 속성을 지닌 보수주의의 기원과 현재를 분석한다. 보수주의는 프랑스혁명에 대응하면서 생긴 반혁명의 반동적 이념이다. 로빈이 보기엔 자유방임론자이건, 파시스트이건, 전통주의자들은 모두 반동적 충동을 가슴 속에 품고 있다. 그 충동이 그 세력들을 단합시켰다.

보수주의에 대한 일반적 관점이나 생각을 봐야 할 것 같다. 작은 정부와 자유에 대한 신념, 또는 변화에 대한 신중함, 점진적 개혁이나 덕의 정치에 대한 믿음? 로빈은 이런 것들은 단지 보수주의 부산물이며 수시로 변할 수 있는 양태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여긴다. 더 근본적인 보수주의 뜻은?

로빈은 이렇게 정의한다. "보수주의는 바로 사람들이 상급자들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 특히 사적 영역에서 자유를 얻는 것에 대한 반대다." 프랑스혁명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도 사적인 뇌관으로 격발된 것이다. 그것은 가정, 공장, 현장에서의 권리와 지위에 대한 다툼이었다. 로빈은 "해방의 진정한 주제는 사적 영역에서 권력의 향배"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버크는 프랑스혁명을 큰 위협으로 봤다. 명령과 복종의 의무 관계가 역전되는 것이 문제였다. 버크가 대중에게 절대로 양보할 수 없던 것은 "권력, 권위, 지도력을 나누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대중은 "국가를 관리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는 1919년 미국 시애틀 총파업 때 나타났다. 노동자들은 법과 질서 유지를 포함한 기초적인 공공서비스를 제공했다. 시애틀 시장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은 폭력과 무정부 상태를 억제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능력이야말로 큰 위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로빈은 프랑스혁명, 노예해방, 여성해방과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 운동 같은 투쟁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권력 배치의 변경이라고 규정한다. 보수주의는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적 도전에 대응해 자신의 원칙을 재조정"하며 반동의 원칙과 입장을 세워나갔다. 특권의 조그만 일부를 나눠주고, 대중이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점진적으로 인정했다. 가족, 공장, 현장에서 유사 귀족으로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통념과 달리 보수주의자들은 구체제에 대해서도 신랄했다. 프랑스혁명에 반대한 정치학자 메스트르도 구체제의 세 기둥인 귀족제, 교회, 군주제를 비판했다. 버크는 혁명을 경탄했다. 시민들이 마리 앙트와네트를 침실에서 끌어내 그녀와 가족을 앞세워 파리로 행진한 일이 일종의 장엄함을 성취한 것이라고 봤다. 보수주의자들은 때로 좌파의 전략, 혁명이나 개혁의 이념과 전술을 흡수했다.

이 모든 비판과 경탄, 수용은 우파를 재건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 시도는 현대에서 우익 대중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로빈은 우익 대중주의 역할을 "수많은 군중을 모아 위세를 과시하면서도, 권력이 진정 공유되거나 분배되지는 않도록 단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로빈은 이런 말도 했다. "평민인 척 하는 것은 보수주의자들의 무기고에 소장된 최고의 무기다."

책 1부에서 반동적 이념의 여러 갈래와 흐름을 살핀 로빈은 2부에서 우파의 폭력 과잉 문제를 들여다본다. 로빈은 보수주의의 폭력이 "결코 일탈적인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보수주의) 전통 그 자체의 구성요소"라고 말한다. 예컨대, 로널드 레이건은 1982년 12월 과테말라 대통령이자 민간학살로 악명이 높았던 리오스 몬트를 만난 뒤 “대단한 인격자”라고 평가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전쟁을 증오한다고 주장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폭력 때문에 슬퍼하거나 부담스러워하거나 괴로움을 겪기는커녕 그것에 의해 활력을 얻어왔다"고 로빈은 말한다. "지배가 장엄할 수 있다. 그렇지만 폭력은 더욱 장엄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좌파의 거대한 사회운동을 물리치기 위해 20세기에 등장한 현대 보수주의의 향배는 어떨까. 로빈은 하이에크의 "(자유시장의 방어는) 그것이 가장 번성할 때 정체된다"는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전망한다. "가시권 내에서 보수주의는 이미 그 목표를 달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것은 퇴장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그렇게 할지, 퇴장하는 길에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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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6 1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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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적 금융 사회>는 가계부채 1000조원, 하우스푸어 150만명 시대,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밑바닥 현실을 조명한다. 빚은 이제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 개인 정보를 장악했고, 시간과 라이프 스타일 등 모든 선택권을 가져가 버렸다. “친절하다 못해 귀찮을 정도로 빚으로 둘러싸인 삶을 예찬하던 금융회사들”이 이제는 돈을 회수하겠노라 얼굴빛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지은이들은 이를 일러 “빚의 교묘한 독재”라고 말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채무 노예 사회”다. 한때는 자유인이었던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빚을 끌어안게 되었고, 이내 노예로 전락했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겨우 회생한 금융기관들이 이제는 자신들을 살려준 국민을 대놓고 협박한다. “빚은 자기 책임”이라는 가혹한 이데올로기를 앞세우고 있지만 정작 오늘날 빚 권하는 사회의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약탈적 금융이 만든 ‘내 탓’ 의식을 먼저 벗어버려야 한다. 또한 “금융 소비자가 주인이 되는, 공적 통제를 받는 조직체”로 금융기관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채무 노예를 만드는 약탈자들과 공조자들의 책임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재테크 열풍을 일으키며 중산층을 무너뜨리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채무 인생의 대물림을 만든 것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금융’은 약탈적 대출로 서민들의 집을 빼앗았고, ‘언론’은 빚도 자산이라는 프레임을 만들며 머니 게임을 부추겼다. ‘신용카드사’는 월급날의 보람을 완전히 앗아가 버렸다. 그런가 하면 ‘정부’는 부동산 대책에서 거푸 헛발질을 하며 하우스푸어를 양산했다. 한편 서민들의 신용회복을 돕겠다며 야심차게 시작된 ‘파산·회생·워크아웃’ 제도는 여전히 진입 장벽이 높고, 제도적 허점으로 서민들의 삶을 더 옥죌 뿐이다.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니지만 “99%의 채무 해방을 위해” 나아갈 길은 멀고 험하다. 먼저 가혹한 채권 회수보다 인간적인 채무 조정 등 채무 조정 시스템을 합리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개인의 힘으로는 세상을 바꾸기 어렵기에 “99%를 위한 채무자 연대”와 같은 사회운동도 필요하다. 지은이들은 “전문가의 도움과 다른 채무자와의 연대, 이것이 당장 빚에 짓눌려 겪는 고통을 해결할 가장 중요한 실천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금융 복지 안전망, 곧 사회적 안전망을 형성하는 일이다. 2012년 대한민국 서민들의 희망은 “인간적인 금융”, 곧 힘겹게 노동해서 번 돈을 약탈해 가는 금융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는 금융 시스템”이다.

<약탈적 금융 사회>는 대한민국의 아픈 현실과 직면하게 한다. 이런 아픈 현실과 직면하여, 이제 삶의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도 알려준다. “자각하고, 분노하고, 연대하고, 그리고 당당히 외쳐야 한다”는 구호와 실천은 단지 약탈적 금융 사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삶을 규정하는 모든 실체를 향해 던져야 할 말이다.

지은이들의 마지막 말이 내내 뇌리에 남는다. “한때 자유인이었던 그 시간을 되찾아 다시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야만적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 야만의 세상을 다시 인간의 세상으로 바꿔야 한다.”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탈리아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 그는 어떻게 자기 나라도 아닌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막대한 항해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을까? 당시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하면 섬이나 육지를 발견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는 그다지 독특한 발상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수많은 탐험가 가운데 콜럼버스가 선택된 이유는 뭘까? 새 책 '역사를 움직인 프레젠테이션'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프레젠테이션 능력을 가진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당시 콜럼버스는 자기 비용은 한 푼도 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대항해를 시도했다. 항해에 필요한 자금을 모두 준비한 뒤 국가에 허가를 신청한 다른 탐험가들과 정반대였다.

자신의 원대한 꿈과 야심을 기획안으로 만들어 국왕을 상대로 프레젠테이션을 한 뒤 국가의 자금을 활용해 눈부신 성공을 이뤄낸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콜럼버스가 스페인에서 펼친 프레젠테이션을 이렇게 비유한다.

' 일본인인 내가 달에 가고 싶어 기획서를 작성한 뒤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내가 요구하는 성공 보수는 달에서 거둬지는 총 수익의 10%를 받는 것이다. 달에서 나의 지위는 부통령이자 제독. 신분은 우리 가문 대대로 세습되도록 할 것.' 이 정도로 대담한 콜럼버스의 요구가 그대로 통과된 셈이다.

지은이는 다른 경쟁자들이 단순히 모험가였던 데 반해 콜럼버스는 플래너, 즉 기획을 파는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기획력이란 개인의 꿈과 야심을 상대, 즉 클라이언트와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해 내는 능력을 말한다. 상대방에게 무엇이 이익이 되는지 공감하게 하고 납득시킬 수 있어야 비로소 팔리는 기획이 된다.'

지은이가 역사에서 한 수 배운 마음을 움직이는 10가지 프레젠테이션 비법은 다음과 같다.

상 대를 설득하고 싶다면 상대의 이익에 초점을 맞춰라. 한 문장 한 단어만 들어도 머릿속에 이미지가 선명하게 펼쳐지는 어휘를 선택하라. 우연이나 행운도 철저히 기획·연출해 상대로 하여금 행운의 여신이 당신 편이라고 믿게 만들어라. 진짜 설득은 상대가 당신과 같은 마음이 됐을 때 가능하다.

상대를 이해시키려 하기보다 유혹하라.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경쟁자의 허를 찔러라. 당신의 기획이 상대의 머릿속에 뿌리내리도록 치밀하게 사전작업 하라. 프레젠테이션 성공 후 사후관리를 결코 소홀히 하지 마라. 평소 꼼꼼하고 치밀한 메모가 프레젠테이션을 완벽하게 만든다.



이 책(원제 'Sudden Genius?')은 '천재의 법칙'을 찾아내기 위해 분투한 19세기 이후 과학자, 심리학자, 우생학자 등의 노력을 생생하게 전한다. 그런 노력은 우선 '정말 천재들은 우리와 다른 무언가가 있는가?'라는 궁금증의 발로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범인(凡人)들을 위한 위로의 구실 찾기로도 읽힌다.

'천재의 법칙'을 찾는 학자들의 분석은 크게 '본성과 양육'으로 나뉜다. 시작은 다윈의 사촌이기도 한 골턴. 그는 1869년 '유전적 천재성'이란 책을 통해 비범한 사람들은 우생학적으로 어떤 가계(家系)에 속했는지 분석했다. '타임스' 등 신문의 부고란 등을 분석한 그의 작업은 법조인과 과학계에선 일부 맞는 듯했다. 하지만 뉴턴의 부계(父系)에선 어떤 뛰어난 사람도 발견하지 못했고, 물리학자 패러데이, 화학자 존 돌턴 등은 아예 명단에서 빼버렸다. '재능은 유전된다'는 결론에 맞지 않아서다.

이런 노력은 20세기 미국의 캐서린 콕스의 '천재 300명의 유소년기 정신적 특질'(1926년) 등으로 이어진다. 천재들이 타고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화석 지능지수(fossil IQs)'까지 동원된다.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지능지수 측정이 없던 시대의 위인들의 IQ를 추산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17세 이하의 지능지수와 17~26세 사이의 지능지수를 각각 측정했더니 다빈치는 135/140, 미켈란젤로는 145/160, 모차르트는 150/155, 뉴턴은 130/170의 결과가 나왔다. 존 스튜어트 밀은 190/170으로 나이가 들면서 떨어지는 것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런 결과에 대해 스티븐 제이 굴드는 "그저 그때까지 남아있던 역사적 사실 기록만을 반영해 이뤄진 것일 뿐 그 천재들을 제대로 평가해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네틀이란 학자가 제안해 심리학계에서 통용되는 5요인 모델 역시 완벽하지는 못하다. 5요인 모델이란 외향성(개방적·열정적이면 높은 점수) 신경성(스트레스를 쉽게 받고 걱정을 잘하면 높은 점수) 의식성(조직적, 자기 통제력이 강하면 높은 점수) 동의성(신뢰와 감정이입을 잘하면 높은 점수) 개방성(창조적 상상력이 풍부하면 높은 점수)을 측정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최근 자기공명장치 등을 이용해 뇌의 활동을 분석하는 기법이 도입됐지만 여전히 '천재의 법칙'은 증명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아주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천재들은 고독을 즐겼다.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혼자 그렸고, 모차르트도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할 때는 집에 틀어박혔으며 샹폴리옹은 상형문자를 해독한 후 형에게만 소식을 알리고 실신했다. 다윈은 자연선택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아내에게도 비밀로 했다.

저자는 이런 이론들을 검증하기 위해 '천재' 10명을 선정, 그들의 '도약'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최후의 만찬'의 다빈치,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을 건축한 크리스토퍼 렌(Wren),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모차르트,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한 샹폴리옹, 진화론의 다윈, 라듐을 발견한 마리 퀴리,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 '댈러웨이 부인'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 사진집 '결정적 순간'의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인도 영화감독 사티야지트 레이 등이다.

저자가 '대표 천재'로 선정한 10명의 선정 기준에 대해선 이론이 있을 수 있다. 결론 역시 전복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천재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인류의 오랜 탐구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책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뇌 때문이야”라고만 하고 마치지 않는다. 책 사이사이에 그런 뇌를 이기는 방법도 함께 제시한다. 먼저 발전적이지 못하고 안주하는 뇌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속도를 늦추라’고 강조한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히든, 속도를 늦추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주의 깊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치밀하지 못한 뇌의 성향은 어떻게 극복하는 것이 좋을까? 행복한 뇌는 단기적인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단기 목표를 먼저 세우고, 그 목표가 결국에는 장기 목표를 이루게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유익하다. 예를 들어, 6개월 만에 13㎏을 감량하고 싶다면 1주일에 1㎏을 감량하기로 하고 그때마다 뇌에게 목표를 달성했다는 보상을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아 울러 저자는 사회신경과학자 존 카치오포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며 ‘고독을 이해할 것’을 추천한다. 뇌가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가상의 인물과 유대감을 느낄수록 현실로 돌아왔을 때 허전함을 느끼기 때문인데, 이때 자신의 감정이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인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충족감을 느낄 수 없어서인지를 이해하면, 뭔가에 중독되려 할 때 자신을 보다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으른 뇌를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 저자는 뇌의 이런 성향을 정반대로 활용하는 12가지 팁을 제시한다. 크고 장기적인 목표는 뇌가 부담스러워하니 일단 쪼갤 것, 즉각적인 피드백으로 약간의 부담을 줄 것, ‘할 수 있어’라는 무책임한 긍정 대신 ‘할 수 있니?’라고 자문할 것,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합리화하고 싶을 때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날 것 등이다. 이런 팁을 잘 활용하면 소소한 실수가 초래할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 ‘주도적이지 않고 눈치보는 뇌’를 극복하기 위해선 뇌가 받아들이기 힘든 노력을 계속하면서 ‘나는 왜 안 될까?’라고 자책하는 것보다, 뇌의 이런 성향을 반대로 활용해 ‘쉽게, 짧게, 반복’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드는 데 유리하다고 말한다. 짧고 간결하고 단박에 이해하기 쉬운 메시지가 설득력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 메시지를 아주 빨리 처리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메시지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저자는 인간의 뇌가 스마트하지 못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뇌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서 가장 발달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 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흠 없고 결점 없는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하지만 체크리스트를 곁에 두거나, 어떤 보상이 주어질 때 잠깐 멈추고 이것이 좋은 보상인지 나쁜 보상인지 생각해보거나, 옆 사람의 의견을 따라가고 싶을 때 몇 초만 생각을 멈추어보는 등의 작은 노력만 기울여도 게으른 선택이나 비겁한 포기로 나중에 후회하는 횟수는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라고 조언한다.



‘게으름’을 경계하기 위한 학습은 글을 깨치기 전부터 이뤄진다. 네댓살이면 접하게 되는 이솝우화 <개미와 베짱이>가 대표적이다. 2500년 전 그리스에서 태어난 이 유명한 우화는 게으름에는 혹독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경고한다. 추운 겨울, 눈보라를 맞으며 벌벌 떨어야 하는 베짱이의 가난이 바로 게으름의 대가다.

게으름에 관한 거의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죄와 벌’의 구조를 갖는다. 우리나라의 전래동화인 <소가 된 게으름뱅이>도 예외가 아니다. ‘게으름은 일종의 죄다. 가난이라는 형벌이 따를 것이다’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이 책은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게으름의 역사를 구어체의 문장으로 풀어놓고 있는 에세이다. 물론 이런 유의 책들이 항용 그렇듯, 이 책의 저자도 “게으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건 아니다”라고 전제한다. 다시 말해 게으름에 대해 죄의식까지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저자는 “(우화 속의) 개미는 누구인가?”라고 자문하면서,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개미들은 귀족, 자본가, 제국주의, 양반 등 힘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계급적 관점까지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어떤 이들은, 20세기 전반의 영국 철학자인 버트란트 러셀의 <게으름에 관한 찬양>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느림의 철학자’로 알려진 피에르 상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연상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저자는 선을 긋는다. 자신에게는 게으름을 찬양할 의도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게으름이 나쁘다고 부추기는 문화와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말한다. “게으름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권력과 결합하는지”를 보여주면서 “게으름을 자책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해방감을 안겨주는 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밝힌다.

게으름에 대한 죄의식은 동양보다 서양의 문화에서 한층 강력하게 유포됐다. 그 뿌리는 물론 <성경>이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낸 두번째 편지에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적었다. 그것은 서양인들에게 하나의 인식적 좌표로 자리했다. “게으름은 신의 목적을 어기는 것, 신에게 헌신하지 않는 것, 신앙이 부족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 인식이 한층 굳건해진 것은 근대에 접어들면서였다. 칼뱅은 “신은 게으른 자가 빵을 먹는 걸 저주한다”고 설파했고, 그것은 곧바로 프로테스탄트의 ‘근면 윤리’로 이어졌다.

‘근면과 성실’이 근대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증기기관이 나오기 이전의 영국에서는 적어도 근면이 지상제일의 덕목은 아니었다. 기계가 등장하면서 인간이 기계에 밀리자 근면은 더욱 강조됐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돈과 힘을 가진 부르주아들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게으름을 피운다고 불평했다. 막간의 휴식조차도 다음날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준비로 여겨졌다.”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하고 신대륙으로 건너간 유럽인들이 “절약과 근면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낭비와 게으름을 경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 벤저민 프랭클린은 게으름을 증오하면서 스스로 근면의 상징이 됐다. 그는 ‘게으름은 자물쇠의 녹’이라거나 ‘시간은 금’이라는 유명한 격언을 남겼다.

그러나 저자는 항의한다. 그는 “게으름은 상대적”이라고 강조한다. 게으름에 대한 인식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야말로 이 책이 보여주는 핵심적인 메시지다. 저자는 우리가 서구의 기독교 자본주의가 주입한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게으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서양에서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일하는 것이 의무로 여겨졌지만, 이들의 지배를 받거나 다른 역사를 지닌 아프리카나 인도 등의 지역에서는 적절한 여유가 삶을 풍족하게 한다고 여겨졌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저자는 책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부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하는 한가로운 비서구 세계의 문화”를 은근히 치켜올린다.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산업화하기 이전의 멕시코, 1960년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을 관찰한 자료 등을 사례로 제시하면서 “근면의 기풍이 서구보다 약하다 해서 열등함을 의미하는 건 결코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자면 그것은 다만 “문화의 차이”이며, 좀더 본질적으로 들여다보자면 “시간의 개념의 차이”다. 예컨대 “인도는 윤회와 환생을 믿고, 중국은 광대무변한 시간 개념”을 가졌다. 반면에 서구인들에게 시간은 째깍거리며 초단위로 직진할뿐더러,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이 차이야말로 근본적인 문화의 ‘다름’이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그리하여 저자는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운명을 스스로 이끌어나가는 길을 생각해보자”고 권한다. 다시 말해, 서구가 유포한 죄의식에서 벗어나자는 얘기다. “게으름을 폄훼하지 않고, 적절한 게으름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마치 천년을 살 것처럼 일만 하고 돈을 모으려는 각박한 사회”에서 “인간의 사회”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선택이라는 주장이다.

저자 이옥순은 인도 델리대학 대학원에서 인도사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연세대 연구교수로 일하면서 인도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230쪽의 얇은 분량이지만 담고 있는 가치는 묵직하다. 간혹 무리한 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부드러운 대화체 문장이 독자를 다감하게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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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6 1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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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너도나도 인문학이니 고전이니 말을 한다. 모두 《논어》를 말하거나 공자를 입에 올린다. 그러나 인문학도 고전도 말만 한다고 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고전을 대하는 마음가짐부터 바뀌어야 한다. 고전을 팔아 책을 내어 독자를 현혹하는 일련의 저자에게 현혹되어 실상 그들이 말하는 고전은 읽지 않고 덧붙인 해설만으로 고전을 읽지 않은 것을 위안받으려는 일반 독자가 태반이다. 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고전이 고전이라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고전은 무언가에 '유용하기'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고전은 읽지 않는 것보다 읽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고전을 읽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말한다. 하나는 그 시대의 인물과 시간에 살아볼 수 있다.

책을 읽으면 옛 사람들과도 벗이 된다. 讀書尙友
_맹자

고전을 읽는 이유는 그 시대의 거대한 시간을 살아보기 위해서다.
_강유원 《인문고전 강의》


다른 하나는 고전을 현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여 오늘날의 문제의 실마리를 찾는 데 있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 溫故知新
_공자

고 전이 고전인 까닭은 바로 끊임없는 해석의 연속에 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늘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어서 고전이 되는 것이다. 그럴 여지가 없다면, 그것은 고전이 아니라, 그저 '오래된 책'으로서 고서古書일 뿐이다. 고전의 가치는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고전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그리고 새로운 시대마다 거듭 새롭게 해석되면서 오래도록 고전의 명성을 누린다. 새롭게 해석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고전이 아니다. 죽은 자의 찌꺼기로 남을 따름이다.
_정천구 《맹자독설》

고전을 다시 읽게 되면 전보다 더 많이 자신을 발견한다.
_클리프턴 패디먼 《평생 독서 계획》

고전을 읽는 목적은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는 데 있다.
_이기동, 성균관대 교수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기 때문이다.
_신영복,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고전을 읽어야 하는 으뜸가는 이유는 우리와 멀리 떨어진 시대, 우리와 사뭇 다른 문화와 사유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_ 데이비드 덴비

고 전은 결코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고전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힘을 지닐 때에만 고전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힘은 재해석을 통해서 드러나며, 재해석은 늘 해석자의 구체적인 체험, 현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맹자》가 고전이라면 거기에 담겨 있는 힘이 재해석을 통해 용틀임을 할 것이고, 그 힘은 우리에게 필요한 통찰력을 줄 것이다.
_정천구 《맹자독설》

말 이란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자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공자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서도 텍스트를 넘어 공자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안 된다. 공자 마음을 이해하려면 공자의 말 한마디를 음미, 또 음미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공자가 아파했던 삶의 흔적을 이해해야 한다. 공자처럼 아파보기도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곰삭아 공자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공자의 말도 제대로 해석되는 법이다.
공 자의 말만 이해하는 데 주력한다면, 공자의 마음에 이르기란 어렵다. 공자의 말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더라도 공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날의 문제를 공자의 눈으로 바라볼 수도 없다. 고전을 읽는 목적은 결국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는 데 있다. 논어를 읽는 가장 중요한 목적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_이기동, 성균관대 교수


이 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고전을 왜 읽는가>에서 열네 가지로 고전을 정의한다.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일러준다. 고전을 읽어야 하지만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고전에 국한하지 않고 인문을 공부하고자 한다면 존 S. 메이저과 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독서계획》과 최효찬의 《마흔, 인문학을 만나라》를 참조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고전을 왜 읽는가에 대한 물음에 관한 해답은 이탈로 칼비노가 정답을 말해준다. 고전에서 많은 것을 얻으려 하지 말고 안 읽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만 하자. 지금 책 읽기 시작하자.


고전을 왜 읽는가? _이탈로 칼비노

1.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 를 다시 읽고 있어" 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다시 읽고 있어" 라고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동 사 '읽다' 앞에 붙은 '다시'라는 말은 유명 저작을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의 궁색한 위선이다. 그들이 안심하도록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아무리 청소년기부터 폭넓게 책을 읽어 왔다 해도 항상 읽지 못한 중요한 작품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작품을 처음 읽을 때 매우 독특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러한 즐거움에는 어린 시절 읽었을 때 느끼는 것과는 매우 다른 기쁨이 있다. 모든 경험이 그러하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읽는 책 모두에 독특한 흥미와 중요성을 부여하게 마련이다. 반면 성인이 되어 읽으면 더욱 세밀한 부분과 다양한 면모와 그 의미를 감상한다.


2. 고전이란 그것을 읽고 좋아하게 된 독자에게 소중한 경험을 선사하는 책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조건에서 즐겁게 읽을 기회를 잡은 사람만이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어 린 시절에 읽은 책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거나 전혀 떠올릴 수 없다 해도) 성인이 되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이러한 내면의 핵심은 이제 우리의 내적 메커니즘의 일부로 남아 있다. 기억 속에서 사라질지 몰라도 어린 시절의 독서 경험은 특별한 잠재력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 씨앗으로 남아있다.


3. 고전이란 특별한 영향을 미치는 책이다. 그러한 작품은 우리의 상상력 속에 잊을 수 없는 것으로 각인될 때나, 개인의 무의식이나 집단의 무의식이라는 가면을 쓴 채 기억의 지층 안에 숨어 있을 때 그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우 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에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을 재발견하는 경험을 반드시 한다. 작품은 그대로지만, 우리 자신이 작품 자체를 바꾸어 놓기도 한다. 또 작품을 다시 읽을 때마다 그 작품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따라서 '읽는다'라고 말하느냐, '다시 읽는다'라고 말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4. 고전이란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이 들게 해 주는 책이다.


5.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6. 고전이란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한 책이다.


7. 고전이란 이전에 행해졌던 해석의 그림자와 함께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며, 그것이 한 문화 혹은 여러 다른 문화에 (더 단순하게는 언어나 관습에) 남긴 과거의 흔적을 우리의 눈앞으로 다시 끌어오는 책이다.

고 전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이전에 그 책에 대해 생각했던 이미지와 비교해 보면서 새삼 놀라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작품에 대해 이차 서적이나 주석본 · 해설서 등을 가능한 피하고 원전을 직접 읽으라고 계속해서 충고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8. 고전이란 그것을 둘러싼 비평 담론이라는 구름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평의 구름은 언제나 스스로 소멸한다.

고 전이라고 해서 반드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 줄 필요는 없다. 우리는 고전에서 잘 아는 것을 (혹은 잘 안다고 믿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고전 작품이 그것을 처음으로 가르쳐 준 것이라는 사실을(혹은 그것이 작품과 모종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한다.


9. 고전이란 사람으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 창의적인 것을 발견하게 해 주는 책이다.

작품을 대할 때 아무런 불꽃도 일지 않는다면, 독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무감이나 조건 없는 경외의 관점에서 고전을 읽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직 작품이 좋아서 읽어야 한다. 학교에서 읽는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자유롭게 읽는 때에야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책을 발견할 수 있다.


10. 고전이란 고대 전통 사회의 부적처럼 우주 전체를 보여주는 모든 책에 붙이는 이름이다.


11. 고전이란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작품과 맺는 관계 안에서, 마침내는 그 작품과 대결하는 관계 안에서 우리가 자신을 규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12. 고전이란 그것 사이에 존재하는 일련의 위계 속에 속하는 작품이다. 다른 고전을 많이 읽은 사람은 고전의 계보에서 하나의 작품이 차지하는 지위를 쉽게 알아차린다.


13. 고전이란 현실을 다루는 모든 글을 배경 소음(잡음)으로 물러나게 하는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이 이 소음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4. 고전이란 배경 소음처럼 존속해서 남는 작품이며, 이는 고전과 가장 거리가 먼 현재에 대한 글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 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고전으로 채운 서가를 만드는 것뿐이다. 이 서가의 반은 읽은 책과 의미 있는 책으로, 그 나머지 반은 읽을 책과 의미 있을 책으로 채워진다. 또한, 우연한 발견과 경이를 선사할 책을 위해 빈 책장도 마련해야 한다.

고전은 무언가에 '유용하기' 때문에 읽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고전은 읽지 않는 것보다 읽는 게 낫다는 것이다.


덧_
이 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의 <왜 고전을 읽는가>를 발췌했다. 약간 어감이 이상한 부분을 수정했다. 아직도 '~책이다' 는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고전이란' 으로 시작하였기에 다른 말로 수정하기 어렵다. '고전은'으로 수정한다면 좀 더 매끄럽게 글을 마무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고전이란 그것을 읽고 좋아하게 된 독자에게 소중한 경험을 선사하는 책이다." 보다는 "고전은 그것을 읽고 좋아하게 된 독자에게 소중한 경험을 선사한다."가 반복없이 사용하므로 더 낫다. 고전이 책을 의미하는 것은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역자의 원글을 보고자 한다면 알라딘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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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저자가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소비행위를 연구하고 그 속에 숨겨져 있던 한국 소비자의 마음을 분석했다. 소비자의 진짜 속마음을 알기 위한 도구로'마음의 MRI 찍기'방법을 소개하고 이를 실제로 적용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한국인의 다양한 삶을 잘 보여준다고 판단되는 스포츠 활동과 휴대전화 소비가 연구 주제다. 또한 디지털문화와 명품소비 현상을 통해 소비자의 소비스타일, 구매심리, 그 속에 감춰진 욕망 등을 꼼꼼히 짚어준다.

심리학, 난해한 암호 같았던 대한민국 소비자의 마음을 해독하다
왜 사람들은 ‘꽝’이 될 걸 알면서도 매주 복권을 사는 걸까? 왜 ‘오늘까지만 할인’ 혹은 ‘얼마 이상 구매 시 상품권 증정’이라는 문구에 혹해서 생각지도 않았던 지출을 하는 걸까? 점심은 김밥 한 줄로 대충 해결하고 밥값보다 더 비싼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속마음은 뭘까?

『대통령과 루이비통』은 이런 질문들―사람들이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준다. 특히 ‘한국 소비자’에게 궁금한 점을 알 수 있는 책이다. 문화 및 정치?경제 상황 등이 다른데도 외국의 이론을 한국에 적용해 설명하는 기존의 마케팅 도서들과 달리 이 책의 중심에는 ‘한국인’이 있다. 저자인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 교수는 교육열, 디지털 활동, 프로 야구 붐, 명품소비 등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소비행위를 연구한 끝에 ‘야구 팬의 여섯 가지 유형’, ‘디지털 신인류’, ‘명품소비 심리코드’ 등 숨겨져 있던 한국 소비자의 마음을 수면으로 끌어냈다. 지금까지 소비자를 단순히 물건 팔 대상으로만 보고, ‘원인’도 모르면서 마케팅 전략을 짜느라 머리를 싸맸던 기업들에게 소비자의 행동 원인인 소비심리를 구분해 소비집단을 나누고 집단별로 적용할 수 있는 마케팅 방법을 제시한다.

이 책은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트렌드, 주류를 따르는 한국인의 심리 등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은 누군가―기업, 정치인, 심지어 명품을 좋아하는 여자 친구를 가진 남자까지!―와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궁금한 소비자 개인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담았다. 또한, 단순히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행위로만 인식됐던 ‘소비’에 ‘선거’와 ‘소통’ 등 다양한 행위를 포함시키며 새롭게 정의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하는 행위와 선거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 더 나아가 자신의 가치관대로 인생을 사는 것조차 모두 소비행위이라는 것이다. 『대통령과 루이비통』은 ‘소비자 인사이트’, 아니 ‘한국인 인사이트’를 발굴, 한국인의 마음을 이해하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바람직한 소비’의 길을 전망한다.


이제 ‘세계화’는 일상용어다. 한국 사회에서 그 용어는 1990년대 문민정부 시절에 ‘국제화’라는 말로 처음 등장했다가 차차 ‘세계화’로 정착한다. ‘글로벌’이라는 용어로 변형되기도 했다. 기업과 대학들이 앞장서서 그것을 유포했다. 우리는 월드컵과 올림픽 같은 스포츠 이벤트는 물론이거니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세계 곳곳의 뉴스들, 쏟아져 들어오는 여러 나라의 상품을 접하면서 세계화를 체감한다. 아울러 금융자본의 전 세계적 흐름이 만들어낸 경제위기를 몸으로 겪으면서 세계화의 실체를 목도한다. 이제 어린 학생들의 대화 속에서도, 팝스타의 노랫말에도 세계화가 등장한다.

그렇지만 정작 세계화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상황을 세계화라고 일컫는 것일까? 막상 그런 질문과 마주하면 답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의 저자인 앤드루 존스는 “이제 세계화는 광범위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왜 중요한지조차 묻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저 자는 영국 런던대학교 버크벡대학의 경제지리학 교수다. 그는 “세계화는 얼굴을 바꾼 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이며 “세계화를 둘러싼 논쟁 역시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정치인부터 시인까지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온갖 변화를 일으킨 원인으로 ‘세계화’를 내세우며 환호하거나 비난”하지만, 정작 세계화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미진하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양적으로 보자면) 그동안 질릴 만큼 많은 논의들, 과용·과대 포장됐던 이론들”이 범람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논의의 현 상태를 점검하고, 어떤 이론이 가치 있는지를 평가하는 중간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렇게 이 책의 집필 동기를 밝히면서 “세계화 이론의 폭주”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예일대 석좌교수인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체론이야말로 세계화 논의의 출발점이라고 바라본다. 물론 그것은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 관점이기도 하다. 세계체제론은 세계를 하나의 체제로 보면서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부로 나눠 권력관계와 자본주의적 양상을 분석한다. 1970년대 초반에 등장해 이후의 세계화 논의에서 커다란 줄기를 형성했으며, 세계화와 근대성의 필연적 관계를 주장한 안소니 기든스(2장)를 비롯해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세계화를 연결시킨 마누엘 카스텔(3장)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세계화가 갑자기 등장한 현상이 아니라 500년도 넘는 긴 역사”를 갖는다고 바라보는 공통점을 갖는다.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와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먼(7장)은 세계화를 “경제발전의 기회”로 본다는 점에서 세계화를 긍정하는 대표적 논객들로 손꼽힌다. 또 “세계화에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조지프 스티글리츠(8장)는 ‘대안적 세계화’의 대표적 이론가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 권위 있는 경제학자가 주장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는 양쪽에서 날아오는 돌을 피하기 어렵다. IMF를 포함한 세계기구의 이론가들은 물론이거니와,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논객들에 의해서도 “이상적이거나 정치적으로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물론 이 책의 저자도 “(스티클리츠가 보여주는) 단언(斷言)과 일반화”에 불편한 입장을 드러내기는 마찬가지다.


‘남고, 아깝고, 원하는…’ 자기 일상의 시시콜콜한 불편함과 욕구에 주목해 이를 자기만의 작은 기업으로 발전시킨 이들이 있다. 평범한 아줌마를 ‘셰프’로 만든 4000원짜리 주먹밥 프로젝트 ‘집밥’, 집에 쌓인 책을 대신 보관해주며 대여도 하는 ‘국민도서관 책꽂이’, 퇴화된 ‘작업 본능’을 깨우려는 일반인을 위해 컴퓨터 설계 프로그램과 전문 공구를 비치한 공동작업실 ‘테크숍’….

책 의 부제는 ‘인터넷과 공유경제가 만들어낸 백만 개의 작은 성공’이다. 제목처럼 일상의 작은 공간,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성공들을 소개한다. 이 주인공들은 요즘 누구나 향유하는 인터넷과 작은 정보기술(IT)의 도움으로 이전 시대에 상상할 수 없던 결과물을 내놓았다. ‘커다란 작음이란 역설이 가능한 세상이 왔다. 당신도 빨리 움직이라. 변화는 시작됐다’고 책은 말한다. 매일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포털 사이트를 대하며 단순한 ‘유저’로 살 것인가, 이를 이용해 인생을 바꾸고 좋은 사람들과 더 많은 가치를 공유할 것인가 중에서 선택하기를 직설 아닌 예증을 통해 권한다.

IT와 기업이라는 딱딱한 이야기에 얹은, 소설을 마주하듯 촘촘한 현장성과 디테일, 저자의 감성이 읽는 맛을 더한다. 본문만 치면 200쪽이 채 안되는 가벼운 분량과 명료한 디자인도 책의 미덕이다.



척박한 석호(潟湖)에 흩어진 118개의 작은 섬, 진흙벌에 참나무 말뚝을 박고 건물을 세워 이뤄진 '물의 도시' 베네치아가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창출한 부(富)에 집중한다. 실용적인 정치·경제체제, 탁월한 위기관리 시스템, 치밀한 외교술에 대한 서술이 생생해 500년 전 이야기임에도 강소국(强小國)의 생존전략 나아가 발전 모델로 삼을 만한 지혜가 있다.

요즘 재정 위기를 겪으며 신용 등급이 강등되고 있는 이탈리아와 달리 이 해상 공화국은 가능한 한 많이 모으고 적게 소비하는 방식으로 현금을 관리했다. 뱃사람도 돈만 있으면 신사가 됐다. '돈이면 다 통한다'(Money talks)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계층 구분이 없던 베네치아의 창조 신화는 무역이었고 영웅은 바로 상인들이었다. 인내와 사업 수완, 강력한 연대로 이윤을 내는 게 미덕이었다. 베네치아는 공무원의 부패, 정실 인사는 엄하게 다스렸다.

그들이 부를 일군 또 하나의 비밀은 규칙성에 있었다. 국가 소유로 매년 경매를 통해 임대된 베네치아 상선들은 14세기 초부터 정해진 항로를 시간표대로 오갔다. 항해의 연중 패턴은 계절의 주기를 따랐다. 인도 대륙에서 불어오는 몬순(계절풍)을 이용해 동방에서 북해로 상품과 금을 운송했고, 서쪽으로 가을바람이 부는 9월이 되면 인도에서 향료를 싣고 아라비아반도로 출항하는 식이었다. 배송을 예측할 수 있게 됐다. 1418년부터는 야파로 가는 순례자 시장도 장악했다. 환전과 도량형, 통역에 대한 실용적인 정보가 축적되면서 이윤은 더 커졌다.

하지만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썼듯이 '성한 자가 반드시 쇠하는 것은 역사의 순리'다. 바스쿠 다 가마가 1499년 인도에서 희망봉을 돌아 포르투갈로 오자 베네치아는 곤두박질 친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비용이 덜 들고 변덕스러운 이교도를 다룰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에 베네치아 동방 무역의 성공 모델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날개를 단 사자 깃발을 배에 달고 바다를 누볐던 베니치아 상인들의 신화는 베네치아영화제 황금사자상 트로피에 아득히 남아 있다. 출렁이는 불모의 땅에 인구도 적은 이 나라는 무역과 외교로 일어섰다. 신중하게 대사(大使)를 임명했고 교황과 이슬람 세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사료가 바탕이 된 이야기체 형식으로 서술된 이 역사서는 꼼꼼하면서 힘차다. 저자는 '현대 외교는 13세기 이 해상 제국에서 시작됐고 영국과 네덜란드가 그것을 벤치마킹했다'고 썼다. 베네치아는 하나의 거대한 회사이자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이어준 통역자였다.



문고본 분량의 책 한 권을 무려 3년에 걸쳐 읽는다. 천천히, 그리고 깊이 음미하면서, 연관된 내용을 찾아 늘상 ‘옆길로 새기’도 하면서 철저하게 독파해서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독자는 중학생들이다. 혼자가 아니라 200명이 교사 한 명의 지도 아래 국어시간에 교과서 대신 이 소설 한 권만을 3년 내내 읽어 나간다. 1950년부터 일본 고베 사립 ‘나다’학교에서 시작된 이 유례없는 실험적 글읽기의 수혜자들이 전후 일본 주류사회를 이끈 여러 분야의 리더가 됐다.

그들이 읽은 책은 작가 나카 간스케(1885~1965)가 그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준 이모에 대한 애틋한 기억을 중심으로 자신의 소년기를 그려낸 자전적 소설 <은수저>(銀の匙)다. 일본 전통색이 짙은 고전급의 읽기 쉽지 않은 소설이다. 지도교사는 1912년 생으로, 100살을 넘긴 지금도 새 학습 계획을 짜고 있는 하시모토 다케시. 그는 중·고등학교 6년 과정을 교사 한 명이 한 교과목씩 맡아 계속 가르치는 중고등 일관학교 나다에서 이 파격적인 시도를 했고 성공했다. 그냥 읽히기만 한 게 아니라 어려운 낱말 풀이, 관련 정보와 지식을 담은 학습교재를 직접 만들어 나눠주고 학생들이 조별 토론을 하며 어떤 생각이든 자유롭게 발표하고 쓰게 하면서 그들이 수업의 주인이 되게 만들었다.

나다학교 졸업생들은 1962년에 교토대학, 1968년에는 도쿄대학 입시에서 가장 많은 합격자를 내며 고등학교별 전국 최고의 성적을 냈고 그 뒤에도 줄곧 수위 자리를 지켰다. 대입 성적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는 하시모토의 ‘기적의 교실’ <은수저> 수업은 1984년 그의 은퇴 때까지 5기에 걸쳐 30여년간 이어졌다. 1000여명의 그의 제자들 중 다수가 변호사, 대학교수, 총장, 교사, 국회의원, 대기업 간부로 출세했다.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은 바로 그 제자들이 회고하는 하시모토 및 그의 수업과 그 장점들을 정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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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4 1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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