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시선 394
송경동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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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선이다. 어떤 방향 전환도 없이 곧게 뻗는다. 이 시집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곧게 뻗어 밀고 들어오는 시집은 처음인지, 오랜만인건지 모르겠다. 숨이 막히고 힘이 빠지는, 이 직설적인 시들을 겨우겨우 읽어나갔다.


 그동안 아름다운 시의 문장들을 극찬하던 날들이 떠올랐다. 내 현실은 그리 고통스럽지 않아서 아름다운 것에 자연스럽게 취해 지냈는데, 그 뒤에 이런 시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철거촌, 공장, 망루, 철 구조물에서 쓴 시들이다. 말 그대로 노동과 저항의 시들이다. 부서지고 밟히고 눈물지으면서도, 그것에 짓눌리지 않으려고 쓴 시들이다. 아마도 이것은 현실이다. 내 일상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만약 발견하더라도 금세 내 일이 아니라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외면해버릴.


이제라도

바람에 휙 날려갈 수 있는 가벼운 모자를 하나

찡긋 윙크하며 깔깔깔 웃을 수 있는 즐거운 모자를 하나

한없이 건방져 보이거나 시크해 보이는 모자를 하나

언제라도 표표히 떠날 수 있는 유목민의 모자를 하나 (65쪽, 모자를 쓰고 싶었다)


 이윤과 권력으로 법외에 내몰린 사람들을 위해 이십여 년 동안 거리에서 싸워온 시인은, 올곧은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릴 때가 있다. 파도처럼 끝없이 철썩이고 몰아치는 밤샘 취조실에서 시인은 가장 아프고 서글프다. 사적인 삶이 없다고 말하는 주변인의 말에 뭐라고 답할 기운도 없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현실로, 거리로 돌아간다. 지금 이 삶이, 짭짤하니 좋다고 한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지하층 바라실'에서 나와 죽지 않기 위해 먹었던 굵고 짭짤한 소금의 맛 ('소금과 나트륨의 차이')을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읽던 '마지막 잎새' ('마지막 잎새')를 생각한다. 그는 아직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한다.


나는 한국인이다 / 아니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 나는 송경동이다 / 아니 나는 송경동이 아니다 / 나는 피룬이며 파비며 폭이며 세론이며 / 파르빈 악타르다 / 수없이 많은 이름이며 / 수없이 많은 무지이며 아픔이며 고통이며 절망이며 / 치욕이며 구경이며 기다림이며 월담이며 / 다시 쓰러짐이며 다시 일어섬이며 / 국경을 넘어선 폭동이며 연대이며 / 투쟁이며 항쟁이다 (102쪽,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그러나 이 희망은 그가 한국인임을 자각할 때, 이따금 무너져내리곤 한다. 캄보디아와 방글라데시, 중국, 베트남 등에서 비겁한 권력을 휘두르는 한국의 거대 자본 앞에서, 그가 했던 투쟁과 항쟁, 그리고 그의 이름과 정체성에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한국인으로서 한국 땅에서 싸웠던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또 다른 땅에서 또 다른 이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이들은 누구인가. 책의 중간쯤에 배치된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라는 시에선 참아왔던 모든 감정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렇게 치닫기까지의 과정은 지금껏 내가 느껴보지 못한 것이기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11쪽, 고귀한 유산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 내릴 수 있는
생의 정거장은 의외로 많지 않다

21쪽, 시인과 죄수
부디 내가 더 많은 소환장과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의 주인이 되기를
어떤 위대한 시보다
더 넓고 큰 죄 짓기를 마다하지 않기를

60쪽, 국가, 결격사유서
그런데도 낡지 않는 것은 약속이다 /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살겠다는 약속 / 거기, 우리 모두 부조를 놓고 / 갈비탕 한그릇씩 비우고 왔다는 약속 / 언제 오느냐는 전화 어디냐는 전화 / 아이는 찾았느냐는 전화 그랬다는 전화 / 들어온다 한 지가 언제냐는 전화 / 말없이 종료 버튼을 누르는 전화

82쪽, 법외 인간들을 찬양함
희한한 세상, 모두 기를 쓰고
법 내로 들어가겠다는데
국가가 나서서 모두를 법외에서 살라 한다

150쪽, 아직은 말을 할 수 있는 나에게
말 없는 당신에게가 아니라 / 아직은 말을 할 수 있는 나에게 / 모든 생을 우리에게 주고 가버린 당신에게가 아니라 / 아직은 살날이 많은 저 아이들에게 / 우리는 무어라고 얘기해야 하나 / 샌들과 지갑을 머리맡에 놓고 / 무슨 좋은 꿈을 꾸는지 / 잊을 만하면 키득키득 웃으며 잠꼬대를 하는 / 아이 방을 몇번이나 드나들며 / 세월이 흘러도 양철북처럼 키가 자라지 않는 당신께 / 참 쓸 수 없는 시 한편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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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성 시인선 : 슬픔에게 언어를 주자 아티초크 빈티지 시선 13
나혜석.에밀리 디킨슨 외 지음, 공진호 엮고옮김 / 아티초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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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제목은 셰익스피어 『맥베스』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첫 장부터 큰 활자로 쓰여있다. "슬픔에게 언어를 주오. 말하지 않는 큰 슬픔은 무거운 가슴에게 무너지라고 속삭인다오." 세계 여성 시인들의 시를 모아놓은 이 책 속의 누구도 "슬픔에게 언어를 주오"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잘 맞아떨어지는 제목이 있을까. 슬픔에겐 언어가 특효약인 것을, 슬픔을 부르짖지 못하면 더 지독한 슬픔으로 침잠해져 가는 것을. 이들은 그렇게 슬픔을 언어로 외쳤다. 고통과 괴로움, 자유와 긍지, 때로는 사랑과 배신을 시詩로 적었다.


 또한, 그동안 '한국 시' 뒤켠에 있었던 국내 여성 시인들의 시가 많이 실려 있다는 것이 특히 눈여겨본 점이었다. 내가 한국의 시와 소설을 끊임없이 읽는 이유, 그리고 한국의 근현대 여성 시인들의 시를 보고 쉽사리 책장을 넘기지 못했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한恨 때문이다. 슬픔이 담긴 언어가 건드리는 특별한 지점이 있다. 이 책에 등장한 시인 '김명순'의 시는 유독 그러하다.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永訣)할 때

개천가에 고꾸라졌던지 들에 피 뽑았던지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다오.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그러면 서로 미워하는 우리는 영영 작별된다.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 <유언> 김명순


 '탄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의 시를 읊으면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의 삶을 알고 나면 더욱 애처롭다. 기생의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쁜 피'라는 이름이 따라다녔고, 성폭력을 당해도 그가 방종한 탓이라고 했다. 당시 놀라운 수준이었던 그의 문학보다는 사생활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함께 글을 쓰던 당대 문인들 또한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한국 문학계에서 떠밀린 그는 죽음조차도 외로웠다. 오죽하면 이렇게 외쳤을까.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으며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김명순의 시를 포함한, 『슬픔에게 언어를 주자』 속의 모든 시는 각기 다른 측면으로 가슴을 울렸고, 오래된 역사와 통념에 가려 남성들과 동등하게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시인들의 글이라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회와 통념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뒤로 밀려나 있었던 이들의 시를 모아 여성들의 연대를 희망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고 느껴졌다. 라틴 아메리카의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스트랄'이 했던, "저 여자의 내면에 있는 불은 어떤 것이기에 그녀는 그슬리지도, 연소되지도 않는 걸까?" ('예술' 130쪽) 라는 말처럼, 여성 시인들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불빛은 뜨겁고 무엇보다 환하게 (언어로) 피어오른 것 같았다. 이들 각자의 시를 더욱 찾아볼 예정이다. 누구보다도 강하게 빛났던 내면의 불씨들이, 누군가가 읽어줌으로써 다시 활활 피어오르기를 고대한다.


 

 

 

73쪽 <녹음> 백국희
소녀의 부끄러움은 오직 붉고 / 그 시절의 꿈만이 가물거린다 //
뻗어가는 찰나는 / 한 점으로 과거와 미래를 이어 . . . //
연홍의 로맨티시즘을 / 초록빛의 현실이 앗았고나


79쪽 <사포의 노래> 크리스티나 로제티
새벽에 한숨짓고, 또 한숨짓네,
찌푸린 하루가 지나갈 때.
저녁에 한숨짓고, 또
한숨짓네, 밤이 잠을 부를 때.
아, 이렇게 슬퍼하고 한숨짓느니, 나 죽어
꿈 없는 죽음의 잠을 자며 날 위해
우는 사람이 없음을 모르는 편이 훨씬 나으리.

110쪽, <‘강이 붉다‘ 곡에 맞춰> 치우 찐
우리는 버릴 것이다,
보석으로 장식된 옷과 기형의 발을.
그리고 언젠가, 하늘 아래 모든 이는
꽃밭의 꽃처럼 피어나는,
훌륭하고 고귀한 아이를 낳는,
아름답고 자유로운 여성을 볼 것이다.

147쪽, <이혼 고백장 - 청구 씨에게> 나혜석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운명이 어찌될지 모릅니다. 속 마디를 지은 운명이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철쇄이외다. 그러나 너무 비참한 운명은 왕왕 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반역케 합니다. 나는 거의 재기할 기분이 없을 만치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얽히어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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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개들의 언덕 - 들개, 유기견, 떠돌이 개... 2년간의 관찰 기록 동물권리선언 시리즈 6
류커샹 지음, 남혜선 옮김 / 책공장더불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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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도시에선 들개를 보기 힘들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들개들은 보통 교외나 산 근처, 재개발 지역과 길거리를 떠돈다. 그들이 원래부터 자연에서 오랫동안 생존하여 개체 수를 늘려간 것일까? 아니다. 아마도 일부(시골에서 풀어놓고 기르는 개들을 포함한)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의 반려견이었던 개들이 버려지고, 버려진 개들이 새끼를 낳아 늘어났을 것이다. 그나마 요즘에는 공공 유기견 보호소가 다수 생기고, 민간단체에서도 솔선수범하여 들개 혹은 유기견들을 재입양시키려 애쓰지만, 다수는 안락사 되고야 만다. 게다가 운이 좋지 않다면 개장수에게 팔려가 식용견이라는 이름으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20년 전 대만에서는 대규모 들개 포획 정책이 이루어졌다. '유기견 추격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몽둥이와 그물망 등을 동원하여 수많은 들개를 포획했다. 도시를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었을까. 춥고 배고프고 잘 곳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들개들은 힘없이 사람들에게 잡혀 나갔다. 도시에는 누군가의 반려견들만 남았다. 내가 지금 사는 이곳처럼.

 

 저자인 '류커샹'은 2년여간 타이베이에서 사는 들개들을 관찰했고, 그들이 도시 정책으로 사라지기까지의 과정을 낱낱이 기록으로 남겼다. 날 때부터 이름도 없었던 개들은 저자에 의해 '동아, 감자, 삼겹이…' 등의 이름을 얻었다. 누군가가 키우다 버린 개들도 있었다. '단백질'과 '반쪽이'는 표정과 행동 자체에서 좌절이 느껴질 정도로 처절하게 버려진 것 같았다. 저자가 관찰한 12마리의 개들은 각자 나름대로 무리를 짓고 규칙을 지키며 위험한 길거리에서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짝짓기하여 새끼들도 낳지만, 번번이 잃고 만다. 이미 닳고 닳은 길거리 생활로 가까스로 생존하는 데 익숙해졌지만, 길거리는 위험한 것 천지이기 때문이다. 최고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 사람들의 학대, 추위와 배고픔, 영양실조 등으로 인한 개들의 죽음, 그것을 목격하고 생존한 개들은 눈물을 흘린다. 때론 새끼의 피를 핥으며 슬퍼하는 어미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잠시 지은 뒤, 살아남기 위해 자리를 뜬다.


 이 책의 끝은 예상하다시피, 슬프다. 이미 사라진 개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2마리의 개 중 한 마리는 끝이 너무 처참하여 예외적으로 좋은 결말을 지어주었다는 저자의 말만 봐도, 들개들에게 처한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고 끔찍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20년도 더 된, 다른 나라의 이야기는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것이 아니다. 빠르게 개발되고 변화되는 우리나라에서 지향해야 할 점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원시시대, 그러니까 인간과 개가 아직 이렇게 밀접한 관게가 형성되지 않았을 때, 야생의 수캐가 먹이를 먹는 암캐를 지켜봤을까? 아니면 수캐가 먹이를 입에 물고 돌아가 암캐에게 주었을까? 잡화점 문 앞에서 기다린다는 사실은 이미 암캐가 안에서 뭔가 먹을 걸 얻어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음을, 게다가 그 먹이가 어떤 사람 손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이미 '문명화'된 행위이며, 도시라는 공간에 사는 시민의 행위이다. 들개는 도시의 시민이다. 사람들이 이 문제를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인간이 아닌 동물을 도시의 시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없을까?"


 개들은 도시의 시민일까? 개 뿐만 아니라 세상에 살아가는 동물을 도시의 시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얼마전 기가 막힌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등산객들이 산에 있는 도토리를 하도 주워가서 야생동물의 소중한 먹거리가 줄어들고 있단다. 먹이가 부족해진 동물들은 자연스럽게 산 아래로 내려오고, 동물을 본 사람들은 놀라서 그들을 포획할 것이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자연은 인간들만의 것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땅을 점령하고, 마음대로 바꾼 우리는 이제 동물 문제를 생각하고, 그들과 공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61쪽,

들개 중 흔히 말하는 `떠돌이 개`는 없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정한 거주지 없이 사는 그런 `떠돌이 개` 말이다. 설사 있다고 해도 대부분 어떤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는 경우이다. 그런 경우 아마도 버려진 뒤 얼마 되지 않아 살 만한 곳을 찾아다니고 있는 개일 가능성이 크다. 그게 아니면 어떻게든 집에 찾아가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또 어쩌면 환경파괴로 더는 원래 살던 곳에서 살 수 없게 된 개일 수도 있다.



76쪽,

자신의 상태를 알기라도 했던 건지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 전 흙구덩이 밖으로 나와 구덩이 옆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몸을 가로뉘었다. 유동나무 잎이 아래로 쉼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동물에게는 가족에게 폐 끼치지 않고 혼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본능이라도 있는 것일까.

100쪽,

무화과와 청어는 아마도 버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악의적으로 쫓겨난 것 같지도 않고. 심리적으로도 잘 적응하고 있는 듯 보인다. 악랄한 방식으로 버려진 개들, 이를테면 차 안에 있다가 주인에게 떠밀려 버려졌다거나 심하게 욕을 먹고 쫓겨났다거나 차 타고 멀리 가서 버려지는 바람에 기력이 다 빠질 때까지 떠나는 주인의 차를 죽어라 뒤쫓아 간 끝에 결국 버려진 개들은 심각할 정도의 좌절을 겪게 되고 자기 자신은 물론 사람에게, 심지어 앞으로의 삶 전체에 자신감을 잃게 된다. 버려진 뒤 아예 넋이 나가 버린 반쪽이와 단백질이 바로 이런 예이다.


126쪽,

들개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자. 그들은 절대 야생에서 오지 않았다. 인류가 사는 세상은 사실 그들의 세상이기도 하다. 야생의 형태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시에서 사람에게 버림받아 어쩔 수 없이 막다른 길에 이른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동물의 도시 생존권을 인정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그들을 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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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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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입학식에 참여한, 눈에 띄게 자그마한 아이는 힘도 없고 억세 보이지도 않았다. 통통한 볼살에도 불구하고 팔다리는 가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부터 흙 밟고 여기저기 노다니기보다는 집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거나, 만약 밖에 나간다 하더라도 친구들과 역할놀이를 하는 적이 많았다. 성향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뛰어다니고, 흙을 묻히며 선머슴처럼 노는 법을 몰랐다. 기본적으로 겁이 많았다. 나이가 먹고, 기적적으로 키와 몸이 커지면서 모든 것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딱 하나 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달리기'였다. 기록을 재고, 여럿이서 달리는 '체육대회'의 50미터 달리기 종목은 고역이었다. 키가 크고, 살이 붙어도, 스피드와 힘은 좋아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달렸는데, 손등에는 도장하나 찍힐 날이 없었다. 순백색의 띠를 허리에 감는 멋진 광경은 한참 앞에서 벌어졌다.

 

 이것은 부끄럽지만 나의 이야기다. 이러한 기억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리기와 관련된 책을 고르게 된 일은 놀랍고 또 놀라운 일이다. '하루키'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고르지 않았을 것이고, 여느 때와 같이 느낌에 따라 책장에서 지금의 상황에 가장 적절할 듯한, 그리고 즉흥적인 기분으로 책을 집어 들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나는 달리기를 매우 기피한다. 아, 어쩔 수 없이 달리거나, 잠깐 기분이 좋아 달리는 것, 가끔 반려견과 조깅 정도 하는 것은 제외하고 말이다. 기록을 재거나, 기록을 재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마음속에 '목표' 같은 것이 설정되는 레이스는 굳이 도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 책을 읽으니 묘한 궁금증이 든다. 끝까지 달리고 난 뒤의 "모든 걸 다 털어내 버린 듯한 상쾌함(22쪽)" 이 궁금하다. 이를 악물고 달려도 가질 수 없던 손등의 도장을, 한 번쯤 찍혀보기 위해서 매일 저녁 달리기 연습을 했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었을는지도 궁금하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만큼 책에는 풍성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달리기를 하면서 느끼는 감정, 기록과 안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마음, 몸의 성장과 마음의 변화까지, '달리기'라는 테마로 말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들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하와이, 뉴욕, 도쿄, 케임브리지, 홋카이도를 넘어, 아테네에 가서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기도 하면서, 그는 계절을 보내고 체감한다. 너무나 멋진 일이다. 걸을 때는 볼 수 없는, 걸을 때는 전혀 신경 쓰지 않던 모든 생각들이 머리속을 메울 것이다.

 

 그러나, '달리기'라는 단어 하나로 이 책을 설명해야 한다면 조금 아쉬울 수 있는데, 역자 후기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책은 "하루키 최초의, 어쩌면 최후의 (라고 썼지만 최근 출간된 책으로 이 말은 취소되었다) 회고록" 이라서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달리기라는 취미와 가장 잘 어우러질 수 있는 '음악'도 이 책에선 빠질 수 없다. 찰스 강변에서 함께 달리는 포니테일을 한 대학생들의 빛나는 모습을 보는 작가는 자신의 청춘을 회상하기도 한다.

 

 의외의,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감동이 밀려온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259쪽)"라는 묘비명을 쓰고 싶다는 작가는 한때 취미였던 '달리기'를 인생 전체로 밀어 넣는다. 그의 사회성은 '달리기'로 인해 길러졌다. 집중력과 지속력은 근육의 발달과 함께 몸에 배어 들었다."나라는 작은 존재 의의(171쪽)"는 '달리기'로 인한 통증이 되새겨주었다. 더 왈가왈부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달리기'는 '작가 하루키'라는 이름과도 같고, 실명 '무라카미 하루키'와도 같다. 그러니 진심 어린 이 책에, 달리기를 싫어하던 사람까지도 매료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36쪽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서 달리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공백 속에서도 그 순간순간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공백 같은 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진공을 포용할 만큼 강하지 않고, 또 한결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달리고 있는 나의 정신 속에 스며들어 오는 그와 같은 생각(상념)은 어디까지나 공백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이 아닌, 공백성을 축으로 해서 성립된 생각인 것이다.




122쪽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집중력과 지속력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된다. 이것은 앞서 쓴 근육의 훈련 과정과 비슷하다.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수치를 살짝 올려간다. 이것은 매일 조깅을 계속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로서의 체형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만큼의 보답은 있다.

145쪽
나의 인생에도 그런 빛나는 날들이 존재했었을까? 그렇다, 조금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때 내가 긴 포니테일을 갖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그녀들의 포니테일만큼 자랑스럽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당시의 내 다리는 지금 그녀들의 다리만큼 힘차게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리라.

171쪽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오로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이 말을 머릿속에서 만트라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글자 그대로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그리하여 자기가 감지하는 세계를 되도록 좁게 한정하려고 애쓴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겨우 3미터 앞의 지면으로, 그보다 앞은 알 수 없다. 내가 당면한 세계는 기껏해야 3미터 앞에서 끝나고 있다. 그 앞의 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늘도, 바람도, 풀도, 그 풀을 먹는 소들도, 구경꾼도, 성원도, 호수도, 소설도, 진실도, 과거도, 기억도, 나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물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3미터 앞의 지점까지 다리를 움직인다 - 그것만이 나라고 하는 인간의, 아니 아니지, 나라고 하는 기계의 작은 존재 의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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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발상에서 좋은 문장까지
이승우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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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독서에 대한 애착이 생긴다. 그러다 보면 무엇인가를 못 견디게 쓰고 싶어진다. 뚜렷한 것은 없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수다 떨듯 끄적이는 잡글이든 어딘가 배출할 곳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서평으로 그 답답함을 해소해왔다. 처음에는 한 줄 한 줄이 막막했고, 한편의 글이라는 느낌보다는 순간순간 떠올리며 쓴 메모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했다. 지금은 어떤가? '어떻게든 쓸 수는 있다'라는 생각은 하게 되었다. 결과물은 어떤가? 글쎄, 대단한 글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렇게 오랫동안 서평을 블로그에 적다 보니,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책'에 기대지 못하면, 쓰기가 힘들어졌다. '어떻게든 쓸 수는 있다'라는 생각은 갖고 있지만, 쓸 때마다 머뭇거리게 되었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오래전이었다. 이승우 작가의 책을 하나하나 고르고 읽기 시작할 무렵, 가장 먼저 보였던 책이었다. 그러나 '쓰기'에 대한 궁금증과 욕망이 더 커졌을 때로 미뤄두고 싶었다. ​'소설 쓰기'에 관련된 책이지만, 무엇인가를 '쓰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문학을 읽는 것에 대한 힌트도 얻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소설 쓰기'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소설 읽는 것을 가장 사랑하는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그보다 황홀할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볼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덤벼들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소설 쓰기는, 어떤 글을 쓰는 것보다도 집요하고 꾸준한 작업이다.

 

 그러니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라는 제목에 혹하여, 소설 작법을 배우거나 소설을 쉽게 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는 편이 좋다. 이승우 작가는 '문학청년들을 향한 시적 노트'라고 이 책을 표현했으나, '문학청년들을 향한 호된 강의'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쓰는 기술'보다는 '쓰는 정신'을 더 강조하는 강의다. 절대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기대가 모든 것을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채찍질하는, 무섭지만 (맞는 말만 하는) 강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의 멋들어진 문장보다 앞서야 하는 것은 자신이 쓰는 소설과 일치된 '삶'이다. 그리고 그 삶을 지겨울 정도로 구질구질하게 관찰하고, 치밀하게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문장을 장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정확성'이다." 소설가가 문장을 쓰는 것부터 한 권의 소설을 완성해내기까지의 과정을 꼼꼼히 따져 설명해가면서 끝엔 이렇게 묻는다. "이렇게 힘들지만, 해볼래? 그러나 신중하게, 확신 있게"

 그러나 겁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의 초반, 그는 소설 창작에 대한 '운명론'을 부정한다. 소설 쓰기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 누가 하는 것인가. "(소설을) 읽은 사람만이 쓴다. 잘 읽은 사람이 잘 쓴다." 결국은 문학을 읽는 것에서부터 소설 쓰기는 시작된다는 말이다. 소설 지망생에게 권하는 '필사'도 이런 주장의 연장선에 있다.

 

 날카롭지만 시원한 책이다. 좋아하던 이승우 작가의 신념이 더없이 존경스러워지기도 한다. 단언컨대 정말 당찬 포부를 가진 사람들만이 덤벼야 하는 것이 '소설 쓰기'다. 그 당찬 포부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 책은 특별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쓰기'에 대한 작은 의문을 가진 (아직 읽기에 머무는) 나에게는, 더 잘 읽고 세상을 좀 더 바라봐야겠다는 투지를 선사해주었다. 아직 나는 출발선 앞에서 달리기를 준비하며 준비운동을 하고 있다. 소설가의 꿈을 가지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의 정신을 본받아 찬찬히 밑그림을 쌓아 올릴 것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들, 이미지나 사상,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영혼에 다름 아닌 그것들에 실체를 부여하는 육화 肉化의 과정이다. 막연한 것, 추상적인 것, 모호한 것, 자기 자신도 아직은 무언지 확실하지 않은 것, 그런 것을 가지고 소설을 시작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써나가다 보면, 지금은 모호하고 뭔지 모르겠지만, 어떤 모양인가가 만들어지겠지, 어떻게 되겠지, 하고 기대하지 말라. 어떻게 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 편의 소설은, 그 소설이 탄생하는 순간까지의 그 작가의 삶의 총체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온다. 축적해놓은 것이 없으면 나올 것이 없다. 차면 넘치는 이치다. 일정한 기간의 소설 창작 교육이 소설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까지 축적해온 그의 삶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구질구질함이 소설 쓰기의 과정이다. 구질구질한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소설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 임동헌의 소설 ​「아이 러브 토일럿」에는 슈퍼마켓에서 산 여행용 화장지와 주유소에서 선물로 제공한 화장지의 장 수를 비교하는 인물이 나온다. 소설가는 아마 그 글을 쓰기 전에 실제로 두 화장지의 낱장을 헤아렸을 것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런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 작업이다.

구체가 소설의 핵심이다. 거듭 말하지만, 소설은 육체여야 한다. 그러니까 소설 쓰기는 전혀 고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고상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 또한 고상하지 않다. 삶이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한 것처럼 소설 쓰기 또한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하다. 손에 흙을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손에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근다. 배추를 밥상에 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흙을 손에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가야 한다. 소설은 김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배추 뽑는 손, 고춧가루 범벅이 된 손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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