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쏜살 문고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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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보물섬』 이라는 소설로 잘 알려져 있는 소설가 '스티븐슨'에겐 작가의 행복한 명성만 있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던 그는 마흔넷으로 요절하기까지 늘 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도 끈질기게 작품을 골몰하고 집필하였다. 활동적인 삶을 갈망하던 그는 많은 곳을 여행하고 뜨거운 삶을 이어나갔다. 그래서였을까. 국내 첫 번역된 그의 에세이집에선 행복과 죽음에 관한 언급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의 삶과 연결해 생각하면 책에 등장하는 행복과 죽음의 상반된 이미지의 연결고리를 파악할 수 있다.

 

'젊은이들을 위하여 Virginibus Puerisque'라는 책의 원제도, 인생의 '후배'들을 염려하고 행복의 관해 전하는 작가의 말이 왠지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것 같다. 책에는 표제작인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을 비롯하여, 다양한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진정한 행복을 찾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담겼다. 행복을 위한 삶과 죽음, 청춘과 노년, 사랑과 결혼, 여행의 맛, 아이와 함께 하는 생활 등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포함된다. 철학적 사유와 고뇌가 담긴 글은 그 길이가 아무리 짧다고 하더라도 읽기 쉽지는 않으나, 다양한 은유적 표현과 강렬하고 매력적인 스티븐슨의 문체는 소중한 글들을 깊이 음미하게 한다.

 

그가 전하는 행복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게으름'인데, (예상했을지 모르나) 이는 아무것도 안 하며 빈둥대는 개념이 아니다. 지나치게 근면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지식보다는 지혜를, 소유보단 진정 원하는 것을, 극도의 분주함보다는 여유로움을, 지배계층이 만들어낸 시스템을 벗어남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라는 이야기다.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젊은이들에게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니나 젊은이의 패기와 용기가 맞붙어 발휘되는 것을 상상하면 그리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을 보고 "그때 용기가 더 있었더라면"이라는 후회 섞인 말로 잠깐 지난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금 늦었다고 아쉬움에만 잠겨 있는 것은 작가의 바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혜와 지성을 찾고, 고정된 일상과 사회에서 벗어나 게으른 행복을 찾는 것. 이 작은 책 속에 꼭꼭 담긴 작가의 마음이 내게 전해준 용기에 고마움을 전한다.

 

"우리는 바닥에 물이 새는 배를 타고 거칠고 위험한 바다를 항해한다. 해군의 구슬픈 옛 노래에서 한 구절을 따오면, 우리는 인어의 노래를 들었고 마른 땅을 결코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늙거나 젊거나 우리 모두 마지막 유람중이다. 담배 한 대를 가진 선원이 있다면 출발하기 전에 부디 한 모금씩 돌려 피우기로 하자!" (50쪽, 심술궂은 노년과 청춘)

 

 

 

 

23쪽, 엘도라도
삶이 행복할 때 우리는 하나가 다른 하나로 끝없이 이어지는 상승 음계에서 살아간다. 앞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늘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우리는 작은 행성에서 보잘것없는 일에 빠져 살아가고 짧은 기간 너머로 영속하지 못하더라도, 별처럼 도달할 수 없는 희망을 품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희망의 시간을 늘려 가게 되어 있다. 진정한 행복은 어떻게 시작하는가의 문제이지 어떻게 끝내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의 문제이지 무엇을 소유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78쪽, 사랑과 결혼의 미로
"아, 잠시만 죽어 있을 수 있다면!" 이라는 톰 소여의 열망을 누구도 잊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그보다는 "해적질을 계속하는 한은 자신의 행동이 절도죄라는 오명을 다시 쓰지 않으리라."라는 두 해적의 결심을 기억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소년 시절의 생각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소년기는 끝났고 (글쎄, 언제 끝났을까?), 스무 살에 끝나지는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스물다섯에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서른에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아직도 그 목가적 시기의 한가운데 있을지 모른다."

145쪽, 도보 여행
우리는 너무 바쁘고, 실현해야 할 먼 장래의 계획이 너무 많고, 상상의 성에 착수하여 자갈땅 위에 견고하고 살 만한 저택을 세워야 하므로, 생각의 땅과 허영의 언덕으로 유람을 떠날 시간이 없다. 깍지를 끼고 밤새 난로 앞에 앉아 있으면 실로 시간이 달라진다. 그 시간을 보내며 아무 불만 없이 생각에 잠겨 행복할 수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의 세계가 달라진다

195쪽, 가스등을 위한 간청
이 별이 그것의 원형만큼 안정적이지 않고 그만큼 밝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 광채는 최고의 밀랍 양초만큼 우아하지 않다. 그러나 가스등은 더 가까이 있으므로 목성보다 실용적이고 유용하다. 또한 가스등이 창공에서 필요에 따라 하나씩 켜지는 별처럼 고유하게 자발적으로 빛을 발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스등을 켜는 점등원은 매일 저녁 부리나케 움직였고 즐거운 마음으로 달렸다. 이렇게 천체의 정확성을 흉내 내려는 사람의 모습은 근사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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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의 죽음 그르니에 선집 3
장 그르니에 지음, 지현 옮김 / 민음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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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데자뷰처럼 떠오른 장면은 수년 전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책에 담긴 감정도, 내가 책을 바라보는 감정도 유사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라는 2년 동안, 내게 온 변화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도 지금도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았다. 운 좋은 일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기에 언젠가 내게 찾아올 슬픔에 대한 두려움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읽고 있던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였다. 작가가 어머니를 잃고 난 뒤 일기처럼 써 내려간 글이다. 사람과 동물이라는 대상의 차이가 있지만, 형식을 포함하여 책에 담긴 마음, 슬픔이라는 감정 등 많은 것이 겹쳐있다.

 

"그녀의 죽음 이후, 그 무언가를 새롭게 "꾸미고 만들어가는 일"이 싫다. 그런데 글쓰기는 예외다. 그건 왜일까? 문학, 그것은 내게 단 하나뿐인 고결함의 영역이다. (마망이 그랬던 것처럼). (<애도일기> 235쪽)"

 

"방에서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녀석이 나를 방해했으면, 짐승들 특유의 그 거절 못 할 수법으로 산책을 하자고 보챘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녀석이 살아 있다면 이렇게 글을 쓸 필요도 없을 것이고 - 글쓰기는 삶과는 상반되는 것이므로 - 따라서 방해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글을 채워나갈 종잇장조차 내 앞에 두지 않을 테니까." (<어느 개의 죽음> 65쪽)

 

다른 책 이야기를 이리 길게 하는 것을 용서해주길 바란다. 내가 <애도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슬픔의 감정이 어떤 대상에 따라 섣불리 판단될 수 없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누구는 가족을 죽어서 슬퍼하고, 누구는 키우던 반려동물이 죽어 슬퍼한다. 대상은 중요치 않다. 소중한 존재 - 그것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더 나아가 식물이든 무엇이든 - 를 잃어버린 사람의 감정은 모두가 똑같다. 결핍을 마주한 두 작가가 소중한 존재를 애도하고, 자신의 슬픔을 어루만질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글쓰기였다.

 

 작가 '장 그르니에'는 개의 죽음을 통해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마음은 말라비틀어진 상태로 접어들고 항시 우울함이 감돌지만, 여전히 감미롭고 충만한 세상을 본다. 고통과 절망, 죽음들과 같은 어두운 단어들과, 행복한 삶과 관계된 아름다운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충돌한다. 작가 "자신 내부의 두 존재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51쪽)"이다. 결핍을 견디기 위해 그는 종이와 펜을 들어 그 모든 사유에 대하여 기록한다.
 
 죽음을 통해 비로소 삶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하던가. 작가는 오랜 세월 함께 했던 '타이오'라는 개의 행동을 추억하기도 하고, 위선적인 인간들과는 다른 동물들의 특성을 그리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 하는 자연의 위대함, 그 속의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한다. 염세적인 시선도 드러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가 글을 쓴 상황 속에서 슬픔을 부정할 수 없었을 뿐이다.

 

 죽음으로 시작된 글쓰기였기에, 텍스트를 넘은 엄청난 우울함이 독자인 나에게도 전달이 된다. 그러나 사랑으로 가득 찬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위안이 되었다. "사랑하자. 위선과 가식과 자만이 없는 사랑을 하자."라고 말하는 듯한 작가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면서 책을 덮는다. 삶을, 삶의 소중한 존재들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또는 사랑할 마음을 지닌 대상을 사랑하자. 보잘 것 없는 설득력을 이용하려 들지 말고, 우리가 보다 나은 존재라고 믿지도 말자.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놀라운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우리들을 고립시키는 커튼을 걷고 누군가 우리에게 손을 뻗는다. 서둘러 그 손을 붙잡고 입을 맞추자. 만일 그 손을 거두어들인다면 당신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까. 오직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9쪽,
두렵지 않은 수호신의 가호를 빌듯이, 밤에 잠을 청할 때면 나는 녀석을 떠올렸다. 녀석은 그 가혹함과 광대함을 두려워하던 대자연에 내가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중재자였던 것이다. 녀석을 통해서 나는 마음을 달래주는 자연의 속성들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침묵, 잠, 걱정도 후회도 없는 만족, 언제나 눈앞에 펼쳐져 세상을 감싸고 있는 햇빛, 발 아래에서 우연히 찾아낸 샘과 같은 것들 말이다. 녀석을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나는 진정으로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

58쪽,
지금도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모두 공허할 따름이다. 이를테면 나는 말라비틀어진 상태에 놓여 있다. 내게 머무르던 감정의 거대한 물결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나를 엄습했던 그 물결 속에 언제까지나 잠겨 있으리라 믿었는데……. 그 물결은 언제고 곧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 메마름을 즐기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 결핍이기 때문이다.

63쪽,
6월 1일이다. 새들이 지저귀고, 멀리 암탉이 운다.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수탉이 울기 시작한다. 세상은 더없이 충만해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실선으로 그려진 세상의 모습 너머, 점선으로 이루어진 형상들을 본다. 내가 본의 아니게 그것들에 눈길을 고정하게 되면, 그 형상들은 실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로 불어나고, 마침내 실선으로 그려진 세상의 모습은 사라지고 만다.


84쪽,
우리는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살아남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꽃들, 가축들, 우리의 부모들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생존하는 동안 육신의 여러 부분들이 우리에게서 벗어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는 것이다. 훗날 우리는 미래에 대한 꿈과 추억들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그러고서도 우리는 <산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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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이쯤에서 마치는 거로 한다
한창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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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막힐 때 청량하고 짜릿한 사이다 한 모금이면 세상 천국이 따로 없을 것 같다. 맥주, 그래. 맥주도 좋겠지만, 그보다 알싸하고 씁쓸한 소주 원샷이 어울리겠다. 그리고 당연한 듯이 바다 내음이 물씬 풍기는 곳이 좋겠다. 바다 위에서 배를 타던지, 발장구를 치던지, 저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명당에 자리 잡으면 더욱 훌륭하다. 지금은 꽃 피는 봄이지만, 이 책을 보고 난 뒤엔 일상에서 벗어난 이런 개꿈 같은 상상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가요,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언제나 그렇듯 여러 작가의 이름을 대면서 한창훈 작가의 시원한 글이 좋다고 했다. 첫 번째 이유는 뼛속까지 바닷사람인 그에게 떼놓을 수 없는 바다의 이미지 - 그에게 바다는 이미 언급하기 지겨울 정도이지만 - 가 떠오르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말 그대로 시원스러운 글을 지어내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원스러운 글은 이번 책에서 정점을 찍는다. <한겨레 21>에 연재한 글을 모아놓은 것인데 제목이 '한창훈의 산다이'다. '산다이', 생소한 일본어로 오해할 수 있지만 옛날에 'sunday'라는 말에서 유래된, 전라남도 섬 지방의 말이라고 한다.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쉽게 말해 한바탕 신나게 노는 문화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작가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술과 담배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공부는 이쯤에서 마치는 거로 한다"라고 선언했다. "이게 나라냐"라고 외치는 지금 우리들에게 그가 선물해주고 싶었던 것이 바로 '산다이'였던 모양이다. 강연이고 뭐고 귀찮은 학생들 앞에서 '문학이고 지랄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것처럼, 독자들이 한바탕 웃고 힘낼만한 이야기들을 준비하였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작가도 우울한 사회 현실을 외면할 순 없었지만, 대신 이리저리 비틀어 놀려대거나 정말 살아본 아저씨의 조언을 들려준다. (특히 하면 된다 정신으로 대강 (대강? 대! 강!)의 제왕이 된 이야기를 읽고 얼마나 통쾌하던지!)

 

"아아, 우리에겐 이렇게 멋진 아저씨도 있다" (출판사 서평 中)
아아, 정말 그렇다. 표준어 거부 운동을 제안하고,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고 말하고, 벤치에서 바다의 표정을 읽고, 비혼 선언에 대해 말하고, 잘못됐으면 덤벼들어야 된다고, 그래야 청춘이라고 말하는 이 아저씨는 얼마나 멋진가. 웃기라고 쓴 티가 팍팍 나는 글에서도 좀처럼 시원하게 웃음이 나질 않는 내가 책을 읽으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취향이 갈릴지라도 내겐 충분히 이 책이 '산다이'였다고 말할 수 있다. 흥겨운 한 판이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무당도 신부도 스님도 목사도, 심지어는 신神도 모른다. 모르는 것 가지고 벌벌 떠는 것처럼 찌질한 짓도 없다. 인생 알 수 없는 덕에 우리는 산다. 젊었을 때의 계획대로 중년 이후를 사는 사람, 나는 못 봤다. 그러니 그런 거 무시하고 친구와 어울려 어기차게 기운이나 발산하자. 그게 생명력이다. 강한 생명력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자유로운 영혼. 이거 멋지지 않은가. 위정자들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자들을 무서워한다. 그들이 무서워할 젊은 영혼이 많은 것, 그게 정상적인 국가이다. 그러니 좆도, 산다이 하면서 놀자. 놀아도 내일은 또 오더라. (20쪽)

 

 

 

54쪽, ‘대강‘의 제왕
"이제 대강 좀 해라, 대강."
그는 눈을 번쩍 떴다. 대강이라면 맞아, 큰 강! 이렇게 외치고 나서 엎드려 있는 수많은 쫄따구들에게 자기 땅의 강을 모두 새로이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물을 가까이해야 한다는 돌팔이의 조언과 도랑을 다뤄서 재미 본 기억도 한몫했지만 제왕은 이른바 ‘가오‘가 다르지 않은가. 강이야말로 자연의 본모습이며 우리는 그저 거기에 깃들여 사는 존재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무지몽매들이 들고일어났다. 그는 당연히 듣지 않았다. 거기에 22조라는, 아무리 들어도 감이 안 잡히는, 노동자 김 씨가 하루 종일 일해서 버는 8만 원 보다 어마어마하게 높은 액수의 돈을 쏟아부었다.



126쪽, 공부는 이쯤에서 마치는 거로 한다.
학생들을 만나자. 우선 사과부터 하자. 너희 친구들을 터무니없는 죽음으로부터, 너희들을 충격과 공포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못난 어른이어서 미안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바다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다. 미워해야 할 대상은 바다가 아니라 그런 사고를 내고 먼저 도망가 버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뒷수습이라고 한, 아직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피해자들을 이간질하는 것도 모자라 악랄하게 공격하고 있는, 같은 시대 같은 공간 속의 어떤 사람들이니까.



152쪽, 벤치의 나이테
그 벤치에서는 바다의 표정이 잘 보인다. 바다의 기분이 보인다고 해도 무방하다. 내가 뿜어 올린 담배 연기도 그때 부는 바람의 방향대로 흘러간다. 바다의 1년이 표정을 바꾸며 흘러가는 것을 그곳에서 확인한다. 단순히 나무 몇 개 엮어놓은 것이지만 벤치가 없었다면 무심하게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194쪽, 북서풍 붑니다. 소주 마십니다
‘북서풍 붑니다, 소주 마십니다. 파도가 하얗게 솟구칩니다, 소주 마십니다. 손발이 얼어갑니다, 소주 마십니다. 입김이 담배 연기처럼 나옵니다, 소주 마십니다‘ 뭐 이런 식이다. 마치 아직도 어선에 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바람에 들창 흔들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소주 병을 꺼낸다. 얼른 몇 잔 마셔 외롭고 추운 몸을 덜 춥고 덜 외로운 에틸알코올의 세계 속으로 보내는 것이다. 조금은 비장하고 우울한 미학이다. 그러고 나면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시간이 지나가는 소리로 들린다. 나는 혼자서 말한다. ‘지금 겨울이 지나가는 중이다.‘ 좀 진부한 표현이지만 겨울 바다는 존재에 대해 끙끙 앓는 시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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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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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겨울, 밝은 새해를 맞아 집어 든 것이 이 책이었다. 너무 무겁게 고민하는 책은 싫어, 그래도 따뜻했음 좋겠어. 이런 생각으로 그동안 읽어볼까 고심했던 책을 읽기로 했다. 댓글 시인에 관해선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인터넷 기사에 올린 시를 읽어보진 못했다. 인터넷 기사와 시詩. 그 만남이 낯설고 어색했지만, "그 쇳물 쓰지 마라"라는 한 문장이 그동안 마음에 들어왔던 시들만큼이나 잊히지 않았다.

 

 "그 쇳물 쓰지 말고 /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 정성으로 다듬어 / 정문 앞에 세워주게." (25쪽, 그 쇳물 쓰지 마라)


  용광로에 빠져 흔적 없이 사망한 20대 청년에게 남긴 시는 이랬다. 안타깝게 스러진 청년의 몸이 녹아있는 그 쇳물을 다듬고 조각상을 만들어, 엄마가 만질 수 있게라도 해주라는 시인의 탄식이었다. 단지 그것으로 허무하게 가버린 청춘의 넋을 위로할 순 없지만, 그거라도 해달라는 애통한 마음이 담겼다. 이 시를 읽고 연민 없이 단숨에 책장을 넘겨버릴 사람은 없으리라.


 표제작인 <그 쇳물 쓰지 마라>를 비롯하여, 많은 시들이 시인의 연민 어린 따뜻한 시선으로 탄생되었다. 그리고 시가 수록된 페이지 옆에는 그가 댓글을 남긴 기사가 함께 실려 있다. 어떤 시는 기사 없이 내용을 판단할 수 있으며 오히려 기사가 없이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만, 시의 자유로운 감상 가능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시집에서 기사가 주는 의미는 무척이나 크다. 수많은 기사를 읽고, 어떤 누군가가 볼 거라고 확신할 순 없어도 끊임없이 사색하고 시를 남겼던 '댓글시인 제페토'라는 시인의 존재. 그리고 삭막한 인터넷 세상에서 누구나 쉽게 시를 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경험의 선물. 특히나 가장 큰 장점은 수많은 인터넷 기사들에 가려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했던 소식들도 시인이 발견해 독자들에게 전해줬다는 것이다.


 짐작건대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 대개 슬프거나 안타까운 소식들을 담고 있을 거라 생각하여 은연중에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안타까운 죽음들, 부조리한 현실 등 어두운 이야기도 있으나, 풍경에 대한 감탄과 힘찬 희망을 담은 이야기도 많다. 특히 아무리 어두운 이야기여도 시인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을 기어코 찾아낸다는 점이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정하게 다독이고, 딛고 일어설 힘을 찾는 시인의 모습이 따뜻하다. 이는 그가 남긴 서문에서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전해오는 봄꽃 소식과, 가뭄을 끝내는 비 소식과, 축복처럼 내리는 첫눈 소식과, 황금빛 물든 억새밭 풍경과, 불편한 몸으로 힘들여 일군 소금을 이웃에게 베푼 염전의 성자와, 생명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사지로 들어간 소방관들에 관한 보도를 보면서, 앞서 느낀 혐오와 절망은 적잖이 민망한 것이 되었고, 다시 살아갈 명분과 희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5쪽, 서문 - 풍선을 위로하는 바늘의 손길처럼 모서리를 둥글게 깎는 목수의 마음처럼)

 


 

37쪽, 이름 모를 친구에게
하필 당신 나와 같은 나이냐
전깃줄에라도 매달렸어야지
없는 날개를 냈어야지
누구는 이십 층서도 살았다던데
구 미터는 살았어야지
어떻게든 살았어야지



75쪽, 여생
잠시 헤어지는 것일 뿐 / 다시 만날 것을 믿자//
붐비는 종로 거리에서 / 결혼 앞둔 카센터 청년의 콩팥으로 / 동갑내기 소녀의 심장으로 / 붙임성 좋은 할머니의 췌장으로



95쪽, 다리 위에서
한번 더 기회를 주는 일. / 강물과 / 택시와 / 둔치에 앉은 연인과 / 도시와 / 붉어지는 하늘과 / 별과 / 우주와 / 이발사를 웃게 하는 정수리의 사마귀와 / 쓸 만한 유머 감각과 /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 대단한 주량과 / 악의 없는 거짓말과 / 이제껏 보고 들은 모든 것들과 / 가슴속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앓는 꿈들이 / 사라지지 않도록 허물뿐인 날들에 / 눈 한 번 감아주는 일.

185쪽, 부두에 생각을 매며
그러니 일상은 일상대로 / 가든 말든 놓아두되 / 우리만은 / 배가 출항했던 그날의 부두를 떠나지 말고 / 도통 이해되지 않는 일들과 / 수상한 사람들에 관하여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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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어루만지다
김사인 엮음, 김정욱 사진 / 비(도서출판b)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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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직 모르고 읽는다. 하나의 시에 머무르다가 어떤 감흥이 오지 않으면 다음 시로 넘어가고, 그것을 계속 반복한다. 그러다가 좋은 시를 만난다. 좋은 시라는 느낌은 때로 한 단어에서, 한 문장에서, 문장을 나열한 행간에서 올 때도 있다. 그런 느낌을 받으면 시인이 단어 하나하나 어떤 마음을 가지고 배치했는지 상상해보기도 한다 (줄곧 이 상상은 아주 짧은 순간에 멈춰버리곤 하지만). 이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시를 어떻게 읽는지 궁금해진다. 나처럼 읽을까. 아니면 좀 더 구체적인 방법으로, 더 세밀하게 따져보며 읽을까.


 그럴 때마다 시에 관한 해석을 엿볼 수 있는 책을 들춰본다. 좋은 시에 좋은 해석까지 볼 수 있는 금상첨화지만, 이런 책들은 글쓴이의 해석에 갇혀 그 너머를 볼 수 없다는 함정도 있다. 김사인 시인의 시 해설집 『시를 어루만지다』는 이 함정이 비교적 큰 편이었다. 페이지 양면에, 왼쪽엔 시, 오른쪽엔 시인의 해설이 정직하게도 딱딱 붙어있다. 시인의 해석이 궁금하지만, 생각을 열어두기 위해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을 꾹 참아야 한다. 이런 함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끝까지 즐겁게 읽었던 것은, 첫째로 시인의 해석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그가 뽑은 시들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풀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묵화墨畵> 김종삼


 책에는 대개 현대시보다는 그 이전의 시를 담았으며, 이름만 들어도 알 듯한 시인의 시도 어느 정도 배제했음을 밝히고 있다. 시인의 입맛대로 뽑은 시라 모든 이들에게 좋을 리는 만무하지만, 이제 막 시를 알기 시작한 내게는 여태껏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생소한 시인과 시의 향연이 너무도 즐겁게 여겨졌다. 언젠가 꼭 읽어보리라 다짐했던 김종삼 시인의 시가 유독 눈에 띄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그런 시에 붙은 해설은 역시나 주옥같았다. '시를 어루만지다'라는 제목은 시에 대한 김사인 시인의 생각을 어느 정도 내보이고 있는데, 그는 책의 전반부에 '시에게 가는 길'이라는 이름으로 시를 읽는 준비를 함께 다한다.


 이것을 제대로 신기해하는 일, 그 힘의 정체를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일이 시를 만나러 가는 첫 걸음이다.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시에 대한 많은 지식들 - 시는 이런 것이다, 또는 저런 것이다 하는 온갖 정의들이며, 정형시, 자유시, 운율, 이미지 등을 동원한 시에 대한 갖가지 분류, 설명, 분석 등 - 이 실은 모두 이 불가사의한 힘에 대한 궁금증의 결과들이다. 그러니 시라는 현상에 닿고자 한다면 선무당 사람 잡는 어설픈 외국이론이나 '유식'에 기대기 전에 이 소박한 물음을 제대로 간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6쪽)


 그는 또한 '매직 아이'를 언급하면서 시 읽기는 "언어들을 2차원의 평면에서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로써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온갖 자유로운 시들이 쏟아져 나오고 시라는 장르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시대에, '시에게 가는 길'이라는 이 책의 도입부가 다소 거창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담은 시와 해설들을 끝까지 읽고 나면 알게 된다. 이 책은 시를 평하거나 어떻게 읽느냐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제목 그대로 시를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걸.


 무엇인가 놓치거나 지나쳤다고 두려워하지 말 것. 그대로 즐기되, 2차원의 평면에서만 머무르지 말 것. 책을 읽고 드는 생각이지만 이것은 단연 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문학에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7쪽,
지난 20년 동안 대체로 나는, 시 쓰기는 제 할 말을 위해 말을 잘 ‘사용하는‘ 또는 ‘부리는‘ 데 있지 않다고 말해왔다. 시공부는 말과 마음을 잘 ‘섬기는‘ 데에 있고, 이 삶과 세계를 잘 받들어 치르는 데 있다고 말해왔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과 시의 뿌리가 다르지 않으며, 시의 기술은 곧 사랑의 기술이요 삶의 기술이라고 말해왔다.
생각건대 쓰기뿐 아니라 읽기 역시 다르지 않아, 사랑이 투입되지 않으면 시는 읽힐 수 없다. 마치 전기를 투입하지 않으면 음반을 들을 수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단언하자면 시 쓰기와 똑같은 무게로 시 읽기 역시 진검승부인 것이며, 시를 읽으려는 이라면 앞에 놓인 시의 겉이 ‘진부한 서정시‘ 이건 ‘생경한 전위시‘ 이건 다만 사랑의 절실성과 삶의 생생함이란 더 깊은 준거 위에서 일이관지하고자 애쓰는 것이 마땅하다.

37쪽, <墨畵> 김종삼
‘이 하루도‘는, ‘오늘 하루도‘나 ‘오늘도‘와 같지 않다. 모래를 씹듯 꾸역꾸역 나날을 넘기는 이의 쓰디씀과 고독함이 어려 있는 발화, 그 쓰디씀에 대비되어 이어지는 ‘함께 지남‘이 더 눈물겨운 것이다.

117쪽, <참 좋은 저녁이야> 김남호
멀리서 가까이서 죽음의 소식들은 쉼 없이 들려온다. 그 소식들 앞에서의 무력감과 허망함 곁에 이 시를 놓아본다. 정색의 비장과 진지함, 또는 익숙한 탈속의 포즈와 선미가 아니라, 위악과 자조가 섞일망정 비애와 허무를 쉬 내색하지 않으려는 이런 장난기 쪽에 차라리 희망이 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149쪽, <장마통> 박구경
아마도 말들은, 결코 요란하지 않으면서 저를 세심하게, 중하게 대하는 이런 시인을 좋아할 것 같다. 제 할 말이 바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래도 말들이 지닌 표정과 빛깔과 한숨 같은 것을 우선 보고 듣고자 애쓰는, 그런 이를 말들은 더 따르지 않을까. 그런 시인들은 소박해 보이지만 예민하고 적확해서, 무엇에도 양보할 리 없는 언어에 대한 확신과 긍지로 차 있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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