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지역은 옛다리의 남쪽에 넓게 펼쳐진 장소였다. 그리고 일찌기 아름다운 물을 가득담고 있던 운하도 지금은 수문을 닫은 채 돌처럼 굳게 말라버린 진흙이 그 바닥을 두텁게 덮고 있을 뿐이였다. 이런 인기없는 공장지역을 가까이 둔 곳에 직공들을 위한 5층 건물의 공동주택이 죽 늘어서 있었다. 마치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은 것이 불가사의 할 정도의 오래된 건물이였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직공(職工)이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실제에 그들이 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은 아니였다. 그것은 이미 그저 의미없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공장은 오래전에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그 이후 직장을 잃은 상태였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는 것없이 거리에서 지급되는 약간의 식량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거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 지역도 영광의 날들의 기억을 갖고 있다. 계속되는 전쟁 시기에는 주물공장이 불야성을 이뤘고 사람들을 재촉하고 거리는 그 불빛의 물거품에 들끓고 있었다. 30개의 굴뚝이 하늘을 향해 서있고 밤낮 구별없이 머리위는 검은 연기가 계속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을음은 공동주택의 빨랫터에 서리처럼 내리고 그곳에 있는 것 모든 것을 회색으로 바꿨다. 회색바지, 회색타올, 회색속옷... 거리는 이처럼 망치소리로 가득했고 화로(火爐) 열기에 가득차있었다. 물론 어찌되었건 오래전 이야기이다. 사람들이 그림자를 잃어버렸을 때, 공장도 버려졌다. 전쟁도 사라지고 회색바지도 사라졌다. 지금에는 공장은 거의 한구석에서 조잡한 괭이나 솥을 만들뿐이였다.





공장가를 지나는 길의 양옆은 붕괴된 석벽이나 오래된 목재가 어느곳인가로 이어져있고 굴뚝은 풍화된 봉우리처럼 어둠속에 검게 높이 솟아있었다. 나와 너는 머리를 돌려 그런 침묵의 계곡을 걸었다. 그리고 마지막 운하에 이르러 난간도 없는 조그만 다리를 건너자 그곳에는 공동주택이 늘어서 있었다. 슬픈 풍경이었다. 평평한 똑같은 모양의 건물이 몸을 맞대고 한없이 이어져있었다. 건물의 사이를 둘러싼 오래된 보도블럭에는, 몇세대에 걸쳐서 사람들의 생활의 색깔이 배어있었다. 그것은 아마 보도블럭의 중심에까지 배어있겠지...



돌의 위를 걸으면서 나의 구두밑창은 소리조차도 나지않았다. 오래된 우물의 바닥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였다.





시간은 한밤으로, 모든 집은 잠들고 몇 개의 불빛이 여기저기의 창을 노란 색으로 물들어 있을 뿐이였다. 너는 공동주택의 사이의 미로같은 보도(步道)를, 나의 손을 이끌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마치 하늘의 암흑에 뒤섞여서 사람들을 노리는 거대한 새의 눈을 피하려는 것처럼...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너는 미로의 한 가운대서 갑자기 멈췄서며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누군가와 말해 보고 싶었어, 그것뿐이야. 다음에도 대화상대가 되어주지 않을래?'



라고 나는 말했다.



'예, 좋아요.'



'내일도 도서관에 갈께'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오래된 꿈과 말할수 있어요?'



'아니 아직은 잘 안돼, 알아듣기가 어렵거든'



'괜찮아요.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잘 될거예요'



낡은 보도위로, 우리들의 소리는 각자에게 다른 사람의 소리처럼 울려왔다. 마치 주위에 어둠이 우리들에 소리를 불균일하게 빨아들이기도하고 내뱉기도 하는 것같았다.





'그런데 왜 나만 오래된 꿈과 말할 수 있지?' 나는 결심하고 그렇게 물어봤다.



'나도 잘 몰라요'



'누구에게 물어보면 좋을까?'



'오래된 꿈에게' 라고 너는 말했다.



'잘 자'



'잘 자요' 그리고 너는 내가 구별할 수도 없는, 늘어선 건물의 하나에 빨려들어갔고 나는다시 홀로남겨졌다. 높은 벽에 둘러쌓인 이 거리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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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사는 직공지역이 과거에 이미 빛을 어둠속으로 잃어버린 곳이라고 한다면 거리의 남서부에 펼쳐진 관사지역는 건조한 빛속으로 끊임없이 그 빛을 잃어가는 곳이였다.



봄이 가져온 윤기를 여름의 태양이 치장시키고 겨울의 계절풍이 풍화시켜버렸던 그런 상태였다. '서편의 언덕'이라고 부르는 평온한 넓은 여백을 따라서 2층건물의 하얀 관사가 쭉 늘어서 있었다. 원래 하나의 건물에는 세가구가 살수 있도록 설계되어서 한가운데의 튀어나온 현관만이 공유부분으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안은 온통 하얀색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하얀색이였다. 서편언덕의 여백에는 여러종류의 흰색이 있었다. 덧칠해야할만큼 부자연한 백색, 태양의 빛을 받아와서 누렇게된 백색, 비바람에 모든 것을 빼앗긴 듯한 허무의 백색, 그런 여러가지 백색이 언덕을 둘러싼 자갈길 어딘가까지 이어져있었다. 관사에는 담장은 없고 벽돌로 만든 좁고 긴 화단이 있을 뿐이였다. 봄이오면 그곳에도 하얀 꽃이 필지모른다. 과거 한때는 무척 맑고 산뜻하였다라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거리였으리라. 거리에는 아이들이 뛰놀고 피아노소리가 들리고 따뜻한 저녁식사의 향기가 감돌았을 것이다.





관사는 이름에 맞게 옛날에는 공무원들이 그 곳에 살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림자를 잃어버렸을 때 살던 공무원도 그 직장을 잃었다. 서기, 세무사, 경찰관, 우편배달부....



그들은 이 거리를 떠나 남쪽지역으로 이주해 갔다.





관사의 새로운 주인은 퇴역군인들이였다. 그들의 인생은 대부분을 이미 써버렸기때문에 그 이상 잃어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었겠지? 그래서 그들은 후회없이 자신들의 그림자를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햇볕좋은 벽에 붙은 벌래의 빈 껍데기처럼 강한 계절풍이 부는 언덕의 여백에서 그 영원한 생을 보내고 있었다. 한 집에는 6인부터 9인의 노군인들이 살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눈 것도 아니다.



그들은 생활용품을 큰주머니에 담아가지고 언덕의 여백을 찾아 와서는 아무 방으로나 들어갔다. 처음 두사람이 2층에 있는 침실을 가지고 뒤이어 온 한사람이 1층의 거실을 가지고....





내가 문지기에게 지시받은 집도 그런 관사의 하나였다. '1145'라는 것이 내 집에 지정된 번호였다. 내집에는 대위와 소위가 한명씩 중사와 군소(일본군대의 계급)가 둘씩 살고 있었다. 전쟁의 준비나 전쟁의 수행이나 전쟁의 뒤처리나 혁명, 반혁명에 끌려다니는 사이에 가정을 가질 기회를 잃어버린 고독한 노인들이였다.





그런 노인들의 마음을 묶어주고 그 단조로운 생활을 규정하고 있던 것은 지금까지도 군대였다. 그림자를 갖지않은 永遠의 군대. 어쩌면 그들 노인들이 그림자를 잃어버린 생활에 가장 적격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아침일찍 눈을 뜨면 급히 아침식사를 먹고 누구에게 명령받은 적도없는 각자의 일에 메달려 있었다. 어떤이는 오래된 관사의 벽에 페인트를 칠하고 어떤이는 화단의 잡초를 뽑고 어떤이는 식량배급을 얻으러 관청(그곳도 반드시 강변에 늘어서 있는 정체불명의 건물 어딘가에 있겠지)에 갔다. 노인들은 아침의 노동을 마치면 다음은 관사의 정면의 양지에 앉아 연금을 계산하거나 옛전우를 회상했다.



내가 있게된 곳은 서쪽을 향한 2층의 방이였다. 종횡이 6보정도, 그러나 가구가 없는 생활이라서 텅빈 인상이였다. 천정이 높은 탓일지도 모른다. 벽의 여기저기는 얼룩이져 있었다. 오래된 철제침대와 조그만 책상과 의자만이 내 방에 있는 가구의 전부였다.





내 이웃에는 나이많은 대위가 살고 있었다. 우리들은 곧 친해져 하루에 몇번이나 둘이서 함께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너 같은 젊은이가 왜 이런 어둔 방에 살고있지' 라고 그는 말했다. '밖은 화창하게 맑은 날씨야'



'눈이 나쁘기때문입니다. 대위님'



이라고 나는 수백번이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밝은 빛에 약해요. 저녁 무렵이나 흐린 날외에는 밖에 나갈 수없습니다.'



'예언자의 눈인가?'



'그렇습니다.' 노인은 커피잔을 손에 든 채 방을 왔다갔다 했다. 닫혀있던 블라인드를 손가락으로 열어 그사이로 밖의 밝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햇쌀만큼 멋진 것은 세상에 없어. 그렇게 생각하지않나?'



'그렇습니다.'



'왜 예언자가 되었지? 선택한 것인가?'



'그것밖에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대위님, 그자리밖에요. 이 거리에 들어오기위해서는 그이외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빛을 읽어버린다해도?' 나는 긍정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거리에 들어오고 싶었습니다. 그것뿐이예요.' 노인은 창가의 낡은 소파에 앉아서 한숨을 쉬었다. '난 잘모르겠어. 이 거리가 너에게 있어서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러나 결국은 네가 결정할 것이지만...'



'예, 알고있습니다.'



'커피 한잔 더 마실래?'



'감사합니다.'



노인은 포트를 손에 잡고 두개의 컵에 커피를 충분히 따랐다.



'그래도 옛날엔 좋은 거리였어. 좁은 거리였지만 구석구석까지 활기가 가득했지... 그러나 거리가 그림자를 잃어버린 날부터 반수이상의 사람들이 거리를 나갔어. 거리에 남은 것은 잃을 것이 없는 인간이나, 늘 잃어버려온 인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뿐이였어'



'당신은 후회한 적 없습니까'



'이 거리에 남은 일 말인가?'



'예'



'설마' 라고 노인은 웃었다.



'이 거리에서는 누구도 후회따위 하지않아, 그 때문에 이 거리에 있는 것이지'



우리는 어둠속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그러나 나가 너의 기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야' 라고 노인은 계속 말했다.



'우리 노인은 많건적건 예언자이니까'



'예'



'너희들과는 방법이 다를 뿐이야'



'그렇군요'



'우린 시간을 잃었고 너희들은 빛을 잃었지 뒤에 생각하나 먼저 생각하나 다를 바없지'



'아무차이없지요.'



'좋아, 태양빛 없이 사물을 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 전쟁과 같아,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거야 '



'예'



'과거와 미래의 구별조차도... 시간을 주의해, 이 거리에서는 시간이란 것이 무게를 갖고 있지않아. 시간을 믿지말아. 미로의 속에서 헤메게 될 뿐이야. 특히 너처럼 완전히 그림자를 버리고 온 것이 아닌 인간은'



'모르겠군요'



'곧 알거야' 노인은 말했다. '시간은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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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무게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실로 이상한 느낌이였다.



물론 하루하루 지나고 계절은 변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자면 마음속에 투영된 상에 지나지않는다. 여러종류의 조각들로 교묘하게 조합된 조립완구처럼 시간은 흐르고 머물고 혹은 역행하는 것같았다. 그것은 노인이 말했듯이 확실히 미로(迷路)였다.





우선 시간이라는 개념을 떠나서 말이 존재할 수 없었다.



계속 말을 하기위해서는 나에게 시간이란 것이 어쨌든 필요했다.





이처럼 세월이 흘렀다.



나는 낮동안에 눈을 뜨고 오후를 노인과 보냈고 저녁이 되면 도서관에 가서 오래된 꿈에 귀를 기울였다. 도서관이 닫으면 너를 '직공'지역의 공동주택까지 바래다 주었다. 3일에 1번은 도서관에 가기전에 서쪽벽의 망루에 올라 짐승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흐린 오후에는 바깥에 나가서 짐승들에게 빵을 줄 수도 있었다.





짐승들은 언제나 배가 굶주려 있었지만 그들의 프라이드는 그래도 강했다. 공원의 벤치에서 내가 던진 빵을 그들은 몇번이나 망설이고 나서 멀리 가져가 먹었다. 나는 그들이 음식을 서로 빼앗는 광경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힘이 센 놈들은 늙은 짐승과 어린 짐승들을 위해 빵의 반정도를 남겨두는 것이 보통이였다.





겨울이 오면, 그들의 깊은 호수같은 푸른 눈은 그 슬픔의 색을 조금씩 더해갔다. 나무들은 그 잎을 지면에 떨어뜨리고 풀은 말라버리고 굶주림의 계절이 가까이 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주었다. 하얀 죽음의 계절을.....





그러던 어느날 안개처럼 가늘고, 얼음처럼 차가운 가을비 아래에서 나는 너를 안았다. 눈에서는 보이지않을 정도의 미세한 물방울이, 너의 앞머리카락을 그 넓은 이마에 부드럽게 달라붙게 하고 있었다.



너는 눈을 감았다. 너의 부드러운 입술은 나의 입술아래에서 가늘게 떨고 있었다.





비雨.





가을의 비는 우리의 주위를 언제까지라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시작이 없었다면 끝도 없었다. 달도 없고 별도 없고 밤새소리도 없었다. 강변에 늘어서있던 수양버들이 그 가는 나뭇가지의 끝에서부터 천천히 물방울을 떨구고 있을 뿐이였다.





네가 입었던 레인코트는 두텁고, 사이즈는 네몸에 두배는 됨직했다.



나는 그 위에서 너의 어깨를 안고 너의 등을 안았다. 너의 몸에서는 비의 냄새가 났다. 너의 머리카락에도 눈꺼풀에도 귀 뒤에서도 비의 냄새가 났다.



'지금까지 몇 천번이나 이 다리를 건넜어요' 라고 너는 말했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는 동안에 언제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나라는 인간이 새로운 나로 바뀌어 가지않을까 마치 칠판에 썼던 글자가 칠판지우게로 지워져가는 것처럼요.'



'착각이야...'



'예... 그것은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저 이런 느낌이 들어요. 이유따위는 몰라요'



'시험해봐'





우리들은 말없이 다리의 나머지를 걷고 반대편 보도위에 섰다.



그리고 나는 다시한번 너를 안고 다시한번 입을 마췄다.



'어떻지?'



'모르겠어요' 너는 불안한 듯한 미소를 짓고 한손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만졌다.



'몰라요'



낡은 다리는 마치 긴 복도처럼 반대편의 어둠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가을비가 그 어둠속에서 소리도 없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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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꿈을 정리하는 이외의 시간을 나는 거리의 지도를 만드는 데 소비했다.



처음은 어둠속에서 무료한 시간은 이겨내려고 시작한 작업이였지만 곧 나는 거기에 몰두하게 되었다. 최초의 작업은 거리의 윤곽을 그리는 일이였다. 우선 벽의 형태였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곤란한 작업이였다. 왜냐하면 누구하나 그정확한 형태를 알지못했기 때문이다. 옆방의 노인도, 너도, 그리고 문지기도...





어쨌든 나는 자신의 다리로 그것을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弱視라는 나의 배경에 있는 핸디캡때문에 그 작업은 가을이 끝날 때까지 걸렸다. 흐린 날과 저녁밖에 내가 나가서 걷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케치북을 한손에 들고 벽을 따라 걷는 사이에 나는 벽이 가진 힘에 점점 끌려가는 것 같았다. '이 벽은 살아있다.' 라고 느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벽은 마치 탄력있는 생물처럼 어느 때는 구불구불하고, 어느 때는 높이 솟고, 어느 때는 휴식하고 그리고 시작도 끝도 없는 바퀴속에서 거리를 삼키고 있었다.





벽의 표면은 미끈미끈했다. 건조하기 쉬운 곳에는 아랫부분에 물이 둘러쌓여 있었고 반대로 습기많은 곳에서는 유채기름을 가득채운 도랑이 패여있어 그 벽이 언제까지라도 보존되도록 만들어져있었다. 꾸미려는 장식은 어느한군데 없었지만 지형을 이용하면서, 한없이 이어진 그 곡선의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지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거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벽을 받들고 있었다. 석양이나, 달, 별, 비, 나무들 그리고 꽃, 그것들 모두가 벽을 위해 만들어진 장신구인 것처럼 벽을 채색하고 있었다. 이 벽을 앞에 하면 아마 어떤 화가라도 미칠듯이 기뻐하고 다음 순간 절망해 버리겠지... 이 거리에서는 벽을 포함한다면 어떤 공간도 예술이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이 그곳에 더하여 주는것은 무엇하나 없었다. 벽앞의 사람, 벽위의 구름, 벽아래의 풀, 풀을 먹는 짐승의 무리, 벽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동화시키고 있었다.





벽 앞의 나.



나는 걷다지쳐 벽의 아래 풀위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구름사이로 햇빛이 거리의 지붕을 오랜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신의 등으로 싸늘한 벽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훨씬 옛날에 어딘가에서 경험했던 무엇인가의 감각과 비슷한 것이였다. 그 무엇인가가 나에게는 도무지 떠오르지않았다. 벽돌의 이상할 정도의 미끈함은 다른 어떤 소재와도 감촉이 달랐다. 마치 유리처럼 단단하고 암반처럼 두터웠다. 그리고 물고기의 배처럼 차가웠다. 나는 내 자신의 등을 지구중심에까지 직접 연결해버린 것같은 기분이였다.





나는 벽아래의 오래된 풀을 몇 묶음 잡아 입에 물었다.



벽의 그림자는 순식간에 길게 늘어지고, 들판을 넘어서 숲을 덮고 공동주택의 담을 넘어서 곧,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밤의 어둠과 일체화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도대체 누가 이 벽을 이해할 수 있을까? 벽은 어떤 때는 무자비하게 그리고 어떤 때는 자비롭게 우리앞에 서있다.



그러나 누가 무자비를 이해할 수 있을까? 혹은 자비를?



형태가 있는 것에는 영원이란 없다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벽은 사람들에게 묻는다.



만약 형태가 없는 것에 영원이 있다라고 하여 도대체 누가 그것을 확인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원래 그것이 너희들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얇은 어둠이 벽을 덮었다. 뿔피리가 울었다. 짐승들의 발굽소리가 거리에 울렸다. 그리고 정적(靜寂). 이미 도서관에 가 있어야 할 시각이다. 그러나 나는 일어설 수 없었다. 벽이 나를 붙잡고 그 태고의 생각은 계속 이야기했다.



이 거리에는 네가 구하는 것은 뭐라도 있다. 그리고 동시에 무엇도 없다. 네가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구하는 것은 뭔가? 너의 입술, 평온한 마음, 오래된 빛........



잊어버리는 쪽이 좋아. 네가 이곳으로 부터 얻는 것은 절망뿐이야. 당신은 이 거리에 올 것이 아니였어. 바깥 세계에 살 인간이야. 죽으면 모든 것은 끝나지. 꿈도 고통도 무엇이라도...



죽는 것은 두렵지않다. 라고 나는 말했다. 無로 돌아가는 것도 잊혀져가는 것도 내가 두려운것은 모두가 시간이라는 위선의 옷에 분주해져가는 것이다.



말이구만... 이라고 벽은 웃었다.



네가 말하고 있는 것도 단지 말뿐이야



별이 하늘에 아로새겨졌다.



두터운 구름은 이미 어딘가로 지워져가고 차가운 바람이 별을 깜박이게 했다.





그리고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렸어. 모든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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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고열이 나를 덮쳤다. 그것은 일주일도 더 계속되었다. 열은 나의 피부를 수포로 가득하게 했고 나의 잠을 어두운 꿈으로 채웠다. 꿈의 태반이 성교의 꿈이 였다. 여러여자와 나는 성교했다. 얼굴을 아는 여자가 있었다면 전혀 본적 없는 여자도 있었다. 벽 속의 거리에서는 다양한 여자와 성교가 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몇번이라도 구토를 했다. 부드러운 유방, 뜨거운 입김, 미끈미끈한 협복(脇腹), 젖은 성기, 정액의 냄새..., 그리고 성교에 연이어 덮쳐 오는 열과 오한.





그 사이 나를 간호해 준 것은 옆방의 노인이였다. 그는 차가운 타올을 적셔주고 죽같은 따뜻한 식사를 아침과 저녁에 가져다 주었다. 비가 내리는 금요일, 내가 조금 의식을 차리기 시작하던 그 오후, 노인은 창가의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옛추억을 말했다.



'훨씬 옛날, 아직 사람들이 그림자를 가지고 전쟁을 반복하고 있었던 때 내가 젊은 중사였을 때 이야기야. 나는 그 당시 한 여인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일이 잘되지않았어. 나는 젊었지만 가난했었고, 유행에 빠져있었지. 결국 절망과 슬픔 이외 나에게는 무엇도 남지 않았어. 여자를 죽이고 내 자신도 죽는 일까지 심각하게 생각해봤어. 그때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몰랐지. 그러나 전쟁이 시작됐어 정말 잘된 일이였지. 전쟁은 조금씩 나의 마음의 상처를 지워가게 해 주었어. 그리고 석달 뒤 다리에 유탄을 맞고 후방으로 이송될 때에는 나도 다시 안정감을 얻어가고 있었지. 이송 첫날 밤, 나는 어떤 마을의 점령된 호텔에서 하루밤을 자게 됐어. 훌륭한 방이였어 넓고 기분좋은 방으로 유리벽으로 된 베란다까지 갖춰져 있었어. 내가 젊은 여자의 유령을 본것은 그 배란다에 있던 등나무의자 위에서야?'



'유령이요?'



'아...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지 모든 것을 잊게 할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어. 완벽한 美, 완벽한 젊음, 완벽한 품위. 너는 그런 것을 본적이있니?'



'아니요.'



'나는 베란다의 등나무의자 위에서 그것을 봤어' 노인은 잠시 침묵하고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정말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지.'



'유령이라고 믿지않았군요.'



'아니 그건 첫눈에 보아도 유령이였어.' 그리고 노인은 웃었다. '그 정도로 완벽한 것을 만들어 낼 만큼 나의 상상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풍부하지 않아'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아무것도 못한 채, 꼼짝할 수 없었어. 마치 무언가에 맞은 듯 나는 멍하니 그곳에 선 채,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서 한번도 눈을 땔 수 없었어. 날이 샐 때까지...닭이 한번 울고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 쯤 그녀는 휙 사라졌지 촛불을 불어끄듯이....'



노인은 다시 한번 침묵하고 잠시 창밖의 비를 보았다.



'그 여자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어. 그리고 그 뒤로 나는 어떤 여자에 대하여서도 열정이란 것을 갖지 못하게 됐지. 어떤 매력적인 여자와 잘 때도 언제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그녀의 얼굴이였어. 한 달 뒤에 귀환했던 전쟁터도 나의 광적인 기분을 맑게 해주진 못 했지.'



'그러나 어느날 나는 갑자기 알았어. 내 자신이 그녀의 얼굴의 옆 얼굴의 한쪽밖에 보지 못한 것을... 왼편 얼굴이였어 여자는 밤새 그 자세 그대로 꼼짝하지않았어. 나도 마찬가지였고....'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왼쪽 뺨을 만져 보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떻게도 그녀의 오른 쪽 옆얼굴을 보고 싶었어. 나는 무리하게 휴가를 얻었고 같은 마을로 돌아가 같은 방을 얻었지. 그녀는 정확히 전과 같은 시각에 나타났어. 같은 등나무의자, 같은 자세, 같은 옆얼굴'



오랜 동안 맑은 빗소리만이 방안을 울리고 있었다.



'그래서요?' 나는 물어보았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자에 반대편 얼굴을 봤어요.'



'봤지'라고 대령은 말했다. '보지않는 편이 좋았었어'



'무엇이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어'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었어. 無야 완벽한 無' 노인은 일어서서 커피잔을 탁자위의 접시에 두었다. '넌 이해할 수 없겠지. 완벽한 無라는 것을....'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조만간 알게 되꺼야. 결국은 그것이 시작이고 그것이 끝이니까.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언젠가 우리들이 그림자를 버리고 걷기를 멈출 때에 無는 언젠가 어디에선가 우리를 맞이하러 올테니까. 그리고 암흑 속에서 우리는 만나게 되지. 그녀의 망령처럼...'



비 雨, 두터운 모포도, 따뜻한 스프도 나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어떤 조용하고 편안한 잠도 내 마음을 안정시켜주지못했다. 얼마만큼의 여자와 성교를 한 뒤에야 저 어두운 꿈은 나의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줄것인가?





오후5시의 뿔피리가 새로운 어둠이 올 것을 알렸다. 그리고 하얀 죽음의 계절이 강철로 만든 바퀴처럼 짐승들의 머리를 계속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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