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 범우사상신서 19
콜린 윌슨 지음 / 범우사 / 199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흔히들 아웃사이더란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 단어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소위 말하는 인사이더, 즉 주류에 편입해 있는 사람이 사용하는 아웃사이더란 단어는 '주류에 편입하지 못한 자', 즉 낙오자를 뜻하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또, 자신이 처한 상황에 그냥 그렇게 적응하며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아웃사이더란 말을 사실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의 어감을 '왕따' 정도로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아웃사이더에 한 발을 딛고 서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책은 바로 그런 책이다. 이른바 자신이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저자는 이 책에서 '아웃사이더 문학'의 특질들을 나열하고, 성격을 파악하고, 원인을 분석하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웃사이더의 철학'이고, 찾고자 하는 것은 '좀 더 발전적인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그것을 위해 작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웃사이더에 관련이 있는 것은 닥치는대로 끌어온다. 과연 이 책이 찾고자 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는지의 문제는 차치해 두고서라도, 당시 24세의 나이로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던 콜린 윌슨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 마저 들게 된다. 그리고 그는 단지 '아웃사이더' 라는 공통점만으로, 자칫 산만해지기 쉬운 그 재료들을 솜씨 좋게 요리해놓고 있다. 이 책이 당시 불러일으킨 반향은 다음의 한 줄로 요약된다. '바이런경 이래, 영국 작가는 그렇게 자발적이고 범세계적인 갈채를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웃사이더란 무엇일까? 저자는 아웃사이더란 '현실을 직시한 사람'이라고 요약한다. 세상은 정말이지 부조리한 곳이고, 모두들 습관적인 타성에 젖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지만 누구라도 그것을 한 번 본 사람은 다시는 타성에 젖은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바라는 것은 '종교적'인 구원이다. 물론 그것은 어느 한 특정 종교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이전의, 모든 종교를 관통하는 원형으로서의 그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이 부조리한 세계를 온 몸으로 껴안고 이 세계와의 거룩한 합일을 원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그것을 이룰 수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실 지금의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도저히 아웃사이더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연장한 문명에 결속되어 꼼짝달싹 할 수도 없지 않는가. 우리의 사고는 인터넷의 지식검색으로 확장되고, 우리의 접촉은 메신져와 한시도 손에서 뗄 수 없는 핸드폰으로 이루어진다. 그것들은 이미 우리의 일부가 된 것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영구적인 결속을 동반한다.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 확장된 개인의 사회에 살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신의 핸드폰의 기능을 아는 만큼이라도 알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가? 본질보다 앞서는 것은 실존이라지만, 그것은 계란의 겉껍질과 알맹이 같아서 필연적으로 본질을 동반할 수밖에는 없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점점 우리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저 하늘의 별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구의 안쪽에 있는 것에 대해선 그저 추측밖에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그저 막연히 느끼고 있을 뿐이다. 아웃사이더 적인 관점에서 말한다면 우리는 퇴보했다. 결국 다른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다 아웃사이더인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된. 따라서 세상과의 올바른 소통이 금지된.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저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는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각성이다. 설령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게 아웃사이더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상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절절한 일이다. 이를테면, '슬프지만 진실'같은, 바로 그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이라니, 여름 씨는 미친 게 아닐까
한차현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국내 작가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나에게 익숙하지만은 않은 일이다. 다분히 두서없고 세련되지도 못한 취향에 더없이 얇은 귀의 떨림에 의존한 나의 독서 목록에 그것은 들어있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무슨 문화사대주의의 질낮은 스노비즘 따위의 발로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나는 '낯간지러움'을 참을 수 없었을 뿐이다. 마치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몰래카메라라도 보는 듯한 죄책감. 장기자랑 자리에 나간 아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듯한 민망함. 내가 읽은 몇안되는 작품이 나에게 전해준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작품의 수준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왜 이책을 꺼내들었는가. 오후 2시의 나른한 햇살과, 아스라이 뿜어지는 소화액의 조화- 그에 따른 필연적 결과인 졸음. 그리하여 내 눈앞에 펼쳐져 있던 몇일전부터 읽어오던(그러나 진도는 나가지 않는) 딱딱한 책의 글자를 두 눈이 더이상 퍼올리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야-. 이른바 전 우주적 의지, 라기보단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따분해서'라는 간단한 말로 표현하는, 바로 그 이유로. 그렇다. 나는 따분했고, 이 책이 마침 내 눈에 보였다. 조금쯤 어리둥절한 제목을 하고, 마치 그의 단편 중 하나에 나오는 것처럼 누군가 빌려 반납하지 않은, 도서관의 스탬프를 여기저기 달고 있는 그런 모습으로.

작가는 그 제목처럼 처음부터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하는데가 있었다. 느닷없이 '자비심을 아십니까'라고 시작하는 첫 작품('자비로운 그녀')부터, 임신한 50대 남자와 남자 파출부 이야기를 진지하게 해대는 표제작을 거쳐, '말죽거리 잔혹사'적 정서를 비치는, '승재'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에 대한 이야기('승재'), 어딘가 카프카적 냄새를 풍기는 고립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당신을 만나는 개와 늑대의 시간'), 다시 고등학교때 '미친년'이란 이름의 음악선생에 대한 쓸쓸한 추억담('슈베르트, 1986'), 키치적인 냄새를 풍기는 스피노자의 현대적 변용(?) ('에티카,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에서, 도스또예쁘스끼를 의식했음이 분명한 마지막 작품까지. ('악령', 단지 '의식'만 했다는 뜻이다. 힐끗, 하고)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은 그의 말대로 '너무나 낯익은 낯설음' 이자 동시에 '너무나 낯설은 낙임음' 이다. 일종의 추억담이라고 여겨질 고전적인 서사에 기댄 세개의 단편과, 비현실성이 전면에 깔러있는 네개의 단편이라는 책 구성만 해도 그렇다. 그는 자연스럽게 추억담을 얘기하지만 그것은 그저 추억담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생경하고, 갑작스럽게 비현실적인 환상을 보여주지만 환상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낯익다. 그리하여 그의 이야기는 나의 낯간지러움을 살짝 비껴간다.

어떤식의 추억이 필연적으로 갖을 수 밖에 없는 절절함과, 어떤식의 추억이든지 필연적으로 갖을 수 밖에 없는 그리움이 거세된 채, 마치 '굳지 않은 시멘트 바닥 위 발자국'처럼 그저 각인되었을 뿐인 그의 추억담은 가볍되 날아갈 정도로 가볍지는 않으며 동시에 무겁되 누군가를 짓누를 만큼 무겁지도 않다. 마치 언제나 있지만 신경쓰기 전까진 있는지조차 모를, 몸 어딘가의 점처럼.

반면 비현실적인 단편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필연성의 결여이다. 그는 비현실에 그 어떤 필연성을 부과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가 간직하고 있는 기억들이 그러하듯, 그저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는 그 상황에 처한다. 그리하여 그의 비현실은 현실과 맞닿게 된다. 현실의 세계가 설령, 정말로, 오직 인과율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라고 하여도 인간은 그것을 항상 파악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짧은 겨울 해가 그렇듯 나의 따분함도 사라져 버렸고, 그의 책 역시 끝나버렸다, 는 이야기. 그의 글을 딱잘라 재미있다, 재미없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힘든 일이겠으나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그의 글은 내 말랑말랑한(그리고 곧 굳어갈!) 뇌에 발자국을 하나 남겨놓았으며, 나는 얼마전 새로나왔다는 그의 다음 작품이 꽤 기대된다는 것이다. 어떤 낯간지럼도 없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소년은 종종 아버지를 죽인다. 상징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그리하여 그는 조금 더 전진한다. 그것의 방향은 정해져있지 않다. 때론 밝은 길로 때론 비극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밝은 길로든 비극으로든 어쨌든 그는 어디론가 '나아갔다'는 것이다. 마치 갑옷처럼, 혹은 감옥처럼 자신을 두르고 있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찢어내고서. 그리고 나서야 그들은 그 갑옷 밖에 있는 화살을 맨몸으로 맞거나, 그 감옥 밖의 자유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인류의 오랜 신화인 '아버지 죽이기'(혹은 '아버지'를 죽이기)에 기초한다. 그렇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아버지를 죽인다. 그것이 상징적이든, 물리적이든, 혹은 메타포로서든. 어쨌든 그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그리하여 조금 더 전진하는 것이다.

카프카는 아버지를 죽인다. 그리하여 그는 비로소 세상과 화해한다. 아직 그의 앞에 어떤 일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비로소 하나의 인격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는 아버지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자기 자신의 창자, 그 미로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카타는 아버지를 죽인다. 그리하여 그는 비로소 '보통의 나카타'가 될 수 있었다.
호시노는 아버지를 죽인다. 그리하여 그는 비로소 자신을 채우고 이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들의 앞에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은 전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카프카의 삶은 그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면 얻게될 삶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렸으며, 호시노 역시 본의 아니게 엉뚱한 일에 휘말려 삶이 바뀌게 되었다. 그는 그의 낙관과는 다르게 회사에서 거절당하고 다른 일자리도 구하지 못한 채 거리로 나앉게 될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사랑스러웠던 나카타 상, 그 착한 노인은 심지어 죽어버렸다. 하지만 누구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지난 굳은 과거와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삶은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그 외연과 관계없이, 조금쯤은 더 긍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은 여러모로 하루키 자신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토록 외면해 왔던 아버지를 죽이는 이유. (물론 그는 아버지를 싫어한다. 하지만 싫어하는 것과 죽이는 것에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거리만큼이나 커다란 거리가 있다. 우리는 종종 그들을 너무나 싫어하는 나머지 그들과 닮아버리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제까지의 '거리를 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것을 그치고 삶에의 긍정을 이야기하는 이유. 당연하지만, 그 대답은 모두 이 책 안에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애늙은이' 이기를 멈추고 (사실은 '늙은 애'가 더 맞겠지만) 조금 더 세상에 다가간 하루키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예전의 그들이라면 전혀 갖지 않았을 '의지'와 '목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다.)

사실 지금 이 시점에서 하루키에 대해서 말을 한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어쩐지 바람직한 일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한 때 나는 그를 무척 좋아했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써버렸기에 이미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단어는 그 의미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마치 너무 많은 것을 파내어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탄광처럼. 혹은 나 자신의 단순한 스노비즘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모두들 던져놓은 단어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그곳에 굳이 내가 무엇을 추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그것은 분명히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내가 이렇게 세상에 또 하나의 무의미를 추가하는 이유는, 그것이 세상의 작동방식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형도 전집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내 마음을 잡았던 시인의 싯구다. 그렇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내게 기적조차 기대할 수 없게하는 그 무엇인가로 점점 변해가고 있다. (원래 그런 것이었는데 내가 이제야 서서히 알게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래도 상관은 없다.)

한 말로, 죽어야 할 사람들은 아직도 곳곳에 살아 느긋하게 숨을 쉬고 살아가는데, 이렇게 치열하게 사유했던 한 가난한 시인은 (시인은 가난하다. 부자 시인, 이라는 것만큼 형용모순적인 표현이 어디있겠는가. 그것은 어찌보면 죄악에 가깝다. 스스로 자기모순에 자기부정을 실체화하는 작업의 일환이 아닌 이상 말이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가슴으로, 자신의 피로 쓴 시들을 한데 모아 책으로 내어 보기도 전에 허망하게 죽어버리고 만다. 서른 그 젊디 젊은 나이에. 그런데 내 어찌 기적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그 삼십 짧은 생을 단거리 주자마냥 치열하고 짧게 살다간 시인의 책을, 많지 않은 원고들을 모아만든 '전집' 이라 이름붙이기에도 조금은 민망한, 이 책을 보고 있으면 어쩔수 없이 기적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자그만 기적이다. 이런 것을 쓸수만 있다면 나 역시 서른, 아니 그 이전에 죽어도 좋다, 라고 생각들만큼이나 내 안의 무엇인가와 같이 공명하게 되는 시들의 울림. 그리하여 그 주파수가 완전히 일치해 설령 내 자신이 산산조각 난다해도, 그냥 그렇게 될때까지 듣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그런 기적 말이다. 그의 생과는 달리 마치 장거리 주자처럼 천천히, 그러나 쉼없이 그의 글들은 내 마음속을 지근지근 밟으며 끝없이 맴도는 것이다.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나 역시 나의 생을, 삶을 사랑하고 싶다. 마치 기적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녁에는 pet shop boys를 들어요. 아침에는 new order를 듣지요. 이른바 pet shop night와 new order morning이랍니다. 사실 요즘 같은 날에는 아침에 pet shop boys를 듣고, 저녁에는 new order를 들어도 상관은 없지만요. 중요한 것은, 해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하루를 마감하고, 혹은 시작하는 그것에 있으므로.

반대로 ride는 그렇질 않지요. 밝은 빛 아래에서 듣는 ride는 어딘지 모르게 죄책감마저 들게 하거든요. 여름날에 듣는 mogwai(정확하게는 'come on die young')처럼. 밝은 빛 아래서라면 나는 smiths를 듣겠어요. 언제나처럼-

기름진 것을 먹고 난 후라면 divine comedy도 좋겠지요. 입안의 느끼함을 덜어줄테니까. 적어도 입안만 신경쓰게 되지는 않을테니까. 몇끼나 굶었을 때는 pulp가 좋아요. 싸구려 인생이라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으니까.

starsailor 같은 애들을 아무리해도 좋아할 수 없는건, 언제 들어야 할지 도무지 타이밍을 잡을 수 없다는데에 있어요. 와인이라도 마셔가면서 들어야 할까? 그렇지만 그럴 때를 위해서 신은 jeff buckley를 내려주고, 또 데려갔는데?

strokes라면, 글쎄요. 12:51이 (감정적으로) 최악(고)의 시간이라고 믿고있는 왕자님들에겐 관심없어,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게 또 그렇게 쉽지는 않거든요.

깊은 잠에서 깨어 시간조차 알 수 없게 되면 coldplay가 좋겠네요. 뭐 그다지 이유는 없지만. all time cheer up을 위해서는 travis(의 1집이)나 ben folds five를 듣듯이. 그런 때에는 조금쯤 사치스러워도 좋지 않을까, 하는. 내일이면 해가 뜨지만 어쨌든 지금 나는 이런 아무것도 없는 암흑속에 있으니까. 그건 일종의 관념과도 같은 시간.

smashing pumpkins는 어떨까요? 유년을 추억하며 아직 우리에게는 소비해야 할 감정이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았다는 것을 다시한번 곰씹기에? 그렇게 해서 감정이 조금 억해진다면, depeche mode를 들어도 좋겠어요. 그래, 그렇지. 하면서.

내일 아침도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버거울 때에는, manics를 듣지요. 어쨌든 일어나야 하니까요. 어떻게해도 피할 수는 없으니까.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그리고 나는 언제나 gene을 들어요. 살아가기 위해서. 여타의 다른 밴드와 달리, 어쨌든 그냥 음악을 한다, 는 식의 그들을. 그다지 배고픈 티는 내지 않고. 그렇다고 배부른 티도 내지 않는, 꼭 필요한 만큼의 느끼함.

너무 구식인가? 어쩌겠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