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고팠던 시절을 회상하는 에세이의 한 구절을 폴 오스터는 이렇게 썼다.


“나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잡문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결국 그것 때문에 인생의 낙오자가 되었지만 거기에는 어떤 낭만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가령 나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선언하고 훌륭한 인생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에 휩쓸리지 않고 혼자 힘으로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은 욕구 같은 것. 내 입장을 고수하고 물러서지 않으면, 아니 그렇게 해야만 내 인생은 훌륭해질 터였다. 예술은 신성한 것이고 예술의 부름에 따르는 것은 예술이 요구하는 어떤 희생도 치르는 것, 목적의 순수성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뜻했다.” (<빵굽는 타자기> 62쪽) 


며칠 후면 나는 서른세 살이 되고 로또라도 당첨되지 않는 한 그때까지 잡문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 게 분명하며 결국 그것 때문에 인생의 낙오자가 되었지만 거기에는 어떤 낭만적인 생각도 없었다. 언젠가 회사를 그만두던 내게 한 상사는 “잘난 척 하지 마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잘난 척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세상에 잘난 척을 하기 위해 불행의 아가리에 제 머리를 들이미는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니 이렇게 말하는 게 낫겠다.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었다는 피터 버거의 고백을 따라 나 역시 ‘어쩌다’ 서평가가 된 것뿐이라고. 그 정도 핑계로는 납득할 수 없다면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몇몇 문장을 인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34쪽)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위의 책, 45쪽)


결국 모든 것은 ‘어쩌다’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떤 불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어쩌다, 도대체 어쩌다… 후회해도 이미 늦다. 물은 엎질러지고, 책장은 넘어간다. 페이지를 되돌릴 순 있어도 이미 읽은 것을 어쩔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진정한 폐해다. 오늘 나는 그렇게 말해야겠다. 


물론 책을 읽은 사람들이 모두 서평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지간해서는 그런 생각, 다시 말해 잡문으로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멍청한 생각을 하느라 인생의 낙오자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잘 된 일이다. 낯모르는 그이의 가계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그들과 경쟁하느라 더욱 위태로워졌을 나의 생계를 위해서라도,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질문.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는 걸까? 다시 말해, 서평가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정말 있긴 한 걸까?


2.

시인이나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 출판사나 서점, 헌책방이나 북카페에서 일하거나, 직접 운영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도. 도서관 사서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고, 학교에 남아 연구활동을 하려 하는 사람도 있다. 그밖에도 책과 관련된 수많은 직업이, 그것에 종사하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각자에게는 때론 낭만적이거나(폴 오스터적인 의미에서) 때론 현실적인(해가 갈수록 앓는 소리만 커지는 업계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일을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조금 생각해봐야겠지만) 저마다의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예술이라는 이상의 추구와 취미와 직업의 조화라는 비교적 소박한 희망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할 이유들. 나는 그들의 꿈을 존중한다. 그들이 자신의 소중한 꿈을 이루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그것이 서평가라면,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왜?


표준 답안은 이렇다 : 독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그럴 듯한 대답이다. 하지만 정보는 넘쳐난다. 인터넷 서점의 도서 정보 페이지를 보라. TV나 신문, 잡지 등 전통적인 매체의 북섹션은 물론이고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사용자가 직접 작성하는 정보들은 또 어떤가. 그러니 인정하자. 너무 많은 정보가 문제다. 사사키 아타루에 의하면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못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질 들뢰즈의 강력한 말이 있습니다.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다"라는. 하이데거도 '정보'란 '명령'이라는 의미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들 명령을 듣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정보를 모은다는 것은 명령을 모으는 일입니다. 언제나 긴장한 채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누군가의 부하에게, 또는 미디어의 익명성 아래에 감추어진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의 부하로서 희희낙락하며 영락해가는 것입니다. 멋지네요.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자신이 옳다고 믿을 수 있으니까요. 자신이 틀리지 않다고 믿을 수 있을 테니까요. (22쪽)


쏟아지는 건 정보만이 아니다. 책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상황에서 인터넷 서점 MD로 일한다는 것은 아베 코보의 세계에서 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쩌다’ 해안 사구 마을에 감금되어 밤마다 집으로 쏟아지는 모래를 퍼내는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던 운 나쁜 남자가 등장하는 <모래의 여자>의 세계. 장마철의 곰팡이처럼 책상 위의 책 더미는 무럭무럭 자라나고, 책상과 책상 사이로 높은 벽이 세워지며, 가끔씩은 (실제로) 책들에 깔리기도 한다. 아무리 필사적으로 책을 치워도, 다음 날이면 그것은 고스란히 돌아온다.


그러니 너무 많은 책 사이에서 독자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줄 길잡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그들은 서평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듯한 말이다. 이 때 서평가는 공정한 판관이 되어, 혹은 감별사가 되어 각각의 책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서평을 쓸 것인가?


사상, 비평, 학문, 지식이나 정보를 둘러싼 이런 분야에서는 두 가지의 전형적인 형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쪽을 '비평가'라고 부르고 다른 한쪽을 '전문가'라고 부릅시다. 현재 대부분의 사회과학이나 심리학적인 지식을, 그것도 위에서 강림한 것 같은 그런 지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비평가'들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 무엇에 대해서도 재치 있는 코멘트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초조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에 매달립니다. 결국은 둘 다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23쪽)


다시 말해 ‘비평가’로서의 서평가인가, ‘전문가’로서의 서평가인가? 어쩌면 서평가라는 애매한 직업군의 사람들은 두 종류의 환상 모두에 시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사회과학이나 심리학적인 지식을 배경으로 ‘모든 분야’의 책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한다. 그들이야말로 ‘책’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이 질문은 중요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서평가가 믿을 만한 서평가인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또 다른 심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서평가평가’ 정도 될까? 그리고 다시 그 ‘서평가평가’를 평가해 줄 ‘서평가평가평가’와 ‘서평가평가평가평가’가, 그리고 ‘서평가평가평가평가평가’와 또……. “잘난 척 하지 마라”는 말은 이럴 때 하는 거다. 그건 결국 “위에서 강림한 것 같은 그런 지식”에 매달린 채 쓸데없이 공정한 척, 객관적인 척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물을지 모른다. 도대체 서평가는 무엇을 써야 하는가, 혹은 서평가는 무엇을 쓸 수 있는가?


하지만 이 자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자리가 아니다(내가 답을 모른다는 사실은 비밀이다). 내겐 그보다 시급한 당면문제가 있다. 그러니 내가 던져야 하는 건 바로 이런 질문이리라 : 나는 어쩌다 서평으로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멍청한 생각을 하느라 인생의 낙오자가 되었나?


3.

돌이켜 보면 나는 다만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다. 인터넷 서점의 MD라는 직업으로부터, 당면한 업무로부터, 너무 많은 책으로부터— 눈앞에 있지만, 읽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한 그 책들로부터.


퇴직금과 약간의 저축으로 당분간 생활은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두 개의 외고를 납품하고 있긴 했지만 그것으로 가계를 충당하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설령 그것 때문에 현실적으로 곤란한 문제들이 생기더라도 <모래의 여자>의 주인공 니키 준페이를 따라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과연 도망치는 재미는 쏠쏠했다. 너무 재미있어서 미칠 것 같은 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퇴직 후 운 좋게 원고 청탁을 받는 일이 늘어났지만, 생계를 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얼마나 부족했는지 이 자리에서 늘어놓기에는 지면이 턱없이 부족할 정도다. 결국 퇴직금이 바닥났다. 회사를 그만두고 1년 6개월만의 일이었다(퇴직금이 많았던 게 아니다. 원고 수입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다만 지출을, 특히 도서구입비를 대폭 줄였을 뿐이다). 초중교 독후감 대회 심사 같은 일회성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지만, 무너지는 댐을 막는 네덜란드 소년의 작은 몸처럼 역부족이었다. 통장 잔고와 생활 아닌 생활,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재취업을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게으름을 이기지 못했다. 어지간한 충격이 아니면 게으름은 물러서지 않는 법이다.


충격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왔다. 2011년 12월 24일의 안개 낀 아침, 천안논산고속도로를 타고 있던 내게 물리적인 방식으로. 96중 추돌사고에 휘말린 것이다. 차는 완파되어 폐차장으로 보내졌고, 네 명의 탑승자는 모두 2주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꼼짝없이 연말연시를 병실에서 보내야 했다. 하지만 불평만 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보험금을 받았고, 그것은 수십 개의 원고를 납품해야 가능한 금액이었다.


보험금이 떨어질 무렵에는 출판사와 책을 계약했고, 계약금을 받았다. 첫 번째 책. 계약금이 떨어질 무렵에는 책이 출간되어 인세를 받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책을 읽고, 원고를 납품했다. 하지만 여전히 원고 수입은 적었고, 생계는 빠듯했다. 생각에 시달리는 일이 잦아졌다. 혼자 술을 마시던 어느 새벽 인터넷 서점에 등록된 <서서비행>(부제는 ‘생계독서가 금정연 매문기’였다)이라는 책의 보도자료를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살면서 적지 않은 보도자료를 읽었지만 그렇게 슬픈 보도자료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고, 나 역시 그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 실린 ‘어느 서평자의 고백’이라는 짧은 글에서 일반적인 서평가를 묘사하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영양실조 상태일 것이고, 최근에 반짝 운이 좋았다면 숙취로 힘들어 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리고 그건 바로 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찾은 병원에서는 내시경 검사를 하자고 했다. 혈액 검사도 해야 한다고 했다. 비용은 대략 30만원. 며칠 후 병원을 나서던 내 눈이 눈물로 흐려졌던 건 기계에 엉덩이를 내주었다는 굴욕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 번도 원고를 기고한 적 없는 잡지의 청탁 전화였다. 원고료는 30만원이라고 했다. 내 속을 들여다보는 대가로 내가 의사에게 지불했던 바로 그 금액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지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며칠 후 혈액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는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10만원. 그러자 이틀 후, 역시 한 번도 원고를 기고한적 없는 잡지에서 그만큼의 원고료를 주겠다는 청탁 전화가 걸려왔다(그렇게 쓴 원고는 기획회의 332호에 실렸다).


우스운 우연이었다. 나는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 재정 상황을 점검한(그건 정말 간단한 산수였다) 나는 ‘얼마’의 돈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와 내 통장에게 약간의 심리적 안정을 줄 수 있는 돈이었다. 나는 ‘얼마’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생각했으며, 생각했다. 밤이 새도록,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자 정말 그 돈이 당장 필요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친구의 전화였다. 그는 내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고, 보수로 바로 그 ‘얼마’만큼의 금액을 제시했다. 정확히 같은 금액을. 그때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씨발’이라는 감탄사는 아마 이런 뜻이었으리라 : “론다 번과 이지성이 옳았단 말인가!” 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인생을 ‘시크릿’ 가득한 ‘꿈꾸는 다락방’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나는 거절했다. 거짓말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서평이라면 쓸 수 있다. 다른 종류의 글도 물론 좋다. 그게 내가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의 제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만약 그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나는 <시크릿>류의 자기계발서 또한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일을 거절한 후에도 돈 나갈 일은 계속해서 생겼다. 병원에서는 또 다른 추가비용을 요구했고, 어머니의 생일이 돌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기획회의의 청탁을 받았다. 바로 이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물론 원고료는 병원과 어머니의 생일을 위해 내가 쓴 돈과 얼추 비슷한 금액이었다. 우스워도 너무 우스운 일이었다. 


문득, 나는 이집트를 탈출하던 히브리 노예들을 생각했다. 그들 앞에 하얗게 쏟아지던 ‘만나’를 생각했다. 창밖에는 올겨울의 첫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아직도 내겐 도망쳐야 할 거리가 남아 있는 모양이라고, 써야할 서평이, 글들이 좀 더 남은 모양이라고. 나는 비록 신자는 아니었지만 게을렀고, 내가 게으른 한 앞으로도 적지 않은 불편함을 참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하는 일이었다.


인내란 딱히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인내를 패배라고 느끼는 순간부터 진정한 패배가 시작되는 것이리라. 애당초 <희망>이란 이름도 그 정도 생각으로 붙인 것이다. (<모래의 여자> 209쪽)



* 기획회의 3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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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산책자의 독서"라는 코너의 청탁을 받고 무슨 글을 써야 하나, 생각하다 이런 글을 써버렸다. 마감 당일까지 고민하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청탁 받은 30매를 훌쩍 넘겨 80매를 쓰고 있었고, 겨우 35매로 줄일 수 있었다. 사사키 아타루와 론다 번이 이어지는 글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좀 우습긴 하다. 독서, 혹은 글쓰기(혹은 자신이 종사하는 직업으로서의 출판업)에 대해 말하는 일은 때론 부정신학을 닮았다. 아마 무엇을 생각하건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원래 연말에 쓴 글이지만(기획회의에는 '어떤 탈출'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다), 그냥 새해 다짐이라고 해두기로 한다. 어쨌거나 새해고, 다짐은 필요하니까.


실은 며칠 전 구차달 님이 선물해주신 멋진 책을 읽고 이곳에 옮길 생각이 없었던 이 글을 옮기게 되었다. 그 책은 나를 부끄럽게 했지만, 결국 그 부끄러움 또한 내가 온전히 안아야 할 것이었다. 그건 이런 책이었고, 기회가 된다면 이 책에 대해서도 쓰게 된다면 좋겠다. 그저 생각일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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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2013-01-07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고 오빠 이 글 너무 좋네요. 새해 복 한 번 더 받으시고 아픈 일 없이 몸 튼튼한 한 해 꾸리시길 바랍니다.

poptrash 2013-01-07 12:16   좋아요 0 | URL
아이고 고맙습니다. 받은 인사 고스란히 돌려드리고 덧붙여 블로그 업데이트를 자주 하는 한 해 꾸려주세요!

Arch 2013-01-07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의 결론은 어떻게 될까. 아마 저 같으면 집착, 우울, 자학의 삼단계를 지나서 별나라로 떠나는 결론을 내렸을 거에요. 팝님, 서서기행은 제가 읽어본 서평서 중에서 최고였어요. 이 말을 꼭 했어야 했는데 이제 해요.

poptrash 2013-01-07 12:18   좋아요 0 | URL
아치 님, 아직 이 글의 결론은 나지 않은 것 같아요. 쉽게 내릴 수도 없고 살다 보면 알게 되겠죠. 그리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서서기행...이 아니고 비행... 물론 기행도 어울리긴 하지만... 그래도...)

Arch 2013-01-07 13:26   좋아요 0 | URL
아, 저기 위에 책제목까지 다시 확인하고 썼는데... 미안해요. 서서비행~ 기행은 왜 튀어나온건지 모르겠어요.

poptrash 2013-01-07 15:58   좋아요 0 | URL
아, 아니에요 ㅎㅎ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관찰자 2013-01-07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하다보니 들어와서 구경하게 되었는데, 쓰신 글을 엄청 집중해서 읽었게 되었을 뿐더러 나이도 저와 같으시고, 처음 인용된 책이 저에게는 애증의 작가 폴오스터인데다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겨준 아베 코보까지. 심지어 연신내. . .
댓글 안남길 수 없어 소심히 남기고 갑니다. 좋은 글 많이 써 주세요.^^

poptrash 2013-01-07 16:00   좋아요 0 | URL
폴 오스터, 저는 애증이랄 건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읽지 않게 된 것 같아요. 그런 작가들이 몇몇 있는데, 대부분 소설은 읽지 않아도 에세이는 종종 생각나면 들춰보게 되더라고요. 연신내 사시나요? 연신내는 저희 옆옆 동네, 제가 무척 좋아합니다 ㅎㅎ 고맙습니다!

수연 2013-01-07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꾸욱. (팝님 팬인데 달리 뭐라고 할 말은 없고 그래도 흔적을 남기고파서 우물쭈물하다가 엉뚱한 댓글 달고 갑니다)

poptrash 2013-01-07 16:00   좋아요 0 | URL
핫 고맙습니다. 저도 지인맘 님 댓글에 좋아요, 꾸욱.

sokdagi 2013-01-07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데요?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부럽기도 하다면 비아냥으로 들으실까요? 진심인데요. 절벽에서 날개가 있다는 것을 아신 것은 아닌지.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더니 당사자가 아니기에 이렇게 감히 말씀드립니다. 멋있으세요! 정말루요.

poptrash 2013-01-07 16:02   좋아요 0 | URL
비아냥처럼 들리지 않아요.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을 찰리 채플린이 단지 자기보다 일찍 태어났다는 이유로 먼저 해버렸다고 투덜대는 소설을 얼마 전에 읽었는데, 사실 그런 거 같아요. 고맙습니다.

티티카카 2013-01-07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낄낄 웃다가 스산해진 마음 한번 붙잡아 보기도 하고 글을 참 맛깔나게 쓰신다는 생각도 해보고 암튼 45매의 이야기도 궁금하고...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ㅋ

poptrash 2013-01-07 16:03   좋아요 0 | URL
45매는 죄 시시콜콜한 이야기 뿐이라서, 날리길 잘한 것 같아요. 만약 지면 제한이 없는 온라인 매체였다면 그냥 쓴대로 보냈을 테고, 그랬다면 저는 조금 더 부끄러워졌을 게 분명하니, 다행이라고 해야겠네요 ㅎㅎ

마태우스 2013-01-0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부쩍 알라딘을 열심히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보석같은 글을 읽었네요. 추천합니다. 사실 울나라같이 인건비에 인색한, 그래서 프리랜서가 살기 힘든 나라에서 글만 써서 살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 같습니다. 건강도 챙기시며 일하시길 빕니다.

poptrash 2013-01-07 16:0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마태우스 님, 저도 마태우스 님의 유머러스한 글 언제나 잘 읽고 있습니다. 용기라기보다는 그저 게으름일 뿐이지만, 고맙습니다. 건강할게요!

미네 2013-01-07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정말 좋네요. 몇번이나 읽었어요. 마음이 조금 찡하네요. 좋은글 계속 볼께요~ 건강하세요~^^

poptrash 2013-01-09 02:3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잘 지내시죠? 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추운 겨울 건강하시길!

이진 2013-01-08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 며칠 새 알라딘에 들어오질 않아 어떤 새롭고 멋진 글이 올라와 있을까 기대했는데 역시... 제 친구가 카톡으로 이 글을 읽어보라고 전해주더군요. 친구는 아직 읽지 않았는데 너 한번 읽어보렴... 이렇게요. 이젠 친구에게도 읽혀야 겠습니다, 그려 ㅎㅎ

poptrash 2013-01-09 02:36   좋아요 0 | URL
조금 신기하네요. 소이진 님 친구가 소이진 님께 이 글을 권하다니... 아무려나, 좋은 친구네요, 그쵸? ㅎㅎ

프레이야 2013-01-0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다'로 이어져가는 우리 삶을 한번쯤 돌아보게 되네요.
팝님의 '서서비행'을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담아갑니다.
익히 소문은 들었는데 말에요.^^
건강 회복하시고 어쩌다(^^) 또 더더 좋은 일도 많이 생기길 빌어봅니다.^^

poptrash 2013-01-09 02:38   좋아요 0 | URL
운동을 해야하는데, 게으르고 날도 추워서 하질 못하네요. 고맙습니다 ^^

2013-01-10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ptrash 2013-01-11 07:52   좋아요 0 | URL
대한민국 0.01%에 속한다는 <서서비행> 독자님이시군요... 고맙습니다.
힘 낼게요. ^^

이화월백 2013-01-13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메일로 온 알라딘 서재에서 이글을 읽기로 작정하고 따로 남겨 두었죠. 그런데 한참 읽다가 보니 어투(?)가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느낌이 들더군요.그래요, 서서비행의 주인공 이시군요. 좀 아둔한 저는 댓글들을 읽다가 알았답니다. 그런데 이책이 왜 반가운가 하면요. 가끔씩 들리는 알라딘에서 제가 읽어야 할책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책으로 서서비행을 꼽고있었는데 딸냄이가 다른 책을 보내면서 엄마 더 읽고싶은 책은 없나요.같이 부쳐드릴께요.해서 읽게 된책이 서서비행이었답니다. 역시 저는 책의 선택에서 실패가 없는 저의 안목에 흐뭇해 하고 있었죠.
사실 나올것도 없는 책읽기에 노년의 시력을 혹사하고 있는 저로서는 읽을 책을 선택할때는 신중을 기해야 하거든요.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면 혹 위로가 될려는 지요.

poptrash 2013-01-15 00:41   좋아요 0 | URL
훌륭하신 이화월백 님과 훌륭하신 따님이군요. (...) 잘 읽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맣은 위로가 되었어요. ^^
 

며칠 후면 저는 서른세 살이 됩니다. 

아니, 이미 되었네요.


언제나처럼 할 일을 미룬 채 게으름을 피우느라 마감을 넘기고 말았습니다. 뭐 대단한 걸 쓰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쓰기란, 그것이 무엇이건, 좀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요.


늘 그렇듯이 저는 또 지각생이 되었네요(정확한 시간에 닿지는 못해도 약속은 엄수하죠). 그렇지만 사람은 본래 싫어하는 일에는 기꺼이 시간을 지키는 법이지요(치과에 가는 거라면 결코 지각을 하지 않거든요). 그밖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믿고 마음을 놓는 거죠. 하기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는데 뭣하러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단 말입니까, 그들은 거기 와 있는데 말입니다. — 1949년 4월 25일,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에게 (244쪽)


몇 번이나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점점 더 편지를 쓰는 일이 드물어집니다. 그러다보니 기껏해야 그다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편지들에나 엄두를 내어 답장을 하는 겁니다. 아무 관심도 없는 것들에 대해서만 말하면 아주 편하거든요! — 1950년 4월 7일, 장 그르니에가 알베르 카뮈에게 (265쪽)


해가 바뀌는 동안 저는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을 읽었습니다. 제야의 종소리를 듣는 것도, 떡국을 먹는 것도 잊은 채 밤을 새워서요. 서른두 살의 저와 서른세 살의 제가 함께 읽었던 셈이지요. 일 년 동안의 독서, 라고 할까요. 하기야, 이건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해가 바뀌었을 뿐, 평소와 다름없는 걸음의 독서였으니까요. 덩달아 마감을 일 년이나 넘기고 말았지만 그 또한 놀랄 일은 아니겠지요. (혹시 당신도 마감을 넘긴 일이 있나요? 만약 있다면 어떤 핑계로 위기를 모면했나요?)


하지만 펼쳐진 책 속에서는 커다란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소설의 시간과는 다른 삶의 시간이, 이십팔 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이. 그동안 자신의 조용한 야망에 시달리던 청년 카뮈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문호가 되었고, 그런 제자를 변함없이 지지하던 젊은 선생은 세상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스승이 되었습니다(머리가 벗겨지기도 했고요). 그리고 그건 제게 제법 놀라운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니, 벗겨진 머리 말고,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우정 어린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 말이에요.


먼저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어요. 제가 사랑한 것은 그르니에가 아닌 카뮈였습니다. 언제나 그랬어요. 그르니에의 책을 아껴 읽던 시절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 그것이 카뮈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굳이 밝힐 필요가 있을까요? — 가뭇없이 사라지는 시간을 살며 거듭 붙잡은 것은 결국 카뮈의 책이었으니까요. 종종 그르니에의 <섬>을 다시 펼치기도 했지만, 대개는 카뮈의 유명한 서문을 다시 읽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군가 어떤 책에 대해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은 언제나 감동적이죠. 특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기에 이 서한집을 읽으며 저는 카뮈에게 스스로를 이입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성공을 필요로 했던 어린 소년이 그토록 꿈꾸던 위대한 예술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따라 읽었던 거예요. 그건 인류의 오랜 고전에서부터 소년 만화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반복된 이야기라 해야겠지만, 동시에 언제 들어도 근사한 이야기가 분명하니까요. 그때 스승의 역할이란 젊은 제자가 품고 있는 가능성을, 그 씨앗을 세심하게 돌보는 일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름다운 꽃에 감탄합니다. — 정원사의 노고가 아니라. “왼손은 그저 거들 뿐”이라는 어느 소년만화의 대사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거죠.


그건 아마도 제가 덜 자란 어른이기 때문일 겁니다. 여전히 내 안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길을 밝혀줄 누군가를 그리고 있기에 — 하지만 어느 누가 그러지 않을까요? 오늘 멘토를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말씀을 기다리는 독자들을 보세요. 그런 범박한 위로나 훈계, 가르침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입니다. 제가 지금 너무 나쁘게 말하고 있나요?


어쩌면 단순한 편집의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겠어요. 235통의 편지가 담겨 있는 이 서한집의 첫 26통은 그르니에에게 보내는 카뮈의 편지니까요. 그르니에가 카뮈의 모든 편지를 보관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언젠가의 카뮈는 그것들을 모두 태워버린 것입니다. “나는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다 태웠소 — 나에게 가장 소중했던 이들 — 나의 자랑이었던 이들 — 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이들 — 그르니에, 외르공, 클로드, 잔, 마르그리트, 크리스티안, 모든 남자들, 모든 여자들. 모든 것이 다 타버렸소. 내 가슴속에서 과거의 오 년이 비워져버렸소.” 그 마음이야 그저 짐작할 수 있을 뿐이지만, 제 마음을 말하자면,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습니다. 카뮈의 편지가 남았으니까요. 그러니 아마 처음 생각이 맞을 겁니다.


그르니에가 카뮈를 만난 것은 1930년, 그가 알제의 한 고등학교에 철학교사로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카뮈는 열일곱 살이었지요. 결핵으로 학교를 잠시 쉬었던 카뮈가 학업에 복귀한 1931년부터 그들은 친분을 쌓아가기 시작합니다. 물론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었어요. 두 사람 모두 조금은 조심스러운 성격의 사람들이었고 — 나는 당신이 이것을 소심함의 증표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그중 한 사람은 여느 청소년들처럼 세상에 대한 불신과 적의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요. 그르니에는 당시의 카뮈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위대함에 대한 욕망, 고귀함에 대한 동경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을 선택하는 데에서도 드러나곤 했다. 그가 천성적으로 조심성 많은 사람이었다고 해서, 그에게 온정의 천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조심성은 물론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취지를 함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진부한 것과 비열한 것에 대한 소박한 방어의 태도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그의 평가와 우정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카뮈를 추억하며> 16쪽)


어때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카뮈와 닮았나요?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의 첫 번째 편지는 카뮈가 그르니에에게 보낸 1932년 5월 20일의 편지입니다. “선생님의 견해를 저에게 유익한 가르침으로 삼겠습니다”라고 허두를 뗀 카뮈는 자신이 쓴 글을, 처음으로 써본 작품을 그르니에가 읽어주길 바란다고 쓰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읽어보시고 소감을 말씀해주신다면 그에 따라 저는 제가 정했던 목표, 현재 저의 처지를 잊어버린 채 추구하고자 노력하려던 목표를 그대로 간직하든가 포기하든가 할 생각입니다.” 과연 열아홉 살의 청춘답게 극단적이네요. 그르니에의 소감이 어땠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린 채 추구하고자 노력하려던 목표”를 그대로 간직하고 마침내 이루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르니에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카뮈는 계속해서 그르니에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의 아버지나 다름없었던 이모부와의 갈등에서부터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했던 질병의 고통,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청소년기의 불안과 그를 낙담과 희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왕복운동하게 했던 야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것들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믿음에 자신을 바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 믿음이 나를 으깨버리고 나를 — 벌거벗은 것처럼 — 혼자 버려두는데. 

제가 느끼는 것은 반항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고 그저 무관심입니다.

어쩌면 이건 결국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일 테지요 — 사실 저는 더이상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 오직 선생님의 우정밖에는 — 그 또한. 

A. C. — 1933년,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에게 (23쪽)


분명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카뮈의 모습이 아닙니다 — 쓸쓸한 표정으로 짧은 담배를 물고 있는 미남자,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던 작가, 이념도 사상도 아닌, 조금 촌스러울 정도로 ‘정의로운 것’을 추구하던 인간(이런 그를 가리켜 수전 손택은 “당대 문학의 이상적 남편”이라고 불렀죠. 물론 그것은 믿음직함, 관대함, 점잖음 등의 미덕과 함께 약간의 고리타분함을 의미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고뇌의 시간이 있었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카뮈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제가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지금 제겐 정말이지 꼭 한 가지 야심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되고 싶다는 것이지요. 가능한 한 가장 단순하게 말입니다. 물론 이것도 역시 오만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지금 너무나 지쳐 있고 너무나 헐벗은 상태라서 이 오만이 제게는 유일한 보호장치인 것 같습니다. 삶에 대하여 아무것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따지려고 들기 전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요. 한사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하는 것보다 그것이 더 낫습니다. 특히 저처럼 자신을 별로 잘 알지 못하는 경우는 특히 그렇습니다. — 1933년,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에게 (26쪽)


바로 이것이 훗날 <시지프 신화>로 발전하게 될 생각의 씨앗임을 우리는 곧바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할까요? 언젠가 빅토르 프랑클 박사가 말했던 것처럼 “일이 다 끝난 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판결을 내리기는 쉬운 법”입니다(그러고 보니 “삶에 대하여 아무것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프랑클이 주장이기도 하네요. 2차 세계대전을 각각 다른 상황, 다른 곳에서 치러 낸 이들의 동시대적 감각일까요). 아마 오늘 우리라면 그런 그의 고민을 ‘중2병’이라느니, ‘허세 쩐다’느니 하는 간편한 말로 일축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뭐, 별수 없죠. 다들 각자의 시대를 사는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요.


그를 다시 생각하거나 그의 편지를 다시 읽을 때, 그리고 내 기억 속에서 그가 한 말들의 메아리를 들을 때면,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그가 공공연하게 내보인 확신과 때때로 드러낸 냉정함 또는 그의 단순한 초연하는 태도 사이의 대조, 그의 확신과 그가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물음을 제기했다는 점 사이의 대조를 거의 피부로 느끼게 된다. 전쟁 직전에 그는 나에게 편지를 써보내곤 했다. 그 편지들에서 그는 내가 기대하고 있던 것과는 반대로 진정한 사상가가 될 자신이 없다고, 사상의 역설적인 측면, 신랄하고 안이한 측면에 끌리고 있으며, 이는 이미 지적 정직성의 징표가 아니라고 토로했다. 그런데 이러한 근심은 그가 아마추어 예술가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카뮈를 추억하며> 30쪽)


끊임없이 고뇌하고 낙심하던 카뮈를 지탱했던 것은 그르니에와의 우정이었습니다. 비록 카뮈는 그것을 일반적인 의미의 우정이라기보다는, 비굴함 때문이 아닌 특유의 촌스러움 탓에, 자신이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더 좋아했지만요(반면 그르니에는 “당신이 내게 신세진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나를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의 나이가 아주 어렸었다는 이유 바로 그것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들의 관계가 동등함을 강조했습니다만, 이게 중요한가요?). 그들의 관계는 카뮈가 학교를 졸업하고, 그르니에가 다른 나라로 떠난 후에도 계속되며,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욱 깊어집니다.


카뮈는 언제나 스승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한 조언을 구했고,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을 통해 <이방인>, <시지프 신화>, <칼리굴라> 등의 초기 작품을 비롯한 카뮈의 작업에 대한 그르니에의 꼼꼼한 비평(때로는 첨삭)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비평집이 아니고, 전기도, 그렇다고 소설도 아니기에 우리가 각각의 편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우선 그들 생활의 냄새입니다 — 2차 세계대전 동안 겪어야 했던 식량난(카뮈는 직접 채취한 버섯을 가루로 만들어 그르니에에게 보내기도 합니다)에서 돈 문제(친한 사이에 돈거래는 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들은 과연 훌륭한 작가답게 신용을 지킵니다), 책이나(물자가 부족한 탓에 카뮈는 책을 쌌던 포장과 노끈을 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집을 구하는(그르니에는 카뮈에게 “무엇보다 ‘세입자’를 들이면 안 됩니다!”고 강조합니다) 문제, 가족의 건강 문제와 시시콜콜한 생활의 문제들(그르니에는 손자를 위해 카뮈가 연출한 연극표를 부탁하기도 합니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소소한 일상이 마치 친한 친구의 그것처럼 가깝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서로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삶의 대부분을 각기 다른 나라에서 보낸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각자의 사정 탓에 많은 경우 만남은 어그러지고, 또 틀어집니다. 자꾸만 엇갈리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읽는 이가 더 안타까울 지경이에요. 아마 제가 드라마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겠지요.


오히려 부족한 것은 역사적인 사건들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식량난에 대한 토로와 몇 가지 일들을 제외하면, 그들의 편지에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통해 카뮈가 널리 이름을 알린 직후에도, 사르트르와 그 유명한 논쟁을 벌일 때에도, 그런 외부적인 사건들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어요. 심지어 카뮈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조차도, 몇 줄의 짧은 편지가 오고 갔을 뿐입니다. 


이번에도* 과연 당신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생쥐스트의 글을 읽었더니 이런 말이 있더군요. “사람은 누구나 스물한 살이 되면 신전에 들어가서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자신의 친구라고 엄숙히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해마다 풍월(공화력의 제6월)에 그 사실을 다시 선언해야 한다.”

앞당겨 그 사실을 선언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J. G. — 1957년 11월 7일을 위하여, 장 그르니에가 알베르 카뮈에게 (336쪽)

(*1957년 10월 16일, 카뮈는 자신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잠시 후면 투우*가 끝날 것입니다. 황소가 죽었으니까요. 아니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애정 어린 인사를 전하며. A. C. 

— 프랑신 카뮈가 스톡홀름에서 그르니에 부부에게 보낸 12월 13일자 엽서에 덧붙여,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에게 (337쪽)

(*노벨상 수상에 따르는 각종 의무적인 행사들을 빗대어 하는 말.)


하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봅니다. 본다고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요. 이미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함께 나눈 시간을, 그리고 쌓아올린 관계를 알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그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읽으며 “모든 것이 개인에서 시작하고 개인으로 귀착한다”(87쪽)는 그르니에의 생각이나, “아마도 향수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저는 이렇게하여 점점 더 인간의 몫 중에서 역사에 속하지 않는 일면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저는 우리가 역사 밖에서 죽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181쪽)과 같은 문장들의 의미를 곱씹어 생각할 수도 있겠죠. 아무래도 좋은 일입니다.


카뮈는 1959년 12월 28일의 편지에서 “<섬>의 새로운 판본을 받아 보았으면 했는데 출판이 늦춰졌나요?”라고 묻고 있습니다. 자신이 쓴 그 유명한 서문이 실린 새로운 판본에 대해서. 하지만 일주일 후인 1월 4일, 친구 미셸 갈리마르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파리로 가던 도중 교통사고를 당한 카뮈는, 두개골이 파열되고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맙니다. 유달리 쾌활한 어조로 쓴 편지의 마지막에서 자신이 한 인사를 지키지 못한 채 — 스스로의 죽음으로 부조리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며칠 전에 어떤 경관이 제 자동차를 세우더니 제게 무슨 글을 쓰느냐고 묻더군요(제 직업이 운전면허증에 기록되어 있었으니까요). 전 “소설을 씁니다”하고 간단히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강조하듯 다시 묻는 거예요. “애정소설입니까, 아니면 탐정소설입니까”라고요. 마치 그 둘 사이에 중간은 없다는 듯이!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반반이죠, 뭐.”

곧 다시 뵙겠습니다. 자주, 아주 자주 선생님을 생각하곤 합니다. 늘 같은 마음으로 말입니다.

선생님과 가족 분들의 건강을 빌며.

알베르 카뮈 — 1959년 12월 28일,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에게 (360쪽)


반면 새해 첫날에 씌어진, 카뮈의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한 그르니에의 마지막 편지는 다음과 같은 추신으로 끝을 맺습니다.


<섬>은 루르마랭으로 우송합니다. 

— 60년 1월 1일, 장 그르니에가 알베르 카뮈에게 (364쪽)


루르마랭으로 우송된 <섬>은 카뮈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배달되었고, 카뮈는 “이제 이 책은 내 것이라기보다는 당신의 것이라고 해야겠어요. 건강하시오. 1960년 1월 1일, 장 그르니에”라고 서명된 그 <섬>을 결코 볼 수 없었습니다. 물론, 제가 가지고 있는 <섬>에도 그의 서명은 없고요.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득 이건 너무 멜로드라마적인 편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 그들의 삶을, 작품을, 시대를, 역사를 모두 무시한 채 멋대로 잘라 붙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삶은 결국 이야기이겠지만, 결코 이야기만은 아니고, 더욱이 이런 통속적인 플롯의 이야기는(어쩐지 [서프라이즈]에 나올 것 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았어요?) 아닐 테니까요. 역시 드라마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겠지요. 반성합니다. 새해에는 조금 줄이도록 할게요. 이왕 이렇게 쓴 것을 어쩔 수는 없었습니다. 죄송해요.


책장을 덮으니 서른세 살이 되었습니다. 

아까 이야기했던가요? 

기록적인 한파에 거리는 꽁꽁 얼었네요 — 실은 담배를 사러 딱 한 번 밖에 나갔을 뿐입니다. 그것도 아주 잠시. 


서른세 살의 저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아까 사온 그 담배요),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의 표지를 새삼스레 바라봅니다. 작은 얼굴들이 있고, 녹색의 원제와 검은색의 번역 제목이 있으며, ‘1932~1960’이라는 숫자가 있네요. 참, 그거 아세요? 그들이 편지를 나누기 시작하던 때의, 그러니까 1932년의 그르니에가 제 나이와 가깝다는 것을. 1898년에 태어났으니 우리 나이로 서른다섯이 — 다시 말해, 처음 카뮈를 만났을 때 그르니에의 나이가 바로 제 나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스스로를 언제나 카뮈 쪽에 대입해서 생각했는데 어느덧 이런 나이가 되어버린 거예요, 세상에.


그리고 그건 오직 저 자신만을 생각하며, 있는지 없는지조차 더는 알 수 없는 내면의 가능성을 끌어내줄 스승을, 길을 밝혀줄 그를, 한 마디로 구원자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그건 결국 성장하는 소년의 플롯에 집착하기엔 너무 늙었고, 진부한 멜로드라마의 플롯에 이입하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걸 제외한 다른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모른다는 것으로 그저 족하기로 하겠습니다. 아직 새해니까요. 날도 춥고.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너무 많아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 바로 이렇게.


마음으로부터의 우정을 보냅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2013. 1. 4. 



책세상 블로그 

http://bkworlds.tistory.com/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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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카뮈의 기일이고, 신년이고, 날씨도 추워서 간지러운 글을 써봤다. 

참고로 책세상 블로그에 올려진 제목은 내가 붙인 게 아니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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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카카 2013-01-06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마음은 언제나 통속으로 더 기울기에 요정도 간지럼쯤이야.
잘 보았습니다~

poptrash 2013-01-06 00:5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통속, 이라고 하니 문득 박인환의 말이 떠오르네요.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
여름이 그리운 것을 보니 저도 통속으로 기울고 있는 모양이에요 ㅎㅎ

프레이야 2013-01-06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에게 몹시도 편지를 쓰고 싶게 만드는페이퍼에요. 생각이 정리되지않으면 편지를ᆢ 괜찮은 자기처방 같아요. 고맙습니다 ^^

poptrash 2013-01-07 07:17   좋아요 0 | URL
저도 계속해서 편지를 써야겠어요. 단 한 사람을 위한 편지를. 고맙습니다.

달사르 2013-01-06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르니에를 먼저 알면서 이제 카뮈를 알아가려는 중이구요.
제 친구는 카뮈를 좋아하게 되면서 그르니에를 알아가는 중이에요. 근데 웃긴건 저는 제 친구에게 그르니에를 소개시켜줬고, 친구는 저에게 카뮈를 소개시켜줬어요. 서로 소개시켜준 사람이 저렇게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인 건 모르고 말이죠. 뒤늦게 저 서한집을 보고 신기하다고, 둘이서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어쨌든 타인의 편지이기에,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을 보는 건 저에게는 시간이 좀 걸리네요. 팝님의 서간체를 잘 견디지 못한다는 말에 괜한 공감이? ^^

poptrash 2013-01-07 07:19   좋아요 0 | URL
좋은 친구 사이네요. 멋진 책을 함께 읽는 것보다 멋진 일이 많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멋진 일이라는 건 변함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다가 그 우연이라니, 재밌는데요.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이 책을 읽어보시면 정말 재밌으실 거예요. 부러 꾸민 서간체가 아닌, 그들이 자연스럽게 주고 받은 편지니까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생각할 때면, 나는 내가 어릴 적에 알았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올립니다. 그곳은 지붕이 낮고, 정원과 베란다가 있으며, 거북이들이 살고 있는 물탱크가 있고, 창문에 창살이 쳐있는 그런 집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부였습니다. 이제 그런 모습은 남쪽 지역에서만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쪽을 생각할 때면, 나는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바로 거기에 내 책들이 있었지만, 나는 친구들에게 책 이름들을 물어봐야만 했습니다. 나는 루돌프 스타이너가 인지학人智學에 대해 쓴 책에서 말했던 대목을 기억합니다. 인지학이란 그의 신지학神智學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는 무엇인가가 끝날 때면, 우리는 다시 무엇인가가 시작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충고는 귀담아들을 만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얻을 것이 아니라 이미 잃어버린 것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아주 소중한 이미지—종종 파렴치한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 혹은 잃어버린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보르헤스가 잃은 것은 시력이었다. 책이라는 세상 속에서 길을 잃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다. 그것이 그가 삶을 살아가는, 차라리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실명했고, 대신 국립도서관 관장이라는 직위를 얻는다. 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앵글로색슨어를 공부했고, 스칸디나비아 문학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창작과 강연을 멈추지 않으며 잃어버린 것을 대체할 것을 스스로 찾았다.


보르헤스는 “한 작가, 아니 모든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든지, 그것이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치와 장애와 불행을 온전히 받아들여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제 우리 차례다.


2013. 1. 2. 경향신문 오늘의 사색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1012217035&code=9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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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나는 새해 첫날 신문에 내 이름이 실리기를 고대했다. 그렇다고 별 다른 시도는 한 것은 아니었다. 은행을 털지도, 늙은 노인의 코를 부러뜨리지도, 불행한 강아지의 엉덩이를 걷어차지도 않았다. 다만 몇 편의 소설을 투고했을 뿐이다. 두 편, 아니 세 편. 약간의 시간이 흘러 새해 두번째 날 신문에 이름을 올렸다. 긴 인용에 약간의 주석이 전부이긴 하지만, 내겐 제법 재미있는 일로만 느껴져 이렇게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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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1-03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제가 어제자 신문을 가방에 넣어두고 읽지 않고 있다가 오늘 아침에 읽으면서 팝님의 이름을 본 게 아니겠습니까! 반가웠습니다. 종종 만나요.

poptrash 2013-01-03 16:06   좋아요 0 | URL
네 다락방 님 종종 만나요! 해피 뉴 이어!
 

프랑스 문학 가운데 가장 유명한 첫 문장을 둘 꼽으라면 그것은 분명히 “오늘, 엄마가 죽었다”와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일 것이다. 굴드는 그 문장들을 하나씩 큰 소리로 여러번 되풀이해 발음해보았다. 그 문장들은 언뜻 보기에는 별로 신통할 게 없다. 하지만 그 문장들의 단순함 그 자체가 진정한 천재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문장들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부터, 우리는 그 각각의 문장들이 앞으로 전개될 그 걸작의 내용과 꼭 들어맞게 의도적으로 구상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베르나르 키리니, <첫 문장 못 쓰는 남자>(윤미연 옮김, 문학동네 펴냄) 10쪽) 


베르나르 키리니의 단편 ‘첫 문장 못 쓰는 남자’의 주인공 피에르 굴드는 제목 그대로 첫 문장을 쓰지 못하는 작가다. 정확하게 말하면 작가 지망생(혹은 ‘작가(진)’)이라고 해야겠지만. 마침내 작가가 되기로, 수년 전부터 구상해왔던 책을 쓰기로 마음먹는 순간, 그는 자신이 첫 문장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가 앞으로 써나가게 될 모든 것은 바로 그 첫 문장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중압감에 허투루 시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젠가 데카르트가 말했던 것처럼,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진 것도 저절로 무너질 것”임을 믿고 있는 굴드는 완벽한 첫 문장을 찾느라 좀처럼 책을 시작하지 못한다.


그런 경우에 작가 지망생이 찾을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을 굴드 또한 찾는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첫 문장을 살펴보는 일이다. 그는 카뮈의 <이방인>(“오늘, 엄마가 죽었다”)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를 시작으로 무질, 조이스, 포크너, 포이스, 로렌스, 오웰, 셀린, 되블린의 첫 문장들을 찾아보지만 별다른 도움을 얻진 못한다. 위대한 작가들이 위대한 첫 문장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위대했기 때문이라는 평범한 깨달음을 얻었을 뿐. 아마 작가 지망생이 찾을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이란 결국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해결책이라는 (여전히 쓸모없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실의에 빠진 그는 “완벽한 첫 문장,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찾아 헤매던 문장이 마치 못된 오리처럼 그를 비웃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시달린다. 못된 오리는 그가 구제불능의 애송이라는 사실을, 위대한 작가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지만 그는 인정할 수 없다. 위대한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자신이 형편없는 첫 문장을 쓰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작가 지망생의 딜레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 홀로 고전을 찾아 읽다 눈만 높아진, 무분별한 독서의 폐해다. (반대로 그가 책을 읽지 않았다면 책을 쓸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독서의 진정한 폐해다.)


굴드는 각종 인용이나 패러디(“오늘 엄마가 죽었다. 그렇지만 변함없이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로 시작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쩐지 비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작가 지망생들이 종종(실은 언제나) 작품 대신 만들어내는 문제 속에 갇혔고, 출구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보통의 작가 지망생들처럼 술과 담배, 늦잠과 자기 비하, SNS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신 그는 고심을 거듭했고, 획기적인 해결책을 찾아낸다. 그는 생각한다. “완벽한 첫 문장을 찾는데 실패했다고? 까짓것, 문제 될 것 없다! 그렇다면 두 번째 문장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다.” 유레카! 제 아무리 콜럼버스라도 깜짝 놀라 달걀을 쓰러트리고 말았을 거다. 발상의 전환에 성공한 굴드는 열에 들뜬 채 자신의 책을 쓰기 시작한다. 바로 이런 두 번째 문장과 함께. 


“(…) 바로 그 때문에 나는 거기서 멈추었다.” (16쪽) 


그는 뿌듯한 마음으로 자신의 두 번째 문장을 바라보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괄호와 말줄임표로 첫 문장 딜레마를 피해간다 하더라도, 책을 펼친 독자에게는 두 번째 문장이 첫 문장이 될 것이고, 그것은 굴드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두 번째 문장이라는 사실을 책머리에 일러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경우 바로 그 일러두기가 책의 실제적인 첫 문장이 될 테고”, 물론, 그 문장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의 작가 지망생들처럼 허기와 숙취, 불면과 불안, 비문학적인 사회에 대한 저주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신 고민을 멈추지 않았던 굴드는 좀 더 획기적인 해결책을 찾아낸다. 두 번째 문장을 첫 문장으로 생각한다면, 두 번째 문장도 괄호로 처리하면 된다! 세 번째 문장이 첫 문장이 된다면 그 또한 괄호로 처리하리라. 그렇다면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문장도 괄호로 처리하지 못할 이유는 또 뭐냐? 그는 작가 지망생답지 않은 호탕함으로 새로운 작품을 써내려갔고,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책을 완성하다. 괄호와 말줄임표로 이루어진(“(…) (…) (…) (…) (…) (…) … (…)”) 그의 첫 번째 책을. 


그는 자랑스러움에 취해 그것을 두 번 되풀이해 읽고 나서 지쳐 쓰러졌다. 그렇게 해서 굴드는 한 권의 소설을 써낸 작가가 되었다. 첫 문장을 시작할 수 없어서 결국 아무 내용도 쓰지 못한 소설의 작가. (17쪽)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굴드는 다시 한 번 깨달았을 것이다. 작가 지망생이 찾을 수 있는 획기적인 해결책이란 대부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만약 이야기가 이렇게 끝났다면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가련한 피에르 굴드와 재치 있지만 결국 그뿐인 이야기를 쓴 베르나르 키리니,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렸겠지. 그리고 좀처럼 가시지 않는 피로와 보일러를 틀어도 도무지 따듯해지지 않는 방, 꼬박꼬박 청구되는 각종 공과금과 도둑처럼 찾아온 마감 따위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으리라. 하지만 (고맙게도!) 베르나르 키리니는 멈추지 않는다.


단편의 후반부에서 키리니는 노년에 접어든 굴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문장에 대한 무시무시한 두려움에 길들여졌고, 그래서 진짜 책들을 써낼 수 있”게 된, 나아가 “존경받는 작가, 유럽 전역에 알려진 유명 작가”가 된 굴드가 생의 말년에 봉착한 새로운 딜레마에 대해서. 그것은 젊은 굴드가 해결해야 했던 문제를 고스란히 뒤집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결말을 이 자리에 밝힘으로써 키리니의 노고를 무시할 생각은 없다.) 키리니는 세심한 솜씨로 이야기의 균형을 맞췄고, 자칫 작가 지망생들의 씁쓸한 술자리 농담에 지나지 않았을 이야기를 글쓰기의 근본 문제에 대한 질문으로, 멋진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완벽한 첫 문장을 찾아 몇 년 동안이나 술과 담배, 늦잠과 자기 비하, SNS 등으로 시간을 보낸 사람의 한 명으로서, 나도 모르게 그의 이야기에 스스로를 이입하고 말았던 것이다. 눈물을 닦으며(언젠가 말했지만 눈물을 흘리며 책을 읽는 일은 힘든, 정말 더럽게 힘든 일이다) 피에르 굴드의 익숙한 시행착오를 좇던 내가 기대한 결말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정신 차리고’ 생업에 복귀하거나, ‘정신 못 차리고’ 불행을 찾아 떠나거나,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아내기를 바랐다. 물론 그것이 우스운 일이라는 걸 나 또한 안다. 독서의 폐해를 독서로 극복하려 하다니, 정말이지 바보 같은 일이다. 


심란해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을 뒤져 그들의 첫 문장을 살펴본다. 정영문(“어쩌면 나는 처음에 개구리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볼라뇨(“내장(內腸) 사실주의에 동참하지 않겠느냐는 친절한 제안을 받았다.”), 부코스키(“쉰 살이고, 여자와 잠을 같이 잔 지 4년도 넘었을 때였다.”), 브라우티건(“워터멜론 슈가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다시, 또 다시 행해졌다.”), 챈들러(“10월 중순 오전 열한시경이었다.”), 김승옥(“오늘 아침에도 그는 설사기 때문에 일찍 잠이 깨었다.”)…. 심란함은, 물론,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나는 새삼 ‘가시질’이라는 표현의 묘함을 생각한다. 내 생각에 이것은 높임말이다). 아무리 허기와 숙취, 불면과 불안, 비문학적인 사회에 대한 저주로 시간을 보낸다 해도 가시지 않을 심란함(님)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여기까지 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밥을 차린다. 허기라도 채우고 보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TV에서는 언젠가의 무한도전이 방영 중이다. A형 간염에 걸린 박명수를 위해 무한도전 멤버들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소원을 말해 봐’ 특집. 병상에 누워 있던 박명수가 뜬금없이 자서전을 쓸 테니 받아 적으라고 말한다. 황당해하는 유재석과 노홍철을 무시한 채, 박명수는 책의 첫 문장을 구술하기 시작한다. 그건 이런 문장이었다. 


“1970년 8월 27일 군산 모동네에서 A형이 혈액형이다.”


숟가락을 내려놓은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문장을 큰 소리로 여러 번 되풀이해 발음해본다. 그 문장은 언뜻 보기에는 별로 신통할 게 없다. 하지만 그 문장의 단순함 그 자체가 진정한 천재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문장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부터, 나는 그 문장이 앞으로 전개될 그 걸작의 내용과 꼭 들어맞게 의도적으로 구상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짧은 자서전의 마지막을 박명수는 이렇게 구술한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들이여.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진짜 너무 늦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땐 너무 늦은 거다. 그러니 지금 시작하라.”(박명수, <맨발에서 2인자까지>)


어느덧 신춘문예의 계절이다. 이 땅의 모든 작가 지망생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2012. 11. 9. 프레시안 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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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농담. 
어느덧 2013년이 밝았고, 올해도 나는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작품을 찾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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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3-01-03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힛. 프레시안에서 진작에 읽었던 글입니닷. 친구의 추천으로 '이방인'을 읽고 있는데 첫문장이 어찌 그리 반갑던지요.

박명수 좋아하는데. 과연, 그런 천재성이 엿보이는 사람이었군요. 이번주나 다음주에 할 박명수 창작 가요제도 기대가 많이 되요. 팝님이 박명수의 자서전 첫 문구에서 느꼈을 그 느낌과 소설 주인공 굴드의 고민 지점 사이에 어떤 해결점이나 연결 고리가 있을 듯한데 말이죠. 박명수가 왠지 고민의 힌트가 되는 느낌이랄까요. 암튼, 베르나르 키리니의 저 소설이 무지 궁금해졌습니다.

poptrash 2013-01-04 01:43   좋아요 0 | URL
핫, 실은 글 앞부분의 굴드를 패러디한 일종의 농담이었어요. 물론 박명수의 그 문장이 저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요. 그런데 달사르 님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박명수의 첫 문장에서 느꼈을 그 느낌과 소설 주인공 굴드의 고민 지점 사이에 무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 그러니까 기존의 문법에 얽메이지 않는 문장이 주는 어떤 느낌, 같은 것. 사실 이런저런 생각하다 보면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Jeanne_Hebuterne 2013-01-0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는 문장으로 후려치기까지 하지요.
그나저나 SNL이 아닌 SNS여서 다행입니다. 주드 로와 다니엘 크레이그, 콜린 퍼스의 SNL에 탐닉하는 저로서는 역시 난 어쩔 수 없군, 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구절!
새해에요, 팝트래쉬님.

poptrash 2013-01-04 16:07   좋아요 0 | URL
SNL이 왜요, 뭐 어때서요! SNS가 딱히 더 나을 것도 없어요!
후려친다는 표현이 정말 적절하네요. 독자들의 뒷통수를 세차게 때리는 느낌...
새해입니다. 건강하시죠?

Jeanne_Hebuterne 2013-01-04 16:32   좋아요 0 | URL
S와 L, 한글자 차이인데 심하게 저속해지는 기분인걸요!
북극 얼음이 녹아 더더욱 추워진답니다. 감기 조심하시길 바래요 :)

poptrash 2013-01-07 07:51   좋아요 0 | URL
올 겨울엔 이미 한 번 호되게 앓아서, 남은 겨울을 무사히 넘겼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야겠죠. J 님도 건강하시길!

프레이야 2013-01-0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년 신춘당선자들의 글과 소감을 찾아읽던 때가 있었어요. 다시 그럴 수 있을까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아직은 들지않는 것 보니 아주 늦진 않은가 봅니다. 고맙습니다. 겨울 잘 나기로 해요.^^

poptrash 2013-01-07 16:04   좋아요 0 | URL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진짜 늦었으니 어서 빨리 시작해야 하는데,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조금 더 여유가 있으신 걸까요? ㅎㅎ 날이 어서 풀렸으면 좋겠네요. 건강하세요!

관찰자 2013-01-0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구차달님의 말씀대로 사서 읽게 만들고 싶어지는 완벽한 서평이네요.
좋아하는 작가의 첫문장을 열거해 주셨는데, 저와 중첩되는 사람은 브라우티건이나 챈들러 정도네요. 어쩌면 세상에는 이렇게도 이야기를 잘 쓰는 사람들이 많은지 오늘도 궁금한 작가들의 목록을 한아름 담아 갑니다.
마음만 바쁘고, 읽는 속도가 영 나지 않은 겨울입니다.

poptrash 2013-01-07 16:07   좋아요 0 | URL
이거 베르나르 키리니에게 수수료라도 받아야겠는데요... 참 세상엔 많은 책이 있고, 시간은 언제나 없네요. 브라우티건이나 챈들러를 좋아하신다면 다른 작가들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연신내 사시면 은평구립도서관에서 빌려 보시면 되겠네요! ㅎㅎ

장현 2013-01-08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글 읽고 그냥 가면 먹튀 혹은 도둑심보겠지요?
"에코와 김수영이 말하는 책읽기"라는 프레시안 서평을 읽고 팝님 이름을 검색해서 여기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박람강기라고 해야 하나요? 진짜 대단하다는 생각 외엔 다른 생각이 안드네요.
팝님이 자신의 독서 노하우나 독서 때의 에피소드들에 대해 책을 쓰면 어떨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너무 일상적인 인사라 식상하지만) 행복하세요 ㅎ

poptrash 2013-01-09 02:40   좋아요 0 | URL
아, 먼 길을 오셨네요.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제게 독서 노하우가 있을까 생각하면 딱히 없고, 에피소드도 떠오르지 않으니 앞으로 만들어 가야겠어요.
장현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후안 가르시아 마데로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면 어떨까. 숙부의 뜻에 따라 법학대학에 입학했지만 문학을 포기할 수 없어 인문대의 시창작 교실을 기웃거리던 얼치기 시인. ‘피리를 불어주겠다’는 제안도 이해 못하는 숙맥이지만 이어진 (성적)행위를 두고 “그녀 말의 의미가 외롭고 지친 수영 선수처럼 내 무지의 검은 바다를 헤치며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고 제법 근사하게 표현할 줄 알았던 열일곱 소년. 가르시아 마데로는 어느 날의 일기를 이렇게 쓴다.


11월 2일

내장(內臟) 사실주의에 동참하지 않겠느냐는 친절한 제안을 받았다. 물론 나는 수락했다. 통과의례는 없었다. 그게 더 낫다. (13쪽)


일기는 끝나고, 우리는 당황한다. 내장 사실주의라는 낯선 단어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개를 저으며 책을 덮을 필요는 없다. 뜻을 모르는 건 비단 우리만이 아니다. 다음 날, 가르시아 마데로는 고백한다. 


11월 3일

내장 사실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같은 쪽)


<야만스러운 탐정들> 또한 여기서 시작한다. 정체도 모르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모임에 가입한 가르시아 마데로가 남긴 1975년의 일기로부터. 그리고 이 서평은 마데로의 남은 일기를, 아직 950여 페이지를 남긴 두 권의 뚱뚱한 책을 이 자리에 고스란히 옮기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씌어지는 중이다. 그보다 더 이 소설을 잘 설명할 방법은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분명하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대신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시인 지망생 가르시아 마데로가 아르투로 벨라노와 울리세스 리마를 만나 내장 사실주의라는 전위적인 문학 그룹에 합류하고, 서로 다른 가슴과 매력을 지닌 여자들 사이에서 방황하며 사랑과 섹스와 문학과 세상을 알아가는 이야기라고.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달콤한 청춘의 고민을 거듭하던 가르시아 마데로가 루페라는 창녀와 기둥서방 사이의 갈등에 휘말려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고, 벨라노와 리마를 따라 내장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진,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시인을 찾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라고. 그러니까 온갖 담론과 육체와 이상 속에서, 무엇보다 문학이라는 도달할 수 없는 꿈을 좇으며 길 위에서 청춘을 탕진하는 흔한 ‘문학청년’의 이야기라고. 


설마.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물을지 모른다. 한 마디로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성장소설 아니냐고. 성장을 말하는, 전혀 성장하지 않는 소설들로 가득한 오래된 장르에 던져진 또 하나의 성장소설. 문학에 대한 당신의 입장과 지식에 따라 반反성장소설이나 교양소설, 어쩌면 빌둥스로만이라는 단어를 택할 수도 있겠다. 대답은 간단하다. 아니.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그런 소설이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3부로 구성된 소설에서 고작 1부의 이야기를 요약했을 뿐이다(그리고 나는 형편없는 요약자다).


소설의 핵심은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뽐내는 2부다. 1976년부터 1996년에 이르는 세월을 채우는 것은 각각의 장소에서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가는 서른여덟 명의 인물들이다. 삶의 어느 순간 벨라노와 리마를 만났던 그들이 추억하는 리마와 벨라노에 대한 이야기. 온전히 그들에게 주어진 각각의 장을 통해 진술되는 일종의 목격담. 


그 속에서 벨라노와 리마는 엉터리 초현실주의자에서 마약밀매상으로, 가짜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이도저도 아닌 얼간이로 계속해서 모습을 바꾸지만, 그 어디에도 가르시아 마데로의 자리는 없다.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내장 사실주의자들을 연구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연구자’조차 “아니, 그 사람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다. 틀림없이 내장 사실주의 그룹에 속한 적이 없을 것이다”라고 잘라 말한다. ‘말 좆’처럼 발기된 성기를 어쩔 줄 몰라 5분 동안이나 거리를 달리던 가련한 소년은 모두에게 잊힌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온전한 벨라노와 리마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고, 앞뒤도 맞지 않으며, 무엇보다 그들에겐 인생이 있다. 한때 어떤 방식으로든 문학과 관계를 맺었던 그들은 이제 다른,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몫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학-이후의 삶. 볼라뇨는 끊임없이 문학(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을 찾아 떠도는 벨라노와 리마의 삶을 쫓는 대신, 마이크를 돌려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한다. 마치 (벨라노와 리마가 좇던) 문학이라는 것이 더는 소문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저마다의 관점으로 훼손되고 뒤틀린, 혹은 불행과 낭만으로 채색된 기억의 파편에서밖에 찾을 수 없다는 듯. 그렇다면 지금 볼라뇨는 죽어버린 문학을 애도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서른여덟 명의 그들이야말로 유령인지 모른다. 한때 매혹되었던 그들의 영혼은 오직 문학에(다른 예술에, 사랑에, 우정과 그 밖의 것들에) 바쳐졌지만, 매혹은 사라졌고, 영혼 또한 간 데 없다.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포기한, 혹은 치러야 했던 어떤 것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볼라뇨는 젊은 날의 반항적인 꿈의 대가로 시간이 어떻게 우리를 벌하는지 보여 준다. 실망, 고통스러울 만큼 사소한 성취들, 깨진 사랑, 질병, 심지어 비명횡사, 그리고 단순하게는, 젊음의 종말은 시간이 주는 벌이다. (프랜시스코 골드먼, ‘위대한 볼라뇨’,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박세형.오숙은 옮김, 열린책들 펴냄) 89쪽)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목소리가 있다. 깨지고 실망하고 병들었지만 여전히 스스로의 존재를 주장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담고 있는 저마다의 삶. 그렇다면 — 볼라뇨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그것은 왜 문학이 아닌가? 우리 모두에게는 목소리가, 삶이, 이야기가 있고, 그것을 들려주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는, 낡은 경전에나 남아 있을 법한 문학의 어떤 소용. 그것이 볼라뇨가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2부에 나오는 수많은 목소리의 흐름을 미시시피 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이 소설은, 멕시코 시인 마리오 산티아고의 삶의 파편들을 어느 정도 충실하게 옮겨 쓴 것이다.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나에겐 행운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어떤 세대적인 패배와 한 세대의 행복을 반영하려고 했다. 여기서 행복이란 어떤 경우엔 용기를 뜻하지만, 용기의 한계를 뜻하기도 한다. 내가 보르헤스와 코르타사르의 작품에 영원한 빚이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내 소설은, 소설에 나오는 많은 목소리만큼이나 다양한 독법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고통스럽게 읽을 수도 있고, 또한 신나게 읽을 수도 있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대하여’, ¡Viva Bolaño!)


결국, 하나의 정설과 몇 개의 가설로 정리할 수 없는 이 방대한 소설을 판단하는 것은 순전히 읽는 이의 몫이다. 심지어 우리는 26장으로 나뉘어진 2부의 이야기를 별개의 단편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볼라뇨가 만들어 놓은 이중의 구조. 벨라노와 리마가 세사레아 티나헤로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탐정이듯, 2부를 통해 벨라노와 리마의 흔적을 쫓는 우리 역시 일종의 탐정이 된다. 증거를 선택하는 것도, 그 증거들을 꿰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도 모두 탐정의 일이다. 그러니까 바로 당신의.


어쩌면 이 짧지 않은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몇 번쯤 길을 잃을지 모른다. 주인공들이 때때로 그랬던 것처럼. 깨지고 실망하고 병들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매일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마침내 진실을 찾는 데 성공했지만 진실을 찾았지만 그 끝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어떤 파국일 수도 있다. 다시 돌아온 가르시아 마데로의 일기로 진행되는 3부의 이야기처럼.


하지만 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페이지를 넘겨 버린 것이다. 별 수 없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나도 모르게. 살아 있는 이상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야 하는 것처럼, 읽어버린 이상 우리는 계속해서 읽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볼라뇨는 용기라고 불렀다.


자, 그렇다면 가르시아 마데로의 일기로 시작한 이 글은 어떻게 끝나야 할까? 올해의 책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걸맞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해야겠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 프레시안북스 12.12.21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2122113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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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제목은 매체에서 정하고, 마음에 드는 경우도 아닌 경우도 있지만, 이번 제목은 마음에 쏙든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써보았는데,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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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 2013-01-01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팝트래쉬님이 골라서 보시는 책이나 작가는 다 좋은듯 ^^

poptrash 2013-01-02 16:15   좋아요 0 | URL
세상에 좋은 책이 너무 많아서 큰일이에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