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거리의 엉덩이에서 튀어나온 거인의 외침 그리고 그가 들려준 더럽고 새로운 이야기



라블레는 거리의 전도사였다. 원한다면 여기에 ‘미친’이라는 수식을 붙여도 좋다. 미친 거리의 전도사 — 제법 그럴듯한 호칭이다(그러니 여기서 라블레가 전도사가 아니라 프란체스코파의 수사였다는 적절한 지적은 하지 말기로 하자). 비슷한 이름을 가진 웨일즈의 한 밴드는 언젠가 이렇게 노래했다.


“사랑 따윈 논하지 않아, 우린 그저 취하고 싶을 뿐!”

(Manic Street Preachers, ‘A Design For Life’)


사랑 따윈 논하지 않고 그저 취하는 것. 그것이 바로 라블레가 추구하는 일이다.


사랑하는(*이것이 단지 수사적인 표현일 뿐이라는 것을 굳이 지적해야 할까? 이 또한 수사의문문일 뿐인데?) 그대들이여, 즐겨라. 그리고 허리에 좋게 몸을 편안히 하고 즐겁게 남은 부분을 읽도록 하라. 그리고 너희들, 당나귀 좆 같은 놈들아. 다리에 종양이 생겨 절름발이나 되어버려라!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나를 위하여 건배하는 것을 잊지 말라. 나도 즉석에서 축배를 들어 답례하겠다. (‘작가 서문’,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20쪽)


과연 도널드 서순이 그의 방대하고도 아름다운 다섯 권짜리 대작 <유럽문화사>(오숙은.이은진.정영목.한경희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에서 프랑스에 ‘국민시인’이 없는 이유를 분석하며 “라블레는 너무 상스럽고 분변학적(이라 국민시인이 될 수 없었다)”라고 말한 이유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는 또한 샹송가수들이 “라블레한테서는 외설적인 말놀이를 빌려왔다”고 언급하기도 하는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굳이 이 자리에 소개하는 것은 물론 내가 얼마전에 문제의 <유럽문화사> 전권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다. 적어도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무척 기쁘다.


한편 서순의 서술은 <세계문학의 구조>(조영일 지음, 도서출판b 펴냄)에 등장하는 ‘국민 작가’라는 개념을 둘러싼 조영일과 장정일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장정일은 서평을 통해 “조영일은 ‘국민 가수’ ‘국민 배우’ ‘국민 투수’에다 ‘국민 여동생’까지 있으니, ‘국민 작가’도 있는 줄 안다”고 조소했는데, 이건 사실 해당 논쟁의 매우 국지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니 이쯤에서 넘어가도록 하자.


<가르강튀아>의 주인공 가르강튀아의 출생 장면은 서순이 지적한 라블레의 ‘상스럽고 분변학적’인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때는 어느 봄날, 가르강튀아의 아버지 그랑구지에가 다스리는 유토피아에 잔치가 벌어진다. 그들은 ‘술을 더 잘 마실 수 있도록’ 36만7천14 마리의 소를 잡는데, 소 창자가 쉬이 상한다는 점을 고려해서 인근 주민들을 모두 모아 남김없이 먹어치우기로 결정한다. 알다시피 소 창자는 “누구나 손가락을 핥을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고, 가르강튀아의 어머니 가르가멜도 참 좋아하는데, 문제는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에 있다. 사려 깊은 남편인 그랑구지에는 아내의 건강을 위해 소식을 권한다.


“똥 껍데기를 먹으면 똥이 먹고 싶어진다오.”


하지만 자존감 충만한 신여성이었던 가르가멜은 남편의 충고를 따르는 대신 큰 통으로 열여섯 통, 중간 크기의 두 통하고 여섯 항아리 분량의 창자를 먹어치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약 5톤 분량의 창자를 뚝딱한 것이다. 세상에! 이토록 놀라운 인체의 신비를 라블레는 간단하게 논평한다. “얼마나 멋진 대변이 그녀 몸속에서 들끓었겠는가!”


아니나다를까, 저마다 양껏 먹고 마시며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가르가멜의 아랫배가 조금씩 아파오기 시작한다. 진통이 오는 걸까? 다시 한 번 다정한 말로 아내를 위로하는 그랑구지에. “암양처럼 용기를 가져요. 이 애를 얼른 낳아버리고 곧 다른 아이를 만듭시다.” 그런 남편에게 가르가멜 역시 살갑게 대꾸한다.


“아, 좋으실 대로 말씀하세요. 당신들 남자들이란! 그래요, 정말이지, 당신이 원하니 있는 힘을 다하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걸 잘라버렸다면 좋았을 것을!”


잠시 거세의 공포에 몸을 떨던 그랑구지에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 통증이 오면 두 손을 입에 대고 소리를 지르라고 이른 후 다시 즐거운 술자리로 돌아간다. 옛날 우리네 아버지들이 떠오르는 뭉클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얼마 후,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된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괴로워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즉시 사방에서 많은 산파들이 달려와서 밑을 만져보고, 나쁜 냄새가 나는 살덩어리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내장요리를 너무 많이 먹은 탓으로 (여러분이 항문에 붙은 창자라고 부르는) 직장이 늘어나며 그녀에게서 빠져버린 항문이었다. (46쪽)


세계문학사, 나아가 인류의 모든 예술 장르를 통틀어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탈장’ 장면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아직 그런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상상조차 하기 싫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산파 무리 중 “육십 년 이상 의술에 종사하며 솜씨를 인정받았던 더러운 차림새의 노파가 강력한 수렴제를 투여”했고, 그 결과 “모든 괄약근이 수축해서 닫혀버려 이로 물어 벌리기도 몹시 힘이 드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으니까. 그래도 탈장은 해결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곧이어 태어난 가르강튀아가 난생 처음으로 접한 광경이 제자리를 벗어난 어머니의 직장이 되는 상황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니까.


가르강튀아는 출생부터 남달랐다. 그는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대신 엉뚱하게도 “위쪽으로 솟아올라 공정맥으로 들어가서는 횡경막을 지나 (그 정맥이 둘로 나뉘는) 어깨 위까지 기어올라간 다음 왼쪽 길을 따라 왼쪽 귀로 나왔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술자리의 모든 사람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마실 것! 마실 것! 마실 것!”


물론 그가 목놓아 요구한 것이 어머니의 젖은 아니었다.


한편, 부어라 마셔라 흥겹게 놀고 있던 그랑구지에는 멀리서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돌연 복받치는 부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너 참 (목청이) 크구나!Que grand tu as!”라고 뇌까렸고, 바로 그것이 아이에게 가르강튀아(Gargantua)라는 이름이 붙여진 까닭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까닭이라고 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제2외국어로 중국어(첫 두 시험은 90점 이상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3년을 평균하면 40점을 넘지 않았다)를 배우고, 교양필수과목으로 초급일어(가타가나를 외우지 못해 D+를 받았고 재수강은 하지 않았다)를 수강한 내가 불어 발음을 알게 뭔가? 그렇다고 하니 그냥 그렇게 알 뿐이다.


<가르강튀아>는 이런 가르강튀아의 이야기다. 상스럽고 분변학적이며 우스꽝스럽고 또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이자, 중세 기사도 소설의 구조를 따라 주인공의 탄생부터 성장과 교육, 결정적인 전쟁(혹은 결투)에 승리한 후 마침내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상승 플롯의 이야기. 사실 주인공 또한 민간 설화 속의 주인공에서 빌려온 것으로, 당대에 이미 <거대한 거인 가르강튀아의 위대하고도 지고한 평전>이라는 작자 미상의 대중소설이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라블레 또한 서문을 통해 도용 아닌 도용을 흔쾌히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라블레의 작품을 단순한 답습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는 낡은 중세 기사도 소설의 형식을 비틀어 자신의 스타일로 전유한 것이다. “문화연구에서 전유는 어떤 형태의 문화자본을 인수하여 그 문화자본의 원(元) 소유자에게 적대적으로 만드는 행동을 가리킨다”라는 문학비평용어사전의 정의 그대로. 문학비평용어 따위 알고 싶지 않다면 국어사전을 찾아도 좋다. “~을 혼자 독차지하여 가지다”라는 풀이가 가리키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당대인들의 밤잠을 설치게 하던 기사도 소설이 아닌, 라블레가 독차지한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이야기니까. 비록 70년 후, 세르반테스와 돈 키호테와 산초 트리오에게 그들의 지분을 상당 부분 빼앗길 운명이긴 하지만.


라블레는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이 시대 속에서 소설을 과거의 희화적 개작, 즉 패러디의 장으로 삼음으로써 반소설anti-roman이라 불리워질 만한 문학적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프랑스 근대 여명기의 거인들 1:라블레>(이환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부 펴냄) 37쪽)


“이 아이를 보십시오. 이 아이는 아직 열두 살도 채 안 됐지만, 폐하께서 데리고 계신 전(前)시대의 공허한 말만 지껄이는 자들*과 오늘날의 젊은이들 사이의 차이를 충분히 알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87쪽)


(*역주에 따르면 “이 단어 mateologien는 그리스어를 전사한 것으로 신학자 théologiens를 암시하는 말장난이다.” 이런 말놀이는 라블레 문체의 또 다른 특징이다. 더럽기만 한 게 아니란 말이다. 물론 종종, 아니 자주, 더러운 말놀이를 즐기긴 하지만.)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수도사 출신의 의사이자 위마니슴 사상가이며 고위 관료와도 돈독한 친분을 나누던, 한 마디로 당대의 엘리트였던 라블레는 왜 이렇게 ‘상스러운’ 소설을 쓰게된 것일까? 대답은 바로 ‘거리’에 있다. 어쩌면 ‘미친’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 희대의 음악가인 모차르트 또한 사촌 누이에게 “잘 자요. 하지만 먼저 침대에 터져 나오도록 똥을 싸세요. 잘 자요, 내 사랑. 당신의 입속으로 당신의 똥꼬를 밀어넣어요” 같은 편지를 보내던 분변증(scatology) 환자가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하나의 작품을 단순한 정신건강의 소산으로, 다시 말해 병든 영혼의 배설물로 해석하는 건 재미없는 일이다. “일기는 일기장에 쓰세요”라는 댓글이 더는 재미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솔직히 좀 지겹지 않나?


“그런데 말씀입니다. (수도사가 말했다) 예쁘지도 착하지도 않은 여자는 무슨 소용이 있지요?

— 수녀원에 넣으면 되지. 가르강튀아가 말했다.

— 그렇지요. (수도사가 말했다) 그리고 속옷을 만드는 데 쓰지요.”

(238쪽)


만약 누군가 인터넷 게시판에 이런 글을 올린다면 “일기는 일기장에”라거나 “똥은 변기에” 같은 댓글을 달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런 댓글이 재치를 보증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물을지 모른다. “어라, 지난 주엔 ‘소설’이란 게 라블레의 엉덩이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 그게 그거 아냐?” 나는 이렇게 반박하겠다. 모든 텍스트에는 무릇 자기모순적인 부분이 있는 법이라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성경>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내가 방금 성호를 긋기 위해 잠시 타이핑을 멈췄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그리고 신께 맹세하는 바인데, 둘은 결코 같지 않다). 


그렇다, 라블레는 특유의 ‘상스럽고 분변학적’인 문체를 ‘거리’에서 빌려왔다. 


지배적인 문체는 뼈대 구실을 하는 그로테스크한 주제에 대응하는 그로테스크하고 희극적인 민중 문체인데 가장 정력적인 형태 속에 가장 강력한 표현이 드러나 있다. (…) 젊은 시절 프란체스코파 수사였던 라블레는 똑같은 샘으로부터(*거리 혹은 민중으로부터) 다른 누구보다도 ‘한결 순수하게’ 그것을 길어 올렸다. 그는 탁발승의 삶의 형식과 표현 형식을 그 원천에서 연구하였고 나름대로 독특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제 그는 그것을 떠나서 살 수가 없게 되었다. 비록 탁발수도회를 증오하기는 하였지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생생한 그들의 멋있고 소박한 문체는 그의 기질과 목적에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미메시스>(에리히 아우허바흐 지음, 김우창.유종호 옮김, 민음사 펴냄) 369쪽)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언어, 그 순박함과 유연성이 그 안에서 온갖 변신과 위장을 가능케 하는 언어, 그 풍요로움과 다양성이 세계의 모든 것을 담아 내는 언어 —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대학자가 되고도 남을 그는 터무니없게도 천박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 프랑스 근대 여명기의 거인들 1:라블레> 7쪽)


아무리 라블레라고 해도 이 더럽고 우스운 소설에 자신의 이름을 거는 일은 조금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라블레는 1532년에 발표한 첫 번째 소설인 <팡타그뤼엘>과 2년 후 발표한 <가르강튀아>를 알코프리바스 나지에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는 또한 아랍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알코프리바스의 직업을 (제5원소의 추출에 성공한) 연금술사라고 설정함으로써 작품에 신비한 분위기를 불어넣으려 한다. 하지만 480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의 시각에는 그저 희극적인 분위기를 배가시킬 뿐이다.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작품을 막 완성한 라블레에 앞에 나타날 수 있다면, 차라리 ‘지라르 드 풍자크’ 같은 귀족적인 이름을 권하는 게 어떨까 싶다(라블레는 두 소설이 모두 성공한 후 세번째 책부터는 라블레라는 본명을 사용한다. 물론 ‘의학박사’라고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는 건 어떨까. 라블레가 본명도 아닌 가명을 내세우면서까지 ‘상스러운’ 소설을 쓰고 또 발표한 목적은 무엇일까? 좋은 질문이다. 정말 좋은 질문이다. 비록 내가 던진 질문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좋은 걸 좋다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부족하고, 평소 그런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해온 나로서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차라리 비통한 심정으로, 이 자리를 빌려 내 작은 신념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음을 여러분께 밝히는 바다. 


아마 라블레의 심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앞서 우리는 라블레가 “세계와 인간의 발견”이라는 슬로건으로 요약할 수 있는 위마니슴의 대표적인 사상가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여러 현실적 이유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지만. 잠시 기억을 더듬어 고등학교 세계사 수업 시간을 떠올려보라. 


위마니슴은 중세의 신 중심적 세계관에 반기를 든 사상이다. 만약 라블레가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에 온다면, 유튜브에 올라온 중세 동영상을 보고 ‘싫어요’ 버튼을 눌렀을 거란 말이다. 어쩌면 어느 CF를 따라 “중세의 올가미! 중세의 덫! 중세의 감옥!”이라고 외쳤을 지도 모르지. 유행가나 음담패설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허섭스레기들을 작품 속에 끼워넣는 라블레의 솜씨를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을 일이다. 그렇기에 라블레는 자신이 만든 웃음 폭탄을 통해 낡은 가치관을 흔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나른한 국어시간에 그런 종류의 웃음을 가리키는 단어를 배웠다. 풍자, 혹은 해학, 혹은 골계미 같은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단어들을.


풍자를 몇 개의 범주로 분류하는 것은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그것들은 서로 교차하고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삶의 주체인 인간에게로 모아진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그의 삶의 실체는 무엇인가. 더 정확하게 묻자 — 그토록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장식된 외양 밑에 숨겨진 실체는 무엇인가. 풍자는 사물을 나타난 그대로 보기를 거부하는 시선에 의해 유도된다. 그것은 가시可視의 현상을 뚫고 진실에 육박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풍자의 최대의 효용은 바로 여기에 있다. 풍자적 웃음은 진실을 가로막는 위선, 기만, 가장의 두터운 벽을 허물어뜨리는 무기 — 그지없이 유연한, 그러나 놀랍도록 효율적인 무기이다. 이 웃음 자체가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눈 있는 자를 볼 수 있는 데까지 안내할 뿐이다. 풍자는 웃으면서 말한다 — 눈 있는 자들이여, 눈을 뜨고 보라. (< 프랑스 근대 여명기의 거인들 1:라블레> 154쪽)


눈 있는 자들이여, 눈을 뜨고 보라고?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영어 시간에 배웠던 “Wake up and smell the coffee!”(‘정신차리고 상황을 직시하라’는 뜻의 관용구)라는 표현을 비틀어 “Wake up and smell the shit!”이라고. 그것이야말로 ‘분변학적’인 문장들을 통해 라블레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봐, 일어나서 똥냄새 좀 맡아봐, 이게 세상이라고, 응? 정신 좀 차려! 어디서 구린내 안나?”


그렇기에 라블레의 소설 속에서 교황과 성직자, 왕과 판관, 부자와 관리, 과거의 위인과 당대의 유명 학자 등 모든 권력자들은 똥과 오줌을 뒤집어쓴 채 권력의 옷을 벗은 하나의 신체가, 기계를 연상시키는 하나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바로 그것이야말로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보편적인 요인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비극 작가는 주인공의 신체적인 측면에로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모든 요소를 피하려고 신경을 쓴다. 신체에 대한 배려가 끼어들면 희극성이 배어나올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뭘 마시지도, 먹지도, 몸을 따뜻하게 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가능한 한 그들은 어디 앉지도 않는다. 긴 독백을 하는 중에 앉는다는 것은 주인공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음을 상기하는 것이리라. 이따금씩 인간 심리에 밝은 면모를 보여주던 나폴레옹은 어디에 앉는다는 행위만으로도 비극은 희극으로 바뀌게 된다고 지적했었다." (<웃음>(정연복 옮김, 세계사 펴냄) 49쪽) 


물론 풍자가 만들어 내는 웃음에는 한계가 있다. “풍자는 빈정대는 웃음 뒤에 숨으며 대상과의 맞대결을 피한다.” 권력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분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정색하고 대응하기엔 쪽팔리기에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농담인 것이다. 안전하지만, 그만큼 위력은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라블레는 당대의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고지식한 교회에 의해 거푸 금서처분을 받기는 했지만) 큰 탈 없는 삶을 살 수 있었다. 라블레의 시대는 라블레가 생각했던 것만큼 멍청하고 경직된 사회는 아니었던 셈이다. 라블레에게는 잘 된 일이다. 국제행사 포스터에 쥐 그림 좀 그렸다고. ‘주적’이라는 나라의 트윗을 리트윗하며 장난 좀 쳤다고 사람을 구속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면, 밭에 나는 쇠고기라 불리며 흰 머리도 검게 만든다는 기적의 콩이 섞인 밥깨나 먹었을 테니까(네이버 댓글로 만족하는 흔한 네티즌이 되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아마 라블레라면 그런 상황에서도 이렇게 말했을 것 같긴 하다.


“똥이나 처먹여라!” (18쪽, 아니 19쪽)



프레시안북스 2013. 1. 25.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125154127&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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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으로 가득 찬 고대의 바다를 상상해보자. 우리에게 익숙한 생물들과 진화의 갈림길에서 사라진 낯선 생물들이 함께 우글거리던 그곳에 한 무리의 원시 양서류가 등장한다. 바다에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웃들의 생각에 의문을 던진 그들은 육지를 꿈꿨고, 육지를 향해 무모한 첫 걸음을 내딛었다. 정확히 말하면 첫 지느러미라고 해야겠지만(그들에게는 아직 발이 없었다). 


그들은 곧장 한계에 부딪힌다. 그들의 몸은 육지의 조건을 견뎌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지상의 삶을 엿볼 수는 있으나, 그것을 온전히 누릴 수는 없다. 죽지 않기 위해 다시금 바다로 —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그곳으로 — 돌아갈 수밖에.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조롱이다. 하지만 그들은 또 다시 육지를 찾을 것이다. 실패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웃음거리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일단 육지를 의식한 이상 그것은 불가피하다. 더는 바다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다. 일상에 신물을 느낀 인간은 보다 높은 차원의 세계로 이동하려, “정신과 상상력의 창조자가 되”려 하지만 정신은 인간을 고갈시킨다. 책을 읽는 일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집중력을 잃은 채 같은 페이지를 맴도는 자신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볼 수 있는가. 글쓰기를 비롯한 다른 정신노동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일에서는 도무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괴롭다는 것을 알지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다. 다시, 또 다시, 그리고 다시. 원시 양서류와 현생 인류의 이 고달픈 왕복 운동을 가리켜 콜린 윌슨은 ‘아웃사이더 문제’라 부른다. 


‘아웃사이더’의 근본 문제는 일상의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며, 그 일상의 세계가 무언가 지루하고 불만족스럽다고 느끼는 데 있다. 마치 최면술에 걸린 사람이 톱밥을 계란이나 베이컨이라고 믿으면서 먹고 있는 것처럼. (<아웃사이더> 445쪽)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계란과 베이컨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설령 톱밥일지라도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달리 먹을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느 여름 오후 옅은 잠에서 깨어나 텅 빈 방을 둘러보며 낯선 비현실의 감각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세차게 젓거나, 세수를 하거나, 차가운 물을 마시며 현실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눈앞의 계란과 베이컨을 톱밥이라고 의심하며 살아가기란 힘든 노릇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아웃사이더다.


콜린 윌슨은 <아웃사이더>를 통해 인류의 역사에 등장한 아웃사이더들의 계보를 쓴다. 카뮈,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헤르만 헤세, 헤밍웨이, 반 고흐, 카프카 등 쟁쟁한 예술가들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그의 펜 앞에 불려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아웃사이더>는 일종의 문예비평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젊은 윌슨은 한 권의 책에 아웃사이더 문제에 관한 모든 것을 담으려 했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아웃사이더로서 해결해야 했던 질문, 즉 “어떻게 현실을 살 것인가?”의 답을 찾아야 했다. 독특한 성찰과 기이한 활기로 가득 찬 윌슨의 처녀작 <아웃사이더>는 그렇게 탄생했다. 


윌슨은 먼저 <지옥>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아웃사이더를 소개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다 할 재능도 없고 완수해야만 할 사명도 없으며, 반드시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될 감정도 없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그는 호텔에 머물며 옆방의 여인들을 훔쳐보는 것으로 소일한다. 그는 볼 필요가 없는 것,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그것은 그의 현실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는 좀처럼 현실로 돌아갈 수 없다. 너무 깊게, 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웃사이더의 첫번째 정의가 도출된다. “아웃사이더는 깨어나서 혼돈을 본 인간이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 등장하는 로캉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나는 완전한 고독 속에 살고 있다. 나는 누구와 얘기하는 일도 결코 없다. 나는 받는 것도 없고, 주는 것도 없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의미와 목적과 효용으로 이루어진 일상을 나름대로 살아간다. 구토가 그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는 세상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정직한 관찰자였고, 깨달음과 함께 구토가 시작된다. 그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그날그날의 사건에 휩쓸려 기계처럼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텅 빈 인간’, 바로 속물에 다름 아니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구토가 나온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깨달음이다. 


다음은 우리에게 친숙한 <이방인>, 뫼르소의 차례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눈물 흘리지 않고, 사랑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사람을 죽인 후에도 별다른 죄의식을 갖지 않는 인간이다. 대단한 악인이라서가 아니다. 단지 느끼지 못할 뿐이다. 뫼르소는 로캉탱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느낌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별다른 감흥도, 반성도 없는 삶. 그가 사형을 선고 받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은 존재한다. 소설의 마지막, 처형을 기다리던 뫼르소에게 찾아온 각성이 그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어머니를 생각하고, 어머니의 삶을 이해한다. 그 자신의 삶 역시 의미로 빛남을 느낀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닮아 마침내는 형제 같음을 느끼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의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윌슨에 따르면 자유란 비현실로부터의 해방에 불과하다. 그것은 단순히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의미의 강렬함’ 즉 살아남으려고 하는 의지를 인간에게 불러일으키게 하는 극한상황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처형을 기다리던 뫼르소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윌슨은 계속해서 말한다. “자신의 자유를 요구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돌연 위기가 찾아오고, 구토를 느끼고 재판과 처형을 받게 되거나 심지어는 하등동물(카프카의 <변신>)로까지 전락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어떻게 자유를 요구한단 말인가? 사르트르는 ‘앙가주망(사회참여)’을 주장한다. 세상에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 무엇이든 택해 자신을 던짐으로써 의미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헤밍웨이가 택했던 말초적인 자극들 — 전쟁에 참전하고, 권투 시합을 하고, 투우에 열광하는 — 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윌슨은 생각한다. 자유에는 자유의지가 전제되어야 하고, 의지에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동기란 곧 ‘신념’의 문제다. 


어떤 것이든 그것이 가능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 한, 그것을 성취할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념이란 무엇인가의 존재에 대한 것임에 틀림없다. 즉 그것은 현실적인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자유란 결국 현실적인 것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웃사이더’는 그 비현실감 때문에 근원에서부터 자유와 차단되어 있다. 비현실의 세계에서 자유를 행사하는 것은 낙하하면서 도약하는 것과 똑같이 불가능한 것이다. (73쪽)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처음과는 조금 다르다. 윌슨은 나선형 계단을 오르듯 또 다른 작품들을 경유하며 새로운 층위에서 문제를 바라본다. 


아웃사이더는 진보를 추구한다. 그것은 사회의 진보가 아닌 개개인의, 차라리 인류 전체의 진보다. 그는 평범한 인간의 조건을 벗어던지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환경에 얽매어 있다. 나무에 집을 짓고 사는 대신 아파트에 살며, 사냥을 하는 대신 직장에 나가 돈을 벌고 마트에서 장을 볼 뿐이다. 추위를 피해야 하고, 더위를 견디지 못하며, 허기와 졸음에, 그 밖의 모든 인간적인 본능에 무릎 꿇는 존재다. 그렇게 약한 존재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마찬가지이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라고? 아웃사이더는 당연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니, 당연함을 당연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윌슨은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인간의 약함을 깊이 명상하면 최후에는 반드시 ‘종교적인 사고’, 헤밍웨이의 소위 “잃을 수 없는 것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에 도달한다. 즉 단념과 규율의 논리로 발전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83쪽)


갑자기 튀어나온 종교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 <매트릭스>의 경우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매트릭스의 세계는 최면에 걸린 노예들의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톱밥을 계란이나 베이컨이라고 믿으면서 먹고 있는’ 세계다. 네오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였지만, 빨간 약을 먹은 후 현실을 마주한다. 다시 한 번, “아웃사이더는 깨어나서 혼돈을 본 인간이다.” 깨어난 그가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은 토하는 일이었다. 네오는 바로 아웃사이더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비현실의 감각을 버릴 수 없다. 네오는 자신이 사람들을 구원할 ‘그(The One)’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빨간약을 선택한 그는 현실을 보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유를 요구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해서 회의하고 번민할 뿐이다. “어떤 것이든 그것이 가능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 한, 그것을 성취할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마침내 그가 그것이 가능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믿는 순간, 자신의 자유를 온 몸으로 요구하는 순간, “잃을 수 없는 것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나약한 인간을 구원하는 신이 되었다(이제 그는 더 이상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구원이다. 물론 윌슨이 분석하고 있는 것은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가 아니고, 그가 요청하는 것도 인류의 구원이 아니다. 그것은 비현실과 자초한 무기력으로부터 아웃사이더 자신을 구원하는 일이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일이다. 윌슨은 어떤 질서의 개념을 인용하고 그것으로 사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생활은 겁쟁이의 생활이며, 거기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아웃사이더의 문제는 ‘인사이더’가 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아웃사이더는 아웃사이더로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자기를 실현함으로써 삶을 새롭게 발견(혹은 발명)하고, 또 구원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신과 감정과 육체를 조화시키며, 그런 조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현실을 살아야한다. 생각에 빠져 행동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것이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육체노동을 하며 남는 시간을 활용해 홀로 책을 써나간 스물네 살의 아웃사이더 콜린 윌슨이 우리들에게 하는 말이다. 아마 누구보다 그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아웃사이더>가 대단한 고전이라는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출간 50년이 넘은 지금도 그의 저작은 여전히 강렬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거장들의 소설이 있고, 그 속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젊은 작가의 열정이 있다. 어느새 나이를 먹어버린 내게 그의 책이 예전만큼 충격을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어린 시절 그의 책을 읽었던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콜린 윌슨은 처녀작 <아웃사이더>의 놀라운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웃사이더로 남았고, 평생에 걸쳐 아웃사이더 문제와 문학뿐 아니라 범죄와 불가사의와 신비사상 등을 연구하며 다양한 분야의 책을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돌아보는 <아웃사이더>의 마지막 부분은 새삼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한 사람이었다.


자기보존의 본능이 내면 확대의 고통에 반항하고, 정신적인 태만에 기울기 쉬운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파도같이 높아져가는 것을 하찮게 여기며, 자기의 눈으로 보고 자기의 손으로 만진 체험의 양을 한정시키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존재의 민감한 부분을 그것에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대상에게 드러내 보이며, 어떻게 하든지 전체로서 사물을 보려고 고투하는 것, 그것이 개인에게 맡겨진 문제다. 개인은 이 긴 노력을 아웃사이더로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성자(聖者)로서 마칠지도 모른다. (438쪽)


고교 독서평설 201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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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3-01-1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웃사이더 읽었을 때의 벅찼던 감동이 다시 느껴져요.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책인데 팝님의 소개를 따라가다보니 그래 이런 말이 있었지, 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아웃사이더야' 하면서 아웃사이더 패밀리를 결성해서 (실지로는) 먹자계를 만들었던 기억도 나고 그렇네요.
전 기존 <이방인>은 이제 다 읽고, 최근에 나온 신간인 그림이 있는 <이방인>을 읽고 있어요. 뫼르소는 여전히 내게 낯선 사람인 듯한데, 그림을 겸해서 보니 조금은 알 듯도 해요. 뫼르소를 이해하는데 위의 저 <아웃사이더>가 도움이 되겠어요. 많은 이사 덕에 저 책은 새로 사야 될 책이네요. 추천 꾸욱.

poptrash 2013-01-21 20:21   좋아요 0 | URL
비록 원고를 쓰기 위해 책을 다시 읽으며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받지 못했지만, 정말 그때의 기억은 생생하게 떠올랐어요. 어린 나이에 이런 글을 쓰다니, 콜린 윌슨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함께. 저도 <일러스트 이방인> 읽었습니다. 그림이 있고, 행갈이를 다르게 했을 뿐인데, 느낌이 정말 다르던데요 ㅎㅎ

2013-01-25 0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6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작위로 재생시켜 놓은 음악파일 중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흘러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린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난 누구도 필요하지 않았어, 사랑은 그저 장난이었지,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가버렸네…”라는 가사를 가지고 있는 그 노래를. 에릭 칼멘이 작곡하고 브리짓 존스가 목 놓아 불렀던 노래의 제목은 '올 바이 마이셀프'. 라흐마니노프의 곡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노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대신 읽던 책을 잠시 내려놓았을 뿐이다.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을 때 나는 ‘모두에게 복된 새해 — 레이먼드 카버에게'라는 묘한 제목을 가진 단편을 (다시) 읽던 중이었고, 마침 한 등장인물이 “저도 말합니다. 날씨, 음식, 음악, 책 말합니다. 저는 라흐마니노프 좋아합니다.”라는 대사를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당신이 피아노를 조율하리라고도,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하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남편이 대꾸했다. 나 역시 그들이 라흐마니노프를 이야기하리라고도, 그 순간 라흐마니노프의 곡이 흘러나오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새해를 앞둔 마지막 날, 피아노를 조율하기 위해 아내의 친구가 집으로 찾아온다. 사트비르 싱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도인이다. 남편은 그의 방문이 달갑지 않다. 아내의 ‘대화 상대’가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싫고, 아내도 없는 집에서 낯선 외국인과 시간을 보내기도 싫지만, 그렇다고 매몰차게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 결국 그는 문을 열어 이방인을 받아들인다.


사내는 피아노를 조율하고, 남편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불편한 시간을 보낸다. 오랜 시간 방치한 피아노는 상태가 좋지 않다. 서툰 한국말로 사내가 묻는다. “이 피아노, 어떻게, 이렇게 왔습니다.” 피아노가 그의 집에 오기까지의 사연을 되짚는 남편. 어린 시절 체르니 40번에 들어갔지만 나오지는 못한 아내와, 아이가 치는 피아노 소리가 흐르는 가정을 상상하던 그 자신과,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그들 부부와 한 노인이 얽힌 복잡한 사연이다. 문득, 남편은 깨닫는다. 익숙하다는 핑계로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 않은 채 그저 습관처럼 아내를 대했던 자신을, 그런 자신 때문에 외로웠을 아내의 마음을. 이제 남편은 아내가 돌아오기를, 그들 모두에게 새로운 해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낯선 손님이 조율한 것은, 실은 남편의 마음이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의문은 남는다. 두 부분으로 나뉜 제목에서 ‘모두에게 복된 새해’는 그렇다 쳐도, ‘레이먼드 카버에게' 는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대답은 김연수가 번역한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대성당’에 있다. 


카버의 소설 역시 아내 친구의 방문으로 시작한다. 그는 맹인이고, 오래 전 아내가 그를 위해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하며 만난 사이였다. 그들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편지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지속해왔고, 아내를 잃고 여행을 떠난 맹인이 이제 그들의 집에 하룻밤을 묵으려 들른 것이다. 물론 남편에겐 그의 방문이 달가울 리 없다. 아내와 그가 계속해서 연락했다는 사실이 싫고, 낯선 맹인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기도 싫다.


마치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아내와는 달리 남편은 그와의 시간이 불편하기만 하다.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우며 잡담을 나눠보지만 불편함은 도무지 가시지 않는다. 결국 남편은 습관처럼 TV를 튼다. 아내가 눈살을 찌푸리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TV에서는 대성당을 다룬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손님에게 남편은 대성당을 설명하려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때 맹인이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대성당을 그려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남편이 펜을 잡자 맹인이 그의 손을 잡았고, 그들은 손을 맞잡은 채 대성당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림이 어느 정도 완성되자 맹인은 그에게 눈을 감아보라고 말한다. 남편은 눈을 감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는 순간적으로 맹인이 ‘보는 세계’를 ‘본’ 것이다. 그가 맹인과 함께 그린 것은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지레 포기한 타인의 세계였다. 그는 말한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어느덧 새해다. 지난 새해 다짐의 대부분을 지키지 못한 채 우리는 또 다시 나이를 먹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우리는 여전히 삶에 서툴다. 소중한 사람은 물론 많은 순간 자기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은 누구도 필요하지 않고, 사랑도 그저 장난이었던 그 시절로부터 한 치도 자라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런 우리에게 아직 늦지 않았다고, (음악과 그림이 있는 한)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고, 그러니 지레 겁먹고 문을 닫지 말라고 말하는 이 두 편의 소설은 퍽 위안이 된다. 하지만 이 글은 소설이 아니고, 나 역시 누구를 위로할 주제가 못 된다. 그러니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해야겠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


행복한 동행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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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라블레는 어떻게 방귀를 뀌었는가 또는 그의 엉덩이가 품고 있던 놀라운 것들에 관해서



프랑수아 라블레는 <가르강튀아>의 서문을 다음과 같은 돈호법으로 시작한다. 


고명한 술꾼, 그리고 고귀한 매독 환자 여러분. (내 글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에게 바치는 것이다.)


나는 그를 따라 이 글을 이렇게 시작할 생각이다.


고명한 트위터리언, 그리고 고귀한 소비자 여러분. (이하동문) 


그러니 쉴 새 없이 갱신되는 타임라인과 시시각각 우리를 유혹하는 물건들의 목록 사이에서 바쁜 시간을 쪼개 이 글을 보아주시는 당신들에게 먼저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것이 사람 된 도리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나는 도리 없는 사람이므로, 인사치레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자.


그렇다, 아무리 도리 없다 한들 사람은 사람이다.


라블레 또한 도리 없는 사람이었다. 1483년(혹은 1493년)에 태어나 1553년 세상을 떠난(것으로 추정되는)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 겸 수도사 겸 의사 겸 인문주의자. 과거를 미화하고 또 신비화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우리의 역사 교육 덕에 이런 교과서적 설명이 그에게 어떤 후광과 거리를 덧씌운다 하더라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의 이름을 딴 라블레시언Rabelaisian이라는 단어를 보라. 흔히 “라블레 풍의(섹스와 인체를 풍자적으로 다루는)”라고 알려진 그 단어의 뜻을 아서 골드워그는 이렇게 정의한다. 


천하고 무식한 유머. 사내아이들이 방귀 소리를 흉내 내며 놀때 ‘라블레시언’이라고 한다. (<이즘과 올로지>(이경아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548쪽)


‘적확하다’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뿡뿡, 뿌우웅웅, 뿌루룽, 뿡! — 이것이 바로 ‘라블레시언’이다. 


라블레의 위마니즘(humanisme) 또한 마찬가지다. 보통 인문주의, 인본주의 등으로 번역되는 그 단어의 뜻을 이 자리에서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만약 그것이 고작 몇 개의 문장을 통해 밝혀질 수 있는 것이라면, 두꺼운 책과 유료 강의를 통해 우리를 깨우쳐주시는 모든 선생님들의 노고를 무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미슐레가 창안하고,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널리 알려진 “세계와 인간의 발견”이라는 슬로건으로 자세한 설명을 대신하도록 하자. 


라블레의 경우, 그가 발견한 것은 똥이었다. 당신이 오늘 아침, 혹은 점심, 아니면 어제, 적어도 지난 한 주 동안 한 번 이상 보았음직한 바로 그것 말이다(다시 보니 이 말은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못한 것 같다. 무심한 서술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을 세상의 모든 변비 환자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참고로 본 필자가 그것을 본 것은 바로 어제였다).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온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다시 말해 라블레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연작)를 통해 우리에게 선사한 것은 먹고 마시고 잠자고 사랑하고 싸고 살아가며 결국엔 죽는 인간의 모습이다. 물론 라블레가 구태여 그 사실을 지적하기 전에도 인간은 그런 존재였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말은, 생각보다 자주, 생각처럼 당연하지 않다. 당연함은 언제나 동시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라블레의 시대에 그의 작품들은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다. 여전히 중세의 신 중심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던 시절이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현세의 가치들은 터부시되었고, 먹고 마시고 잠자고 사랑하고 싸고 살아가는 존재가 느끼는 육체적 쾌락은 외설스럽고 음탕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니 그의 작품들이 교회에 의해 몇 번이고 거듭해서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놀랍지 않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라블레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 심지어 프랑스에서조차 라블레를 단순한 인본주의적인 사상가로, “유희, 활기, 기발, 음란, 웃음” 등 그의 작품의 진정한 진가를 무시한 채 '진지성(眞摯性)’의 표본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하니, 동서를 막론한 우리 시대의 교육이 추구하는 목표라는 것이 하나도 놀랍지 않아 코가 막히는 느낌이다. 쿤데라는 라블레에 대한 ‘팬심’으로 이런 현실을 비난한다.


그것은 아이러니나 기발한 것 등의 거부보다도 더 나빠. 그것은 예술에 대한 무관심, 예술의 거부, 예술에 대한 거부 반응이고 일종의 ‘미조뮈즈’*야. 라블레의 작품을 일체의 미학적 성찰에서 벗어나게 만들기 때문이지. 사료 편찬과 문학 이론이 점점 더 미조뮈즈해지고 있기에, 오직 작가들만이 라블레에 대해서 흥미로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어. ('라블레와 미조뮈즈들에 대한 대화’, <만남>(한용택 옮김, 민음사 펴냄) 108~109쪽)


(*뮈조뮈즈misomusist : 반문화주의 혹은 반문화주의자. 쿤데라의 <커튼>에는 주석이 없다. 그래서 나는 검색을 통해 어느 독자가 민음사 카페에 쓴 항의문을 통해 비로소 이 단어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시대인가! 


참고로 쿤데라의 책에 주석이 없는 이유는 “쿤데라는 전 세계에 출간되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 어떤 주석이나 해설이 달리는 것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민음사 판 쿤데라 작품에는 주석과 작품 해설이 없습니다. 또한 작가 약력 역시 쿤데라의 요청대로 단 두 줄로 실리는 형편입니다. 제3자의 해설에 따라 독자들의 판단과 의견, 혹은 감동까지 좌지우지되는 것을 쿤데라가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작가인가!)


물론,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 (축복받은) ‘작가’이고 그렇기에 라블레에 대한 ‘흥미로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는 부분일 것이다. 너무 아니꼽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는 자신이 틀림없는 작가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을 통해서.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이야기는 유럽의 소설이 모든 규범에서 벗어나 막 태어나기 시작할 무렵에 쓰였다. 그 책들에는 미래의 소설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거나 버려질, 어쨌든 전부 우리에게 영감으로 남게 될 가능성들이 가득 차 있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일, 지적 도전, 형식의 자유 사이를 거닐고 있다. (<커튼>(박성창 옮김, 민음사 펴냄) 구판 110쪽)


과연 쿤데라의 말은,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 한물 간 ‘386 취향의 소설가’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경청할 가치가 있다.


라블레와 그의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확고한 것으로, 방귀의 뒤를 따르는 똥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규정되기 직전, 마치 어떤 예감처럼 엉덩이를 간질이지만 그것이 된똥인지 물똥인지 옛날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회충인지 단순히 항문에 난 털인지 혹은 그저 싱거운 헛방귀인지 알 수 없는 순간, 다시 말해 모든 가능성으로 충만하던 시절에 등장했다. 


소설은 된똥이나 물똥, 회충이나 제모가 필요한 항문털, 헛방귀가 될 수 있었고, 단지 차가운 곳에 엉덩이를 오래 붙인 탓에 발병한 치질이나 치루일 수도 있었지만, 라블레의 등장 이후, 그의 뒤를 이은 작가들과 완장을 찬 ‘미학적 검열관’들에 의해 하나의 장르로 규정된 것일 뿐이다. 소설이란 다름 아닌 ㄸ…… 아니, 라블레시언한 비유는 이쯤에서 그쳐야겠다. 대신 이것을 ‘라블레의 엉덩이’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상자를 열기 전까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그의 엉덩이가 소설을 세상으로 내보내기 전까지 우리는 소설이 어떤 것일지 알 수 없었다는 의미에서.


그것이 바로 쿤데라가 라블레의 책들을 가리켜 “미래의 소설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거나 버려질, 어쨌든 전부 우리에게 영감으로 남게 될 가능성들이 가득 차 있다”고 말한 이유다. 또한 움베르토 에코가 포스트모던이란 단어가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현실을 불평하며 “만약 <포스트모던>의 의미가 이런 것이라면, 라블레 또한 포스트모던이다”라고 쓴 이유이기도 하다(거짓말이다. 에코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맥락이 다르다. 다만 내겐 논거를 보충할 권위 있는 이름이 필요했을 뿐이다).


나아가 그것은 ‘요설’이라는 다소 ‘과거 지향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코너가 라블레와 함께 시작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참고삼아 덧붙이자면 코너명은 프레시안북스 편집부의 제안이다. 평소 내가 쓰고 있는 글을 그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적절한 예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내게도 양심이란 것이 있는데 “요설饒舌 :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함”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한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내가 생계를 위해 이 지면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둘째로 치고라도 말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가 이 자리에서 다루게 될 소설들의 공통점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속으로만 생각했던 ‘우스운 소설들의 계보’라는 제목처럼, 이 자리는 우스운 소설들을 위한 자리이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말이 많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혹은, 지금 생각난 건데, ‘요설’이란 단어가 ‘요사스러운 소설들’의 약자라고 우기는 건 어떨까? 만약 모두의 예상과 달리 이 코너가 충분히 길게 살아남을 수 있다면, 언젠가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을 다루게 될 날도 올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잠깐만 말 끊지 말고,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았…, 아니 도대체 뭐하자는 거요?).


잠깐, 이쯤에서 당신은 물을지도 모른다, 아니, 물어야만 한다. 

도대체 라블레가 썼다는 그 <가르강튀아>인지 <팡타그뤼엘>인지가 무슨 내용인데?


좋은 질문. 그것이 바로 다음 시간에 우리가 알아볼 내용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가르강티아.팡타그뤼엘>은 웃긴, 무엇보다 정말 더럽게 웃긴 소설이다. 물론 이때 ‘더럽다’는 ‘어떤 정도가 심하거나 지나치다’는 5번의 뜻과, ‘때나 찌꺼기 따위가 있어 지저분하다’는 1번의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당신들 모두의 쾌변을 빈다.



2013. 1. 11. 프레시안북스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111150346&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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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3-01-18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히히. 저는 첨에 '요설'이란 단어를 접하고는 아싸~ 이제 팝님이 요사스런 소설을 소개시켜주시려는구나. 신난다! 생각했더랬어요. 하하.
요설의 뜻이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함'의 의미라면 더 환영인데요? 팝님의 설명은 들을수록 푸욱 빠지는 뭔가가 있어서 말이지요. 좀더 길게, 조금만 더 기일게, 를 주장하는 바입니다. 에헴.

<가르강튀아> 로 시작하는 이 코너, 환영입니닷. 저도 이 책 다시 읽으면서 따라독자 노릇하렵니다. 변비쟁이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은 소설이긴 합니다.ㅎ

poptrash 2013-01-21 20:19   좋아요 0 | URL
예리하신 달사르 님 ㅎㅎ 저도 요설이란 제안을 들었을 때 '요사스러운 소설'이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어요. 늘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는 더 길게 쓸게요. ^^
 

190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빅토르 E. 프랑클은 생의 말년, 질병으로 눈이 먼 상황에서 완성한 회상록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의 어머니는 오래전에 프라하에 정착한 명문 가문에서 태어났다. 프라하에 살았던 독일 작가 비너Oskar Wiener가 어머니의 삼촌인데, 마이링크Gustav Meyrink는 자신의 소설 <골렘>에서 비너를 불멸의 인물로 형상화했다. (11쪽) 


자신의 회상록을 어머니의 출생으로 시작하며 어머니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 프랑클 박사는, 마이링크의 소설 <골렘>을 언급함으로써 문학에 대한 조예를 은근히 뽐내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회상록의 세 번째 문장을 프랑클은 이렇게 쓴다. 


나는 오래전에 실명한 그 당숙 어른이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비극 : 실명, 수용소, 죽음. 프랑클 자신이 그것을 목격했다고 밝힘으로써 비극은 완성된다. 수용소, 그는 그곳에 있었다. 눈이 먼 당숙 어른이 죽어가던 바로 그 순간에.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갈 뿐이다. 12세기 유대 성경과 탈무드의 해설자였던 라쉬Raschi의 후손이며, 프라하의 ‘고귀한 랍비 뢰브’ 마하랄Maharal의 후손이기도 한 그의 어머니에 대하여. 프랑클은 그런 사실을 예전에 족보를 살펴보다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나는 그 문장을, 그 문장을 감싸고 있는 문단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의 태도, 마치 정육점 주인이 고기를 다루듯 무심히 비극을 다루는 그의 태도는 나를 놀라게 했다. 이유가 무얼까. 나는 이미 그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래 전 나는 강제수용소의 체험을 담은 그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었고,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레포트를 쓰기도 했다(내 기억은 종종 틀린다). 다른 많은 독자들처럼 나 역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 다음 날 아침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많은 것들이 잊혀진다. 그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어쩌면 살아낼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질문 — 평생 잊히지 않을 끔찍한 경험을 한 사람은, 어떻게 그 기억과 함께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말하자면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는 그 대답이다.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끌려간 그는 평생 잊히지 않을 끔찍한 경험을 했고, 그 기억과 함께 남은 생을 살았다. 물론 그것은 그의 삶이다. 우리 모두는 자기 몫의 삶을 산다. 날마다 스타벅스의 메뉴판만큼이나 다양한 문제들을 마주하며, 때론 고심하고 때론 아무 생각 없이 나름의 답을 내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대형서점의 평대를 가득 채운 책들을 보라. 아니, 스마트폰이면 충분하다.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블로그와 각종 게시판과 댓글을 통해 자신을 주장하는 문장들, 그 뒤의 삶들, 더는 보고 싶지 않지만 나도 모르게 들여다보게 되는 모든 것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삶과 많은 답이 있는데, 게다가 우리는 강제수용소에 끌려갈 일도 없는데, 이미 세상을 떠난 어느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샌 퀜틴 형무소의 한 수인이 그의 책을 읽고 쓴 독후감의 한 구절을 빌려, “프랑클은 자신의 삶을 글로 쓰는 사람이며, 그 글처럼 사는 사람”이었다고. 프랑클 자신의 말을 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다른 이의 책을 위해 쓴 헌사에서 프랑클은 이렇게 말했다. “피로 글을 쓰는 것은 쉽다. 그렇지만 내 피로 글을 쓰는 건 쉽지 않다.” 그는 그 자신의 피로 글을 쓴 사람이다. 만인의 멘토를 자처하며 그럴듯한 말 부스러기를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무슨 일이든 극복해라. 오물을 뒤집어써도 즐거워해라.”(37쪽)


이것은 프랑클의 문장이 아니다. 어느 화장실에서 그가 본 낙서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 내뱉을 수 있는 문장이다. 요즘은 오물을 뒤집어 쓴 적도, 그런 상황에서 즐거워한 적도 없는 사람들이 다른 이를 위로한답시고(실은 가르친답시고) 남의 피로 써대는 문장이고, 그렇게 닳고 닳아 의미가 사라진 문장이다. 하지만 프랑클은 웃지 않는다. 그가 그 낙서를 본 장소는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의 화장실이었다. 그건 그런 문장이 아니었다. 충분하다는 건 바로 그런 뜻이다.


그건 결국 책임의 문제다. 스스로 내뱉은 말의 무게를 책임지지 않을 때 말은 공허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아니 나는, 그런 공허한 말놀이에 이제 진저리가 난다. 


나는 자살하는 사람의 결심을 존중한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한 생명이라도 살리고 싶은 내 원칙도 존중받기를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칙을 나 스스로 배신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동반 자살을 기도한 노부부가 우리 병원으로 실려 왔을 때였다. 아내는 죽고 남편은 사경을 헤맸다. 나는 남자를 살려야 할지 갈등을 하다가 결국 애써 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자가 목숨을 구하게 되면 홀로 아내의 무덤에 가야 할 텐데, 내가 그 책임을 질 수 있을지 갈등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또 있다. 치료가 불가능하여 오래 살 수 없으면서, 갈수록 고통이 심해지는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런 고통 속에도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런 원칙적인 가능성은 극도로 신중하게 보여줄 수 있고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런 한계 속에서 자아실현의 영웅주의는 단 한 사람에게만, 즉 자기 자신에게만 요구해야 한다. 그와 같은 문제적인 상황은 ‘나치한테 고개를 숙이느니 차라리 강제수용소에 가는 게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한테도 적용될 수 있다. 그 주장은 일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안전한 외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이 다 끝난 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판결을 내리기는 쉬운 법이다. (118~119쪽)


그러니 나는 이 자리에서 그의 삶을 요약하지 않을 것이다.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라는 한 권의 짧은 책을 통해 프랑클 자신이 이미 끝낸 일이다. 그 책에 대한 나름의 평을 늘어놓을 생각 또한 없다. “일이 다 끝난 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판결을 내리기는 쉬운 법”이니까.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 역사의 오물을 뒤집어 쓴 채, 부모와 어린 부인과 당숙과 수많은 친지들과 그보다 많은 낯선 이들의 죽음을 목도하면서도 끝내 살아남아 로고테라피라는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킨 인물을 두고 이런저런 군소리를 할만한 배짱이 내게는 없다.


나는 다만 이렇게 말할 생각이다. 비극 — 우리가 보기에 그것은 프랑클의 삶이었지만, 프랑클에게 삶은 비극이 아니었다고. 어쩌면 스스로 내뱉은 공허한 말들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우리의 삶이야말로 비극인지도 모르겠다고. 만약 그렇다면, 프랑클 박사의 처방은 약간의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희망과 의미만큼 공허한 말은 달리 없다고 생각하는 당신이라면 더더욱.


나는 이미 1929년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갖게 하는 세 가지 가치와 가능성에 대해 구상했다. 그 세 가지 가능성은 바로 우리가 하는 행동, 우리가 하는 일, 그리고 경험, 만남,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설령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운명(우리는 이것을 불치병이나, 수술이 불가능한 악성종양이라고 말한다)과 대결한다고 해도, 우리는 인간의 능력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인 능력, 즉 인간의 고통을 인간의 업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증언하면서 삶의 의미를 쟁취할 수 있다. (92~93쪽)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회상록의 마지막을 프랑클은 이렇게 썼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나는 프랑클이 말한 의미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우리 딸의 이름은 가브리엘레이고, 사위는 프란츠 베젤리이다(그는 빈 대학 물리학과 교수이다). 그리고 손주는 카타리나와 알렉산더이다.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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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까지 마감해야 할 원고를 시작하지 못 해, 공연히 지난 글을 들추어보는 새벽. 이곳에 옮기지 않았던 언젠가의 원고를 올린다. 의미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지도 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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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1-09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올해 첫독서로 삼아서 무척 반가운 리뷰에요. 지금은 죽음의수용소를 읽고있어요. 좀 늦었지만. 그의 회상록을 먼저 선택했어요. 왠지 그러고싶어서요. 대단한 기운을 느끼고 있습니다.

poptrash 2013-01-10 13:56   좋아요 0 | URL
정말 빅토르 프랑클 박사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아마 저는 절대 알 수 없겠죠.

수연 2013-01-10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팝님의 이 글 읽는 동안, 그래서 이 책을 구하러 막 집을 나서려고 합니다. 추운 날, 감기 조심하세요 팝님.

poptrash 2013-01-10 13:57   좋아요 0 | URL
날이 도무질 풀리지 않네요. 책 재미있게 읽으시길. 지인맘 님도 감기 조심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