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다시 한 번, 라블레의 실패한 농담 그리고 팡타그뤼엘의 거대한 입에 관하여



격주로 연재되는 이 코너도 어느덧 4장에 접어들었으니 꼬박 두 달 동안이나 라블레의 거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셈이다. 지겹다고? 나도 그렇다. 당신은 그저 한숨을 쉬며 창을 끄면 그만이겠지만, 나는 라블레에 대한 또 한 편의 글을 써야만 하는 입장이다.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 어쨌거나, 아직도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고 있을 당신을 위한 마지막 요점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마침 적당한 구절이 있다.


모든 것이 미치광이 같은 소극이지만 라블레는 끊임없이 변하는 생각의 흐름, 문체와 지식의 모든 범주를 의도적으로 뒤죽박죽으로 혼성하는 기발한 생각으로 그것을 채우고 있다. (에리히 아우어바흐 <미메시스>(김우창.유종호 옮김, 민음사 펴냄) 373쪽)


말인즉슨,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이야기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당신 잘못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나의 잘못도 아니다. 전적으로 라블레의 잘못이다. 3장에서 우리는 “라블레는 재치있는 트윗으로 사회를 조롱하고 풍자하며 수많은 팔로워들을 거느리던 르네상스 시대의 파워 트위터리언에 불과한 걸까?”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지만, 만약 그가 오늘날의 글쟁이였다면 링크에 덧붙인 “쯧쯧쯧, 이런 게 글쟁이라고”,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바보가 여기 있네요” 같은 조롱과 함께 타임라인을 떠돌고 있을 게 분명하다. 놀랍지만 딱히 쓸모는 없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우리의 문해력은 나날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 세상의 평범한 이치다.


라블레는 바로 그 ‘뒤죽박죽’인 이야기를 통해 중세적 가치관을 폐기하려 한다. 


게다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라블레의 목적은 중세적 사고방식과 전면으로 상충된다. 이것은 개개 요소에조차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중세 후기의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지리적으로, 우주론적으로, 종교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일정한 뼈대 안에 한정되어 있다. 이들은 한 번에 사물의 한 국면만을 제시한다. 다양한 사물과 국면을 취급해야 할 때는 일반적인 질서라는 일정한 뼈대 속에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시도한다. (375쪽)


아우어바흐가 묘사하는 중세의 상황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일정한 뼈대 속에 사물의 다양한 국면을 욱여넣어 제시하는 것 — 이것은 이데올로기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수꼴’과 ‘좌좀’과 ‘깨시민’과 ‘진신류’ 들이 오늘도 하고 있는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을 ‘수꼴’과 ‘좌좀’과 ‘깨시민’과 ‘진신류’로 지칭하며 행해지는 일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러니 구태여 움베르토 에코의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라는 책 제목을 들먹일 이유도, 실은 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았다는 고백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신 얼마 전 소소한 화제가 되었던 한 칼럼을 떠올려보자. 정희진은 경향신문 칼럼(2013. 2. 15.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을 통해 “쉬운 글을 선호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쉬운 글은 내용이 쉬워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여서 쉬운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비슷한 이야기다. 물론 누군가는 그녀의 칼럼에 대해 “당신 글이야말로 이데올로기여서 불편하다”라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모든 칼은 그것을 휘두른 사람을 향해서도 겨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블레의 전략은 다르다.


그러나 라블레의 전체적인 노력은 사물이나 사물의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국면과의 희롱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완전한 혼란상을 띠고 있는 현상을 독자에게 보여 줌으로써 현상을 바라보는 일정한 습관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리하여 비록 위험을 무릅써야 하기는 하지만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세계의 큰 바다로 독자를 꼬여내는 데 힘쓴다. (<미메시스> 375쪽)


라블레는 내용이 아닌 형식, 차라리 ‘쓰기’ 자체를 통해 세계와 대립한다. 아우어바흐의 설명은 앞장에서 살펴본 바흐친의 주장을 조금 ‘쉽게’ 풀어쓴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 바흐친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어렵게 쓴 함량미달의 글쟁이인가? 혹은, 아우어바흐야말로 복잡할 수밖에 없는 내용을 일정한 뼈대에 억지로 욱여넣어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바꾼 위험한 글쟁이인가? 글쎄, 나는 별로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해야겠다. 혹시라도 궁금한 독자가 있다면 직접 알아보세요.


다만 분명한 것은 <미메시스>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아우어바흐가 모든 작품을 재현과 모방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팡타그뤼엘의 거대한 입과 그 속에 재현된 세상의 모습에 주목한다. 이런 이야기다.


팡타그뤼엘의 군대가 길을 가던 중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팡타그뤼엘은 혀를 내밀어 군대가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가려준다. 이때, 화자가 혀 위를 기어올라 입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산과 같은 거대한 바위(치아)들과, “큰 들판과 큰 숲들, 그리고 리옹이나 푸아티에보다 작지 않은 큰 도시들을” 본다. 깜짝 놀란 그가 양배추를 심고 있던 노인에게 묻는다.


“친구, 자네는 무엇을 하고 있나?”

— 양배추를 (그가 말했다) 심고 있습지요.

— 그런데 왜, 그리고 어떻게? 내가 말했다.

— 아, 나리, (그가 말했다) 누구나 절구처럼 무거운 불알을 가질 수 없듯이 모두 부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소인은 이렇게 이것들을 이곳 뒤에 있는 도시의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요.

— 예수님, 이럴 수가! (내가 말했다) 여기에 신세계가 있단 말인가?

— 이곳은 (그가 말했다) 전혀 새로운 곳이 아니랍니다. 그런데 사람들 말로 이곳 밖에 새로운 땅이 있는데 그곳에는 해와 달이 있고 멋진 일들이 잔뜩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곳이 더 오래되었지요.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472~473쪽)


“이곳은 전혀 새로운 곳이 아니랍니다”라는 영감의 말. 그것이 바로 아우어바흐가 하고 싶은 말이다. 참고로 “누구나 절구처럼 무거운 불알을 가질 수 없듯이 모두 부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라는 영감의 말. 그것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다.


이 고르지아(*입속 세상의 이름)의 세계에 관한 가장 놀랍고도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은 그것이 우리 세계와 전혀 다르지도 않고 도리어 자질구레한 세목에 있어서도 닮아 있다는 점이다. 그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음에도 우리 쪽 세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세계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다른 점에서는 무척 똑같다. 그리하여 라블레는 역할을 교환하는 기회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다시 말해서 배추 심는 농부를 외부 세계의 이방인을 유럽인다운 순박함으로 맞아들이는 토박이 유럽인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또 라블레는 일상생활의 사실적 장면을 전개하는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다. (…) 거대한 규모와 대담한 발견 여행이라는 뼈대 전체는 그저 우리에게 배추 심기에 종사하고 있는 투렌의 농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작동된 것처럼 보인다. (<미메시스> 369~370쪽)


이 자리에서 아우어바흐의 관점에 대해 길게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다. 공연히 서투른 이야기를 꺼내 선생님들을 화나게 하고 싶은 생각도 없거니와 21세기 한국에서는 별로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도록 하자. 아우어바흐의 지적처럼 입속 세계라는 환상적인 공간이 우리 세계와 다를 바 없는 곳이라는 사실은 분명 우리를 웃게 한다. 최소한 아우어바흐는 크게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우스꽝스러운 부분은 아니다. 이 에피소드의 핵심은 마지막, 다시 세상으로 나온 화자와 팡타그뤼엘의 대화에 있다.


그는 나를 보자 내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알코프리바스?”

내가 대답했다.

“전하의 목구멍에서입니다.

— 그러면 언제부터 거기 있었나? 그가 말했다.

— 전하께서 (내가 말했다) 알미로드인들을 향해 진군하셨을 때부터입니다.

— 지금으로부터 (그가 말했다) 여섯 달도 더 전이로군. 그러면 자네는 무엇을 먹고살았나? 무엇을 마셨는가?

내가 대답했다.

“전하, 전하와 같은 것이지요. 전하의 목구멍을 넘어오는 것 중에서 가장 맛있는 조각을 통행세로 징수했지요.

— 그랬군, 그런데 (그가 말했다) 자네는 어디에 똥을 쌌는가?

— 전하의 목구멍 속이랍니다. 내가 말했다.

— 하, 하, 자네는 재미있는 친구로군. (그가 말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딥소디인들의 나라를 모두 정복했다네. 자네에게 살미공댕의 영지를 하사하지.

— 대단히 감사합니다. (내가 말했다) 전하께서 제 공로보다 훨씬 큰 상을 내려주시다니.”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475~476쪽)


이 얼마나 감동적인 대화인가! 전쟁 기간 동안 말도 없이 사라진 부하다. 하지만 문책은커녕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묻고 있다. 나아가 똥은 어디에 쌌냐고 묻는 군주와 “전하의 목구멍 속이랍니다”라고 해맑게 답하는 신하의 모습에는 절로 눈물이 흐를 지경이다. 이것이야말로 싸는 동시에 먹는 것의 완벽한 구현이 아닌가? 심지어 팡타그뤼엘은 영지를 하사하는데, 그것은 바로 알코프리바스가 입속 세계에서 신선놀음 하는 동안 끝나버린 전쟁을 통해 정복한 땅이다.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작품의 클라이막스가 되었어야 마땅할 전쟁이 화자의 입속 여행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가르강튀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다소 지루한 전쟁 묘사와 대조를 이룬다. 목동과 빵과자 장수 들의 사소한 다툼이 전쟁으로 번지는 과정을 통해 라블레는 조금 더 직접적인 풍자를 노린다. 적국의 왕과 가신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림으로써 당대의 지배 계급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직접적인 풍자는 우습지 않다. 어쩌면 번역으로는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언어유희 때문일 수도, 단순한 분량 때문일 수도, 라블레와 우리 사이의 시차 탓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말해야겠다. 가르강튀아의 전쟁 이야기는 라블레의 실패한 농담이라고.


그렇다면 라블레는 왜? <팡타그뤼엘>에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근사한 방식으로 전쟁 장면을 생략한 그다. <가르강튀아>에서 또한 전쟁 장면 따위는 건너뛸 수 있었을 거란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나는 그것이 라블레의 신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작품을 통해 라블레는 자신이 그리는 세계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차원이 아닌) 구세계의 파괴가 필요했던 것이다. 파괴, 그것은 물론 전쟁이다. 그렇다면 그가 꿈꾸던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전쟁이 끝난 후, 부하들에게 상을 내리던 가르강튀아는 용맹한 수도사 장을 쇠이예의 수도원장으로 임명하려 한다. 하지만 장은 그 제안을 거절하는 대신 새로운 수도원을 세워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텔렘(* 주석에 따르면 “그리스어로 의지라는 뜻이다. 텔렘 수도원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최대한 보장하는 자발적인 수도의 장(場)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지방 전체에 “다른 교단들과는 정반대의 교단”이 세워지게 된다. 라블레는 특유의 장광설로 몇 장에 걸쳐 텔렘 수도원의 모습을 그리는데, 그중에서도 텔렘 수도사들의 생활방식에는 라블레의 위마니슴이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다.


그들의 모든 생활은 법이나 규정, 규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의사와 자유의지에 따라 관리되었다. 그들은 원할 때 침대에서 일어나,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길 때 먹고 마시고 일하고 잠을 잤다. 아무도 그들을 깨우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에게 먹거나 마시고, 무슨 일이거나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가르강튀아가 정해놓았던 것이다. 그들의 규칙이라고는 ‘원하는 바를 행하라’는 조항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는 자유로운 인간들에게는 천성적으로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하고 악을 멀리하도록 하는 본능이 있고 그들이 명예라고 부르는 자극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수치스러운 굴종과 강제에 의하여 억압받고 예속될 때, 그들에게 자유롭게 미덕을 추구하며 예속의 굴레를 떨쳐버리고 거역하게 하던 고상한 성향은 왜곡된다. 우리는 언제나 금지된 일을 시도하고 우리에게 거부된 것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254쪽)


무척 아름다운 이야기다. 하지만 지루하다. 라블레는 이어 수도원의 기초에서 발견되었다는 커다란 청동판에 씌어진 수수께끼를 옮기고 있는데, 그것은 신세계에 대한 노골적인 찬가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인가? 아마도. 유토피아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현실의 질서를 은폐하는 것일 테니까. ‘어디에도 없다(nowhere)’라는 그 단어의 뜻은 이제 너무 식상해서 싸이월드에나 가야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우리는 뒷목을 부여잡고 “라블레, 너 마저…”라고 뇌까리며 그의 책을 집어던져야 하는 것일까? 


설마. 


청동판에 적힌 수수께끼를 소리 내 읽은 가르강튀아에게 수도사가 묻는다. 


“전하의 견해로는 이 수수께끼가 무엇을 가리키고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뭐라니? (가르강튀아가 말했다) 성스러운 진리의 진행과 영속성을 말한 것이라오.

— 성 고드랑을 두고 말이지만, (수도사가 말했다) 제 해석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언자 메를랭의 문체입니다. 원하시는 만큼 심오한 알레고리와 의미를 부여하시고, 전하와 모두들 좋으실 대로 추론하십시오. 저로서는 모호한 말로 정구 경기를 묘사한 것 외에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들이란 시합을 주선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은 보통 친구 사이랍니다. 두 번 서비스를 넣은 다음에는 경기장 안에 있던 사람은 밖으로 나가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게 되지요. 먼젓번 사람에게 공이 선 위로 지나갔는지 아래로 지나갔는지를 알리도록 합니다. 홍수는 땀을 말하고, 라켓의 줄은 양이나 염소의 창자로 만들지요. 둥근 물체는 실뭉치나 공을 가리키는 것이고요. 경기가 끝난 다음 사람들은 환한 불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속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다음에는 보통 주연을 벌이는데, 승리한 사람들이 더 신나게 마시지요. 그러고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거지요!” (261~262쪽)


그렇다. 그 수수께끼는 사실 정구 경기의 모습을 장중한 문체로 묘사한 당대의 유행하던 수수께끼 시로, 라블레는 첫 두 행과 마지막 열 행을 추가하여 원래의 시와 다른 의미로 해석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 모두와 가르강튀아를 속인 후, 수도사 장으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해 우리에게 말하도록 한다. “원하시는 만큼 심오한 알레고리와 의미를 부여하시고, 전하와 모두들 좋으실 대로 추론하십시오.”


물론 그것은 단순히 마지막 수수께끼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라블레는 자신의 작품이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 설령 그것이 자기 자신의 신념일지라도. 그리하여 라블레의 실패한 농담은 이제 거대한 농담의 일부가 된다. 라블레는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라블레의 위대함이다. 그리고 라블레에 대한 찬사는, 얼마나 거창한 찬사이건 간에, 실패할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고전에 대한 글을 쓰는 즐거움이다.


<가르강튀아> 발표 십이 년 후 세상에 나온  <제3서>의 내용은 거인왕의 일대기였던 전작들과는 달리 팡타그뤼엘의 친구 파뉘르주가 결혼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며 다양한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어지는 <제4서>는 앞선 문답에서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파뉘르주가 팡타그뤼엘을 비롯한 패거리와 함께 ‘신성한 술병’(!)의 신탁을 듣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일종의 여행기다. 라블레가 세상을 떠난 후 출간된 <제5서>는 위작 논란이 끊이지 않는 작품인데, 아마 그 탓인지 국내에는 번역조차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마지막 권에서 일행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고, 여사제를 통해 신탁의 내용을 전해 듣는다. 여사제는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마셔라! Trinch”


그것이야말로 팡타그뤼엘리슴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는 이쯤에서 수다를 멈추고 잔을 채우는 것이 좋겠다. 아우어바흐 또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라블레의 숨은 의미, 즉 뼈의 골수에 천착하여 분명하고도 윤곽이 뚜렷한 교의를 찾아내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작품 속에 숨겨져 있으나 수많은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은 스스로 팡타그뤼엘리슴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지적인 태도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것과 관능적인 것을 동시에 이해하며 어떠한 삶의 가능성도 소홀히 하지 않는 삶의 파악이다. 그것을 더욱 상세히 서술한다는 것은 현명한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자신도 모르게 즉각 경쟁하는 처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라블레 자신이 항시 그것을 서술하고 있으며 우리보다 더 잘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미메시스> 383쪽)


그러니 이 글은 잊고 서점으로 달려가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을 읽어라. “그리고 원하시는 만큼 심오한 알레고리와 의미를 부여하시고, 모두들 좋으실 대로 추론하십시오.” 그것이 내가 짧지 않은 글을 읽어준 당신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이다. 그럼 그냥 그렇게 말하지 왜 이리 긴 헛소리를 늘어놓았느냐고? 앗, 이런, 어느새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끝나버린 모양이다. 나는 라블레를 따라 이렇게 말해야겠다.


안녕히 계시라, 여러분. 나를 용서하라. 그리고 내가 당신들의 잘못에 개의치 않는 만큼 내 잘못도 염두에 두지 말기를 바란다.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482쪽)


‘미친 거리의 전도사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웨일스의 밴드는 언젠가 이렇게 노래했다. 


난 그저 당신이 우리를 용서해주길 바라

하지만 모든 것은 계속되어야만 하지 


만약 당신에게 설명이 필요하다면

그때 모든 것은 계속되어야만 해!

(Manic Street Preachers ‐ ‘Everything Must Go’)
















2013. 2. 22. 프레시안북스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222113725&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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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3회로 끝낼 예정이었던 라블레를 4회로 끝내고, 오늘 마감이었던 돈 끼호떼 첫회를 넘겼다. 잊지 않고 서재에도 꼬박꼬박 올려두려고 했는데, 게으른 탓에 자꾸만 때를 놓치고 만다. 


원고를 넘기고 오랜 만에 냉장고 청소를 했다. 청소라기보다는 벌써 몇 년이나 냉장고에서 묵어가던 더는 먹지 않는 김치류를 치웠을 뿐이다. 어떤 김치에는 곰팡이가 피었고, 어떤 김치에서는 와인 냄새가 났다. 타자를 치는 손에서는 김치 냄새가 난다. 얼른 씻고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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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라블레의 실패한 농담 그리고 팡타그뤼엘의 거대한 입에 관하여



그렇다면 라블레는 재치 있는 트윗으로 사회를 조롱하고 풍자하며 수많은 팔로워들을 거느리던 르네상스 시대의 파워 트위터리언에 불과한 걸까? 바흐친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라블레의 전략에서 풍자의 한계를 보는 대신 원대한 예술적 기획을 본다. 


사제와 수도승, 왕과 영주, 기사나 부유한 시민, 학자와 법률가의 언어, 즉 권력을 쥐고 있고 풍족한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언어에 대항하여 유쾌한 악한의 언어가 제시된다. 그리하여 이 언어는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서든 어떠한 파토스라도 희화적으로 재생시키지만 이럴 경우 언제나 그 언어를 미소나 가식을 통해 ‘입으로부터 떼어냄으로써’ 그 언어를 중립화하고 그것의 거짓됨을 조롱하며 그럼으로써 거짓말을 유쾌한 속임수로 바꾸어놓는다. 허위는 반어적 의식에 의해 조명되며 유쾌한 악한의 입을 통해 스스로를 패러디한다. (<장편소설과 민중언어>(전승희.서경희.박유미 옮김, 창비 펴냄) 232쪽)


바흐친의 독법 속에서 더 이상 라블레는 권력자의 발밑에 ‘콩알탄’을 던지며 낄낄대는 무해한 악동이 아니다. 우스꽝스러운 언어적 모험, 차라리 기행을 통해 라블레가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언어의 허위성이다.


우리는 그가 구문의 구조에 대한 패러디적 파괴를 통해 인간 언어 자체의 기만적 성격을 조롱하고 그럼으로써 많은 단어들의 논리적이고 표현적인 측면(예컨대 단정이나 설명 따위를 나타내는 측면)을 부조리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언어로부터의 등돌림(이는 물론 언어를 수단으로 한 것이지만)이라든가 이데올로기적 담론에 흔히 나타나는 의도의 직접적 표출이나 과도한 표현(지나치게 ‘무게’를 잡는 진지성)에 대한 불신, 모든 언어가 관습적이고 허위에 물들어 있으며 악의적으로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가정, 이 모든 것들이 라블레의 작품 속에서 산문에서 가능한 가장 순수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122쪽)


이제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단순히 라블레의 문장에서 드러나는 일차적인 의미가 아니다. 문장 뒤에 도사리고 있는 숨은 의미 따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며 문장을 쌓아가는 행위, 다시 말해 라블레의 ‘쓰기’ 자체가 문제다. 


바흐친에 따르면 “사물과 관념은 그들의 본성에 어긋나는 그릇된 위계적 관계로 결합되기도 하”며, “이러한 그릇된 결합은 학문적인 사고, 거짓된 신학적‧법적 궤변 및 궁극적으로는 언어 자체에 의해 강화된다”고 한다. 언어야말로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친 과오로 가득 차있다는 것이다. 바흐친의 라블레는 이 잘못된 결합을 끊어내고, 사물들을 해방시킨 후, 그들 각각에게 걸맞은 새로운 결합을 찾고자 한다 — 다름 아닌 언어를 통해서. “따라서 라블레에게 있어서는 낡은 세계상을 파괴하는 작업과 새로운 세계상을 건설하는 긍정적 작업이 서로 불가분으로 얽혀 있는 것이다.” (364쪽)


그렇다면 라블레가 제시하는 새로운 결합이란 무엇인가? 바흐친은 그것을 일곱 개의 시리즈로 분류한다. 


1. 해부학적·생리학적 측면에서 본 인간 육체의 시리즈

2. 의복의 시리즈

3. 음식의 시리즈

4. 음주와 취태(醉態)의 시리즈

5. 성(性)의 시리즈

6. 죽음의 시리즈

7. 배설의 시리즈 


동작그만,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같은데? 가슴 사이즈와 ‘식스팩’에 대한 지치지 않는 탐구(해부학적‧생리학적 측면에서 본 인간 육체의 시리즈),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옷차림에 대한 비아냥(의복의 시리즈), 때를 가리지 않고 올라오는 다양한 음식 사진과 주린 배를 절로 움켜쥐게 만드는 야식 타령(음식의 시리즈), 다음 날이면 지워지곤 하는 깊은 밤의 욕설(음주와 취태의 시리즈), 각종 ‘섹드립’(성의 시리즈)과 ‘똥드립’(배설의 시리즈)과 죽고 싶다는 토로와 죽여 버리겠다는 엄포(죽음의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이거, 이거 다 트위터 ‘드립’ 아녀? 자 모두들 보쇼. 바흐친이라는 이름으로 대충 퉁치고 넘어가겠다, 이거 아녀?


그럴 리가. 나는 지금 약을 파는 게 아니라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바흐친의 말에는, 관념과 관념 사이로 우아한 도약을 감행하는 그의 이론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사실에 내 돈 모두하고 손모가지를 건다(당신이 탐낼만한 재산과 손모가지는 아닐 거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그것을 차근차근 설명할 생각이 없다. 능력이 없다고 말해도 좋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바흐친이 40여 쪽에 걸쳐 풀어내는 녹록치 않은 이야기를 내가 무슨 수로 요약한단 말인가?


물론 나도 마음이 아프다. 어쩌면 나는 문제의 부분이 있는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365쪽에서 408쪽까지를 찬찬히 곱씹은 후, 잘 요리된 정보에 목마른 선량한 독자들을 위해 그 일을 해내야 했는지도 모른다. 나아가 바흐친의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이덕형.최건형 옮김, 아카넷 펴냄)마저 독파한 후, 레포트를 써야하지만 두꺼운 책을 읽을 시간은 없는 대학생들을 위해 그럴 듯한 요점 정리를 해두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모두 나의 불찰이다.


하지만 친구여, 생각해 보라. 일개 서평가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세상에 박사님들이 왜 필요하며 두꺼운 이론서들이 왜 필요하겠는가? 물론 내게도 직업윤리라는 게 있어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를 찾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절판되어 정가 35000원짜리 책이 중고가 64500원에 팔리는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나마 남아 있던 그 책 또한 이틀 후에 팔려버렸는데? 내가 이 글을 쓰고 얼마를 받는지 당신은 아는가? 도서관에 가면 되지 않느냐고? 이 추운 겨울에?


대신 나는 블라지미르 쁘로쁘의 <희극성과 웃음>(정막래 옮김, 나남 펴냄)이라는 정가 25000원짜리 책을 1%의 할인도 받지 않고 구입했고, 친절한 색인(학술서에 색인을 넣지 않는 출판사에 저주가 있을지어다)의 도움을 받아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웃음 뒤에는 절대로 폭력이 있을 수 없고 웃음은 장작더미를 쌓아올리지 않으며 위선과 기만은 절대로 웃는 법이 없이 근엄한 가면을 쓰고 있고 웃음은 교리를 만들지 않고 권위적이지 않으며 웃음이 자각하는 것은 공포가 아닌 힘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근엄함을 믿지 않고 축제날의 웃음을 믿었다(바흐찐, 107). (245쪽) (*주술관계가 조금 이상하지만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그렇지만 내가 이미 가지고 있던 정가 10000원짜리 구판 <장편소설과 민중언어>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고, 일곱 개의 시리즈와 관련된 부분도 아니니 나는 25000원을 고스란히 날린 꼴이 되었다. 언젠가 절판되어 비싼 값에 되팔 수 있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54500원 정도를 챙길 수도 있겠지. 물가인상률을 반영한다면 조금 더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만 기약할 수 없는 미래의 54500원보다는 눈앞의 25000원이 훨씬 절실한 법. 나는 묻고 싶다. 이건 도대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그러니 공연히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그만두고 라블레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채 해결되지 않은 부분들은 바흐친과 박사님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의 길을 가도록 하자.


낡은 세계상을 파괴하는 동시에 새로운 세계상을 건설하는 것 — 그것이 바로 라블레가 하는 일이다. 이 말이 너무 추상적이라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싸는 동시에 먹는 것 — 그것이 바로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을 통해 라블레가 하고 있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싸면서 책을 읽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일일 것이다.


우리는 앞서 가르강튀아의 출생으로 이어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탈장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것을 싸는 것의 환유라고 하자. 그렇다면 먹는 것의 환유는? 이쯤에서 팡타그뤼엘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물론 <가르강튀아>에도 탈장의 원인이 되었던 엄청난 양의 소 창자 요리를 비롯, 하정우의 ‘먹방’에 견줄만한 인상적인 장면들이 가득하지만, 순전히 진행상의 편의를 위해서다. 벌써 밤이 깊었고, 우리에게 허락된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먼저 ‘족보’를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팡타그뤼엘>은 라블레의 첫 번째 소설이다. 하지만 <팡타그뤼엘 연서>의 첫 번째 책은 아니다. <거대한 거인 가르강튀아의 위대하고도 지고한 평전>(혹은 <거대한 거인 가르강튀아의 놀라운 대연대기>)이라는 작자 미상의 대중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라블레가 먼저 가르강튀아의 아들 팡타그뤼엘이 등장하는 후속편을 쓰고, 2년이 지난 후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가르강튀아의 이야기를 다시 쓴 것이다. 이어지는 3서와 4서, 그리고 사후에 발표된 (위작 논란에 시달리는) 5서는 모두 팡타그뤼엘의 이야기이고, 따라서 아버지 가르강튀아의 이야기가 연서의 첫 번째 책이 되었다.


팡타그뤼엘은 원래 “술에 취해 잠든 사람들의 입에 소금을 뿌리고 다닌다고 알려진 전설에 나오는 작은 악마의 이름”이라고 한다. 라블레는 이것을 살짝 비틀어 팡타그뤼엘을 사람들에게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소개한다. 바로 이렇게.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 바드벡의 해산 중에 산파들이 아이를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을 때, 그녀의 배에서 먼저 각자 소금을 잔뜩 실은 노새 고삐를 잡은 예순여덟 명의 노새 몰이꾼들이 나왔고, 그다음으로 햄과 훈제한 소혀를 실은 아홉 마리의 단봉낙타와 작은 뱀장어들을 실은 일곱 마리의 쌍봉낙타, 그리고 스물다섯 수레분의 파와 마늘, 양파, 골파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를 보고 앞에 말한 산파들은 두려워했지만, 그중 몇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식량이군요. 우리가 전에는 찔끔찔끔 마실 수밖에 없었지만 이젠 실컷 마실 수 있겠어요. 이것들은 포도주를 당기게 하는 것이니까 좋은 징조예요.”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286쪽)


<팡타그뤼엘>은 <가르강튀아>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탄생과 성장, 전투와 승리라는 상승의 플롯을 따라 굴러가지만, 훨씬 느슨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지 웃기기 위해 쓴 에피소드들의 나열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고 할까. 특히 파뉘르주(팡타그뤼엘의 단짝이자 훗날 3서와 4서의 중심인물이 되는)가 저지르는 온갖 악행을 나열하는 장들은 별개의 피카레스크 소설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다. 하지만 그만큼 웃음의 순도는 높아서, 일곱 개의 시리즈가 끊임없이 변주되는 가운데 노골적인 음담패설(여성과 도끼가 등장하는 만국 공통의 이야기 포함)과 차라리 초현실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몸개그’들이 쉴 새 없이 펼쳐진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을 보라. 영국의 위대한 학자 토마스트가 파뉘르주와 논쟁을 하는 장면이다. 단, 그들은 말이 아닌 몸짓으로 논쟁을 하고 있는데, 영국인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왜냐하면 이 논제들은 매우 까다로운 것들이어서 사람의 말은 내가 원하는 만큼 그것을 설명해내는 데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그때 영국인은 다음과 같은 몸짓을 했다. 왼손을 활짝 펼치고 공중에 높이 쳐들었다가 네 손가락을 오므려 주먹을 쥐고 엄지손가락은 뻗어서 콧날 위에 갖다댔다. 그러고는 갑자기 오른손을 펴서 쳐들었다가 펼친 채로 내려 왼손 새끼손가락을 오므린 곳에 붙이고는 왼손의 네 손가락을 공중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반대로 오른손으로 왼손이 했던 동작을 반복하고, 왼손으로는 오른손이 했던 동작을 반복했다.


파뉘르주는 이에 놀라지 않고, 왼손으로 그의 거대한 바지 앞주머니를 공중으로 당겨 쳐들고, 오른손으로 그 안에서 흰 암소의 등살 한조각과 하나는 흑단, 하나는 브라질산 담홍색 목재로 만든 같은 모양의 나무토막 두 개를 꺼내서는 균형을 잘 잡아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맞부딪치게 해서 브르타뉴 지방의 문둥이들이 딱딱이로 내던 소리와 비슷하면서도 더 잘 울리고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영국인을 바라보며, 입 안에서는 혀를 오므려 신나게 흥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신학자들, 의사와 외과의사들은 이 몸짓을 보고 그가 영국인을 문둥이라고 추론했다고 생각했다.

판사들, 법률학자들, 교회법 학자들은 예전에 구세주께서 주장하셨듯이, 인간에게 있어서 일종의 지복은 문둥이가 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그가 내리려 한다고 생각했다. (396쪽)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같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우스타 쿄스케의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를 읽었으리라. 그리고 우스타 쿄스케는 라블레를 읽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에 내 여자친구 집에 있는, 그녀가 자신의 돈을 주고 구입한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 7권에서 15권까지를 걸 수도 있다. 어쨌거나 참 멋진 만화책 아닙니까.


어쩌면 당신은 웃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는 심각한 독자가 분명하군요. 훌륭합니다. 문득 ‘지나치게 무게를 잡는 진지성’이라는 바흐친의 표현이 떠오르지만 기분 탓이겠죠. 그런 당신을 위한 라블레의 첨언 : 


토마스트가 제기한 논제들의 해설과 그들이 토론할 때 했던 몸짓의 의미에 관해서는 그들이 직접 말했던 대로 여러분에게 설명할 생각이었지만, 사람들이 말하기를 토마스트가 이에 관한 커다란 책을 써서 런던에서 출판했고, 그 책에서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고 밝혔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으로서는 그 일에 손을 대지 않으련다. (403쪽)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라블레의 농담이야말로 서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16000원짜리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내가 왜 그것을 설명해야 하지? 그 덕에 나는 제목에서 예고한 라블레의 실패한 농담과 팡타그뤼엘의 거대한 입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는데? 이건 또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하지만 친구여, 오늘은, 오늘 단 하루만큼은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그만두기로 하자. 그리고 건배. 좋은 술과 안주로 몸을 따뜻하게 덥히고, 못다 한 약속은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자. 


“평화로이, 즐겁고, 건강하게, 언제나 좋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팡타그뤼엘리슴(팡타그뤼엘의 사상)이니까.

















2013. 2. 8. 프레시안북스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208125405&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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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문자 그대로 가난해지는 것을 두려워해왔다. 우리는 자신의 내적 삶을 단순화시키고 구원하기 위해 가난을 선택한 모든 사람을 경멸한다. 어떤 사람이 일반적으로 재산을 긁어모을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돈 벌 수 있는 수단을 열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생기 없고 야망이 부족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옛부터 가난의 이상화가 의미했던 것을 상상할 수 있는 힘까지도 잃어버렸다. 물질적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움, 매수되지 않는 영혼, 보다 대담한 무관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또는 우리가 하는 일로 헤쳐나아갈 수 있는 삶, 언제라도 책임없이 삶을 내던질 수 있는 권리 — 더욱 강건한 상태, 다시 말해서 도덕적 전투상태를 우리는 잃어버렸다. (…) 가난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자유인이 되는 반면에, 부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노예가 된다는 다수의 사례가 있다. (…) 우리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킬 필요가 없고, 또 혁명가나 개혁가에게 투표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나는 이 문제를 여러분이 심각하게 숙고해보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교육 받은 계급들 중에서 가난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두려움은 우리의 문명을 고통받게 하는 가장 나쁜 도덕적 병이라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서점의 MD로 일하며 숱한 독자 서평을 보았지만,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 한 편의 서평이 있다. 인용을 제하면 단 한 줄 뿐인 그 글을 독자는 이렇게 썼다. “책을 읽다가 아래의 구절에 시선이 멈췄다. 다음 날 공무원을 그만두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같은 구절에서 시선을 멈췄다. 오랜만에 찾은 서평에서는 두 번째 문장이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 그 구절을 다시 읽으며 나는 생각한다. 여전히 가난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받는 나의 작은 마음과 공무원을 그만두었다는 문장을 쓰고 또 지우던 낯모르는 독자의 마음을. 2월 28일은 내가 회사를 그만둔 지 꼭 3년이 되는 날이다.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3032154355&code=9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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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서평에 대한 서평일까? 

서평에 대한 감상문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려나, 3년이 넘게 살았는데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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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2013-03-05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말 하는 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팝님이 회사를 관두셔서 좋아요. 팬심으로.

poptrash 2013-03-05 15:38   좋아요 0 | URL
이런 말은 처음 들었는데... 회사를 그만둔 보람이 있네요 ㅎㅎ
고맙습니다!
 

“너 혹시 공장에서 일할 생각 없냐?” 오징어순대를 한입 크게 베어 물던 내게 선배가 물었다. 출판 편집자로 일하는 선배다. 나는 반쯤 삼킨 안주를 도로 뱉으며 선배를 바라봤다. 우리가 벌써 취한 건가? 설마. 그렇다면 순대가 이렇게 뜨거울 리 없다. 우리는 방금 만났고 이제 첫 잔을 비웠을 뿐이다. 하지만 몇 잔을 연거푸 마신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지는 걸 보니, 어쩌면 정말 취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냉정한 편집자의 시선으로 사랑하는 후배에게 전업을 권하는 것도, 먼 친척에게 공장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었다. 이런저런 공장들에서 일을 하고, 그것을 토대로 르포를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언젠가 우리 사회에 더 많은 르포르타주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기획인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언제나 더 많은 일거리가 필요한 입장이었다. 그러니 건배. 우리는 밤이 깊도록 기획을 발전시켰고, 보람찬 술잔을 나누었으며, 다음 날 아침 곧바로 잊어버렸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을 읽었고, 우리가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니시모리 히로유키의 만화 <오늘부터 우리는>에서 따온 것으로 짐작되는 필명을 쓰는 저자의 이력은 이렇다. “전국을 떠돌며 닥치는 대로 일했고 일하는 틈틈이 영원히 출판되지 못할 게 분명한 시와 소설 들을 썼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고시원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그동안 겪어본 직업이 꽤 여러 가지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1차.2차.3차 산업, 더 세밀하게는 농업, 어업, 축산업, 제조업, 서비스업계에서 모두 일해본다면 그때는 책을 한 권 써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렇게 했다.”


과연 저자는 그렇게 했다. 진도의 꽃게잡이 배에서부터 서울의 주유소와 편의점. 아산의 돼지농장, 춘천의 비닐하우스, 당진의 자동차 부품 공장에 이르기까지 몸소 체험한 다양한 직업의 현장을 기록한 것이다. 아니, 체험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건 어쩐지 ‘체험! 삶의 현장’ 같은 프로그램 제목을 떠올리게 하니까. 그는 글을 쓰기 위해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경험한 것을 기록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질투어린 시선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지만 이내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사소한 부분을 놓치지 않는 저자의 시선과 어떤 상황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유머 감각 때문이었다. 숙소와 식사, 작업 과정과 도구, 사람들의 면면과 말투를 아우르는 세밀한 묘사와 그 위에 더해지는 다소 반어적인 유머는 자칫 어둡고 무겁게만 흘러갈 수 있었을 이야기에 생동감을 부여했다. “이 괴상망측한 사회가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굴러갈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음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다소 평범한 진리가 커다란 울림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실, 진리란 언제나 평범한 법이다. 그러니 별 수 있나. 우리가 늦었다는 사실을 흔쾌히 인정할 수밖에.


책을 읽은 후 다시 만난 술자리에서 선배가 물었다. “너 혹시 대리운전할 생각 없냐?”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선배는 <꽃미남 대리운전>이라는 제목까지 생각해둔 모양이었다. “형, 근데 ‘꽃미남’은 좀 아닌 것 같은데…” 주저하는 내게 선배가 시원하게 말했다. “응, 걱정 마, ‘꽃미남’은 내가 섭외할 테니까 넌 운전만 열심히 해.” 결국 나는 운전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다. 하기야 운전이야 아무래도 좋았으니, 우리는 그날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이다.


 

 

 

 

 

 

 

 

 

 

 

 

 

시사인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5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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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3-03-04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좋았어요. 담담한 문체와 기습같은 씁쓸한 유머가 말이죠.

poptrash 2013-03-05 15:41   좋아요 0 | URL
정말 좋은 책이에요. 올해 이 책이 좋다는 이야기를 몇 사람에게 했는지 몰라요. 아치 님도 좋아하신다니, 좋네요 ㅎㅎ

수연 2013-03-05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미남-에 한표! ^^

poptrash 2013-03-05 15:42   좋아요 0 | URL
그건 너무 픽션이네요 ㅎㅎ

감은빛 2013-03-06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미남 대리운전] 재밌겠네요!
한 오륙년 전에 어느 대리운전 기사님의 블로그를 즐겨 방문했어요.
블로그에 업무일지 처럼, 일을 시작한 시간과 끝낸 시간.
어디서 어디까지 몇건에 얼마를 받았는지.
간식은 언제 뭘 먹었는지.
중간에 휴식은 어디서, 이동은 어떻게 했는지 등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해 두시더라구요.

그 기록만 읽어도 이 분이 일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게 빠지지 않고 매일 올라오는 기록들을 보면서,
나중에 이거 잘 갈무리하고 살을 덧붙여서 책으로 엮어도 재밌겠다 생각했었어요.
운전을 배우셔서 한번 도전해보심이. ^^

poptrash 2013-03-07 07:55   좋아요 0 | URL
아, 멋진 대리운전 기사님이시네요.
그런 기록을 매일 한다는 건 좋은 일 같아요.
그렇지만 운전이 무서워서 저는 포기... orz
 

1.

너무나 많은 로맹 가리가 있다. 유대계 슬라브 혈통의 이민자 소년 로맹 카체브, 기꺼이 자신의 삶을 희생한 홀어머니의 하나뿐인 아들 로만, 자유 프랑스의 영웅이자 샤를 드골 장군으로부터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공군 중위 가리 드 카체브, 전쟁 기간 동안 써내려간 데뷔작으로 평론가상을 수상한 전후 프랑스의 대표작가 로맹 가리, 미디어가 사랑한 외교관이자 드골주의자, 영화배우 진 세버그의 바람둥이 연인, 두 편의 영화를 만든 영화감독, 그리고 또 한 명의 작가 에밀 아자르에 이르는 수많은 정체성과 그를 둘러싼 이야기, 차라리 전설. 그러니 로맹 가리에 대해서라면 두툼한 전기를 쓰거나, 아무 것도 쓰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도미니크 보나의 <로맹 가리>나 폴 세르주 카콩의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가쁜 사랑>처럼. 혹은 그에 대해 쓰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그들은 얼마나 운 좋은 사람들인가? 하지만 행운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적어도 오늘은. 나는 이 짧은 글을 통해 그의 데뷔작인 <유럽의 교육>를 요약할 것이고, 하얀 종이가 너무 작아 아빠 얼굴을 그리며 잠이 들었다는 어느 동요의 주인공처럼, 안타까운 마음으로 잠을 청할 것이다. 사실, 밤은 이미 늦었다.

 

2.

<유럽의 교육>은 1942년 겨울을 무대로, 폴란드 레지스탕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독일 점령군을 피해 빌노를 에워싼 드넓은 숲으로 도피한 빨치산들은 땅을 파서 만든 은신처에서 두더지처럼 생활한다. 리투아니아의 겨울이 쳐놓은 덫에 걸려 완전히 고립된 그들은 이따금 은신처에서 나와 적군 수송 행렬을 기습한다. 하지만 그들을 괴롭히는 가장 무서운 적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절망이다. 자살의 유혹과 광기를 이겨내게 하는 유일한 희망은 스탈린그라드다. 그들은 러시아 군대가 그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목숨 자체가 붉은 군대의 항전에 걸려 있다. 모든 폴란드 빨치산들은 숲에서 나가 러시아 군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점령군에 대항해 싸울 순간만을 기다린다. (<로맹 가리> 98쪽)


이야기의 주인공은 야네크라는 이름의 어린아이다. 독일군에게 형과 부모를 잃은 소년은 숲속을 헤매다 빨치산을 만나 그들 무리에 합류한다. 그곳에서 소년은 “폴란드 기병대의 사각모를 눌러쓴, 사랑의 열정을 품은 빨치산 대장 야블론스키, 시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과묵하고 무뚝뚝한 농부 체르프,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우크라이나의 구두 수선공 크릴렌코, 딸들이 독일군들에게 능욕당하자 빨치산이 되어 끔찍한 전리품 — 독일 병사들의 잘린 성기(번역본에서는 ‘여남은 명의 팔다리’) — 을 수집하는 빌노의 이발사 스탄치크, 금요일 저녁마다 숲의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폐허로 기도를 하러 가는 유대인 정육점 주인 얀켈 쿠키에르, 또는 어린애나 다름없는 젊디젊은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영웅 놀이를 하는 육십대 변호사 ‘선생님’. 그리고 밤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책을 읽어주는, 하나가 된 평화로운 유럽을 맹목적으로 믿고자 하는 소설가 도브란스키” (99쪽) 등의 다양한 인물들을 만난다. 조시아라는 이름의 어린아이도 빼놓을 순 없다.  “고결한 마음씨를 가진 첩자이자 너그럽고 사랑스러운 어린 창녀이고, 반은 성모, 반은 집시인” 소녀를 로맹 가리는 이렇게 묘사한다.


주근깨 가득한 마르고 창백한 얼굴의 소녀는 볼에 분을 덕지덕지 바르고 입술을 너무 붉게 칠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예뻤다. 수하르키에서는 본 적이 없는 소녀였다. 그녀는 군인들이 빌노에서 자신을 데려왔다고 설명했다. 부모는 돌아가셨고,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그녀는 일 년 전부터 ‘군인들을 따라다녔다’. 그녀는 베레모를 쓰고, 체구에 비해 너무 큰 군인 외투를 입고 있었다. 고무줄로 붙잡아 매놓은 검은 털양말은 계속 미끄러져 발목까지 기어내려오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아이들이 하듯이 몸은 구부리지 않고 다리만 한 쪽씩 들어 올려 손으로 양말을 끌어당겼다. (<유럽의 교육> 19쪽)


소년은 이내 사랑에 빠진다. 소녀도 그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소설은 성장하는 소년의 이야기가 된다. 전쟁과 사랑, 그것이 바로 소년이 받는 ‘유럽의 교육’이다. 로맹 가리는 마치 다양한 과목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처럼, 소년의 교육을 위해 다양한 삽화를 준비한다. 도브란스키가 열정적으로 설파하는 희망의 이야기도 과목 중의 하나다. “독일은 왜 우리한테 그런 짓을 하는 걸까요?”라고 묻는 소년에게 도브란스키는 이렇게 답한다.


“절망 때문이지. 좀 아까 페흐가 하는 말 들었지? 사람들은 서로 멋진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이어 그 이야기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 그들은 그것으로써 신화가 현실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페흐 역시 절망에 빠지려 하고 있어. 독일 사람들만 절망하는 게 아니야. 절망은 어디에나 떠돌고 있어. 옛날부터,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절망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절망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면 인간은 곧장 독일인이 되는 거야. 그 사람이 폴란드의 애국지사라 해도 말이야. 문제는 그 사람이 독일인인지 아닌지를, 그에게 그런 일이 단지 어쩌다가 한 번씩 일어나는 것에 불과한지 아닌지를 아는 거란다. 내가 책에서 하려는 얘기가 바로 그런 거지. 제목 안 물어보니?”

“말해주세요.”

“‘유럽의 교육’이야. 타데크 흐무라가 권한 제목이지. 틀림없이 그는 빈정거리는 뜻에서 한 말이었겠지만……. 그에게 유럽의 교육이란 폭탄, 학살, 포로 총살, 짐승처럼 구덩이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 뭐 그런 거지. 하지만 나는, 나는 도전에 응하겠어. 자유, 존엄성, 인간으로서의 명예, 그 모두가 결국은 사람들로 하여금 목숨을 내놓도록 만드는 한 편의 동화일 뿐이라고 얼마든지 말해도 좋아.” (78쪽)


물론 그것은 그의 생각일 뿐이다. 도브란스키가 언급하듯 타데크 흐무라의 생각은, 야네크의 생각은, 그리고 물론 로맹 가리의 생각은 다르다. 그리하여 소설은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하나의 플롯 — 마침내 찾아온 해방의 서사 혹은 덧없는 죽음의 서사 — 를 향해 달려가는 대신, 전쟁의 풍경과 그것을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리는 거대한 태피스트리가 된다.


“그래, 나도 알아.” 타데크 흐무라가 상냥하게 말했다. “그것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란 매우 어렵지, 안 그래? 유럽은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좋은 대학, 가장 아름다운 대학들을 갖고 있었지.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이념들, 우리의 가장 훌륭한 업적들에 영감을 준 이념들, 즉 자유나 인간의 존엄성이나 형제애 같은 개념들이 태어났지. 유럽의 대학들은 문명의 요람이었지. 하지만 또 다른 종류의 유럽의 교육도 있단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받고 있는 교육이지. 총살 집행반, 구속, 고문, 강간,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모든 것의 파괴. 암흑의 시절이지.” (93쪽)


우리의 학생 야네크가 제일 처음 배우는 것은 다름 아닌 증오다.


“나는 증오를 알고 있어. 독일이 나한테 증오를 가르쳐주었어. 부모님을 잃으면서, 추위와 배고픔을 겪으면서, 땅 밑에서 살면서, 그리고 만약 길에서 독일군이 나와 마주치더라도 나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거나 나를 불 옆에 앉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들이 나를 보며 오직 피부 속에 총알을 쑤셔박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증오를 배웠어.” (122쪽)


그렇지만 야네크는 증오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는다. 그는 음악을 사랑했고, 음악을 사랑하는 한 그는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다. 그는 조시아에게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언젠가 야블론스키의 편지를 전달했던 여인의 집을 향하고, 점령군에게 처형된 그녀를 대신해 집을 차지한 독일 장교에게 권총을 겨눈다. 야네크는 그에게 연주할 것을 명령하고, 늙고 선한 장교는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준다. 기묘한 음악시간. 그리고 그들은 친구가 된다. 


야네크는 또한 무너진 공장에 숨어 범죄를 저지르는 아이들의 무리에서 노예처럼 부림 당하던 ‘분더킨트’를 구하기도 한다. 그가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소년을 구하기 전에 먼저 연주를 청한다.


더러운 누더기를 걸친 아이, 유태인 거주 지역의 학살로 부모를 잃은 유태인 아이가 악취 풍기는 지하실 한가운데 서서 세계와 인간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신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그는 연주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더 이상 흉하지 않았고, 그의 어설픈 몸은 더 이상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자그마한 손에서 활은 요술 막대기가 되었다. 승리자처럼 의기양양하게 머리를 뒤로 젖히고, 승리의 미소로 반쯤 입을 벌린 채 그는 연주하고 있었다. 세계가 혼돈으로부터 빠져나왔다. 세계가 조화롭고 순수한 모습을 띠어갔다.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증오가 사라졌고, 처음 몇 곡에 굶주림과 경멸과 추악함이 달아나버렸다. (178쪽)


하지만 그들은 이내 목숨을 잃는다. 늙은 장교는 트럭을 습격한 빨치산들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다. 분더킨트는 숲속의 겨울을 이기지 못한 채 손가락이 굳어가는 공포 속에서 눈을 감는다. 품속에 바이올린을 꼭 껴안고서. 야네크는 살아남아 그들의 죽음을 지켜본다. 그 또한 교육의 일부인 것이다. 


조시아에게도 시련이 찾아온다. 몸을 팔아 정보를 사는 일을 그만둔 그녀에게 조직이 ‘마지막’ 활동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고통을 겪는 데 ‘마지막’은 없었다. 그리고 희망은, 새로운 고통을 견뎌내도록 인간을 격려하기 위한 신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 그녀는 자문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사랑하고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뿐인데, 평화롭게 사랑하는 것, 굶어 죽지 않는 것, 얼어 죽지 않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지구는 둥글며 자전한다든가, 맞춤법이 어떻게 된다든가 하는 것 등 제 나이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을 다 깨우치는 것보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194쪽)


그러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목숨을 잃는다. 식량보다 죽음이 더 흔한 시절이다. 거듭되는 교육 속에서 야네크는 생각한다. 인간 세상이란 어떤 거대한 자루에 불과하다고. 눈이 먼 채 꿈만 꾸는 감자들이, 자루 속에서 무정형의 덩어리를 이루며 발버둥치고 있다고. 그것이 바로 인간성이라고. “더 이상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고통의 목소리로, 올된 교육과 그를 성숙시킨 어떤 인간적 경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그래서 환상이 제거된 목소리로” 야네크는 말한다.


“나 화 안 났어, 조시아. 하지만 나는 결국 배우게 되었어.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어. 그들은 우리를 훌륭한 학교에 보냈고 나는 언제나 훌륭한 학생이었어. 우리는 유명한 교육을 받았어. 타데크 흐무라 기억하지? 그는 그것을 우리의 ‘유럽의 교육’이라고 불렀어.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어. 나는 너무 어렸거든. 그는 자신이 곧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아무 데서나 빈정거리고 다녔어. 하지만 나는 이제 알아. 그가 옳았어. 그가 그토록 비꼬아 말했던 이 유럽의 교육이라는 것은 바로, 그들이 너희 아버지를 쏠 때, 또는 너 자신이 뭔가 대단한 명문을 내세워 누군가를 죽일 때, 또는 네가 죽도록 굶주리고 있을 때, 또는 네가 마을을 파괴하고 있을 때 이루어지는 거야. 우리는 훌륭한 학교에 있었어. 우리는 정말 교육되었어.” (273쪽)


조시아가 쓸쓸한 목소리로 말한다. “너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어째서 그런 말을 하냐고 묻는 야네크에게 그녀는 말한다. “왜냐하면 너는 불행하니까.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는 그 무엇도 너를 불행하게 하지 못해. 알겠지, 나도 대단한 걸 배웠어.” 열다섯의 나이에 그들은 적지 않은 것들을 배운 셈이다.


그리고 시험이 시작된다.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을 새롭게 돌아보게 하는 마지막 기말 시험. 야네크는 그것을 치러낸다. 마침내 유럽의 교육을 이수한 야네크. 그는 아직도 자신을 어린애라고 생각하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순진한 도브란스키를 향한 거의 아버지와도 같은 보호본능을 느끼며 자신이 배운 것을 곱씹는다.


수없이 많은 세월이 흘러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꾀꼬리가 어둠 속에서 그렇게 노래를 불렀을까? 믿음을 품고 영감을 받은 인간 꾀꼬리들이 이 영원하고 경이로운 노래들을 부르며 얼마나 많이 죽어갔을까? 매혹적인 목소리에 담긴 약속이 실현되기도 전에, 추위와 고통과 경멸과 증오와 고독 속에서 또 얼마나 많은 인간 꾀꼬리들이 죽어가게 될까? 또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탄생이, 얼마나 많은 죽음이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기도와 꿈이, 얼마나 많은 꾀꼬리가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눈물과 노래가, 얼마나 많은 어둠의 노래가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꾀꼬리가 필요할까? (282쪽)


3.

물론 유럽의 교육을 이수한 건 야네크만이 아니었다. 그건 차라리 로맹 가리, 그 자신이었다. 전투에 참여하려 부단히 노력하지만 계속해서 엇갈리는 상황 탓에 막사에 틀어박혀 승리를 꿈꿀 수밖에 없던 현실의 로맹 가리는, 유년의 기억을 차지하고 있는 폴란드의 숲으로 돌아가 가상의 전투를 치렀고, 성장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성장시켰다.


마치 “사람들은 서로 멋진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이어 그 이야기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 그들은 그것으로써 신화가 현실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라던 도브란스키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현실과의 구분이 모호한, 목숨을 건 위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는 전쟁에서 돌아온 영웅이자 평론가상을 수상한 신인 작가를 기다리던 기자들 앞에 검은 군복 상의를 입고 훈장을 단 채, 다시 말해 유럽의 학교에서 받은 학사모와 졸업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모두가 기다리던 새로운 전설의 시작을 알린다. 그가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변주하게 될 로맹 가리라는 이름의 전설을.


전설이 그의 피부에 달라붙어, 대중은 보다 어둡고 미묘한 진실을, 전 생애에 걸쳐 행동에 뛰어든 단 한 번뿐인 고질적인 몽상가이며 욕구 불만의 이상주의자인 가리의 비밀을 알지 못하게 된다. 우유부단하고 머뭇거리고 쉽게 상처 입는 그는 해방훈장 수훈자의 가면을 벗으면, 오히려 반(反)케셀 혹은 반헤밍웨이처럼 보일 터였다. 사실 그는 모험가보다는 시인에 가까웠다. 하지만 비평계는 무엇보다 당시 그가 자신에게 부여한 연극적 이미지, 세기의 폭풍 속에 온몸으로 뛰어든 작가들의 막내동생 이미지를 간직하게 된다. (<로맹 가리> 117쪽, 강조는 인용자)


4.

<유럽의 교육>(구판)의 권말에 실린 해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그가 진정 위대했는지 아직 말할 수 없다. 앙드레 말로를 비롯한 위대한 작가들에 대한 모방이 그의 작품 도처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아직도 그에게서 의혹의 시선을 거둘 수 없고, 그를 제대로 자리매김 하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진지하게 싸웠다는 사실이고, 그렇기에 그의 모습이 회한 혹은 연민과 더불어 우리 존재를 뒤흔들어놓고야 만다는 사실이다. (301쪽)


나 역시 그가 진정 위대한 소설가였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나는 단지 이렇게 말할 생각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위대함을 연기한 배우였고, 그의 연기는 실로 위대했다고.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였고, 그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은 채 그것을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위대함은 더 이상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결말을 짓는 일뿐이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모든 위대한 예술가가 그랬던 것처럼 작품을 끝내야 할 순간을 알았고, 그렇게 했다. 


그렇다면 왜? 해답은 아마 내 자전적 작품의 제목인 ‘밤은 고요하리라’와, 내 마지막 소설의 마지막 구절인 ‘더 잘 말할 수 없기 때문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마침내 나 자신을 완전히 표현했다. (유서 중에서, <로맹 가리> 427쪽,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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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3-04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ㅏㅏㅏㅏㅏㅏㅏ팝님 ㅠㅠ
저 어제 새벽까지 이 책 읽고 이제 이 책에 대한 페이퍼를 쓸 참이었는데, 하아, 팝님 글이 이렇게 멋지게 올라오면, 하아, 제가 어떻게 써요 ㅠㅠ 전 그냥 인용문 투척이나 해야겠어요. 그마저도 이 글과 겹치지만. 흑. orz

poptrash 2013-03-04 12:07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오랜만이에요!
프로필이 활짝 웃는 사진으로 바뀌었네요 ㅎㅎ
저도 사실 인용문 투척을 하려 했으나 원고료를 받아서...
그런데 정말 얼마나 많은 꾀꼬리가 필요할까요?

수연 2013-03-05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수의 연필-과 함께 장바구니로 퐁-당-

poptrash 2013-03-05 15:42   좋아요 0 | URL
저도 목수의 연필 보관함에 넣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