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유쾌하고 엄숙한 검열식, 그리고 작가의 탄생


약속된 검열의 날이 밝았다. 우리의 주인공이 잠들어 있는 사이 조카딸에게 서재의 열쇠를 받은 이발사와 신부는 장정이 훌륭한 100권과 몇 권의 소책자를 앞에 두고 재판을 시작한다. 성수를 뿌리며 모든 책을 태울 것을 주장하는 무지몽매한 여인들. 하지만 박식한 두 명의 검열관은 책의 운명이 자신들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직접 책을 살핀 후 내용에 따라 처분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첫 번째 책은 돈 끼호떼의 영웅, <아마디스 데 가울라>의 모험을 그린 4권짜리 전질이다.


“귀한 책이로군”하고 신부가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이 책이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기사도 이야기라던데. 다른 책들은 모두 이 책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는 거야. 말하자면 이 책이 모든 사악한 종파를 세운 셈이니 가차 없이 화형에 처해야겠군.” (<돈 끼호떼>(김현창 옮김, 범우사 펴냄) 58쪽)


하지만 이발사의 생각은 다르다. 그 책이야말로 지금까지 발표된 이런 종류의 책 중에서 최고의 걸작이기에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흔쾌히 수락하는 신부. 하지만 자비는 거기까지다. 아마디스 데 가울라의 적자 <에스쁠란디안의 무용담>은 아비의 덕이 아들에게까지 꼭 미치라는 법은 없다는 이유로, 그 밖의 ‘아마디스’ 일족의 이야기들은 여우를 말에 태운 것처럼 부질없다는 이유로 화형을 선고받는다. 그 밖의 다른 책들에게도 각각의 판결이 이어진다. 멋대로고 조잡한 문체 — 유죄, 장황하고 불필요한 대목 — 유죄, 사실성 혹은 창의성의 부족 — 유죄, 엉터리 번역 —유죄…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신부와 이발사는 어떻게 사악하고 유해한 책들의 내용을 그렇게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걸까? 답은 뻔하다. 그들 역시 그것을 읽은 것이다. 다만 그들은 미치지 않았기에 박식함을 자랑하며 판결을 내릴 수 있다. 그들은 나름의 문학적 근거를 가지고 판결을 내린다. 독창성, 문체, 캐릭터와 에피소드, 구성 등등. 마치 정전(canon)을 판별하는 비평가 선생님들처럼, 두 신사는 무지몽매한 대중을 대신해 남겨야 할 기사도 소설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한다. 물론 그것은 세르반테스 자신의 기준이다.


세르반테스의 의도는 분명하다. 기사도 소설에 대한 공격. 하지만 작가이자 기사도 소설의 독자였던 세르반테스는 기사도 소설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우스꽝스러운 검열 장면을 통해 넘쳐나는 엉터리 기사도 소설들을 폐기하고, 남길 가치가 있는 몇 편의 걸작들을 구하려던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의 작품도 포함해서.


“미겔 데 세르반떼스의 <라 갈라떼아>(세르반테스의 처녀작. 그는 이 작품에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듯 종종 속편을 쓰겠다고 했었으나 쓰지 못하고 말았다)로군요.” 

“그 세르반떼스도 오래전부터 내 친구지.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 사람은 노래보다 속세의 고생에 더 익숙한 사람이야. 그 책 속에는 약간 기대할 만한 구석도 있지. 무엇을 내놓고 아무런 결말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말야. 마땅히 있어야 할 속편이나 기다릴 수밖에는. 약간 손질만 하면 지금은 못 받고 있는 인기도 얻을 수 있을 거야. 자, 그때까지 당신 집에다 간수해두시지.” (64쪽)


모든 작가는 자기만의 문학사를 갖는다고 말한 것은 밀란 쿤데라였다. 세르반테스 또한 그것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발사와 신부의 검열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로 소설 속에 들어오는 순간 문제는 달라진다. 그것은 더 이상 작가 자신이 젖줄을 댄 사적인 문학사에 대한 장난스러운 언급이 아니다. 이발사와 신부라는(다소 자질이 의심스러운) 두 명의 검열관은 화형식을 통해 가치 있는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구분한다. 선택과 배제. 그들은 모든 시대의 비평가들이 그렇게 하듯, 그들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공식적인(혹은 공익적인) 문학사를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짝짝짝

나는 잠시 타이핑을 멈추고 그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니 뛰어난 안목과 냉철한 감식안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검열관과 비평가 들을 도대체 누가 검열하고 비평할 것인지는 묻지 말기로 하자. 적어도 오늘은 적당한 날이 아니다. 어차피 밤이 오면 무지몽매한 가정부가 게으른 판관들을 대신해 남겨야 할 책과 그렇지 않은 책들을 가리지 않고 몽땅 태워버릴 예정이다.


하지만 아무리 책을 태운다 한들 이미 읽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의 돈 끼호떼는 이미 읽어버린 사람이다. 독자, 그것도 미친 독자다. 뒤늦게 잠에서 깨어나 온 벽에다 칼질을 하며 건재함을 과시하던 돈 끼호떼는 자신의 소장도서가 사악한 마술사에 의해 사라져버렸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놀라지 않는다. 다만 그자의 이름이 ‘현인 무냐똔’이었다고 둘러대는 조카딸을 향해 침착하게 대꾸할 뿐이다. “그자는 아마 프레스똔이라고 말했을 게다.” 그는 이미 읽었고, 읽은 것을 받아들였다. 검열은 그가 읽은 것을 오히려 더 풍요롭게 만들어줄 뿐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돈 끼호떼는 두 번째의 출정을 나선다. 기사도 소설에 대한 공격, 혹은 패러디와 이별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돈 끼호떼의 모험은 더 이상 이야기 속 영웅들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답습이 아니다. 이발사와 신부라는 비평가(그리고 조카딸과 가정부라는 대중)에 의해 폐기된 어떤 전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되살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마치 세르반테스 자신의 소설이 그런 것처럼.


소설의 정신은 연속의 정신이다. 모든 소설은 그에 앞선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며, 소설에 앞선 모든 체험을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정신은 현재에만 고정되었다. 이 현재는 너무 넓고 방대한 것이어서 우리의 지평에서 과거를 몰아내고 시간을 현재의 순간만으로 축소해 버린다. 이 같은 체계에 휩쓸려 있는 소설은 더 이상 ‘작품’(영속하게 하는 것, 과거를 미래에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건들과 다를 바 없는 시사적인 사건이며, 내일 없는 몸짓일 뿐이다. (<소설의 기술>(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민음사 펴냄) 34쪽)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돈 끼호떼의 모험은 세르반테스 자신의 창작 과정에 대한 은유라고. 위대한 선배들이 갔던 영웅적인 길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때론 우스꽝스러운 형식으로 되풀이 하는 것. 그들이 남긴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은 채, 그저 새롭게 반복하는 것 — 근대 문학의 시작을 알린 <돈 끼호떼>는 바로 그렇게 탄생했다. 


우리는 아마 이 은유를 더욱 확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돈 끼호떼를 아예 작가라고 하는 건 어떤가. 허름한 주막을 성이라고 생각하고, 풍차를 거인이라고 생각하며, 익숙한 모든 사물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바라보는 미친 독자가 작가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작가의 옆에 찰싹 붙어 때론 감탄하고, 대개는 이죽거리며 세상과 작가 사이의 (최소한의) 소통을 책임지고 있는 산초 빤사는 편집자라고 해야겠지. 그렇다면 돈 끼호떼가 한 번 보지도 못한 채 그토록 사모하는 둘씨네아 아가씨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독자일 것이다(이런 관점에서 보면 10년 후 발표된 속편에서 마침내 마주친 둘씨네아에게 돈 끼호떼가 실망하는 장면, 산초가 돈 끼호떼를 달래기 위해 공주님이 나쁜 마법에 걸렸다고 둘러대는 장면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물론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나는 앞선 5장에서 예고했듯 “비난받을 두려움도, 보상에 대한 기대도 없이 돈 끼호떼의 이야기에 대해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깡그리” 말하고 있을 뿐이다. 뭔가 그럴 듯한 것을 기대했다면 이 글은 이만 접고(이런, 벌써 이만큼이나 읽어버렸는데!) 훌륭한 선생님들이 남기신 주옥같은 글을 참고하시라.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나 이언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 같은 책들을. 리포트를 쓰거나 숙제를 하기에는 윌리엄 L. 랭어가 엮은 <호메로스에서 돈 키호테까지> 중 H.R. 트레버‐로퍼가 쓴 ‘돈 키호테의 두 에스파냐’라는 꼭지가 적당하다. 비교적 적은 분량에 세르반테스의 약력과 당시 시대상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다. 돈 끼호떼와 산초 빤사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색다른 접근을 원한다면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을, 때론 포스트 모더니즘적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돈 끼호떼>의 서술 기법에 대해서라면 로버트 스탬의 <자기 반영의 영화와 문학>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그밖에도 <돈 끼호떼>를 다룬 많은, 정말 많은 글들이 있다.


나는 어쩌면 이 자리에서 우리의 ‘우수에 찬 얼굴의 기사’의 모험을 더욱 상세하게 기술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촉박한 마감과 게으름, 연재가 너무 늘어지는 게 아니냐는 프레시안북스 측의 압박(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들의 의견을 언제나 신뢰하는 편이며 별다른 불만도 갖고 있지 않으며 비록 매번 마감은 늦지만 언젠가 말했듯 그건 감사의 마음이 너무 큰 탓에 언제나 넙죽 엎드린 자세로 타이핑을 하기 때문이다) 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다른 무엇보다 보르헤스의 어느 단편을 읽어버렸기 때문이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짧은 이야기에서 보르헤스는 말 그대로 <돈 끼호떼>를 다시 쓴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는 또 다른 <돈키호테>를 집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쓰려고 했던 것은 <돈키호테> 그 자체였다. 그가 원작을 기계적으로 옮겨 쓰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은 덧붙일 필요가 없다. 그의 경탄스러운 야심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모든 단어와 모든 행이 완전히 일치하는 몇 페이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픽션들>(송병선 옮김, 민음사 펴냄) 57쪽)


처음에 피에르 메냐르는 “스페인어를 열심히 배우고, 가톨릭 신앙에 귀의하고, 무어인들이나 터키인들과 전쟁을 벌이고, 1602년부터 1918년까지의 유럽 역사를 잊어버리고,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되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이유로 그 계획을 포기해버린다. 세르반테스가 되어 <돈 끼호떼>에 이르기보다는 피에르 메나르로 계속 존재하면서 피에르 메나르의 경험을 통해 <돈 끼호떼>에 이르는 것이 더 흥미롭다고 판단한 것이다. 과연 어떻게?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소설 속 피에르 메나르는 <돈 끼호떼> 1부의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의 일부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소설의 화자는 친구가 남긴 작품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글자상으로는 하나도 다르지 않고 똑같다. 그러나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작품보다 거의 무한할 정도로 풍요롭다.(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더 ‘모호’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호성은 풍요로움이다.)

메나르의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비교해보면 이것은 확연히 드러난다. 가령 세르반테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진리’의 어머니는 역사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 — <돈키호테> 1부, 9장


‘재치 넘치는 평민’인 세르반테스가 17세기에 쓴 이런 열거들은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반면에 메나르는 이렇게 적는다.


…… ‘진리’의 어머니는 역사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이다. 이런 생각은 어마어마하게 놀라운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와 동시대 사람인 메나르는 역사를 현실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현실의 기원으로 정의한다. 메나르에게 역사적 진실이란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행위이다. 마지막 문장 —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이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 — 은 뻔뻔스럽게도 잘난 척하고 있다. (63쪽)


결국 보르헤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텍스트를 둘러싼 컨텍스트의 변화를 통해 무한한 의미를 창출해내는 일의 즐거움, 독서의 즐거움이다(“메나르는 (아마 자기도 모르게) 새로운 기법 — 계획적인  시대착오와 잘못된 원저자 설정 — 을 통해 꼼꼼하고 흔적을 남기는 기술인 독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나는 여기에 다소 고리타분한 서평가의 편견을 덧붙이고 싶다. 어떤 작품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말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작품 전체를 고스란히 다시 쓸 수밖에 없다. 한 권의 책을 타이핑하는 일은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정말 더럽게 힘든 일이다. 당신은 정말 가련한 서평가에게 가욋돈을 주지도 않고 그런 일을 요구할 정도로 뻔뻔한 사람인가? 


설마. 나는 아니라고 믿는다.


프레시안북스 2013. 4. 5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405163802&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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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돈 끼호떼 2부는 다루지 못하고 후루룩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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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구, 그 잔인한 게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영국의 시인 T. S. 엘리어트는 그렇게 노래했다. 분명 이 위대한 시인은 야구를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시구詩句와는 달리, 모든 야구팬들에게 4월은 가장 신나는 달이 아니던가. 겨우내 기다렸던 프로야구 시즌이 마침내 개막하는 달이고, 누구나 자신의 팀이 승승장구하는 꿈을 꿀 수 있는 달이다. 설령 당신이 만년 하위 팀의 팬이라고 하더라도 ‘올해는 다르다’는 매년 똑같은 헛된 꿈을 다시 한 번 꿀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야구는 잔인한 게임이다.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진다. 그리고 진다는 것은 정말이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아무리 지고 또 진다고 해도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당신이 LG 트윈스의 팬이라면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1994년에 마지막 우승을 한 LG 트윈스는, 2002년 이후로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유일한 팀이다. 다시 말해 <고교 독서평설>을 구독하는 당신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마지막 우승을 했고, 당신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단 한 번도 ‘가을야구’를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LG 트윈스의 팬이라면, 지금 당장 경찰에 연락하라. 청소년보호법에 따라 당신을 야구로부터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라. 아무리 프로야구 팀이라도 자라나는 청소년의 마음을 산산이 부셔놓을 권리는 없는 것이다.


2. 야구, 또는 신비주의


빌리 빈에게도 야구는 잔인한 게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모든 스카우터들이 꿈꾸는 종류의 선수였다. 주루 능력과 송구 능력, 수비 능력, 타격 정확도, 장타력을 뜻하는 5툴five‐tools를 모두 갖춘 것은 물론이고, 타고난 리더십과 멋진 외모(참고로 영화 <머니볼>에서 빌리 빈을 연기한 것은 브래드 피트였다)까지 가지고 있는 준비된 슈퍼스타였다. 수많은 메이저리그 팀들이 그를 탐냈으며, 누구도 그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막대한 계약금과 함께 뉴욕 메츠에 입단한다.


하지만 눈부신 재능은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타고난 재능 덕분에 빌리는 실패에 익숙하지 않았고, 프로의 높은 벽 앞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실패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는 실패를 견딜 수 없었지만, 그럴수록 실패는 그의 어깨를 더욱 짓누를 뿐이었다. 코치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들이 보기에 빌리는 실패할 수 없는 선수였으니까. 어쩌면 그들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빌리는 결코 실패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니까. 실패를 받아들이지 않는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자신의 두려움과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내몰려”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던 빌리는 은퇴를 결심한다.


그렇게 해서 빌리는 부질없이 매달렸던 재능에 대한 미련을 마침내 던져버렸다. 그는 자신의 재능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재능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야구는 기술일 수도 있고 요령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 그는 야구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의 근거 없는 기대와 꿈에 짓눌리고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렸던 과거에서 이제 벗어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빌리가 신비주의에 둘러싸인 야구를 혐오하게 된 것도 당연했다. 그는 곧 야구의 신비주의를 무너뜨릴 무기를 쥐게 될 것이다. (91쪽)


1990년, 빌리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뛰었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전력분석원으로 취직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좀처럼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성공하고 싶었고, 그것을 위해서는 선수를 평가하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했다. 기존의 방식은 선수들을 판단하는데 적절하지 않았다. 빌리 자신이 바로 그 증거였다. “메이저리그 스타가 되지 못한 고참 스카우터들은 젊은 선수를 통해 대신 꿈을 이루고 싶어 한다.” 마치 어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들은 결코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수 없었다. 강한 어깨와 빠른 발, ‘야구선수다운’ 몸매와 잘생긴 얼굴에 홀려 막대한 계약금을 낭비했다. 빌리는 그들의 실패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때를 절박했던 심정을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야구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필사적인 노력 속에서 창의성이 나오게 됩니다.” (98쪽)


3. 야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식품공장의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던 빌 제임스는 괴짜였다. 삼진과 홈런, 호수비와 같은 선수들의 플레이에 열광하는 다른 팬들과는 달리, 그는 야구를 통계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 제임스는 엉터리 통계가 야구를 뒤덮고 있다고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야구라는 게임을 왜곡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테면 타점은 전통적으로 타자의 능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지만, 그가 보기에는 타석에 들어섰을 때 주자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단지 운에 지나지 않는 문제였다. 타율과 그 밖의 것들 또한 행운과 요령의 교묘한 결합이긴 마찬가지였다.


“타자는 자신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의 성공 여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하며, 타자의 목표는 바로 출루에 있다. 그러나 이 점에서 야구계가 얼마나 착각에 빠져 있는지를 알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공격 부문의 팀별 순위를 정할 때 메이저리그는 1순위, 즉 최고의 공격 팀으로 가장 많은 득점을 한 팀이 아니라 평균 타율이 가장 높은 팀을 꼽는다. 공격의 목적은 높은 타율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117쪽)


그는 볼넷과 안타, 도루 등의 숫자를 고려해 한 팀이 얼마나 득점할 수 있는지 예측하는 모형을 만들었다. 실제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진 이론을 통해 그는 사람들이 볼넷과 장타의 가치는 폄하하고, 평균 타율과 도루의 가치를 과대평가해왔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것은 게임의 법칙을 뒤바꿀 획기적인 주장이었지만, 정작 야구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빌 제임스는 외부인, 그것도 숫자와 컴퓨터에 미친 괴짜 외부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숫자를 사랑한 몇몇 경제학자들과 단순한 감상을 넘어선 폭넓은 이해를 바라던 소수의 팬들이 빌 제임스의 이론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기존의 해석에 만족하지 않았던 그들은 스스로 가설을 세운 후 증거를 찾아 실험했다. 그리고 그들의 실험은 점차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극소수의 야구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빌리 빈 또한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4. 그저 운이 좋았을 뿐?


1997년 빌리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단장으로 취임한다. 불과 몇 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그렇지만 야구는 여전히 그에게 잔인했다. 애슬레틱스는 가난한 구단이었고, 팀을 승리로 이끌 스타급 선수는커녕 평범한 선수조차 살 형편이 못 되었던 것이다. 그는 적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네 배에 이르는 돈을 쓰는 부자 구단들을 상대해 승리를 거둬야 했다. 분명 공정한 상황은 아니다.


메이저리그의 평균 연봉은 230만 달러였지만, 시즌 개막일 기준 애슬레틱스의 평균 연봉은 150만 달러도 채 못 되는 금액이었다. 따라서 다듬어지지 않은 어린 선수나 시장에서 과소평가된 기존 선수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프로야구계의 연봉 상승세를 감안한다면 메이저리그 선수들 가운데 저평가된 선수가 남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게다가 선수시장이 합리적으로 운영된다고 해도 재능 있는 선수는 이미 부자 구단에서 모조리 쓸어갔을 테니 가난한 구단이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을 리 없다. (175~176쪽)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애슬레틱스는 대부분의 부자 구단들보다 좋은 성적을 올렸다. 해가 갈수록 재정이 더욱 악화되고, 다른 구단과의 연봉 격차 또한 빠르게 벌어졌지만, 승률은 오히려 더 높아졌다. 97년 87승을 기록한 팀은 2000년에 91승을 거뒀고, 2001년에는 102승을 거두면서 2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당신이 LG 트윈스의 팬이라면 바로 지금이 분통을 터뜨릴 순간이다.


비밀은 바로 빌 제임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발전시킨 새로운 평가 기준에 있었다. 애슬레틱스는 전통적인 관점을 가진 구단들이 높게 평가하는 선수들의 몸값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빠른 발과 강한 어깨, 높은 타율과 훌륭한 수비력을 가진 선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볼넷을 고를 줄 아는 타자, 출루율이 높은 타자를 원했을 뿐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들이 아무리 많은 단점을 가지고 있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조금 더 헐값에 영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구단은 애슬레틱스의 성공을 단순한 운으로 치부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한, 애슬레틱스는 계속해서 승리할 수 있었다. 모두가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선수시장에서 홀로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애슬레틱스의 성공 요인이었다.


5. 머니볼, 불공정한 게임을 승리로 이끄는 과학


2002년은 빌리 빈과 애슬레틱스에게 중요한 시즌이었다. 시즌을 앞두고 팀의 중심타자인 1루수 제이슨 지암비와 빠른 발을 가진 1번 타자 자니 데이먼, 그리고 팀의 뒷문을 지키던 마무리 투수 제이슨 이스링하우젠이 모두 자유계약 선수가 되어 막대한 연봉을 제시한 다른 구단으로 이적한 것이다. 모든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애슬레틱스의 몰락을 예견했다. 하지만 빌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개인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집합체, 즉 팀 전체의 완성도를 재현해내는 데 있습니다.” 그는 제2의 지암비를 찾을 수도 없고 찾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지암비를 구성하는 여러 부분 중 한 부분을 갖춘 선수를 찾아서 지암비보다 훨씬 저렴한 값에 사올 수는 있었다. (204쪽)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물론 지암비의 높은 출루율이었고, 그것을 대체할 만한 선수를 찾은 것이다. 빌리는 보스톤 레드삭스에서 포수로 뛰다 치명적인 어깨 부상을 입고 방출당한 스콧 해터버그를 영입했고, 그에게 지암비가 떠난 1루를 맡겼다. 그는 또한 신인지명과 트레이드를 통해 다른 부족한 부분들도 채워나갔다. 다른 구단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선수를 찾아 기용하고, 과대평가된 선수를 비싼 가격에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함으로써 필요한 선수들을 헐값에 받아왔다. 다른 팀들이 합리적인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빌리를 비웃기까지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에슬레틱스가 하려는 일들을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한 가지 교훈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한 번도 비슷한 사례를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행동을 비웃는 태도는 단순한 악덕이 아니라 오히려 사치에 가깝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상상력의 부재는 경쟁시장에서의 비효율성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168쪽)


그리하여 역사적인 시즌이 펼쳐진다. 시즌 초반 부진을 면치 못했던 팀은 중반 이후 연승을 이어가기 시작했고, 아메리칸 리그 최초 20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것이다. 11대 0이라는 큰 점수차로 앞서 나가다 11대 11로 따라잡혔던 마지막 경기에서, 대타로 나와 연장 끝내기 홈런을 친 것은 다름 아닌 스콧 해터버그였다.


결국 지구 우승을 거머쥐며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사람들은 그들의 야구를  ‘머니볼’이라고 불렀다.


6. 머니볼, 그 이후


하지만 성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다른 구단들이 서서히 빌리의 방식을 따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평가되었던 선수들이 새롭게 평가되었다. 경쟁이 치열해지며 자연스럽게 몸값이 폭등했다. 물론 애슬레틱스 구단에는 그들의 몸값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고, 새로운 접근 방식을 발견해야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고, 빌리 빈의 실험은 여전히 계속되는 중이다. 그는 여전히 저평가된 선수들을 찾아 선수들의 기록을 뒤지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12 시즌, 오클랜드는 2006년 이후 6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하며 새로운 머니볼의 시작을 예고했다.


이것은 물론 야구를 둘러싼 이야기이지만, 단순히 야구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빌리 빈과 오클랜드 에슬레틱스가 야구계에 던진 것은 어떻게 구단을 운영하고 경기를 펼치며, 누가 가장 훌륭한 선수이고 왜 그런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그들은 이미 주어진 답안에 만족하는 대신, 자신들의 방식으로 답을 찾았고, 그것을 멋지게 증명했다. 이것은 또한 편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애슬레틱스가 영입한 많은 선수들은 야구의 신비주의에 희생된 선수들이었고, 빌리 빈이 아니었다면 기량을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야구계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은 실패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빌리 빈이 마침내 그것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이야기. “당신이 실패를 멈추는 순간, 당신의 혁신은 끝이다”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닌 우디 앨런이었다 .


결국 <머니볼>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야구는 분명 잔인한 게임이지만, 인생을 닮은 게임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야구가 잔인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고교 독서평설 201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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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독서평설에 연재 중인 '고전의 귀를 접다' 코너의 지난 4월호 원고. 사실 '머니볼'이랑 가장 먼 야구가 LG 야구가 아닐까 싶은데... 얼마 전 보낸 5월호 원고에서는 '풀 하우스'를 소개하며 4할 타자의 등장이 빠를까, LG 트윈스 4강 진출이 빠를까를 다뤘다. 고등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냐 싶지만, 그래도 4월은 야구의 계절이니까. 4할도 4강도 4월도 모두 병이고 LG 트윈스는 이뭐병... 


솔직히 지난 일요일 대 두산전만 이겼어도 이런 포스팅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졌고, NC, 한화와의 생각만해도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는 시리즈를 앞두게 되었다. 오늘은 야구를 할 수 있을까? 과연, 야구를 하는 게 좋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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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3-04-09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봐도 웃음이 ㅎㅎㅎ

올해 롯데는 웃음후보도 안 될듯합니다. 롯데 떨어지고 LG가 사강 가면 프로 야구 좀 재미잇을 것 같은데요.

poptrash 2013-04-09 18:06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하이드 님! 그래도 롯데는 최근 5년간 해온 게 있으니 잘하지 않을까요? 압도적이진 않아도 그럭저럭 위기를 극복하면서 (종종 뒷골 잡는 경기도 하겠지만) 4강 싸움할 것 같아요. 사실 올해는 SK도 긴가민가해서... 반면 넥센 타선이 폭발할 거 같으니 올해 야구는 더 재밌겠네요. 제가 LG 팬만 아니라면 진짜 재밌을듯...
 

흥미로운 제목이다. “너희들의 혁명은 실패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들의 봉기가 시작된다!!”라는 띠지의 문구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문제의 띠지에 따르면 히로세 준은 “가라타니 고진, 아사다 아키라를 잇는 젊은 사상가”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알 뿐이다.


저자는 우리가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세상은 어리석은 자들이 좌지우지하고 있고, 그들을 설득하여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도, 그들로부터 패권을 빼앗아 오는 것도, 그들을 전부 숙청하여 어리석은 자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하나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 결과에 충격과 공포를 느꼈던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만한 대목이다. 물론 그것도 어리석고 힘센 ‘그들’과 어리석진 않지만 패권을 빼앗을 역량은 없는 ‘우리’라는 이분법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의 말이지만.


불가능한 혁명의 대안은 바로 봉기다. 잠깐, 봉기라고? 고개를 갸웃할 당신을 위해 직접 저자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들뢰즈의 말처럼 세계가 우리의 혁명에 의해 무언가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우리 자신이 무언가 다른 것이 되고, 혁명적으로 되고,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된다devenir’는 것은, 세계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것이다. 세계가 무언가가 ‘되는’ 것을 기대하는 우리의 치욕, 세계로부터 사랑받을 것을 기대하는 우리의 치욕은 우리 자신이 무언가가 ‘되는’ 것으로만, 우리가 세계를 사랑하는 것으로만 씻어낼 수 있다. 이 책에서 ‘봉기’라고 부르는 것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언가가 ‘되는’ 거, 그것에 관한 이중화된 비전, 디스토피아를 뒤바꾸는 에티카, 게릴라전을 가리킨다. 이와 더불어 시작되는 ‘사랑’이란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애’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봉기의 정체는 모호하기만 하다. 봉기와 혁명의 관계 또한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인데, 난데없이 ‘사랑’이 끼어든다. 그리고 저자에게는 설명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것이 이 책의 단점이다. 현대 사상과 영화를 오가는 방대한 인용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 그것을 아랍의 봄이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의 사례에 적용하는 저자의 통찰은 종종 빛을 발하지만, 근본적인 개념설정의 부재가 자꾸만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는 흥미로운 독서경험을 제공한다. 어차피 명확한 것도 없고, 답도 없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혁명이란 문제를 해결하고, 공유하는 답을 실현하는 것이다. 반면 봉기는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창출하면서 문제를 껴안고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마치 원자력이 그런 것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운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자신이 주장하는 ‘봉기’ 그 자체를 닮았다. 그리고 “혁명은 피로를 알지 못하지만, 봉기는 피로하다.” 저자가 끊임없이 나열하는 현대 사상의 단편들은 분명 우리를 피로하게 하는 구석이 있지만, 그것이 단편인 탓에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지식인의 무척 솔직한 자기고백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말한다. “막다른 곳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다른 상태 속에서 버, 버, 버벅거림으로써만 오늘날의 투쟁은 시작한다.” 우리의 삶도, 그리고 이 책도 마찬가지다.
















시사in 288호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5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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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이다. 특히 영화를 전공한 이력답게 영화와 프랑스 이론을 나열하는 저자의 솜씨가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 물론 나는 이 말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또한 폭력적인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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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3-25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재미있겠는데요. 읽어봐야겠습니다.

poptrash 2013-03-26 17:54   좋아요 0 | URL
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ㅎㅎ
 

제6장 어느 미친 독자의 영웅적이고 미미한 모험에 대한 이야기


이름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라 만차의 어느 마을에 창걸이에 창, 낡은 방패, 야윈 말 그리고 날쌘 사냥개를 가진, 흔히 볼 수 있는 한 귀족이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 끼하다, 혹은 께사다, 어쩌면 끼하나. 다소 방정맞은 이름이다. 위무도 당당한 돈 끼호떼 데 라 만차라는 이름과 비교한다면 더더욱.


어느덧 쉰을 바라보는 끼하다, 혹은 께사다, 어쩌면 끼하나는 평범한 시골 귀족의 평온한 삶에 안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낮에는 양고기보다 쇠고기를 더 많이 넣어 삶은 요리를 먹고, 밤에는 잘게 썬 고기 요리, 토요일에는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와 달걀 요리를 먹으며, 금요일에는 불콩 콩국을, 일요일이면 새끼 비둘기 요리를 곁들여 먹으면서도 콜레스테롤 수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살 수도 있었단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도대체 왜? 바로 책 때문이다. 


그는 한가한 시간이 있으면(하기야 일 년 중 대부분이 한가한 시간이지만) 기사도 이야기를 읽는 데 골몰했으며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사냥이나 재산 관리조차 잊고 말았다. 나중에는 기사도에 대한 호기심과 이러한 도취가 정도를 넘어서, 읽고 싶은 기사도 책을 구입하기 위해서 수많은 밭을 팔아버렸다. (<돈 끼호떼>(김현창 옮김, 범우사 펴냄) 29쪽)


한 마디로 그는 독자였다. 우리 시대의 독서 멘토로 불린다는 어느 ‘미남’ 저자는 일찍이 독서를 세 부류로 나눈 바 있다. 1단계인 프로 리딩Pro‐Reading은 “자기 분야에 관한 책 100권 이상을 읽어서 3000년의 내공을 쌓는 독서”이고, 2단계인 슈퍼 리딩Super‐Reading은 “1년 365권 자기계발 독서 프로젝트를 통해 성공자의 사고방식을 갖는 독서”이며, 그레이트 리딩Great‐Reading은 “인문고전 독서를 통해 리더로 거듭나는 독서”라고 한다(<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이지성 외 지음, 다산라이프 펴냄) 11쪽 참고). ‘돈 끼호떼 라 만차’만큼이나 거창한 작명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재기 넘치는 시골 귀족은 어떤 독자였을까? 세르반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요컨대 그는 이런 종류의 책(*기사도 소설)에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매일 밤을 뜬눈으로 꼬박 새웠고, 낮에는 낮대로 아침 동이 틀 때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오로지 독서에만 열중하였는데, 이러한 바람에 그는 정신마저 잃게 되었다. 요술, 싸움, 전투, 결투, 부상, 구애, 연인, 번민, 그 밖의 온갖 황당무계한 사건 등 모두 그 엄청난 책에서 읽은 이상야릇한 환상이 언제나 그를 사로잡았으며, 그리하여 그가 읽은 숱한 허황된 얘기들이 모두 진실로만 여겨졌고,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확실한 이야기는 없다고 여겨질 만큼 그의 공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말았다. (30쪽)


그러니 우리는 그를 책에 써 있는 그대로 믿는 독자, 다시 말해 크레이지 리딩Crazy‐Reading을 하는 독자라고 해두기로 하자. ‘프로’도 ‘슈퍼’도 ‘그레이트’도 아니다. 그냥 미친놈이다. 돈 끼호떼의 시대에 성공을 약속하는 멘토들의 자기계발서나 다정한 ‘힐링 도서’가 없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행여나 그가 그런 책을 읽었다면 우리 미치지 않은 독자들은 애잔한 편력기사의 모험담을 읽을 수 없었으리라. 우리의 신사 양반 또한 아무리 그런 책을 읽는다 해도 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찌감치 포기했겠지. 정신 나간 삼촌 탓에 속을 끓여야 했던 조카딸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대부분의 독자란 이렇게 이기적이다.


미친 독자의 운명을 비장하게 노래한 것은 바로 사사쿠 아타루다.


책을 읽었다기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34쪽)


그러므로 이런 것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의 일입니다. 왜 사람은 책을 성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왜 책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왜 읽고서 옳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요? 아시겠지요. 미쳐버리기 때문입니다. (37쪽)


결국 미친 독자란 성실한 독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미치지 않은 우리와 미친 돈 끼호떼가 있을 뿐이다. 그는 ‘정보’라는 필터를 꽂을 줄 모르는 독자다. 그 밖의 ‘프로’니 ‘슈퍼’니 ‘그레이트’니 하는 구분은 사사키 아타루에게는 사기나 다름없는 짓이다. 


읽어도 전혀 모르겠다, 머리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지루해서 왠지 싫은 기분이 든다고 하는 것, 다들 뭔가 자신의 능력이 뒤떨어져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화를 내거나 책을 내팽개치거나 하는 것입니다. “번역이 나빠”라고 한다거나 “좀 더 쉽게 쓰란 말이야”라며 다른 사람 탓을 하거나 “좀 더 공부해야겠는걸”, “좀 더 쉬운 책은 없을까”라든가, 초급이 있어야 중급이 있고 중급이 있어야 상급이 있다는 듯한 지의 서열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런 일종의 열등감이나 분노를 이용하여 엉터리 같은 입문서나 비즈니스 책이나 팔아치우며 독자를 착취하는 패거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39쪽)


물론 이것은 사사키 아타루의 주장이다. 나는 우리 시대의 몇몇 베스트셀러 저자들을 “엉터리 같은 입문서나 비즈니스 책이나 팔아치우며 독자를 착취하는 패거리”라고 부를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 이 글을 읽으며 “뭐 이딴 글이 다 있어”라고 투덜대는 당신을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아시겠지만, 우리는 더는 책을 읽고 미칠 수 있는 시대를 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따듯한 방에 앉아 낄낄거리며 책장을 넘기는(혹은 마우스 휠을 돌리는) 안전한 소비자‐독자가 되는 일이다. 내가,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것은 우리의 잘못인가? 글쎄,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언젠가 루카치는 이렇게 탄식하지 않았던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러니 사소한 의문들은 뒤로 한 채, 검은 글자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책장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의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자. 평범한 시골 귀족 끼하다, 혹은 께사다, 어쩌면 끼하나는 그것을 읽었고, 아니, 읽고 말았고, 그리하여  돈 끼호떼가 되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Neo’가 ‘그The One’가 된 것처럼, 그는 그저 믿음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편력 기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창대한 모험이라도 그 시작은 미미한 법. 우리의 편력 기사를 기다리는 것 또한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차라리 궁상맞은 사소한 문제들이었다.


그가 처음 만난 난관은 편력 기사의 코스튬을 갖추는 일이다. 창고를 뒤져 몇 대나 지난 옛 조상의 낡은 갑옷을 발견하지만, 투구에 낯가리개가 없었다. 그는 뛰어난 손재주를 활용해 두꺼운 판지를 잘라 쇠모자에 붙이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비록 “그것이 얼마나 튼튼하며 칼끝의 위험에 견딜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려고 칼을 뽑아 두어 번 내려쳐서, 일주일 동안의 노력의 결과를 망가뜨려버리고 말”지만, 다시금 공들여 완성한 그것을 두 번 시험하지 않을 정도로는 현명했던 것이다.


첫 번째 난관을 무사히 통과한 그는 모든 기사가 자신에게 꼭 맞는 명마를 가지고 있듯 자신의 ‘로신’(비루먹은 말이라는 뜻)에게 로시난떼라는 멋진 이름을 지어주고, 돈 끼호떼 데 라 만차라는 이름을 통해 스스로의 신분과 고향을 분명히 나타낸 후, 한 번 본 적도 없는 이웃 마을 농부의 딸에게 둘씨네아 델 또보소라는 이름을 붙여 아름다운 공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모든 편력 기사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조건들을 단숨에 마련한다. 이제 남은 것은 긴 창을 비껴들고 로시난떼에 오르는 일이다.


이렇게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고 보니 그가 쳐부수고자 하는 부조리, 바로잡아야 할 부정, 고쳐야 할 비리, 제거해야 할 폐해, 처리해야 할 부채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어서 자기가 조금이라도 지체하고 있으면 그만큼 세상이 받는 손실이 크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33쪽)


우리 시대 어떤 정치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처럼, ‘사심 없는’ 희망의 첫발을 내디딘 돈 끼호떼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는 아직 기사가 아니다. 누구보다 그 자신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왜 아니겠는가? 그는 아직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지 않았고, 기사도 소설의 법도에 의하면 정식 서임을 받지 않은 이는 어떤 기사와도 맞설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보고, 공상하는 모든 것이 책에서 읽는 그대로 되어 있고 또 된다고 믿고 있는 우리의 모험가”는, 그러니까 미친 독자는 이내 “사면의 누각이 있고, 은빛 찬란한 첨탑과 들어 올리는 다리와 깊은 해자 등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성”(이라고 쓰고 주막이라고 읽는다)을 발견한 것이다. 


성주는, 그러니까 주인은 한 눈에 보기에도 미친 게 분명한 허름한 손님에게 돈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다. 물론 끼호떼에게는 한 푼도 없다. 그가 읽은 편력 기사의 이야기책에 돈을 가지고 다녔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기사를 주인은 좋은 말로 타이른다. 굳이 책에 쓰지 않은 것은 편력 기사들이 깨끗한 속옷처럼 돈을 갖고 다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구태여 그것을 밝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책에 나오지 않는 사실이라고? 세상에, 그럴 리가! 책으로 기사도를 배운 성실한 독자로서는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만, 그는 차분히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따름이다. 성실한 독자는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법이고, 우리의 주인공에게는 기사 서임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그는 이미 미쳤으니까. 누구도 두 번 미칠 수는 없는 법이다.


마침내 돈 끼호떼는 기사 서임을 받는다. 말썽을 원치 않는 주막 주인이 주먹구구식으로 한 것이지만, 어쨌거나 서임은 서임이다. “말의 배때기까지 터질 듯한 기쁨으로 싱글벙글 마음도 가볍게 매우 만족스러운 심정으로” 주막을 나선 돈 끼호떼는 곧바로 정의를 구현한다. 양치는 소년을 묶어놓고 채찍질을 하고 있는 농부를 만난 것이다. 그는 이 사악한 사내가 소년의 임금도 지불하지 않은 채 트집을 잡아 분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채고, 저 현명한 솔로몬 왕에 뒤지지 않는 판결을 내린다. 농부에게 지금 즉시 집으로 소년을 데려가 밀린 임금을 지불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즉결 심판을 내릴 수도 있지만, 기사가 천한 농부에게 검을 들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기사가 떠나는 순간 더욱 가혹한 매질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는 소년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지만, 돈 끼호떼는 기사도와 맹세를 운운하며 농부에게 거듭 경고할 뿐이다.


“레알 은화로 지불해주어라. 그러면 나는 만족이다. 아무튼 반드시 서약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니라. 만일 어길 경우에는 그대의 서약 그대로 다시 되돌아와 그대를 찾아내어 형벌에 처할 테다. 제아무리 그대가 도마뱀처럼 달아나 숨더라도 찾아내지 않고는 가만있지 않을 테다. 이것의 이행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기 위해서, 대체 이것이 누구의 명령인가를 가르쳐주마. 나는 사악과 비도의 징벌자인 용맹스러운 돈 끼호떼 데 라 만차다. 그러니 한 번 맹세한 서약을 꿈에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때엔 앞에서도 말한 대로 형벌이 그대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니 그리 알아라.” (48쪽)


아, 우리의 멋진 돈 끼호떼! 무정한 무리들의 부정을 간단히 제압한 초보 기사는, 그러나 결코 초보로는 보이지 않는 용감한 기사는 “자기의 기사도가 참으로 화려하고 고매한 발족을 했다고 생각하고 일의 진행 경과에 매우 만족해하면서 무척 우쭐해져서” 자신의 길을 가고, 남겨진 소년은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 채 혹독한 고초를 겪는다. 세르반테스는 첫 번째 업적을 담담하게 기술한다.


우리의 용사 돈 끼호떼는 이런 식으로 무도(無道)와 비리를 바로잡았던 것이다. (49쪽)


그렇지만 용사의 길에 시련이 없을 리 없다. 우리의 남다른 기사에게 시련은 무척 일찍 찾아온다. 성주의 조언에 따라 깨끗한 속옷과 금화, 내친 김에 방패를 들릴 종자를 구하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편력 기사의 무리(는 물론 비단을 사러 가는 상인들)를 만난 것이다. 새로운 모험에 흥분한 늙은 기사는 길을 막고 서서 큰 소리로 의연하게 외친다.


“라 만차의 여왕인 둘씨네아 델 또보소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이 세상에 없다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거기 있는 누구라도 이곳을 지나가게 하지 않으리라.” (50쪽)


미친놈과 적당히 놀아주자는 생각에 말재간이 있는 상인 하나가 돈 끼호떼에게 수작을 건다. 훌륭한 부인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조금도 모르니, 한 번 그분을 보여 달라고. 그런 다음에 그토록 아름다운 분이라면 기꺼이 진실을 고백하겠노라고. 하지만 정작 돈 끼호떼조차 한 번 본 적 없는 여인이 아닌가? 돈 끼호떼는 말한다.


“아니, 부인을 보여주고 난 다음에”하고 돈 끼호떼가 대답했다. “명명백백한 사실을 고백한다고 하면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겠느냐.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부인을 한 번도 보지 않고도 그것을 믿고 고백하고 옹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싫다면 이 오만불손하고 건방진 녀석들, 나하고 한바탕 싸워야 할 줄 알아라. 기사도의 관습에 따라 한 사람씩 차례로 덤벼도 좋고, 너희들 같은 무리들의 관례와 악습대로 한꺼번에 덤벼 와도 좋다. 나는 나의 정의를 믿고 여기서 기다리겠노라.” (50쪽)


그렇다. 믿음, 돈 끼호떼에겐 그것만이 중요하다. 본 적은 없지만 틀림없이 사랑하는 부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 자신의 정의에 대한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 책에 인쇄된 글자 하나하나가 사실이라는 단단한 믿음. 돈 끼호떼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인 동시에 계부인 세르반테스가 서문에서 친절히 밝히고 있듯 기사도에 대한 공격, 다시 말해 “기사도에 관한 서적이 세상이나 속인들 사이에 갖고 있는 권위와 세력을 타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은 없”는 우스꽝스러운 이 편력담이 시대를 거치며 작가의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읽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르반테스가 쓴 것은 분명 엉터리 기사도 소설에 대한 패러디이고 무자비한 공격이다. 세간의 평에 의하면 길고도 지루했던 라블레를 다룬 이 연재의 첫 4회 분을 위해 내가 적지 않은 돈을 주고 구입한 블라지미르 쁘로쁘의 <희극성과 웃음>(정막래 옮김, 나남 펴냄)에 따르면 패러디는 “패러디되는 대상의 내적 불충분성에 대한 폭로의 수단”이며 “문학에서 패러디가 출현한다는 것은 패러디되는 문학사조가 소멸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세르반테스가 하는 일이고 이는 라블레가 기사도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했던 작업, 즉 “작품의 작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성격의 현상들에 반대하기 위하여 전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들의 형태를 풍자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와 구별되는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분명한 목적을 위해 늙은 돈 끼호떼를 만들었고,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험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 하지만 돈 끼호떼는 잊히지 않았다 — 대부분의 수단들이 목적을 이룬 후 버려지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보잘 것 없는, 그렇지만 단단한 믿음과 함께, 신이 사라진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인간들의 운명을 낡은 갑옷처럼 두룬 채 살아남은 것이다. 유일한 절대 진리는 사라졌다. 인간에게는 너무나 많은 가능성이, 마치 사막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어느 곳으로든 갈 수 있지만 어느 하나 구원을 보장하진 않는 가능성이 주어졌다. 자유라는 이름의 형벌. 돈 끼호떼는 황량한 자유의 사막을 자신의 두 다리로, 아니, 사랑하는 애마 로시난떼의 네 다리로 걸어간다. 기사도라는 우스꽝스러운 믿음을 그러쥔 채. 그는 미친 독자讀者인 동시에 독자獨自이며, 나아가 믿음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누구보다도 신실한 독신자篤信者인 것이다. 그가 낭만주의의 영웅이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영웅이라고 해도 뭇매를 맞는 일을 피할 수는 없었다. 부인의 초상화라도 보여줄 수 없겠냐며 “아니 비록 그 초상화가 한쪽 눈이 애꾸고 다른 눈에서는 진물과 고름이 흘러내린다 해도 우리는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라는 불경스러운 말을 지껄이는 악당을 향해 “아무것도 절대로 흘러내리지 않는다, 이 흉악한 놈팡이야!”라고 사자후를 내뱉으며 돌진하던 돈 끼호떼는 그만 말에서 떨어져 나뒹굴었고, 북소리가 나게 두들겨 맞은 것이다. 물론 빗발치는 몽둥이찜질을 당하면서도 입만은 쉬지 않고 놀리며 호통을 치긴 했지만…. 


그러나 우리의 돈 끼호떼는 이런 재난은 편력 기사들에게는 으레 따라다니는 것이라고 은근히 기쁘게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잘못을 말의 탓으로 돌렸지만, 온몸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도저히 일어날 가망이 없었다. (52쪽)


아무리 노력해도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자 돈 끼호떼는 늘 하는 방법을 써보려고 마음먹는다. “그것은 전에 읽은 책들 중의 어느 한 대목을 생각해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두들겨 맞지 않았음에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없을 때 내가 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통한 목소리로 어느 기사도 소설에 등장하는 로망스를 부르던 그가 “오 고귀하신 만뚜아 후작님! 한 핏줄을 나눈 나의 숙부님이여!”란 대목에 이르렀을 때, 마침 같은 동네에 사는 농부가 그를 발견한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동네 어른을 본 마음씨 착한 농부는 그를 당나귀에 실어 마을로 데려온다. 이렇게 우리 기사의 첫 번째 모험은, 모두가 기대했던 풍차와의 대결도 미처 벌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반면 주인어른이 말도 없이 사라져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그의 집에서는 돈 끼호떼의 가장 친한 친구들인 마을 신부와 이발소 주인이 가정부가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제 짐작이 틀림없어요. 나리께서 언제나 끌어모아가지고 늘 읽고 계시던 그 몹쓸 기사도 책들이 나리의 머리를 돌게 만들고 만 거예요. 이건 신부님, 제가 태어나서 죽는 것이 틀림없는 일인 것처럼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 그 따위 책은 악마나 염병 귀신에게 줘버려야 해요.” (55쪽)


사랑하는 조카딸도 한 마디 거든다.


“외삼촌은 그 엉터리 기사도 책을 꼬박 이틀 동안이나 쉬지 않고 열심히 읽곤 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러고 나서는 책을 내동댕이치고 칼을 들고 벽을 향해 마구 내리치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지치시면 자신이 탑만큼이나 큰 거인을 넷이나 죽였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또 지쳐서 땀이 흐르면, 이것은 싸움에서 입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 그 나쁜 책들을 모두 불살라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교도처럼 화형이 알맞을 책들을 잔뜩 가지고 계시거든요.” (56쪽)


이에 신부가 입을 열어 “내일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책들을 공식 재판에 붙여서 꼭 화형에 처해야겠어. 앞으로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읽고 또 나의 소중한 친구가 한 것처럼 되풀이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라고 화답했으니, 아마도 다음 장에서는 ‘우리의 기지 넘치는 귀족의 서재에서 신부와 이발사가 행한 유쾌하고 엄숙한 검열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프레시안북스 2013. 3. 22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322141543&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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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서 붙인 "독서 천재 '돈 대리'가 미쳤어요"라는 제목에 풉,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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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위대한 세르반테스의 꼬여버린 족보와 그의 사려 깊은 친구가 들려주는 탁월한 조언에 대한 이야기



한가로운 독자여, 내가 이 책을 내 지능의 아이로서 상상할 수 있는 한 어디까지나 아름답고, 고아하고, 교묘하고, 치밀한 것이 되어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이 자리에서 새삼 맹세치 않더라도 믿어주실 줄 안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 모든 것은 자기를 닮은 것밖에 낳지 않는다는 이 자연의 법칙에는 마침내 나도 역시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 빈약하고 도무지 교양 없는 나의 재지가, 마치 모든 불편이 우쭐대고 모든 쓸쓸한 소리의 거처인 감옥 안에서나 태어난 것처럼 메마르고, 여위고, 요령부득인데다가 잡동사니를 긁어모은, 일찍이 누구 하나 생각지도 못한 사고에 찬 아들과도 비유할 수 있는 이야기 이외에, 대체 무엇을 낳을 수가 있었을까? (<돈 끼호떼>(김현창 옮김, 범우사 펴냄) 20쪽)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돈 끼호떼의 아버지가 아니다. 적어도 그의 주장은 그렇다. 그는 굳세고 가련한 기사 돈 끼호떼를 세상에 내보내며 신중하게도 그를 낳은 가상의 아버지를 함께 창조한다. 역사가인 씨데 아메떼 베넨헬리가 남긴 ‘재기 넘치는 시골 귀족 돈 끼호떼 데 라 만차’의 실록을 자신은 그저 다듬어 소개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르반테스는 그의 주장대로 돈 끼호떼의 계부인가? 씨데 아메떼 베넨헬리의 아버지이자 돈 끼호떼의 할아버지인가? 아니면 두 사람 모두의 아버지인가? 시작부터 족보를 꼬아놓은 세르반테스는 모른 척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사랑하는 독자여, 두 눈에 거의 눈물마저 머금고 이 내 자식 속에서 당신이 깨달으시는 수많은 결점을 용서하거나 관대히 봐주십사고 부탁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 아이의 친척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며, 당신 자신의 몸속에 버젓이 자기의 정신을 가졌고,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는 확고한 자유의사를 가졌으며, (…) 당신은 이러한 일체의 것으로부터 제재를 받는 일도 없고 보면, 이 이야기에 대해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깡그리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비방했다고 해서 비난받을 두려움도 없고 칭찬했다고 해서 별로 보상받는 일도 없는 것이다. (21쪽)


그러니 그렇게 하자. 비난받을 두려움도, 보상에 대한 기대도 없이 돈 끼호떼의 이야기에 대해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깡그리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이다. 비난할 거리를 찾으며, 행여 찾지 못한다고 한들 보상을 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이 이 글을 읽는 것, 그것은 당신의 일이다.


우연히 발견한 돈 끼호떼의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하려는 세르반테스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다. 그를 괴롭게 하는, 심지어 “그토록 고매한 기사의 여러 가지 무훈의 공개 그 자체를 그만둬버릴까” 생각하게 만드는 고민은 이렇다. “창의도 없고 문체도 빈약한 데다 사상도 희박하며, 박식도 학식도 결여되어 내가 보는 다른 서적처럼 난외의 인용구도 없고 권말에 주석도 없는” 이야기를 뻔뻔하게 들고 나타난다면 세상의 많은 선생님들이며 박사님들이 대체 뭐라고 할까? 권두에 실을 “공작, 후작, 백작, 사교, 귀부인 혹은 매우 이름난 시인의 소네트”도 없는데? 


그런 세르반테스에게 친구는 말한다. 여보게, 이 사람아, 권두에 실을 거창한 소네트들이라면 자네가 직접 지은 후 적당하고 그럴 듯한 이름들을 붙여주면 될 것 아닌가? 계속해서 그는 괴로워하는 작가는 물론, 오늘도 마감에 시달리고 있을 대한민국의 수많은 원고 저술업자들에게도 여전히 유용한 몇 가지 조언을 들려준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또한 운이 없다면, 그러니까 저술업자의 하나로 빈사 상태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면 다음의 조언에 반드시 귀를 기울이기를. 만약 당신이 전능한 소비자의 권리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행복한 독자라면 자비로운 당신의 신께 감사를 드리되 너무 자만하지는 마시길. 운명의 여신이 언제 변덕을 부려 끝없는 마감의 무간지옥으로 당신의 등을 떠밀지 모르니. 특히 ‘요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더욱 조심할 일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많이 웃고, 좋은 음식을 먹어두시라. 그것들이 당신의 인생에서 예고도 없이 사라지는 날이 오더라도 너무 후회하지는 않을 수 있도록.


* 재지(才智) 넘치는 세르반테스의 친구가 세상 모든 원고 납품업자들에게 전하는 탁월한 충고와 서평자의 잔머리가 괄호 안에 덧붙인 몇 가지 것들


1. 이야기에 삽입할 격언이나 문구를 인용할 때는 기억하고 있거나 혹은 찾는 데 그다지 시간이 안 걸리는 격언이나 라틴어 문구가 꼭 들어맞도록 궁리할 것. (혹은 검색을 통해 이런저런 블로그들에 잘 정리되어 있는 위인들의 명언이나 영어 속담, 인용문을 참고할 것.) 


2. 주석이 필요하다면 주석을 달기 쉬운 단어를 사용할 것. 이를테면 이야기에 골리아스라는 이름의 거인을 등장시켜 ‘거인 골리아스 또는 골리앗. 블레셋 사람으로서 양치는 다윗이 돌로 쳐서 엘라 골짜기에 쓰러뜨렸음. 사무엘 상 제17장의 기록에 의함’이라고 쓸 것.


3. 인문학이나 우주학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뽐내고 싶다면 이야기 속에 따호 강의 이름을 들 것. (이것은 당대 스페인의 문화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으로 보이므로 따호 강은 잊고, 사회와 정치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뽐내기 위해 4대강이나 새빛둥둥섬을 언급할 것.)


4. 책의 마지막에 실을 참고문헌과 저자들의 목록이 필요하다면 A에서 Z까지 최대한 많은 이름을 나열한 책을 찾아 그것을 고스란히 가져올 것. 방대한 목록이 달리 소용은 없다고 해도 책에 생각지 않던 권위를 부여해줄 수 있음을 기억할 것. (그런 책을 찾는 것조차 귀찮다면, ㄱ에서 ㅎ까지 무려 열 쪽에 달하는 방대한 목록을 나열하고 있는, 그럼에도 어떤 권위도 얻지 못한 <서서비행>(금정연 지음, 마티 펴냄)이라는 책을 살펴볼 것 —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네 번째 충고만은 절대 잊지 말 것.)


사려 깊은 친구는 소심한 우리를 위해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설혹 그것이 틀려서 학식을 보란 듯이 코끝에 내걸고 다니는 선생님들이나 엉터리 박사들이, 그 일로 자네를 헐뜯고 덤비거나 왁자하게 떠들어댄다고 하더라도 그야말로 눈썹 하나 꿈쩍할 것 없지 않은가? 아무리 그 인간들이 자네의 엉터리를 캐냈다고 하더라도 설마 그것을 쓴 자네의 손을 잘라버릴 수는 없을 테니 말일세.” (23쪽)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무려 열한 개나 되는 거창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소네트를 서두에 실은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는 돈 끼호떼가 사랑한 기사도 소설의 주인공들이 라 만차의 기사를 위해 보낸 소네트를 비롯, 돈 끼호떼의 사랑 둘씨네아 델 또보소에게 보내는 공주의 소네트와 위대한 기사의 종자가 산초 빤사에게 보내는 소네트, 그리고 ‘잡동사니 시인의 장난꾸러기’가 애마 로시난테에게 보내는 시까지 실어 자신의 책에 엄청난 권위를 부여하지만, 순진한 독자들을 속이기 위한 다른 기술은 거부한다. 돈 끼호떼의 이야기에 그런 잔재주는 필요없다는 친구의 충고 덕분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사도 책에 대한 공격이거든. 그런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꿈에도 생각지 않던 일이고, 성 바실리우스도 언급한 적이 없으며, 키케로조차 몰랐단 말일세. (…) 게다가 자네의 이 저작은 기사도에 관한 서적이 세상이나 속인들 사이에 갖고 있는 권위와 세력을 타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은 없으니까, 굳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철학자들에게는 잠언(箴言)을, 성서로부터는 조언을, 시인들에게는 우화를, 수사학자 제공들에게는 문장을, 성자들에게는 기적을 구걸할 필요는 전혀 없네.” (26쪽)


그리하여 ‘재기 넘치는 시골 귀족 돈 끼호떼 데 라 만차’의 이야기는, 우리가 보는 지금 모습 그대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기사도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 정신이 살짝 돈 시골 귀족의 이야기, 거침없지만 내 종자에게는 따듯한 편력기사의 지금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모험담, ‘우수에 찬 얼굴의 기사’의 슬픈 전설, 낭만주의의 영웅이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패배자의 필요 이상으로 세세한 기록, 그리고 성마르고 홀쭉한 주인과 통통한 종자의 세기적인 브로맨스(bromance)가… 


우리의 이야기 또한 여기에서 시작한다. 갈 길이 머니 신발 끈을 미리 꽉 조여 놓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길을 떠나기 전에 이 자리에 서서 잠깐 쉬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늘 마감과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가련한 서평가가 마침 이쯤에서 제5장을 마치기로 했기 때문이다.















2013. 3. 8. 프레시안북스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308143052&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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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이번 주가 돈 끼호떼 두 번째 원고 마감이라니 

정말 시간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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