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 발을 딛고 일어나 구석에 있는 세면대로 가서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잠시 후 기분이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주 조금일 뿐이었다. 나는 술이 필요했고 거액의 생명 보험이 필요했다. 휴가가 필요했으며 시골에 있는 집이 필요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코트 하나와 모자 하나, 총뿐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레이먼드 챈들러, <안녕, 내 사랑>(박현주 옮김, 북하우스) 347쪽) 


그래도 필립 말로는 운이 좋은 편이다. 나 역시 술이, 거액의 생명 보험이, 휴가가, 시골에 있는 집이 필요하지만 싸구려 코트조차 갖지 못했다. 가진 거라곤 결국에는 지고야 마는 야구팀의 로고가 새겨진 더러운 모자뿐. 만약 총이 있었다면 진즉 방을 나서 그 팀의 숙소를 찾아갔겠지. 아홉 시 뉴스에 얼굴이 나갈 수도 있었을 거다.


나는 두 발을 딛고 일어나 구석에 있는 세면대로 가서 찬물을 얼굴에 끼얹는다.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별 수 없이 냉장고를 연다. 언제나 맥주 하나쯤은 품고 있는 냉장고다. 사실은 몇 개. 그렇다고 7월 8일로 예정된 반상회를 마친 후 이웃들을 초대해 파티를 벌일 정도는 아니다. (반상회의 주제는 계단 청소에 대한 것이고, 며칠씩 밖에 나가 들어오지 않거나 집에 틀어박혀 나가지 않는 나로서는 할 말이 없는 주제다. 이게 바로 내게 시골에 있는 집이 필요한 이유다.)


잔을 들어 맥주를 따른다. 지난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선물 받은, 다소 신경질적인 얼굴의 알베르 카뮈가 그려진 유리잔이다. 노랗게 질린 채 땀을 흘리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생각이라고? 거짓말이다. 한 잔 술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 있을 리 없다. 나는 마시고 또 마시며, 카뮈의 입장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다시 마실 뿐이다. 잔을 깨끗히 비운 후에야 비로소 생각한다. 냉장고에 가야겠다는, 딱 그 정도의 생각. 


그래서 다시, 한 잔의 술이다. 불필요한 말이다. 우리 앞에 놓이는 것은 언제나 한 잔의 술인 것이다. 당신과 나와 그와 그녀가 모두 어제도, 내일도 아닌 바로 오늘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은 채 시작하기도 전에 가뭇없이 사라지겠지만, 어느새 또 다른 오늘로 채워질 테고, 우리 또한 다시금 잔을 채운다. 우리 앞의 한 잔을. 그러니 건배! 어쩌면 당신은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당신을 위한 어느 잘생긴 <아저씨>의 충고. “내일을 사는 놈은, 오늘을 사는 놈한테 죽는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겐 힘이 없고, 당분간 총을 가질 생각도 없으니까.


대신 나는 다른 아저씨를 떠올린다. 지갑을 잃어버린 아저씨, 말보로만 피우는 아저씨, 죽으려 했지만 죽지 못한 아저씨, 끈질기게 들이댄 끝에 선배 형의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던 아저씨를. “우리 정말 죽어버릴래요. 죽을 마음만 있으면, 반년쯤만 살다 죽을래요. 그럼 정말 사랑할 수 있을 거 같은데”같은 말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아저씨이고, 여관방을 먼저 나서려는 그녀에게 지갑이라도 놓고 가라고 말하는 아저씨이며, 선배가 입원한 병원 앞에서 다시 만난 그녀에게 다시 추근대다 “자긴 이제 재미 봤죠, 그럼 이제 그만, 뚝!”이라고 혼나는 아저씨다. 영화 <극장전>의 동수 이야기다.


영화가 끝날 무렵, 동수는 선배의 병실을 찾는다. 이제 막 죽을 고비를 넘긴 선배는, 그러나 앞으로도 몇 번의 고비를 넘겨야 하는 선배는, 그 중 어디에선가는 끝내 주저앉고 말 선배는 말한다. 아프다고, 아파서 죽을 거 같다고, 그런데 죽고 싶지 않다고, 정말로 죽고 싶지가 않다고. 내내 선배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던 동수는 끝내 무너진다. 눈물을 흘린다. 흘리며 말한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내가 미안하다고, 형은 죽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병실을 나온 동수는 어느새 마른 눈으로 담배 한 대를 입에 문다. 한낮의 거리를 걷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제 생각을 해야겠다. 정말로 생각이 중요한 거 같아. 끝까지 생각하면 뭐든지 고칠 수 있어. 담배도 끊을 수 있어. 생각을 더 해야 돼.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 살 수 있도록.”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을 훔치며, 나 역시 이제 생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무슨 생각?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 죽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지금까지 나는 너무 많은 담배를 피워왔고, 그건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이 아니었다. 나는 조금 우쭐한 기분이 든다. 왜 아니겠는가. 나도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게 이제야 밝혀졌는데. 시대의 요구를 거스르지 않는 인간이,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을 수도 있는 인간이, 자기를 계발함과 동시에 국민건강을 증진시키는 인간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생각한다. 정말로 생각이 중요한 거 같다는 생각을, 끝까지 생각하면 뭐든지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을, 담배도 끊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언젠가 <시크릿>이나 <꿈꾸는 다락방>같은 책에서 읽었던 것과 비슷한 생각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나는 담배를 사랑한다. 도무지 끊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단 말이다. 그러자 문득 술부터 끊어야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언젠가 또 다른 아저씨, 유럽에 사는 빅토르 씨가 그랬던 것처럼.


“의사가 약을 처방해주면서, 내가 담배를 계속 피우고 운동을 안 하면 아무 효과도 없을 거라고 하더군. 그런데 나는 담배를 끊을 생각은 조금도 없어. 게다가 나는 그럴 의지력도 없고. 알콜 중독자에게 의지력으로 술을 끊어보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처방이야. 그러니 내가 담배를 끊으려고 한다면, 나는 우선 술부터 끊어야 할 거야.


담배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또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어. 담배를 피우면서도, 나는 담배를 끊지 않으면 혈액순환이 완전히 멈추고 다리가 썩어서 발이나 어쩌면 다리 전체를 절단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지.”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중) 타인의 증거>(용경식 옮김, 까치 펴냄) 131쪽)


이건 분명 멍청한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생각은 생각이다. 그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그를 이끈다. (전적으로 어느 자기계발서 저자가 한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의미로서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기치로, 국가의 안녕과 그 자신의 구원에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그를 데려가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심오한 진리를 깨닫기도 한다.


“난 이제 쉰살밖에 안 됐어. 내가 담배와 술을, 그래, 술과 담배를 끊는다면, 난 책 한 권쯤 쓸 수 있을 거야. 여러 권도 쓸 수 있겠지만 어쩌면 단 한 권이 될 거야. 난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나.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같은 책, 133쪽)


아, 가련한 빅토르 씨! 마침내 그는 깨달았지만, 깨달음이 너무 늦었다. 가게를 정리하고 누나가 살고 있는 시골집으로 이사한 그다. 생활에 치어 다락 한 구석에 치워두었던 꿈, 한 권의 책을 쓰고야 말겠다는 가련한 꿈을 위해서. 하지만 그는 결국 술을 끊지 못했다. 담배를 끊지도, 동생이 위대한 작가가 되기만을 기다리던 누나를 만족시키지도 못했다. 생각이 모자랐던 탓이다. 그래서 그는 누나를 죽인다. 그에게 “넌 안색이 너무 나빠. 눈가에 달무리가 졌어. 얼굴은 창백하고 배가 너무 나왔어.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구나. 운동을 해야지. 밖에도 좀 나돌아다니고, 좀 건전하게 살아봐”라며 충고를 아끼지 않던 누나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주옥같은 자기계발서들에 비하면 충고라고 할 수도 없는 미미한 충고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나를 죽이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에게 단 한 권의 자기계발가 있었더라면! 왜 누구도 진작 그에게 <시크릿>이나 <꿈꾸는 다락방>과 같은 자기계발서를 권하지 않았던가? 유럽이란 곳은 그토록 정이 없고 그토록 따뜻함이 없으며 서로를 돌볼 줄 모르는 비인간적인 곳이었던가? 백번 양보해서 그런 책이 미처 번역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나라의 출판계에는, 아니 문화에는 ‘힐링’이나 ‘위로’, ‘공감’ 같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어쩌면,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그의 나이 탓일 지도 모르겠다고. 망망대해의 나침반처럼 언제나 우리 삶의 지침이 되어주는 저 자기계발서들을 보라. <20대 공부에 미쳐라>라고 했다. <30대 다시 공부에 미쳐라>라고, <40대 공부 다시 시작하라>라고도 했다. 어디에도 50대의 공부를 위한 조언은 없는 것이다.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제목의 책도 있지만, 이건 대입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이나 취업을 대비하는 취업준비생들에게나 하는 말이다(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지만, 공부와 죽음의 상관관계를 따져본다면 분명해질 문제이며, 이 사회의 ‘어른’들이 얼마나 공부하고 계신지는 또 다른 문제다). 헝가리 출신의 구루 루카치의 말처럼 “밤하늘의 별을 보고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반면 빅토르 씨처럼 자신을 인도할 별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결국 빅토르 씨의 문제는 비단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일 당장 50대의 공부를 위한 자기계발서가 나오지 않는 한 우리 사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우리 출판계의 문제, 나아가 우리 사회의 문제다.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란 말이다.


아니, 아니다. 아무래도 말이 헛나온 것 같다. 어쩌면 이런 일은 벌써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록 포탈의 헤드라인에서는 본 적 없지만. 아무려나, 내게는 이런 거창한 시시비비를 따질 자격도 여유도 없다. 나는 내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기고하지 않을 때만 자유로운 자유기고가이고,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명제를 스스로 증명하는 팀의 팬이다. 그러니 그저 이렇게 말해야겠다. 이것이 잘못이라면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아니, 이것도 아니다. ‘우리’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결국 모두 내 탓이고, 내 잘못이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술잔을 비운다.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래봤자 죄책감은 덜어지지 않는다. 반사회적 행위를 하고 있는 부담만 더해질 뿐. 나는 궁금하다. 왜 자기계발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내려주지 않는 건가?


그렇지만 이건 너무 괴로운 생각이다. 인간은 이렇게 끔찍한 생각을 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관적인 인간들과는 거리가 멀단 말이다. 비록 지금 내 앞의 술잔엔 술이 반밖에 남아있지 않다고는 해도.


그래서 나는 책을 집는다. 무릇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생각해야 하고, 남자라면 스물일곱 이건희처럼 생각해야한다. 그들은 다른 훌륭한 인물들이 그렇듯 수많은 책을 읽었다. 읽었다고 한다. 나는 여자도, 그렇다고 스물일곱도 아니지만 성공하고 싶다. 적어도 실패하고 싶진 않다. 솔직히 말해 세상에 실패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니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리딩reading하면 리드lead한다. 라임rhyme이 맞는 말이 대개 그런 것처럼, 이것 또한 객관적인 팩트다. 요즘 유행하는 모든 자기계발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고, 부족한 부분은 자기계발서로 보충한 사람이다. 그러니 당신이 무슨 멘토라도 되지 않는 한, 내 말에 귀를 기울일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


그래서 책이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책을 집는다. 지푸라기라도 집는 심정으로 눈앞에 보이는 아무 책이나 들어 마구 페이지를 넘긴다. 자기계발서가 아니라도 좋다. 당뇨병 환자에게 때론 사탕이 약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는 찾았다. 바로 이런 구절이다.


술병을 들고 침실로 갔다. 옷을 벗고 팬티만 입고서 침대에 들었다. 뭐 하나 맞아떨어지는 게 없었다. 사람들은 뭐가 되었듯 맹목적으로 눈앞에 있는 걸 움켜쥐려 한다. 공산주의, 건강식품, 선(禪) 사상, 서핑, 발레, 최면술, 집단 상담, 난교, 자전거 하이킹, 허브, 가톨릭주의, 역도, 여행, 금단 현상, 채식주의, 인도, 회화, 글쓰기, 조각, 작곡, 지휘, 배낭여행, 요가, 성교, 도박, 음주, 어울려 다니기, 프로즌 요구루트, 베토벤, 바흐, 부처, 예수, 초월적 명상, 습관성 약물 투약, 당근 주스, 자살, 수제 양복, 제트기 여행, 뉴욕. 그러다 이 모든 게 증발하고 떨어져 나간다. 사람들은 죽기를 기다리는 동안 할 일을 찾으려 한다. 그나마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다. 


나는 선택을 했다. 보드카 병을 들어 쭉 마셨다. 러시아인들은 뭘 좀 아는 사람들이다. (찰스 부코스키, <여자들>(박현주 옮김, 열린책들 펴냄) 252쪽)


그래서 나 역시 선택을 했다. 맥주잔을 들어 쭉 마셨다. 부코스키는 뭘 좀 아는 사람이다. 나는 몇 병째의 맥주를 땄고, 책장에 꽂힌 부코스키의 다른 책을 찾았다(이거야말로 바람직한 독서법이라고 나는 배웠다). <팩토텀>(석기용 옮김, 문학동네 펴냄)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그리고 나를 위로할 또 다른 구절을 찾았다. 나의 죄책감을 깨끗하게 씻어주고, 성공을 향한 새벽 세시의 자유로로 나를 인도할 그런 구절을.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돈을 모을 수 있으리라. 나도 좋은 사업 구상을 떠올리고, 그걸로 사업 자금을 뽑아낼 수 있으리라. 나도 사람을 쓰고 내쫓을 수 있으리라. 나도 책상 서랍에 위스키를 보관해둘 수 있으리라. 나도 사십 인치짜리 가슴과 엉덩이를 가진, 씰룩대는 그 모습만 봐도 골목길의 신문팔이 소년이 바지 안에 싸게 만들 수 있을 만큼 풍만한 마누라를 얻을 수 있으리라. 나는 그녀 몰래 바람을 피울 수도 있고 그녀는 알면서도 내 집에서 부유함을 누리며 살고 싶기에 모른 척하고 있으리라. 나는 내칠 만한 이유가 없는 여자들을 내칠 수도 있으리라.


 남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게 전부다. 희망. 사람을 낙담시키는 것은 바로 희망의 결핍이다. 나는 뉴올리언스 시절을 기억했다. 그 무렵 글을 쓸 수 있는 여유를 얻기 위해 일주일 내내 하루에 오 센트짜리 막대사탕 두 개만 빨며 지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굶주림은 예술을 돕지 않았다. 그저 방해할 뿐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위장(威腸)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찌 됐든 인간은 동전 한 푼짜리 막대사탕보다는 고급 비프스테이크를 먹고 0.5리터들이 위스키를 마신 다음에야 훨씬 더 글을 잘 쓸 수 있다. 궁핍한 예술가라는 신화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모든 것이 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에야 사람은 더 현명해지고 동료 인간의 피를 짜내고 그를 태워 없애기 시작한다. 힘없는 남자들, 여자들, 어린이들의 부서진 육신과 삶 위에 나의 제국을 세울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내내 그들 앞에서 나의 제국을 으스댈 수 있으리라. 이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91쪽)


비록 내겐 0.5리터들이 위스키가 없지만 0.5리터들이 맥주가 있다. (꿀꺽꿀꺽) 무엇보다 내겐 희망이 있다. 책이라는 이름의 희망이! 그러니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돈을 모을 수 있고, 좋은 사업 구상을 떠올리고, 그걸로 사업 자금을 뽑아낼 수 있으며, 사람들 앞에서 나의 제국을 으스댈 수 있으리라! (꿀꺽꿀꺽) 하지만 너무 으스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앉은 채로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심장이 뛰었다. 다소간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짐짓 겸손한 태도로 잔을 든다. 허공을 향해 건배를 한다. 다음 잔을 위해서, 저 어디에선가 기다리고 있을 나의 미래를 위해서. (꿀꺽꿀꺽꿀꺽)


그런데 문제가 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너무 많은 술을 마신 것 같다. 이미 마감일의 아침이 밝았고, 나는 자유롭지 않은 자유기고가의 운명을 다시금 상기한다. 나는 아프고 곤경에 처했다. 굳이 책을 펼쳐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머리는 더더욱 아파지기만 했다. 만약 내게 총이 있다면 차라리 머리를 쏘아버리고 싶은 정도의 두통이다. 어느덧 더러워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카뮈도 말한 바 있지 않던가.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고. 


아니, 아니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내게 필요한 것은 생각이다.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긋지긋한 카뮈의 얼굴을 감싸 보이지 않게 만든 후, 이미 식어버린 맥주를 들이킨다. 그리고 생각한다.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비록 지금은 아플지 몰라도,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설령 괜찮아지지 않더라도 상관없다고. 나는 아프고,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잠시 후 기분이 좀 나아진 나는 다시금 생각한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약간의 희망과 더러운 모자, 몇 권의 자기계발서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나 역시 운이 좋은 편이라고. 잠을 못자 어지러울 오후가 되면 나는 그것들을 걸치고 항상 지기만 하는 나의 LG 트윈스를 응원하기 위해 방을 나설 것이다. 



- 비꼬는 남자는 멋이 없어, 커티스 

(이상우, ‘비치’, <계간 문학동네 71호> 407쪽)






지난 프레시안북스 원고. 
이런 글을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마 어느 자기계발서 저자의 인터뷰를 보고 받은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 그렇다면 이 쓸데없이 긴(분량을 채워야 했으니 쓸데는 있었다) 농담은 왜 실패했을까. 
충분히 비아냥거리지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결국 최종심급의 문제인 거 같다.

뭐랄까 그건 아마 내가 LG팬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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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7-01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결국 희망은 책인데... 마침내 7월이 왔네요. 저도 목 빠져라 기다리는 책이 한 권 있어서요^^

poptrash 2012-07-02 04:38   좋아요 0 | URL
그 책이 제가 아는 그 책이라면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ㅜ_ㅜ 근데 저는 희망이 책이라는 말을 할 자격은 없는 거 같아요... 이렇게 꼬인 글이나 쓰고 있는 걸 보아서는요.
 

나는 사회학에 관심이 없다. 우연하게도 중고등학교 시절의 절반 이상을 사회과 과목을 담당한 담임 밑에서 보낸 탓에 생긴 일종의 편견인 셈이다. 하지만 매일같이 매를 맞고 기합을 받고 반성문을 쓰고 화장실 청소를 해본 사람은 안다. 자신에게 그런 벌을 준 인물이 가르치는 과목을 좋아하기란 정말이지 어렵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어려운 일에는 관심이 없다. 교육사회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이런 태도를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겠지. 멋진 일이다. 그렇다고 굳이 내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성학과 관련된 사회학과 전공수업을 몇 차례 수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여성'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학'이야 아무래도 좋았단 말이다. 당시의 성적표가 그 증거다. 물론 나는 성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성적인 것이라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아무런 회한도 없이 말하지만, 그건 여전히 마찬가지다. 나도 제법 고집스럽게 한 길을 걸어온 셈이다. 


내친김에 하나 더. 나는 자서전이란 형식 또한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엔 해묵은 오해가 있다.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다. 소년소녀 세계명작의 세계 속에서 더없이 평온한 날들을 만끽하던 내게 한 권의 책이 찾아온다. 포마드를 바른 머리에 네모난 턱을 가진 청년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책이다. 등교 준비를 하며 훔쳐보던 아침방송에서 종종 보게 될 얼굴.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세대의 사람이다. 그렇다. 그 책은 다름 아닌 <7막 7장>이었다. 나 역시 그 책을 읽었고, 독후감을 썼고, 아름다웠던 유년시절에 작별을 고했다. 말 그대로, 세대적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은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모든 자서전을 미워할 필요는 없다고. 고작 '진로 포도주'를 마신 후 모든 와인에 편견을 갖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라고. 당신 말이 맞다. 하지만 나의 고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 책을, 젊은 유학생의 허세 가득한 자서전 아닌 자서전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다. 그것도 몇 번씩이나. 심지어 "과거의 얘기가 아니라 내일을 여는 책이기 때문"에 마침표를 쓰지 않는다던 패기에 압도당해 그처럼 살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아마 나는 세상의 모든 책은 항상 옳다고 믿었던 것 같다. 순진한, 때론 치명적인 착각.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보다시피 이 글에는 마침표가 있고, 내겐 내일을 열 생각이 없다. 국어 수업과 유학 따윈 꿈꿀 수 없는 가계와 도리 없이 먹어버린 나이가 나를 구한 셈이다. 그럼에도 부끄러운 과거다. 지울 수 없는 과오다. 당신이 지금 이 페이지를 닫는다고 해도 내게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방법은 하나, 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문인들의 자서전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자서전을 멀리할 것. 내겐 누군가가 뻔뻔하게 늘어놓는 자화자찬과 과도한 의미 부여에 대항할 수 있는 내성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리하여 3년이 넘는 시간을 인터넷 서점의 인문사회 MD로 일하는 동안, 나는 담당 분야였던 정치인의 자서전, 그러니까 <함박웃음> 같은 책들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놀랄 일은 아니다. 읽지 않은 책이 꼭 그것만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건 또 다른 문제다. 다만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만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살면서 나는 그보다 실용적인 책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느 사회학자의 지적 자서전에 대한 서평을 쓰고 있다. 세상에, 나는 생각한다, 이보다 '어쩌다'란 단어가 어울리는 일이 또 있을까? 


*


물론 세상은 넓고, 그런 일이 매양 일어난다고는 할 순 없겠지만, 그리 드물지도 않은 모양이다. 이를테면 피터 버거의 경우. 60년이 넘는 자신의 학문적 경력에 대해 아무런 회한도 없이 "나의 지적 이력은 착각에서 시작됐다"고 고백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 남자가 뉴욕에 있는 한 유대 식당에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웨이터가 중국인인데, 우아한 리투아니아 이디시어로 말하더란다. 남자가 식당을 나가다 식당 주인이 보이자 말했다.

"여기 중국인 웨이터가 있던데요?"

"예, 일 년 전에 상하이에서 왔답니다."

"그런데 이디시어가 완벽하더군요."

그러자 주인이 말했다. "쉿, 그 사람은 자기가 영어를 배우고 있는 줄 알아요." 

나도 내가 미국 사회학을 배우는 줄 알았다.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14쪽)


부모와 함께 미국에 온 열여덟의 피터 버거는 목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미국 사회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싶었다. 그는 신학 공부를 뒤로 미루는 대신,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기로 한다. 미국에서 배우는 언어라면 당연히 영어일 거라고 생각한 중국인처럼, 미국에서 배우는 사회학이란 당연히 미국 사회에 대한 학문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주팔자를 공부하기 위해 철학과를 선택하는 일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착각이었다.


그가 택한 곳은 뉴욕의 사회 조사 뉴스쿨. 사회학이 뭔지도 몰랐던 그가 심사숙고해서 결정을 내렸을 리 없다. 그는 가난했고, 학비를 벌어야 했다. 다시 말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대학원 과정을 마칠 수 있는 곳이 그곳밖에 없었던 것이다. 뉴스쿨이 당시 미국 사회과학계에서 얼마나 변방이었는지는 그가 알 바 아니었다. 그는 첫 강의로 '사회학자 발자크'라는 이름의 강의를 들었고, 우연히 만난 발자크는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에게 사회학자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분명하게 각인시킨 것이다. 


그러한 시각, 발자크가 갖고 있었다고 잘로몬이 말한(맞건 그르건 간에) 그 시각은 인간이 하는 온갖 짓들에 대한, 특히 상류 사회에서 감추고 부정하는 행위들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이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경스럽고 폭로적이고 전복적인 시각이었다. 발자크가 진정 잘로몬이 말했던 그런 사람, 그러니까, 도시의 비밀을 캐려고 되도록 밤에 파리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살롱과 관청과 상점과 선술집과 매음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해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내 마음속에 새겨진 사회학자의 상이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거기에 실렸던 내 젊의 혈기는 누그러졌어도 그 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15쪽)


그는 뉴스쿨에서의 배움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사회학이 학대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신화들의 정체를 폭로함으로써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믿음과 "사회학은 '인문학'(혹은 정신과학)의 하나로 역사와 철학과 가까울 뿐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이 갖는 직관적 통찰과도 밀접하다는" 시각이 그것. 이것은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져온 그의 사회학적 탐구의 고갱이가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담임은 물론 사회학과 교수들을 통해 내가 접했던 사회학과는 사뭇 다른 지점이다. 실제로 버거는 '그들의 사회학'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최근 수십 년간 사회학은 두 가지 병을 앓고 있다. 정량적 방법에 적합한 현상이 아니면 연구하려 들지도 않는 지경에 이른 맹목적인 방법론 숭배와 늘 똑같은 주문만 되뇌고 있는(가끔은 풍부한 어휘를 구사해가면서) 이데올로기적 선전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질병 탓에 사회과학이 갈수록 따분해지고 있다. 정량적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유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베이 리서치에 들어가는 비싼 비용을 기꺼이 대주는 이들의 이해관계 탓에 정교한 방법으로 사소한 문제를 연구하는 일들이 갈수록 흔해지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슬로건 문제에 이르면, 30년 전에는 흥미가 있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하품만 나오는 실정이다. (9쪽)


이런 피터 버거의 일침은 사회학에 대해 갖고 있던 나의 편견을 정당화시켜주는 동시에(사회학의 대가가 보기에도 이제는 하품만 나오는 실정이라지 않는가!), 사회학에 대한 나의 편견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이런 사회학도 있다, 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의 사회학적 모험담을 들려주며 그는 종종 녹록하지만은 않은 사회학 이론을 동원하지만, 그런 개념들은 사회학에 무지한 독자를 주눅 들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지난 책들과 그가 인용하고 있는 학자들의 책을 보관함에 담도록 부추길 뿐이다. 그건 전적으로 그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과 유머러스한 문체 탓이다. 그는 가르치려 들지도,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독자를 유혹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자신을 평생 동안 사로잡았던 "변덕스러운 인간 세상에 대한, 또 그걸 이해하려는 노력에 대한 끊임없는 매혹"을, 그 열정을 고스란히 보여줄 뿐이다. 과연 '사회학자 발자크'라는 수업으로 사회학에 첫 발을 내딛은 학자답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 이어지는 책의 내용을 길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이미 솜씨 좋게 간추린 개인의 지적 여정이고, 그가 살아온 시대에 대한 간략한 사회학적 분석이며,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지식사회학적 요약이다. 더 이상 요약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내겐 그의 사회학적 작업에 대해 무어라 평가할만한 지식이 없고, 내가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늘어놓는 일에도 별 관심이 없다. 그저 그런 문외한이 읽기에도 무척이나 흥미로웠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뿐.


다만 그의 책을 읽으며 대부분의 자서전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모종의 편견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그는 "허심탄회하고, 자기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고, 그리고 스타일과 위트가 지성을 고양해준다고 생각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건 물론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를 통해 피터 버거 자신이 몸소 실천하고 있는 태도이고, 철만 되면 쏟아지는 국내 유명 인사들의 자서전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태도다. 그들의 책에는 마침표만 없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것은 또한 내게 어떤 자서전을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입장을 제시해주었다. 말하자면 자서전에 대한 내성을 만들어주었다고 할까. 더 이상 번드르르한 '자뻑'에 속아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서전이라는 형식 자체를 기피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고마운 일이다. 


그가 한 사람의 학자로서 내내 견지하고 있는 태도 또한 나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했다. 한 분야의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분야는 물론, 그 밖의 다양한 사회문제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인 시각을 가장한 채 편향된 의견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경각심이다. 피터 버거는 객관성이란 가면이 얼마나 기만적인지 폭로한다.


객관성이란 사회과학자가 세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 지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전 존재를 말하는 게 아니다. 베버의 용어로 말하자면, 과학이라면 모름지기 '가치 중립적'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가치 중립적' 과학자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도덕적으로는 괴물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중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유용하다. 사회과학자는 두 개의 모자를 쓴다. 그는 특정 분석 규준을 충실히 지켜야 하는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도덕적인 고려를 해야만 하는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 두 모자는 상당히 다르다. 특정 진술을 할 때는 어떤 모자를 쓰고 했는지 분명히 밝혀서 정직하게 알려줘야 한다. (281쪽)


'이중 시민권'이란 "객관적인 관찰자와 사회 구성원의 입장에서 도덕적인 참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균형점이다. 그는 광신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회학자의 '이중 시민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그것이 비단 사회학자에게만 필요한 모자는 아닐 것이다. 스스럼없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보수주의라고 단언하고, 종종 진보주의자들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프레시안북스 95호에 실린 노명우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꼴통'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의 토론에서부터 주변 친구들과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흔히 자신의 의견이 객관적이고 그렇기에 옳다는 주장들을 만나곤 한다. 피터 버거에 따르면, 좌우를 막론하고, 그런 인간들이야말로 꼴통이다. 무엇보다 그런 말은 지루하다. 사심을 담아 말하자면, 객관적인 입장을 가장한 서평 또한 지루하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는 지루한 것엔 관심이 없다.


이쯤에서 책의 부제를 상기하며 마무리해야겠다.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의 부제를 피터 버거는 [How to explain the world without becoming a bore]라고 썼다. 직역하면 '지루하지 않게 세상을 설명하는 법' 정도 될까. 내 감상을 말하자면, 피터 버거는 성공했다. 나 또한 성공했다. 어쩌다 집게 된 책을 무척이나 즐겁게 읽었고 사회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몇 개의 편견 또한 깨트렸으니. 물론 이 서평의 성공 여부는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http://bkworlds.tistory.com/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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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6-27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도 출력해서 읽고 싶은 걸요.
팝님글 오랜만에 읽으니 차암 좋아요 ㅎㅎ

poptrash 2012-06-28 14:46   좋아요 0 | URL
말없는수다쟁이 님, 잘 지내셨죠? 너무 더워서 정신을 쏙 빼놓고 살다 보니 서재에도 소흘하게 되네요. 우리 같이 종이를 아끼고 환경을 보호해서 지구 온난화를 막아요 ㅎㅎ

Jeanne_Hebuterne 2012-06-27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고 싶었던 날. 그 모든 고리가 정직하게 연결되기를 바랐던 날.
이 책은 참 정직한 책일 듯 합니다.

poptrash 2012-06-28 14:48   좋아요 0 | URL
"허심탄회하고, 자기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고, 그리고 스타일과 위트가 지성을 고양해준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책이지요. ㅎㅎ

비로그인 2012-06-28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의 내용과 상관없이 어쩌다, 란 말을 십여 차례 되뇌고 가네요. 잘 읽었습니다. 어쩌다 쓴 서평이 이 정도라면...(뒷말은 생략ㅎㅎ)

poptrash 2012-06-28 14:49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로쟈 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어쩌다 서평을 쓰게 되었는데, 그게 이렇게 오래 갈 줄은... (뒷말은 생략ㅎㅎ) 사실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어쩌다 태어나 어쩌다 이런 각자의 일들을 하며 사는 거겠죠? 하필이면. ㅎㅎ

노이에자이트 2012-06-28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트 밀즈도 계량적인 사회과학에 대한 회의감을 토로한 적이 있죠.피터 버거도 그랬나봐요.

poptrash 2012-06-29 00:38   좋아요 0 | URL
네, 그러고 보면 <괴짜사회학>의 저자 또한 그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인데 정확하진 않네요. 아무래도 학계 내에서는 다양한 목소리가 있는 모양이에요. 잘은 모르지만요.

수양 2012-06-29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때 7막7장 정말이지 티없이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경탄하며(!) 읽었는데 팝님도 그러셨군요 이거 참 반가운 걸요 (패기 넘치게 마침표 생략)

poptrash 2012-06-29 00:40   좋아요 0 | URL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기억은 있게 마련이니까요 ㅋ 패기가 없는 저는 그냥...... (마침표 남발)

수아람 2014-06-20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見利思義見危授命은 論語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입니다만 이시대가 음미해야 할
사회적 과제라고 봅니다. 글객들께서는 이 사회를 어떻게 수다하시나요?
 

언젠가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오, 인간이여! 그대의 존재를 그대 안에 가두면 그대는 더 이상 비참해지지 않으리라. 자연이 존재의 사슬 속에서 그대에게 할당한 곳에 머물라.”1  그럴듯한 말이다. 그 자신, 거대한 에고를 끝내 가둘 수 없어 끊임없는 비참에 시달려야 했던 인물이 하는 말씀이라면 더더욱.

그로부터 2세기 후, 블랑쇼는 이렇게 쓴다. “장-자크 루소가 생전에 자신이 그렇게 믿었던 만큼 박해받았는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 그에 대한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며, 적의로 가득 찬 정념을 초래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술 더 떠서 겉으로 보기에 이성적인 사람들까지도 그를 미워하고, 그의 모습을 왜곡시키기 위해 기를 쓰며 비난을 퍼붓고 있다.”2  이를테면 이런 비난들.

“루소는 비록 개인적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허영심이 강하고 성미가 급하고 또 다투기를 잘했으나, 온 인류에 대한 감상적 사랑을 품고 있었다.” (스털링 P. 램프레히트)3

“그는 이성을 불신했던 까닭에 한 번도 진실되고 신뢰할 만한 감정과 헛되고 공상적이고 혹은 악의에 찬 감정을 구별하는 기준을 시사조차 할 수 없었다.” (역시, 스털링 P. 램프레히트)4 

“그가 일상의 덕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는 증거는 매우 많다. 그렇지만 그는 기본적인 행동에 전혀 방해를 주지 않는, 가장 친한 친구들을 향한 따뜻한 가슴이 있다고 언제나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리곤 했다.” (버틀런드 러셀)5 

“늘 엄마를 찾은 마조히스트.” (다니엘 부어스틴)6 

“그는 모든 친구를 적으로 만들었고, 만년에는 거의 미쳐 있었다. 온갖 종류의 별스러운 질병에 시달렸으며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형태의 신경증을 앓았다.” (J. 크리스토퍼 헤럴드)7 

루소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그의 시대에도 그를 향한 비난은 결코 부족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 몇 가지 증거가 있다.

“그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내 곁에는 저주받은 영혼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다시 보고 싶지 않다. 그는 나로 하여금 악마와 지옥이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드니 디드로)8 

“내 생각에 그는 최악의 인간이야. 서너 나라가 그를 추방했지. 이 나라가 그를 보호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야.” (‘닥터’ 새뮤얼 존슨)9 

“민회를 지지하는 정신 이상의 소크라테스.” (에드먼드 버크)10 

“그는 허영으로 가득한 자만심 이외에는 자기 가슴에 영향을 미치거나 자신의 오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원칙도 환대하지 않았다.” (다시, 에드먼드 버크)11 

“그는 일생 동안 오로지 느낌에만 충실했다. 이 점에 관한 한 이전의 어떤 사례도 능가할 정도로 고양되어 있다. 그런데 그의 감수성은 그에게 쾌락보다는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 그는 자신의 옷뿐만 아니라 피부까지도 벗어버린 채, 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우에 맞서 싸우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 같다”12라는 데이비드 흄의 평가는 러셀의 말대로 공정하며 또한 ‘가장 친절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흄이 세상을 떠난 후(동시에 루소가 세상을 뜨기 바로 직전) 애덤 스미스에 의해 출간된 흄의 자전적 에세이를 루소가 좋아했을 것 같지는 않다. 10여 쪽에 불과한 짧은 글을 흄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허영심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짧게 말하려고 한다.”13  (물론 여기서 ‘자신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이 다름 아닌 루소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심지어 그의 성격은 다른 이의 덕성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기도 했다. 마치 칸트의 산책이 동네 주민들의 시계가 되었던 것처럼.

“흄은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일례로 그는 성격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철학자 루소에게 최선을 다해 호의를 베풀었다.” (앤서니 케니)14 

자, 상황이 이러하니 이제 막 외국에서 돌아와 세상물정 모르던 ‘루소’ 씨가 ‘프랑스인’의 입을 통해 ‘장 자크’의 추잡한 이면을 듣게 되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우리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루소 : 나는 방금 너무나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놀라워요, 정말 놀라워요. 그럴 수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사람인지! 그자는 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어요! 나는 그를 미워할 겁니다!15 

루소의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 대화>는 바로 이렇게 시작한다. 

*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 대화>(이하 <대화>로 표기)는 루소의 말년에 쓰인 ‘자서전 삼부작’의 한 권으로, <고백>과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의 사이에 놓인 작품이다. 일반적인 회상록 형식으로 쓰인 <고백>이나 내적 일기 형식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과는 달리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순진한 독자 ‘루소’ 씨와 소문에 빠른 ‘프랑스인’이 악명 높은 작가 ‘장 자크(이하 J.J.로 표기)’의 추악한 진실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다. 물론 그들을 연기하는 것은 장-자크 루소 자신이다. 일종의 일인극인 셈이다. 회상과 일기로도 모자라 대화 형식까지 동원하다니. 과연 흄의 말마따나 그는 허영심 가득한 인간이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의문은 남는다. 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굳이 대화라는 형식을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이.

1712년 주네브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다. 어머니는 그를 낳던 도중 사망했고, 가출한 형은 평생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의 아버지 역시 그를 떠났다. 그의 나이 열 살 때의 일이었다.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목사에게 맡겨진 루소는 목사의 여동생에게 체벌을 당하며 성적쾌감을 맛보았고, 마조히즘적인 쾌감을 향한 욕망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이후 목사관을 나온 그는 시계 조각공의 도제를 거쳐, 한 귀부인의 집사이자 조수, 양자이자 정부라는 임상수 감독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역할을 수행하는가 하면, 악보도 읽을 줄 모르면서 어린 소녀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을 맡기도 한다. 예루살렘에서 온 가짜 수도원장과 함께 헌금을 위한 설교를 하는 한편, 함께 여행을 하던 친구가 간질 발작을 일으키자 친구는 내버려둔 채 사람들이 던져준 동전을 열심히 챙긴 것도 그였다. 

새로운 악보표기법을 만들어 돈을 벌 계획을 세우기도 했던 루소는 다양한 일거리를 전전하는 틈틈이 기상천외한 연애사건에 휘말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매력과 재능을 바탕으로, 간단히 말해 어느 귀부인의 도움으로, 베네치아 주재 프랑스 대사의 개인비서 자리를 꿰차기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평생직장은 아니었는데, 임금 문제로 대사와 한바탕 다툰 후 때려치운 것이다. 

이룬 것도 없이 나이만 먹은 30대의 루소는 파리로 돌아와 평생의 동반자를 만난다. 테레즈 르바쇠르라는 이름의 하녀였다. 러셀에 따르면 “흉한 외모를 가진 데다 무식하기까지 했”던 그녀의 어떤 점에 루소가 매력을 느꼈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러셀 또한 “재정적인 면에서나 지적인 면에서 그녀보다 우월하다는 확신과 그녀가 자신에게 완전히 의존한다는 느낌을 즐겼을”16  것이라는 다소 피상적인 추측을 제시할 뿐이다. 물론 루소에겐 그녀를 위해 다른 여자들과의 애정 관계를 청산할 마음이 없었고, 행동 또한 그러했다는 ‘팩트’를 지적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반면 해럴드는 좀 더 심층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그는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열렬히 사랑하는 여성에 대해서만 성적 불능이었으며, 당연히 테레즈는 그런 여성이 아니었다”17는 사실에 주목한다. 앞서 그는 목사관의 생활을 통해 함양된 루소의 성적취향을 언급하며 “수줍어하는 성격 때문에 자신이 품었던 가장 큰 욕망(사도마조히즘 플레이)을 여성에게 요구할 수는 없었다”고 덧붙였는데, 결국 테레즈 앞에서는 루소가 수줍음을 느끼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돌려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분석이 옳다면 러셀의 말과는 반대로 재정적인 면에서나 지적인 면에서 그녀보다 우월한 루소 자신이 그녀에게 완전히 지배당한다는 느낌을 즐긴 것이 된다. 물론 이는 심리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

읽지도 쓰지도 못했던 그녀는 남은 평생 루소의 곁을 지키며 모두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루소의 고백(혹은 <고백>)에 의하면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으로 보내졌으며, 그 후로는 그들을 다시 보지 못했다. 아무려나, 아이가 있건 없건 가정을 꾸리는 일에는 돈이 필요한 법이다. 물론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국가 또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문제겠지만 일단 루소의 시대로 주제를 한정시키자. 당시 루소가 매달리고 있던 글쓰기와 악보 베끼기로는 생계를 꾸려나갈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그에게도 광명이 드리우기 시작했으니, 남은 그의 삶에 깊은 그늘을 드리울 강렬한 빛이었다. 38세가 되던 1749년 여름, 백과전서파의 계몽철학자들과 친분을 나누던 그는 감옥에 있던 디드로를 면회하러 가는 도중 우연히 한 잡지에 실린 디종 아카데미의 논문 공모전 공고를 보게 된다. ‘(르네상스 이후) 학문과 예술의 부흥이 풍속의 순화에 기여했는가?’라는 주제였다. 그는 훗날 그 운명적인 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것은 읽는 순간 나는 갑작스러운 영감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수천 개의 불빛이 내 영혼을 비추는 것만 같았습니다. 생생한 사상이 내게 떼 지어 밀려들었습니다. 힘차고도 당혹스럽게 그것은 나를 설명할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술에 취한 것 같은 현기증이 느껴졌습니다. 맥박이 고동쳤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나는 더 이상 걸으면서 숨을 쉴 수가 없었으므로 길가에 있는 나무 아래 쓰러졌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반 시간 동안이나 흥분에 휩싸인 채 그대로 있었습니다. 다시 일어났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로 윗도리 앞자락이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 18

집으로 돌아온 그는 즉시 <학문예술론>이라 이름 붙인 논문에 착수한다. 다소 현학적인 공모 주제를 ‘예술과 학문은 도덕성과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켰는가?’라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바꾼 그는 (디드로의 조언을 따라) “아니. 아니. 아니. 잠깐, 그 부분은 생각 좀 해보고. 음… 역시 아니”라고 요약할 수 있을 부정적인 대답을 제출한다. 예술과 학문은 진보가 아닌 퇴보의 기념비일 뿐이고, 역사의 어느 장을 펼쳐 보아도 문화의 함양은 늘 도덕의 타락을 수반해 왔으며, 그에 반해 공허한 지식에 감염되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기들의 도덕을 통해 행복을 얻고 다른 사람들의 귀감이 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19 그것은 물론 그가 남은 평생을 바쳐 끊임없이 주장하게 될 루소 사상의 서막이었다. 바야흐로 ‘자연인’ 루소의 존재를 선포하는 순간. 그는 특유의 (후대의 낭만주의자들이 그들의 ‘영혼’을 바쳐 추앙하게 될)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아니 온 ‘우주’를 향해 외친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선조들의 계몽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행복을 증진할 유일한 자산인 소박함과 무구함과 가난으로 되돌려 주소서!”20 

*


<학문예술론>은 (당연히) 일등상을 받았고, 세상은 새로운 천재의 등장에 환호했다. 동시대 계몽철학자 엘비시우스의 표현에 의하면 ‘우연히 된 철학자(philosophe par hasard)’, 루소 자신의 표현에 따르자면 ‘실수로 된 철학자(philosophe par erreur)’가 일약 지성계의 슈퍼스타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인류의 지성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될 문제작들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에밀>, <사회계약론>과 같은 철학적인 저작들을 발표하는 것은 물론,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낭만적인 사랑을 그림으로써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서간체 소설 <신 엘로이즈>를 썼고,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다. 물론 틈틈이 연애 사건을 벌이는 일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영광의 나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모든 친구를 적으로 만들었다’는 후대의 평가처럼 그는 볼테르와 다투었고(그는 볼테르를 “불경스러운 나팔, 얍삽한 천재, 야비한 영혼”이라고 불렀으며, “만약 당신의 재주 이외에 내가 존경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그것은 나의 잘못은 아닙니다”라고 쓴 정중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21), 이내 디드로를 비롯한 백과전서파의 다른 계몽철학자들에게도 등을 돌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등을 돌렸다고 해야겠지만.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인간관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에밀>에서 자연 종교의 원리들을 제시하며 가톨릭교와 개신교 정통파를 공격했던 그는, <사회계약론>을 통해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왕권신수설을 부인하며 명실상부한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두 책은 판금 조처되었고 심지어 불태워졌으며, 급기야 저자 루소에 대한 구속영장까지 발부되기에 이르렀다. “2500년 동안 전해내려 온 인간의 영혼관과 사회관을 폭파해 버린”22  그에게 세상이 복수를 시작한 셈이다.

루소는 체포를 피해 스위스로 피신하지만,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문자 그대로) 돌팔매질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정처 없이 떠돌던 그는 1766년, 데이비드 흄의 초대를 받아들여 영국으로 떠난다. 영국에서는 모든 것이 잘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얼마 동안은. 하지만 계속되는 당국의 박해와 몇 년 동안이나 이어진 도피생활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그의 심신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는 세상 전체가 자기를 모함하고 음해하는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망상(평자에 따라 피해망상, 추적망상, 박해강박, 편집증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는)에 사로잡혔고, 흄 또한 그들 편이라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결국 흄과 결별한 그는 책을 출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프랑스로 돌아온다. 그리고 세상의 음모에 결연히 맞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로 마음먹는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 이미 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던 <고백>을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이다. 세헤라자데의 이야기처럼 기나긴, ‘자서전 삼부작’의 시작이었다.

* 


루소의 삶과 사상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자전적인 작품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견해가 일치하는 편이다. 서로 다른 세 명 저자들의 문단을 이어 붙여 <고백>을 설명하는 그럴듯한 소개문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루소는 <고백>에서 전례가 없을 만큼 진솔하게, 거의 노출증에 가까울 만큼 솔직하게 자신의 생애를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갈등과 내면적 고투, 열정적 감정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었고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극심한 불행에 시달렸으며 심각한 심리장애마저 있었던 한 인간의 삶이다.”23 

“루소는 비방자와 비판가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인생을 정당화할 속셈으로 당황스러운 개인사를 고백하고 있다. 가령 자신에게 빈뇨증이 있었다는 사실, 자신이 물건을 훔쳐놓고 그것을 불쌍한 하녀에게 뒤집어씌운 사실, 자신의 아이들을 기아(棄兒) 병원에 내다버린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대중 앞에서 자신을 매도한 것은 하나의 전략에 불과하다. 그는 이렇게 묻고 있다. 하느님의 재판석 앞에 선다면, 독자들의 삶도 나(루소)보다 별반 나을 것이 있는가? <고백>은 본질적으로 자기 인생에 대한 변명이다.”24 

“그러나 그의 사후 출간된 <고백>은 그에 대한 오해를 더욱 증폭시켰을 뿐이다. 언제나 자기 자신의 최대 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만드는 데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그는, 저작들이 널리 읽히면 읽힐수록 더 많은 적들에 의해 포위되었다. 루소의 비방자들은 <고백> 한 권만으로도 그를 공격할 병기로 가득 찬 무기고를 확보할 수 있었다.”25 

그렇다. 그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터놓고 말함으로써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려 했고, 자신이 더없이 진솔한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바닥까지 떨어진 명성을 회복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사람들은 그의 글에서 오직 악덕만을 찾았고, 루소의 악명은 더욱더 높아져만 갔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이 글에서 요약하고 있는 루소의 개인사 부분을 보라. 블랑쇼의 지적대로 그것은 “그의 모습을 왜곡시키기 위해 기를 쓰는” 후대인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서술이다. 나는 러셀과 J. 크리스토퍼 헤럴드의 서술을 참고했다. 그리고 그들은 루소의 <고백>을 참고했다. 

해럴드는 루소를 가리켜 “적에 의한 희생자인 동시에 자기 폭로의 희생자”라고 쓴다. 루소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 그는 <대화>의 등장인물 ‘루소’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그는 당신의 신사 분들이 회고록이라고 부르는 <고백>을 통해 그들에게 덜미를 잡히는 계기를 제공했고, 그들은 그것을 결코 놓치지 않았어요.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그 책을 읽어줬는데,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더욱 없었습니다. 결국 그 독서는 사람들에게 그의 나약함과 가장 은밀한 잘못을 모두 알려주는 꼴이 되고 말았지요. (…) 괴물로 여겨질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왜곡된 것을 보면서, 자신에게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이 더 많다고 느끼던 그의 자의식이 그에게 용기를 준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줄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은 아마 그 사람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는 자기 영혼의 내면을 완전히 드러내고 <고백>을 제시함으로써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었던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 아주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설명을 하면, 그 설명이 자신의 증언이 되어, 자기 고백이 진실한 것이고 근원도 밝혀지지 않은 채 널리 퍼져 있는 자신에 대한 끔찍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잘못된 것임을 느끼게 해줄 거라고 믿었어요. (…) 그들은 그의 결점을 악덕으로, 그의 잘못을 죄악으로, 그의 젊은 날의 나약함을 성숙한 나이의 비열함으로 왜곡했습니다. 그의 영혼 속에 자리 잡은 사랑스럽고 좋은 본성의 결과를, 때때로 우스꽝스럽기도 한 결과를 변질시켰어요. 소심한 천성에 의해 억제된 열성적이고 독특한 기질에 불과한 것들이 그들의 수고로 지독히 변태적인 취향과 기분으로 바뀌었어요. J.J.에 대한 그들의 진행 방식과 내가 감지한 모습들을 통해, 마침내 나는 그들이 <고백>에서 그에게 불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찾아낸 후 <고백>을 헐뜯기 위해 그가 살았던 모든 장소에서 음모를 꾸미고 책동을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평생을 왜곡하고, <고백>을 거짓으로 보이게 하는 거짓말을 교묘하게 만들어내고, 그가 자신에게 불리한 고백을 한 것에서조차 솔직함이라는 장점을 없애기 위해서 말이에요.”26 

하지만 루소는 멈추지 않는다. 잘못은 명백했다. 진실한 영혼의 고백을 이해할 사람이 그의 시대에는 없었다는 사실. 이번에는 대화라는 형식을 이용하기로 한다. 그가 보기에 “대화는 찬반을 논하기에 가장 적절한 형식”27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기꺼이 자기 자신을 분열시킨다. 순진한 독자 ‘루소’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루소를 박해하는 거대한 음모의 일원이 된 ‘프랑스인’, 그리고 가련한 희생양인 작가 ‘J.J.’라는 세 명의 인물로. “<고백>에서 독자에게 고백을 함으로써 독자들을 자신의 고백을 들어주는 사람인 동시에 심판자로 만들었던” 루소는, “<대화>에서는 독자에게서 심판자의 지위를 빼앗는다. 독자들이 아니라 루소 자신이 ‘J.J.’ 심판관이 되어 그를 어떤 방법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심판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28 

* 


다시 <대화>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J.J.’의 열렬한 독자 ‘루소’ 씨는 우연히 만난 ‘프랑스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다. 그가 그토록 탐독했던 위대한 저작들의 저자,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인 ‘J.J.’가 형편없는 악당이라는 것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놀랐을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던 윤리교과서 속 성선설의 아이콘이 이런 인간이었다고? ‘루소’는 절규한다. “나는 방금 너무나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놀라워요, 정말 놀라워요. 그럴 수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사람인지! 그자는 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어요! 나는 그를 미워할 겁니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은 그는, ‘프랑스인’에게 ‘J.J’가 행한 범죄의 증거를 제시할 것을 요청한다. 그의 저작에 감춰져 있는 독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 또 그의 작품이 표절이라면 누구의 작품을 어떻게 표절한 건지, 그가 치졸하고 더러운 범죄자라면 그 증거는 또 무엇인지. 그리고 그는 프랑스인에게 근거라고 할 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그저 항간의 소문을, 고귀한 신사분들이 하시는 말씀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것처럼 떠벌이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J.J’의 저작을 읽지도 않았다. 고귀한 신사분들이 그것을 정신의 독약이라고 선포했으므로, 자신은 읽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루소의 생각으로는 바로 그것이 핵심이었다. 자신의 저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저자의 덕성을 흠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테니까. 누군가 자신을 욕한다면 그것은 읽지 않았거나,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볼테르와 디드로를 비롯한 그의 적들이 권세와 명성을 등에 업고 그를 음해하려는 목적으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렸고, 그의 책을 읽지 않도록, 적어도 올바르게 읽지 않도록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전지구적인 음모다. 루소는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은 웃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루소는 진지하다. 그는 <대화>를 통해 거대한 음모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한다. 모든 사람이 음모에 동참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저 몇 사람의 핵심인물로 족하다. 그럴듯한 말을 꾸미고 적당히 둘러대어 사람들에게 지침을 내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대상이 소문을 좋아하는 프랑스인이라면 더더욱. 음모는 교묘하다. 겉으로는 여전히 평화로운 세상이고, 누구도 나서서 루소에게 해를 가하진 않지만 그들은 그렇게 서서히 루소를 사회에서 고립시켜 고독 속에서 죽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누구도 그를 방문하지 않고, 그의 방문을 받아주지 않는다(단, 음흉한 목적이 있는 경우는 제외하고). 새로운 소식을 접하지 못하도록 신문을 모두 치웠으며, 어떤 책을 읽기 위해 서점에 가면 그 즉시 모든 마을에서 그가 찾는 책은 사라졌다. 정부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그때그때 지침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낭만적인 루소의 영혼이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망상이었다. 하지만 루소의 입장에서 망상에 빠진 것은 그를 제외한 세상이었다. 그리고 솔직한 ‘고백’이 악의적인 오독으로 더럽혀진 지금, 그는 ‘대화’를 통해 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한다. 거장의 풍모가 빛나는 지점이다. 물론 그는 낙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절망하지도 않는다. 그는 서문(‘이 글의 주제와 형식에 대하여’)의 마지막을 이렇게 쓴다. 

“이 글을 손에 넣게 되어 읽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관대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으리라는 믿음이나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 인류를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29

<대화>는 바로 그런 책이다. 

* 


총 3부, 번역본으로 400여 쪽에 이르는 기나긴 대화를 통해 ‘루소’는 ‘J.J.’의 애독자답게 차근차근 ‘프랑스인’을 설득해나간다. ‘프랑스인’으로 분한 루소는 스스로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모든 기발한 논리를 차용하고, 또 창조하며 ‘J.J.’를 비난하고 ‘루소’를 궁지로 몰아넣지만, ‘루소’는 지지 않고 어떤 작가의 저작을 읽지도 않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일임을,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포장을 해도 고귀한 신사분들의 음모는 옳지 않은 일임을 따지고 드는 것이다. 그는 세상의 오해에 맞서 ‘J.J.’의 사상을 변호하고, 올바른 독법을 제시하며, 나아가 그의 사상에 대한 전체적인 가이드를 제시한다. 결국 루소가 말하는 루소 사용설명서인 셈이다. 하지만 역시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음모에 대한 루소 자신의 편집증적 집착이다. 장점과 단점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태도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열정적인 목소리 또한 여전하다. 인간 정신의 수수께끼를 보여주는 텍스트. 

“당신 스스로 수수께끼를 만들지 않는 한, 수수께끼는 없습니다. 그는 착하다기보다는 악의가 없는 사람이고, 건강하지만 나약한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덕을 숭배하지만 실천하지 못하고, 선행을 몹시 좋아하지만 행하지는 못하는 사람이지요. 그의 마음이 결코 죄에 가까이 간 적이 없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내 존재를 확신하듯 확신합니다. 증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그의 도덕성에 대한 내 관찰을 요약하자면 그렇습니다. 나머지는 요약해서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내가 아는 다른 어떤 사람과도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 사람에 대해서만 따로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30 

하지만 <대화>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그리 후하지 않다. 

“그가 쓴 대화록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는 군데군데 이성적 섬광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암담해지는 그의 정신 상태를 드러내주는 비극적 증언이다.”31 

“<고백록>에서 보이는 기꺼이 엉덩이를 맞고자 했던 루소의 성적 마조히즘을 여기서 자세히 곱씹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루소가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제단에 바친, 자기 자신과의 기이한 대화집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역시 다루지 않을 것이다.”32 

인용문에서도 드러나듯, 그 부분에나마 주목한 책은 무척 적고, 대개는 언급조차 하지 않으며, 덕분에 나는 적지 않은 책을 뒤져야만 했다. 역자 또한 <대화>의 말미에 붙은 해설에서 이런 현실을 지적하며 서두를 뗀다.

“장-자크 루소의 사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의 자서전적인 글들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다. 기껏해야 그의 이론서가 쓰인 상황을 설명해주는 구절들을 인용하는 것에 불과했고, 자서전적인 작품을 더 많이 활용한다면 루소의 사상을 그의 인간적인 됨됨이에 비추어 해석하기 위한 경우가 고작이었다. 대체로 이런 접근은 루소의 개인적 혼란을 드러냄으로써 그의 이론서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할 때가 많았다. 자서전적인 작품의 이론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고자 시도한 학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고백>이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과 같이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자서전적인 작품들도 루소의 사상에 접근하려는 시각보다는 이를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간주하는 시각 아래 놓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 대화>에서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 대화>는 루소의 주요 저작들 중에서 가장 안 읽히고 연구되지 않은 작품으로, 최근까지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로 루소의 망상증에 대한 증거로 이 책에 관심을 보였다.”33 

이어 역자는 현재 프랑스에서는 기존의 평가를 넘어 <대화>의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며 중요성을 주목하는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루소의 삶과 더불어 사상 체계에 대한 포괄적인 시각을 제공해주는 책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망상증의 증거로 보는 시각을 반대한다.

“현대의 비평가들은 루소를 괴물보다는 정신 이상자로 특징짓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의 작품에 대해 적대적이기보다는 다소 상냥한 어조를 취한다. 그러나 이 책의 ‘프랑스인’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루소 작품의 본 내용에서는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 개인에 관한 견해로 인해 그의 작품이 심오하고 진실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34 

하지만 나는 그 우려에 공감할 수 없다. 나는 루소 연구자가 아니고,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루소 전공자는 아닐 것이다(혹시라도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이 ‘비전공자’의 글을 덮으시길). 대학시절 ‘근대 철학’ 수업을 수강하긴 했지만, 교재로 썼던 <서양근대철학>의 루소 부분에 이르기 전에 학기가 끝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적어도 나는, 이 긴 ‘대화’를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그게 나에게 가장 익숙한 독법이므로. 누구라도 <대화>를 읽은 사람은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한 비탄에 빠진 정신을, 그럼에도 도무지 꺼트릴 수 없는 열정으로 광기와 논리가 뒤섞인 말을 끊임없이 내뱉는 한 고독한 지성을. (루소를 사랑한 후배들이 어째서 낭만주의운동을 시작했는지 나는 지금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역시 ‘지성’의 자리에 ‘영혼’이라는 단어를 넣지는 못하겠다.) 

그러니 역자의 우려는 순전한 기우가 아닐까? 그가 설사 미치광이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미치광이의 심오한 진실을 문학보다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형식은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렇게 볼 때에야 비로소 책의 말미에 붙인 일종의 에필로그(‘이 글이 겪은 파란만장한 이야기’)에서 그려지는 일종의 기행을, 모험을 우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화>를 하나님께 봉헌하기 위해 노트르담 성당의 대제단에 숨어 들어갔다가 대제단 앞에 세워진 철조망에 절망한 후, <대화>의 중요대목들을 손수 필사해 길거리에서 나눠주던 루소의 모습을. 그는 <대화>의 일부가 담긴 편지의 겉봉을 이렇게 썼다. 

“아직도 정의와 진실을 사랑하는 모든 프랑스인에게”35 

*


블랑쇼 또한 루소에게서 문학을 본 사람이다. 그것은 오늘날 모든 작가들이 처한 어떤 상황, 이를테면 “‘문예(Letters)에 거슬러 말하는 문필가’로서 쓰는 것에 거슬러 쓰는 것이 열중하고, 문학(Littérature)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염원하며 문학에 몰두하고, 이미 아무것도 전달할 가능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쓰기를 멈추지 않는” 행위로서의 문학이다. 그는 이렇게 쓴다. 

“루소는 필연적으로 그 <고백>에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할 것이다. 모든 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의 모든 이야기이며, 그의 모든 생활이다. 모든 것을 말했기 때문에 그는 비난받는 것인데, 오직 그것만이 그가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상스러운 것과 저급한 것, 부정한 것이며, 그것은 또한 무의미한 것, 애매모호한 것, 그리고 무가치한 것이기도 하다. 가까스로 시작했을 뿐인데, 그렇게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미친 짓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위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 방식의 모든 규칙과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통감한다. (…)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쓰기를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중단하면서도 어떤 시기가 되면 싫증을 내지도 않고 다시 그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가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그 시작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는 이 처음의 평온하고 행복한 확실성을 느끼고 있지만, 일단 표현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언제나 떨어져 나가고 마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고백>은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을 “모조리 대중에게”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그들의 시선 앞에”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은 그에게 “아주 작은 틈”도 “아주 작은 공허”도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 결코 글쓰기를 멈추지 않도록 강요할 것이다. 이어서 <대화>가 쓰이기 시작한다. 거기서는 ‘모든 것을 이야기한’ 인물이 “만약 내가 어떤 것을 말하지 않은 채로 둔다면, 사람들은 전혀 나를 알 수 없겠지”라는 강박에 의해, 이전에 단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것처럼 다시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다음에 오는 것이 <몽상>이다. “나 자신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바로 이것이 내가 여전히 추구해야 할 문제이다.” 만약 쓴다는 행위가 그치지 않는 것에 대한 기이한 정념이라면, 말에 의해 들볶여서 쓰는 것에 지치고 싫증이 나면서도, 이제 그만 닥치라는 도전에 부딪히면서도 여전히 “서두르자. 종이 위에 중단되어 있는 말들”을 내던지는 이 인물만큼, 우리에게 이 사실을 백일하게 드러내 주는 이가 또 있을까? 그에게는 가까스로 이 몇 마디를 “다시 읽을 시간만큼 글을 수정할 시간은 더욱 부족”한 것이다.”36  (강조는 인용자)

*


블랑쇼처럼 멋진 말을 할 능력이 없는 나는 다만 하나의 문학을 떠올린다. 끊임없이 떠들어대기를 멈추지 않는 한 남자의 절망적인 독백으로 이루어진 짧은 소설을. 특히 책의 첫머리에 놓은 작가의 말을. 

<전락>에서 말을 하고 있는 사내는 계산된 고백에 열중해 있다. 운하와 싸늘한 빛의 도시인 암스테르담에 묻혀 살면서 은자(隱者)와 예언자의 시늉을 하고 있는 이 전직 변호사는 어떤 수상쩍은 선술집에서 영합하기 잘하는 청중을 기다린다. 

그는 현대적인 마음씨를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남들에게 심판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서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보다 더 자유롭게 심판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는 거울을 그는 마침내 다른 사람 앞에다가 쳐들어 보이고야 마는 것이다.

어디부터가 고백이며 어디부터가 남들에 대한 고발일까? 이 책 속에서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심판하고 있는 것인가, 그의 시대를 심판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어떤 특수한 경우일까, 아니면 현대인일까? 이 고심하여 맞추어놓은 거울놀이 속에서 하여간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이 약속하는 바 그것뿐이다.37 

<전락>을 구상하던 1953년의 카뮈는 자신의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단 한가지의 거대한 목적 : 진실의 인식.38

루소와 카뮈가 시차를 두고 공유했던 그 목적은 얼마나 거대한가. 또한 얼마나 도리 없는가. 그렇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문학이 아닐 수 있는가?



*각주*

  1. 장-자크 루소, <에밀>, 피터 왓슨, <생각의 역사 1>(들녘), 30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2. 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그린비) 83쪽 [본문으로]
  3. 스털링 P. 램프레히트, <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 485쪽 [본문으로]
  4. 스털링 P. 램프레히트, 앞의 책, 489쪽 [본문으로]
  5. 버틀런드 러셀, <러셀 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 871쪽 [본문으로]
  6. 피터 왓슨, 앞의 책, 1160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7. 윌리엄 L. 랭어 편,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푸른역사), 220쪽 [본문으로]
  8. 윌리엄 L. 랭어 편, 앞의 책, 238쪽 [본문으로]
  9. 사이먼 크리칠리, <죽은 철학자들의 서>(이마고), 238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0. 마이클 더다, <마이클 더다의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유문화사), 235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1. 버틀런드 러셀, 앞의 책, 877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2. 버틀런드 러셀, 앞의 책, 878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3. 사이먼 크리칠리, 앞의 책, 238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4. 앤서니 케니, <서양철학사>(이제이북스), 235쪽 [본문으로]
  15. 장-자크 루소,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 대화>(책세상), 27쪽 [본문으로]
  16. 버틀런드 러셀, 앞의 책, 873쪽 [본문으로]
  17. 윌리엄 L. 랭어 편, 앞의 책, 229쪽 [본문으로]
  18. 윌리엄 L. 랭어 편, 앞의 책, 230쪽 [본문으로]
  19. 한스 요하임 슈퇴리히, <세계 철학사>(이룸), 572쪽 [본문으로]
  20. 한스 요하임 슈퇴리히, 앞의 책, 572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21. 버틀런드 러셀, 앞의 책, 876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22. 마이클 더다, 앞의 책, 241쪽 [본문으로]
  23.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앞의 책, 570쪽 [본문으로]
  24. 마이클 더다, 앞의 책, 244쪽 [본문으로]
  25. 윌리엄 L. 랭어 편, 앞의 책, 222쪽 [본문으로]
  26. 장-자크 루소, 앞의 책, 309쪽 [본문으로]
  27. 장-자크 루소, 앞의 책, 20쪽 [본문으로]
  28. 장 자크 루소, 앞의 책, 423쪽, 옮긴이 해설 [본문으로]
  29. 장-자크 루소, 앞의 책, 23쪽 [본문으로]
  30. 장-자크 루소, 앞의 책, 154쪽 [본문으로]
  31. 윌리엄 L. 랭어 편, 앞의 책, 242쪽 [본문으로]
  32. 사이먼 크리칠리, 앞의 책, 238쪽 [본문으로]
  33. 장-자크 루소, 앞의 책, 420쪽, 옮긴이 해설 [본문으로]
  34. 장-자크 루소, 앞의 책, 425쪽, 옮긴이 해설 [본문으로]
  35. 장-자크 루소, 앞의 책, 409쪽 [본문으로]
  36. 모리스 블랑쇼, 앞의 책, 93쪽 [본문으로]
  37. 알베르 카뮈, <전락>(책세상), 7쪽 [본문으로]
  38. 알베르 카뮈, <작가수첩 3>(책세상), 137쪽 [본문으로]

 

 

http://bkworlds.tistory.com/68

 

 

 

 

 

 

 

 

 

 

---

 

본문이 너무 지저분해 지는 걸 막기 위해 각주라는 걸 달아봤다. 사실은 많은 책을 참고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글이다. 조금 웃겨서, 그래서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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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5-30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맙소사! 페이퍼에 각주라니! (몇 줄 읽고 더 읽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중인데 각주가 그저 책의 출처라면 읽어도 좋겠군요!)

poptrash 2012-05-31 04:14   좋아요 0 | URL
후후 각주를 싫어하시는 다락방 님. 출처를 본문에 쓰면 글이 조금 보기 안 좋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각주로 넣어봤는데, 아마 책세상 블로그에 올리는 담당 편집자님이 고생 좀 하셨을 듯. 하지만 저는 각주를 좋아합니다! 아니, 이 경우에는 미주라고 해야하나. 아무튼요. ㅎㅎ

달사르 2012-05-30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멋집니다! 각주를 사랑하는 일인으로써, 일단 만세! (선댓글, 후감상)

- 요새 은근히 팝님 글 올라오길 기다리는 재미를 붙인 달사르-

poptrash 2012-05-31 04:15   좋아요 0 | URL
하핫, 각주만으로 달사르 님을 만족시키다니, 뿌듯한데요!

달사르 2012-05-30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팝님 덕분에 읽게 된 오에 겐자부로의 어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루소와 겹치는 지점이 있는 듯하여 괜히 길게 써봅니다. 힛.

오에 겐자부로가 토마스 만에게 정감이 가게 된 사건이 있었다지요. 토마스 만이 급히 망명하는 도중 잃어버린 가방을 나중에 찾고선, 노심초사하던 가방 속의 숨겨진 (은밀한) 비밀이 안전하게 있었던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정작 시간이 흐른 뒤 어느 지면에선가 털어놓았다던가요. 문학이란 게 작가의 사생활이 필연적으로(?), 본인이 의식하든 안 하든 들어가질 수 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역시 사소설이 살짝 가미된 소설을 쓰는지라 이런 토마스 만이 무척 반가웠을 거라 생각했구요.

그런데 오늘 보니 루소는 정말 거대한 에고를 속에 품고 있었군요. 본인이 가둘 수 조차 없는 거대한 에고. 루소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는데 이 포스팅 읽고나니 루소에게 애잔한 마음도 생기고 친근한 마음도 생기고 막 그럽니다. ^^

링크를 타고 들어가보니 루소랑 사람들 사진이 나오네요. 루소가 무척 미남이네요. 하하.

poptrash 2012-05-31 04:18   좋아요 0 | URL
오에 겐자부로의 이야기라면 물론 저도 읽은 기억이 있는데 그게 어느 책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네요. 일전에 다자이 오사무의 딸 쓰시마 유코의 <나>라는 소설집을 잠깐 들춰봤는데, 일본의 사소설적 전통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루소 참 잘생겼죠. 게다가 말은 또 청산유수니 귀부인들이 루소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

비로그인 2012-05-31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 각주에도 번호를 붙여주셔야죠. 위에서부터 세어가면서 확인하느라 애먹었습니다ㅎㅎ 그나저나 대단하시네요!! 어쩐지 공짜로 읽으면 안 될 것 같은 글이에요^^

poptrash 2012-05-31 05:29   좋아요 0 | URL
사실 전 웹페이지에 각주를 어떻게 넣는지 몰라 책세상에 올리신 걸 그대로 퍼왔는데, 이게 또 브라우저마다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에요. 구글 크롬에서는 각주 번호가 보이는데... 익스플로러 등에서는 안 보이는 모양이지요? ㅠㅠ 괜한 고생을 하시게 만들었네요 제가. 늘 고맙습니다 후와 님. ^^

라로 2012-06-27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팝님! 유명해 지시길 바랄게요, 그렇게 되신 후엔 알라딘의 뤼야켈레벡이 일조했다 생각해 주세요, (응?? ㅎㅎㅎ기도로, ㅋㅎㅎㅎㅎ)

poptrash 2012-06-27 23:2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ㅜ_ㅜ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게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뤼야켈레벡 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한번 되어보고 싶네요 ㅎㅎ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박인환, ‘목마와 숙녀’ 중에서)

 

한 잔의 술을 마시는 새벽이면 나는 종종 박인환을 이야기한다. 그의 생애가 아니다. 목마도 옷자락도 아니다. 홀로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부를 뿐이다. 무슨 ‘센티멘탈 저니’ 같은 감상에 젖어서가 아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 부르며 소원이라도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 또한. 다만 그의 이름이 입안에서 만들어내는 리듬을 즐길 뿐이다. <롤리타>의 화자가 ‘롤리타’의 이름을 음미하듯이.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롤리타> 15쪽)

 

그의 이름을 부를 때는 반드시 끝에 ‘-이’를 붙여야 한다. 박인환이, 라고. 굳이 말하자면 [바:기놔니] 정도 될까? 아무튼 그런 새벽이다. 잠깐 웃고, 잔을 비운다. 그리고 생각한다. 한국문학사에서 박인환만큼 ‘-이’가 어울리는 인물이 또 있을까? 그럴 리가. 아마 세계문학사를 뒤져본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EBS 드라마 [명동백작]에서다. 어느 골목의 포장마차, 아니, 포장은 없으니 노상주점이라 해두자. 술값을 위해 어머니의 장롱에서 금비녀를 훔쳐 나온 ‘명동백작’ 이봉구가 김수영과 함께 잔을 기울이는 장면이다. 남로당 활동을 하며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 오장환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는 이봉구에게 술 취한 수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이 선배,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경멸하는 놈이 누군지 아십니까? 박인환이에요. 작가라는 놈이 멋이나 부리고, 고급 양복이나 입고 여자나 유혹하고. 그런데 오장환은 박인환이 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나쁜 놈입니다.”

 

“자넨?”

 

“난? 여성을 노리개로 생각한 적 없습니다.”

 

“인환이도 그렇지. 아, 박인환이만 한 페미니스트가 어디 있겠어?”

 

“후, 머리는 텅텅 빈 게 멋은 젠장”

 

“그러면서도 죽고 못 사는 게 자네와 박인환이 관계 아냐?”

 

“…… (말없이 한 잔 들이킨다)”

 

“아니야?”

 

“인환이 이 자식, 지금도 여자나 후리고 신나게 살고 있겠지……. 근데 이 선배, 왜 박인환이가 이렇게 보고 싶은 겁니까? (젖은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본다)”

 

“아, 박인환이만 한 페미니스트가 어디 있겠어?”라는 이봉구의 말은 물론 “근데 이 선배, 왜 박인환이가 이렇게 보고 싶은 겁니까?”라는 김수영의 말까지. 대수롭지 않은, 차라리 통속적인 문장이다. 하지만 ‘박인환이’가 들어가는 순간 사정은 달라진다. 재료도 변변찮은데 간까지 밍밍한 국에 약간의 미원을 넣는 일과 비슷하다고 할까. 말맛이 살아나는 것이다. 박인환이가 정말 페미니스트였는지는 알 바 아니다. 화학조미료가 얼마나 몸에 나쁜지도 알고 싶지 않다. 인문정신이 대체 무엇인지, 김수영에게 그런 것이 있었는지 또한 관심 없다. 궁금한 건 따로 있다. 말하자면 오장환을 욕하는 자리에서 굳이 인환의 이름을 들먹여야했던 수영의 마음, 같은 것.

 

내게 김수영은 성姓을 빼고 부르기 좋은 시인이다. 수영을 평생의 라이벌로 생각했던 김춘수의 이름을 불러보면 알 수 있다. 춘수, 라니. 너무 ‘춘수럽지’ 않은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노래한 김춘수지만, 적어도 ‘성 없이 부르기 좋은 이름’ 부문에 있어서만큼은 완패라 해야겠다.

 

세계로 눈을 돌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들을 존이나 윌리엄이라고, 샤를이나 아르튀르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 우리에겐 (정)지용도 있는데? 당신은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지켜야 할 선은 있는 법이다. 우리가 그를 지용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면 다음 세대가 그를 ‘지드래곤’이라고 부르는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물론 소녀시대에는 수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멤버가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적어도 그들은 시인을 존중할 줄 안다고. 언젠가 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난 그대 소원을 이뤄주고 싶은 행운의 여시인- / 소원을 말해 봐 / (I'm genie for your dream)”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의 이름에 어울리는 각각의 잉여와 결락은 그들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작가라는 놈이 멋이나 부리고”라는 수영의 말에서 드러나듯, 낭만적인 성향의 박인환이는 화려한 치장과 과장을 좋아했고(팽창), 내향적인 수영은 거추장스러운 장식과 허식을 경멸했던 것이다(수축). 물론 엉터리 성명학이고 조야한 단순화다. 그러니 말장난은 이쯤에서 접어두는 것이 좋겠다.

 

*

 

아무튼. 적지 않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명동백작>은 우리의 문화사 전체를 낭만적 기조로 개관하려는 과욕 탓인지 캐릭터들의 내면파악에 간혹 가다 분명한 한계를 드러냈는데, 내 눈에 그것은 김수영과 박인환의 관계설정에 있어서 제일 유치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명동백작>은 마치 김수영이 박인환을 애증 내지는 연민한 것처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정이 병이라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이름이다. 과연 이봉구스러운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이응준, ‘김수영의 박인환 증오’, 이인성 홈페이지)

 

소설가 이응준의 말이다. 드라마 [명동백작]은 그가 지적하듯 이봉구의 감상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풍경일 뿐이다. 수영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다면 수영을 읽어야 한다(그것은 루소가 자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쓴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 대화>에서 줄기차게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마침 우리에게는 두 개의 텍스트가 있다. 그 중 ‘박인환’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수영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수영, ‘박인환’, <김수영 전집 2 : 산문> 98쪽)

 

이보다 직접적인 서두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이어지는 내용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박인환이 죽은 후 부러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는 수영은, “인환이가 죽은 뒤에 그를 무슨 천재의 요절처럼 생각하고 떠들어대던 사람 중”에 인환과 같이 경박한 사람 뿐 아니라 “유정 같은, 시의 소양이 있는 사람”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세상의 이런 인환관과 나의 생각과의 너무나도 동떨어진 격차를 조정해 보려고” “시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새삼스럽게 생각”하며, 인환의 “<선시집>의 후기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 ‘밤의 미매장’이란 시를 읽어보고, 그래도 미흡해서 ‘센티멘털 저니’라는 시를 또 한번” 읽는다. 그리고 쓴다.

 

인환! 너는 왜 이런, 신문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 이 유치한, 말발도 서지 않는 후기. 어떤 사람들은 너의 ‘목마와 숙녀’를 너의 가장 근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에는 ‘목마’도 ‘숙녀’도 낡은 말이다. 네가 이것을 쓰기 20년 전에 벌써 무수히 써먹은 낡은 말들이다. ‘원정(園丁)’이 다 뭐냐? ‘배코니아’가 다 뭣이며 ‘아포롱’이 다 뭐냐?

 

‘신문기사만큼도 못한’ 인환의 시에 대해서라면 ‘마리서사’에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이 있다. “(마리서사에 드나들며 외국의) 이상한 시에 접하게 되었고, 그보다도 더 이상한, 그가 보여주는 그의 자작시를 의무적으로 읽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그는 일본말이 무척 서툴렀고 조선말도 제대로 아는 편이 못 되었지만, 그 대신 그의 시에는 내가 모르는 멋진 식물, 동물, 기계, 정치, 경제, 수학, 철학, 천문학, 종교의 요란스러운 현대용어들이 마구 나열되어 있었다.” 조선말이 서툰 인환의 시를 수영은 일종의 스노브로 파악한 모양이다. 수영은 이렇게 덧붙인다.

 

인환의 최면술의 스승은 따로 있었다. 박일영이라는 화명을 가진 초현실주의 화가였다. 그때 우리들은 그를 ‘복쌍’이라는 일제 시대의 호칭을 그대로 부르고 있었다. 복쌍은 사인보드나 포스터를 그려주는 것이 본업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인환이하고 알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쓰메에리를 입은 인환을 브로드웨이의 신사로 만들어준 것도, 콕토와 자코브와 도고 세이지의 ‘가스파돌의 입술’과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과 트리스탄차라를 교수하면서 그를 전위시인으로 꾸며낸 것도, 마리서사의 ‘마리’를 시집 <군함 마리>에서 따준 것도 이 복상이었다. 파운드도 엘리엇을 이렇게 친절하게 가르쳐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복쌍을 알고 나서부터는 인환에 대한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흥미가 전부 깨어지고 말았다. 복쌍은 그를 나쁘게 말하자면 곡마단의 원숭이를 부리듯이 재주도 가르쳐주면서 완상도 하고 또 월사금도 받고 있었다(월사금이라야 점심이나 저녁을 얻어먹을 정도이었지만). 그는 셰익스피어가 이아고나 맥베스를 다루듯이 여유 있는 솜씨로 인환을 다루고 있었지만, 셰익스피어가 그의 비극적 인물의 파탄에 책임을 질 수 없었던 것처럼 그를 끝끝내 통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럴 때면 나한테만은 농담처럼 불평을 하기도 했다. “인환이놈은 너무 기계적이야” 하고. (김수영, ‘마리서사’, <김수영 전집 2 - 산문> 106쪽)

 

하지만 나쁘게 말하고 있는 수영의 자세와는 달리, 그들의 관계가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김수영과 박인환은 다시 예전처럼 대폿잔을 기울이다 논쟁을 벌이고, 결국은 멱살을 잡고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그것도 시라고 썼느냐고 욕설을 퍼붓다가 더는 잃어버릴 것 없는 세상을 서러워하며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릴 것이 분명합니다”라는 드라마 [명동백작]의 내레이션을 참고할 것도 없다.

 

수영은 마리서사에 드나들며 인환과 친분을 쌓았고, 함께 ‘후반기’ 동인 활동을 하기도 했다. 밤늦도록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술을 마셨고, “이러한 교우관계가 그들의 모친간 관계로 발전하여 박인환과 김수영, 그리고 그들의 모친들 사이에까지 문화적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한 긴밀한 연분이 형성”(한기, ‘박인환과 김수영, 혹은 문학사적 짝패의 초기 동행여정’, <살아있는 김수영> 271쪽)되기도 했단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은 조금도 낯선 것이 아니었다. 김규동은 이렇게 회상한다.

 

“아까는 작곡하는 평안도내기 김동진이 지나갔고 이봉구, 조경희, 전숙희 등 문인이 지나간 거리를 지금 수영과 인환이 걷고 있다. 그들은 걸으며 시를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환이 연해 한손을 올렸다 내렸다하는 것이 무슨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라도 있는 모양이다. (…)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키는 훤칠하게 크다. 하지만 비쩍 마른 둘의 모습은 선병질 체질이다. 공복에 강술만 먹고 다니니 몸에 살이 붙을 리 있겠는가. 영양실조다. 그들은 지금 명동 안쪽에 있는 ‘동방살롱’으로 가는 중이다.” (김규동, ‘소설 김수영’, <살아있는 김수영> 255쪽)

 

물론 우정도 언젠가는 빛이 바래는 법이다. 더욱이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야?”라고 말하던 당대 최고의 ‘댄디보이’ 인환과 “틀림없는 농부 같은 옷차림을 하고 한쪽 손에는 묵직한 방한모를 개켜”(김규동) 쥐고 있던 수영은 애당초 결이 다른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파국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전집에 따르면 수영이 ‘마리서사’와 ‘박인환’을 쓴 것은 모두 1966년의 일이다. 인환이 세상을 떠난 게 1956년이니, 꼭 십년 만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어떤 충동이 수영에게 문우의 사후 10주년을 맞아 이런 글을 쓰게 했을까? 나중에 쓴 ‘박인환’에서는 ‘마리서사’를 언급하며 “인환에 대해서 쓴 나의 유일한 글에 그런 욕을 쓴 것이 여간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라고 고백하면서도,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그의 문학을 조롱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쉬이 짐작할 수 없는 마음이다. 이응준은 이렇게 말한다.

 

<김수영 전집 2>(산문)를 백 번 이상 읽은 나는 이제 이렇게 본다. 어느 시점에서부터 김수영은 박인환을 문학의 공적(公敵)으로 결론 내렸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박인환은 가짜 시인이었고, 태작기계였으며, 제 멋에 취해 예술을 오도하는 문화양아치였다. 고로, 김수영은 자신의 산문들 중에서 가장 공적(公的)인 태도를 견지하고서 문학의 섬세한 질서를 위해 ‘박인환’과 ‘마리서사’를 썼던 것이다. 김수영의 박인환에 대한 감정은 연민이라든가 애증 따위가 아니라 완벽한 역겨움이자 순수한 증오였으며 그것은 사사로운 분노가 아니라 공분(公忿)이었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김수영은 ‘박인환’과 ‘마리서사’를 쓴지 이 년 뒤에 죽었다. 그는 추호도 후회가 없었을 것이다.

 

이응준은 전적으로 수영의 시점에서 문제를 바라본다. 반면 수영과 인환을 “서로 욕망하면서 경쟁하고, 경쟁하면서 욕망하는 쌍둥이와 같은 관계”인 ‘짝패’로 파악하는 평론가 한기의 시각은 반대다. 그는 인환 쪽에 서서 수영을 바라본다.

 

조금 과장하여 말한다면, 박인환 생시에는 거의 숨도 쉬지 못하였던 김수영이 박인환의 타계와 함께 일어서서, 마침내 시사에 미친 박인환의 영향을 걷어내기 위해 절치부심했다는 것은 역사의 숙명이자, 의식변증법, 문화변증법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짝패’는 서로 닮는다 했던가. 욕망하면서 증오하고, 증오하면서 선망하는 이러한 짝패 관계의 의식적 선망원리로 볼 때, 박인환을 시사의 희생양으로 내세운 김수영의 태도란 어떤 점에서 박인환에게서 전수된 것이라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박인환은 김수영의 스승이자, 동지이며 동시에 적수였다. (한기, ‘박인환과 김수영, 혹은 문학사적 짝패의 초기 동행여정’, <살아있는 김수영> 305쪽)

 

그렇다면 중간은 없을까? 물론 있다. 둘을 ‘짝패’로 바라보는 건 같지만 좀 더 온전하고 둘 모두에게 공정한 시선은 황현산의 것이다.

 

그러나 이 추억담을 쓸 때 김수영에게는 박인환을 폄훼하려는 의도 외에 시인으로서의 자기발전의 한 계기를 기념하려는 뜻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산문과 시를 함께 살피다보면, 그가 박인환과의 관계에서 ‘젊은 날의 덫’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박인환의 약점은 바로 그 자신의 약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이 관계에 냉정한 선을 그어둠으로써 “프로이트를 읽어보지도 않고 모더니스트들을 추종하기에 바빴던” 자신의 치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동무’에게 못지않게 자기 자신에게도 가혹했다. (황현산, ‘시의 몫, 몸의 몫’, <살아있는 김수영> 114쪽)

 

한편 그의 분석은 내게 여러모로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를 떠올리게 한다. 글을 써야한다는 강박에 자신의 인생을 내맡겼지만 글을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끝내 극복할 수는 없었던 헤밍웨이와, 빛나는 재능을 가졌지만 스스로 초래한 파국을 피하지 못한 채 펜을 놓아버린 피츠제럴드의 관계를. 헤밍웨이에게 피츠제럴드는 마음속 깊은 곳의 “두려움과 절망이 겉으로 드러난” 또 다른 자신이었고, 헤밍웨이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쓰기 위해, 차라리 살아남기 위해 피츠제럴드를 공격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피츠제럴드가 세상을 떠난 후로도 그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그는 자신을 향해 엽총의 방아쇠를 당겨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그것이 ‘이봉구스러운 시각’과 닮은 나의 편견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무엇보다 나는 수영의 글에서 서로 다른 감정과 감정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애틋함을, 어떤 ‘비애’를 본다. 기어이 보고야 마는 것이다. 백 번의 십분지 일도 읽지 못했지만 그렇다. 절절한 그리움 따위가 아니라 일정 이상 거리를 둔 그리움이다. 애써 떼려한 적 없고, 끌어안은 적도 없지만 그 자리에 있어 녹지 않는 만년설 같은 그리움이다. 그렇다면 수영은 왜 그렇게 모진 말을 해야만 했을까?

 

그건 아마도 사사로운 정에 현혹될 수 없었던 수영 자신의 ‘시의 소양’ 때문이 아니었을까. 수영의 말대로 자신의 눈에는 ‘이상한 시’였던 인환의 시가 많은 사랑을 받고 그의 죽음이 ‘천재의 요절’로 오독되던 시절이 벌써 10년이 흐른 것이다. 어떤 유행이 인환의 시를 하늘 높이 치켜세웠지만, 그것이 더 이상은 지속될 수 없음은 수영은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이의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두 손으로 그의 눈을 감기듯, 스스로 그것을 선언해버린 것이다. 세간이 친우의 이름을 더럽히기 전에, 그의 이름이 어떤 추문으로 전락하기 전에. 그것은 이응준의 지적대로 지극히 공적인 '사망선고'라 해야겠지만, 내겐 삶의 한때를 함께 헤쳐 왔던 인간 '박인환이'를 위한 불가피한 결심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네가 죽기 얼마 전까지도 나는 너의 이런 종류의 수많은 식언의 피해에서 벗어나려고 너를 증오했다”고 수영은 고백한다. 이 문장은 ‘전까지도 ~ 했다’는 구조를 가진 명백한 과거형이다. 또한 “식언의 피해에서 벗어나려고 너를 증오했다”는 것은 이미 애증의 언술이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식언에 피해 입지 않으며, 단지 식언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증오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응준의 마지막 말에는 나 역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수영이 인환에게 “그처럼 너는, 지금 내가 이런 글을 너에 대해서 쓴다고 해서 네가 무덤속으로 안고 간 너의 <선시집>을 교정해 내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교정해 가지고 나올 수 있다 해도 교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도 해본 일이 없다고 도리어 나를 핀잔을 줄 것이다. “야야 수영아, 훌륭한 시 많이 써서 부지런히 성공해라!” 하고 빙긋 웃으면서, 그 기다란 상아 파이프를 커크 더글러스처럼 피워 물 것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언젠가 수영은 이렇게 썼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 ‘절망’ 전문)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525152743













아직 회사를 다니던 시절이니 이년 하고 몇 달쯤 더 전의 일인 것 같다. 무슨 글인가를 쓰려고 나는 휴가계를 냈는데, 결국 김수영과 박인환에 대한 짧은 글을 블로그에 쓰고 그 글은 쓰지 않았단 기억이다. 아마 다음날 회사에서야 겨우 썼겠지. 회사 업무와 관련된 글이었으니 내가 방만한 직장인이었던 건 아니다. 적어도 그 경우에는. 어쩌면 이 서재를 방문하는 누군가는 그 글을 읽었을 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그 글은 이 동네 어딘가에 있다.


본문에 나오는 표현을 빌자면 나는 언제나 문학사의 짝패 관계가 궁금했다. 이를테면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랄까. 카뮈와 사르트르랄까.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랄까. 물론 수영과 인환도 그렇고, 실은 가장 애착이 가는 관계이기도 하다. 이런 표현은 조금 이상하다. 그들과 나의 관계에 애착이 가는 게 아니니. 나는 그들이 만들어 낸 관계에, 그 모호함에, 애착이 가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마 수영이 인환을 경멸했다는 쪽이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계간 문학동네에 실린 김현경 여사의 말만 들어도 그렇다. 이런 대화였다.


신수경 : 박인환 시인은 어떤 분이셨어요?


김현경 : <목마와 숙녀>인가 뭔가가 야단이어서....... 우리는 아주 멸시를 했어.


신수정 : 이게 늘 김수영 시인이 박인환 시인을 회고할 때 하시는 말씀인데...... (웃음) 그게 오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 형편이잖아요, 요즘. 박인환 시인을 우습게 아는 것은 김수영의 콤플렉스였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들 말이에요. 


김현경 : 몰라, 우리는 그랬어. 옷차림부터 말야, 그는 아주 댄디해...... 지금 같으면 양장점 점원 같은 것 해도 잘했을 사람이야. 샹송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끝까지 아는 게 없어. 늘 기분만 내는 사람이야. 조니 워커 블랙 라벨이니 레드 라벨이니 그런 것만 가지고 떠들고. 진짜 술맛을 몰라. 그러니까 철저하게 경멸당했지. 


'오해다, 컴플렉스였다 이런 말이 나온다'는 신수정의 말은 조금 이상하다. 그들의 관계가 문학사의 장으로 편입된 이상, 그런 사실관계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려나 텍스트들이고, 나머지는 그저 좋을대로 짐작하고 넘겨짚을 뿐이다. 다만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을 줄 수 있느냐의 문제일 뿐. 이야기란 결국 해석의 문제이고 그 해석이란 언제나 망상일 뿐이다. 이건 피에르 바야르의 말이다. 아니다. 내가 전유하고 있는 피에르 바야르의 말이라고 해야겠다. 


아무려나, 나는 언젠가 둘의 관계에 대해 좀 더 긴 글을 써봐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이 글이 씌어졌으나, 결과적으로는 실패다. 분량과 말장난, 인용이 늘어났을 뿐 결론은 지난 글과 똑같은 것이다. 마감에 쫓긴 탓이 가장 크겠지만, 실상 나는 내 해석을, 그러니까 망상을 더 발전시킬 능력이 혹은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건... 본문에도 나오지만 조금 감상적인 시선이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내 개인적인 관계, 그러니까 어떤 친구와 나의 관계 때문이다. 저 글을 처음 썼던 그때에도 나는 그것을 고민했고, 지금은 더이상 고민하지 않지만 그것은 그저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을 다시 썼음에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이다. 


김수영 전집은 꾸준히 판매되고 있는데 박인환 전집은 두 권 모두 품절이다. 내겐 두 판본이 모두 있다. 아마 몇 개의 글이 추가된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닐 수도 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인환의 '센티멘탈 저니'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수영洙暎에게"라는 헌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실천문학사 판본은 밝히지 않고, 예옥 판본은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옥 판본이 앞선 판본이다. 


<살아있는 김수영>에 실린 글은 재미있는 글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저 그랬다. 이봉구의 <명동백작>에는 드라마에 나온 많은 일화들이 없다. 아마 드라마는 이봉구의 다른 많은 글들을 토대로 만들었으리라. 아마 <명동백작> 역시 처음 제목은 그게 아니었고,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이봉구의 어떤 책 중 하나를 제목을 달리해서 펴낸 것 같다. 내 짐작이다. 


무언가 할 말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느덧 약속 시간이 다가오니 이만 줄여야겠다. 나는 오늘 오랜만에 그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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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5-26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같은데 중간 중간에 때문에 읽기가 다소 불편하네요.설마 일부러 쓰신것은 아닐테고 알라딘 시스템의 오류인가요?

poptrash 2012-05-28 05:02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 중간 중간에 때문에 읽기가 다소 불편한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다시 읽어봤는데 제 문장 외에 알라딘이 오류로 집어 넣은 건 없었습니다.

poptrash 2012-05-29 21:38   좋아요 0 | URL
아, 이제 알았네요. 익스플로러에서는 보이네요. 댓글에 써주신 것도 보이고 본문에서도 보이고. 클롬이나 파이어폭스 사파리에서는 안 보였거든요. 고쳤습니다! ^^

비로그인 2012-05-27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즈로 쓰시는 모양이죠? 아주 재미있습니다^^

poptrash 2012-05-28 05:03   좋아요 0 | URL
그냥, 저를 잡고 놓아주지 않지만 제가 한 번도 똑바로 바라본 적 없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게 되네요. 지루하진 않으셨나요? ^^

비로그인 2012-05-30 01:26   좋아요 0 | URL
지루하긴요. 원래 팝님 글의 특성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는 거잖아요ㅎㅎ^^

poptrash 2012-05-31 04:23   좋아요 0 | URL
그게 장점인지 단점인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사실 별로 장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

달사르 2012-05-27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패관계가 문학이란 장르에서 보게 되니 더욱 흥미진진하네요. 그들 작품의 숨은 결로도 읽히게 되고, 또 그들이 바라던 (자신에게는 없지만 짝패 당사자에게는 있는) 상대적인 그 무엇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어 그들의 작품이 더 재미있게 읽히는 것 같애요.

최근에 김수영 관련 책들이 나오고 있어 살펴보던 중이었는데 과연 팝님의 이번 글 역시 책 읽기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

poptrash 2012-05-28 05:04   좋아요 0 | URL
그쵸. 달사르 님, 저도 그런 게 재미있고 또 궁금한데, 아무래도 제대로 쓰지 못한 거 같아서 속상해요.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부끄럽습니다.

2012-06-01 2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ptrash 2012-06-04 10:1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감은빛 2012-06-04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poptrash 2012-06-05 03:02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1. 4월, <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소설이 존재한다. 펼치는 순간 잠이 폭풍처럼 몰려오는 소설과 책장을 덮은 후에도 좀처럼 잠을 청할 수 없는 소설. 후자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이 그리고 있는 세계가 너무 매혹적인 탓에 좀처럼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는 소설이 하나고 읽는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심란해진 마음을 달랠 길 없는 소설이 다른 하나다.


전아리의 장편소설 <앤>은 심란한 종류다. 다소 난해한(?) 보라색의 표지만 그런 게 아니다. 그녀가 그리는 인물이 그렇고, 세계가 그러하며 무엇보다 그녀의 소설 자체가 그렇다. 실제로 어떤 의무감으로 책을 집었던 그 새벽 이후, 나는 한동안 불면에 시달려야만 했다.


소설은 다섯 명의 소년과 한 소녀를 둘러싼 어두운 비밀과 욕망, 집착과 배신을 그린다. 친구의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한 여자아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계획한 사소한 장난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홀로 죄를 뒤집어 쓴 친구는 감옥에 간다. 남은 이들은 비밀의 무게에 짓눌린 채 서로에게서 도망친다. 어른이 된 그들. 그리고 감옥에서 출소해 그들 앞에 나타난 친구. 서로 다른 것을 욕망하는 그들은 스스로의 어둠을 견디지 못한 채 결국 서로를 죽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한 배를 타고 있었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살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불편한 이야기지만 그것이 심란함의 이유는 아니다. 좋은 작품은 무릇 불편한 법이고, 불편함을 통해 가려진 진실을 돌아보게 하는 법이니까. 물론 모든 불편한 작품이 좋은 작품은 아니다. 바로 그것이 <앤>이 나를 심란하게 하는 이유다.


<앤>은 독자들에게 불편함을 주겠다는 욕망 하나로 쓰인 소설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어떤 진실도 , 장르소설의 쾌감도 없다. 자극적인 상황을 계속해서 이어감으로써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겠다는 작가의 욕망과 철저하게 소비되는 인물들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이미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그건 바로 ‘막장 드라마’다.



2. 5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11년 맨부커상 심사를 마친 후, 심사위원장 스텔라 리밍턴은 이렇게 말했다. “카펫에 흘린 피 같은 건 일절 없었다. 씩씩거리며 자리를 뜬 사람도 없었다. 우리 모두 친구가 되었고, 결과에 만족했다.” 실제로 심사는 고작 31분 만에 만장일치로 이루어졌고,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수상자가 줄리언 반스라는 걸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놀라운 건 이것이 반스의 첫 번째 맨부커상 수상이라는 사실뿐. 심사위원회에서 내세운 심사기준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은 두 말 없이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살만 루슈디, 이언 매큐언 등과 함께 ‘골든 제네레이션’ 작가로 불리는 반스는 <플로베르의 앵무새>, <10과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등의 작품에서 선보인 현란한 지식과 형식실험으로 영국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작가라는 수식을 얻었지만, 그의 진정한 매력은 ‘찌질한’ 남자의 내면세계를 묘사하는 집요한 시선과 뒤틀린 유머에 있다. 삼각관계에 놓인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구차한 속내를 거침없이 그려낸 <내 말 좀 들어봐>와 <사랑 그리고>가 그랬고, 부인의 과거에 대한 의심과 질투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뇌내망상’적 모험을 그린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이 또한 그랬다. 맨부커상 수상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은 바로 그런 계보에 속하는 작품이다. 어느덧 60대에 접어든 작가를 따라 소설의 주인공 역시 노년에 접어들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사랑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그러나 사랑할 능력은 갖지 못한 구제불능의 ‘찌질남’일 뿐이다. 대신 깊어진 건 작품의 깊이. 스스로를 왜곡하며 기만하던 남자의 기억이 치명적인 진실을 대면하는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인간존재, 나아가 인간의 역사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철학적이라고? 그렇다고 인상을 찌푸릴 필요는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줄리언 반스의 소설이고, 그건 끝내주게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3. 6월(예정), <헤밍웨이 전집>


어쩌면 당신은 헤밍웨이를 잘 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가련한 노인이 조각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가 청새치 한 마리를 잡겠다고 죽도록 고생한 끝에 결국 앙상한 생선뼈만 가지고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쓴 작가,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신은 알록달록한 삽화가 그려진 ‘소년소녀 세계명작’의 한 권으로 그것을 읽었고, 독후감도 썼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사춘기를 맞은 당신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필요했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그곳에 있었다. 이를테면 <상실의 시대>. “누구라도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은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대사를 통해 당신은 피츠제럴드라는 이름을 만난다. 때마침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개봉하고 당신은 피츠제럴드의 원작 소설을 구입한다. 좋은 선택이다. 작품 해설과 작가 연보까지 꼼꼼히 훑어보는 타입이라면 헤밍웨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을 것이다(둘은 절친한 친구였다). 영화를 사랑하는 문화시민이 된 당신은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노상 술을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휘두르던 남자, 그게 바로 헤밍웨이다. 새삼스럽게 그의 이름을 검색한 당신은 그가 1961년 엽총자살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확실히 많은 걸 알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아직 당신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사후 50년이 지나면 저작권 보호가 풀린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올해가 그 해라는 사실이다. 참 오래 걸렸다. 마침내 당신 앞에 ‘소년소녀 세계명작’의 껍질을 벗은 온전한 헤밍웨이가 놓이기까지. 그리고 이제 당신은 알았을 것이다. 한 번도 헤밍웨이의 소설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런데 헤밍웨이가 너무 많다. 올해 출간된 헤밍웨이만 벌써 수십 종이다. 꼼꼼한 당신이라면 책을 펼치고 번역 문장을 일일이 비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예쁜 책이 언제나 읽기 좋은 책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꽂아 놓기는 더 좋은 법이다.



*


<보그 걸>이라는 패션지를 위해 쓰고 있는 5매짜리 원고. 첫번째 원고는 작품 선정에 나름 고심을 했지만(그리고 결과적으로 혹평을 하게 되었지만) 너무 '본격 비평적'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 구석이? 아마도 5매짜리 박스 기사에서 문단을 나눈다는 게 너무 젠 체 하는 것으로 보인 모양이다. 절치부심한 두번째 원고에서는 작품 내적인 이야기보단 작가에 대한 이야기와 수상을 둘러싼 에피소드가 주가 되었다. 다소 상투적인 표현들도 자제하지 않았고, 문단을 나누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무릇 자유기고가라면 갖추어야 할, 겸허한 자세다. 바로 오늘 아침에 넘긴 세번째 원고에서는 조금 더 커다란 도약을 감행한다. 재출간 열풍이 불고 있는 헤밍웨이에 대해 쓰기로 한 것. 네이버 백과사전의 작가 소개가 아닌 이상 5매 안에서 헤밍웨이에 대해 무슨 말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신간이 나온 것도 아니고, 어느 작품 하나에 대한 글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몇 가지 꼼수를 쓰게 되었는데 일단 하루키와 피츠제럴드와 우디 앨런 등의 이름으로 지면을 채우기로 한 것이다. 더불어 내가 몇 달 동안 이 잡지를 관찰하며 나름대로 파악한 '보그체'라는 것을 도입하게 되었는데, 세간의 평가에 의하면 일단 그것은 '버캐별러리'의 차원에서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겠으나, 나의 단어 사전은 미들스쿨 2학년의 수준에서 퍼즈된 관계로 문장 구조의 차원에서 그 일을 해내야 했으니, 나는 시종일관 '당신'을 호명하며 멋대로 단정하는 문장을 구사하기로 한 것이다. 그건 분명 보그체의 일종이다. 가장 인기 있는 종류는 아닐지 몰라도... 아무려나 나는 그렇게 했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나는 그저 한글 파일을 열었을 뿐, 나머지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마감시간이 했다. 내가 한 일은 그저 손가락을 움직인 것 뿐. 물론 문단을 나누지 않은 것만은 나의 선택이고 의지였다. 벌써부터 다음 달 원고를 걱정하는 나는 이토록 성실한 필자다.



*


bgm으로는 글렌 체크의 'vogue boys and girls'가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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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ai 2012-05-08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득키득 보그체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걸요. 정말 성실한 필자이십니다!

poptrash 2012-05-09 02:04   좋아요 0 | URL
하지만 정작 담당자 님께서는 원래 쓰던 대로 쓰라며... 흑흑

이매지 2012-05-08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갖 수식을 영단어의 나열로 채우는 것만 보그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도 그럴싸하네요.ㅎㅎ 5매면 짧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다룰 수 있군요. :)

poptrash 2012-05-09 02:05   좋아요 0 | URL
6매라고 생각하고 썼다가 부랴부랴 줄였더니 조금 어색한 부분들이 많이 있네요. 근데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 저도 놀랐습니다. 문단을 바꾸지 않는 이유가 있었어요.

... 2012-05-09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그체'란 단어에 완전 공감. 유치원부터 잡지와 함께 자라온 매거진키드, 동서양의 수많은 잡지를 섭렵해온 잡지홀릭자인 저는, 그 잡지 성격에 맞지 않은 칼럼/에세이들이 불쑥불쑥 나타날때마다 짜증나요 ㅜㅜ 바로 어제도, 모잡지 속에서 꽤 유명해지신 분이 쓰신 글이 홀로 동동 떠다니는 걸 보고 작가도 자신의 적절한 이미지 구현을 위한 자기관리가 필요하겠구나, 생각했어요. 본인이 기고하신 잡지 성격을 (잡지측에서 제목만 던져주었던 것일지도) 제대로 파악 못하신 그 분이 좀 성의없게 보였달까요. 보그걸은 타겟계층이 분명하니까 편하실듯.

아, 그런데 위에 쓰신 댓글처럼 담당자께서 원래 쓰던 대로 쓰라고 하셨다면, 호혹시 poptrash님의 분석이 잘못된 것이....? '보그체'의 정체는 다른 무언가가 아닐까요? ㅎ

poptrash 2012-05-10 23:39   좋아요 0 | URL
그그럴지도요... 저는 음악잡지 sub와 영화잡지 kino - film2.0 - movieweek를 끝으로 잡지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지라... 5매 안에 이것저것 욱여 넣는다는 게 쉽지 않네요. 좀 더 공부가 필요합니다. ㅎㅎ

Jeanne_Hebuterne 2012-05-09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맹보다 칼 라거펠트와 안나 윈투어의 시즌 투어에 관심 많은 독자 1인 여기 대령이오.
보그체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거든 언제든 저를 찾아주십시오. 보그는 5월이 가장 좋아요. 패션위크 스페셜 부클릿이 별도증정되거든요.(여기서부터, 보그체에 일가견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줄리언 반즈는 홍상수보다 날카롭고 우디 알렌보다 수다스러워요.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제발 내 말 좀 들어봐' 에서 그가 말하는 남자의 뒤끝, 속좁음, 좋은 기억력의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보다도 완벽했습니다. 정반대의 의미로.

poptrash 2012-05-10 23:40   좋아요 0 | URL
정말 홍상수보다 날카롭고 우디 알렌보다 수다스럽죠. ㅎㅎ 어쩌면 그게 오늘날 소설이 영화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어떤 지점인 건지도 모르겠네요. 역시 세상은 넓고 보그체의 고수는 많군요...

달사르 2012-05-09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월 예정의 헤밍웨이 작품이 기다려지는 건 팝님 덕분! ^^

from, 성실한 필자에 따르기 마련인 성실할 (예정인) 독자. 히힛.

poptrash 2012-05-10 23:4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사실 말로만 성실한데... 오늘도 하루종일 놀다 이제서야... 흑흑

비로그인 2012-05-10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보그>에도 글을 쓰시는군요. 전방위 저술가!ㅎㅎ 5매로 제한된 분량의 글을 쓴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닐 텐데요. 멋집니다^^

poptrash 2012-05-10 23:44   좋아요 0 | URL
<보그>는 아니고, 조금 더 어린 분들을 타깃으로 하는 <보그걸>이에요. 근데 정말 5매 분량의 글쓰기는 어렵네요. 그릴 것은 너무 많은데 하얀 종이가 너무 작아서 아빠 얼굴 그리다 보니 잠이 들고 말았어요 음음... 같은 느낌이랄까요. 전방위 저술가는 아니고, 그냥 온갖 잡스러운 걸 다 쓰는 그런 사람이죠. ㅎㅎ;

yerin 2012-05-23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헤밍웨이...
댄디한 음악이 흐르는 쿠바의 시크한 바 구석에서 홀로 다이키리와 모히토를 즐겼다던 그 올드맨.
하루의 피로를 상큼하게 씻어줄 그런 모히토를 서브해줄 핸썸한 웨이터는 이제 레어아이템이 되었지. 혹 발견한다고 해도 말하고 싶지 않아. 셀럽과 팔로워들이 모여드는 핫플레이스와 머스트 해브 아이템들에 나는 지쳤거든. 오늘 저녁, 나는 헤밍웨이에게 다이키리를 내어주던 시크한 바텐더와 체의 스피릿을 이어받은 프리한 플라멩고 뮤직이 하모니를 이룬 나만의 패러다이스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어. 훗, 동행이 필요하지 않냐고? 아니... 자칫 손이 베일 듯한 날카로운 나의 외로움과 차가운 아이스가 흘린 티어드랍이면 충분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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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starla 에게서 기쁜 소식 듣고 축하하러 왔다가 보그체를 보고 업되어서는 그만;;; 사실 올리는 페이퍼들은 늘 잘 읽고 있어요. 잘 지내고, 일도 잘 되어가길 바랍니다. 언젠가 '다이키리' 한 잔 해요. 축하해요. ^^

poptrash 2012-05-24 02:45   좋아요 0 | URL
아 보그체의 고수가 여기 계셨군요 제가 괜한 허세를... 저 며칠 전에 꿈꿨는데 yerin 님이 나오셨어요. 꿈 내용은 비밀입니다... 라기 보단 너무 뻔해서 못 쓰겠어요. 축하해주시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조금 쪽팔리기도 하고... 스마트폰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미천한 중생은 이만 줄입니다. 다이키리 한 잔 꼭 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