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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5일

지난 원고의 마지막을 너무 섣부르게 마무리한 것 같다. 특히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감히) 비틀어, “우리 모두는 고골의 콧구멍에서 나왔다”고 시부렁거린 부분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내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했을까? 찝찝한 게 마치 코를 풀다 코딱지가 입술에 묻은 기분이다. 그것도 모른 채 하루 종일 거리를 싸돌아다니다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기분이다. 


11월 27일

아무래도 그 글이 <외투>파를 자극한 모양이다. 누군가 내게 메일을 보내 <외투>의 진가도 알아보지 못하는 너 같은 놈은 코딱지나 다름없다고 했다. 물론 <코>파의 지원은 없었다. 내가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일이 <코>파와 <외투>파의 해묵은 논쟁을 다시 불붙게 하는 것은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일 중의 하나다. 어차피 똑같은 놈들이다. <죽은 혼>은 너무 길어서 읽지 않고, <검찰관>은 희곡 형식이라 읽지 않는다는 멍청한 놈들일 뿐이다. 


11월 28일

코딱지라니. 그거야말로 우리 모두가 콧구멍에서 나왔다는 이야기 아닌가? 적어도 나는. 물론 그게 누구 콧구멍인가는 여전히 논쟁의 소지가 있긴 하겠지만(어쩌면 신은 거대한 콧구멍이 아닐까?) 그나저나 자꾸만 콧물이 나온다. 인중이 쓰리다. 날씨 탓이다. 외투를 장만해야 한다.


12월 1일 

겨울 외투를 구경하기 위해 백화점에 들렀다. 형형색색의 패딩들이 늘어선 진열대를 보고 있자니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하나를 골라서 입어보았다. 점원이 조용히 웃으며 내게 옷을 입혀주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너무 가볍고 포근해서 그 자리에서 스르륵 잠들 뻔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 말은, 그런 곳에서 잠들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런 가격표를 보고도 태연히 잠들 수는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돈을 주고 옷을 사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때야 나는 점원의 옅은 웃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네가?’라는 웃음이었다.


나는 점원을 향해 크게 콧방귀를 뀌어주고 백화점을 나섰다. 바람이 찼다.


12월 2일 

잠이 오지 않는다. 외투 때문이다. 어제 입었던 패딩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눈을 감고 천천히 양을 세어 보았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이 작은 무리를 이루자 어디선가 양치는 소년이 나타나 양털을 깎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외투를 만들었다. 하얀색 패딩이었다. 잠깐만, 어제 내가 입어 본 건 ‘구스 다운’이었는데? 아무려나, 양털로 만든 패딩 또한 너무나 포근해 보여서 나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백화점에 가서 한 번 물어봐야겠다. 양털로 만든 패딩은 없냐고. 사실 ‘구스 다운’만 있으면 양털 따위 없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냥 호기심이다.


12월 3일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눈을 감으면 자꾸 거위와 오리와 양과 너구리와 여우와 곰과 알파카와 그 밖의 털과 가죽을 가진 동물들이라면 이름을 알 수 없는 것들까지 등장하는 바람에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동물의 똥으로 가득한 것처럼 무거웠다. 그걸 치우려면 여러 명의 사육사가 필요할 거 같았다. 하지만 내게는 사육사를 고용할 돈이 없었고, 하릴없이 스마트폰을 들었다. 지인들의 SNS를 구경하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너나없이 패딩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패딩을 지르고 지르고 지르고 질렀다. 왜 나는 지금까지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거지? 누나 가슴에 삼천 원쯤은 있는 것처럼, 누구나 옷장에 ‘구스 다운’ 하나쯤은 있는 모양이었다. 나만 빼놓고? 


나는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패딩을 검색해보았다. 백화점에서 본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색상도, 디자인도, 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콧물이 흘렀지만 닦는 것도 잊었다. 너무 많은 선택지는 나를 언제나 겁먹게 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디자인은 대동소이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검색 결과, 많은 업체들이 유명한 브랜드의 디자인을 도용하고 있다고 했다. 마침 그건 내가 백화점에서 입어본 바로 그 옷이었다). 휴, 다행이다. 그렇다면 선택의 폭을 현저히 좁힐 수 있는 것이다. 색상이야 선호하는 색상이 있으니(‘고독한 남자의 그레이’, ‘남자라면 네이비’ 그리고 ‘진짜 사나이라면 카키’) 문제는 가격이었다. 십만 원대에서 수백만 원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차이가 났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하나하나 꼼꼼히 비교하다보니 어느새 날이 밝았다. 그건 정말이지 넓고도 깊은 세상이었고, 나는 하룻밤 사이 전문가가 된 것 같아 어쩐지 뿌듯했다. 콧물은 멈추지 않았다.


12월 4일 

밤을 꼬박 샌 것으로 모자라 계속해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더니 눈알이 빠질 것 같다. <외투>파의 일원에게 새로운 메일이 왔다. 정말로 시급한 문학적 문제는 단 하나, 바로 외투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메일이었다. 알베르 카뮈라니, 도대체 이놈들의 독서는 어디에서 멈춘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물어보지 않아도 뻔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법 격식을 갖춘 것처럼 시작한 메일은 이내 유치한 비방이 되었다. “코 풀다 콧구멍이 헐어서 패혈증에 걸려 뒈질 놈”이라는 부분에서는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 잘못도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코를 푼 후)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고 사과한 뒤, 이어 작금의 패딩적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과연 오리지널의 가치가 몇 배가 훌쩍 넘는 가격차를 상쇄할 정도로 의미 있느냐고도. 진심으로 궁금한 문제, 차라리 당면문제였기에 최대한 정중하게 쓰려고 노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놈에게 답장이 왔다. 사뭇 정중한 어조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고 사과한 뒤, 녀석은 각 패딩의 충전재와 ‘필파워’의 차이를 조목조목 비교해갔다. 보기보다 깊은 지식에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사람은 글로만 봐서는 알 수 없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어떤 책을 읽느냐가 아닌 어떤 패딩을 입느냐에 달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상세한 비교와 달리 결론은 단순했다. 단순해서 오히려 더욱 믿음이 가는 결론이었다. 역시 패딩이라면 캐나다 거위로 만든 오리지널을 입어야 한다는 것. 녀석은 이렇게 덧붙였다. 


“P.S. 고골의 <외투>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길. 당신의 패딩적 고뇌를 해결해 줄 단 하나의 소설입니다.” 


12월 5일 

그래서 그렇게 했다. 다시 읽은 고골의 <외투>는 과연 놀라운 영감으로 가득한 소설이었다. 눈이 아파 아직 절반밖에는 읽지 못하긴 했지만(여전히 한 숨도 자지 못한 탓이다), 그럼에도 당면한 나의 패딩적 현실에 대한 해법을 일러주었다. 잊기 전에 정리해둔다.


주인공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불쌍한 양반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9급 관리다. 소설의 첫머리에서 고골은 거장다운 필치로 그를 묘사한다. 


아주 뛰어나다고 할 수 없고 키가 작은 그 관리는 약간 얽은 자국이 있는 불그스름한 얼굴에 눈에 띄게 시력이 안 좋았으며, 이마가 조금 벗겨지고, 양볼에 주름이 진 데다 치질 환자 같은 얼굴빛을 하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뻬쩨르부르그 기후 탓인 것을. 관등에 관한 한(우리나라에서는 우선 광등부터 밝혀야 한다) 그는 만년 9급 관리였다. 아시다시피 밟혀도 끽소리 한번 못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훌륭한 습성이 있는 온갖 종류의 작가들이 마음껏 놀려대고 마구 비꼬는 바로 그 9급이다. (‘외투’, <빼쩨르부르그 이야기>(조주관 옮김, 민음사 펴냄) 56쪽)


그가 언제 어떤 시기에 관청에 들어왔는지, 또 그를 관직에 앉힌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기억할 수 없었다. 부장과 국장이 수없이 갈리는 동안, 그는 언제나 같은 자리와 같은 직위에서 서기로사 겉은 업무를 되풀이하였다. 나중에는 그가 제복을 입고 이마가 벗겨진 모습을 한 채 9급 관리가 되기 위해 이미 완전한 준비를 하고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고 다들 믿게 되었다. 관청에서는 모두 그를 아무렇게나 대했다. (58쪽)


관청에서 그가 담당하는 업무는 문서를 정서하는 일이었다. 젊은 관리들이 그를 조롱하고, 일흔 살 먹은 주인집 노파하고 언제 결혼 하냐며 놀려대고, 눈이 내린다며 종이 부스러기를 그의 머리 위에 뿌리기도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해서 글을 써내려가는 것이다. 누군가 그의 팔을 건드리며 일을 방해할 때에야, 그제서야 “날 좀 내버려둬요, 왜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거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건 어쩐지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아서 나는 다시금 콧물을 훔친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소시민이다. 세상은 왜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가? 그가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는 말단 9급 관리라서? 작고 볼품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이마가 벗겨진 가난뱅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그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뿐이었다면, 그는 반쯤은 체념하고 반쯤은 즐기며 남은 인생을 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서를) 쓸 만큼 다 쓰고 나면 ‘내일은 또 무엇을 정서해야 하나?’하고 미리 내일을 상상해 보며 그는 미소 띤 얼굴로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400루블의 급료로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며 살아가던 한 인간의 평화로운 삶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고 아마 또 그렇게 순조롭게 말년을 맞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9급이든, 3급이든, 7급이든, 또 어떤 공직자이든, 관청 근처에도 안 가본 사람이든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닥치는 삶의 길에 뿌려진 갖가지 큰 불행이 없었다면 말이다. (62쪽)


문제는 그가 입고 있는 외투였다. 악명 높은 뻬쩨르부르그의 북풍에서 그가 의지하는 낡고 얇은 외투가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하도 덧대고 기워서 모양까지 이상해진 볼품없는 그것을 동료들은 “외투라는 점잖은 이름 대신에 실내복이라고” 불렀다. 바로 그것이 그를 동료들 사이에서 만만한 남자로, 마음껏 놀리고 조롱해도 되는 존재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외투적 현실이었다. 설상가상, 그것이 완전히 못 쓰게 되면서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의 고난이 시작된다. 망가진 외투적 현실. 다시 말해 ‘망함’. 놀란 그는 재봉사에게 달려가지만 주정뱅이 재봉사는 냉정한 외과의사의 시선으로 사형선고를 내린다. 


“안 되겠는데요, 못 고치겠어요. 옷이 완전히 망가졌네요!”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그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했다. 

“왜 안 된다는 거야, 뻬뜨로비치?” 그의 목소리는 거의 떼쓰는 어린아이 같았다. “겨우 어깨가 좀 닳은 것뿐인데, 사실 덧댈 만한 천이 있지 않나……?”

“그래요, 천 같은 거야 뭐, 얼마든지 있지요, 하지만 꿰맬 수가 없어요. 너무 심하게 삭아서 바늘을 갖다 대면 찢어질걸요.”

“찢어지면 어때, 또 즉시 기우면 되지.”

“덧댈 수가 없어요. 받쳐주는 게 아니라 닳아버린 옷감을 더 잡아당길 테니까요. 말이 양복지지 바람만 불어보세요, 금방 갈가리 찢어질 텐데요.”

“그래도, 어떻게 해보게. 정말, 이럴 수가 있나, 내 참……!”

뻬뜨로비치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요! 손댈 수가 없어요. 완전히 엉망이에요. 이제 겨울 추위도 다가오고 할 테니 잘라서 각반이나 만들어 쓰는 게 나아요. 추울 땐 양말만으론 부족할 테니까.” (67쪽)


재봉사는 그에게 이 기회에 새 외투를 장만하라고 말한다. 가격은 50루블짜리 석 장, 즉 150루블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의 잠이 달아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 또한 그런 남자인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콧물도 조금 흘렸을 것이다. 


나는 초조했다. 이 가련한 남자가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지, 아니, 극복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잠을 잘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가 꼭 나처럼 느껴…… 아니, 그건 아니다. 그냥 나는 그가 걱정되었을 뿐이다. 책을 읽는 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감능력, 그래, 공감능력이다.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주인공답게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그는 술주정뱅이 이웃에 대한 이해와 가계에 대한 산수로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뻬뜨로비치가 80루블을 받고도 일을 할 사람이라는 것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렇다 해도 그 80루블은 대체 어디서 가져온단 말인가? (*중략.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에게는 평소에 잔돈을 모아두는 저금통이 있었고, 몇 년간 모아온 그 돈이 대략 40루블 정도 될 거라는 계산을 한다.) 절반은 이미 수중에 있으나, 나머지 반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40루블이나 되는 돈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적어도 1년간만이라도 생활비를 줄이기로 결심했다. 저녁마다 마시던 차도 끊고, 저녁에 촛불도 켜지 않고 꼭 필요할 때는 주인 여자 방에 있는 촛불을 사용하면 된다. 길에서는 되도록 살살 걸어 다니고, 돌과 석판을 밟을 때는 조심조심 발끝으로 걷다시피 하여 밑창이 빨리 닳지 않도록 주의하고, 속옷이 빨리 해지지 않도록 세탁부에게 맡기는 횟수를 줄이고, 집에 돌아와서는 속옷 대신 오래됐지만 아직 쓸 만한 목면 가운만 걸치고 살기로 했다. (72쪽)


아, 이 불행한 사람! 이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콧물은 킁킁 남몰래 삼킬 수 있지만 눈물은 도로 삼킬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사실도. 고작 새 외투를 사기 위해 1년 동안이나 그런 궁상을 떨어야 하다니, 정말이지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놀라운 정신력을 발휘한다. 그야말로 정신의 승리다. 


솔직히 말해 처음엔 그런 내핍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차츰 익숙해지더니 어느덧 순조롭게 되었다. 나중엔 저녁을 굶는 것이 완전히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그 대신에 미래의 외투에 대한 끝없는 이상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정신적인 포만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 자신의 존재는 보다 완전해진 것 같았고, 마치 결혼한 것 같기도 하였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같았으며, 혼자가 아니라 일생을 함께하기로 한 마음에 맞는 유쾌한 삶의 동반자를 만난 것 같았다. 그 동반자란 다름이 아니라 두꺼운 솜과 해지지 않는 튼튼한 안감을 댄 외투였던 것이다. 그는 웬일인지 생기가 돌았고, 이제 스스로 목표를 정한 사람처럼 성격이 보다 강인해졌다. 그의 얼굴과 행동에서 보이던 불안과 우유부단함이, 언제나 망설이기만 하던 불확실한 특징이 이제 사라졌다. 때때로 눈에서 불꽃이 보였고, 머릿속으로는 아주 뻔뻔스럽고 대담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 옷깃에다가 담비가죽을 달아보는 것은 어떨까? (73쪽)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는 그런 궁핍한 생활을 이겨냈고, 생각보다 빨리, 고작 6개월 만에, 생각보다 많이 들어온 보너스의 도움으로, 필요한 80루블을 모두 모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새 외투를 구입한다! 윤이 반지르르하고 몸에도 꼭 맞는 따뜻한 새 외투가 그에게도 생긴 것이다! 만세! 


다음 날,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출근길에 나선다. 그는 마치 축제를 즐기듯 새 외투를 뽐내며 걸어갔다. 고골에 따르면 사실 새 외투가 좋은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따뜻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관청에 도착하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동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새 외투를 구경하며 따뜻하게 축하해줬다. 여전히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는 말단 9급 관리에 작고 볼품없는 외모와 이마까지 벗겨진 가난뱅이인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였지만, 새 외투를 구입함으로써 마침내 그들의 동료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들은 새 외투를 위해 기념 축배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까끼 아까끼예비치가 수줍게 거절하자 계장대리가 대신 나서 축하 파티를 열어주기로 했다. 바야흐로 새 외투와 함께 새 인생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여기까지 읽었다. 그리고 나는 <외투>파의 친절한 사내가 내게 하려던 말을 이해했다. 삶을 바꾸고 싶다면 패딩을 바꿔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좋은 패딩을 사야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나의 결단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게는 돈이 없다.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처럼 청승을 떨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걱정 없다. 내게는 신용카드가 있다. 12개월 할부로 결제하면 그만이다.


12월 6일

간만에 단잠을 잤다.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멋진 꿈도 꾸었던 것 같다. 간만에 생기가 돌았고 강인해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집을 나섰다. 바람이 찼지만 그건 나를 오히려 더욱 들뜨게 했다. 웬일인지 콧물도 흐르지 않았다. 


백화점에는 예의 점원이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일전에 입었던 그것을 다시 한 번 입혀주었다. 똑같은 미소와 함께. 하지만 이제 내게 그의 미소는 더없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의 친절한 도움으로 패딩을 입으며 왈칵, 눈물이 터질 뻔했다. 며칠 동안 내가 그리던 패딩적 이상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여전히 포근하며 따뜻했으며,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처럼 가벼워 마치 정말로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비유적 의미에서의 비행이라면 실제로 가능할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외투>의 교훈이었다. 


지체할 것 없다. 나는 점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결제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그가 물었다. “12개월로 해주세요.” 내가 말했다. “보너스라도 받는다면 6개월로 끊어도 되겠지만, 제가 프리랜서라서.” 그러자 그가 예의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손님은 분명 <외투>를 읽으셨겠네요. 그렇죠?”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며 그렇다고 했다. 그는 내게 패딩이 든 쇼핑백을 건네며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손님, 혹시 그 결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명색이 서평가인데 끝까지 읽지 않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12월 6일 (2)

참지 못하고 지하철 화장실에 들러 패딩을 입었다. 한시라도 빨리 새로운 패딩적 현실을 느끼고 싶었다. 과연, 고골이 옳았다. 새로운 패딩에는 두 가지 장점이 있었다. 하나는 더럽게 따뜻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럽게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지하철에서는 땀이 났지만 벗지 않았다. 앞으로는 사우나를 갈 필요가 없을 것 같다. 


12월 6일 (3)

집에 돌아오자마자 SNS에 ‘착샷’을 올렸다. 친구들의 축하 멘션에 일일이 답을 해주다보니 어느덧 밤이 깊었다. 내일은 ‘요설’ 마감이 있는 날이라 일찍 잠을 자야만 했다. 하지만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불을 켜고 <외투>를 마저 읽었다. 그런데 잠깐, 뭔가 이상하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결말이 아니었다. 나는 이런 걸 기대한 게 아니었는데……. 잠깐 생각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12월 7일, 마감 당일

밤새 <외투>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읽고 또 읽고 혹시라도 내가 잘 못 읽었나 싶어 다시 읽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당연히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의 앞에 새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새로운 외투적 현실과 함께, 보다 따뜻하고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동료들의 축하를 받고, 조금 더 사교적이 되어 주말이면 함께 즐거운 시간도 보내고, 그러다 여자를 소개받아 결혼도 하고, 그런 삶을 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었다고. 


새 외투를 입고 출근한 그날, 그러니까 동료들의 축하를 받고 축하 파티까지 열게 된 그날,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외투를 강탈당한다. 파티 장에서 늦게까지 머물다 집으로 돌아오던 그를 괴한이 덮쳤다. 그들은 무자비하게도 그에게서 외투를 빼앗아갔고, 그는 잠시 기절한 후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후두염에 걸렸다. 너무 낙담한 나머지 멍하니 입을 열고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죽어 유령이 된다. 밤마다 거리를 떠돌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외투를 빼앗는 불쌍한 유령이……. 그것이 그의 외투적 미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패딩적 미래는 무엇이란 말인가? 


같은 날, 마감 시한을 얼마 남기지 않은 몇 시쯤

메일 알람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콧물이 흘러내려 하마터면 질식사해 죽을 뻔했다. 아니지.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나는 코를 세게 풀었다. 인중이 또 쓰렸다. 

두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하나는 프레시안 담당기자에게서. ‘^^’라는 이모티콘과 함께 원고를 언제 줄 것인지 묻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아니, 과연 시작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다른 메일은 <외투>파의 일원에게 온 것이었다. 그는 내게 옷은 마음에 드는지, 따뜻한지 묻더니 곧이어 물론 마음에 들고 따뜻하겠지 자답했다. 이놈은 미친놈인가? 그런데 이 녀석이 내가 새 패딩을 산 것을 어떻게 알지? 무언가 이상했다. 나는 계속해서 메일을 읽었다. 녀석은 내가 12개월로 패딩을 구입한 것까지 알고 있었다. 녀석이 바로 백화점의 점원이었던 것이다! 녀석은 정중하게, 그러나 어딘가 조롱하는 투로, 메일을 마무리 지었다. 새로운 패딩적 현실에 적응하시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P.S. <외투>는 다시금 끝까지 읽어보셨나요? 부디 그러셨기를 바랍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몇 시인지도. 아직 마감은 넘기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시(時)

아까부터 전화기가 계속 울린다. 처음에는 카톡이, 다음에는 문자가, 그리고 다음에는 전화가 왔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마감을 묻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받을 수 없다. 없고 말고. 새로운 나의 패딩적 현실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나의 패딩적 미래는 어떤가? 그러니까 앞으로 12개월 동안, 할부금을 갚기 위해 내가 감내해야 하는 궁핍은 무엇인가? 앞으로 몇 개의 원고를 더 써야 하는가? 겨울은 고작 세 달 남짓일 뿐인데? 원고를 써야 할부금을 갚을 수 있는데, 당장 마감을 넘기지 못하면 어떻게 하자는 건가? 얼마나 많은 청탁과 원고가, 얼마나 많은 거위가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마감과 사과가, 얼마나 많은 헛소리가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거위가 필요할까? 


알 수 없는 나는 패딩을 입는다. 따뜻하고 포근한 패딩 속에 숨어 이 모든 겨울과 마감과 기나긴 할부가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 끝 -


















PRESSIAN BOOKS 169호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1206181247&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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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연재 1년을 맞이한 요설 2013년 마지막 특별호. 일기의 화자와 상관없는 나는 엊그제 인터넷을 통해 패딩을 구입했고 패딩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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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2-11 0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날이 춥던데 패딩 제대로 입어볼 기회이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연말 모임은 조심하셔야 할 것 갓습니다.
담뱃불 떨어져서 홀랑 타는 경우도 있더라고요..헤헤..

poptrash 2013-12-11 22:20   좋아요 0 | URL
고골이 말한 그대로, 따뜻하고 기분이 좋다는 두 가지 장점이 있더라고요. 덕분에 추운줄도 모르고 즐겁게 쏘다녔습니다 ㅎㅎ

왕재윤아빠 2014-01-10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골 작품 중 코와 외투를 인상 깊게 보았는데, 패딩 (광인)이야기까지 씨줄과 날줄이 엮이듯 너무 잘 쓰신 서평, 일기, 재창작 소설 잘 봤습니다.

사무실에서 단숨에 읽어내려갔습니다. 참고로 저 패딩 만들어 파는 회사 다닙니다.
보는 내내 점원처럼 씨익 웃었습니다.

저도 고골 글을 보고 쓴 '잠바' 라는 습작 소설이 있어 보내드리고 싶은데, 관심 있으시면 말씀 부탁 드립니다. 읽어 주신다면 큰 기쁨이겠습니다.

poptrash 2018-03-15 08:22   좋아요 0 | URL
앗, 패딩 회사에 다니신다니, 이거 대단한 우연이네요. ㅎㅎ

제가 그럴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신통한 말씀도 드릴 순 없겠지만 보내주시면 즐겁게 잘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토끼 2014-07-18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마다 사도 사도 또 사게 되는 외투네요..정말 재정에 빵꾸나는 짓..ㅜ

poptrash 2014-07-29 01:26   좋아요 0 | URL
사계절... 저주한다... ㅠ
 

제9장 거인국에 남겨진 걸리버의 수난이 그려진다. 거대한 젖가슴에 관한 이야기와 걸리버가 떠나온 대한민…, 아니, 유럽에 대한 거인왕의 비판이 쏟아진다. 



1702년 6월 20일, 걸리버는 새로운 항해에 나선다. 소인국에서 돌아온 지 고작 두 달 만의 일이다. 중학교에 다니는 전도유망한 아들과 아직 어린 딸,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를 두고 떠나는 그의 나이는 마흔. 그러니 서둘러 집을 나서는 이유 같은 건 묻지 않기로 하자.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좀처럼 퇴근할 생각을 하지 않는 부장님에게 이유를 묻는 게 실례인 것과 마찬가지다.


“운명의 여신에게서 험하고 불안정한 생활을 점지 받은” 걸리버의 항해는 이번에도 순탄치 않았다. 처음엔 배에 물이 새더니 수리를 위해 정박한 곳에서 선장이 학질에 걸리고, 이제 겨우 항해를 재개하나 싶던 차에 폭풍에 휘말린 것이다. 항로에서 2400킬로미터나 벗어난 곳으로 떠밀려 간 어드벤처 호. 낯선 바다를 헤매던 그들은 커다란 섬을 발견하고, 물을 찾기 위해 열 명의 무장 선원을 보낸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함께 가기를 자청한 걸리버는 과연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낸다. 자신보다 12배나 큰 거인들을 발견한 것이다. 


다른 선원들이 물을 찾는 동안 멀리 떨어진 해안가를 서성이던 걸리버는 거인들의 섬에 홀로 남겨진다. 과부가 될 아내와 아버지를 여의게 될 아이들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긴 걸리버. 떠나기 전에도 그런 생각을 했으면 오죽 좋았겠냐만, 절절한 가족애는 언제나 절체절명의 순간에만 솟아오르는 법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진정으로 걸리버를 사로잡은 생각은 따로 있었으니 다름 아닌 소인들의 나라, 릴리퍼트의 추억이다. 


작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존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나는 블레훼스크의 함대를 한 손으로 끌고 올 수 있었다. 몇 백만 명이 그들의 후손에게 증언한다고 한들 좀처럼 믿을 수 없을 만한 기적들을 나는 이룩했던 것이다. 릴리퍼트의 후손들은 이 이야기를 아마도 믿지 않을 것이다. 릴리퍼트의 작은 사람 하나가 영국에 온 것처럼, 이 나라에서 나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보일지에 대해 생각하니 무척이나 억울했다. (<걸리버 여행기>(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펴냄) 106쪽)


이제 우리는 걸리버가 그토록 항해를 서두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작은 사람들의 나라에서 제법 거물 행세를 하던 걸리버다. 비록 눈칫밥을 먹긴 했지만 누구보다 커다란 ‘남성’으로서의 우월감 속에서 삼십 대의 마지막 몇 년을 보냈다. 그러니 평범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결국 사이즈가 문제였던 것이다. 


비탄에 잠겨있는, 한때 거대했으나 다시 평범해졌고 어느새 쪼그라든 남성을 발견한 것은 시골의 한 농부다. 작지만 위험한 동물을 발견했을 때처럼 잠시 망설이던 농부는 엄지와 검지로 걸리버의 허리를 잡고는 관찰하기 시작한다. 압도적인 존재와 마주한 불혹의 걸리버는, 비슷한 경우에 많은 중년의 남성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심약한 성정이 다시금 그의 목숨을 구한다.


큰 사람이 나의 옆구리를 세차게 잡고 있었으나 그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떨어지게 될까 봐 무척 두려웠다. 그래서 2미터 정도의 공중에서 탈출을 위한 몸부림은 전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내가 했던 행동이라고는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자세로 두 손을 모은 채, 지금 처한 상황에 어울리도록 겸손하고 서글픈 어조로 몇 마디 말을 하는 것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큰 사람은 나의 목소리와 행동에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특히 내가 사람처럼 분명한 발음으로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매우 놀라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108쪽)


걸리버를 집으로 데려가는 농부. 처음에는 영국 여자가 두꺼비나 거미를 보고 놀라듯 소스라쳤던 농부의 아내도 점차 그를 귀여워한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작고 약한 것을 예뻐하는 여성적인 취향 탓으로 돌린다면 걸리버의 노고를 무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식사에 앞서 정중한 영어로 “부인의 건강을 위하여!”라고 외치거나,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모자를 예절 바르게 머리 위로 흔들며 만세 삼창을 하는 등 걸리버 또한 자신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으니, 그는 진정 사랑받는 법을 아는 남자였던 셈이다.


그렇게 거인국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장난꾸러기 막내아들과 암소보다 세 배는 큰 고양이, 코끼리를 네 마리나 합쳐 놓은 것만큼 큰 개가 함께하는 아슬아슬한 생활이었지만 걸리버는 조금씩 적응해간다. 자진해서 농부를 주인이라고 부르는 그의 모습에서는(“나는 이제부터 농부를 주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참으로 충직한 영국인의 표본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어려움이 없을 리 없다. 그중에서도 그를 가장 괴롭히는 건 유모의 젖가슴이다.


솔직히 나는 이제까지 유모의 거대한 젖가슴보다 더 구역질나는 물체를 본 적이 없었다. 궁금한 독자들에게 젖가슴의 크기와 모양 그리고 색깔에 대해 무엇인가 알려 주어야 할 텐데, 나는 그 젖가슴과 비교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가슴에서 180센티미터 정도 솟아오른 것이었다. 젖가슴의 둘레는 5미터나 됐다. 젖꼭지는 내 머리 크기의 절반 정도 되었고, 양쪽 젖가슴의 빛깔이며 그 주변에 나 있는 여러 개의 점과 여드름, 주근깨들이 무척 지저분하여 그보다 더 구역질 날 수 없을 지경이었다. (113쪽)


순식간에 단란한 시골 가정의 애완동물로 전락한 걸리버.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이 있을까? 물론 있다. 릴리퍼트에서 표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여전히 살아있고, 살아있는 한 생리적인 욕구를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대변이 몹시 급해서 어쩔 줄 몰랐다. 아무리 급해도 이것만은 누가 대신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농부의 아내에게 마루에 내려놓아 달라는 뜻을 전하려고 애를 썼다. 그녀는 나를 마루에 내려놓았다.


나는 부끄러워 도저히 입으로 얘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문을 가리키며 몇 번이고 허리를 굽히는 시늉을 했다. 친절한 농부의 아내는 노력한 끝에 드디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 손으로 다시 나를 잡은 그녀는 정원으로 가서 놓아주었다. 나는 200미터 정도를 걸어서 구석으로 갔다. 농부의 아내에게 나를 보거나 따라오지 말라고 손짓을 하고는 괭이밥 잎사귀 사이로 몸을 숨기고 일을 보았다. (116쪽)


하지만 걸리버가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얼마나 고상한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은 걸리버에게 영광 있으리. 그리고 그것을 잊지 않고 언급하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분변학적 취향에도 마땅한 영광이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어리석고 천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것이 아주 사소한 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매사를 깊이 사고하려는 현명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야말로 자신의 사고와 상상력을 깊고 풍부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개인이나 사회인으로 생활하는 데 있어서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믿는다”는 말은 한번쯤 숙고할 가치가 있다. 당신이 소설가를 꿈꾼다면(물론 아니기를 바란다) 더더욱. 제 아무리 고뇌에 가득 찬 중산층 남성이라 한들, 사람은 똥을 싸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법이다.


얼마 후,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작은 동물이 있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퍼진다. 걸리버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오는 이웃들. 이에 주인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장에 걸리버를 데려가 관람료를 받고 쇼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걸리버는 장을 돌아다니며 몰려든 구경꾼들에게 연설하고, 골무에 술을 담아 “모두의 건강을 위하여”라고 소리치며 건배를 청하고, 기사를 흉내 내 칼을 휘두르는 한편 밀짚을 상대로 창술을 펼치는 식의 공연을 하루에도 열두 번씩 되풀이하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쇼비즈니스의 시초라 하겠다.


무리한 일정 탓에 걸리버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뼈만 남을 정도로 앙상하게 야위었지만, 주인은 우리의 작은 스타가 죽기 전에 한몫 챙기겠다는 일념으로 그를 더욱 혹사시킬 뿐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했던가? 연예 기획사의 운영 방침은 300년 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어느덧 소문은 왕궁까지 퍼져 걸리버는 왕비 앞에서 특별 공연을 펼친다. 왕비는 걸리버가 마음에 들었고, 곁에 두기를 원했다. 어차피 얼마 안 가 걸리버가 죽을 거라고 확신한 농부는 기꺼이 그를 바친다. 물론 두둑한 사례를 챙기는 것은 잊지 않는다.


그리하여 왕궁에서의 생활이 펼쳐진다. 릴리퍼트에 이어 다시금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 걸리버. 그는 특유의 매력을 뽐내며(“조그마한 것이 오밀조밀하게 먹는 모습만 봐도 재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내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너그럽고 지적인 왕은 낯선 나라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작은 ‘생물’과 이야기하기를 즐겼고, 걸리버는 그에게 유럽의 관습, 종교, 법률, 정치, 학문 등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러나 내가 무역과 육지나 바다에서의 전쟁, 종교 분열, 그리고 정당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을 때 왕은 지금까지 받았던 교육에 의한 편견으로 좀처럼 나를 신용하려 들지 않았다. 왕은 오른손으로 나를 잡고 왼손으로 등을 두드리며 한바탕 크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그대는 휘그당인가 토리당인가’(* ‘그대는 새누리당인가 민주당인가’하고 묻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하고 농담조로 물었다. 왕은 로열 서브린 호의 돛만큼 커다란, 하얀색의 왕 홀을 가지고 뒤에 기립해 있는 대신을 향해 몸을 돌리고 ‘인간의 위대함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와 같이 작은 벌레도 그것을 흉내낼 수 있다니 말이다. (132쪽)


사랑하는 조국이 모욕을 당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지만 별 수 없다. 그것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일들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를 분노하게 하는 건 왕궁의 난쟁이다. 키가 고작 9미터도 되지 않았던 그 작은 인간은 왕비의 총애를 빼앗긴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걸리버를 괴롭혔던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것들을 일일이 늘어놓아 선량한 독자들을 괴롭힐 생각은 없다. 하지만 몇 가지 사례는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이를테면 


시녀들은 가끔씩 나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발가벗기고는 가슴에 꼭 껴안아 주기도 했는데, 나는 그것이 아주 싫었다. 그녀들의 피부에서 아주 역겨운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148쪽)


라거나, 


시녀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쾌활하며 장난을 좋아하는, 열여섯 살짜리 시녀는 때때로 나를 가슴 위에 올려놓고 자신의 젖꼭지를 타고 앉게 했다. 온갖 짓궂은 장난을 당했지만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149쪽)


같은 부분이다. 인용하는 사람에게도 즐거울 권리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쉽게도 걸리버는 언급을 자제하고 있지만,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는 독자가 있다면 박민규의 단편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단편집 <더블>(창비 펴냄)에 수록)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자동차를 팔기 위해 급기야 화성(Mars)까지 간 세일즈맨이 거대한 외계 ‘복부인’을 만나는 이야기다. 차를 본 그녀가 “저거… 꼭 좆같이 생겼네”라고 콩떡같이 말하자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차를 한 대라도 더 팔아야만 하는 주인공이 찰떡같이 알아듣고 “갑니다 누님!”이라고 외친 후, 그대로 차를 몰아 “전진 후진… 전진 후진… 좌삼삼 우삼삼…” 한다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21세기 버전의 <걸리버 여행기>라 하겠다.


(이쯤에서 나는 쓰기를, 당신은 읽기를 잠시 멈추는 것도 좋겠다. 어쩐지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충분히 상상하셨는지? 그럼 다시 걸리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지만, 사실 2부의 핵심은 걸리버와 왕의 대화다. 비록 똑똑한 벌레 취급을 당하긴 하지만, 걸리버는 인류를 대표해 왕에게 유럽의 문화를 이해시키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느 날, 용기를 내 “이성은 몸이 크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로 유럽에서는 키가 큰 사람들이 거의 이성이 부족하다”고 허두를 꺼낸 걸리버는, 161쪽부터 166쪽까지 무려 5페이지에 걸쳐 유럽의 사회제도와 역사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물론 나는 자세한 내용을 시시콜콜 늘어놓을 생각이 없는데, 궁금한 독자는 정치/사회 분야의 뉴스를 검색할 일이다.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동행한 어느 수행원의 기발한 돌출행동에 관한 뉴스 같은 것이 보인다면 제대로 찾은 것이다.


한편 걸리버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린 왕은 사려 깊은 미소를 짓고는 걸리버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한다.


나의 조그마한 친구 그릴드릭(* 난쟁이라는 뜻), 그대는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아주 놀랄 만한 찬사를 했습니다. 그대는 의원의 자격을 갖추는 데 있어 무지와 태만, 부도덕이 적절한 요소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대의 나라에서는 온통 법을 악용하고 왜곡하며 회피하는 일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자들이 있으며, 이들에 의해 법이 가장 잘 설명되거나 해석되고 있으며 적용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잘 알려 주었습니다.


만들었을 당시에는 아주 좋았을 제도들이 그대의 나라에서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하다가 이제는 부패되어 완전히 희미해지거나 제멋대로 변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대의 말을 들으면서 알게 된 것인데, 어떤 지위에 오르는 데 가장 합당한 이가 그 지위를 갖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덕망으로 귀족이 되거나, 사제들이 학식으로 승진하는 것 같지도 않으며, 용기 있는 행동으로 군인이 된다거나, 정직하기 때문에 재판관이 영달을 하고, 국가를 사랑한다고 국회의원에 선출되거나, 지혜가 있다고 해서 국왕의 고문들이 총애를 받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삶의 많은 부분을 여행하는 일에 바친 그대는, 그대의 조국이 저지른 많은 악덕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고 나는 믿고 싶습니다.


그대의 이야기와 내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종합해 보았을 때, 그대의 민족 대부분이 세상의 표면에 기어 다니게 된 생물 중 가장 유해하고 밉살스러우며, 작은 벌레들의 모임인 것으로 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166~167쪽)


그런 왕의 인내심도 때론 바닥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걸리버가 화약과 포탄에 대한 말을 꺼냈을 때. 왕의 환심을 사려는 소박한 마음에 적절한 재료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성벽을 무너뜨리고 불순분자들을 제압할 수 있는 대포를 만들어 바치겠다는 걸리버에게 왕은 노여움을 감추지 않고 말한다. 그처럼 무기력하고 천한 벌레가 어쩌면 그렇게 잔인한 생각을 할 수 있냐며, 또한 파괴적인 기계가 만들어 내는 피와 살육의 장면을 어떻게 그리 태연하게 이야기할 수 있냐며, 목숨이 아깝다면 다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다. 걸리버는 그런 왕의 반응이 이상하기만 하다.


편협한 원칙과 근시안적인 안목의 이상한 결과였다. 존경과 사랑과 숭배를 받을 수 있는 재능과 원대한 지혜와 깊은 학문을 갖춘 데다 훌륭한 통치력으로 국민에게 찬양받고 있는 국왕이, 이처럼 가엾고 불필요한 망설임 때문에(이러한 경우는 유럽에서 거의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국민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에 대한 절대적인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손안에 들어왔는데도 거절을 한 것이다. (170쪽)


하지만 왕을 설득할 수 있는 시간이 걸리버에게는 없었다. 어느 날, 걸리버의 집(이라기보다는 상자)을 독수리가 물고 날아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독수리는 거북이의 껍질을 깰 때 하는 것처럼 상자를 바위에 떨어뜨려 걸리버의 몸을 삼키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운명은 걸리버를 위해 더 많은 고난을 남겨두었으니,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다른 독수리들이 먹이를 빼앗으려 덤벼드는 바람에 상자는 바다에 떨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걸리버는 그곳을 지나던 배에 의해 구조된다.


마침내 자신과 같은 인간들을 만나게 된 걸리버. 그런 그가 처음 느낀 감정은 다름 아닌 놀람이었다. 이렇게 작은 사람들이 있다니, 그것도 이렇게 많이. 어느새 큰 사람들의 나라에 익숙해진 걸리버의 눈에 그들은 이제까지 보았던 것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고 형편없는 생물로 보일 뿐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마주치는 집과 나무, 가축 그리고 사람들이 너무 작아 릴리퍼트로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모든 것들이 브롭딩낵 국왕의 말처럼 나약하고 무기력한 주제에 밉살스러운 벌레처럼 여겨졌다. 동족 혐오. 큰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걸리버의 내부에서는 무엇인가가 영영 변해버렸고, 다시는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걸리버는 또 다시 바다를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프레시안 북스 2013. 5. 10.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510155756&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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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5-14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진짜 재미있겠는데요. 읽어봐야겠습니다.
아, 이거 딱 내 스타일이에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제8장 걸리버가 항해한 대한민…, 아니, 소인국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라블레를 떠올리게 하는 몇몇 분변학적 장면이 언급된다.



서른일곱의 레뮤엘 걸리버가 문제의 항해를 떠난 것은 1699년 5월 4일의 일이다. 그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어엿한 외과 개업의였지만, 그런 현실도 여행을 향한 그의 오랜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역마살이 끼었다고나 할까. 존재에 깊이 새겨진 잔인한 운명이었다.


11월 15일, 앤틸로프 호의 선원들은 곤경에 처한다. 남태평양에서 동인도를 향해 순조롭게 항해하던 도중 예상치 못한 폭풍에 휩쓸린 것이다. 항로에서 벗어난 그들은 남쪽 위도 30도 2분 근처까지 떠밀려가야만 했다. 열두 명의 선원이 과로와 영양실조로 죽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하기야 건강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앤틸로프 호는 얼마 못 가 사위를 가득 채운 짙은 안개 속에서 암초에 부딪쳐 산산조각 날 예정이었으니까. 여섯 명의 선원들이 보트를 타고 탈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여섯은 너무 많다.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신의 계획에 따라,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오직 한 사람, 서른일곱의 외과 의사뿐이었다.


릴리퍼트의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자연은 그들에게 익숙한 것이었고, 그들은 순응할 줄 알았다. 제 아무리 세상을 날려버릴 듯 사나운 폭풍이라도 그 뒤에는 자비로운 태양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태양과 함께 거대한 공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어질 비극을.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마주했을 때 


그날 인류는 떠올렸다 

놈들이 지배하던 공포를 

새장 속에 갇혀 있던 굴욕을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한, 아주 거대한 괴물이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곳이 1699년의 릴리퍼트가 아닌, 845년의 시간시나 구였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걸리버가 사람들을 마구 잡아먹는 충격적인 장면과 함께, 그에게 어머니를 잃은 한 소년의 복수와 성장의 드라마를 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앞에 놓인 것은 화제의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이 아니다. 동화책으로, 명작 만화로, 잭 블랙 주연의 영화로 지겹게 보았던 <걸리버 여행기>다. 신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역사하시고, 세상은 우리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걸리버에 비하면 운이 좋은 편이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높이 떠올라 있었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는 동안 나의 두 팔과 다리가 땅에 단단히 붙들어 매 있었던 것이다. 길면서도 숱이 많은 나의 머리카락도 풀리지 않도록 묶여져 있었으며, 겨드랑이부터 허벅지에 이르는 온몸 전체에 몇 줄의 가늘고 긴 줄이 얽혀있었다. 하늘을 향해 누워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햇볕이 뜨거워질수록 점점 눈이 부셨다. 주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똑바로 누운 채 묶인 자세로는 하늘밖에 볼 수 없었다. (<걸리버 여행기>(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펴냄) 19쪽)


세상은커녕 자신의 몸조차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걸리버다. 불과 15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키의 사람들에 의해 자신이 옴짝달싹 못하게 묶여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경악한다. 비명을 지르는 걸리버 — 위협적인 거인이 되기는 애당초 틀려먹은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심약한 성정이 그를 구했으니, 그를 경계하며 바늘같이 조그마한 화살을 날려대던 릴리퍼트 인들도 그가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살려두기로 한 것이다.


곧바로 릴리퍼트의 수도로 옮겨진 걸리버. 쇠사슬에 묶인 채 어느 사원에서 영어의 삶을 시작한다. 가장 큰 건물이라고 해도 그에게는 고작해야 고급형 개집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다. 새장 속에 갇힌 건 소인이 아닌 거인이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온 릴리퍼트 국민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걸리버.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이 있을까? 물론 있다. 그가 여전히 살아있고, 살아있는 한 생리적인 욕구를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대변을 본 지가 이틀이나 지났으니 아주 당연하다. 다급한 마음과 부끄러움 사이에서 나는 무척 난처했다. 생각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은 사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안으로 기어들어가 문을 닫은 후 발에 묶인 쇠사슬이 미치는 구석에서 대변을 보았다. 그러나 내가 이처럼 불결한 행동을 한 것은 이번뿐이었다. (29쪽)


과연 그날 이후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아침 일찍 소인들의 눈을 피해 사원 밖으로 나가 일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항해도 그의 장 건강을 해치진 못했으니 잘된 일이다. 매일 거대한 똥냄새를 맡아야 하는 인근 주민들에게도 잘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불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주민들이 민원을 넣은 탓인지 이내 그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두 명의 시종이 배치된 것이다. 낯모르는 두 사람을 대신해 말하지만, 먹고 사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다. 비극이다.


하지만 걸리버는 잘 먹었다. 릴리퍼트의 수학자들은 그의 키가 자신들의 12배이고, 따라서 1728명 분의 음식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문과대 출신으로서 그들의 계산에 아무런 불만도 없음을 밝혀둔다. 국왕은 그를 먹이기 위해 칙령을 반포,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 900미터 이내의 마을에 식재료를 바치도록 했다. 시민들은 매일 아침 여섯 마리의 소와 40마리의 양, 그리고 고기와 같은 비중의 빵과 마실 것 등을 납품했고, 국왕의 재무성에서 비용을 지불했다. 제법 배포가 큰 왕이었던 셈이다.


다른 국민들보다 (걸리버의 손톱만큼) 크고 당당한 체구를 자랑하는 국왕의 배포는 남다른 인사 검증 시스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릴리퍼트에서 관직에 오르려는 자는 줄타기를 해야 하는데, 약 30센티미터의 높이에 팽팽하게 매달린 60센티미터 길이의 줄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가장 높이 뛰어올라 국왕을 즐겁게 하는 자만이 요직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왕의 남자>에 따르면 연산 또한 이와 비슷한 시스템을 운영하지 않았던가. 유례없는 ‘인사참사’로 고민하는 박근혜 정부에서도 한번 검토할 만한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고전이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한편, 공손하고 예의바른 행동을 통해 신임을 얻은 걸리버에게 국왕이 고민을 털어놓는다. 평화롭게만 보이는 릴리퍼트 왕국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높은 굽의 구두를 신는 당파’와 ‘낮은 굽의 구두를 신는 당파’간의 격렬한 당쟁으로 국정이 마비될 지경이며, 외부적으로는 이웃 나라로부터 침략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계란을 먹을 때 좁은 방향부터 깨는 릴리퍼트와 달리 넓고 둥근 방향으로 깨는 이웃 나라 블레훠스크가 왕국 내부의 ‘종블’ 세력들을 이용해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했다.


내란은 언제나 블레훠스크가 선동했으며, 진압이 되고 난 다음 반란을 주도했던 주동자들은 언제나 그 왕국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그동안 1만 1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좁은 방향의 끝부분으로 계란을 깨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던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수백 권의 두툼한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그러나 넓은 방향의 끝부분을 깨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출판과 판매의 자유가 금지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법에 의해 그들은 공직에도 취임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 계란의 넓은 방향 끝부분을 깨어 먹는 파에서 망명을 한 사람들은 블레훠스크 국왕으로부터 많은 신임을 받고 있으며, 또한 고향인 릴리퍼트에 있는 자기 파 사람들로부터도 많은 도움과 격려를 받고 있기 때문에 지난 36개월 동안 두 나라 사이에는 언제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54~55쪽)


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아닌가? 멀게는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을 것인지,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을 것인지를 가지고 대립했다던 소문도 있는) 조선의 붕당정치에서부터 가깝게는 남쪽과 북쪽을 둘러싼 여러 문제에 이르기까지… 에이, 아마 기분 탓일 것이다. 그러니 다시 걸리버의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자. 국왕은 걸리버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자유를 제공하는 대신, 릴리퍼트를 위해 차세대 1인승 주력 전투기 랩터 스텔스를 작전에 투입… 아니, 블뤠스크로 가서 그들의 함대를 무력화시켜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걸리버는 그렇게 한다. 730미터 거리의 해협을 걸어가 수많은 화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군함 50척을 나포해온 것이다. 하지만 국왕은 만족하지 않는다.


국왕의 야망이란 끝이 없었다. 아마도 그는 블레훠스크의 영토 전체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어 다스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망명을 가 있는, 계란의 넓은 끝부분을 깨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모두 처치하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계란의 좁은 끝부분을 깨뜨리도록 강요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국왕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정치 문제로 일어나는 많은 분쟁을 일깨워 줌으로써 국왕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또한 자유롭고 용감한 국민을 노예로 만드는 일을 도울 수는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61쪽)


순식간에 병력 대부분을 잃은 블레훠스크는 화평을 요청한다. 릴리퍼트 국왕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이 성립되고, 업무를 마무리한 대사들은 걸리버를 찾는다. 블레훠스크에 한 번 방문해줄 것을 부탁하는, 호의적인 만남이었다. 걸리버는 릴리퍼트 국왕에게 블레훠스크를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하지만 국왕의 부탁을 거절한 걸리버는 이미 궁정 내부의 공공의 적이 되어 있었으니, 이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후에 계속하도록 하자.


그러던 어느 날, 왕궁에 화재가 발생한다. 소설을 읽다가 그대로 잠이 든 시녀 때문에 왕비의 침소가 불에 타고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소설이 문제다. 그러니 건강한 삶을 살고자하는  사람이라면 담배와 술과 소설을 멀리하는 게 좋다. 담배도 술도 소설도 멀리하지만 운이 없는 걸리버는 잽싸게 궁전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고작 골무만한 물통으로는 좀처럼 불길을 잡을 수 없다. 그는 묘안을 떠올린다.


어제 저녁 나는 ‘글리미그림’이라고 부르는 굉장히 맛있는 포도주를 잔뜩 마셨는데, 그것은 소변을 자주 보게 했었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소변을 보지 않았다. 불 옆에서 소화 작업에 열중하고 있자니 몸속이 뜨거워지면서 곧 소변이 마려워지기 시작했다. 불길 가까이 다가선 나는 곧 참고 있던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게다가 꼭 필요한 곳을 겨냥해 방출했기 때문에 불은 나의 오줌으로 3분 만에 완전히 꺼지게 되었다. 완성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을 궁전의 나머지 부분은 화재의 위험에서 안전하게 되었다. (65쪽)


진압에 성공한 걸리버. 그는 왕의 치하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집으로 돌아온다. 릴리퍼트의 법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궁전 부근에서 소변을 보는 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은 대법원에 걸리버의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왕비는 자신의 방에 오줌을 싼 무식한 거인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고, 다른 곳으로 옮긴 후 그쪽을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않았다.  가뜩이나 좁은 릴리퍼트에서 걸리버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이윽고 걸리버를 시기하던 고위 관료들이 탄핵안을 제출한다. 왕궁에 소변을 봄으로써 국왕을 능멸했을 뿐 아니라, 블레훠스크가 적국임을 뻔히 알면서도 방문을 강행하려는 것으로 미루어 ‘종블’ 세력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주무대신과 해군사령관은 깊은 밤에 집에 불을 질러 참혹하게 태워 죽이자고 주장했다. 육군사령관은 2만 명의 무장한 군사에게 독화살을 쏘게 해 고통스럽게 죽이자고 주장했다. 걸리버의 친구인 비서실장은 그간의 공적을 감안해서라도 눈을 멀게 하는 정도로 마무리하자고 주장했지만 재무대신이 반대했다. 걸리버의 생활비를 감당하느라 국왕의 재정이 파탄 날 지경이라는 것이다. 그는 “어떤 종류의 새는 눈이 멀게 되었을 경우에 더욱 빨리, 그리고 많이 먹어서 살이 찌게 된다”는 이유를 들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식사량을 조금씩 줄여 결국에는 굶어 죽게 만들 것을 주장했다. 문득 전에 다니던 회사의 재무팀장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얼까. 결국 걸리버를 굶겨 죽이기로 결정한 국왕은 신하들에게 계획을 은밀하게 실행할 것을 당부한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거인이 그 소식을 듣지 못할 이유가 뭔가? 익명의 제보자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걸리버는 블레훠스크로 탈출을 감행한다. 그곳에 한동안 머물며 국고를 먹어치운다. 블레훠스크의 재무대신에게는 아마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영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걸리버. 마침 우연히 발견한 고장 난 보트도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거대한 식객을 보내버려야 한다는 온 국민의 성원에 힘입어 보트를 수리하는데 성공한 걸리버는 드디어 고향을 향해 배를 띄운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의 귀환을 너무 상세하게 늘어놓음으로써 독자들을 괴롭히지는 않을 생각은 없다. 다만 어떤 종류의 우연과 행운을 통해, 1702년 4월 13일, 집을 떠난지 약 3년 만에 마침내 고향땅을 다시 밟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하지만 천성이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으니, 그는 고작 두 달을 가족과 함께 보낸 후 다시금 수라트를 향하는 300톤짜리 상선 어드벤처 호에 오른다. 참으로 빌어먹을 운명이다. 그리하여 거인국에 표류하게 된 걸리버의 두 번째 모험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계속될 예정이다.















프레시안 북스 2013. 4. 19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419174820&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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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유쾌하고 엄숙한 검열식, 그리고 작가의 탄생


약속된 검열의 날이 밝았다. 우리의 주인공이 잠들어 있는 사이 조카딸에게 서재의 열쇠를 받은 이발사와 신부는 장정이 훌륭한 100권과 몇 권의 소책자를 앞에 두고 재판을 시작한다. 성수를 뿌리며 모든 책을 태울 것을 주장하는 무지몽매한 여인들. 하지만 박식한 두 명의 검열관은 책의 운명이 자신들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직접 책을 살핀 후 내용에 따라 처분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첫 번째 책은 돈 끼호떼의 영웅, <아마디스 데 가울라>의 모험을 그린 4권짜리 전질이다.


“귀한 책이로군”하고 신부가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이 책이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기사도 이야기라던데. 다른 책들은 모두 이 책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는 거야. 말하자면 이 책이 모든 사악한 종파를 세운 셈이니 가차 없이 화형에 처해야겠군.” (<돈 끼호떼>(김현창 옮김, 범우사 펴냄) 58쪽)


하지만 이발사의 생각은 다르다. 그 책이야말로 지금까지 발표된 이런 종류의 책 중에서 최고의 걸작이기에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흔쾌히 수락하는 신부. 하지만 자비는 거기까지다. 아마디스 데 가울라의 적자 <에스쁠란디안의 무용담>은 아비의 덕이 아들에게까지 꼭 미치라는 법은 없다는 이유로, 그 밖의 ‘아마디스’ 일족의 이야기들은 여우를 말에 태운 것처럼 부질없다는 이유로 화형을 선고받는다. 그 밖의 다른 책들에게도 각각의 판결이 이어진다. 멋대로고 조잡한 문체 — 유죄, 장황하고 불필요한 대목 — 유죄, 사실성 혹은 창의성의 부족 — 유죄, 엉터리 번역 —유죄…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신부와 이발사는 어떻게 사악하고 유해한 책들의 내용을 그렇게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걸까? 답은 뻔하다. 그들 역시 그것을 읽은 것이다. 다만 그들은 미치지 않았기에 박식함을 자랑하며 판결을 내릴 수 있다. 그들은 나름의 문학적 근거를 가지고 판결을 내린다. 독창성, 문체, 캐릭터와 에피소드, 구성 등등. 마치 정전(canon)을 판별하는 비평가 선생님들처럼, 두 신사는 무지몽매한 대중을 대신해 남겨야 할 기사도 소설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한다. 물론 그것은 세르반테스 자신의 기준이다.


세르반테스의 의도는 분명하다. 기사도 소설에 대한 공격. 하지만 작가이자 기사도 소설의 독자였던 세르반테스는 기사도 소설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우스꽝스러운 검열 장면을 통해 넘쳐나는 엉터리 기사도 소설들을 폐기하고, 남길 가치가 있는 몇 편의 걸작들을 구하려던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의 작품도 포함해서.


“미겔 데 세르반떼스의 <라 갈라떼아>(세르반테스의 처녀작. 그는 이 작품에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듯 종종 속편을 쓰겠다고 했었으나 쓰지 못하고 말았다)로군요.” 

“그 세르반떼스도 오래전부터 내 친구지.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 사람은 노래보다 속세의 고생에 더 익숙한 사람이야. 그 책 속에는 약간 기대할 만한 구석도 있지. 무엇을 내놓고 아무런 결말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말야. 마땅히 있어야 할 속편이나 기다릴 수밖에는. 약간 손질만 하면 지금은 못 받고 있는 인기도 얻을 수 있을 거야. 자, 그때까지 당신 집에다 간수해두시지.” (64쪽)


모든 작가는 자기만의 문학사를 갖는다고 말한 것은 밀란 쿤데라였다. 세르반테스 또한 그것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발사와 신부의 검열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로 소설 속에 들어오는 순간 문제는 달라진다. 그것은 더 이상 작가 자신이 젖줄을 댄 사적인 문학사에 대한 장난스러운 언급이 아니다. 이발사와 신부라는(다소 자질이 의심스러운) 두 명의 검열관은 화형식을 통해 가치 있는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구분한다. 선택과 배제. 그들은 모든 시대의 비평가들이 그렇게 하듯, 그들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공식적인(혹은 공익적인) 문학사를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짝짝짝

나는 잠시 타이핑을 멈추고 그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니 뛰어난 안목과 냉철한 감식안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검열관과 비평가 들을 도대체 누가 검열하고 비평할 것인지는 묻지 말기로 하자. 적어도 오늘은 적당한 날이 아니다. 어차피 밤이 오면 무지몽매한 가정부가 게으른 판관들을 대신해 남겨야 할 책과 그렇지 않은 책들을 가리지 않고 몽땅 태워버릴 예정이다.


하지만 아무리 책을 태운다 한들 이미 읽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의 돈 끼호떼는 이미 읽어버린 사람이다. 독자, 그것도 미친 독자다. 뒤늦게 잠에서 깨어나 온 벽에다 칼질을 하며 건재함을 과시하던 돈 끼호떼는 자신의 소장도서가 사악한 마술사에 의해 사라져버렸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놀라지 않는다. 다만 그자의 이름이 ‘현인 무냐똔’이었다고 둘러대는 조카딸을 향해 침착하게 대꾸할 뿐이다. “그자는 아마 프레스똔이라고 말했을 게다.” 그는 이미 읽었고, 읽은 것을 받아들였다. 검열은 그가 읽은 것을 오히려 더 풍요롭게 만들어줄 뿐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돈 끼호떼는 두 번째의 출정을 나선다. 기사도 소설에 대한 공격, 혹은 패러디와 이별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돈 끼호떼의 모험은 더 이상 이야기 속 영웅들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답습이 아니다. 이발사와 신부라는 비평가(그리고 조카딸과 가정부라는 대중)에 의해 폐기된 어떤 전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되살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마치 세르반테스 자신의 소설이 그런 것처럼.


소설의 정신은 연속의 정신이다. 모든 소설은 그에 앞선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며, 소설에 앞선 모든 체험을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정신은 현재에만 고정되었다. 이 현재는 너무 넓고 방대한 것이어서 우리의 지평에서 과거를 몰아내고 시간을 현재의 순간만으로 축소해 버린다. 이 같은 체계에 휩쓸려 있는 소설은 더 이상 ‘작품’(영속하게 하는 것, 과거를 미래에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건들과 다를 바 없는 시사적인 사건이며, 내일 없는 몸짓일 뿐이다. (<소설의 기술>(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민음사 펴냄) 34쪽)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돈 끼호떼의 모험은 세르반테스 자신의 창작 과정에 대한 은유라고. 위대한 선배들이 갔던 영웅적인 길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때론 우스꽝스러운 형식으로 되풀이 하는 것. 그들이 남긴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은 채, 그저 새롭게 반복하는 것 — 근대 문학의 시작을 알린 <돈 끼호떼>는 바로 그렇게 탄생했다. 


우리는 아마 이 은유를 더욱 확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돈 끼호떼를 아예 작가라고 하는 건 어떤가. 허름한 주막을 성이라고 생각하고, 풍차를 거인이라고 생각하며, 익숙한 모든 사물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바라보는 미친 독자가 작가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작가의 옆에 찰싹 붙어 때론 감탄하고, 대개는 이죽거리며 세상과 작가 사이의 (최소한의) 소통을 책임지고 있는 산초 빤사는 편집자라고 해야겠지. 그렇다면 돈 끼호떼가 한 번 보지도 못한 채 그토록 사모하는 둘씨네아 아가씨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독자일 것이다(이런 관점에서 보면 10년 후 발표된 속편에서 마침내 마주친 둘씨네아에게 돈 끼호떼가 실망하는 장면, 산초가 돈 끼호떼를 달래기 위해 공주님이 나쁜 마법에 걸렸다고 둘러대는 장면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물론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나는 앞선 5장에서 예고했듯 “비난받을 두려움도, 보상에 대한 기대도 없이 돈 끼호떼의 이야기에 대해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깡그리” 말하고 있을 뿐이다. 뭔가 그럴 듯한 것을 기대했다면 이 글은 이만 접고(이런, 벌써 이만큼이나 읽어버렸는데!) 훌륭한 선생님들이 남기신 주옥같은 글을 참고하시라.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나 이언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 같은 책들을. 리포트를 쓰거나 숙제를 하기에는 윌리엄 L. 랭어가 엮은 <호메로스에서 돈 키호테까지> 중 H.R. 트레버‐로퍼가 쓴 ‘돈 키호테의 두 에스파냐’라는 꼭지가 적당하다. 비교적 적은 분량에 세르반테스의 약력과 당시 시대상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다. 돈 끼호떼와 산초 빤사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색다른 접근을 원한다면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을, 때론 포스트 모더니즘적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돈 끼호떼>의 서술 기법에 대해서라면 로버트 스탬의 <자기 반영의 영화와 문학>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그밖에도 <돈 끼호떼>를 다룬 많은, 정말 많은 글들이 있다.


나는 어쩌면 이 자리에서 우리의 ‘우수에 찬 얼굴의 기사’의 모험을 더욱 상세하게 기술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촉박한 마감과 게으름, 연재가 너무 늘어지는 게 아니냐는 프레시안북스 측의 압박(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들의 의견을 언제나 신뢰하는 편이며 별다른 불만도 갖고 있지 않으며 비록 매번 마감은 늦지만 언젠가 말했듯 그건 감사의 마음이 너무 큰 탓에 언제나 넙죽 엎드린 자세로 타이핑을 하기 때문이다) 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다른 무엇보다 보르헤스의 어느 단편을 읽어버렸기 때문이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짧은 이야기에서 보르헤스는 말 그대로 <돈 끼호떼>를 다시 쓴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는 또 다른 <돈키호테>를 집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쓰려고 했던 것은 <돈키호테> 그 자체였다. 그가 원작을 기계적으로 옮겨 쓰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은 덧붙일 필요가 없다. 그의 경탄스러운 야심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모든 단어와 모든 행이 완전히 일치하는 몇 페이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픽션들>(송병선 옮김, 민음사 펴냄) 57쪽)


처음에 피에르 메냐르는 “스페인어를 열심히 배우고, 가톨릭 신앙에 귀의하고, 무어인들이나 터키인들과 전쟁을 벌이고, 1602년부터 1918년까지의 유럽 역사를 잊어버리고,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되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이유로 그 계획을 포기해버린다. 세르반테스가 되어 <돈 끼호떼>에 이르기보다는 피에르 메나르로 계속 존재하면서 피에르 메나르의 경험을 통해 <돈 끼호떼>에 이르는 것이 더 흥미롭다고 판단한 것이다. 과연 어떻게?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소설 속 피에르 메나르는 <돈 끼호떼> 1부의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의 일부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소설의 화자는 친구가 남긴 작품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글자상으로는 하나도 다르지 않고 똑같다. 그러나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작품보다 거의 무한할 정도로 풍요롭다.(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더 ‘모호’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호성은 풍요로움이다.)

메나르의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비교해보면 이것은 확연히 드러난다. 가령 세르반테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진리’의 어머니는 역사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 — <돈키호테> 1부, 9장


‘재치 넘치는 평민’인 세르반테스가 17세기에 쓴 이런 열거들은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반면에 메나르는 이렇게 적는다.


…… ‘진리’의 어머니는 역사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이다. 이런 생각은 어마어마하게 놀라운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와 동시대 사람인 메나르는 역사를 현실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현실의 기원으로 정의한다. 메나르에게 역사적 진실이란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행위이다. 마지막 문장 —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이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 — 은 뻔뻔스럽게도 잘난 척하고 있다. (63쪽)


결국 보르헤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텍스트를 둘러싼 컨텍스트의 변화를 통해 무한한 의미를 창출해내는 일의 즐거움, 독서의 즐거움이다(“메나르는 (아마 자기도 모르게) 새로운 기법 — 계획적인  시대착오와 잘못된 원저자 설정 — 을 통해 꼼꼼하고 흔적을 남기는 기술인 독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나는 여기에 다소 고리타분한 서평가의 편견을 덧붙이고 싶다. 어떤 작품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말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작품 전체를 고스란히 다시 쓸 수밖에 없다. 한 권의 책을 타이핑하는 일은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정말 더럽게 힘든 일이다. 당신은 정말 가련한 서평가에게 가욋돈을 주지도 않고 그런 일을 요구할 정도로 뻔뻔한 사람인가? 


설마. 나는 아니라고 믿는다.


프레시안북스 2013. 4. 5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405163802&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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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돈 끼호떼 2부는 다루지 못하고 후루룩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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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어느 미친 독자의 영웅적이고 미미한 모험에 대한 이야기


이름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라 만차의 어느 마을에 창걸이에 창, 낡은 방패, 야윈 말 그리고 날쌘 사냥개를 가진, 흔히 볼 수 있는 한 귀족이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 끼하다, 혹은 께사다, 어쩌면 끼하나. 다소 방정맞은 이름이다. 위무도 당당한 돈 끼호떼 데 라 만차라는 이름과 비교한다면 더더욱.


어느덧 쉰을 바라보는 끼하다, 혹은 께사다, 어쩌면 끼하나는 평범한 시골 귀족의 평온한 삶에 안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낮에는 양고기보다 쇠고기를 더 많이 넣어 삶은 요리를 먹고, 밤에는 잘게 썬 고기 요리, 토요일에는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와 달걀 요리를 먹으며, 금요일에는 불콩 콩국을, 일요일이면 새끼 비둘기 요리를 곁들여 먹으면서도 콜레스테롤 수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살 수도 있었단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도대체 왜? 바로 책 때문이다. 


그는 한가한 시간이 있으면(하기야 일 년 중 대부분이 한가한 시간이지만) 기사도 이야기를 읽는 데 골몰했으며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사냥이나 재산 관리조차 잊고 말았다. 나중에는 기사도에 대한 호기심과 이러한 도취가 정도를 넘어서, 읽고 싶은 기사도 책을 구입하기 위해서 수많은 밭을 팔아버렸다. (<돈 끼호떼>(김현창 옮김, 범우사 펴냄) 29쪽)


한 마디로 그는 독자였다. 우리 시대의 독서 멘토로 불린다는 어느 ‘미남’ 저자는 일찍이 독서를 세 부류로 나눈 바 있다. 1단계인 프로 리딩Pro‐Reading은 “자기 분야에 관한 책 100권 이상을 읽어서 3000년의 내공을 쌓는 독서”이고, 2단계인 슈퍼 리딩Super‐Reading은 “1년 365권 자기계발 독서 프로젝트를 통해 성공자의 사고방식을 갖는 독서”이며, 그레이트 리딩Great‐Reading은 “인문고전 독서를 통해 리더로 거듭나는 독서”라고 한다(<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이지성 외 지음, 다산라이프 펴냄) 11쪽 참고). ‘돈 끼호떼 라 만차’만큼이나 거창한 작명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재기 넘치는 시골 귀족은 어떤 독자였을까? 세르반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요컨대 그는 이런 종류의 책(*기사도 소설)에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매일 밤을 뜬눈으로 꼬박 새웠고, 낮에는 낮대로 아침 동이 틀 때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오로지 독서에만 열중하였는데, 이러한 바람에 그는 정신마저 잃게 되었다. 요술, 싸움, 전투, 결투, 부상, 구애, 연인, 번민, 그 밖의 온갖 황당무계한 사건 등 모두 그 엄청난 책에서 읽은 이상야릇한 환상이 언제나 그를 사로잡았으며, 그리하여 그가 읽은 숱한 허황된 얘기들이 모두 진실로만 여겨졌고,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확실한 이야기는 없다고 여겨질 만큼 그의 공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말았다. (30쪽)


그러니 우리는 그를 책에 써 있는 그대로 믿는 독자, 다시 말해 크레이지 리딩Crazy‐Reading을 하는 독자라고 해두기로 하자. ‘프로’도 ‘슈퍼’도 ‘그레이트’도 아니다. 그냥 미친놈이다. 돈 끼호떼의 시대에 성공을 약속하는 멘토들의 자기계발서나 다정한 ‘힐링 도서’가 없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행여나 그가 그런 책을 읽었다면 우리 미치지 않은 독자들은 애잔한 편력기사의 모험담을 읽을 수 없었으리라. 우리의 신사 양반 또한 아무리 그런 책을 읽는다 해도 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찌감치 포기했겠지. 정신 나간 삼촌 탓에 속을 끓여야 했던 조카딸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대부분의 독자란 이렇게 이기적이다.


미친 독자의 운명을 비장하게 노래한 것은 바로 사사쿠 아타루다.


책을 읽었다기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34쪽)


그러므로 이런 것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의 일입니다. 왜 사람은 책을 성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왜 책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왜 읽고서 옳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요? 아시겠지요. 미쳐버리기 때문입니다. (37쪽)


결국 미친 독자란 성실한 독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미치지 않은 우리와 미친 돈 끼호떼가 있을 뿐이다. 그는 ‘정보’라는 필터를 꽂을 줄 모르는 독자다. 그 밖의 ‘프로’니 ‘슈퍼’니 ‘그레이트’니 하는 구분은 사사키 아타루에게는 사기나 다름없는 짓이다. 


읽어도 전혀 모르겠다, 머리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지루해서 왠지 싫은 기분이 든다고 하는 것, 다들 뭔가 자신의 능력이 뒤떨어져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화를 내거나 책을 내팽개치거나 하는 것입니다. “번역이 나빠”라고 한다거나 “좀 더 쉽게 쓰란 말이야”라며 다른 사람 탓을 하거나 “좀 더 공부해야겠는걸”, “좀 더 쉬운 책은 없을까”라든가, 초급이 있어야 중급이 있고 중급이 있어야 상급이 있다는 듯한 지의 서열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런 일종의 열등감이나 분노를 이용하여 엉터리 같은 입문서나 비즈니스 책이나 팔아치우며 독자를 착취하는 패거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39쪽)


물론 이것은 사사키 아타루의 주장이다. 나는 우리 시대의 몇몇 베스트셀러 저자들을 “엉터리 같은 입문서나 비즈니스 책이나 팔아치우며 독자를 착취하는 패거리”라고 부를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 이 글을 읽으며 “뭐 이딴 글이 다 있어”라고 투덜대는 당신을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아시겠지만, 우리는 더는 책을 읽고 미칠 수 있는 시대를 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따듯한 방에 앉아 낄낄거리며 책장을 넘기는(혹은 마우스 휠을 돌리는) 안전한 소비자‐독자가 되는 일이다. 내가,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것은 우리의 잘못인가? 글쎄,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언젠가 루카치는 이렇게 탄식하지 않았던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러니 사소한 의문들은 뒤로 한 채, 검은 글자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책장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의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자. 평범한 시골 귀족 끼하다, 혹은 께사다, 어쩌면 끼하나는 그것을 읽었고, 아니, 읽고 말았고, 그리하여  돈 끼호떼가 되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Neo’가 ‘그The One’가 된 것처럼, 그는 그저 믿음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편력 기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창대한 모험이라도 그 시작은 미미한 법. 우리의 편력 기사를 기다리는 것 또한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차라리 궁상맞은 사소한 문제들이었다.


그가 처음 만난 난관은 편력 기사의 코스튬을 갖추는 일이다. 창고를 뒤져 몇 대나 지난 옛 조상의 낡은 갑옷을 발견하지만, 투구에 낯가리개가 없었다. 그는 뛰어난 손재주를 활용해 두꺼운 판지를 잘라 쇠모자에 붙이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비록 “그것이 얼마나 튼튼하며 칼끝의 위험에 견딜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려고 칼을 뽑아 두어 번 내려쳐서, 일주일 동안의 노력의 결과를 망가뜨려버리고 말”지만, 다시금 공들여 완성한 그것을 두 번 시험하지 않을 정도로는 현명했던 것이다.


첫 번째 난관을 무사히 통과한 그는 모든 기사가 자신에게 꼭 맞는 명마를 가지고 있듯 자신의 ‘로신’(비루먹은 말이라는 뜻)에게 로시난떼라는 멋진 이름을 지어주고, 돈 끼호떼 데 라 만차라는 이름을 통해 스스로의 신분과 고향을 분명히 나타낸 후, 한 번 본 적도 없는 이웃 마을 농부의 딸에게 둘씨네아 델 또보소라는 이름을 붙여 아름다운 공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모든 편력 기사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조건들을 단숨에 마련한다. 이제 남은 것은 긴 창을 비껴들고 로시난떼에 오르는 일이다.


이렇게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고 보니 그가 쳐부수고자 하는 부조리, 바로잡아야 할 부정, 고쳐야 할 비리, 제거해야 할 폐해, 처리해야 할 부채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어서 자기가 조금이라도 지체하고 있으면 그만큼 세상이 받는 손실이 크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33쪽)


우리 시대 어떤 정치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처럼, ‘사심 없는’ 희망의 첫발을 내디딘 돈 끼호떼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는 아직 기사가 아니다. 누구보다 그 자신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왜 아니겠는가? 그는 아직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지 않았고, 기사도 소설의 법도에 의하면 정식 서임을 받지 않은 이는 어떤 기사와도 맞설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보고, 공상하는 모든 것이 책에서 읽는 그대로 되어 있고 또 된다고 믿고 있는 우리의 모험가”는, 그러니까 미친 독자는 이내 “사면의 누각이 있고, 은빛 찬란한 첨탑과 들어 올리는 다리와 깊은 해자 등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성”(이라고 쓰고 주막이라고 읽는다)을 발견한 것이다. 


성주는, 그러니까 주인은 한 눈에 보기에도 미친 게 분명한 허름한 손님에게 돈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다. 물론 끼호떼에게는 한 푼도 없다. 그가 읽은 편력 기사의 이야기책에 돈을 가지고 다녔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기사를 주인은 좋은 말로 타이른다. 굳이 책에 쓰지 않은 것은 편력 기사들이 깨끗한 속옷처럼 돈을 갖고 다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구태여 그것을 밝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책에 나오지 않는 사실이라고? 세상에, 그럴 리가! 책으로 기사도를 배운 성실한 독자로서는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만, 그는 차분히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따름이다. 성실한 독자는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법이고, 우리의 주인공에게는 기사 서임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그는 이미 미쳤으니까. 누구도 두 번 미칠 수는 없는 법이다.


마침내 돈 끼호떼는 기사 서임을 받는다. 말썽을 원치 않는 주막 주인이 주먹구구식으로 한 것이지만, 어쨌거나 서임은 서임이다. “말의 배때기까지 터질 듯한 기쁨으로 싱글벙글 마음도 가볍게 매우 만족스러운 심정으로” 주막을 나선 돈 끼호떼는 곧바로 정의를 구현한다. 양치는 소년을 묶어놓고 채찍질을 하고 있는 농부를 만난 것이다. 그는 이 사악한 사내가 소년의 임금도 지불하지 않은 채 트집을 잡아 분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채고, 저 현명한 솔로몬 왕에 뒤지지 않는 판결을 내린다. 농부에게 지금 즉시 집으로 소년을 데려가 밀린 임금을 지불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즉결 심판을 내릴 수도 있지만, 기사가 천한 농부에게 검을 들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기사가 떠나는 순간 더욱 가혹한 매질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는 소년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지만, 돈 끼호떼는 기사도와 맹세를 운운하며 농부에게 거듭 경고할 뿐이다.


“레알 은화로 지불해주어라. 그러면 나는 만족이다. 아무튼 반드시 서약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니라. 만일 어길 경우에는 그대의 서약 그대로 다시 되돌아와 그대를 찾아내어 형벌에 처할 테다. 제아무리 그대가 도마뱀처럼 달아나 숨더라도 찾아내지 않고는 가만있지 않을 테다. 이것의 이행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기 위해서, 대체 이것이 누구의 명령인가를 가르쳐주마. 나는 사악과 비도의 징벌자인 용맹스러운 돈 끼호떼 데 라 만차다. 그러니 한 번 맹세한 서약을 꿈에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때엔 앞에서도 말한 대로 형벌이 그대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니 그리 알아라.” (48쪽)


아, 우리의 멋진 돈 끼호떼! 무정한 무리들의 부정을 간단히 제압한 초보 기사는, 그러나 결코 초보로는 보이지 않는 용감한 기사는 “자기의 기사도가 참으로 화려하고 고매한 발족을 했다고 생각하고 일의 진행 경과에 매우 만족해하면서 무척 우쭐해져서” 자신의 길을 가고, 남겨진 소년은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 채 혹독한 고초를 겪는다. 세르반테스는 첫 번째 업적을 담담하게 기술한다.


우리의 용사 돈 끼호떼는 이런 식으로 무도(無道)와 비리를 바로잡았던 것이다. (49쪽)


그렇지만 용사의 길에 시련이 없을 리 없다. 우리의 남다른 기사에게 시련은 무척 일찍 찾아온다. 성주의 조언에 따라 깨끗한 속옷과 금화, 내친 김에 방패를 들릴 종자를 구하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편력 기사의 무리(는 물론 비단을 사러 가는 상인들)를 만난 것이다. 새로운 모험에 흥분한 늙은 기사는 길을 막고 서서 큰 소리로 의연하게 외친다.


“라 만차의 여왕인 둘씨네아 델 또보소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이 세상에 없다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거기 있는 누구라도 이곳을 지나가게 하지 않으리라.” (50쪽)


미친놈과 적당히 놀아주자는 생각에 말재간이 있는 상인 하나가 돈 끼호떼에게 수작을 건다. 훌륭한 부인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조금도 모르니, 한 번 그분을 보여 달라고. 그런 다음에 그토록 아름다운 분이라면 기꺼이 진실을 고백하겠노라고. 하지만 정작 돈 끼호떼조차 한 번 본 적 없는 여인이 아닌가? 돈 끼호떼는 말한다.


“아니, 부인을 보여주고 난 다음에”하고 돈 끼호떼가 대답했다. “명명백백한 사실을 고백한다고 하면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겠느냐.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부인을 한 번도 보지 않고도 그것을 믿고 고백하고 옹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싫다면 이 오만불손하고 건방진 녀석들, 나하고 한바탕 싸워야 할 줄 알아라. 기사도의 관습에 따라 한 사람씩 차례로 덤벼도 좋고, 너희들 같은 무리들의 관례와 악습대로 한꺼번에 덤벼 와도 좋다. 나는 나의 정의를 믿고 여기서 기다리겠노라.” (50쪽)


그렇다. 믿음, 돈 끼호떼에겐 그것만이 중요하다. 본 적은 없지만 틀림없이 사랑하는 부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 자신의 정의에 대한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 책에 인쇄된 글자 하나하나가 사실이라는 단단한 믿음. 돈 끼호떼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인 동시에 계부인 세르반테스가 서문에서 친절히 밝히고 있듯 기사도에 대한 공격, 다시 말해 “기사도에 관한 서적이 세상이나 속인들 사이에 갖고 있는 권위와 세력을 타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은 없”는 우스꽝스러운 이 편력담이 시대를 거치며 작가의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읽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르반테스가 쓴 것은 분명 엉터리 기사도 소설에 대한 패러디이고 무자비한 공격이다. 세간의 평에 의하면 길고도 지루했던 라블레를 다룬 이 연재의 첫 4회 분을 위해 내가 적지 않은 돈을 주고 구입한 블라지미르 쁘로쁘의 <희극성과 웃음>(정막래 옮김, 나남 펴냄)에 따르면 패러디는 “패러디되는 대상의 내적 불충분성에 대한 폭로의 수단”이며 “문학에서 패러디가 출현한다는 것은 패러디되는 문학사조가 소멸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세르반테스가 하는 일이고 이는 라블레가 기사도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했던 작업, 즉 “작품의 작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성격의 현상들에 반대하기 위하여 전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들의 형태를 풍자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와 구별되는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분명한 목적을 위해 늙은 돈 끼호떼를 만들었고,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험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 하지만 돈 끼호떼는 잊히지 않았다 — 대부분의 수단들이 목적을 이룬 후 버려지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보잘 것 없는, 그렇지만 단단한 믿음과 함께, 신이 사라진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인간들의 운명을 낡은 갑옷처럼 두룬 채 살아남은 것이다. 유일한 절대 진리는 사라졌다. 인간에게는 너무나 많은 가능성이, 마치 사막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어느 곳으로든 갈 수 있지만 어느 하나 구원을 보장하진 않는 가능성이 주어졌다. 자유라는 이름의 형벌. 돈 끼호떼는 황량한 자유의 사막을 자신의 두 다리로, 아니, 사랑하는 애마 로시난떼의 네 다리로 걸어간다. 기사도라는 우스꽝스러운 믿음을 그러쥔 채. 그는 미친 독자讀者인 동시에 독자獨自이며, 나아가 믿음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누구보다도 신실한 독신자篤信者인 것이다. 그가 낭만주의의 영웅이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영웅이라고 해도 뭇매를 맞는 일을 피할 수는 없었다. 부인의 초상화라도 보여줄 수 없겠냐며 “아니 비록 그 초상화가 한쪽 눈이 애꾸고 다른 눈에서는 진물과 고름이 흘러내린다 해도 우리는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라는 불경스러운 말을 지껄이는 악당을 향해 “아무것도 절대로 흘러내리지 않는다, 이 흉악한 놈팡이야!”라고 사자후를 내뱉으며 돌진하던 돈 끼호떼는 그만 말에서 떨어져 나뒹굴었고, 북소리가 나게 두들겨 맞은 것이다. 물론 빗발치는 몽둥이찜질을 당하면서도 입만은 쉬지 않고 놀리며 호통을 치긴 했지만…. 


그러나 우리의 돈 끼호떼는 이런 재난은 편력 기사들에게는 으레 따라다니는 것이라고 은근히 기쁘게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잘못을 말의 탓으로 돌렸지만, 온몸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도저히 일어날 가망이 없었다. (52쪽)


아무리 노력해도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자 돈 끼호떼는 늘 하는 방법을 써보려고 마음먹는다. “그것은 전에 읽은 책들 중의 어느 한 대목을 생각해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두들겨 맞지 않았음에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없을 때 내가 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통한 목소리로 어느 기사도 소설에 등장하는 로망스를 부르던 그가 “오 고귀하신 만뚜아 후작님! 한 핏줄을 나눈 나의 숙부님이여!”란 대목에 이르렀을 때, 마침 같은 동네에 사는 농부가 그를 발견한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동네 어른을 본 마음씨 착한 농부는 그를 당나귀에 실어 마을로 데려온다. 이렇게 우리 기사의 첫 번째 모험은, 모두가 기대했던 풍차와의 대결도 미처 벌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반면 주인어른이 말도 없이 사라져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그의 집에서는 돈 끼호떼의 가장 친한 친구들인 마을 신부와 이발소 주인이 가정부가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제 짐작이 틀림없어요. 나리께서 언제나 끌어모아가지고 늘 읽고 계시던 그 몹쓸 기사도 책들이 나리의 머리를 돌게 만들고 만 거예요. 이건 신부님, 제가 태어나서 죽는 것이 틀림없는 일인 것처럼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 그 따위 책은 악마나 염병 귀신에게 줘버려야 해요.” (55쪽)


사랑하는 조카딸도 한 마디 거든다.


“외삼촌은 그 엉터리 기사도 책을 꼬박 이틀 동안이나 쉬지 않고 열심히 읽곤 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러고 나서는 책을 내동댕이치고 칼을 들고 벽을 향해 마구 내리치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지치시면 자신이 탑만큼이나 큰 거인을 넷이나 죽였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또 지쳐서 땀이 흐르면, 이것은 싸움에서 입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 그 나쁜 책들을 모두 불살라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교도처럼 화형이 알맞을 책들을 잔뜩 가지고 계시거든요.” (56쪽)


이에 신부가 입을 열어 “내일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책들을 공식 재판에 붙여서 꼭 화형에 처해야겠어. 앞으로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읽고 또 나의 소중한 친구가 한 것처럼 되풀이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라고 화답했으니, 아마도 다음 장에서는 ‘우리의 기지 넘치는 귀족의 서재에서 신부와 이발사가 행한 유쾌하고 엄숙한 검열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프레시안북스 2013. 3. 22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322141543&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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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서 붙인 "독서 천재 '돈 대리'가 미쳤어요"라는 제목에 풉,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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