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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위대한 세르반테스의 꼬여버린 족보와 그의 사려 깊은 친구가 들려주는 탁월한 조언에 대한 이야기



한가로운 독자여, 내가 이 책을 내 지능의 아이로서 상상할 수 있는 한 어디까지나 아름답고, 고아하고, 교묘하고, 치밀한 것이 되어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이 자리에서 새삼 맹세치 않더라도 믿어주실 줄 안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 모든 것은 자기를 닮은 것밖에 낳지 않는다는 이 자연의 법칙에는 마침내 나도 역시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 빈약하고 도무지 교양 없는 나의 재지가, 마치 모든 불편이 우쭐대고 모든 쓸쓸한 소리의 거처인 감옥 안에서나 태어난 것처럼 메마르고, 여위고, 요령부득인데다가 잡동사니를 긁어모은, 일찍이 누구 하나 생각지도 못한 사고에 찬 아들과도 비유할 수 있는 이야기 이외에, 대체 무엇을 낳을 수가 있었을까? (<돈 끼호떼>(김현창 옮김, 범우사 펴냄) 20쪽)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돈 끼호떼의 아버지가 아니다. 적어도 그의 주장은 그렇다. 그는 굳세고 가련한 기사 돈 끼호떼를 세상에 내보내며 신중하게도 그를 낳은 가상의 아버지를 함께 창조한다. 역사가인 씨데 아메떼 베넨헬리가 남긴 ‘재기 넘치는 시골 귀족 돈 끼호떼 데 라 만차’의 실록을 자신은 그저 다듬어 소개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르반테스는 그의 주장대로 돈 끼호떼의 계부인가? 씨데 아메떼 베넨헬리의 아버지이자 돈 끼호떼의 할아버지인가? 아니면 두 사람 모두의 아버지인가? 시작부터 족보를 꼬아놓은 세르반테스는 모른 척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사랑하는 독자여, 두 눈에 거의 눈물마저 머금고 이 내 자식 속에서 당신이 깨달으시는 수많은 결점을 용서하거나 관대히 봐주십사고 부탁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 아이의 친척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며, 당신 자신의 몸속에 버젓이 자기의 정신을 가졌고,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는 확고한 자유의사를 가졌으며, (…) 당신은 이러한 일체의 것으로부터 제재를 받는 일도 없고 보면, 이 이야기에 대해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깡그리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비방했다고 해서 비난받을 두려움도 없고 칭찬했다고 해서 별로 보상받는 일도 없는 것이다. (21쪽)


그러니 그렇게 하자. 비난받을 두려움도, 보상에 대한 기대도 없이 돈 끼호떼의 이야기에 대해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깡그리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이다. 비난할 거리를 찾으며, 행여 찾지 못한다고 한들 보상을 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이 이 글을 읽는 것, 그것은 당신의 일이다.


우연히 발견한 돈 끼호떼의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하려는 세르반테스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다. 그를 괴롭게 하는, 심지어 “그토록 고매한 기사의 여러 가지 무훈의 공개 그 자체를 그만둬버릴까” 생각하게 만드는 고민은 이렇다. “창의도 없고 문체도 빈약한 데다 사상도 희박하며, 박식도 학식도 결여되어 내가 보는 다른 서적처럼 난외의 인용구도 없고 권말에 주석도 없는” 이야기를 뻔뻔하게 들고 나타난다면 세상의 많은 선생님들이며 박사님들이 대체 뭐라고 할까? 권두에 실을 “공작, 후작, 백작, 사교, 귀부인 혹은 매우 이름난 시인의 소네트”도 없는데? 


그런 세르반테스에게 친구는 말한다. 여보게, 이 사람아, 권두에 실을 거창한 소네트들이라면 자네가 직접 지은 후 적당하고 그럴 듯한 이름들을 붙여주면 될 것 아닌가? 계속해서 그는 괴로워하는 작가는 물론, 오늘도 마감에 시달리고 있을 대한민국의 수많은 원고 저술업자들에게도 여전히 유용한 몇 가지 조언을 들려준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또한 운이 없다면, 그러니까 저술업자의 하나로 빈사 상태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면 다음의 조언에 반드시 귀를 기울이기를. 만약 당신이 전능한 소비자의 권리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행복한 독자라면 자비로운 당신의 신께 감사를 드리되 너무 자만하지는 마시길. 운명의 여신이 언제 변덕을 부려 끝없는 마감의 무간지옥으로 당신의 등을 떠밀지 모르니. 특히 ‘요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더욱 조심할 일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많이 웃고, 좋은 음식을 먹어두시라. 그것들이 당신의 인생에서 예고도 없이 사라지는 날이 오더라도 너무 후회하지는 않을 수 있도록.


* 재지(才智) 넘치는 세르반테스의 친구가 세상 모든 원고 납품업자들에게 전하는 탁월한 충고와 서평자의 잔머리가 괄호 안에 덧붙인 몇 가지 것들


1. 이야기에 삽입할 격언이나 문구를 인용할 때는 기억하고 있거나 혹은 찾는 데 그다지 시간이 안 걸리는 격언이나 라틴어 문구가 꼭 들어맞도록 궁리할 것. (혹은 검색을 통해 이런저런 블로그들에 잘 정리되어 있는 위인들의 명언이나 영어 속담, 인용문을 참고할 것.) 


2. 주석이 필요하다면 주석을 달기 쉬운 단어를 사용할 것. 이를테면 이야기에 골리아스라는 이름의 거인을 등장시켜 ‘거인 골리아스 또는 골리앗. 블레셋 사람으로서 양치는 다윗이 돌로 쳐서 엘라 골짜기에 쓰러뜨렸음. 사무엘 상 제17장의 기록에 의함’이라고 쓸 것.


3. 인문학이나 우주학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뽐내고 싶다면 이야기 속에 따호 강의 이름을 들 것. (이것은 당대 스페인의 문화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으로 보이므로 따호 강은 잊고, 사회와 정치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뽐내기 위해 4대강이나 새빛둥둥섬을 언급할 것.)


4. 책의 마지막에 실을 참고문헌과 저자들의 목록이 필요하다면 A에서 Z까지 최대한 많은 이름을 나열한 책을 찾아 그것을 고스란히 가져올 것. 방대한 목록이 달리 소용은 없다고 해도 책에 생각지 않던 권위를 부여해줄 수 있음을 기억할 것. (그런 책을 찾는 것조차 귀찮다면, ㄱ에서 ㅎ까지 무려 열 쪽에 달하는 방대한 목록을 나열하고 있는, 그럼에도 어떤 권위도 얻지 못한 <서서비행>(금정연 지음, 마티 펴냄)이라는 책을 살펴볼 것 —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네 번째 충고만은 절대 잊지 말 것.)


사려 깊은 친구는 소심한 우리를 위해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설혹 그것이 틀려서 학식을 보란 듯이 코끝에 내걸고 다니는 선생님들이나 엉터리 박사들이, 그 일로 자네를 헐뜯고 덤비거나 왁자하게 떠들어댄다고 하더라도 그야말로 눈썹 하나 꿈쩍할 것 없지 않은가? 아무리 그 인간들이 자네의 엉터리를 캐냈다고 하더라도 설마 그것을 쓴 자네의 손을 잘라버릴 수는 없을 테니 말일세.” (23쪽)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무려 열한 개나 되는 거창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소네트를 서두에 실은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는 돈 끼호떼가 사랑한 기사도 소설의 주인공들이 라 만차의 기사를 위해 보낸 소네트를 비롯, 돈 끼호떼의 사랑 둘씨네아 델 또보소에게 보내는 공주의 소네트와 위대한 기사의 종자가 산초 빤사에게 보내는 소네트, 그리고 ‘잡동사니 시인의 장난꾸러기’가 애마 로시난테에게 보내는 시까지 실어 자신의 책에 엄청난 권위를 부여하지만, 순진한 독자들을 속이기 위한 다른 기술은 거부한다. 돈 끼호떼의 이야기에 그런 잔재주는 필요없다는 친구의 충고 덕분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사도 책에 대한 공격이거든. 그런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꿈에도 생각지 않던 일이고, 성 바실리우스도 언급한 적이 없으며, 키케로조차 몰랐단 말일세. (…) 게다가 자네의 이 저작은 기사도에 관한 서적이 세상이나 속인들 사이에 갖고 있는 권위와 세력을 타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은 없으니까, 굳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철학자들에게는 잠언(箴言)을, 성서로부터는 조언을, 시인들에게는 우화를, 수사학자 제공들에게는 문장을, 성자들에게는 기적을 구걸할 필요는 전혀 없네.” (26쪽)


그리하여 ‘재기 넘치는 시골 귀족 돈 끼호떼 데 라 만차’의 이야기는, 우리가 보는 지금 모습 그대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기사도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 정신이 살짝 돈 시골 귀족의 이야기, 거침없지만 내 종자에게는 따듯한 편력기사의 지금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모험담, ‘우수에 찬 얼굴의 기사’의 슬픈 전설, 낭만주의의 영웅이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패배자의 필요 이상으로 세세한 기록, 그리고 성마르고 홀쭉한 주인과 통통한 종자의 세기적인 브로맨스(bromance)가… 


우리의 이야기 또한 여기에서 시작한다. 갈 길이 머니 신발 끈을 미리 꽉 조여 놓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길을 떠나기 전에 이 자리에 서서 잠깐 쉬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늘 마감과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가련한 서평가가 마침 이쯤에서 제5장을 마치기로 했기 때문이다.















2013. 3. 8. 프레시안북스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308143052&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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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이번 주가 돈 끼호떼 두 번째 원고 마감이라니 

정말 시간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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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다시 한 번, 라블레의 실패한 농담 그리고 팡타그뤼엘의 거대한 입에 관하여



격주로 연재되는 이 코너도 어느덧 4장에 접어들었으니 꼬박 두 달 동안이나 라블레의 거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셈이다. 지겹다고? 나도 그렇다. 당신은 그저 한숨을 쉬며 창을 끄면 그만이겠지만, 나는 라블레에 대한 또 한 편의 글을 써야만 하는 입장이다.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 어쨌거나, 아직도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고 있을 당신을 위한 마지막 요점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마침 적당한 구절이 있다.


모든 것이 미치광이 같은 소극이지만 라블레는 끊임없이 변하는 생각의 흐름, 문체와 지식의 모든 범주를 의도적으로 뒤죽박죽으로 혼성하는 기발한 생각으로 그것을 채우고 있다. (에리히 아우어바흐 <미메시스>(김우창.유종호 옮김, 민음사 펴냄) 373쪽)


말인즉슨,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이야기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당신 잘못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나의 잘못도 아니다. 전적으로 라블레의 잘못이다. 3장에서 우리는 “라블레는 재치있는 트윗으로 사회를 조롱하고 풍자하며 수많은 팔로워들을 거느리던 르네상스 시대의 파워 트위터리언에 불과한 걸까?”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지만, 만약 그가 오늘날의 글쟁이였다면 링크에 덧붙인 “쯧쯧쯧, 이런 게 글쟁이라고”,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바보가 여기 있네요” 같은 조롱과 함께 타임라인을 떠돌고 있을 게 분명하다. 놀랍지만 딱히 쓸모는 없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우리의 문해력은 나날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 세상의 평범한 이치다.


라블레는 바로 그 ‘뒤죽박죽’인 이야기를 통해 중세적 가치관을 폐기하려 한다. 


게다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라블레의 목적은 중세적 사고방식과 전면으로 상충된다. 이것은 개개 요소에조차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중세 후기의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지리적으로, 우주론적으로, 종교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일정한 뼈대 안에 한정되어 있다. 이들은 한 번에 사물의 한 국면만을 제시한다. 다양한 사물과 국면을 취급해야 할 때는 일반적인 질서라는 일정한 뼈대 속에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시도한다. (375쪽)


아우어바흐가 묘사하는 중세의 상황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일정한 뼈대 속에 사물의 다양한 국면을 욱여넣어 제시하는 것 — 이것은 이데올로기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수꼴’과 ‘좌좀’과 ‘깨시민’과 ‘진신류’ 들이 오늘도 하고 있는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을 ‘수꼴’과 ‘좌좀’과 ‘깨시민’과 ‘진신류’로 지칭하며 행해지는 일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러니 구태여 움베르토 에코의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라는 책 제목을 들먹일 이유도, 실은 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았다는 고백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신 얼마 전 소소한 화제가 되었던 한 칼럼을 떠올려보자. 정희진은 경향신문 칼럼(2013. 2. 15.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을 통해 “쉬운 글을 선호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쉬운 글은 내용이 쉬워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여서 쉬운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비슷한 이야기다. 물론 누군가는 그녀의 칼럼에 대해 “당신 글이야말로 이데올로기여서 불편하다”라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모든 칼은 그것을 휘두른 사람을 향해서도 겨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블레의 전략은 다르다.


그러나 라블레의 전체적인 노력은 사물이나 사물의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국면과의 희롱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완전한 혼란상을 띠고 있는 현상을 독자에게 보여 줌으로써 현상을 바라보는 일정한 습관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리하여 비록 위험을 무릅써야 하기는 하지만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세계의 큰 바다로 독자를 꼬여내는 데 힘쓴다. (<미메시스> 375쪽)


라블레는 내용이 아닌 형식, 차라리 ‘쓰기’ 자체를 통해 세계와 대립한다. 아우어바흐의 설명은 앞장에서 살펴본 바흐친의 주장을 조금 ‘쉽게’ 풀어쓴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 바흐친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어렵게 쓴 함량미달의 글쟁이인가? 혹은, 아우어바흐야말로 복잡할 수밖에 없는 내용을 일정한 뼈대에 억지로 욱여넣어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바꾼 위험한 글쟁이인가? 글쎄, 나는 별로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해야겠다. 혹시라도 궁금한 독자가 있다면 직접 알아보세요.


다만 분명한 것은 <미메시스>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아우어바흐가 모든 작품을 재현과 모방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팡타그뤼엘의 거대한 입과 그 속에 재현된 세상의 모습에 주목한다. 이런 이야기다.


팡타그뤼엘의 군대가 길을 가던 중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팡타그뤼엘은 혀를 내밀어 군대가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가려준다. 이때, 화자가 혀 위를 기어올라 입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산과 같은 거대한 바위(치아)들과, “큰 들판과 큰 숲들, 그리고 리옹이나 푸아티에보다 작지 않은 큰 도시들을” 본다. 깜짝 놀란 그가 양배추를 심고 있던 노인에게 묻는다.


“친구, 자네는 무엇을 하고 있나?”

— 양배추를 (그가 말했다) 심고 있습지요.

— 그런데 왜, 그리고 어떻게? 내가 말했다.

— 아, 나리, (그가 말했다) 누구나 절구처럼 무거운 불알을 가질 수 없듯이 모두 부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소인은 이렇게 이것들을 이곳 뒤에 있는 도시의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요.

— 예수님, 이럴 수가! (내가 말했다) 여기에 신세계가 있단 말인가?

— 이곳은 (그가 말했다) 전혀 새로운 곳이 아니랍니다. 그런데 사람들 말로 이곳 밖에 새로운 땅이 있는데 그곳에는 해와 달이 있고 멋진 일들이 잔뜩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곳이 더 오래되었지요.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472~473쪽)


“이곳은 전혀 새로운 곳이 아니랍니다”라는 영감의 말. 그것이 바로 아우어바흐가 하고 싶은 말이다. 참고로 “누구나 절구처럼 무거운 불알을 가질 수 없듯이 모두 부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라는 영감의 말. 그것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다.


이 고르지아(*입속 세상의 이름)의 세계에 관한 가장 놀랍고도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은 그것이 우리 세계와 전혀 다르지도 않고 도리어 자질구레한 세목에 있어서도 닮아 있다는 점이다. 그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음에도 우리 쪽 세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세계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다른 점에서는 무척 똑같다. 그리하여 라블레는 역할을 교환하는 기회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다시 말해서 배추 심는 농부를 외부 세계의 이방인을 유럽인다운 순박함으로 맞아들이는 토박이 유럽인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또 라블레는 일상생활의 사실적 장면을 전개하는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다. (…) 거대한 규모와 대담한 발견 여행이라는 뼈대 전체는 그저 우리에게 배추 심기에 종사하고 있는 투렌의 농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작동된 것처럼 보인다. (<미메시스> 369~370쪽)


이 자리에서 아우어바흐의 관점에 대해 길게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다. 공연히 서투른 이야기를 꺼내 선생님들을 화나게 하고 싶은 생각도 없거니와 21세기 한국에서는 별로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도록 하자. 아우어바흐의 지적처럼 입속 세계라는 환상적인 공간이 우리 세계와 다를 바 없는 곳이라는 사실은 분명 우리를 웃게 한다. 최소한 아우어바흐는 크게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우스꽝스러운 부분은 아니다. 이 에피소드의 핵심은 마지막, 다시 세상으로 나온 화자와 팡타그뤼엘의 대화에 있다.


그는 나를 보자 내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알코프리바스?”

내가 대답했다.

“전하의 목구멍에서입니다.

— 그러면 언제부터 거기 있었나? 그가 말했다.

— 전하께서 (내가 말했다) 알미로드인들을 향해 진군하셨을 때부터입니다.

— 지금으로부터 (그가 말했다) 여섯 달도 더 전이로군. 그러면 자네는 무엇을 먹고살았나? 무엇을 마셨는가?

내가 대답했다.

“전하, 전하와 같은 것이지요. 전하의 목구멍을 넘어오는 것 중에서 가장 맛있는 조각을 통행세로 징수했지요.

— 그랬군, 그런데 (그가 말했다) 자네는 어디에 똥을 쌌는가?

— 전하의 목구멍 속이랍니다. 내가 말했다.

— 하, 하, 자네는 재미있는 친구로군. (그가 말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딥소디인들의 나라를 모두 정복했다네. 자네에게 살미공댕의 영지를 하사하지.

— 대단히 감사합니다. (내가 말했다) 전하께서 제 공로보다 훨씬 큰 상을 내려주시다니.”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475~476쪽)


이 얼마나 감동적인 대화인가! 전쟁 기간 동안 말도 없이 사라진 부하다. 하지만 문책은커녕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묻고 있다. 나아가 똥은 어디에 쌌냐고 묻는 군주와 “전하의 목구멍 속이랍니다”라고 해맑게 답하는 신하의 모습에는 절로 눈물이 흐를 지경이다. 이것이야말로 싸는 동시에 먹는 것의 완벽한 구현이 아닌가? 심지어 팡타그뤼엘은 영지를 하사하는데, 그것은 바로 알코프리바스가 입속 세계에서 신선놀음 하는 동안 끝나버린 전쟁을 통해 정복한 땅이다.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작품의 클라이막스가 되었어야 마땅할 전쟁이 화자의 입속 여행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가르강튀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다소 지루한 전쟁 묘사와 대조를 이룬다. 목동과 빵과자 장수 들의 사소한 다툼이 전쟁으로 번지는 과정을 통해 라블레는 조금 더 직접적인 풍자를 노린다. 적국의 왕과 가신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림으로써 당대의 지배 계급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직접적인 풍자는 우습지 않다. 어쩌면 번역으로는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언어유희 때문일 수도, 단순한 분량 때문일 수도, 라블레와 우리 사이의 시차 탓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말해야겠다. 가르강튀아의 전쟁 이야기는 라블레의 실패한 농담이라고.


그렇다면 라블레는 왜? <팡타그뤼엘>에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근사한 방식으로 전쟁 장면을 생략한 그다. <가르강튀아>에서 또한 전쟁 장면 따위는 건너뛸 수 있었을 거란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나는 그것이 라블레의 신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작품을 통해 라블레는 자신이 그리는 세계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차원이 아닌) 구세계의 파괴가 필요했던 것이다. 파괴, 그것은 물론 전쟁이다. 그렇다면 그가 꿈꾸던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전쟁이 끝난 후, 부하들에게 상을 내리던 가르강튀아는 용맹한 수도사 장을 쇠이예의 수도원장으로 임명하려 한다. 하지만 장은 그 제안을 거절하는 대신 새로운 수도원을 세워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텔렘(* 주석에 따르면 “그리스어로 의지라는 뜻이다. 텔렘 수도원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최대한 보장하는 자발적인 수도의 장(場)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지방 전체에 “다른 교단들과는 정반대의 교단”이 세워지게 된다. 라블레는 특유의 장광설로 몇 장에 걸쳐 텔렘 수도원의 모습을 그리는데, 그중에서도 텔렘 수도사들의 생활방식에는 라블레의 위마니슴이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다.


그들의 모든 생활은 법이나 규정, 규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의사와 자유의지에 따라 관리되었다. 그들은 원할 때 침대에서 일어나,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길 때 먹고 마시고 일하고 잠을 잤다. 아무도 그들을 깨우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에게 먹거나 마시고, 무슨 일이거나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가르강튀아가 정해놓았던 것이다. 그들의 규칙이라고는 ‘원하는 바를 행하라’는 조항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는 자유로운 인간들에게는 천성적으로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하고 악을 멀리하도록 하는 본능이 있고 그들이 명예라고 부르는 자극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수치스러운 굴종과 강제에 의하여 억압받고 예속될 때, 그들에게 자유롭게 미덕을 추구하며 예속의 굴레를 떨쳐버리고 거역하게 하던 고상한 성향은 왜곡된다. 우리는 언제나 금지된 일을 시도하고 우리에게 거부된 것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254쪽)


무척 아름다운 이야기다. 하지만 지루하다. 라블레는 이어 수도원의 기초에서 발견되었다는 커다란 청동판에 씌어진 수수께끼를 옮기고 있는데, 그것은 신세계에 대한 노골적인 찬가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인가? 아마도. 유토피아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현실의 질서를 은폐하는 것일 테니까. ‘어디에도 없다(nowhere)’라는 그 단어의 뜻은 이제 너무 식상해서 싸이월드에나 가야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우리는 뒷목을 부여잡고 “라블레, 너 마저…”라고 뇌까리며 그의 책을 집어던져야 하는 것일까? 


설마. 


청동판에 적힌 수수께끼를 소리 내 읽은 가르강튀아에게 수도사가 묻는다. 


“전하의 견해로는 이 수수께끼가 무엇을 가리키고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뭐라니? (가르강튀아가 말했다) 성스러운 진리의 진행과 영속성을 말한 것이라오.

— 성 고드랑을 두고 말이지만, (수도사가 말했다) 제 해석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언자 메를랭의 문체입니다. 원하시는 만큼 심오한 알레고리와 의미를 부여하시고, 전하와 모두들 좋으실 대로 추론하십시오. 저로서는 모호한 말로 정구 경기를 묘사한 것 외에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들이란 시합을 주선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은 보통 친구 사이랍니다. 두 번 서비스를 넣은 다음에는 경기장 안에 있던 사람은 밖으로 나가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게 되지요. 먼젓번 사람에게 공이 선 위로 지나갔는지 아래로 지나갔는지를 알리도록 합니다. 홍수는 땀을 말하고, 라켓의 줄은 양이나 염소의 창자로 만들지요. 둥근 물체는 실뭉치나 공을 가리키는 것이고요. 경기가 끝난 다음 사람들은 환한 불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속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다음에는 보통 주연을 벌이는데, 승리한 사람들이 더 신나게 마시지요. 그러고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거지요!” (261~262쪽)


그렇다. 그 수수께끼는 사실 정구 경기의 모습을 장중한 문체로 묘사한 당대의 유행하던 수수께끼 시로, 라블레는 첫 두 행과 마지막 열 행을 추가하여 원래의 시와 다른 의미로 해석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 모두와 가르강튀아를 속인 후, 수도사 장으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해 우리에게 말하도록 한다. “원하시는 만큼 심오한 알레고리와 의미를 부여하시고, 전하와 모두들 좋으실 대로 추론하십시오.”


물론 그것은 단순히 마지막 수수께끼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라블레는 자신의 작품이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 설령 그것이 자기 자신의 신념일지라도. 그리하여 라블레의 실패한 농담은 이제 거대한 농담의 일부가 된다. 라블레는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라블레의 위대함이다. 그리고 라블레에 대한 찬사는, 얼마나 거창한 찬사이건 간에, 실패할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고전에 대한 글을 쓰는 즐거움이다.


<가르강튀아> 발표 십이 년 후 세상에 나온  <제3서>의 내용은 거인왕의 일대기였던 전작들과는 달리 팡타그뤼엘의 친구 파뉘르주가 결혼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며 다양한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어지는 <제4서>는 앞선 문답에서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파뉘르주가 팡타그뤼엘을 비롯한 패거리와 함께 ‘신성한 술병’(!)의 신탁을 듣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일종의 여행기다. 라블레가 세상을 떠난 후 출간된 <제5서>는 위작 논란이 끊이지 않는 작품인데, 아마 그 탓인지 국내에는 번역조차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마지막 권에서 일행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고, 여사제를 통해 신탁의 내용을 전해 듣는다. 여사제는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마셔라! Trinch”


그것이야말로 팡타그뤼엘리슴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는 이쯤에서 수다를 멈추고 잔을 채우는 것이 좋겠다. 아우어바흐 또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라블레의 숨은 의미, 즉 뼈의 골수에 천착하여 분명하고도 윤곽이 뚜렷한 교의를 찾아내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작품 속에 숨겨져 있으나 수많은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은 스스로 팡타그뤼엘리슴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지적인 태도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것과 관능적인 것을 동시에 이해하며 어떠한 삶의 가능성도 소홀히 하지 않는 삶의 파악이다. 그것을 더욱 상세히 서술한다는 것은 현명한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자신도 모르게 즉각 경쟁하는 처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라블레 자신이 항시 그것을 서술하고 있으며 우리보다 더 잘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미메시스> 383쪽)


그러니 이 글은 잊고 서점으로 달려가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을 읽어라. “그리고 원하시는 만큼 심오한 알레고리와 의미를 부여하시고, 모두들 좋으실 대로 추론하십시오.” 그것이 내가 짧지 않은 글을 읽어준 당신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이다. 그럼 그냥 그렇게 말하지 왜 이리 긴 헛소리를 늘어놓았느냐고? 앗, 이런, 어느새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끝나버린 모양이다. 나는 라블레를 따라 이렇게 말해야겠다.


안녕히 계시라, 여러분. 나를 용서하라. 그리고 내가 당신들의 잘못에 개의치 않는 만큼 내 잘못도 염두에 두지 말기를 바란다.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482쪽)


‘미친 거리의 전도사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웨일스의 밴드는 언젠가 이렇게 노래했다. 


난 그저 당신이 우리를 용서해주길 바라

하지만 모든 것은 계속되어야만 하지 


만약 당신에게 설명이 필요하다면

그때 모든 것은 계속되어야만 해!

(Manic Street Preachers ‐ ‘Everything Must Go’)
















2013. 2. 22. 프레시안북스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222113725&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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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3회로 끝낼 예정이었던 라블레를 4회로 끝내고, 오늘 마감이었던 돈 끼호떼 첫회를 넘겼다. 잊지 않고 서재에도 꼬박꼬박 올려두려고 했는데, 게으른 탓에 자꾸만 때를 놓치고 만다. 


원고를 넘기고 오랜 만에 냉장고 청소를 했다. 청소라기보다는 벌써 몇 년이나 냉장고에서 묵어가던 더는 먹지 않는 김치류를 치웠을 뿐이다. 어떤 김치에는 곰팡이가 피었고, 어떤 김치에서는 와인 냄새가 났다. 타자를 치는 손에서는 김치 냄새가 난다. 얼른 씻고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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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라블레의 실패한 농담 그리고 팡타그뤼엘의 거대한 입에 관하여



그렇다면 라블레는 재치 있는 트윗으로 사회를 조롱하고 풍자하며 수많은 팔로워들을 거느리던 르네상스 시대의 파워 트위터리언에 불과한 걸까? 바흐친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라블레의 전략에서 풍자의 한계를 보는 대신 원대한 예술적 기획을 본다. 


사제와 수도승, 왕과 영주, 기사나 부유한 시민, 학자와 법률가의 언어, 즉 권력을 쥐고 있고 풍족한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언어에 대항하여 유쾌한 악한의 언어가 제시된다. 그리하여 이 언어는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서든 어떠한 파토스라도 희화적으로 재생시키지만 이럴 경우 언제나 그 언어를 미소나 가식을 통해 ‘입으로부터 떼어냄으로써’ 그 언어를 중립화하고 그것의 거짓됨을 조롱하며 그럼으로써 거짓말을 유쾌한 속임수로 바꾸어놓는다. 허위는 반어적 의식에 의해 조명되며 유쾌한 악한의 입을 통해 스스로를 패러디한다. (<장편소설과 민중언어>(전승희.서경희.박유미 옮김, 창비 펴냄) 232쪽)


바흐친의 독법 속에서 더 이상 라블레는 권력자의 발밑에 ‘콩알탄’을 던지며 낄낄대는 무해한 악동이 아니다. 우스꽝스러운 언어적 모험, 차라리 기행을 통해 라블레가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언어의 허위성이다.


우리는 그가 구문의 구조에 대한 패러디적 파괴를 통해 인간 언어 자체의 기만적 성격을 조롱하고 그럼으로써 많은 단어들의 논리적이고 표현적인 측면(예컨대 단정이나 설명 따위를 나타내는 측면)을 부조리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언어로부터의 등돌림(이는 물론 언어를 수단으로 한 것이지만)이라든가 이데올로기적 담론에 흔히 나타나는 의도의 직접적 표출이나 과도한 표현(지나치게 ‘무게’를 잡는 진지성)에 대한 불신, 모든 언어가 관습적이고 허위에 물들어 있으며 악의적으로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가정, 이 모든 것들이 라블레의 작품 속에서 산문에서 가능한 가장 순수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122쪽)


이제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단순히 라블레의 문장에서 드러나는 일차적인 의미가 아니다. 문장 뒤에 도사리고 있는 숨은 의미 따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며 문장을 쌓아가는 행위, 다시 말해 라블레의 ‘쓰기’ 자체가 문제다. 


바흐친에 따르면 “사물과 관념은 그들의 본성에 어긋나는 그릇된 위계적 관계로 결합되기도 하”며, “이러한 그릇된 결합은 학문적인 사고, 거짓된 신학적‧법적 궤변 및 궁극적으로는 언어 자체에 의해 강화된다”고 한다. 언어야말로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친 과오로 가득 차있다는 것이다. 바흐친의 라블레는 이 잘못된 결합을 끊어내고, 사물들을 해방시킨 후, 그들 각각에게 걸맞은 새로운 결합을 찾고자 한다 — 다름 아닌 언어를 통해서. “따라서 라블레에게 있어서는 낡은 세계상을 파괴하는 작업과 새로운 세계상을 건설하는 긍정적 작업이 서로 불가분으로 얽혀 있는 것이다.” (364쪽)


그렇다면 라블레가 제시하는 새로운 결합이란 무엇인가? 바흐친은 그것을 일곱 개의 시리즈로 분류한다. 


1. 해부학적·생리학적 측면에서 본 인간 육체의 시리즈

2. 의복의 시리즈

3. 음식의 시리즈

4. 음주와 취태(醉態)의 시리즈

5. 성(性)의 시리즈

6. 죽음의 시리즈

7. 배설의 시리즈 


동작그만,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같은데? 가슴 사이즈와 ‘식스팩’에 대한 지치지 않는 탐구(해부학적‧생리학적 측면에서 본 인간 육체의 시리즈),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옷차림에 대한 비아냥(의복의 시리즈), 때를 가리지 않고 올라오는 다양한 음식 사진과 주린 배를 절로 움켜쥐게 만드는 야식 타령(음식의 시리즈), 다음 날이면 지워지곤 하는 깊은 밤의 욕설(음주와 취태의 시리즈), 각종 ‘섹드립’(성의 시리즈)과 ‘똥드립’(배설의 시리즈)과 죽고 싶다는 토로와 죽여 버리겠다는 엄포(죽음의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이거, 이거 다 트위터 ‘드립’ 아녀? 자 모두들 보쇼. 바흐친이라는 이름으로 대충 퉁치고 넘어가겠다, 이거 아녀?


그럴 리가. 나는 지금 약을 파는 게 아니라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바흐친의 말에는, 관념과 관념 사이로 우아한 도약을 감행하는 그의 이론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사실에 내 돈 모두하고 손모가지를 건다(당신이 탐낼만한 재산과 손모가지는 아닐 거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그것을 차근차근 설명할 생각이 없다. 능력이 없다고 말해도 좋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바흐친이 40여 쪽에 걸쳐 풀어내는 녹록치 않은 이야기를 내가 무슨 수로 요약한단 말인가?


물론 나도 마음이 아프다. 어쩌면 나는 문제의 부분이 있는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365쪽에서 408쪽까지를 찬찬히 곱씹은 후, 잘 요리된 정보에 목마른 선량한 독자들을 위해 그 일을 해내야 했는지도 모른다. 나아가 바흐친의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이덕형.최건형 옮김, 아카넷 펴냄)마저 독파한 후, 레포트를 써야하지만 두꺼운 책을 읽을 시간은 없는 대학생들을 위해 그럴 듯한 요점 정리를 해두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모두 나의 불찰이다.


하지만 친구여, 생각해 보라. 일개 서평가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세상에 박사님들이 왜 필요하며 두꺼운 이론서들이 왜 필요하겠는가? 물론 내게도 직업윤리라는 게 있어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를 찾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절판되어 정가 35000원짜리 책이 중고가 64500원에 팔리는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나마 남아 있던 그 책 또한 이틀 후에 팔려버렸는데? 내가 이 글을 쓰고 얼마를 받는지 당신은 아는가? 도서관에 가면 되지 않느냐고? 이 추운 겨울에?


대신 나는 블라지미르 쁘로쁘의 <희극성과 웃음>(정막래 옮김, 나남 펴냄)이라는 정가 25000원짜리 책을 1%의 할인도 받지 않고 구입했고, 친절한 색인(학술서에 색인을 넣지 않는 출판사에 저주가 있을지어다)의 도움을 받아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웃음 뒤에는 절대로 폭력이 있을 수 없고 웃음은 장작더미를 쌓아올리지 않으며 위선과 기만은 절대로 웃는 법이 없이 근엄한 가면을 쓰고 있고 웃음은 교리를 만들지 않고 권위적이지 않으며 웃음이 자각하는 것은 공포가 아닌 힘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근엄함을 믿지 않고 축제날의 웃음을 믿었다(바흐찐, 107). (245쪽) (*주술관계가 조금 이상하지만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그렇지만 내가 이미 가지고 있던 정가 10000원짜리 구판 <장편소설과 민중언어>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고, 일곱 개의 시리즈와 관련된 부분도 아니니 나는 25000원을 고스란히 날린 꼴이 되었다. 언젠가 절판되어 비싼 값에 되팔 수 있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54500원 정도를 챙길 수도 있겠지. 물가인상률을 반영한다면 조금 더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만 기약할 수 없는 미래의 54500원보다는 눈앞의 25000원이 훨씬 절실한 법. 나는 묻고 싶다. 이건 도대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그러니 공연히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그만두고 라블레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채 해결되지 않은 부분들은 바흐친과 박사님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의 길을 가도록 하자.


낡은 세계상을 파괴하는 동시에 새로운 세계상을 건설하는 것 — 그것이 바로 라블레가 하는 일이다. 이 말이 너무 추상적이라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싸는 동시에 먹는 것 — 그것이 바로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을 통해 라블레가 하고 있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싸면서 책을 읽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일일 것이다.


우리는 앞서 가르강튀아의 출생으로 이어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탈장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것을 싸는 것의 환유라고 하자. 그렇다면 먹는 것의 환유는? 이쯤에서 팡타그뤼엘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물론 <가르강튀아>에도 탈장의 원인이 되었던 엄청난 양의 소 창자 요리를 비롯, 하정우의 ‘먹방’에 견줄만한 인상적인 장면들이 가득하지만, 순전히 진행상의 편의를 위해서다. 벌써 밤이 깊었고, 우리에게 허락된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먼저 ‘족보’를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팡타그뤼엘>은 라블레의 첫 번째 소설이다. 하지만 <팡타그뤼엘 연서>의 첫 번째 책은 아니다. <거대한 거인 가르강튀아의 위대하고도 지고한 평전>(혹은 <거대한 거인 가르강튀아의 놀라운 대연대기>)이라는 작자 미상의 대중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라블레가 먼저 가르강튀아의 아들 팡타그뤼엘이 등장하는 후속편을 쓰고, 2년이 지난 후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가르강튀아의 이야기를 다시 쓴 것이다. 이어지는 3서와 4서, 그리고 사후에 발표된 (위작 논란에 시달리는) 5서는 모두 팡타그뤼엘의 이야기이고, 따라서 아버지 가르강튀아의 이야기가 연서의 첫 번째 책이 되었다.


팡타그뤼엘은 원래 “술에 취해 잠든 사람들의 입에 소금을 뿌리고 다닌다고 알려진 전설에 나오는 작은 악마의 이름”이라고 한다. 라블레는 이것을 살짝 비틀어 팡타그뤼엘을 사람들에게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소개한다. 바로 이렇게.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 바드벡의 해산 중에 산파들이 아이를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을 때, 그녀의 배에서 먼저 각자 소금을 잔뜩 실은 노새 고삐를 잡은 예순여덟 명의 노새 몰이꾼들이 나왔고, 그다음으로 햄과 훈제한 소혀를 실은 아홉 마리의 단봉낙타와 작은 뱀장어들을 실은 일곱 마리의 쌍봉낙타, 그리고 스물다섯 수레분의 파와 마늘, 양파, 골파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를 보고 앞에 말한 산파들은 두려워했지만, 그중 몇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식량이군요. 우리가 전에는 찔끔찔끔 마실 수밖에 없었지만 이젠 실컷 마실 수 있겠어요. 이것들은 포도주를 당기게 하는 것이니까 좋은 징조예요.”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286쪽)


<팡타그뤼엘>은 <가르강튀아>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탄생과 성장, 전투와 승리라는 상승의 플롯을 따라 굴러가지만, 훨씬 느슨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지 웃기기 위해 쓴 에피소드들의 나열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고 할까. 특히 파뉘르주(팡타그뤼엘의 단짝이자 훗날 3서와 4서의 중심인물이 되는)가 저지르는 온갖 악행을 나열하는 장들은 별개의 피카레스크 소설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다. 하지만 그만큼 웃음의 순도는 높아서, 일곱 개의 시리즈가 끊임없이 변주되는 가운데 노골적인 음담패설(여성과 도끼가 등장하는 만국 공통의 이야기 포함)과 차라리 초현실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몸개그’들이 쉴 새 없이 펼쳐진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을 보라. 영국의 위대한 학자 토마스트가 파뉘르주와 논쟁을 하는 장면이다. 단, 그들은 말이 아닌 몸짓으로 논쟁을 하고 있는데, 영국인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왜냐하면 이 논제들은 매우 까다로운 것들이어서 사람의 말은 내가 원하는 만큼 그것을 설명해내는 데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그때 영국인은 다음과 같은 몸짓을 했다. 왼손을 활짝 펼치고 공중에 높이 쳐들었다가 네 손가락을 오므려 주먹을 쥐고 엄지손가락은 뻗어서 콧날 위에 갖다댔다. 그러고는 갑자기 오른손을 펴서 쳐들었다가 펼친 채로 내려 왼손 새끼손가락을 오므린 곳에 붙이고는 왼손의 네 손가락을 공중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반대로 오른손으로 왼손이 했던 동작을 반복하고, 왼손으로는 오른손이 했던 동작을 반복했다.


파뉘르주는 이에 놀라지 않고, 왼손으로 그의 거대한 바지 앞주머니를 공중으로 당겨 쳐들고, 오른손으로 그 안에서 흰 암소의 등살 한조각과 하나는 흑단, 하나는 브라질산 담홍색 목재로 만든 같은 모양의 나무토막 두 개를 꺼내서는 균형을 잘 잡아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맞부딪치게 해서 브르타뉴 지방의 문둥이들이 딱딱이로 내던 소리와 비슷하면서도 더 잘 울리고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영국인을 바라보며, 입 안에서는 혀를 오므려 신나게 흥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신학자들, 의사와 외과의사들은 이 몸짓을 보고 그가 영국인을 문둥이라고 추론했다고 생각했다.

판사들, 법률학자들, 교회법 학자들은 예전에 구세주께서 주장하셨듯이, 인간에게 있어서 일종의 지복은 문둥이가 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그가 내리려 한다고 생각했다. (396쪽)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같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우스타 쿄스케의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를 읽었으리라. 그리고 우스타 쿄스케는 라블레를 읽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에 내 여자친구 집에 있는, 그녀가 자신의 돈을 주고 구입한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 7권에서 15권까지를 걸 수도 있다. 어쨌거나 참 멋진 만화책 아닙니까.


어쩌면 당신은 웃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는 심각한 독자가 분명하군요. 훌륭합니다. 문득 ‘지나치게 무게를 잡는 진지성’이라는 바흐친의 표현이 떠오르지만 기분 탓이겠죠. 그런 당신을 위한 라블레의 첨언 : 


토마스트가 제기한 논제들의 해설과 그들이 토론할 때 했던 몸짓의 의미에 관해서는 그들이 직접 말했던 대로 여러분에게 설명할 생각이었지만, 사람들이 말하기를 토마스트가 이에 관한 커다란 책을 써서 런던에서 출판했고, 그 책에서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고 밝혔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으로서는 그 일에 손을 대지 않으련다. (403쪽)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라블레의 농담이야말로 서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16000원짜리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내가 왜 그것을 설명해야 하지? 그 덕에 나는 제목에서 예고한 라블레의 실패한 농담과 팡타그뤼엘의 거대한 입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는데? 이건 또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하지만 친구여, 오늘은, 오늘 단 하루만큼은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그만두기로 하자. 그리고 건배. 좋은 술과 안주로 몸을 따뜻하게 덥히고, 못다 한 약속은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자. 


“평화로이, 즐겁고, 건강하게, 언제나 좋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팡타그뤼엘리슴(팡타그뤼엘의 사상)이니까.

















2013. 2. 8. 프레시안북스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208125405&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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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거리의 엉덩이에서 튀어나온 거인의 외침 그리고 그가 들려준 더럽고 새로운 이야기



라블레는 거리의 전도사였다. 원한다면 여기에 ‘미친’이라는 수식을 붙여도 좋다. 미친 거리의 전도사 — 제법 그럴듯한 호칭이다(그러니 여기서 라블레가 전도사가 아니라 프란체스코파의 수사였다는 적절한 지적은 하지 말기로 하자). 비슷한 이름을 가진 웨일즈의 한 밴드는 언젠가 이렇게 노래했다.


“사랑 따윈 논하지 않아, 우린 그저 취하고 싶을 뿐!”

(Manic Street Preachers, ‘A Design For Life’)


사랑 따윈 논하지 않고 그저 취하는 것. 그것이 바로 라블레가 추구하는 일이다.


사랑하는(*이것이 단지 수사적인 표현일 뿐이라는 것을 굳이 지적해야 할까? 이 또한 수사의문문일 뿐인데?) 그대들이여, 즐겨라. 그리고 허리에 좋게 몸을 편안히 하고 즐겁게 남은 부분을 읽도록 하라. 그리고 너희들, 당나귀 좆 같은 놈들아. 다리에 종양이 생겨 절름발이나 되어버려라!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나를 위하여 건배하는 것을 잊지 말라. 나도 즉석에서 축배를 들어 답례하겠다. (‘작가 서문’,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20쪽)


과연 도널드 서순이 그의 방대하고도 아름다운 다섯 권짜리 대작 <유럽문화사>(오숙은.이은진.정영목.한경희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에서 프랑스에 ‘국민시인’이 없는 이유를 분석하며 “라블레는 너무 상스럽고 분변학적(이라 국민시인이 될 수 없었다)”라고 말한 이유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는 또한 샹송가수들이 “라블레한테서는 외설적인 말놀이를 빌려왔다”고 언급하기도 하는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굳이 이 자리에 소개하는 것은 물론 내가 얼마전에 문제의 <유럽문화사> 전권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다. 적어도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무척 기쁘다.


한편 서순의 서술은 <세계문학의 구조>(조영일 지음, 도서출판b 펴냄)에 등장하는 ‘국민 작가’라는 개념을 둘러싼 조영일과 장정일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장정일은 서평을 통해 “조영일은 ‘국민 가수’ ‘국민 배우’ ‘국민 투수’에다 ‘국민 여동생’까지 있으니, ‘국민 작가’도 있는 줄 안다”고 조소했는데, 이건 사실 해당 논쟁의 매우 국지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니 이쯤에서 넘어가도록 하자.


<가르강튀아>의 주인공 가르강튀아의 출생 장면은 서순이 지적한 라블레의 ‘상스럽고 분변학적’인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때는 어느 봄날, 가르강튀아의 아버지 그랑구지에가 다스리는 유토피아에 잔치가 벌어진다. 그들은 ‘술을 더 잘 마실 수 있도록’ 36만7천14 마리의 소를 잡는데, 소 창자가 쉬이 상한다는 점을 고려해서 인근 주민들을 모두 모아 남김없이 먹어치우기로 결정한다. 알다시피 소 창자는 “누구나 손가락을 핥을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고, 가르강튀아의 어머니 가르가멜도 참 좋아하는데, 문제는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에 있다. 사려 깊은 남편인 그랑구지에는 아내의 건강을 위해 소식을 권한다.


“똥 껍데기를 먹으면 똥이 먹고 싶어진다오.”


하지만 자존감 충만한 신여성이었던 가르가멜은 남편의 충고를 따르는 대신 큰 통으로 열여섯 통, 중간 크기의 두 통하고 여섯 항아리 분량의 창자를 먹어치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약 5톤 분량의 창자를 뚝딱한 것이다. 세상에! 이토록 놀라운 인체의 신비를 라블레는 간단하게 논평한다. “얼마나 멋진 대변이 그녀 몸속에서 들끓었겠는가!”


아니나다를까, 저마다 양껏 먹고 마시며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가르가멜의 아랫배가 조금씩 아파오기 시작한다. 진통이 오는 걸까? 다시 한 번 다정한 말로 아내를 위로하는 그랑구지에. “암양처럼 용기를 가져요. 이 애를 얼른 낳아버리고 곧 다른 아이를 만듭시다.” 그런 남편에게 가르가멜 역시 살갑게 대꾸한다.


“아, 좋으실 대로 말씀하세요. 당신들 남자들이란! 그래요, 정말이지, 당신이 원하니 있는 힘을 다하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걸 잘라버렸다면 좋았을 것을!”


잠시 거세의 공포에 몸을 떨던 그랑구지에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 통증이 오면 두 손을 입에 대고 소리를 지르라고 이른 후 다시 즐거운 술자리로 돌아간다. 옛날 우리네 아버지들이 떠오르는 뭉클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얼마 후,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된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괴로워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즉시 사방에서 많은 산파들이 달려와서 밑을 만져보고, 나쁜 냄새가 나는 살덩어리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내장요리를 너무 많이 먹은 탓으로 (여러분이 항문에 붙은 창자라고 부르는) 직장이 늘어나며 그녀에게서 빠져버린 항문이었다. (46쪽)


세계문학사, 나아가 인류의 모든 예술 장르를 통틀어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탈장’ 장면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아직 그런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상상조차 하기 싫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산파 무리 중 “육십 년 이상 의술에 종사하며 솜씨를 인정받았던 더러운 차림새의 노파가 강력한 수렴제를 투여”했고, 그 결과 “모든 괄약근이 수축해서 닫혀버려 이로 물어 벌리기도 몹시 힘이 드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으니까. 그래도 탈장은 해결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곧이어 태어난 가르강튀아가 난생 처음으로 접한 광경이 제자리를 벗어난 어머니의 직장이 되는 상황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니까.


가르강튀아는 출생부터 남달랐다. 그는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대신 엉뚱하게도 “위쪽으로 솟아올라 공정맥으로 들어가서는 횡경막을 지나 (그 정맥이 둘로 나뉘는) 어깨 위까지 기어올라간 다음 왼쪽 길을 따라 왼쪽 귀로 나왔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술자리의 모든 사람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마실 것! 마실 것! 마실 것!”


물론 그가 목놓아 요구한 것이 어머니의 젖은 아니었다.


한편, 부어라 마셔라 흥겹게 놀고 있던 그랑구지에는 멀리서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돌연 복받치는 부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너 참 (목청이) 크구나!Que grand tu as!”라고 뇌까렸고, 바로 그것이 아이에게 가르강튀아(Gargantua)라는 이름이 붙여진 까닭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까닭이라고 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제2외국어로 중국어(첫 두 시험은 90점 이상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3년을 평균하면 40점을 넘지 않았다)를 배우고, 교양필수과목으로 초급일어(가타가나를 외우지 못해 D+를 받았고 재수강은 하지 않았다)를 수강한 내가 불어 발음을 알게 뭔가? 그렇다고 하니 그냥 그렇게 알 뿐이다.


<가르강튀아>는 이런 가르강튀아의 이야기다. 상스럽고 분변학적이며 우스꽝스럽고 또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이자, 중세 기사도 소설의 구조를 따라 주인공의 탄생부터 성장과 교육, 결정적인 전쟁(혹은 결투)에 승리한 후 마침내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상승 플롯의 이야기. 사실 주인공 또한 민간 설화 속의 주인공에서 빌려온 것으로, 당대에 이미 <거대한 거인 가르강튀아의 위대하고도 지고한 평전>이라는 작자 미상의 대중소설이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라블레 또한 서문을 통해 도용 아닌 도용을 흔쾌히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라블레의 작품을 단순한 답습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는 낡은 중세 기사도 소설의 형식을 비틀어 자신의 스타일로 전유한 것이다. “문화연구에서 전유는 어떤 형태의 문화자본을 인수하여 그 문화자본의 원(元) 소유자에게 적대적으로 만드는 행동을 가리킨다”라는 문학비평용어사전의 정의 그대로. 문학비평용어 따위 알고 싶지 않다면 국어사전을 찾아도 좋다. “~을 혼자 독차지하여 가지다”라는 풀이가 가리키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당대인들의 밤잠을 설치게 하던 기사도 소설이 아닌, 라블레가 독차지한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이야기니까. 비록 70년 후, 세르반테스와 돈 키호테와 산초 트리오에게 그들의 지분을 상당 부분 빼앗길 운명이긴 하지만.


라블레는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이 시대 속에서 소설을 과거의 희화적 개작, 즉 패러디의 장으로 삼음으로써 반소설anti-roman이라 불리워질 만한 문학적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프랑스 근대 여명기의 거인들 1:라블레>(이환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부 펴냄) 37쪽)


“이 아이를 보십시오. 이 아이는 아직 열두 살도 채 안 됐지만, 폐하께서 데리고 계신 전(前)시대의 공허한 말만 지껄이는 자들*과 오늘날의 젊은이들 사이의 차이를 충분히 알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87쪽)


(*역주에 따르면 “이 단어 mateologien는 그리스어를 전사한 것으로 신학자 théologiens를 암시하는 말장난이다.” 이런 말놀이는 라블레 문체의 또 다른 특징이다. 더럽기만 한 게 아니란 말이다. 물론 종종, 아니 자주, 더러운 말놀이를 즐기긴 하지만.)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수도사 출신의 의사이자 위마니슴 사상가이며 고위 관료와도 돈독한 친분을 나누던, 한 마디로 당대의 엘리트였던 라블레는 왜 이렇게 ‘상스러운’ 소설을 쓰게된 것일까? 대답은 바로 ‘거리’에 있다. 어쩌면 ‘미친’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 희대의 음악가인 모차르트 또한 사촌 누이에게 “잘 자요. 하지만 먼저 침대에 터져 나오도록 똥을 싸세요. 잘 자요, 내 사랑. 당신의 입속으로 당신의 똥꼬를 밀어넣어요” 같은 편지를 보내던 분변증(scatology) 환자가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하나의 작품을 단순한 정신건강의 소산으로, 다시 말해 병든 영혼의 배설물로 해석하는 건 재미없는 일이다. “일기는 일기장에 쓰세요”라는 댓글이 더는 재미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솔직히 좀 지겹지 않나?


“그런데 말씀입니다. (수도사가 말했다) 예쁘지도 착하지도 않은 여자는 무슨 소용이 있지요?

— 수녀원에 넣으면 되지. 가르강튀아가 말했다.

— 그렇지요. (수도사가 말했다) 그리고 속옷을 만드는 데 쓰지요.”

(238쪽)


만약 누군가 인터넷 게시판에 이런 글을 올린다면 “일기는 일기장에”라거나 “똥은 변기에” 같은 댓글을 달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런 댓글이 재치를 보증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물을지 모른다. “어라, 지난 주엔 ‘소설’이란 게 라블레의 엉덩이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 그게 그거 아냐?” 나는 이렇게 반박하겠다. 모든 텍스트에는 무릇 자기모순적인 부분이 있는 법이라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성경>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내가 방금 성호를 긋기 위해 잠시 타이핑을 멈췄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그리고 신께 맹세하는 바인데, 둘은 결코 같지 않다). 


그렇다, 라블레는 특유의 ‘상스럽고 분변학적’인 문체를 ‘거리’에서 빌려왔다. 


지배적인 문체는 뼈대 구실을 하는 그로테스크한 주제에 대응하는 그로테스크하고 희극적인 민중 문체인데 가장 정력적인 형태 속에 가장 강력한 표현이 드러나 있다. (…) 젊은 시절 프란체스코파 수사였던 라블레는 똑같은 샘으로부터(*거리 혹은 민중으로부터) 다른 누구보다도 ‘한결 순수하게’ 그것을 길어 올렸다. 그는 탁발승의 삶의 형식과 표현 형식을 그 원천에서 연구하였고 나름대로 독특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제 그는 그것을 떠나서 살 수가 없게 되었다. 비록 탁발수도회를 증오하기는 하였지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생생한 그들의 멋있고 소박한 문체는 그의 기질과 목적에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미메시스>(에리히 아우허바흐 지음, 김우창.유종호 옮김, 민음사 펴냄) 369쪽)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언어, 그 순박함과 유연성이 그 안에서 온갖 변신과 위장을 가능케 하는 언어, 그 풍요로움과 다양성이 세계의 모든 것을 담아 내는 언어 —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대학자가 되고도 남을 그는 터무니없게도 천박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 프랑스 근대 여명기의 거인들 1:라블레> 7쪽)


아무리 라블레라고 해도 이 더럽고 우스운 소설에 자신의 이름을 거는 일은 조금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라블레는 1532년에 발표한 첫 번째 소설인 <팡타그뤼엘>과 2년 후 발표한 <가르강튀아>를 알코프리바스 나지에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는 또한 아랍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알코프리바스의 직업을 (제5원소의 추출에 성공한) 연금술사라고 설정함으로써 작품에 신비한 분위기를 불어넣으려 한다. 하지만 480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의 시각에는 그저 희극적인 분위기를 배가시킬 뿐이다.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작품을 막 완성한 라블레에 앞에 나타날 수 있다면, 차라리 ‘지라르 드 풍자크’ 같은 귀족적인 이름을 권하는 게 어떨까 싶다(라블레는 두 소설이 모두 성공한 후 세번째 책부터는 라블레라는 본명을 사용한다. 물론 ‘의학박사’라고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는 건 어떨까. 라블레가 본명도 아닌 가명을 내세우면서까지 ‘상스러운’ 소설을 쓰고 또 발표한 목적은 무엇일까? 좋은 질문이다. 정말 좋은 질문이다. 비록 내가 던진 질문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좋은 걸 좋다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부족하고, 평소 그런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해온 나로서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차라리 비통한 심정으로, 이 자리를 빌려 내 작은 신념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음을 여러분께 밝히는 바다. 


아마 라블레의 심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앞서 우리는 라블레가 “세계와 인간의 발견”이라는 슬로건으로 요약할 수 있는 위마니슴의 대표적인 사상가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여러 현실적 이유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지만. 잠시 기억을 더듬어 고등학교 세계사 수업 시간을 떠올려보라. 


위마니슴은 중세의 신 중심적 세계관에 반기를 든 사상이다. 만약 라블레가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에 온다면, 유튜브에 올라온 중세 동영상을 보고 ‘싫어요’ 버튼을 눌렀을 거란 말이다. 어쩌면 어느 CF를 따라 “중세의 올가미! 중세의 덫! 중세의 감옥!”이라고 외쳤을 지도 모르지. 유행가나 음담패설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허섭스레기들을 작품 속에 끼워넣는 라블레의 솜씨를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을 일이다. 그렇기에 라블레는 자신이 만든 웃음 폭탄을 통해 낡은 가치관을 흔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나른한 국어시간에 그런 종류의 웃음을 가리키는 단어를 배웠다. 풍자, 혹은 해학, 혹은 골계미 같은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단어들을.


풍자를 몇 개의 범주로 분류하는 것은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그것들은 서로 교차하고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삶의 주체인 인간에게로 모아진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그의 삶의 실체는 무엇인가. 더 정확하게 묻자 — 그토록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장식된 외양 밑에 숨겨진 실체는 무엇인가. 풍자는 사물을 나타난 그대로 보기를 거부하는 시선에 의해 유도된다. 그것은 가시可視의 현상을 뚫고 진실에 육박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풍자의 최대의 효용은 바로 여기에 있다. 풍자적 웃음은 진실을 가로막는 위선, 기만, 가장의 두터운 벽을 허물어뜨리는 무기 — 그지없이 유연한, 그러나 놀랍도록 효율적인 무기이다. 이 웃음 자체가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눈 있는 자를 볼 수 있는 데까지 안내할 뿐이다. 풍자는 웃으면서 말한다 — 눈 있는 자들이여, 눈을 뜨고 보라. (< 프랑스 근대 여명기의 거인들 1:라블레> 154쪽)


눈 있는 자들이여, 눈을 뜨고 보라고?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영어 시간에 배웠던 “Wake up and smell the coffee!”(‘정신차리고 상황을 직시하라’는 뜻의 관용구)라는 표현을 비틀어 “Wake up and smell the shit!”이라고. 그것이야말로 ‘분변학적’인 문장들을 통해 라블레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봐, 일어나서 똥냄새 좀 맡아봐, 이게 세상이라고, 응? 정신 좀 차려! 어디서 구린내 안나?”


그렇기에 라블레의 소설 속에서 교황과 성직자, 왕과 판관, 부자와 관리, 과거의 위인과 당대의 유명 학자 등 모든 권력자들은 똥과 오줌을 뒤집어쓴 채 권력의 옷을 벗은 하나의 신체가, 기계를 연상시키는 하나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바로 그것이야말로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보편적인 요인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비극 작가는 주인공의 신체적인 측면에로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모든 요소를 피하려고 신경을 쓴다. 신체에 대한 배려가 끼어들면 희극성이 배어나올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뭘 마시지도, 먹지도, 몸을 따뜻하게 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가능한 한 그들은 어디 앉지도 않는다. 긴 독백을 하는 중에 앉는다는 것은 주인공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음을 상기하는 것이리라. 이따금씩 인간 심리에 밝은 면모를 보여주던 나폴레옹은 어디에 앉는다는 행위만으로도 비극은 희극으로 바뀌게 된다고 지적했었다." (<웃음>(정연복 옮김, 세계사 펴냄) 49쪽) 


물론 풍자가 만들어 내는 웃음에는 한계가 있다. “풍자는 빈정대는 웃음 뒤에 숨으며 대상과의 맞대결을 피한다.” 권력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분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정색하고 대응하기엔 쪽팔리기에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농담인 것이다. 안전하지만, 그만큼 위력은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라블레는 당대의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고지식한 교회에 의해 거푸 금서처분을 받기는 했지만) 큰 탈 없는 삶을 살 수 있었다. 라블레의 시대는 라블레가 생각했던 것만큼 멍청하고 경직된 사회는 아니었던 셈이다. 라블레에게는 잘 된 일이다. 국제행사 포스터에 쥐 그림 좀 그렸다고. ‘주적’이라는 나라의 트윗을 리트윗하며 장난 좀 쳤다고 사람을 구속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면, 밭에 나는 쇠고기라 불리며 흰 머리도 검게 만든다는 기적의 콩이 섞인 밥깨나 먹었을 테니까(네이버 댓글로 만족하는 흔한 네티즌이 되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아마 라블레라면 그런 상황에서도 이렇게 말했을 것 같긴 하다.


“똥이나 처먹여라!” (18쪽, 아니 19쪽)



프레시안북스 2013. 1. 25.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125154127&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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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라블레는 어떻게 방귀를 뀌었는가 또는 그의 엉덩이가 품고 있던 놀라운 것들에 관해서



프랑수아 라블레는 <가르강튀아>의 서문을 다음과 같은 돈호법으로 시작한다. 


고명한 술꾼, 그리고 고귀한 매독 환자 여러분. (내 글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에게 바치는 것이다.)


나는 그를 따라 이 글을 이렇게 시작할 생각이다.


고명한 트위터리언, 그리고 고귀한 소비자 여러분. (이하동문) 


그러니 쉴 새 없이 갱신되는 타임라인과 시시각각 우리를 유혹하는 물건들의 목록 사이에서 바쁜 시간을 쪼개 이 글을 보아주시는 당신들에게 먼저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것이 사람 된 도리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나는 도리 없는 사람이므로, 인사치레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자.


그렇다, 아무리 도리 없다 한들 사람은 사람이다.


라블레 또한 도리 없는 사람이었다. 1483년(혹은 1493년)에 태어나 1553년 세상을 떠난(것으로 추정되는)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 겸 수도사 겸 의사 겸 인문주의자. 과거를 미화하고 또 신비화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우리의 역사 교육 덕에 이런 교과서적 설명이 그에게 어떤 후광과 거리를 덧씌운다 하더라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의 이름을 딴 라블레시언Rabelaisian이라는 단어를 보라. 흔히 “라블레 풍의(섹스와 인체를 풍자적으로 다루는)”라고 알려진 그 단어의 뜻을 아서 골드워그는 이렇게 정의한다. 


천하고 무식한 유머. 사내아이들이 방귀 소리를 흉내 내며 놀때 ‘라블레시언’이라고 한다. (<이즘과 올로지>(이경아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548쪽)


‘적확하다’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뿡뿡, 뿌우웅웅, 뿌루룽, 뿡! — 이것이 바로 ‘라블레시언’이다. 


라블레의 위마니즘(humanisme) 또한 마찬가지다. 보통 인문주의, 인본주의 등으로 번역되는 그 단어의 뜻을 이 자리에서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만약 그것이 고작 몇 개의 문장을 통해 밝혀질 수 있는 것이라면, 두꺼운 책과 유료 강의를 통해 우리를 깨우쳐주시는 모든 선생님들의 노고를 무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미슐레가 창안하고,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널리 알려진 “세계와 인간의 발견”이라는 슬로건으로 자세한 설명을 대신하도록 하자. 


라블레의 경우, 그가 발견한 것은 똥이었다. 당신이 오늘 아침, 혹은 점심, 아니면 어제, 적어도 지난 한 주 동안 한 번 이상 보았음직한 바로 그것 말이다(다시 보니 이 말은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못한 것 같다. 무심한 서술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을 세상의 모든 변비 환자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참고로 본 필자가 그것을 본 것은 바로 어제였다).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온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다시 말해 라블레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연작)를 통해 우리에게 선사한 것은 먹고 마시고 잠자고 사랑하고 싸고 살아가며 결국엔 죽는 인간의 모습이다. 물론 라블레가 구태여 그 사실을 지적하기 전에도 인간은 그런 존재였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말은, 생각보다 자주, 생각처럼 당연하지 않다. 당연함은 언제나 동시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라블레의 시대에 그의 작품들은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다. 여전히 중세의 신 중심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던 시절이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현세의 가치들은 터부시되었고, 먹고 마시고 잠자고 사랑하고 싸고 살아가는 존재가 느끼는 육체적 쾌락은 외설스럽고 음탕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니 그의 작품들이 교회에 의해 몇 번이고 거듭해서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놀랍지 않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라블레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 심지어 프랑스에서조차 라블레를 단순한 인본주의적인 사상가로, “유희, 활기, 기발, 음란, 웃음” 등 그의 작품의 진정한 진가를 무시한 채 '진지성(眞摯性)’의 표본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하니, 동서를 막론한 우리 시대의 교육이 추구하는 목표라는 것이 하나도 놀랍지 않아 코가 막히는 느낌이다. 쿤데라는 라블레에 대한 ‘팬심’으로 이런 현실을 비난한다.


그것은 아이러니나 기발한 것 등의 거부보다도 더 나빠. 그것은 예술에 대한 무관심, 예술의 거부, 예술에 대한 거부 반응이고 일종의 ‘미조뮈즈’*야. 라블레의 작품을 일체의 미학적 성찰에서 벗어나게 만들기 때문이지. 사료 편찬과 문학 이론이 점점 더 미조뮈즈해지고 있기에, 오직 작가들만이 라블레에 대해서 흥미로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어. ('라블레와 미조뮈즈들에 대한 대화’, <만남>(한용택 옮김, 민음사 펴냄) 108~109쪽)


(*뮈조뮈즈misomusist : 반문화주의 혹은 반문화주의자. 쿤데라의 <커튼>에는 주석이 없다. 그래서 나는 검색을 통해 어느 독자가 민음사 카페에 쓴 항의문을 통해 비로소 이 단어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시대인가! 


참고로 쿤데라의 책에 주석이 없는 이유는 “쿤데라는 전 세계에 출간되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 어떤 주석이나 해설이 달리는 것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민음사 판 쿤데라 작품에는 주석과 작품 해설이 없습니다. 또한 작가 약력 역시 쿤데라의 요청대로 단 두 줄로 실리는 형편입니다. 제3자의 해설에 따라 독자들의 판단과 의견, 혹은 감동까지 좌지우지되는 것을 쿤데라가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작가인가!)


물론,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 (축복받은) ‘작가’이고 그렇기에 라블레에 대한 ‘흥미로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는 부분일 것이다. 너무 아니꼽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는 자신이 틀림없는 작가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을 통해서.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이야기는 유럽의 소설이 모든 규범에서 벗어나 막 태어나기 시작할 무렵에 쓰였다. 그 책들에는 미래의 소설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거나 버려질, 어쨌든 전부 우리에게 영감으로 남게 될 가능성들이 가득 차 있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일, 지적 도전, 형식의 자유 사이를 거닐고 있다. (<커튼>(박성창 옮김, 민음사 펴냄) 구판 110쪽)


과연 쿤데라의 말은,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 한물 간 ‘386 취향의 소설가’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경청할 가치가 있다.


라블레와 그의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확고한 것으로, 방귀의 뒤를 따르는 똥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규정되기 직전, 마치 어떤 예감처럼 엉덩이를 간질이지만 그것이 된똥인지 물똥인지 옛날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회충인지 단순히 항문에 난 털인지 혹은 그저 싱거운 헛방귀인지 알 수 없는 순간, 다시 말해 모든 가능성으로 충만하던 시절에 등장했다. 


소설은 된똥이나 물똥, 회충이나 제모가 필요한 항문털, 헛방귀가 될 수 있었고, 단지 차가운 곳에 엉덩이를 오래 붙인 탓에 발병한 치질이나 치루일 수도 있었지만, 라블레의 등장 이후, 그의 뒤를 이은 작가들과 완장을 찬 ‘미학적 검열관’들에 의해 하나의 장르로 규정된 것일 뿐이다. 소설이란 다름 아닌 ㄸ…… 아니, 라블레시언한 비유는 이쯤에서 그쳐야겠다. 대신 이것을 ‘라블레의 엉덩이’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상자를 열기 전까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그의 엉덩이가 소설을 세상으로 내보내기 전까지 우리는 소설이 어떤 것일지 알 수 없었다는 의미에서.


그것이 바로 쿤데라가 라블레의 책들을 가리켜 “미래의 소설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거나 버려질, 어쨌든 전부 우리에게 영감으로 남게 될 가능성들이 가득 차 있다”고 말한 이유다. 또한 움베르토 에코가 포스트모던이란 단어가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현실을 불평하며 “만약 <포스트모던>의 의미가 이런 것이라면, 라블레 또한 포스트모던이다”라고 쓴 이유이기도 하다(거짓말이다. 에코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맥락이 다르다. 다만 내겐 논거를 보충할 권위 있는 이름이 필요했을 뿐이다).


나아가 그것은 ‘요설’이라는 다소 ‘과거 지향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코너가 라블레와 함께 시작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참고삼아 덧붙이자면 코너명은 프레시안북스 편집부의 제안이다. 평소 내가 쓰고 있는 글을 그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적절한 예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내게도 양심이란 것이 있는데 “요설饒舌 :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함”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한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내가 생계를 위해 이 지면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둘째로 치고라도 말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가 이 자리에서 다루게 될 소설들의 공통점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속으로만 생각했던 ‘우스운 소설들의 계보’라는 제목처럼, 이 자리는 우스운 소설들을 위한 자리이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말이 많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혹은, 지금 생각난 건데, ‘요설’이란 단어가 ‘요사스러운 소설들’의 약자라고 우기는 건 어떨까? 만약 모두의 예상과 달리 이 코너가 충분히 길게 살아남을 수 있다면, 언젠가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을 다루게 될 날도 올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잠깐만 말 끊지 말고,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았…, 아니 도대체 뭐하자는 거요?).


잠깐, 이쯤에서 당신은 물을지도 모른다, 아니, 물어야만 한다. 

도대체 라블레가 썼다는 그 <가르강튀아>인지 <팡타그뤼엘>인지가 무슨 내용인데?


좋은 질문. 그것이 바로 다음 시간에 우리가 알아볼 내용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가르강티아.팡타그뤼엘>은 웃긴, 무엇보다 정말 더럽게 웃긴 소설이다. 물론 이때 ‘더럽다’는 ‘어떤 정도가 심하거나 지나치다’는 5번의 뜻과, ‘때나 찌꺼기 따위가 있어 지저분하다’는 1번의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당신들 모두의 쾌변을 빈다.



2013. 1. 11. 프레시안북스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111150346&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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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3-01-18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히히. 저는 첨에 '요설'이란 단어를 접하고는 아싸~ 이제 팝님이 요사스런 소설을 소개시켜주시려는구나. 신난다! 생각했더랬어요. 하하.
요설의 뜻이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함'의 의미라면 더 환영인데요? 팝님의 설명은 들을수록 푸욱 빠지는 뭔가가 있어서 말이지요. 좀더 길게, 조금만 더 기일게, 를 주장하는 바입니다. 에헴.

<가르강튀아> 로 시작하는 이 코너, 환영입니닷. 저도 이 책 다시 읽으면서 따라독자 노릇하렵니다. 변비쟁이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은 소설이긴 합니다.ㅎ

poptrash 2013-01-21 20:19   좋아요 0 | URL
예리하신 달사르 님 ㅎㅎ 저도 요설이란 제안을 들었을 때 '요사스러운 소설'이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어요. 늘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는 더 길게 쓸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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