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비가 내렸다. 아직 가을이 끝나지 않았나, 생각했지만 날은 여전히 추웠다. 4층 계단을 오르다 아침 수업의 선생님을 만났다. 이제는 퇴임하신 노선생님은 언제나처럼 조금 구부정한 자세로 한 쪽 어깨엔 기다란 보조가방 끈을 메달고 내려오고 계셨다. 손에는 오천원 한 장을 들고. "안녕하세요!" 나를 보고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거리던 선생님은 무언가 생각이나셨다는 듯 나를 다시 바라보며 "자네 혹시 오천원 바꿀 천원짜리 있나?"라고 물으셨다. 나는 없다고 말씀드리면서 왜인지 정말로 죄송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30년대 고등룸펜문학에 대한 수업을 들으며 어쩐지 뜨끔했다. 추워서 쓴 조 페시 풍 비니 속이 간질간질했다. 쉬는 시간. 아까 뽑아오신 커피에 담배재를 털어 넣으시며 교탁 옆에 서 계시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 말은 "농담하나 할까?"라고 시작해서 "...그런 것입니다." 라고 끝났다.

농담하나 할까?
나는 평생동안 교수만 했습니다.
다른 직업은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만약 다시 세상에 온다면,
그래도 나는 교수를 택할겁니다.
무엇을 전공하겠냐?
문학입니다.
문학은 인간 탐구의 학문입니다.
문학만큼 매력있는 게 없습니다.

오늘 날 문학이 외롭습니다.
문학이 죽었다고 말들이 많습니다.
그건 문학 자체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런 것입니다.

그건 결코 농담이 아니었지만, 지금껏 내가 들은 농담 중에 다섯 번째 안에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인문대 지하 휴게실에서 밥을 시켜 먹었다. '(K-1) 밥샵' 이라는 이름의 가게에서는 갈비탕을 팔았다. 바로 뒤에서 이야기에 열중한 우리를 보지 못하고 배달원은 전화를 해서 내게 짜증을 냈다. 그는 수저를 잊었다. 다시 돌아온 차가운 수저를 쥐고 밥을 먹으려는 순간 얼마 전에 5년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진 후배가 문자를 보냈다. '뭐해요?' '밥 먹어' '나한테 전화 좀 하지...' 결국 그는 밥을 혼자 먹었다.

디지털 매체의 서사 문제를 논하는 수업 시간 내내 자다가, 사실 그것은 동어 반복이었다. 처음의 인트로덕션 이후에는 죄다 똑같은 이야기들 뿐, 담배를 한 대 피웠다. 학교에서만 판다는 코카스 한 병과 함께. 몸이, 마치 술을 잔뜩 마신 다음날 아침처럼 혈관이 막힌 듯 덜덜 떨렸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수업은 제목부터 형이상학적인 '형이상학'. 한 학기 동안 공부한 데까르뜨 씨의 책에 대해 한 마디씩 하는 시간이었다. 데까르뜨 씨발놈... 이라고 할까 하다가 그냥 "...(그가 살던 시절은) 나름 참 좋은 시절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으니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그럼 어디 한번 국문과 얘기 한번 들어보죠." 라고 물어본 후에 무슨 말만 하면 너무나 말도 안되는 말이라서, 멍청한 말이라서 들어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선생님은 한 학기 동안 아주 괜찮았다면서,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제가 칭찬에 인색하지요, 라는 립서비스로 끝내셨다. 시험은 몇문젠가요? 라는 질문에 "아 물론 한문젭니다. 저는, 두 문제를 경멸합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문을 닫고 나갔다. 9명이 듣는 수업 마지막 날에는 7명 밖에 오지 않았다.

수업이 끝난 건 분명히 다섯 시였는데, 어쩌다보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 언제나처럼 내가 미처 따라 잡기도 전에 시간은 흐른다. 하루가 늦고, 일주일이 늦고, 한달이 늦고, 결국 일년이 늦고. 오고 가는 길에 읽는 김승옥의 책에서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다.

"김 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 다섯 살짜리죠?"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도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기웃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 다섯 살입니다." 나는 말했다.

어쩐지 나는 아직, 스물 다섯이란 것도 실감이 나지 않는데 말이다. 이상의 무슨 시에서처럼, 13 + 1이 12가 되듯이, 25 + 1은 24이 되는 그런 것은 없을까. 어쨌든 12월이고, 겨울이다. 눈이나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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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shop 2005-12-02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 참 발가벗은 페이퍼로군 내가 다 민망하네 근자에 밥이라도 청하러 오게나 주먹밥이라도 대접하겠네 (요샌 세끝주먹밥에 춘화축수를 붙여서 팔더구먼 망조가 든게지..) 아참 건넛고을 최강창민 대감께서 서한을 보내오셨네. 나도 냉큼 보고 홍조가 되어 어쩔줄 모르는 참이네만, 장쾌한 후렴구에 모쪼록 주목해주기 바라네. 내용인즉 "언제까지 그러고 살텐가, 하하하하하"

poptrash 2005-12-02 0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 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 다섯 살짜리죠?

Phantomlady 2005-12-02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가 살던 시절은 나름 참 좋은 시절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으니까...

오늘 틴에이지 팬클럽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과 그런 얘기를 했어요. 음악이든 영화든 구십년대는 참 재미없는 시대라고. 바비빌에 따르면 '서태지가 시나위였던 시절. 힙합바지 없던 그 시절'도 참 좋았죠. 그런데 이제 겨우 스물 다섯 살이군요. 전 스물 다섯 살이 지나니까 김승옥이 몹시 징그러워졌어요. 그래서 싫어졌다는 건 아니지만..

나도 '무진기행'의 그녀처럼 '바보라는 이름의 혈액형이예요' 라고 말해야 할까요..

비로그인 2005-12-02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평생동안 교수만 했습니다, 라는 말에 감히 다른 말을 덧붙이기가 조심이 됩니다.

poptrash 2005-12-05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 : 지나간 세월은 지나간 버스 처럼 무조건 좋은거 같아요. 90년대도, 뭐랄까 영국 쪽의 90년대라고 하면 폼나지 않나요?

J : 저도 평생동안 교수만 하고 싶어요... 흑.

참깨 2012-12-22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중학생같으심....증말.
 

오에 겐자부로, <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 중에서

나는 시를 단념한 인간이다. 그것은 단념한다는 말이 본래 이중의 의미를 갖고서 한 개의 말로 실재하는 사정 그대로, 시의 말과 소설의 말의 근본적인 차이를 어떻게든 명확히 인식함으로써 시 쓰기를 그만두고 소설로 향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내 소설의 말은, 이른바 현대시의 세계와 대질시키면 희박하다는 조소를, 그 현대 시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학자 시인(학자 개라고 하는 말도 있지만!)으로부터 받아도, 그것은 말의 근본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자 자신의 애매한 이해에 근거한 비난이라고밖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여러 시인들의 시에 계속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소설을 쓰고 있는 시간은 일상 생활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말에 무관심하지 않은 인간은 그의 육체 = 영혼을 하나 혹은 몇 개의 시의 추(錐)에 관통당하지 않고 살아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역시 이른바 현대 시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번역가 시인(말(馬) 자신의 말을 이야기하는 것 외에, 그 밖의 말을 이야기하는 말(馬)도 있다지만!)으로부터, 내 소설 같은 것은 읽어 볼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매도를 당한 적도 있으나, 거꾸로 나는 진정으로 시의 말을 갖춘 시인에 대해서는 절대로 무관심 할 수가 없다.

다양한 시대, 여러 지방의 전투에서 비참하게 쓰러져 간 병사의 배낭에서 종종 시집이 발견된다는 보고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명료한 의식을 갖춘 채, 눈앞에 있는 자신의 육체 = 영혼의 죽음을 응시할 때, 자신이 하나 혹은 몇 편의 시를 내면에 안고서 쓰러질 게 틀림없다고 똑똑히 확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육체 = 영혼의 죽음이 실제로 지금 움직이고 있는 심장이나 뇌중추의 파괴와 함께 찾아오듯이, 그것은 또한 지금 자신의 내부에 있는, 하나의 장기(臟器)와 같은 시의 파괴와 함께 찾아온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시라는 것은 그와 같이 인간의 육체 = 영혼의 내부에 들어가 계속 기능하고, 그 실재감을 부어 오른 간장보다 더욱 또렷하게 손가락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나 소설이란 다 읽고 나면 참호에 내버려지는 것이다. 다 읽고 난 소설을 참호에 버린 채 일어나서 떠나간 병사들이 총알을 맞고 쓰러질 때, 그는 그 육체 = 영혼으로부터 떼어 내기 힘든 시와 함께 죽었던 것이다. 나는 병사는 아니지만 이 뜻하지 않은 죽음의 함정으로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러한 돌연한 죽음 앞에서 내 육체 = 영혼의 내부에서 나와 함께 죽어 갈 수 있는 시를 확보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을 얼마간 완화시키고자 시를 구하고 잇을 뿐, 그러한 시 외에는 어떠한 화려한 말의 수식도 찾아내고 싶지 않다.


나는 분명 승부욕이 많은 인간은 아니다. 몇 부분만 뺀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내가 머리 속으로 하고 있던 생각을 누군가 이미 글로써 멋드러지게 표현해낸 것을 발견했을 때(같은 맥락으로 내가 생각해오던 것과 같은 이야기/장면을 영화에서 발견했을 때도) 그렇다. 가끔씩은 단순히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럴 수는 없다며 분통을 터트리기도 한다. 오에 겐자부로가 쓴 저 부분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만, 이것은 별개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들을 풀어준다면 정말 경탄하겠지만 이것은 별개란 말이다. 물론 억지다. 우리는 모두 거인들의 어깨를 딛고 서있고,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저런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조차 없었을테니까. 그래도 아쉬움을 쉽게 떨쳐버릴 수는 없지만. 누군가 좋은 것들을 다 해버리기 전에(이미 대부분 다 해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빨리 하고 싶은 마음이 달음박질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쉽지만은 않다. 사실 그들이 내뱉어 놓은 것은 내 머리에 들어있던 설익은 생각보다, 백만배는 더 근사하니까.

오에 선생은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시의 말의 실질과 기능은 소설의 말이 갖추고 있는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금 소설의 말의 실질과 기능이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 것도, 애당초 이들 서로 다른 두 개의 말이라는 대륙이 지닌 근본적인 차이를 간과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시의 말의 실질의 무게에 비해서 소설의 말의 실질은 참으로 너무나 가벼워서, 거의 실질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말에서는 기능이 바로 그 주체이다. 소설의 말의 실질처럼 보이는 것은 이 기능을 감싸고 있는 껍데기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기능이 충분히 발휘된 뒤에는 당연히 빈 껍데기 같은 것이 되는 존재. 그리고 미학적으로 말의 부피는 그 한계가 이미 정해져 있으므로, 기능에 더욱더 충실하기 위해서는 말의 껍데기는 최대한 얇아야 한다. 그러나 충만한 기능이 겉껍데기를 뚫고 나가지 못하도록 껍데기가 단단해야 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따라서 소설의 말의 껍데기는 로켓을 만드는 데 쓰이는 특수한 합금처럼, 얇고 가볍고 질기면서도 그 내부에 풍부한 기능을 담고 있는 성격의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시의 말에서는, 기능이 문제가 될 때는 물론 있겠지만, 실질 역시 큰 문제다. 금속의 비유를 다시 한 번 사용한다면, 시의 말의 질량은 가능한 한 커져야 한다. 게다가 시의 말에서는 기능과 그것을 감싸는 껍데기를 분리할 수가 없다. 방사성 물질을 감싸고 있는 두꺼운 납처럼, 시에서는 두껍고 둔중한 껍데기가 날카로운 방사능 미립자를 빽빽히 감싸고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으로서는 시 자체를 파괴하지 않고 껍데기를 제거하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따라서 소설에서는, 얇은 껍데기를 제거하고 말의 기능을 작동시킨 뒤, 즉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덮어 놓은 소설 책은 수북이 쌓인 땅콩 껍질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시는, 정말로 그것을 읽은 사람에게는 말의 실질과 기능이 그대로 한 덩어리의 추가 되어서 육체 = 영혼 속에 단단히 파고 들어가 버린다. 그래서 시에는 다 읽었다는 것이 없다. 일단 인간이 시와 조우하면, 그 만남은 항상 진행중이다.


문득 나에겐 그런 시가 있는가, 라고 생각해 본다. 나는 여전히 취향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죽어버린 누군가의 시를 나는 분명 간직하고 있는 듯 하지만, 너무도 흔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꺼낼 수가 없다. 물론, 그것의 흔함이 시가 나에게 주는 의미를 깎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굳이 꺼낼 필요가 없는 것이므로 그냥 넣어두어야겠다. 홀로 소중히, 나만의 언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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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5-10-14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일 시작하기 전에 잠깐 들렀는데, 반갑게도 글이 세개씩이나! 헤헷.
일 끝나고-흑흑. 정녕 끝나기는 할런지-퇴근후에 편하게 읽어야겠어요. 내일은 토요일이네요. 맨 마지막에 쓰신 '나만의 언어로'부분만 눈에 들어오는데, 뭘까. 헷. 집에 들어가서 새벽에 읽어야겠다.
 

더 물리적으로 말하면, 기계에 있어서 충격은 항상 무한소적(無限小的)으로 드러나 다른 두 개의 질서의 작용으로 보인다는 사실로부터, 어쩌면 우리는 결심을 하고 또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순간을 유추하고, 그 거북한 제한 안에 다시 죄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령 하나의 타격은 무한히 짧은 시간 안에서 퍼지는 무한히 큰 힘에 의해 설명된다. ... 단지 행위 후에 계속되는 행동이 의식적 요소가 덜한 유기적 자동성에 맡긴 그 정도에 따라 이전과 같은 전개의 비연속성에 대한 관찰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된다. 순간을 느끼기 위해서, 의식의 명확한 작용에로 되돌아가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을, 배만 고프고 책은 읽히지 않는 2005년의 가을. 어릴 적의 가을 하늘엔 글자들이 가득했다. 그 위로, 저녁이면 새들이 날고 날개짓에 떨어진 글자들을 나는 말없이 주워 먹었더랬다. 요즘의 하늘은, 그냥 높다. 항상 허기진 내 배처럼. 그것은 내게 있어 오직 어떤 종류의 허무를 떠오르게 할 뿐이다.

몇 권의 책들을 영양가 없이 들추어 보다가 오늘 택한 책은 바슐라르의 <순간의 미학>이었다. 맛보듯 앞 부분만 살짝 읽던 오에 겐자부로와 폴 오스터, 미르치아 엘리아데 그리고 로버트 맥기씨의 책을 미뤄두고 또 다시 새 책을 꺼내 읽은 것은 순전히 그 두께 때문이었다. 오가는 차 속에서 최근의 내 독서 경향 그대로, 앞 부분만을 맛보았다.

위에서 인용한 것 같은, 알 수 없는 문장들이 가득하긴 하지만 그래도 흔들리는 차 속에서 이 책을 놓지 않고 읽었던 것은 아래와 같은 문장들 때문이었다. 바로 저 윗 단락에 이어지는, 꿀처럼 달콤한 약속을 위한 단락.

이 소론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게 됐을 때 우리는 시간과 진보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순간의 경험에 대한 이와 같은 현실적이고 능동적인 개념으로 다시 한 번 되돌아가고자 한다. 그 때 우리는 삶이라는 것이 수동적인 명상 안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삶을 산다는 것 이상의 것이고, 참으로 그것은 삶을 추진하는 것이다. 삶이라는 것은 그 삶을 하나의 수로로써 받아들일지도 모를 객관적 시간의 축(軸, axe) 위를 경사에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니다. 삶이라는 것은 일렬로 늘어서 있는 많은 시간적 순간의 하나의 형태이지만, 그러나 삶이 그 제 1의 현실을 발견하는 것은 항상 하나의 순간에 있어서이다.

즉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삶을 산다는 것 이상의 것이고, 참으로 그것은 삶을 추진하는 것이다. 이런 문장. 요즘의 내가 붙잡고 있는 문제이기도. 바슐라르씨의 이 책을 마저 읽을지, 이전에 펼쳐놓았던 책들을 읽을지 그것도 아니라면 또다시 새로운 책을 찾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저 문장만으로도, 라고 느낀다. 어쩐지 약속한 그 '소론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도 무럭무럭하지만, 어쩐지 저런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기에 달콤한 약속으로 족하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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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이 말을 좋아한다. 추운 겨울날, 곱은 손을 아무 말 없이 잡아주는 누군가의 손길처럼 그 말은 따뜻하다. 물론 그 손에는 어떤 사심도 없다. 때때로 나도 저 말을 내뱉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공기와 닿는 순간 반쯤 호기 넘치고, 반쯤 무책임한 말이 되어버린다. 성격 탓이다. 나는 사심이 많다.

사심은 말을 길게 만든다. 행여나 오해할까, 혹은 내가 원하는 그대로 전달이 되었을까 노심초사 말을 덧붙이게 한다. 언젠가부터 나의 인생은 지리한 주석집이 되었다. 말을 하고, 주를 달고, 주에 주를 달고, 또 또 또. 이게 다 누군가 '그래 이제 그만해도 괜찮아' 라고 말해주지 않았던 탓이라고 한다면, 어리광일까.

내 인생에 아무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세상을 다 알것 같았고, 지루하긴 했지만 편안했다. 그때 나는 누군가의 어깨를 밟고 있었다. 물론 당시의 나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순전히 내 잘못이긴 하지만 그걸 알게 된 것은 비로소 내가 온 힘을 다해 누군가에게 편안한 토대를 만들어주려고 했을 때였다. 일반론이다.

누군가 내게 괜찮아, 라고 해주었으면 좋겠다. 괜찮아, 다 괜찮아. 그렇다면 나도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변명은 그만두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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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아 2005-10-12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아요!

하이드 2005-10-12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괜찮아' 라는 말을 바라는 사람한테 '안괜찮아' 라고 툭 던지며 씩 웃는 습성이.
하지만, 저만의 미묘한 뉘앙스로 '괜찮아'보다 더 위안 줄 수도 있는데. ^^

sudan 2005-10-12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닥토닥.

로드무비 2005-10-12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심은 말을 길게 만들어요. 인간적이라는 미명하에.....
좋은데요?^^

비로그인 2005-10-12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입니다. IT'S ALRIGHT, IT'S ALRIGHT. EVRYTHING WILL BE ALRIGHT.
주문처럼 되내입니다.

poptrash 2005-10-14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perky 2005-10-15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 너무 좋은 글이에요. ^^
 

하루에 발표 두 개를 끝냈다. 비트겐슈타인과 데카르트. 임팩트 있게 발표 이틀 전부터 하룻밤에 한 개씩 처리했건만. 그 부담은 발표가 정해진 학기의 시작부터 지고 있었는지 어쩐지 커다란 짐을 던 기분이다. 아, 복학생. 저 두 사람에게 이 자리를 빌어 한 마디씩 남기자면 비트겐슈타인 - 그래서 어쩌자고?, 데카르트 - 야이 개새끼야 정도 되겠다. 뭐, 개인적인 원한은 없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언어 철학에서 기억에 남는 것을 적어둔다. 언어는 세계에 관해 말하고 있고 이것은 그 둘이 어떻게든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그 둘의 구조에는 공통되는 것이 있을 것이고 하나의 구조를 안다면 다른 하나의 구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언어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논리학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세계를 알기 위한 언어학을, 하나의 존재론으로써, 풀어낸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일반명제(복합명제)는 말그대로 단순한 것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복합적인 명제이다. 그렇다면 그곳엔 필연적으로 단순한 것이 있어야 한다. 복합적이라는 관념에는 단순한 것들이 모인 것이라는 사실이 이미 들어있으므로(이것이 그가 줄곧 견지하고 있는 선험적 방식이다). 그것은 복합 명제를 가능하게 하는 구성 요소로서의 명제, 바로 요소 명제다. 요소 명제는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원자적 사실과 맞닿아 있다(이름과 대상의 관계는 생략). 아무리 우리가 사용하는 복합명제를 분석해봤자 그 요소 명제에 닿을 수는 없고, 그래서 그것의 예를 들 수는 없지만 그것 역시 필연적으로 반드시 그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않다면 우리가 말하는 이 모든 것은 헛된 것에 불과할테니. (논리적인 점프가 있지만 대충 이런 식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명제를 찾을 수 있는 것인가? 논리적인 필연성으로 말하자면,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찾아져야만 하는게 아닌가(물론 비트겐슈타인과 다른 식으로 언어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많은 이론들이 있지만 그의 논의를 따르자면). 어쩐지 그것의 모습을 한 번 보고 싶어졌다. 이건 순전히 철학적인 관심에서라기 보다는 문학적인 관심에서인데(이 관심으로 데카르트 발제 때 교수님에게 개갈구심을 당했다), 세상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은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주어진 언어의 존재 방식 위에서의 유희도 물론 즐겁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데카르트 개새끼)를 직접 보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물론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명제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과학자들이 원자와 분자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처럼(이것도 논리적인 비약).

만약에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리하여 그 존재의 필연성으로 인해 어떠한 어려움 끝에서라도 마침내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아니 전적으로 주어지진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곳으로 조금씩 다가갈 수만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신에 대한 탐구보다 훨씬 유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 그냥 생각이다.

* 오독 사절. 저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게 아닙니다. (뻔뻔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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