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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시상식은 연말에 몰려 있다. 그렇기에 연초에 나온 작품들은 부득불 손해를 보게 마련이다. 인간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고, 상대적으로 최근에 받은 감상을 더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2013년 올해의 책을 꼽기 전에 먼저 평균 이하인 내 기억력에 감사를 드려야겠다. 만약 내가 엊그제 읽은 책의 제목도 기억하지 못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면 올해의 책을 꼽기 위해 지난 독서목록을 뒤지는 일은 없었을 거고, 그랬다면 올해 첫 책으로 읽은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시대의창 펴냄)을 떠올리지 못했을 거다. 휴, 다행이지 정말.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책을 읽은 게 1월 5일이라는 사실이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 정말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의 책을 다소간 묵혔다 읽는 게으른 습벽을 생각할 때, 책이 2012년 12월에 출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래, 미친 거지. 마감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런 걸 따지고 있다니, 멍청한 주제에 집요하기까지 하지만 별 수 없다. 내게도 나름의 직업윤리가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남의 돈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들 하기에 하나 장만했을 뿐이다.


판권면을 펼쳐 출간일을 확인한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2013년 1월 3일.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물론 그런 경우는 별로 많지 않지만, 책은 2012년 연말에 나온 게 맞다. 신문 기사만 검색해봐도 알 수 있다. 일간지 기사가 12월 마지막 주, 주간지에는 1월 첫째 주에 실렸다. 출간 이전에 미리 기사가 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건 엄청난 판매량을 자랑하는 유명작가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따라서 나는 출간일을 늦추어 기재한 출판사의 선경지명에 감사드리는 바다). 물론 한승태는 그런 작가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한승태가 그런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이 무척 속상하다.


<인간의 조건>은 저자가 꽃게잡이 배에서부터 서울의 주유소와 편의점, 아산의 돼지농장, 춘천의 비닐하우스, 당진의 자동차 부품 공장에 이르기까지 몸소 체험한 다양한 직업의 현장을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고 ‘체험, 삶의 현장’ 같은 프로그램을 떠올려서는 곤란하다. 그는 단순히 경험을 위해, 혹은 문학 수업의 일환으로 그 일자리들을 전전한 게 아니다. 단지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기 위해 직업이 필요했을 뿐이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그리고 틈틈이 글을 썼다. 몇몇 훌륭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며 어쩔 수 없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을 굴러먹던 조지 오웰(<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과 미국 전역을 떠돌며 온갖 잡일을 섭렵했던 찰스 부코스키(<팩토텀>)의 삶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한승태 역시 그들을 좋아한다. 책날개만 봐도 알 수 있다.


전국을 떠돌며 닥치는 대로 일했고 일하는 틈틈이 영원히 출판되지 못할 게 분명한 시와 소설 들을 썼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고시원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그동안 겪어본 직업이 꽤 여러 가지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1차·2차·3차 산업, 더 세밀하게는 농업, 어업, 축산업, 제조업, 서비스업계에서 모두 일해본다면 그때는 책을 한 권 써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렇게 했다. (작가 소개 중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은 훌륭하다. 우체국을 그만둔 후 <우체국>이라는 제목의 장편 데뷔작을 쓴 부코스키 또한 언젠가 그렇게 했다.


아침이 되자 아침이었고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아마 소설을 쓸 것 같군, 생각했다.

그래서 소설을 썼다. (<우체국>(박현주 옮김, 열린책들 펴냄) 241쪽)


그러고 보면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또한 작가의 첫 장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데뷔작을 통해 받아 마땅한 주목을 받았다. 축하할 일이다. 그리하여 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가가,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광적인 마니아를 낳은 컬트 소설가가 되었다. 제몫의 성공을 챙긴 것이다. 그렇다면 한승태는 어떨까? <인간의 조건> 가격은 14800원, 졸저 <서서비행>(금정연 지음, 마티 펴냄)보다 딱 천 원 비싸다. 그렇다면 각 인터넷 서점의 세일즈 포인트를 살펴보건대… 에이, 관두자. 차라라 그 시간에 담배를 한 대 피우는 게 낫겠다.


나는 지금 한승태가 조지 오웰이나 찰스 부코스키처럼 위대한 작가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들이 이루어낸 성취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을 뿐이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노동에도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출간 직후 한 신문과 가졌던 인터뷰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기자의 말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부자가 됐으면 합니다. 부자가 돼 하고 싶은 일하며 사는 것인데 제게는 글 쓰는 일이 되겠지요. 생계비 걱정 않고 글 쓰는 것이 제 꿈입니다.” 이어 전업 작가로 살려면 한 달에 얼마 정도가 필요하냐고 묻는 질문에는 이런 산수를 내민다. 


“한 달에 80만~90만원 정도. 또 그런 게 죽 있어야 하니까 그렇게 쉽지는 않지요. (책에 나오는) 고시원 방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임시로 가는, 도저히 생활이 안 되는 공간이고요. 싼 데를 찾아보면 한 달에 방세 30만~35만원, 식비는 30만원, 이것도 처음엔 아껴서 먹어요. 하루에(한 끼가 아니다!) 7000원 정도씩 먹다가 더 이상 못 참겠다며 확 먹어버려서 대중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무리 아껴도 한 30만원 들어요. 여기에 공과금 전화세 교통비 등 합쳐 그 정도만 있으면 글만 쓰며 살 수 있지요.”

(서울신문, 2012년 12월 29일, ‘[저자와 차 한 잔] ‘인간의 조건’ 쓴 한승태씨’)


내가 만약 부자라면 그에게 매달 돈 백만 원쯤 보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나 역시 생계가 가능한 최소한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밤낮없이 납품하는 글쟁이일 뿐이다. 그러니 당신은 이 글 또한 올해의 책을 핑계로 “가난한 작가들의 생계를 보장하라”고 징징대는 투정(물론 당신의 생각도 옳다. 가난한 건 작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의 일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하시라. 당신이 뭐라고 생각하건, 나는 다만 <인간의 조건>이 지금보다는 더 많은 관심을 받을만한 책이라는 사실을 몇몇 이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족하다. 나는 이 책이 올해 나온 어떤 책들보다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가치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한 관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그렇다는 사실에 내 한 달치 원고료를 걸 수도 있다. 물론 당신은 그 정도 금액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지만. 


세상이 이따위인 건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쓸모없는 놈들이라며 손가락질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다수의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의지의 결핍이 아니라 희망의 결핍이기 때문이다. 노력한 만큼 삶이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말이다. 우리는 그런 희망을 체스 게임에서 감지할 수 있다. 체스의 졸은 한 번에 한 칸씩 전진하는 것밖에 못하는 절름발이 말이지만, 그런 졸이라 해도 상대편 진영 끝에 도달하게 되면 여왕으로도 변신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남의 돈을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선 졸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평생 졸에 머무르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 나는 조금 두려워진다. (447쪽)


나 역시 그의 두려움에 공감한다. 동시에 그가 8~90만원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느라 다음 책을 쓰지 못할까 두렵기도 하다. 독자는 이렇게 이기적이다.















PRESSIAN BOOKS 170호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121317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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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북스 올해의 책으로 지금껏 내가 꼽았던 책들은 다음과 같다. 


2011년 <어떤 작위의 세계>

2012년 <야만스러운 탐정들> 


한승태의 다음 책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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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 가운데 가장 유명한 첫 문장을 둘 꼽으라면 그것은 분명히 “오늘, 엄마가 죽었다”와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일 것이다. 굴드는 그 문장들을 하나씩 큰 소리로 여러번 되풀이해 발음해보았다. 그 문장들은 언뜻 보기에는 별로 신통할 게 없다. 하지만 그 문장들의 단순함 그 자체가 진정한 천재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문장들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부터, 우리는 그 각각의 문장들이 앞으로 전개될 그 걸작의 내용과 꼭 들어맞게 의도적으로 구상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베르나르 키리니, <첫 문장 못 쓰는 남자>(윤미연 옮김, 문학동네 펴냄) 10쪽) 


베르나르 키리니의 단편 ‘첫 문장 못 쓰는 남자’의 주인공 피에르 굴드는 제목 그대로 첫 문장을 쓰지 못하는 작가다. 정확하게 말하면 작가 지망생(혹은 ‘작가(진)’)이라고 해야겠지만. 마침내 작가가 되기로, 수년 전부터 구상해왔던 책을 쓰기로 마음먹는 순간, 그는 자신이 첫 문장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가 앞으로 써나가게 될 모든 것은 바로 그 첫 문장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중압감에 허투루 시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젠가 데카르트가 말했던 것처럼,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진 것도 저절로 무너질 것”임을 믿고 있는 굴드는 완벽한 첫 문장을 찾느라 좀처럼 책을 시작하지 못한다.


그런 경우에 작가 지망생이 찾을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을 굴드 또한 찾는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첫 문장을 살펴보는 일이다. 그는 카뮈의 <이방인>(“오늘, 엄마가 죽었다”)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를 시작으로 무질, 조이스, 포크너, 포이스, 로렌스, 오웰, 셀린, 되블린의 첫 문장들을 찾아보지만 별다른 도움을 얻진 못한다. 위대한 작가들이 위대한 첫 문장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위대했기 때문이라는 평범한 깨달음을 얻었을 뿐. 아마 작가 지망생이 찾을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이란 결국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해결책이라는 (여전히 쓸모없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실의에 빠진 그는 “완벽한 첫 문장,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찾아 헤매던 문장이 마치 못된 오리처럼 그를 비웃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시달린다. 못된 오리는 그가 구제불능의 애송이라는 사실을, 위대한 작가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지만 그는 인정할 수 없다. 위대한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자신이 형편없는 첫 문장을 쓰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작가 지망생의 딜레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 홀로 고전을 찾아 읽다 눈만 높아진, 무분별한 독서의 폐해다. (반대로 그가 책을 읽지 않았다면 책을 쓸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독서의 진정한 폐해다.)


굴드는 각종 인용이나 패러디(“오늘 엄마가 죽었다. 그렇지만 변함없이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로 시작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쩐지 비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작가 지망생들이 종종(실은 언제나) 작품 대신 만들어내는 문제 속에 갇혔고, 출구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보통의 작가 지망생들처럼 술과 담배, 늦잠과 자기 비하, SNS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신 그는 고심을 거듭했고, 획기적인 해결책을 찾아낸다. 그는 생각한다. “완벽한 첫 문장을 찾는데 실패했다고? 까짓것, 문제 될 것 없다! 그렇다면 두 번째 문장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다.” 유레카! 제 아무리 콜럼버스라도 깜짝 놀라 달걀을 쓰러트리고 말았을 거다. 발상의 전환에 성공한 굴드는 열에 들뜬 채 자신의 책을 쓰기 시작한다. 바로 이런 두 번째 문장과 함께. 


“(…) 바로 그 때문에 나는 거기서 멈추었다.” (16쪽) 


그는 뿌듯한 마음으로 자신의 두 번째 문장을 바라보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괄호와 말줄임표로 첫 문장 딜레마를 피해간다 하더라도, 책을 펼친 독자에게는 두 번째 문장이 첫 문장이 될 것이고, 그것은 굴드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두 번째 문장이라는 사실을 책머리에 일러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경우 바로 그 일러두기가 책의 실제적인 첫 문장이 될 테고”, 물론, 그 문장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의 작가 지망생들처럼 허기와 숙취, 불면과 불안, 비문학적인 사회에 대한 저주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신 고민을 멈추지 않았던 굴드는 좀 더 획기적인 해결책을 찾아낸다. 두 번째 문장을 첫 문장으로 생각한다면, 두 번째 문장도 괄호로 처리하면 된다! 세 번째 문장이 첫 문장이 된다면 그 또한 괄호로 처리하리라. 그렇다면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문장도 괄호로 처리하지 못할 이유는 또 뭐냐? 그는 작가 지망생답지 않은 호탕함으로 새로운 작품을 써내려갔고,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책을 완성하다. 괄호와 말줄임표로 이루어진(“(…) (…) (…) (…) (…) (…) … (…)”) 그의 첫 번째 책을. 


그는 자랑스러움에 취해 그것을 두 번 되풀이해 읽고 나서 지쳐 쓰러졌다. 그렇게 해서 굴드는 한 권의 소설을 써낸 작가가 되었다. 첫 문장을 시작할 수 없어서 결국 아무 내용도 쓰지 못한 소설의 작가. (17쪽)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굴드는 다시 한 번 깨달았을 것이다. 작가 지망생이 찾을 수 있는 획기적인 해결책이란 대부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만약 이야기가 이렇게 끝났다면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가련한 피에르 굴드와 재치 있지만 결국 그뿐인 이야기를 쓴 베르나르 키리니,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렸겠지. 그리고 좀처럼 가시지 않는 피로와 보일러를 틀어도 도무지 따듯해지지 않는 방, 꼬박꼬박 청구되는 각종 공과금과 도둑처럼 찾아온 마감 따위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으리라. 하지만 (고맙게도!) 베르나르 키리니는 멈추지 않는다.


단편의 후반부에서 키리니는 노년에 접어든 굴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문장에 대한 무시무시한 두려움에 길들여졌고, 그래서 진짜 책들을 써낼 수 있”게 된, 나아가 “존경받는 작가, 유럽 전역에 알려진 유명 작가”가 된 굴드가 생의 말년에 봉착한 새로운 딜레마에 대해서. 그것은 젊은 굴드가 해결해야 했던 문제를 고스란히 뒤집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결말을 이 자리에 밝힘으로써 키리니의 노고를 무시할 생각은 없다.) 키리니는 세심한 솜씨로 이야기의 균형을 맞췄고, 자칫 작가 지망생들의 씁쓸한 술자리 농담에 지나지 않았을 이야기를 글쓰기의 근본 문제에 대한 질문으로, 멋진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완벽한 첫 문장을 찾아 몇 년 동안이나 술과 담배, 늦잠과 자기 비하, SNS 등으로 시간을 보낸 사람의 한 명으로서, 나도 모르게 그의 이야기에 스스로를 이입하고 말았던 것이다. 눈물을 닦으며(언젠가 말했지만 눈물을 흘리며 책을 읽는 일은 힘든, 정말 더럽게 힘든 일이다) 피에르 굴드의 익숙한 시행착오를 좇던 내가 기대한 결말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정신 차리고’ 생업에 복귀하거나, ‘정신 못 차리고’ 불행을 찾아 떠나거나,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아내기를 바랐다. 물론 그것이 우스운 일이라는 걸 나 또한 안다. 독서의 폐해를 독서로 극복하려 하다니, 정말이지 바보 같은 일이다. 


심란해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을 뒤져 그들의 첫 문장을 살펴본다. 정영문(“어쩌면 나는 처음에 개구리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볼라뇨(“내장(內腸) 사실주의에 동참하지 않겠느냐는 친절한 제안을 받았다.”), 부코스키(“쉰 살이고, 여자와 잠을 같이 잔 지 4년도 넘었을 때였다.”), 브라우티건(“워터멜론 슈가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다시, 또 다시 행해졌다.”), 챈들러(“10월 중순 오전 열한시경이었다.”), 김승옥(“오늘 아침에도 그는 설사기 때문에 일찍 잠이 깨었다.”)…. 심란함은, 물론,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나는 새삼 ‘가시질’이라는 표현의 묘함을 생각한다. 내 생각에 이것은 높임말이다). 아무리 허기와 숙취, 불면과 불안, 비문학적인 사회에 대한 저주로 시간을 보낸다 해도 가시지 않을 심란함(님)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여기까지 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밥을 차린다. 허기라도 채우고 보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TV에서는 언젠가의 무한도전이 방영 중이다. A형 간염에 걸린 박명수를 위해 무한도전 멤버들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소원을 말해 봐’ 특집. 병상에 누워 있던 박명수가 뜬금없이 자서전을 쓸 테니 받아 적으라고 말한다. 황당해하는 유재석과 노홍철을 무시한 채, 박명수는 책의 첫 문장을 구술하기 시작한다. 그건 이런 문장이었다. 


“1970년 8월 27일 군산 모동네에서 A형이 혈액형이다.”


숟가락을 내려놓은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문장을 큰 소리로 여러 번 되풀이해 발음해본다. 그 문장은 언뜻 보기에는 별로 신통할 게 없다. 하지만 그 문장의 단순함 그 자체가 진정한 천재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문장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부터, 나는 그 문장이 앞으로 전개될 그 걸작의 내용과 꼭 들어맞게 의도적으로 구상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짧은 자서전의 마지막을 박명수는 이렇게 구술한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들이여.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진짜 너무 늦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땐 너무 늦은 거다. 그러니 지금 시작하라.”(박명수, <맨발에서 2인자까지>)


어느덧 신춘문예의 계절이다. 이 땅의 모든 작가 지망생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2012. 11. 9. 프레시안 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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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농담. 
어느덧 2013년이 밝았고, 올해도 나는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작품을 찾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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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3-01-03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힛. 프레시안에서 진작에 읽었던 글입니닷. 친구의 추천으로 '이방인'을 읽고 있는데 첫문장이 어찌 그리 반갑던지요.

박명수 좋아하는데. 과연, 그런 천재성이 엿보이는 사람이었군요. 이번주나 다음주에 할 박명수 창작 가요제도 기대가 많이 되요. 팝님이 박명수의 자서전 첫 문구에서 느꼈을 그 느낌과 소설 주인공 굴드의 고민 지점 사이에 어떤 해결점이나 연결 고리가 있을 듯한데 말이죠. 박명수가 왠지 고민의 힌트가 되는 느낌이랄까요. 암튼, 베르나르 키리니의 저 소설이 무지 궁금해졌습니다.

poptrash 2013-01-04 01:43   좋아요 0 | URL
핫, 실은 글 앞부분의 굴드를 패러디한 일종의 농담이었어요. 물론 박명수의 그 문장이 저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요. 그런데 달사르 님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박명수의 첫 문장에서 느꼈을 그 느낌과 소설 주인공 굴드의 고민 지점 사이에 무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 그러니까 기존의 문법에 얽메이지 않는 문장이 주는 어떤 느낌, 같은 것. 사실 이런저런 생각하다 보면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Jeanne_Hebuterne 2013-01-0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는 문장으로 후려치기까지 하지요.
그나저나 SNL이 아닌 SNS여서 다행입니다. 주드 로와 다니엘 크레이그, 콜린 퍼스의 SNL에 탐닉하는 저로서는 역시 난 어쩔 수 없군, 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구절!
새해에요, 팝트래쉬님.

poptrash 2013-01-04 16:07   좋아요 0 | URL
SNL이 왜요, 뭐 어때서요! SNS가 딱히 더 나을 것도 없어요!
후려친다는 표현이 정말 적절하네요. 독자들의 뒷통수를 세차게 때리는 느낌...
새해입니다. 건강하시죠?

Jeanne_Hebuterne 2013-01-04 16:32   좋아요 0 | URL
S와 L, 한글자 차이인데 심하게 저속해지는 기분인걸요!
북극 얼음이 녹아 더더욱 추워진답니다. 감기 조심하시길 바래요 :)

poptrash 2013-01-07 07:51   좋아요 0 | URL
올 겨울엔 이미 한 번 호되게 앓아서, 남은 겨울을 무사히 넘겼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야겠죠. J 님도 건강하시길!

프레이야 2013-01-0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년 신춘당선자들의 글과 소감을 찾아읽던 때가 있었어요. 다시 그럴 수 있을까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아직은 들지않는 것 보니 아주 늦진 않은가 봅니다. 고맙습니다. 겨울 잘 나기로 해요.^^

poptrash 2013-01-07 16:04   좋아요 0 | URL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진짜 늦었으니 어서 빨리 시작해야 하는데,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조금 더 여유가 있으신 걸까요? ㅎㅎ 날이 어서 풀렸으면 좋겠네요. 건강하세요!

관찰자 2013-01-0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구차달님의 말씀대로 사서 읽게 만들고 싶어지는 완벽한 서평이네요.
좋아하는 작가의 첫문장을 열거해 주셨는데, 저와 중첩되는 사람은 브라우티건이나 챈들러 정도네요. 어쩌면 세상에는 이렇게도 이야기를 잘 쓰는 사람들이 많은지 오늘도 궁금한 작가들의 목록을 한아름 담아 갑니다.
마음만 바쁘고, 읽는 속도가 영 나지 않은 겨울입니다.

poptrash 2013-01-07 16:07   좋아요 0 | URL
이거 베르나르 키리니에게 수수료라도 받아야겠는데요... 참 세상엔 많은 책이 있고, 시간은 언제나 없네요. 브라우티건이나 챈들러를 좋아하신다면 다른 작가들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연신내 사시면 은평구립도서관에서 빌려 보시면 되겠네요! ㅎㅎ

장현 2013-01-08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글 읽고 그냥 가면 먹튀 혹은 도둑심보겠지요?
"에코와 김수영이 말하는 책읽기"라는 프레시안 서평을 읽고 팝님 이름을 검색해서 여기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박람강기라고 해야 하나요? 진짜 대단하다는 생각 외엔 다른 생각이 안드네요.
팝님이 자신의 독서 노하우나 독서 때의 에피소드들에 대해 책을 쓰면 어떨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너무 일상적인 인사라 식상하지만) 행복하세요 ㅎ

poptrash 2013-01-09 02:40   좋아요 0 | URL
아, 먼 길을 오셨네요.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제게 독서 노하우가 있을까 생각하면 딱히 없고, 에피소드도 떠오르지 않으니 앞으로 만들어 가야겠어요.
장현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후안 가르시아 마데로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면 어떨까. 숙부의 뜻에 따라 법학대학에 입학했지만 문학을 포기할 수 없어 인문대의 시창작 교실을 기웃거리던 얼치기 시인. ‘피리를 불어주겠다’는 제안도 이해 못하는 숙맥이지만 이어진 (성적)행위를 두고 “그녀 말의 의미가 외롭고 지친 수영 선수처럼 내 무지의 검은 바다를 헤치며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고 제법 근사하게 표현할 줄 알았던 열일곱 소년. 가르시아 마데로는 어느 날의 일기를 이렇게 쓴다.


11월 2일

내장(內臟) 사실주의에 동참하지 않겠느냐는 친절한 제안을 받았다. 물론 나는 수락했다. 통과의례는 없었다. 그게 더 낫다. (13쪽)


일기는 끝나고, 우리는 당황한다. 내장 사실주의라는 낯선 단어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개를 저으며 책을 덮을 필요는 없다. 뜻을 모르는 건 비단 우리만이 아니다. 다음 날, 가르시아 마데로는 고백한다. 


11월 3일

내장 사실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같은 쪽)


<야만스러운 탐정들> 또한 여기서 시작한다. 정체도 모르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모임에 가입한 가르시아 마데로가 남긴 1975년의 일기로부터. 그리고 이 서평은 마데로의 남은 일기를, 아직 950여 페이지를 남긴 두 권의 뚱뚱한 책을 이 자리에 고스란히 옮기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씌어지는 중이다. 그보다 더 이 소설을 잘 설명할 방법은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분명하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대신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시인 지망생 가르시아 마데로가 아르투로 벨라노와 울리세스 리마를 만나 내장 사실주의라는 전위적인 문학 그룹에 합류하고, 서로 다른 가슴과 매력을 지닌 여자들 사이에서 방황하며 사랑과 섹스와 문학과 세상을 알아가는 이야기라고.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달콤한 청춘의 고민을 거듭하던 가르시아 마데로가 루페라는 창녀와 기둥서방 사이의 갈등에 휘말려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고, 벨라노와 리마를 따라 내장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진,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시인을 찾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라고. 그러니까 온갖 담론과 육체와 이상 속에서, 무엇보다 문학이라는 도달할 수 없는 꿈을 좇으며 길 위에서 청춘을 탕진하는 흔한 ‘문학청년’의 이야기라고. 


설마.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물을지 모른다. 한 마디로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성장소설 아니냐고. 성장을 말하는, 전혀 성장하지 않는 소설들로 가득한 오래된 장르에 던져진 또 하나의 성장소설. 문학에 대한 당신의 입장과 지식에 따라 반反성장소설이나 교양소설, 어쩌면 빌둥스로만이라는 단어를 택할 수도 있겠다. 대답은 간단하다. 아니.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그런 소설이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3부로 구성된 소설에서 고작 1부의 이야기를 요약했을 뿐이다(그리고 나는 형편없는 요약자다).


소설의 핵심은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뽐내는 2부다. 1976년부터 1996년에 이르는 세월을 채우는 것은 각각의 장소에서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가는 서른여덟 명의 인물들이다. 삶의 어느 순간 벨라노와 리마를 만났던 그들이 추억하는 리마와 벨라노에 대한 이야기. 온전히 그들에게 주어진 각각의 장을 통해 진술되는 일종의 목격담. 


그 속에서 벨라노와 리마는 엉터리 초현실주의자에서 마약밀매상으로, 가짜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이도저도 아닌 얼간이로 계속해서 모습을 바꾸지만, 그 어디에도 가르시아 마데로의 자리는 없다.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내장 사실주의자들을 연구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연구자’조차 “아니, 그 사람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다. 틀림없이 내장 사실주의 그룹에 속한 적이 없을 것이다”라고 잘라 말한다. ‘말 좆’처럼 발기된 성기를 어쩔 줄 몰라 5분 동안이나 거리를 달리던 가련한 소년은 모두에게 잊힌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온전한 벨라노와 리마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고, 앞뒤도 맞지 않으며, 무엇보다 그들에겐 인생이 있다. 한때 어떤 방식으로든 문학과 관계를 맺었던 그들은 이제 다른,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몫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학-이후의 삶. 볼라뇨는 끊임없이 문학(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을 찾아 떠도는 벨라노와 리마의 삶을 쫓는 대신, 마이크를 돌려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한다. 마치 (벨라노와 리마가 좇던) 문학이라는 것이 더는 소문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저마다의 관점으로 훼손되고 뒤틀린, 혹은 불행과 낭만으로 채색된 기억의 파편에서밖에 찾을 수 없다는 듯. 그렇다면 지금 볼라뇨는 죽어버린 문학을 애도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서른여덟 명의 그들이야말로 유령인지 모른다. 한때 매혹되었던 그들의 영혼은 오직 문학에(다른 예술에, 사랑에, 우정과 그 밖의 것들에) 바쳐졌지만, 매혹은 사라졌고, 영혼 또한 간 데 없다.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포기한, 혹은 치러야 했던 어떤 것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볼라뇨는 젊은 날의 반항적인 꿈의 대가로 시간이 어떻게 우리를 벌하는지 보여 준다. 실망, 고통스러울 만큼 사소한 성취들, 깨진 사랑, 질병, 심지어 비명횡사, 그리고 단순하게는, 젊음의 종말은 시간이 주는 벌이다. (프랜시스코 골드먼, ‘위대한 볼라뇨’,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박세형.오숙은 옮김, 열린책들 펴냄) 89쪽)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목소리가 있다. 깨지고 실망하고 병들었지만 여전히 스스로의 존재를 주장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담고 있는 저마다의 삶. 그렇다면 — 볼라뇨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그것은 왜 문학이 아닌가? 우리 모두에게는 목소리가, 삶이, 이야기가 있고, 그것을 들려주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는, 낡은 경전에나 남아 있을 법한 문학의 어떤 소용. 그것이 볼라뇨가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2부에 나오는 수많은 목소리의 흐름을 미시시피 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이 소설은, 멕시코 시인 마리오 산티아고의 삶의 파편들을 어느 정도 충실하게 옮겨 쓴 것이다.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나에겐 행운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어떤 세대적인 패배와 한 세대의 행복을 반영하려고 했다. 여기서 행복이란 어떤 경우엔 용기를 뜻하지만, 용기의 한계를 뜻하기도 한다. 내가 보르헤스와 코르타사르의 작품에 영원한 빚이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내 소설은, 소설에 나오는 많은 목소리만큼이나 다양한 독법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고통스럽게 읽을 수도 있고, 또한 신나게 읽을 수도 있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대하여’, ¡Viva Bolaño!)


결국, 하나의 정설과 몇 개의 가설로 정리할 수 없는 이 방대한 소설을 판단하는 것은 순전히 읽는 이의 몫이다. 심지어 우리는 26장으로 나뉘어진 2부의 이야기를 별개의 단편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볼라뇨가 만들어 놓은 이중의 구조. 벨라노와 리마가 세사레아 티나헤로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탐정이듯, 2부를 통해 벨라노와 리마의 흔적을 쫓는 우리 역시 일종의 탐정이 된다. 증거를 선택하는 것도, 그 증거들을 꿰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도 모두 탐정의 일이다. 그러니까 바로 당신의.


어쩌면 이 짧지 않은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몇 번쯤 길을 잃을지 모른다. 주인공들이 때때로 그랬던 것처럼. 깨지고 실망하고 병들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매일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마침내 진실을 찾는 데 성공했지만 진실을 찾았지만 그 끝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어떤 파국일 수도 있다. 다시 돌아온 가르시아 마데로의 일기로 진행되는 3부의 이야기처럼.


하지만 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페이지를 넘겨 버린 것이다. 별 수 없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나도 모르게. 살아 있는 이상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야 하는 것처럼, 읽어버린 이상 우리는 계속해서 읽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볼라뇨는 용기라고 불렀다.


자, 그렇다면 가르시아 마데로의 일기로 시작한 이 글은 어떻게 끝나야 할까? 올해의 책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걸맞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해야겠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 프레시안북스 12.12.21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2122113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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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제목은 매체에서 정하고, 마음에 드는 경우도 아닌 경우도 있지만, 이번 제목은 마음에 쏙든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써보았는데,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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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 2013-01-01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팝트래쉬님이 골라서 보시는 책이나 작가는 다 좋은듯 ^^

poptrash 2013-01-02 16:15   좋아요 0 | URL
세상에 좋은 책이 너무 많아서 큰일이에요 ㅎㅎ
 

어떤 호기에서였는지 나는 바르트의 <애도 일기>(김진영 옮김, 이순 펴냄)에 대한 짧은 기록을 남기기로 마음먹었고, 마감 시간이 임박한 후에야 그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기획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나는 겸허히 실패를 인정하고 백지를 제출하는 대신, 혹은 재빨리 다른 가능한 것(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전제하에)으로 선회하는 대신, 내가 <애도 일기>에 대해 쓰기 위해 경유한 몇몇의 장소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지도도 아니고 청사진도 아닌, 고작해야 몇 권의 책에서 뽑아낸 어떤 흔적들의 나열에 불과한 그것은 만족이라는 다분히 자기기만적인 단어의 의미에만 부합하는 만족, (단서를 모으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해석에는 실패한 탐정처럼) 스스로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실제로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 분명한 가상적인 만족이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종종 그러하듯이, 이 자리에 멈추어 선 채 자기 자신에게 주문을 걸듯 중얼거리는 것이다. 만족하려 한다, 라고. 마치 그것이 순전히 양의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반복적으로.


*


1977년 발표된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하나의 선언으로 시작한다.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원칙에서 출발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단순히 어떤 증세가 있는 환자로 환원시켜서는 안 되며, 오히려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비실제적인 것, 다시 말하면 다루기 힘든 것intraitable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원칙 말이다. 이렇게 하여 사례를 들지 않고 오로지 일차 언어의(메타 언어가 아닌) 행위에만 의존하는 ‘극적’ 방법이 선택되었다. 사랑의 담론을 묘사하는 것은 그 가상simulation으로 대체되었고, 분석이 아닌 언술 행위énonciation를 무대에 올려놓기 위하여 이 담론에서는 그 근본 주체인 ‘나’가 복귀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시된 것은 하나의 초상화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는 심리적인 것이 아닌 구조적인 것이다. 그것은 말parole의 자리를 읽게 해준다. 말하지 않는 그 사람(사랑의 대상) 앞에서 혼자 마음속으로 사랑스럽게 말하는 그 누군가의 자리를. (<사랑의 단상>(김희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11쪽)


그리고 그 선언은 어머니를 잃고 바르트가 남긴 짧은 기록을 모은 <애도 일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단순히 몇 개의 단어를 바꾸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를테면 “애도하는 사람을 단순히 어떤 증세가 있는 환자로 환원시켜서는 안 되며”, “그것은 말의 자리를 읽게 해준다. 말할 수 없는 그 사람(애도의 대상) 앞에서 혼자 마음속으로 필사적으로 말하는 그 누군가의 자리를” 같은 식으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틀 후의 일기를 바르트는 이렇게 썼다.


그러나 별로 반갑지 않은 위안들. 애도는, 우울은, 병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은 나를 무엇으로부터 낫게 하려는 걸까? 어떤 상태로, 어떤 삶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려는 걸까? 애도가 하나의 작업이라면, 애도 작업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속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 존재, 아주 귀중해진 주체다. 시스템에 통합된 그런 존재가 더는 아니다. — 1977.10.27 (<애도 일기> 18쪽)


사랑과 애도를 병의 대척점에, 같은 자리에 위치시키는 바르트의 말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한 애도도 이미 시작된 것”(왕은철 <애도 예찬>에서 재인용)이라는 데리다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의 단상>에 이미 등장하는 부재에 관한 절들을 보라.


나는 부재하는 이에게 그의 부재에 관한 담론을 끝없이 늘어놓는다. 이것은 요컨대 놀라운 상황이다. 그 사람은 지시물référent로는 부재하지만 대화 상대로서는 현존한다. 이 이상한 뒤틀림으로부터 일종의 감당하기 어려운 현재가 생겨난다. 나는 지시의 시간과 담화의 시간 사이에 처박혀 꼼짝못한다. 당신은 떠났고(그 때문에 내가 괴로워하는), 또 당신은 여기 있다(내가 당신에게 말하고 있으므로). 그러면 나는 현재가, 이 어려운 시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것은 고뇌의 순수한 한 편린이다.


부재는 지속되고, 나는 그것을 견디어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부재를 조작하려 한다. 시간의 뒤틀림을 왔다갔다하는 행동으로 변형시키거나, 리듬을 산출하거나, 언어의 장면을 열고자 한다(언어는 부재에서 태어난다. 아이는 실패를 가지고 장난한다. 어머니의 외출과 귀가를 흉내내며 실패를 던졌다 붙잡았다 한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창출된 것이다). 부재는 하나의 능동적인 실천, 분망함affairement(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이 된다. 다양한 역할(의혹.비난.욕망.우울)이 등장하는 허구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런 언어의 연출은 그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아이가 어머니의 부재를 여전히 믿고 있는 시간과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시간 사이에는 극히 짧은 차이밖에 없다고 한다. 부재를 조작하는 것, 그것은 이 순간을 연장하려는, 그리하여 그 사람이 냉혹하게도 부재에서 죽음으로 기울어질지도 모르는 순간을 되도록 오래 늦추려는 것이다. (<사랑의 단상> 30~31쪽)


마치 어머니의 죽음을 예언하기라도 한 듯한 그 절들은 <애도 일기>에서 좀더 생생한 언어로 반복된다. 


춥다, 밤이다, 겨울이다. 나는 집 안에서 따듯하지만, 그러나 혼자다. 그리고 이런 밤에 나는 다시 깨닫는다 : 이제 나는 이런 외로운 밤을 아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한다는 걸, 이런 고독 속에서 행동하고 일하기, 그러니까 저 “부재의 현전”과 달라붙어서 늘 함께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 1977.11.28. (79쪽)


결국 <사랑의 단상>에서 바르트가 말하고 있는 사랑은 애도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사랑이며, 애도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 의식했건 그렇지 않았건) <사랑의 단상>을 쓰며 어머니의 죽음을,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끔 부재를 잘 견디어낼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 ‘소중한 이’의 떠남을 감수하는 ‘모든 사람’의 대열에 끼게 되는 것이다. 일찍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있도록 훈련된 그 길들이기에 나는 능숙하게 복종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던(거의 미칠 지경이었던) 그 길들이기에. 나는 젖을 잘 뗀 주체처럼 행동한다. 어머니의 젖가슴이 아닌 다른 것으로 그 동안 양분을 취할 줄도 안다.


이 잘 견디어낸 부재, 그것은 망각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간헐적으로 불충실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망각하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기에. 가끔 망각하지 않는 연인은 지나침, 피로, 추억의 긴장으로 죽어간다(베르테르처럼).


(어렸을 때 난 잊어버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멀리 일하러 간 그 기나긴 버려진 나날들을. 저녁마다 어머니를 마중하러 세브르-바빌론 버스 정류장에 나가곤 했다. 버스는 여러 대 지나갔지만 그 어느 것에도 어머니는 없었다.) (28~29쪽)


하지만 현실로 다가온 어머니의 죽음에, 그 완벽한 부재에 그는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다. 그것은 단순히 지나간 일이 아니다. 매번 새롭게 일어나는(경험되는) 일이고, 매번 새롭게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운 일이다. 


모로코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집을 나가면서 마망이 누워 있던 자리에 남겨진 꽃을 치운다 — 그러자 다시 나를 사로잡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 위니코트가 했던 말은 얼마나 진실인가 : 이미 일어났었던 일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더 분명한 사실은 : 즉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일에 대한 두려움. 다름 아닌 이 두 사실이 궁극적으로 끝나버린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다. — 1978.7.9. (<애도 일기> 168쪽)


그는 <사랑의 단상>에서 이미 그러한 자신에 대해 예견한 바 있다. 


정신병 환자는 붕괴의 공포 속에 산다고 한다(이 이외의 증세는 방어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붕괴에 대한 임상적인 공포는 이미 체험한 적이 있는 붕괴에 대한 공포이다(원초적인 고뇌Primitive agony). [……] 그러므로 때에 따라서는 이런 붕괴에 대한 공포가 그의 삶을 침식해가는 환자에게, 이 붕괴가 이미 일어난 적이 있다는 것을 말해줄 필요가 있다.” 사랑의 고뇌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사랑의 출발점, 내가 매혹되었던 그 순간부터 이미 치러졌던 한 장례에 대한 공포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마세요. 당신은 이미 그를(그녀를) 잃어버렸는걸요.”라고. (49쪽)


그렇다고 그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 어머니의 죽음은, 단순한(이런 말은 가능하지 않겠지만) 죽음을 넘어, 그 자신의 존재를 근본부터 위협하는 사건이었다.


“죽음이란 특히 이런 것이다 :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것. 우리가 인지해왔던 것으로부터의 장례.” 이렇게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말하는 그 짧은 순간, 나는 마치 죽어가는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납으로 만든 인물, 말하지 않는 꿈의 형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속에서의 침묵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가? 또는 내게 거울을, 이미지를 보여주며 “이것이 바로 네 모습이란다”라고 말하는 자비로운 어머니? 그러나 침묵중의 어머니는 내가 누구인가를 말해주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근거가 없는, 고통스럽게 떠돌아다니는, 내 존재마저도 상실한 인간이다. (<사랑의 단상> 228쪽)


바르트에게 어머니가 어떤 존재였는지 우리에게 알려주는 하나의 기록.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는 마락Marrac이라고 불리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 동네에는 건축중인 집들이 엄청나게 많았고, 그 공사 현장에서 아이들이 놀곤 했다. 건물의 기초로 사용되기 위하여 점토질의 지면에 커다란 구멍이 몇 개 패어 있었다. 어느 날, 그 구멍들 중 하나 안에서 놀고 있다가 아이들은 나만 제외하고 전부 기어올라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올라가지 못한 것이었다. 땅 위 높은 곳에서, 그들은 ‘게임에 졌어! 혼자야! 보기 좋네! 제외되었어!’라고 소리치며 나를 놀렸다(제외된다는 것은 밖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멍 안에 혼자 있다는 것’, 하늘은 열려 있는데 갇혀 있다는 것, ‘폐쇄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때 나의 어머니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나를 그곳으로부터 끌어낸 후 아이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데리고 갔다. 그들에 대항하여. — ‘어린 시절의 추억’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이상빈 옮김, 강 펴냄) 174~175쪽)


그에게 어머니는 하나의 세상이었다. 세계에서 제외된 그가 속할 수 있었던 유일한, 그러나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았던 완벽한 세상. 이제 그에게는 자신이 평생 동안 매혹 당했던 글쓰기의 세계까지 오직 어머니의 존재를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나에게 온 편지들 안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기분 좋은 사실 : 많은 이들이(우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RB(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를 읽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그녀에 대한 글을 통해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게 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나의 글쓰기는 성공을 거두었던 셈이다. 그리고 지금 역시 좋은 것으로 내게 돌아오는 글쓰기의 성취. — 1977.11.14. (<애도 일기> 59쪽)


기록을 하는 건 기억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이렇게} 기록을 하는 건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망각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다. 아무것도 자기를 이겨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그 고통을. 돌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없는 그런 것. 

“기념비”의 필연성.

Memento illam vixisse. (그녀가 살았었음을 기억하라) — 1978.4.12일경 (123쪽)


물론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한 “기념비”는 아니었다.


죽은 뒤의 일에 대해서 나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내 글들이 나의 사후에도 계속 읽혀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다(M.을 위해서라면 경제적인 면을 고려해야겠지만).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각오가 되어 있고, “기념비”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 그러나 마망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견딜 수가 없다(그건 아마도 그녀가 글을 쓴 적이 없고, 그래서 내가 없으면 그녀에 대한 기억도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 1979.3.29. (244쪽)


그래서 바르트는 <밝은 방>을 쓰기 시작한다. 그가 분석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한 장의 사진(젊은 시절 어머니가 찍힌)을 보기 위해서, 그 의미를 자기 자신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무엇보다 잊지 않기 위해서, 다시 만나기 위해서 — 바로 그의 어머니를 위해서. 


한 장의 사진을 사랑할 때, 또는 그 사진이 나를 어지럽힐 때, 나는 그것 때문에 머뭇거린다. 그 사진 앞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내내, 나는 무엇을 하는가. 마치 그것이 보여주는 사물 혹은 사람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것을 바라보고 탐색한다. 온실 뒷구석에 망연히 서 있는 어머니의 얼굴은 흐릿하고 창백하다. 나는 불현듯 소리쳤다. “어머니다! 참으로 어머니다! 마침내, 나의 어머니다!” - (<카메라 루시다>(조광희 옮김, 열화당 펴냄) 99쪽)


*


난-널-사랑해란 말에는 뉘앙스가 없다. 그것은 설명이나 조정.정도.조심성 등을 삭제해버린다. 언어의 엄청난 역설이긴 하지만 난-널-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말parole의 어떤 연극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리고 그 말은 항상 진실이다(그것의 발화 이외에는 어떤 다른 지시물도 갖지 않는, 즉 수행어performatif와도 같은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 


난-널-사랑해에는 다른 곳ailleurs이 없다. 그것은 다이애드dyade(모성적인, 사랑스런)로 된 단어이다. 어떤 거리감도 뒤틀림도 그 기호를 분리하러 오지 않는다. 그 말은 그 무엇의 은유도 아니다. 

난-널-사랑해는 문장이 아니다. 그 말은 어떤 의미도 전달하지 않으며, 다만 하나의 제한된 상황에 집착해 있을 뿐이다 : “즉 주체가 그 사람에 대한 성찰의 관게에 정지되어 있는 상황” 말이다. 그것은 일문일어holophrase의 문장이다. (<사랑의 단상> 200쪽)


아마 ‘난-널-애도한다’라는 말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바르트는 어느 날의 <애도 일기>를 “이 메모를 하면서, 내면의 진부함에게 나는 나 자신을 모두 주어버린다”고 썼던 것이리라. 그것은 수없이 반복되어 진부할 대로 진부해진 말이지만, 그것을 내뱉는 이에게는 대체할 말을 찾을 수 없는, 찾을 필요조차 없는 진실이리라. 


<애도 일기>에는 바르트의 눈물로 얼룩진 문장들이 가득하지만, 나는 부러 이 자리에 그것들을 옮기지 않았다. 그것이 무책임한 인용으로 채워진 누더기 같은 글을 쓰며 내가 내린 유일한 윤리적인 결정이다. 물론 나는 지금 윤리적이라는 단어를 가장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어떤 요약이나 설명보다, 그의 문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분명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 또한 없는 것은 아니다(믿음이라는 단어의 가장 기만적인 용례).


일종의 지진계와 같이 바르트 자신의 감정의 진폭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는 <애도 일기>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그러니까 1979년 9월 15일까지 이어진다. 그 가을의 마지막 일기를 바르트는 이렇게 쓴다. 


1979. 9. 15.

슬프기만 한 수많은 아침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반 년이 지나지 않은 1980년 2월 25일, 바르트는 작은 트럭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결코 치료되기를 원치 않았던 그는 한 달 뒤인 3월 26일 세상을 떠난다. 그의 바람대로라면, 그의 마망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적어도 그가 자신에게 던지던 곤란한 질문이 더는 필요하지 않은 곳으로. 


그건 이런 질문이었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그 사람 없이도 잘 살아간다면, 그건 우리가 그 사람을, 자기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까……? — 1977.11.28.(78쪽)
















2012.12.14. 프레시안북스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21214185100&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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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남겨진, 아직도 끝내지 못한 애도, 애도, 애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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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카카 2012-12-22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떠오르는 글은 언제나 마음 한 켠에 조그만 나를 세워두고 있는 기분이 들게 해요.
책이 궁금해지네요.. 잘 봤습니다~

poptrash 2012-12-23 05:29   좋아요 0 | URL
이 엉터리 글도 나름의 소용이 있었네요. 고맙습니다.
 

선풍기가 더운 숨을 내뱉던 7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대한 짧은 원고를 쓰던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쓰려고 하던 중이었지만. 아무려나, 내게 약간의 재치란 게 있었다면 쓰(려고 하)던 중이었다, 라고 짧게 표현할 수도 있었을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스스로에게정직하고자노력하는사람이라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라고 담백하게 표현할 수도 있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카뮈의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과 <반항하는 인간>과 <작가 노트>와 <젊은 시절의 글>과 <시사평론>과 <단두대에 대한 성찰․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와 <결혼․여름> 사이를 발작적으로 오가고 있는 중이었다. 장 그르니에의 <카뮈를 추억하며>와 <섬>을, 램프레히트의 <서양철학사>를,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의 <20세기 서양철학의 흐름>을, 피터 왓슨의 <생각의 역사 2>를, F. 짐머먼의 <실존철학>을, 사이먼 크리칠리의 <죽은 철학자들의 서>를 초조하게 뒤적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밖에 기억도 나지 않는 책들을 책장에서 뽑아 방바닥에 던지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내가 그 모든 책을 순식간에 읽어낼 수라도 있다는 듯이. 마감 시간은 이미 넘긴지 오래였다.


선풍기에서 더운 바람이 불어올 때면, 누구라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픈 심정이 들게 마련이다.


나는 잠시 타이핑을 멈추고, 만약 내가 스스로에게정직하고자노력하는사람이라면 그 상황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생각해 본다. 마치 내가 언제나 스스로에게정직하고자노력하는사람이었던 것처럼, 답은 순식간에 튀어나온다. 이런 대답이다. 


A :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라는 표현이 전적으로 옳음.


나는 잠시 웃고, 머리를 흔든다. Enter 버튼보다 수백 배는 큰 Del 버튼을 누른다. 모든 것은 제 존재에 걸맞은 크기를 갖게 마련이다. 적어도 머릿속에서는. 어쨌거나 나는 스스로에게정직하고자노력하는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런 사람은 카뮈 하나로 족하다. 그리고 카뮈는 죽었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은 니체였다. 니체도 죽었다. 카뮈는 죽은 니체를 따라, 그러나 자신의 방식으로, 신이 죽은 세상에서의 신학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아니, 신이 혼수상태에 빠진 세상에서의 신학이라고 해야겠다. 그것은 부조리의 신학이다. 그 자신은 겸손을 가장하며, 혹은 귀찮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조리의 시론’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분명 신학이다. 그는 평생 신의 존재에 대해 판단하기를 유보했고, 그래서 말년에는 날파리떼 같은 일당들에게 신앙에 귀의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몰라도 한참은 모르는 말들이다. 카뮈가 구했던 것은, 처음부터 신앙이었다. 신앙의 핵심은, 세상의 편견과는 달리, 신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이다. 대부분의 경우 신이란 어떤 종류의 커피 위에 올라가는 생크림이나 마찬가지일 뿐이다. “카페 모카, 그란데 사이즈로, 생크림은 빼고. 다이어트 중이라서…” 카뮈는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단순히 생크림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렇다면 이 기회에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가 보기에 우리는, 우리들의 정신은, 우리들의 문화는 약간의 다이어트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아랑곳 않고 카뮈를 먹어치웠으며, 그 밖의 많은 것들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카뮈는 죽었다. 다시, 그리고 다시. 오늘도 카뮈는 세상의 모든 청춘들의 마음속에 다시 태어나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것이다. 영원히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처럼. 프로메테우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카뮈에게는 어떨지 모르겠다. 아마 그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장 그르니에는 스승의 현명함으로, 어린 카뮈가 어떤 종류의 명성을 갈구하고 있었음을, 아니 차라리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었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그건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후의 명성을 부인했지만, 바라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의 작동방식이 시지프의 노동을 닮았다면 더더욱.)


카뮈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사이먼 크리칠리는 철학자들의 죽음을 모은 책에서 카뮈의 죽음을 짧게 서술한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를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참으로 심각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다. 그것은 자살이다."

카뮈는 50페이지쯤 지나서 이 질문에 답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삶이다."

44세 때 노벨문학상을 받은 카뮈는 슬프게도 3년 후인 1960년 어이없는 자동차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자동차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이 아마도 카뮈가 대단히 감동적으로 묘사한 부조리의 무작위적인 힘일 것이다. 

(<죽은 철학자들의 서> 324~325쪽)


이것이 바로 스스로에게정직하고자노력하는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해, 그의 첫 번째 죽음에 대해, 그리고 오늘도 반복되고 있을 영원한 죽음에 대해 한 마디도 쓸 수 없었다. 나는 스스로에게정직하고자노력하는사람에 대해서라면 아무것도 쓸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노력하는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나 나름대로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하는 노력의 한 방식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사방에서 마감이 나를 죄어들고 있었고, 그 사이로 카뮈가 내게 상기시킨 추억이, 청춘의 시간이 괴롭게 빛나고 있었다. 빛나는 과거란 언제나 괴로운 법이다. 실은 별로 빛나지 않았음을 기억한다면, 더더욱. 


그래서 나는 주먹을 꼭 쥐고 책장으로 걸어가 백민석을 집었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그래봤자 마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 페이지, 다만 한 페이지씩 읽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감에 눈이 부셔서, 아니, 언제나 평범한 플라이 볼을 놓친 후 변명을 늘어놓는 ‘피너츠’ 팀의 외야수 루시 반 펠트가 말한 것처럼, 


추억에 눈이 부셔서. 



“형, 그거 알아요? 형은 참 좆같은 거.” 


후배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왕십리의 어느 곱창집이었다. 나는 물론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자 문득 자신이 좆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실은 좆같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제법 철학적이고도 성가신 의문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타닥타닥, 커다란 빗방울이 곱창집의 포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 인생도 좆같지.”


녀석의 말에 따르자면 내 인생이 좆같기 때문에, 자기 인생도 좆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고작 스물여덟 살에 다른 사람까지 좆같이 만들 수 있는 인생이라면 실은 좆같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제법 철학적이고도 성가신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스물일곱에 다른 사람 때문에 좆같아지는 인생이라면 정말 좆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묵묵히 술을 마시고, 곱창을 뒤집었다. 양념도 변변치 못하건만 곱창 맛이 퍽도 맛이 있었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술을 사주었을 뿐이다. 그전에도 사주었고, 앞으로도 사줄 것이다. 한 학번 후배였던 녀석은 당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직장인이었다. 평생 술을 얻어먹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단 말이다. 술뿐만이 아니다. 신입생 시절부터 녀석에게 빌려주고, 때론 그냥 주었던 그 모든 책, 책, 책들. 이를테면 스무 살의 내가 읽고, 스무 살의 녀석에게 주었던 <시지프 신화>, 혹은 내가 입에 침을 튀며 이야기하던, 백민석을 비롯한 몇몇 작가들의 소설 같은 것들.


그러니까 바로 그런 책들이 문제라는 거요, 녀석이 말했다. 말이 좀 짧았지만 나는 구태여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그 순간 나는 술도 사주고 책도 권하고 말버릇도 참아내는 훌륭한 선배였다. 녀석은 계속해서 그 책들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가치관이 그렇게 박혀버렸고, 그래서 결국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다고 했다. 자기는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나만 쏙 직장인이 되어 자본의 단물을 빨아먹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마지막 말은 내가 다른 선배에게 했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 어쨌거나 녀석은 제 인생을 나더러 책임지라고 했다.


“그래, 네 말대로 나는 좆같을지도 모르지.” 내가 말했다. “그리고 나 때문에 너까지 좆같아졌는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너를 책임진다면, 나는 더 이상 좆같은 놈이 아니잖니? 좆같은 놈은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나는 네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거고. 하지만 네 입장에서도 알지도 못하는 인간에게 인생을 맡길 수는 없는 일이겠지. 그러니까 나는 너를 책임질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내가 카뮈에게 배운 것이었다. 그때 나는 아직 조금쯤은 스스로에게정직하고자노력하는사람이었던 것이다. 


녀석은 웃었고, 우리는 건배를 했다. 녀석 또한 카뮈를 읽었고, 역시 얼마간은 스스로에게정직하고자노력하는사람이었던 것이다. 


*


처음엔 <내가 사랑한 캔디>로 시작했다. 이어 <목화밭 엽기전>을,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를, <죽은 올빼미 농장>을, <헤이, 우리 소풍 간다>를, <불쌍한 꼬마 한스>를,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을 읽었다. 95년에 처음 시작되어 2003년에 막을 내린 백민석이라는 세계를, 출간 순서와 상관없이, 내 맘대로, 다시 한 번 방문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제법 슬픈 일이었다.


<러셔>는 읽지 않았다. 나는 <러셔>를 한 번도 읽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그건 ‘다시’ 읽을 수 없는 텍스트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의 소설에 대해 이제 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글쎄.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백민석은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정직하고자노력하는독자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읽고 좇던 모든 책의 흔적을 그는, 구태여 광고하지 않지만(작가 후기에서 커트 보네거트의 이름을 언급한 <불쌍한 꼬마 한스>의 경우를 제외하면)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는다. 그의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그러니 그의 책 뒤에 실린 해설들이 오늘의 시점에선 하나같이 헛소리처럼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에게정직하고자노력하는독자스스로에게정직하고자노력하는사람보다 많지 않다. 그리고 해설을 쓰는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스스로에게정직하고자노력하는독자가 아니다. 그들은 다만 직업적인 독자들일 뿐이다. 직업적인 독자들에 대한 바르트와 모리스 나도의 대담을 기억할 것.


나 역시 스스로에게정직하고자노력하는독자는 아니다. 그러니 나는 그의 소설에 대해 할 말이 없다. 몇 가지 키워드를 늘어놓을 수는 있다. 허물어져가는 공동체와 그 자리를 채운 욕망들. 그러니까 폭력과 섹스. 한국문학의 평균치를 상회하는 피학과 가학. 죄책감이 불러온 과거의 유령들. 혹은 과거의 유령이 환기시키는 죄책감.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던적’ 수법들. 글쓰기의 불가능성. 도무지 구해지지 않는 구원과 어디에도 쓸모없는- 다만 등장인물들을 좌절시킬 뿐인 진실들. 그러니까 부조리. 뭐 그런 것들. 


나는 그저 독자들이 그의 소설을 읽어주기를, 계속해서 읽어주기를, 그리하여 무슨 말이건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결코 할 수 없는 말들을, 나보다 훨씬 더 근사하게. 그것이 나 나름대로 스스로에게 정직한 독자가 되고자하는 노력의 한 방식이다. 그리고 궁금할 뿐이다. 내가 사랑했던 작가의 절필 이유가. 혹은 이후가. 이대로라면 사라진 시인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두 주인공들처럼 백민석을 찾는 원정대라도 꾸려야 할 지경이다. 



어쩌면 백민석의 절필은 스스로에게정직하고자노력하는독자가 맞이하는 당연한 결말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에서 자꾸만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자기지시적인 글쓰기와, <죽은 올빼미 농장>에서 마침내 다다른 불모의 땅을 생각하고 있다. 그의 마지막 소설인(<러셔>를 읽지 않은 나는 그냥 그렇게 말하기로 한다) <죽은 올빼미 농장>은 여러 가지 점에서 첫 번째 장편소설인 <헤이, 우리 소풍 간다>를 닮았다. <헤이, 우리 소풍 간다>의 인물들은 절대적 폭력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돌아오는 과거의 유령(들)에 쫓긴다. 그들은 다시 모여 과거를 방문하고, 구원을 희구하지만, 같은 실수를 저지른 후 마침내 파멸한다. 백민석은 그들을 위해 판자촌이라는 ‘예외상태’의 지역을 제시한다. 그곳은 강박적인 세계고, 모호하고 불길하지만 치명적인 위협으로 가득한 세계다. 그리고 그것은 외상의 형태로 그들 모두에게(다시 말해 우리 모두에게) 계속해서 되돌아온다. 


<죽은 올빼미 농장>의 화자 또한 과거의 유령들에 시달린다. 하나는 ‘인형’으로 불리는, 화자의 유아기적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올빼미 농장’에서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 과거의 낯모르는 유령들이다. 화자는 ‘전형적인 아파트먼트 키드’라는 수식으로 제시되며, ‘죽은 올빼미 농장’에서 보내는 편지는 화자가 알지 못했던, 우리 모두가 잊었던 과거로부터의 호출이고, 화자는 얼치기 탐정이자 일종의 대리인으로 기능한다. 이미 황무지가, 쓰레기장이 된 농장의 샘을 다시 흐르게 함으로써, 소외되어 죽어갔던 이들을 위무하고 자기 자신과의 화해에도 성공한다. 그리고 ‘자장가’라는 이름의 선물을 얻는다. 백민석의 소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달콤한 과거의 한 조각. 난삽하지만 더없이 직접적이었던 <헤이, 우리 소풍 간다>의 긴장은, <죽은 올빼미 농장>을 통해 추상적이고 간접적인 형태로 해소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야말로 작가에게 계속해서 글을 쓰게 만들었던 내적 충동, 혹은 긴장이 해소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단언하고픈 충동을 애써 참고 있는 중이다. 


그럼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진실로 진지한 태도는, 아마도 예술을, 예술 자체를 포기할 때만 도달하게 될 어떤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던 수전 손택을 따라, 그의 예술관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이라고. 소설을 읽고 또 쓰는 태도에 피할 수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변화가 생긴 것이라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정직하고자노력하는독자라면, 그리고 그가 직업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면, 언젠가 ‘글쓰기의 불가능성’이라는 주제를 대면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처음과 끝이 호응할 수 있도록, 카뮈를 인용하며 글을 끝마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카뮈는 이렇게 썼다. 


참으로 진지한 문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절필이다. 소설이 쓸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밖에, ‘라노베’가 새로운 문학인가 어떤가, 신간의 판매지수가 천 대인가 만 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 (카뮈, <시지프 혹은 소설의 신화> 3쪽)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20810150631&Section=04
















*


그리고 나는 아직 시지프 신화에 대한 짧은 글을 쓰지 못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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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08-17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면서 계속 드는 생각. 나는 어째서 여지껏 백민석이라는 작가를 몰랐지?로 시작해 하단에서 보여지는 책 표지들을 나는 왜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지?만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시지프 신화>의 책 표지라도 눈에 들어와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런데 뭐가 또 그렇게 다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ㅠㅠ

poptrash 2012-08-17 05:4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무엇이 다행일까요. 제 입장에서는 이런 글로나마 백민석이라는 작가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이 생겼다는 게 다행.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까요? 아무려나, 저는 다행입니다. ㅎㅎ

선인장 2012-08-17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명이 유난히 붉은 술집에서 누군가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백민석 작가를 본 적이 있어요. 2000년 가을이었던가. 그때 마침 내 가방에는 <목화밭엽기전>이 들어있었어요. 내 마음은 그 책 속의 세상보다 더 황폐해져 있었구요. 그 책을 꺼내 들고, 작가의 테이블에 동석하여 사인을 받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을 기약했더랬어요. 그는 참 악필이더군요. 그리고 몇 년 뒤, 한 후배가 그의 책을 내게될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 책의 출판이 어그러지고, 그 뒤로는 어디에서도 백민석 작가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어요. 그의 책 출간 소식을 물론,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웠어요....

그러니, 작가는 찾는 원정대가 꾸려진다면, 그 누군가들을 위해 마실 물이라도 준비할 마음이...

너무도 오랫만에 듣는 백민석 작가의 이름이 반가워, 초면임에도 불쑥 댓글 남깁니다.
이따금 서재에 올라오는 글, 조용히 읽고 갔다는 뒤늦은 인사도 함께요...

poptrash 2012-08-20 01:26   좋아요 0 | URL
아, 묘한 사연이네요. 꼭 백민석 작가 초기 단편집에 등장할 법한. 어쨌거나, 그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셨다니 부러운 일입니다. 악필이라는 것도 어쩐지 좋네요.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읽고, 이야기를 하면 좋겠지만, 그러려면 실제로 원정대를 꾸려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반갑습니다. :)

비로그인 2012-08-17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화밭 엽기전]... 선빵 날리고 쓰러진 권투선수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그 책의 작가 백민석이라니요! 저는 처음 백민석을 읽을 때 다시는 그와 관련된 어떤 텍스트도 접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팝님 글을 보니 백민석은 이리저리 거미줄을 여러 군데 치고 있는 작가인 것 같네요. 음, 그런데 전 아직도 좀 겁나요 ( '')... 좀 더 정직하게 읽어보려고 다시 시도해봐야겠네요.

poptrash 2012-08-20 01:28   좋아요 0 | URL
선빵 날리고 쓰러진 권투선수라니, 무척 생생한 표현이네요! 백민석이 조금 무섭다면 <내가 사랑한 캔디>로 시작해보세요. 그리고 <불쌍한 꼬마 한스>도. 특히 전자는 제가 사랑하는 소설이에요.

아아 2012-08-27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백민석, 그립네요. 전 특히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에 실린 <이 친구를 보라>를 좋아했어요...

poptrash 2012-08-30 02:01   좋아요 0 | URL
저도 그 단편 좋아요. 백민석, 친구들끼리 모이면 가끔 이야기 해요. 저는 더이상 아무것도 읽지 않을 것 같다고 했는데, 다른 친구는 읽기는 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쓰지 않을 수도 없다는 이야기니까 우리는 그저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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