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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트가 유행인 모양이라 한 번 읽어 보았다. <토성의 고리>는 아직 도서관에 들어오지 않아 <아우스터리츠>를 들었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쏟아지는 문장들 탓에 숨도 쉬기 힘들었지만 아무튼 읽었고, 뭐, 좋았다. (근데 비문이 왜 이렇게 많은지?) 하지만 제발트를 읽으면 폼 좀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엔 부족했으니 <토성의 고리>를 마저 읽어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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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앨범 속에서 여행자가 지나가는, 거의 망각에 빠져 있는 풍경 사진을 다시 한 번 눈앞에 떠올리는 것처럼 어느 정도 쓸 만한 것들을 새로 오려 내고 배열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내가 몇 달에 걸쳐 이 계획에 몰두하는 수고가 크면 클수록 그 결과는 점점 더 옹색하게 보이고, 서류 뭉치를 열거나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기록한 무수한 페이지들을 펼치기만 하면 이미 반감과 구역질이 점점 더 나를 사로잡아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그럼에도 독서와 글스기는 항상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얼마나 기꺼이 어두워질 때까지, 더 이상 아무것도 해독할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리고 생각들이 빙빙 돌기 시작할 때까지 한 권의 책에 머물러 있었는지, 그리고 밤에 어두운 집 안에서 책상 앞에 앉아 램프의 불빛 속에서 연필 끝이 말 그대로 저절로, 전적으로 성실하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줄 한 줄 그어진 페이지를 내달리는 그림자를 쫓는 것을 바라보며 안도감을 느꼈을까요. 그러나 이제 글 쓰는 일은 내게 너무 어려워져서 종종 한 문장을 위해 하루 종일 걸리기도 하고 몹시 힘들게 생각해 낸 문장을 기록할 수 없을 때면, 고통스럽게도 나의 구상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과 내가 사용한 모든 단어들의 부적절함이 드러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기만하며 때때로 하루 분량이 채워진 것처럼 보일 때라도, 다음날 아침에 그 페이지에 처음 눈길을 던지자마자 매번 심각한 오류와 부조화, 궤도를 벗어나는 것들을 보게 되는 거예요. 기록된 것이 많든 적든 간에 그것을 읽어 보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처럼 보여서 그 자리에서 그것을 없애 버리거나 새로 시작해야 했지요. 나는 곧 첫걸음을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지요. 한 발을 다른 발 앞으로 어떻게 옮길지 알지 못하는 공중 줄타기 곡예사처럼 나는 내 밑에서 플랫폼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고,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훨씬 벗어나 번쩍거리는 균형 막대의 끝이 더 이상 이전처럼 나의 등불이 되지 못한 채, 나를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불길한 유혹이라는 사실을 경악하며 깨닫게 되었지요. 때때로 내 머릿속의 생각이 멋지고 분명하게 나타나는 일이 아직 있지만, 그것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포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데, 내가 연필을 붙들기만 하면 이전에는 편안하게 나를 맡길 수 있었던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이 이제는 가장 매력 없는 문구의 잡동사니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러고 나면 문장 속의 그 어떤 표현도 처량한 절름발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공허하거나 거짓으로 들리지 않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지요. 이처럼 수치스러운 정신 상태에서 나는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벽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앉아서, 영혼을 소진시키고, 예를 들면 여러 가지 물건들이 들어 있는 서랍을 치우는 것과 같은 아주 사소한 일이나 용무조차 우리의 힘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점차 깨닫게 되었지요.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내 속에서 진행되던 질병이 나타난 것으로, 내 속에 뭔가 둔감하고 고집스러운 것이 자리 잡아서 점점 더 모든 것을 마비시키는 것이었지요. 이미 나는 내 머리 뒤에서 인격의 몰락을 불러오는 사악한 공허를 느꼈고, 내가 실은 기억력이나 사고력을, 애초에는 존재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일생 동안 오로지 소멸되어 가는 세상과 나 자신에게 계속적으로 등을 돌려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지요. 만약 그 당시에 누군가가 나를 처형장으로 데려가려 했다면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마치 카스피 해를 지나는 증기선에서 몹시 심하게 멀미를 앓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갑판 밖으로 던져 버리겠다고 했을 때 아무런 저항도 보이지 못하는 것처럼, 눈도 뜨지 않은 채 그 모든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었을 거예요. 내 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난 것은 당혹감으로, 그 감정과 함께 이 문장을, 아니면 어떤 임의의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나는 모든 쓰여져야 할 문장의 시작 부분에 있었고, 그것은 곧 훨씬 간단한 독서 행위로까지 확대되어서, 전체 페이지를 관망하려는 시도에서 엄청난 혼란 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지요. 우리가 언어를 골목과 광장, 시간 속으로 멀리 되돌아가는 구역들의 여러 구석을 가진, 무너지거나 개량되었거나 새로 만들어진 구역과 훨씬 넓게 교외로까지 커져 간 외곽 지역을 가진 오래된 도시로 생각할 수 있다면, 나 자신은 오랫동안 부재했던 탓에 이 집결 상태에 더 이상 적응하지 못하고, 정류소가 무엇에 사용되는지, 뒷마당과 교차로, 대로나 다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 같았지요. 언어의 전반적인 구조, 개별적인 부분들의 문장론적인 순서, 문장부호, 접속사와 심지어 습관적인 물건들의 이름, 그 모든 것이 꿰뚫어 볼 수 없는 안개 속에 감춰져 있었지요. 무엇보다 나 자신이 과거에 썼던 것들을 나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런 문장은 여전히 뭔가 의미심장한 것인데, 실제로는 기껏해야 보조적인 것, 우리의 무지가 기형적으로 발전한 것으로서, 그것과 더불어 우리는 마치 촉수를 가진 많은 바다 식물이나 바다 동물 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을 맹목적으로 더듬는 것처럼 생각되었지요. 평소에는 목적이 분명한 명석한 인상을 불러 일으켰을 바로 그런 것들, 문체상의 완성도를 가지고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것이 내게는 완전히 임의적이거나 망상적인 시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나는 어디서도 더 이상 연관 관계를 보지 못했고, 문장들은 단순히 개개 단어들로 해체되고, 단어들은 철자의 고의적인 연속이었으며, 철자들은 깨어진 기호이자 납회색과 여기저기 은색으로 빛나는 흔적들로 해체되었는데, 이 흔적들은 어떤 기어다니는 생물을 격리시키고 자기 뒤로 끌어당겼으며, 그 광경은 나를 점점 더 공포와 수치심으로 채우는 것이었어요. 어느 날 저녁, 나는 모든 묶여 있거나 흩어진 종이들과 노트, 수첩, 서류철과 강의록 등 내 글씨로 채워진 것들을 모두 집 밖으로 끌어내어 정원 아래쪽 끝에 있는 퇴비더미 속에 던져 넣고 몇 차례 삽질하여 썩은 나뭇잎과 흙을 끼얹어 층층이 덮어 버렸지요. 게다가 그 후 몇 주 뒤에 방을 치우고 바닥과 벽을 새로 칠하는 동안 내 삶의 무게로부터 가벼워진 것을, 그러나 동시에 그림자들이 내 위로 내려오는 것을 알아차렸지요. 특히나 내가 평소에 가장 좋아한 저녁놀이 지는 시간이면, 처음에는 모호하지만 점점 더 짙어지는 불안이 나를 엄습했고, 그 불안감 때문에 희미한 빛깔들의 아름다운 유희가 사악하고 빛없는 창백함으로 변하고, 가슴속의 심장은 원래의 4분의 1 정도의 크기로 위축되고, 머릿속에 든 유일한 생각이라고는 내가 몇 년 전에 의사를 찾아갔다가 기이한 발작이 일어나 그레이트 포틀랜드 가에 있는 어느 집 4층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구덩이 속의 깊은 어둠으로 곤두박질친 일이었어요. 애초에 많지 않은 지인 중의 누군가를 찾거나 정상적인 감정으로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것은 그 당시 내게는 불가능했지요.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두려웠고, 더군다나 스스로 말해야 하는 것은 더 심했으며, 그것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웨일스 사람들 사이에서나 영국인들, 프랑스 인들 사이에서 내가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지, 그리고 이전부터 그래 왔다는 것을 점차 깨달았지요. 나의 진짜 출신에 대한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츤느 말했다. 나는 학교와 직장, 혹은 친분 관계에서 한 번도 소속감을 갖지 못했어요. 예술가들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시민적인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한 번도 편안하게 느끼지 못했고, 개인적인 우정을 맺는 일을 오랫동안 하지 못했지요. 누군가를 채 알기도 전에 나는 그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간다고 생각했고, 누군가가 내게 관심을 보이자마자 그를 멀리했지요. 극단적인 정중함만이 최종적으로 나를 사람들과 묶어 놓았는데, 그것은 오늘날 생각해 보면 그때그때 몇 안 되는 상대방에게 적용되어서, 그들은 항상 피할 수 없는 절망감의 바닥에 서 있다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닫아 버리는 것을 허락해 주었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136~1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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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yours 2011-09-14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성의 고리>를 너무너무 읽고 싶은데, 펼쳤다 덮었다 벌써 네 번째.
애초에 왜 '너무너무 읽고 싶은데'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잊어버렸어요 팝 님.

poptrash 2011-09-14 22:55   좋아요 0 | URL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저는 보통 너무너무 읽고 싶은데 -> 그럼 책을 사야하는데 -> 그래서 책이 왔는데 -> 일단 꽂아 두는데 -> 다른 책이 너무너무 읽고 싶은데, 이런 패턴이라서 뭐라 드릴 말씀이...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돈이 없으면 책을 덜 사게 되고, 어떻게든 읽고는 싶으니 도서관을 찾고, 발품한 게 아까우니 펼쳐보게 되며, 연체 하게 되면 그 기간 동안 책을 빌리지 못하니 되도록 연체하기 전에 책을 다 읽으려고 노력하게 되고, 책을 반납하러 갈 때는 이왕 간 김에 다른 책을 빌리게 되므로, 결국 계속해서 책을 (알라딘 메인에서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며 우리를 유혹하는 잘 나가는 신간은 아닐지라도) 읽게 된다는 것인데, 유일한 문제점이 있다면 그 동안 책장에 꽂아두고 읽지 않은 많은 책들에게 미안하다는 것. 뭐 그렇습니다.

stillyours 2011-09-16 08:33   좋아요 0 | URL
저는 다시 안 읽을 것 같거나, 아직 안 읽었으나 내내 안 읽을 것 같은 책들을 팔고 있어요. 그 돈으로 진짜 읽고 싶은 책들을 사고요. 진짜 읽고 싶어서 산 책들이 서서히 쌓이고 있어요.
팝 님의 '보통 너무너무 읽고 싶은데'에서 '다른 책이 너무너무 읽고 싶은데'까지의 패턴에 일단 공감을. 이건 병이 아닐까요.ㅋ

poptrash 2011-09-16 13:55   좋아요 0 | URL
앗, 저도요. ㅎㅎ 근데 이제 거기 재미가 들려서 자꾸 뭘 팔까 책장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어요. 책은 안 읽고. 병 맞는듯... 병맛 병ㅋ

비로그인 2011-09-14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의 교정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ㅋㅋ^^

poptrash 2011-09-14 22:28   좋아요 0 | URL
후와 님이 우와! 라고 하시니까 재밌어요 ㅎㅎ 근데 정말... 이런 책을 작업한다면 눈알이 빠질거 같아요;

비로그인 2011-09-14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 책도 관심 가는데요? 조만간 추파 던져봐야겠어요. (응?)

poptrash 2011-09-14 22:28   좋아요 0 | URL
말없는수다쟁이 님은 플레이보이. (응?)
 

Sentio legem. 나는 글을 쓰는 행위에 의무라는 개념을 부여했다. 침묵의 단어가 없는 탓에 나는 단 하루도 살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철저히 입을 봉하고 있을 용기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삶의 온기 가까이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 까닭에 어떤 날도 내게는 휴일이 되지 못한다. 나는 틀림없이 불안으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아마도 애초에 익사하지 않으려고 매달린 나무토막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고립되기 위한 핑계, 각성(覺醒)과 그로 인한 감시와 타인의 관심에서 벗어나려는 속임수였을 것이다.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속이고, 세상 몰래 숨어서 세상 자체를 속이려는 명목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절대 죽지는 않으면서 세간사에서 벗어나기 위한 명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란 위인은 자신의 욕구도 다스리지 못하고, 새벽 시간마저 뜻대로 쓰지 못한다. 나는 지금 거울을 박살내고 싶다. 나는 새벽 시간을 첼로 연습 시간으로 바꾸지 못한다. 자동차 여행처럼 주의를 요하는 여행으로, 축제나 영화 시사회나 이사회로도, 혹은 친구의 장례식으로도 바꾸지 못한다. 매번 기회가 올 때마다 어떤 기회든 내게는 여가처럼 생각되고, 그래서 시행착오를 거듭할 뿐이다.

*

우리는 결함 있는 존재이다. 날마다 배고픔에 사로잡히는 우리의 포로 상태, 성기를 곤두서게 만드는 꿈, 마음의 동요, 두려움, 거울, 언어, 이런 것들이 망망대해에서 끊임없이 다시 생겨나는 파도처럼 되풀이된다. 우리는 칼을 피해 미끄덩 달아나는 얼어붙은 커피 아이스크림의 유혹을 떨쳐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욕망을 포기하지도, 나이나 휴식, 겉치레에 불과한 영과에 넘겨주지도, 사회적 지위나 그 따분함, 명예와 그 역할에 넘겨주지도, 여자나 금전에 넘겨주지도 말아야 한다. 또한 집, 가족, 틀에 박힌 사고, 안락함, 대의명분, 평화, 그 어떤 것에도 욕망을 넘겨주면 안 된다. 태어나면서 우리가 받은 재산이라곤 생명과 생명에 대한 탐욕 뿐이므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죽음을 원치 않는 한, 그 무엇도 생명을 압수해선 안 된다. 혀끝에서 맴돌기만 할 뿐 완전히 되찾을 가망이 전혀 없는 우리의 원천이 제 아무리 불가사의하고 야성적이며, 언어에 대해 고집불통이고, 의식에 대해서도 완강하며, 인정머리 없고, 위험하거나 혹은 잔인하게 여겨질지라도 그러하다. 생명이 아닌 나머지는 모두 죽음이다. 이런 욕망이나 이런 폭력이 고착되는 대상 모두가 죽음이다. 대상은 결코 충족되지 못한다. 대상은 고통이며, 우리를 고통으로 인도한다. 

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창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알몸이던 날, 두려움의 날, 진실 - 정면에서 바라본 두려움 - 의 날, 빛 속에서 전율하던 날을 향해 가는 것과 흡사하다. 자아는 자기 내면의 인성의 지배자가 아니어서 스스로를 뛰어넘지 못한다.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해 착각한다. 자기 정체성이란 자신이 바라볼 수 없는 어느 날 밤의 영원한 대체물에 불과하기 대문이다. 인간이 언어의 지배자가 아닌 것은 지구가 은하계의 중심이 아닐 뿐더러, 혹성들의 지배자, 항성들의 구덩이와 빛의 지배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언어는 하나의 화면이다. 의지는 시야에 생긴 얼룩이다. 의식은 위성 중계하는 악마이다. 이 모두가 살인과 죽음에 봉사한다. 통찰력과 이성(理性), 현재 통용되는 언어는 무한한 정성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끊임없이 고사(枯死)하는 관목들이다. 우리 내부에서 어떤 토양도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바람 속에서 한결같이 서로에게 매달린다. 우리는 사막에서 쉬지 않고 뿌리를 더듬는다. 우리의 기력은 계속해서 쇠퇴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어둠과 침묵에 합류한다. 마치 물이 도랑으로 흘러들 듯이.

(123 ~1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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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8-15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맨 위 단락은 제 마음 속 생각을 글로 써낸 것 같아요. 혀 끝에서만 맴돌던 말을요. 도서관에서 빌릴 책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ㅎㅎ

poptrash 2011-08-15 03:59   좋아요 0 | URL
이윽고 인간의 목소리가 우릴 깨우고, 우린 익사하겠죠.

달사르 2011-08-16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표지부터 마음에 들었어요! 전 읽으면서 생각보다 어려워서 두세 번인가 읽었는데 아직 제대로 다 이해를 못하고 있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이 책 리뷰나 포스팅 올라오면 무척 반가워요. ^^

poptrash 2011-08-17 18:09   좋아요 0 | URL
전 사실 표지가 조금 무서웠어요. 지금도 그래요. 저도 조만간 다시 읽어 보려고요. 참 멋진 책들이 많아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리고 세상에 몇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건 이런 일반론으로 시작하는 글은 대개 형편 없다는 일반론을 나는 신봉하고 있다)

하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것을 하지 않기 위해 핑계를 대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일을 마무리 지은 후 그것에 대해 변명하는 사람이다. 두 단어는 종종 혼용 되지만, 아마도 이현복 선생님의 데카르트 수업 시간에 들은 것으로 기억 되는데, 애매와 모호라는 단어의 철학적 용법이 다르듯 두 단어의 쓰임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주로 핑계를 대는 사람이다. (물론 이것은 일반론을 전제로 한 후 시작한 글이므로, 내가 절대 변명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게으름이라는 속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내 안주머니엔 언제나 글을 쓰지 않기 위한 변명이 여남은 개 정도가 준비 되어 있고, 마치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여러 생활인들처럼 그것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증명 되고도 남음이 있다. 

반면 변명은 책임감과 직결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의 부재와. 변명 또한 품이 드는 일이기에, 책임감이 있는 이들은 변명할 힘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거나 묵묵히 스스로를 책망하는 것이다. 물론 책임감은 핑계와도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를테면 나는 소량의 책임감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핑계를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 다른 의미의 - 음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 책임감이 사용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지금 마감이 닥친 어떤 원고를 쓰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데, 기분 전환을 위해 한 뜨거운 샤워 동안 핑계와 변명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그것이 썩 그럴듯해 보인다는 착각에 빠질 법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것을 새로운 핑계의 씨앗으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오랜 세월동안 계발해온 어떤 동물적인 직감으로 이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와중에도 마감 시간은 끊임없이 다가 오고 있고, 마치 예정된 파국처럼, 나에게는 그것을 피할 도리가 없다. (물론 나는 또한 어떻게든 써낸 원고에 대해 내가 그다지 큰 불만을 가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나의 책임감이 주로 위에서 말했던 음의 기운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인간의 언어는 우리의 깜냥보다는 좀 더 발달되어 있어, 핑계와 변명을 아우르는 어휘 또한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꼴값이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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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1-03-21 0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꼴7ㅏㅄ 이라는, 다소 '나는 7ㅏ수다'라는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프로그램의 제목을 의식한 태그는, 그것과는 별개로 타이포그라피 적인 의미로 충만한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떠올라서 댓글을 적어야만 한다는 핑계를 사용하셨습니다)

정말로, '꼴'과 7'과 'ㅄ'이라니... 무슨 뜻일까?(라는 궁금증이 떠올라서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겠다는 핑계를 사용하셨습니다)

poptrash 2011-03-21 0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물론 핑계와 변명이라는 두 가지의 기술을 거의 비슷한 비율로 함께 사용하거나, 전혀 사용하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지금 문득, 구태여 할 필요는 없지만 너무나 시의적절하게 떠올랐다. 그 두 사람은 몹시 다르면서도 또한 몹시 비슷할 거라는 예감인데, 나로서는 그 누구와고도 친하게 어울리고 싶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변명과 핑계를 함께 시전하는 사람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고, 변명과 핑계를 모두 사용하지 않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못할 것 같다. 전자는 내가 싫고, 후자는 나를 싫어할테니. (당신의 핑계 레벨이 한 단계 업 되었습니다)

하이드 2011-03-21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작도 않고 핑계를 대는 사람과 무려 '마무리'를 하고 변명을 하는 사람의 비교는, 사실 '마무리'와 '변명'은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무튼, 밸런스가 안 맞는듯.

poptrash 2011-03-21 08:10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마무리한 모든 일에 변명이 필요한 게 아니니까. 밸런스는... 시작도 않고 핑계를 대는 사람도 어떻게든 마무리를 하고(결과에 대해 변명은 안함), 핑계 없이 시작한 사람은 마무리가, 결과가 좋지 않으면 변명을 한다... 인데 망한 글이네요. 반성 반성(하면서 자숙을 해야겠다는 핑계를 사용).

하이드 2011-03-21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7ㅏ수다가 어제 좀 심하게 꼴7ㅏㅄ스러웠던거에는 120% 공감 ㅡㅜ
정말 웃게 만드는 타이포그래피군요. ㅎㅎ

poptrash 2011-03-21 08:11   좋아요 0 | URL
좀 생각을 해봤는데 꼴은 꼴등, 7은 7등, ㅄ은 ㅄ이니까... 아마 LG 얘기인듯. 프로야구 시즌이 다가오니까요. 그건 그렇고 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잠을 자야하나 이거... 참 난감하네요.

수양 2011-03-21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화하하하하 이거야말로 필사적인 딴짓인데요! 아, 팝님은 보통 같아요 알랭 드 보통^^ 파국은 어떻게 잘 극복하셨는지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ㅋㅋㅋ

poptrash 2011-03-21 15:16   좋아요 0 | URL
가장 보통의 남자입니다.
구원은 여전히 난망하고...
잠깐 눈 좀 붙일까 하고 잠들었는데
너무 달콤한 꿈을 꿔버렸어요.

김토끼 2011-03-2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공감이요. 해야 될 일을 20%쯤 남겨두고 옆길에서 놀다가, 15% 할 수 있는 시간을 남겨두고 거기에 20%를 꾹꾹 쑤셔넣습니다. 지금도 이럴 때가 아닌데요..

poptrash 2011-03-29 02:44   좋아요 0 | URL
저는 100%를 남겨두고 20% 할 수 있는 시간을 남겨두고, 아직 20%나 남았네? 라는 초긍정적인 마인드와 함께 브레인스토밍을 한답시고 10%까지 써버리는 잔인한 인간입니다...

김토끼 2011-03-30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역시 리얼 개그의 종결자이십니다.

poptrash 2011-04-03 00:59   좋아요 0 | URL
미안해요. 웃길 생각은 없었는데 ㅜ_ㅜ
 

  “좋은 소설은 늘 현실보다 더 과잉이거나 결핍이고 더 느리거나 빠르다.”1) 그렇다면 질문.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과잉인가 결핍인가, 느린가 빠른가. 카포티의 ‘모하비 사막’은? 먼저 ‘바틀비’에 결핍된 것. 바로 바틀비라는 인물 그 자체. “다른 필경사에 대해서라면 일생을 다루는 전기를 쓸 수도 있지만 바틀비에 대해서는 그런 종류의 글을 전혀 쓸 수 없다. 나는 이 사람에 대한 충실하고 만족스러운 전기를 쓸 만한 자료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것은 문학에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려주는 1인칭 관찰자인 화자는, 자료의 턱없는 부족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작하고야 만다. 바틀비가 거기, 그의 눈앞에 존재했기 때문에. 전후의 유럽에 유행했던 농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하지만 멜빌은 19세기 중반에 이 소설을 썼다) 실존의 뒤를 따르는 것은 설명이다. 용모, 쓸모, 습관과 욕망, 꿈과 상처 기타 등등. 서류심사와 면접시험장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장황한 자기소개, 이력의 나열. 하지만 그런 절차 없이 채용된 바틀비를 설명할 책임은 그를 채용하고 관찰하는 ‘나’에게로 미루어진다. 그리하여 결핍을 채우는 것은 과잉이다. 추측의 과잉. 해석의 과잉. 바틀비는 ‘나’에게 채워야 할 백지 같은 존재이자 자신이 쓴 것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거울 같은 존재로 작동한다.2)

  ‘모하비 사막’에서는 모든 것이 과잉이다. 물질의 과잉, 취향의 과잉. 따라서 욕망의 과잉.  인물은 대개 숫자로 설명되고(“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몸무게에 키는 작은 50대 남자”인 빈센트와 예일 법학 대학원을 3등으로 졸업하고 하버드 경영 대학원을 1등으로 진학하고 지난 10년 내내 내각의 요직에 제안을 받아 온 남편) 취향으로 판단된다(“그렇다고 그 선물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닌 빈센트. 선물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베두라 커프스, 고전적인 폴 플라토 담배 케이스, 의무적으로 사주는 카르티에 시계” 반면 “남편은 정말로 여자의 외모를 잘 알아보는 남자였다. 한눈에 전체 분위기를 딱 알아차렸다. 남편을 위해서라면 옷을 차려 입어도 보람이 있었고, 이건 그를 사랑하는 사소한 이유 중 하나였다.”). 과잉된 욕망은 필연적으로 존재의 소외를 낳는다. 인물의 마음속에, 마치 블랙홀처럼, 채울 수 없는 결핍을 낳는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관계를 갈망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결핍을 채우는 과잉과 결핍을 낳는 과잉.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과잉과 결핍의 종류다. 결핍된 인물을 채우는 것은 또 다른 인물의 과잉된 주관적 해석이다(‘바틀비’). 과잉된 물질이 야기하는 것은 인간(성)의 결핍이다(‘모하비’). 둘 사이에 놓인, 122년이라는 시차. 자본주의가 발흥하는 시점의 미국과 이미 후기로 접어든 시점의 미국. 각각을 살아내는, 살아내야만 하는, 사람들. 그 모습을 포착하는 각각의 작가.

  그렇다면 속도. 미국에서도 가장 바쁘게 돌아가는 월 가의 변호사 사무실. 늘어난 업무량으로 인해 ‘나’는 새로운 직원을 뽑는다. 이미 그에게는 각각 오전과 오후에 말썽을 일으키는 두 명의 필경사와 과도한 야망과 만성적인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심부름꾼 소년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합류하는 바틀비라는 인물. 필사 업무 외에 다른 모든 것을 조용히 거절하던 그는 마침내 필사 업무까지 거절하기에 이른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거절. 아니 그것은 거절이 아니다. 차라리 무화라고 해야 하리라. ‘해야 한다/하고 싶지 않다’라는 단순한 힘의 대결이 아닌 ‘해야 한다/안 하고 싶다’로 표현되는 일종의 비껴감. ‘하고 싶지 않은’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반항이나 굴종의 몸짓이다. ‘나’는 바틀비에게 굴종을 요구하지만 그에게선 일말의 반항심조차 엿볼 수 없고, 따라서 그를 대할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한다. ‘안 하고 싶은’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굴종이나 반항이 아니다.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안)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이다. 그는 그러고만 싶다면, 저항과 복종의 이항대립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틀비는 계속해서 ‘안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을 늘려나간다. 남이 필사한 것의 검토, 자신이 필사한 것의 검토, 심부름, 신상에 대한 답변, 합리적인 생각, 사무실을 떠나는 일…. 이것은 반복과 변형이 필요한 쌓아 올리는 이야기이고, 이야기의 서술 시간과는 별개로, 느린 이야기이다. 그 느림은 ‘나’와 우리가 바틀비라는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그리고 그 느림은, 마치 바다를 향해가는 새끼거북의 발걸음처럼,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도 조용한 여운을 남긴다.

  반면 ‘모하비 사막’은 불과 몇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회상이 종종 등장하긴 하지만). 유한계급의 여성이 불륜의 상대에게 이별을 통고하고 집으로 돌아와 “정숙하게 보이도록 화장을 새로 하고는 회색 비단 카프탄드레스와 진주 고리가 달려 있는 회색 비단 구두를 신”고 남편을 기다린다. 남편은 그녀가 사랑하는 유일한 남자이지만, (과장하자면) 섹스를 하지 않는 유일한 남자이기도 하다. 저녁에 잡혀 있던 약속을 취소한 남편은 서재3)에서 술을 마시고 대학시절 배낭여행을 하다 만난 노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흔 살의 나이에 장님인 그는 2년 전 이웃의 소개로 만난 아내에게 배신당하고, 전 재산과 트레일러도 빼앗긴 채 모하비 사막에 버려졌다. 아내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평소와 다른 그의 장황한 말에 불안을 느낀다.4) 그리고 이내 불안은 가면을 벗는다. 화려한 실내장식과 값비싼 물품들의 목록, 애정 없는 섹스 아래 숨겨져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낮잠에서 깨어나 같이 놀던 친구들이 사라졌음을 깨달은 어린아이처럼, 남편은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모하비 사막에서 홀로 남겨진 노인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다. 남편에 비해 아직 젊은 아내는 그런 자신들을,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 그녀는 남편에게 애원한다 : “제발요, 여보. (새로운 애인은) 누구든지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아무런 도구도 갖지 못한 인간이 무엇의 깊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직접 추락하는 수밖에 없다. 공허의 깊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깨달음은 언제나 찰나의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빠른 이야기다. 두 번째 질문.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느 것이 우리의 이야기와 더 가까운가?

  원래는 이런 이야기를 쓸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이만 하기로 한다.


1) <몰락의 에티카> 14p, 신형철, 문학동네(2008)

2) 이런 관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예술가의 운명을 그린 것(바틃비는 멜빌 자신)’이라는 기존의 해석을 넘어, ‘백지를 마주한 예술가의 불안을 그린 것’이라는 해석 또한 가능할 것이다.


3) 특이한 팔각형의 서재에는 빌리 볼드윈의 개념을 본 따 만든 놋쇠 책꽂이가 있고, 풍성한 갈색 양란 두 다발이 편안히 꽂혀 있는 노란 중국제 꽃병들이 있고, 이탈리아 조각가 마리노 마리니가 만든 말이 있고, 고갱이 그린 남쪽 바다의 풍경화가 있고, 프렌치 창문 밖으로는 정원과 이스트 리버가 보이고, 모카색 벨벳을 씌운 사치스러운 소파가 있고, 탁자 위에 은제 얼음통에는 후추향이 풍기는 러시아 보드카가 가득 들어 있다.

4) 여기에는 작은 반전이 존재한다. 카포티는 마치 남편이 부인의 불륜을 알아챘고 그래서 과거의 경험담을 통해 그녀를 돌려 비난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이미 그들은 서로의 불륜을 알고 있고 심지어 아내는 남편의 불륜 상대를 직접 물색하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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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1-01-05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줄 요약은 없어요? 미안. 여기 알라딘이었지.
올시즌 배추의 연봉 삭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페이퍼 코멘트 하고 싶지만, 읽은 책이 없어서 글이 눈에 안 들어오고 그러네요.

poptrash 2011-01-05 01:33   좋아요 0 | URL
이거슨 글설리...
배추 연봉 삭감은 "ㅋㅋㅋ" 입니다.
배추가 받아들였다는 게 신기하고 부활했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는 없을 거 같고 그래도 5천이면 땜빵선발로라도 어떻게 좀...

양철나무꾼 2011-01-05 0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는데...왜 올해 문화일보 신춘문예 펑론 부문 당선작인 그 분의 글이 떠오르는 거죠?^^

새해 뜻하는 모든 일 하실 수 있는 한해가 되시길 빌구요, 무엇보다 건필하세요~^^

poptrash 2011-01-06 19:08   좋아요 0 | URL
저도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고맙습니다 :)
 

이승훈 선생님을 생각하면 당신의 방이 생각나고 사물 A가 생각나고 매일 점심마다 시켜 항상 반쯤 남기시던 잡채밥과 힘겨운 비명을 지르며 돌아가던 박카스 뚜껑과 오렌지와 싸우는 대포와 염소와 개미와 차가운 맥주와 검은 김 몇 장이 생각나고 무엇보다 얇은 담배 한 대가 생각난다. 강의가 무르익어 갈 무렵이면 선생님은 종종 내 이름을 부르셨고, 오늘은 무슨 담배를 피우느냐고 물으셨는데, 아직 이십대 초반의 새파란 청춘이었던 나는 한 담배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런 저런 담배를 전전했던 탓이고, 선생님은 종종 담배를 가져오기를 잊으셨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얇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내가 새파란 청춘이었다는 건 이미 말했고 얇은 담배는 팔다리가 가늘어지는 노인들이나 피우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시간이면 즉석에서 담배에 대한 품평이 오가게 마련이고, 오늘 담배는 너무 독하다거나, 맛이 괜찮다거나 뭐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갔던 기억이다. 사정을 모르는 타과생이었다면 이게 시론 시간인지 시창작 시간인지 아니면 '시가' 품평회인지 헷갈렸으리라. 시에 대한 소양의 턱없는 부족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은 성적을 받았던 건 바로 담배에 대한 소양 때문이라 나는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그 시절에 선생님을 위해 따로 얇은 담배 한 갑 준비할 생각을 못했던 것은 내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고,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갑자기 이승훈 선생님을 떠올리게 된 것은 가을밤 무슨 감상에 젖어서가 아니고 지긋지긋한 담배 때문도 아니고 차가운 맥주는 떨어졌고 하지만 위스키는 남아 있고 물론 오렌지와 대포와 염소와 개미 때문도 아니다. 대학을 다닌 시간 보다 대학을 졸업하고 허송세월한 시간이 더 길어져버린 이 마당에 선생님을 다시 생각하게 된 이유는 당연히 현대시 때문이다. 며칠 전에 연신내에서 내 가난한 친구와 나눈 대화 때문이다. 사회학과와 심리학과를 복수전공하고 어떤 작은 신문사에 월에 100만원을 받으며 다니던 친구는 결혼을 해서 애가 생기고 100만원으로는 생활할 수가 없고 그래서 프로그래밍 학원을 3개월 동안 다닌 후에 IT 회사에 취직해서 밤낮 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월급은 그렇게 늘어난 것 같지 않고,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니고 병도 아니고 정으로 일하는 그 친구를 위해 나는 소설을 쓰겠다고 약조하고 <정의 자세>란 제목까지 생각해놓은 바 있으나 주체할 수 없는 게으름 탓에 미루고 미뤄 이제는 모두 백지가 되어버린 터였다. 하지만 고맙게도 친구는 자기가 발견한 괜찮은 술집에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나를 불렀고, 고마운 마음에 나는 그 술집은 일전에 우리가 그곳을 지나다 내가 들어가 보자고 했으나 네가 거절한 바로 그곳이라는 지적을 굳이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 마침 내 손에는 시집이 한 권 들려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것은 황태의 기본 / 국물엔 뜨거운 파…’ 가 아니라 ‘이것은 기계의 기본 / 기둥엔 차가운 피’라는 멋들어진 시인의 말이 있는 황병승 시인의 <트랙과 들판의 별>이었던 것이다. 친구는 내 손에서 시집을 낚아채더니 몇 장인가를 후루룩 살펴보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도 시야?”

그럼, 하고 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자 친구는 미심쩍다는 듯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책과 함께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데”라는 말을 돌려주었다. “이게 어째서 시지?”

물론 나는 한국 모더니즘 시의 거장인 이승훈 선생님께 6학기 동안 담배를 ‘조공’하던 모범생으로서 명쾌한 답변을 돌려줄 책무를 마음 속 깊이 느꼈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밝혀야겠지만 시에 대한 소양이 부족한 자로서 대답이 궁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는 것이 최소한의 인간적 소양을 보여주는 길이리라. 나는 다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뿐이다.

“시인이 썼으니까 시지.”

“그럼 내가 아무 말이나 하면 시인가?” 녀석이 다시 물었고

“아니 그건 아니지.” 내가 사려 깊게 대답했다. “너는 시인이 아니니까.”

그리하여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피상적이고 쓸모없는 논의가 얼마간 진행되기도 했는데, 이는 우리가 남아도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곧잘 하는 수작으로 가장 최근의 예로는 “왜 샌프란시스코의 영건이자 에이스인 팀 린스컴을 좋아할 수 없는가?”가 있다. 나는 네가 이미 나이를 먹은 아저씨가 되어서 젊고 잘나가는 재능 충만한 젊은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다소 고리타분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를 했고, 녀석은 이런저런 반례를 펴며 오전 시간을 보내다 결국 점심시간이 닥쳐서야 우리는 ‘생긴 게 맘에 안든다’는 비교적 흡족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런 수작을 일컫는 ‘오늘 하루도 시간 잘 때웠네(오하때)’라는 표현까지 갖고 있었다. 하여간 서른 살이 먹도록 돈과 시적 소양과 ‘티미’에 대한 호감을 갖추지 못한 우리는 기묘한 패러독스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인 아닌 사람이 현대시를 쓸 수 있을까?

현대 시인이 쓰면 현대시이고, 같은 말이라도 우리가 아무렇게나 뱉어 놓는 말은 현대시가 아닐 지언데, 그렇다면 시인과 비시인 사이, 시와 비시非詩 사이의 그 균열은 도대체 무엇이냐 말이다. 나는 마치 저녁 먹고 한가롭게 공원을 산책하다가 크레바스에라도 빠진 기분이었다. 시와 비시 사이의 넓고 깊고 어두운 구멍에 빨려 들어간 기분이었다. 시인이란 사람은 시를 쓰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건 어쨌거나 시라고 생각하면 적어도 머리 아플 일은 없겠지만, 시인이 아닌 사람이 시를 쓰려면 시인이 되어야 할 텐데, 과거의 정형시를 흉내내보았자 그것은 그저 우스운 어린애 장난에 불과할 것이고, 그렇다면 시인이 아닌 사람은 시를 쓸 수 없는데 무슨 수로 시인이 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건 내게 ‘목숨을 건 도약’을 연상시켰다. ‘비시’라는 이름의 이쪽 편에서 ‘시’라는 저쪽 편으로의 목숨을 건 도약. 그것은 정말 목숨을 건 도약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데, 그런 일을 한다고 어디서 돈이 생기는 것은 아니며 자칫하면 그 사이에 떨어져 ‘오하때’에 열을 올리는 나와 내 친구 같은 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내 또 다른 가난한 친구가 언젠가 알려준 ‘DC 문학갤’이라는 곳에 가보면 그런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건필하시길!)

술을 마시고 돌아온 후에도 나는 한참 동안이나 ‘시-비시’에 끼어 벗어날 줄을 몰랐다. 심지어 주변의 예를 들어 30대의 연애에 대해 말하던 여자 친구와의 대화 와중에도 나는 빌어먹을 시와 비시를 생각했던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적당히 섞인 술자리에서 여자 친구는 “그런데 어차피 남자가 여자랑 연애하는 건 자려고 그러는 거 아냐?”라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고(잠깐만 근데 너는 나를 그렇게 생각했던 거냐)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남자들은 검지 하나를 곧추어 세우며 너는 아직 멀었다고 했단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남자는 여자랑 자고 나서야 연애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충분히 시간을 들여 생각하며 하루를 때울만한 또 하나의 ‘오하때’의 예이겠지만, 나는 자려고 연애하는 남자와 자고 나서야 연애하는 남자의 사이에 또 다시 끼인 채 시와 비시를 생각했다. 나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니까. 말하자면 글러 먹었지만 굴러먹지는 않는 놈인데, 그건 이 자리에서 논의할 상황이 아니고 또 손도 너무 춥고 하니까 다음 기회에 이야기해보도록하자.

그래서 내가 펼친 것은 현대시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이란 책이었다. 이토록 정직한 제목의 책이 다 있을까. 이승훈이 썼고 알기 쉽게 썼으며 현대시에 관한 책인데 특히 작법을 말한다. 특히 충격적인 부분은 ‘알기 쉬운’이란 부분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승훈’이란 걸 감안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당신도 15분 간 유명하다> 같은 에세이를 제외하면 이 책은 선생님이 쓴 가장 쉬운 책들의 하나이리라. 그렇다고 선생님이 항상 무슨 어려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는 말이 아니다. 프로이트와 융과 라깡을 이야기하고, 바슐라르와 바르트를 이야기하고, 선불교와 데리다의 해체를 이야기하시지만 선생님의 개념정리는 그 누구의 개념정리 보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다만 문제는 프로이트와 융에서 라깡으로 넘어가고 다시 바슐라르와 바르트 그리고 선불교와 데리다로 넘어가는 그 생각의 흐름을 종종 종잡을 수 없고 본인도 그걸 명쾌히 정리해 설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이 책에는 그런 이름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말로 바르트 이름이 한 번인가 나오고 프로이트의 전집 인용이 조금 나오긴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선생님에게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식한 것은 다만 충분히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자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책에도 역시 의식의 흐름이랄까, 도무지 하나로 정리해 담을 수 없는 노 시인의 넓고도 광대한 의식이 흐르는 결을 엿볼 수 있는 단서는 많다. 그게 선생님의 스타일이니까. 다만 그것은 개인적인 이야기들이고, 아프고 강의는 고되고 삶은 지루하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 살아 벌써 육십 년이 넘는 마일리지를 채워 만들어진, 이승훈이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너무도 적확히 말해주는 바가 있어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밑줄 긋기인데 서론이 이렇게 길어져버렸다. 그러니 아마 뒷부분은 흐지부지 끝나게 되리라. 그것이 나의 스타일이고 나의 게으름이다. 나는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박인환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에 대해, 그리고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잔의 술, 세 잔의 술, 열 잔의 술과 한 잔의 술이 주는 의미는, 최소한 시에서는, 다르다. 이것도 센스의 문제이다. 한 잔의 술은 외로움, 고독, 그리움, 결핍을 상징한다. 열 잔의 술을 마시고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술주정이고 횡설수설이고 주사일 것이다. 외로워서 술을 마시지만 술에 취한 상태에서는 외로움을 모른다.

그러므로 어떤 유행가 가사에는, 지금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하기야 기억이 틀림없다는 말도 말이 안 되지만 아무튼 ‘한 잔 술에 떠오른 얼굴’이라는 가사가 떠오르고 이 주인공 역시 한 잔 술에 애인의 얼굴이 떠오르지 두 잔, 세 잔, 열 잔 술에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물론 두 잔 술에도 떠오를 수 있지만 독주라면 이미 취한 상태이고 술이 센가 약한가도 문제이므로 술에 약한 화자라면 밀밭에만 가도 사라진 애인의 얼굴이 떠오를 수 있다. 한 잔 술에 떠오른 얼굴은 도대체 어디에 떠오른 얼굴인가? 술잔인가? 화자의 생각인가? 머리인가? 가슴인가? 술잔에 애인의 얼굴이 떠올랐다면 술을 마시는 것은 그리운 애인의 얼굴을 삼키는 행위가 되고, 그러므로 그리움은 해소된다. 나와 그녀 혹은 나와 그 남자가 술을 매개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다소 빗나간 감이 있지만 모든 문학이 그렇고 삶도 그렇고 바른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바른 길로 곧게 나가는 것도 아니다. 특히 문학은 바른 길로 바르게 걸어가는, 말하자면 직선으로 앞을 향해 가는 게 아니다.” (58-59p)

시인의 예민한 감각을 이야기하며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이야기하다가 술이 몇 잔인지, 그게 독주인지 술은 센지 약한지로 넘어가서 삶과 문학의 길로 자연스레 넘어가는 이 문장의 길을 보라. 이것이야말로 ‘보여주기’가 아닌가. 무엇이 예민한 것인지를 설명하지 않고 문장의 흐름 그 자체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대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대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잠이

들었다

- 성민, ‘놀이’ 전문

이런 반복은 내용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이 시의 경우 시간은 변하지만 아무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 따라서 한결같이 지속되는 정서나 관념의 흐름을 강조한다. 내가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이 아니라 그대가 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러니까 그대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가 되는 마음으로 잠이 드는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아름다운가?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나만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잠이 들기 때문이다.” (102-103p)

여기서 빛나는 것은 한 줄의 아포리즘이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나만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잠이 들기 때문이다, 라는 부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시를 모르는 인간이고, 내 가슴을 친 것은 시보단 선생의 그 문장이었다.


“이미지와 관념의 관계가 ‘1:다’라고 할 때 다는 다라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모자란다는 뜻이고 말하자면 상징의 의미는 아무리 퍼내도 쏟아붓고 계속 의미를 부여해도 모자란다는 뜻이고 그러므로 다多는 다이고 다가 아니다. 그런가 하면 또한 다는 다da이다. 이 다는 다자인dasein, 현존재라는 의미의 다자인의 접두사이고 현재 존재하는 나, 지금 여기 있는 나의 의미를 강조한다. 현존재는 존재sein와 현da이 결합된 존재이고 그러므로 여기 da가 중요하다. 여기는 어디인가?” (109p)

 

다가 다가 되고 다시 다가 되며 결국엔 ‘여기는 어디인가’로 끝나는 이런 문장.


“시의 화자는 김소월이 아니라 한 여인이고, 이 여인은 님과의 이별을 근심한다. 자신이 역겨워서, 싫어서, 구역질이 나서 떠난다면 어떻게 하나? 만일 자신이 역겨워서 님이 떠난다면 화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고 말한다. 말이 되는가? 자신이 역겨워 님이 떠난다면 이런 님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님을 붙잡고 떠나지 말라고 울며불며 하소연하는 고전적이고 감상적인 태도. 둘째는 칼이나 총을 들고 떠나지 못하게 위협하거나 님의 옷을 찢는 공격적인 사디스트의 태도. 셋째는 이별을 체념하는 나 같은 허무주의자의 태도. 넷째는 뭐? 역겹다구? 그래 나도 네가 역겨웠다. 그러니까 잘 되었다고 기뻐하는 낙천적 현실주의적 태도. 다섯째는 재수없다고 소금을 뿌리는 샤머니즘의 태도.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129p)

 

국민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이야기하며 ‘나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라는 화자의 문제적 언술을 놓고, 일반적으로 이별을 통고 받은 여성들의 다섯 가지 반응을 정리했는데 그것이 1. 고전적.감상적 태도 2. 사디스트의 태도 3. ‘나 같은’ 허무주의자의 태도 4. 낙천적 현실주의적 태도 5. 샤머니즘의 태도다. 난 정말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물론 글쓴이는 웃기려는 의도가 없었겠지만, 누군가는 이게 뭐가 웃기냐고 묻겠지만. 참 웃긴데, 진짜 웃긴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 이런 여성의 언술을 맞닥뜨린 남성의 반응에 대한 분석을 보자.


“이런 여인의 행위에 대한 남자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진달래꽃을 그냥 밟고 가는 남자. 둘째는 사뿐히 즈려 밟으려고 노력하다 쓰러지는 남자. 셋째는 도대체 이 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망설이는 남자. 물론 사뿐히 즈려 밟고 가는 남자도 있을 수 있다. 이 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밟고 가는 남자는 야만적이고 씩씩하고 늠름하고 남성적이다. 한편 사뿐히 즈려 밟으려다 쓰러지는 남자는 내성적이고 섬세하고 병적이고 아둔하고 아마 내가 이 모양일 것이다. 문제는 이 꽃 앞에서 망설이는 남자. 싫어서 떠나는 남자가 가는 길에 꽃을 뿌리는, 그것도 빨간 진달래꽃을 뿌리는 이 여인의 행위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쁘다는 표현인가?” (130p)

 

야만적이고-씩씩하고-늠름하고-남성적인 남자와 내성적이고-섬세하고-병적이고-아둔한 남자를 대조한 후, 후자에 대고 ‘내가 아마 이 모양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그의 자기 인식. 나는 그게 우습고 또 슬프다. 참고로 나는 사뿐히 즈려 밟으려고 노력해 결국 넘어지지도 않고 지나왔지만, 나중에 발바닥에 붙은 진달래꽃의 파편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하는 지지부진한 남자다.


“대체로 언어유희는 말장난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지하고 엄숙한, 그런 면에서 도덕주의자에 속하는 이 땅의 많은 시인들은 이런 유희를 비판하고 부정하고 혐오하지만 과연 그런가? 예술이 궁극적으로는 놀이이고 장난이고 이 놀이는 현실원칙을 뛰어넘는다. 그만큼 자유롭다는 말씀. 언어유희를 강조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언어의 조건과 관계된다. 언어는 기표(소리)와 기의(의미)로 구성되지만 이 기의는 한 번도 완성된 적이 없고 언제나 지연되고 다른 것으로 치환된다. 지금도 치환된다. 이런 말을 하려면 끝이 없고, 내일까지 해도 모자라고, 내가 기침 감기로 고생을 하는 것도 끝이 없다. 3월부터 두통 때문에 이브론정과 판피린을 복용하다가 다시 기침 감기로 코푸정과 판피린을 복용하는 게 20일이 넘는다. 감기는 자랑이 아니지만 수치도 아니다. 물론 언어는 감기를 모른다. 그러나 기표와 기의가 따로 논다는 것도 모른다. 언어유희, 특히 동음이의어로 하는 장난은 언어가 보여 주는 이런 차이, 사이, 틈을 파고든다. 어디 시뿐이랴? 진리는 언어유희를 지향한다.” (140p)

 

끊임없이 의미가 지연되는 언어 자체의 속성, 하여 언어유희의 필연성을 이야기 하는 와중에 ‘이런 말을 하려면 끝이 없고, 내일까지 해도 모자라고, 내가 기침 감기로 고생을 하는 것도 끝이 없다’같은 문장으로 넘어가고 이어 이브론정과 판피린과 코푸정을 이야기하는 이 능청스러움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제는 장르가 아니라 양식이고 양식은 그것이 양식이기 때문에 우리를 살지게 하고 배부르게 한다. 일용할 양식이 없다면 우리는 굶을 수밖에 없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단식 농성을 할 때 찾아가 굶으면 죽는다고 말했다. 그렇다. 굶으면 죽는다.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은가? 양식이 있어야 하고 물론 양식樣式은 양식糧食이 아니지만 한편 양식일 수도 있다. 양식이 양식이라고?

다시 피로가 오나 보다. 어제는 목요일 방학 중에도 중앙일보 시창작 야간 강의가 있었고, 한낮엔 따뜻하던 날씨가 저녁이 되면서 다시 추워 오고 강의가 업이라고 생각하면서 힘들게 강의 두 시간이 끝나면 추운 겨울밤 젊은 시인들, 나이 든 학생들과 함께 서소문 뒷골목 시끄러운 분식집에 앉아 호프를 마시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되었다. 가을밤 호프 한 잔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고 야간 강의의 피로도 풀리지만 다음 날이면 피로가 더 심해지고 오늘도 그렇다. 피로는 나의 운명이고 나의 브랜드이고 나의 애인이다. 문제는 양식이고 양식이 아니고 문학에는 세 가지 장르가 있는 게 아니라 슈타이거 식으로 말하면 아홉가지 장르가 있을 수 있다.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95p)

장르와 양식에 대해 말하다가 양식과 양식을 가지고 장난을 치시다가 문득 시창작 야간 강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그것은 (양식을 벌기 위한) 업이고, 그네들과 함께 시끄러운 분식집에서 호프한잔(양식) 마시는데, 피로를 풀지만 다음 날이면 피로가 더 심해지고 오늘도 그러시단다. 당할 길이 없다. 더군다나 그 틈을 타 피로는 나의 운명이고 브랜드이고 애인이라고 천명하기까지. 나도 오늘 술을 마시며 이런 글을 쓰고, 이런 글을 쓰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조금 즐겁기도 하지만 내일이면 더욱 스트레스를 받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나의 운명이고 브랜드이고 애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다. 아무리 해도 그럴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 자야할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화자는 나이가 든 경상도 남자로 저편(저승) 강기슭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치 않다. 따라서 화자의 목소리는 시의 후반으로 올수록 더 강해진다. ‘뭐락카노’라는 목소리는 5연에 오면 세 번 반복될 정도이다. 박목월 선생이 지금(시를 쓰던 그때) 강기슭에 서 있는 게 아니라 그가 아닌, 혹은 그가 경상도 노인의 탈을 쓰고 말한다. 물론 박목월 선생은 경상도 출신이다. 그러나 선생은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 적도 없고 그런 시도 없다. 갑자기 선생님 생각이 나고 겨울 저녁 하늘이 흐려오고 우울하고 슬퍼진다. 선생님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인가? 글을 더 쓸 수가 없다. 선생님은 나의 은사이시다.” (165p)

 

학교에는 세어 보다 항상 중간에서 포기하고 마는 138단 짜리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의 중간에는 박목월 선생님의 시비가 있다. 박목월 선생님이 공대에 다니는 이승훈 선생님을 설득해 국문과로 오게 했다니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애틋할 것인가. 그냥 수업을 듣기만 한 나도 이승훈 선생님을 생각하면 이렇게 애틋한 것을.

사실 선생님의 책은 ‘현대시 작법’이라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만 그것은 이 글이 ‘밑줄 긋기’라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고 다만 나는 그때 선생님을 위해 얇은 담배 한 갑을 준비하지 못했음을 후회할 뿐이다. 아직도 이 모자란 학생을 기억하고 계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빨리 건강해지셨으면 좋겠다, 바랄 뿐이다. 남은 술 들이키고 이제는 정말 자야하겠다.


사나이의 팔이 달아나고 한 마리 흰 닭이 구 구 구 잃어버린 목을 좇아 달린다. 오 나를 부르는 깊은 명령의 겨울 지하실에선 더욱 진지하기 위하여 등불을 켜놓고 우린 생각의 따스한 닭들을 키운다. 닭들을 키운다. 새벽마다 쓰라리게 정신의 땅을 판다. 완강한 시간의 사슬이 끊어진 새벽 문지방에서 소리들은 피를 흘린다. 그리고 그것은 하아얀 액체로 변하더니 이윽고 목이 없는 한 마리 흰 닭이 되어 저렇게 많은 아침 햇볕 속을 뒤우뚱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 이승훈, '사물 A'


그러고보니 선생님은 보라색을 좋아하셨고, 보라색 볼펜으로 답안지를 쓰면 A+를 준다는 뜬소문도 돌았더랬다. 나는 볼펜 색깔과 상관 없이 항상 A+를 받는 학생이었으므로 소문의 진위 따위는 모른다. 그리고 현대시가 무엇인지도,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결국 모두다 장난이고 유희이고 놀이이다." (2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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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10-30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간 남자는, '죽은 남자' '죽어서 관 속에 누운 남자'일 것입니다. 사뿐히 즈려밟고 갈 수 없는 남자가 되겠지요.
이 페이퍼 하나가 그대로 '시' 같네요. ^^

poptrash 2010-10-31 03:0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ㅎㅎ 생각할수록 맞는 말씀. 누군들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갈 수 있겠냐만은, 진달래꽃이 다 무어냐 아무 것도 모르고 지나가는 남자는 분명히 있을 거예요.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니길 바랍니다만... 또 모르죠.
이것은 시가 아니라 페이퍼 >_<

라로 2010-10-30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는 시인이 아니니까,,,,,음
멋지세요,,,,,별찜을 하고도 모자라 프린트를 해서 여러번 읽고 싶어지는 글이에요,,,

poptrash 2010-10-31 03:05   좋아요 0 | URL
우리는 시인이 아니에요. 그것은 100%의 진실.
어쩐지 시인이 되고 싶은 밤이네요...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는 걸까요.

마노아 2010-10-30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별찜을 하고 인쇄도 했어요. 그리고 추천도 했어요.^^ㅎㅎㅎ

poptrash 2010-10-31 03:06   좋아요 0 | URL
3단 콤보;;;
인쇄는 어쩐지 부끄럽단 말예요.

2010-10-30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31 0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0-10-31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3단 콤보는 다른 분들도 다 하셨으니...
저도 당근이고요~

연신내라는 지명이 전 마냥 친근하게 느껴져서 말이죠~^^

poptrash 2010-10-31 21:22   좋아요 0 | URL
연신내. 은평의 중심지에요. 어린 친구들이 너무 많긴 하지만...
곱창집에서 술먹고 돌아다니다 해장국에다 소주 한 잔 하는게 진리라는!

bugs 2010-12-04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훈 선생님의 '시창작 연습'의 마지막 시험문제 . 암송하는 시를 적으시오 . 나는 김소월 시인의 '오르골'을 적었지만 사실 그건 줄리아하트의 '오르골' 노래가사였고 시험시간에 속으로 계속 노래를 불렀다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맑은 노래는 아직도 제 가슴에 젖어 젖어 있어요 아마 내버려뒀으면 송골매가 부른 '세상모르고살았노라' 역시 적었을지도 모름 . 한 학기내내 모든 수업을 지각과 결석없이 들었고 면접시험도 포기하고 수업을 즐겼던 것 같음 . "시는 세상에 아무 쓸모가 없어요 (한 템포 쉬고) 그래서 소중한거죠" . 낮부터 어둑한 하늘이라 어깨가 아프셨던 선생님이 밖을 보다가 말씀하심 .

poptrash 2010-12-05 06:14   좋아요 0 | URL
난 뭐를 적었더라? 기억 안나. 어쩐지 나도 정지용의 향수를, 이동원 박인수 버전으로 부르며 적었던 것 같기도.... 다시 듣고 싶다. 시는 세상에 아무 쓸모가 없고 나도 그런데, 그렇다면 나도 소중하겠죠.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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