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부코스키에 대해 말할 때면 나도 모르게 장광설을 늘어놓게 된다. “예전에 말이야, 찰스 부코스키라는 분이 계셨어. 부코스키. 술과 여자를 양팔에 끼고 미국 전역을 떠돌며 온갖 일자리를 전전하신 분이지. 그 양반 스타일이 이래. 너 고용주야? 나 부코스키야…” 같은 대사를 떠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마 술 때문이겠지. 나는 취했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아니라면 그런 헛소리를 들어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말이야 아무래도 좋다. 잔과 잔 사이를 채우는 의미없는 충전재일 뿐이다. 우리는 양껏 마시고, 마시고, 마신 후… 조금 더 마신다. 언젠가 부코스키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부코스키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한 편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절판된 부코스키의 책을 찾아 헌책방을 헤매던 어느 날의 소회를 담은 글이다. 소회, 라고 하니 어쩐지 제법 노회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아무려나, 나는 이렇게 썼다.


“정작 출간 당시에는 독자들에게 외면당해 생명을 잃은 책이, 희소성으로 인해 뒤늦게 전설의 성배 취급을 받는 일이 이 동네에서는 왕왕 일어나곤 한다. 그 중 하나가 찰스 부코스키의 책이다. 이십 대 초반에 단편 소설을 발표하지만 출판계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싸구려 일자리와 허름한 하숙집을 전전하던 남자. ‘죽을 때까지 매달 100달러의 월급’을 보장하겠다는 출판사의 제안에 마흔 아홉의 나이에야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남자.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작품은 단 세 권뿐이다. <시인의 여자들>,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팩토텀>. 그나마도 앞의 두 권은 이미 절판되어 게으른 독자들을 애태우고 있다…(중략)”


그게 벌써 3년 전 일이니 그사이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먼저, 부코스키의 소설 두 권이 출간되었다. 데뷔작인 <우체국>과 <시인의 여자들>을 새롭게 번역한 <여자들>이다. 덕분에 우리는 술과 여자와 경마와 잡일로 인생을 탕진하던 청년(<팩토텀>)에서, 실수로 들어간 우체국에서 십수 년간 일하며 술과 여자와 경마로 시름을 달래던 중년(<우체국>)을 거쳐, 술꾼들과 되바라진 청년들의 시인이 되어 술과 여자와 경마로 인생을 즐기는 노년(<여자들>)에 이르는 부코스키의 일대기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한 친구가 내게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를 선물해준 일이 있었다.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마땅히 보답할 게 없어 그냥 감사하는 마음만 주었다. 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신세를 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그럴 때를 대비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언제나 넉넉히 준비해두는 편이다. 만약 당신이 부코스키에 대한 원고가 들어 있는 졸저 <서서비행>을 구입한다면 페이지마다 묻어 있는 나의 감사하는 마음을 절절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해야 할 일은 또 있다. 지난해 출간된 도서 중 아깝게 묻힌 50권을 선정해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서평을 쓰는 기획의 한 꼭지를 맡게 된 것이다. 물론 나는 어느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다. 나는 그냥 부코스키의 <우체국>에 대해서 쓰기로 했고, 그렇게 했다. 생활 음주인으로서의 꾸준한 노력에 이제야 보답이 돌아온 셈이라고 해야 할까. (참고로 해당 원고는 <아까운 책 2013>에서 확인할 수 있다. 책이 팔려도 추가 인세는 없으므로 감사하는 마음은 느끼기 힘들 거라는 사실을 미리 밝혀둔다.)


하지만 여기까지라면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래서야 그저 자기 책을 광고하는 얼간이가 아닌가? (물론 나는 얼간이가 맞다.) 따라서 마지막 사연은 이렇다. 얼마 전, 나는 우연히 내가 모르던 부코스키 번역본이 한 권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1993년에 출간된 <미친 시인의 사랑>이라는 제목의 소설집이었다. 나는 그 즉시 헌책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뒤지고 뒤지고 뒤졌다. 그리고 결국 2천원이라는 가격표를 달고 있는 그 책을 찾아냈다!


은전 한 닢이 그렇게도 갖고 싶었다던 상해의 늙은 거지처럼 책을 품에 꼭 안고 집에 돌아온 나는, 다른 모든 일들을 미룬 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비록 낡고 상한 헌책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까 넘겼던 페이지가 다시 나오는 게 아닌가. 178페이지 다음에 163페이지가 나오더니 다시 178페이지까지 차례대로 이어진 후 곧바로 195페이지로 넘어가고 있었다. 한 마디로, 여덟 장이 없는 파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나. 허탈해진 나는 씁쓸히 웃으며 술을 따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부코스키와 그의 인생을, 그의 술과 여자와 경마와 직업과 무엇보다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결국 그가 남긴 마지막 말에 생각이 닿았다. 그의 묘비명이기도 한 그 말은, 지금까지 내가 부코스키에 대해 쓴 모든 글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했다. 그건 이런 말이었다.


“애쓰지 마라(Don’t try).”


행복한동행 201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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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까운 책 2013>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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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세상 모든 똥구멍.
    from 새빨간 활 2013-05-13 23:13 
    이 세상 모든 똥구멍 ! “ 이 작품은 허구이며 아무에게도 바치지 않는다. “ - 찰스부코스키, POST OFFICE 지상파 방송 3사 프로그램을 통틀어서 내가 가장 경멸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 생활의달인 > 이다. 일종의 < 육체 노동 만만세 !> 전파 방송이다. 자전거 짐칸에 탑처럼 상자를 쌓고 달리기, 뚝배기가 담긴 쟁반을7층 다보탑 높이로 쌓아 머리에 이고 배달하기 그리고 중국 음식을 최단 시간 안에 배달하는 배달의 기
 
 
곰곰생각하는발 2013-05-13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부코스키답습니다. 저 우체국 읽고나서 유레카를 외쳤어요. 바로 이거다 !!!!!!
정말 대단한 작가입니다... 흑흑....



어라 ?! 링크'를 건다는 게 먼댓글로 됬네요. 링크가 먼뎃글인가요 ? ㅎㅎㅎㅎㅎ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그냥 걸어두렵니다.... ㅎㅎ. 이 우체국이란 소설 대박났으면 좋겠습니다.


poptrash 2013-05-14 00:58   좋아요 0 | URL
그쵸 저도 처음 팩토텀을 읽고 같은 생각을 했어요.
정말 대단한 작가입니다... 흑흑... -> 눈물까지 포함해 바로 요 반응.

빨리 대박, 중박 아니 소박이라도 나서 부코스키 다른 소설도 번역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위먹은영구 2013-07-03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업데이트 원합니다! 방에 에어콘 세게 틀어놓고 하나 쓰시죠!

poptrash 2013-07-05 04:20   좋아요 0 | URL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서재를 찾아주셔서 영광... 안 그래도 어제 술 취해서 자다가 기분 좋게 일어나니 밤새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더라고. 그래서 당분간 에어컨은 틀지 않는 것으로... 근데 정말 이미 쓴 원고들 옮기는 것도 귀찮은 여름이네. 비와서 야구도 안 하고 흑흑

파파 2013-12-11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코우스키를 아는 분과는 어째 금방 친구가 될 수 있겠단 생각을 예전부터 하고 있었죠. 글 잘 읽고 갑니다.

poptrash 2013-12-11 22:22   좋아요 0 | URL
부코우스키를 아는 분과 만나면 일단 술 한 잔 해야겠죠 ㅎㅎ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