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거인국에 남겨진 걸리버의 수난이 그려진다. 거대한 젖가슴에 관한 이야기와 걸리버가 떠나온 대한민…, 아니, 유럽에 대한 거인왕의 비판이 쏟아진다. 



1702년 6월 20일, 걸리버는 새로운 항해에 나선다. 소인국에서 돌아온 지 고작 두 달 만의 일이다. 중학교에 다니는 전도유망한 아들과 아직 어린 딸,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를 두고 떠나는 그의 나이는 마흔. 그러니 서둘러 집을 나서는 이유 같은 건 묻지 않기로 하자.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좀처럼 퇴근할 생각을 하지 않는 부장님에게 이유를 묻는 게 실례인 것과 마찬가지다.


“운명의 여신에게서 험하고 불안정한 생활을 점지 받은” 걸리버의 항해는 이번에도 순탄치 않았다. 처음엔 배에 물이 새더니 수리를 위해 정박한 곳에서 선장이 학질에 걸리고, 이제 겨우 항해를 재개하나 싶던 차에 폭풍에 휘말린 것이다. 항로에서 2400킬로미터나 벗어난 곳으로 떠밀려 간 어드벤처 호. 낯선 바다를 헤매던 그들은 커다란 섬을 발견하고, 물을 찾기 위해 열 명의 무장 선원을 보낸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함께 가기를 자청한 걸리버는 과연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낸다. 자신보다 12배나 큰 거인들을 발견한 것이다. 


다른 선원들이 물을 찾는 동안 멀리 떨어진 해안가를 서성이던 걸리버는 거인들의 섬에 홀로 남겨진다. 과부가 될 아내와 아버지를 여의게 될 아이들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긴 걸리버. 떠나기 전에도 그런 생각을 했으면 오죽 좋았겠냐만, 절절한 가족애는 언제나 절체절명의 순간에만 솟아오르는 법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진정으로 걸리버를 사로잡은 생각은 따로 있었으니 다름 아닌 소인들의 나라, 릴리퍼트의 추억이다. 


작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존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나는 블레훼스크의 함대를 한 손으로 끌고 올 수 있었다. 몇 백만 명이 그들의 후손에게 증언한다고 한들 좀처럼 믿을 수 없을 만한 기적들을 나는 이룩했던 것이다. 릴리퍼트의 후손들은 이 이야기를 아마도 믿지 않을 것이다. 릴리퍼트의 작은 사람 하나가 영국에 온 것처럼, 이 나라에서 나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보일지에 대해 생각하니 무척이나 억울했다. (<걸리버 여행기>(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펴냄) 106쪽)


이제 우리는 걸리버가 그토록 항해를 서두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작은 사람들의 나라에서 제법 거물 행세를 하던 걸리버다. 비록 눈칫밥을 먹긴 했지만 누구보다 커다란 ‘남성’으로서의 우월감 속에서 삼십 대의 마지막 몇 년을 보냈다. 그러니 평범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결국 사이즈가 문제였던 것이다. 


비탄에 잠겨있는, 한때 거대했으나 다시 평범해졌고 어느새 쪼그라든 남성을 발견한 것은 시골의 한 농부다. 작지만 위험한 동물을 발견했을 때처럼 잠시 망설이던 농부는 엄지와 검지로 걸리버의 허리를 잡고는 관찰하기 시작한다. 압도적인 존재와 마주한 불혹의 걸리버는, 비슷한 경우에 많은 중년의 남성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심약한 성정이 다시금 그의 목숨을 구한다.


큰 사람이 나의 옆구리를 세차게 잡고 있었으나 그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떨어지게 될까 봐 무척 두려웠다. 그래서 2미터 정도의 공중에서 탈출을 위한 몸부림은 전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내가 했던 행동이라고는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자세로 두 손을 모은 채, 지금 처한 상황에 어울리도록 겸손하고 서글픈 어조로 몇 마디 말을 하는 것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큰 사람은 나의 목소리와 행동에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특히 내가 사람처럼 분명한 발음으로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매우 놀라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108쪽)


걸리버를 집으로 데려가는 농부. 처음에는 영국 여자가 두꺼비나 거미를 보고 놀라듯 소스라쳤던 농부의 아내도 점차 그를 귀여워한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작고 약한 것을 예뻐하는 여성적인 취향 탓으로 돌린다면 걸리버의 노고를 무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식사에 앞서 정중한 영어로 “부인의 건강을 위하여!”라고 외치거나,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모자를 예절 바르게 머리 위로 흔들며 만세 삼창을 하는 등 걸리버 또한 자신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으니, 그는 진정 사랑받는 법을 아는 남자였던 셈이다.


그렇게 거인국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장난꾸러기 막내아들과 암소보다 세 배는 큰 고양이, 코끼리를 네 마리나 합쳐 놓은 것만큼 큰 개가 함께하는 아슬아슬한 생활이었지만 걸리버는 조금씩 적응해간다. 자진해서 농부를 주인이라고 부르는 그의 모습에서는(“나는 이제부터 농부를 주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참으로 충직한 영국인의 표본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어려움이 없을 리 없다. 그중에서도 그를 가장 괴롭히는 건 유모의 젖가슴이다.


솔직히 나는 이제까지 유모의 거대한 젖가슴보다 더 구역질나는 물체를 본 적이 없었다. 궁금한 독자들에게 젖가슴의 크기와 모양 그리고 색깔에 대해 무엇인가 알려 주어야 할 텐데, 나는 그 젖가슴과 비교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가슴에서 180센티미터 정도 솟아오른 것이었다. 젖가슴의 둘레는 5미터나 됐다. 젖꼭지는 내 머리 크기의 절반 정도 되었고, 양쪽 젖가슴의 빛깔이며 그 주변에 나 있는 여러 개의 점과 여드름, 주근깨들이 무척 지저분하여 그보다 더 구역질 날 수 없을 지경이었다. (113쪽)


순식간에 단란한 시골 가정의 애완동물로 전락한 걸리버.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이 있을까? 물론 있다. 릴리퍼트에서 표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여전히 살아있고, 살아있는 한 생리적인 욕구를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대변이 몹시 급해서 어쩔 줄 몰랐다. 아무리 급해도 이것만은 누가 대신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농부의 아내에게 마루에 내려놓아 달라는 뜻을 전하려고 애를 썼다. 그녀는 나를 마루에 내려놓았다.


나는 부끄러워 도저히 입으로 얘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문을 가리키며 몇 번이고 허리를 굽히는 시늉을 했다. 친절한 농부의 아내는 노력한 끝에 드디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 손으로 다시 나를 잡은 그녀는 정원으로 가서 놓아주었다. 나는 200미터 정도를 걸어서 구석으로 갔다. 농부의 아내에게 나를 보거나 따라오지 말라고 손짓을 하고는 괭이밥 잎사귀 사이로 몸을 숨기고 일을 보았다. (116쪽)


하지만 걸리버가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얼마나 고상한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은 걸리버에게 영광 있으리. 그리고 그것을 잊지 않고 언급하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분변학적 취향에도 마땅한 영광이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어리석고 천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것이 아주 사소한 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매사를 깊이 사고하려는 현명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야말로 자신의 사고와 상상력을 깊고 풍부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개인이나 사회인으로 생활하는 데 있어서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믿는다”는 말은 한번쯤 숙고할 가치가 있다. 당신이 소설가를 꿈꾼다면(물론 아니기를 바란다) 더더욱. 제 아무리 고뇌에 가득 찬 중산층 남성이라 한들, 사람은 똥을 싸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법이다.


얼마 후,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작은 동물이 있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퍼진다. 걸리버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오는 이웃들. 이에 주인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장에 걸리버를 데려가 관람료를 받고 쇼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걸리버는 장을 돌아다니며 몰려든 구경꾼들에게 연설하고, 골무에 술을 담아 “모두의 건강을 위하여”라고 소리치며 건배를 청하고, 기사를 흉내 내 칼을 휘두르는 한편 밀짚을 상대로 창술을 펼치는 식의 공연을 하루에도 열두 번씩 되풀이하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쇼비즈니스의 시초라 하겠다.


무리한 일정 탓에 걸리버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뼈만 남을 정도로 앙상하게 야위었지만, 주인은 우리의 작은 스타가 죽기 전에 한몫 챙기겠다는 일념으로 그를 더욱 혹사시킬 뿐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했던가? 연예 기획사의 운영 방침은 300년 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어느덧 소문은 왕궁까지 퍼져 걸리버는 왕비 앞에서 특별 공연을 펼친다. 왕비는 걸리버가 마음에 들었고, 곁에 두기를 원했다. 어차피 얼마 안 가 걸리버가 죽을 거라고 확신한 농부는 기꺼이 그를 바친다. 물론 두둑한 사례를 챙기는 것은 잊지 않는다.


그리하여 왕궁에서의 생활이 펼쳐진다. 릴리퍼트에 이어 다시금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 걸리버. 그는 특유의 매력을 뽐내며(“조그마한 것이 오밀조밀하게 먹는 모습만 봐도 재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내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너그럽고 지적인 왕은 낯선 나라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작은 ‘생물’과 이야기하기를 즐겼고, 걸리버는 그에게 유럽의 관습, 종교, 법률, 정치, 학문 등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러나 내가 무역과 육지나 바다에서의 전쟁, 종교 분열, 그리고 정당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을 때 왕은 지금까지 받았던 교육에 의한 편견으로 좀처럼 나를 신용하려 들지 않았다. 왕은 오른손으로 나를 잡고 왼손으로 등을 두드리며 한바탕 크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그대는 휘그당인가 토리당인가’(* ‘그대는 새누리당인가 민주당인가’하고 묻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하고 농담조로 물었다. 왕은 로열 서브린 호의 돛만큼 커다란, 하얀색의 왕 홀을 가지고 뒤에 기립해 있는 대신을 향해 몸을 돌리고 ‘인간의 위대함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와 같이 작은 벌레도 그것을 흉내낼 수 있다니 말이다. (132쪽)


사랑하는 조국이 모욕을 당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지만 별 수 없다. 그것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일들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를 분노하게 하는 건 왕궁의 난쟁이다. 키가 고작 9미터도 되지 않았던 그 작은 인간은 왕비의 총애를 빼앗긴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걸리버를 괴롭혔던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것들을 일일이 늘어놓아 선량한 독자들을 괴롭힐 생각은 없다. 하지만 몇 가지 사례는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이를테면 


시녀들은 가끔씩 나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발가벗기고는 가슴에 꼭 껴안아 주기도 했는데, 나는 그것이 아주 싫었다. 그녀들의 피부에서 아주 역겨운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148쪽)


라거나, 


시녀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쾌활하며 장난을 좋아하는, 열여섯 살짜리 시녀는 때때로 나를 가슴 위에 올려놓고 자신의 젖꼭지를 타고 앉게 했다. 온갖 짓궂은 장난을 당했지만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149쪽)


같은 부분이다. 인용하는 사람에게도 즐거울 권리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쉽게도 걸리버는 언급을 자제하고 있지만,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는 독자가 있다면 박민규의 단편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단편집 <더블>(창비 펴냄)에 수록)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자동차를 팔기 위해 급기야 화성(Mars)까지 간 세일즈맨이 거대한 외계 ‘복부인’을 만나는 이야기다. 차를 본 그녀가 “저거… 꼭 좆같이 생겼네”라고 콩떡같이 말하자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차를 한 대라도 더 팔아야만 하는 주인공이 찰떡같이 알아듣고 “갑니다 누님!”이라고 외친 후, 그대로 차를 몰아 “전진 후진… 전진 후진… 좌삼삼 우삼삼…” 한다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21세기 버전의 <걸리버 여행기>라 하겠다.


(이쯤에서 나는 쓰기를, 당신은 읽기를 잠시 멈추는 것도 좋겠다. 어쩐지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충분히 상상하셨는지? 그럼 다시 걸리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지만, 사실 2부의 핵심은 걸리버와 왕의 대화다. 비록 똑똑한 벌레 취급을 당하긴 하지만, 걸리버는 인류를 대표해 왕에게 유럽의 문화를 이해시키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느 날, 용기를 내 “이성은 몸이 크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로 유럽에서는 키가 큰 사람들이 거의 이성이 부족하다”고 허두를 꺼낸 걸리버는, 161쪽부터 166쪽까지 무려 5페이지에 걸쳐 유럽의 사회제도와 역사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물론 나는 자세한 내용을 시시콜콜 늘어놓을 생각이 없는데, 궁금한 독자는 정치/사회 분야의 뉴스를 검색할 일이다.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동행한 어느 수행원의 기발한 돌출행동에 관한 뉴스 같은 것이 보인다면 제대로 찾은 것이다.


한편 걸리버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린 왕은 사려 깊은 미소를 짓고는 걸리버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한다.


나의 조그마한 친구 그릴드릭(* 난쟁이라는 뜻), 그대는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아주 놀랄 만한 찬사를 했습니다. 그대는 의원의 자격을 갖추는 데 있어 무지와 태만, 부도덕이 적절한 요소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대의 나라에서는 온통 법을 악용하고 왜곡하며 회피하는 일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자들이 있으며, 이들에 의해 법이 가장 잘 설명되거나 해석되고 있으며 적용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잘 알려 주었습니다.


만들었을 당시에는 아주 좋았을 제도들이 그대의 나라에서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하다가 이제는 부패되어 완전히 희미해지거나 제멋대로 변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대의 말을 들으면서 알게 된 것인데, 어떤 지위에 오르는 데 가장 합당한 이가 그 지위를 갖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덕망으로 귀족이 되거나, 사제들이 학식으로 승진하는 것 같지도 않으며, 용기 있는 행동으로 군인이 된다거나, 정직하기 때문에 재판관이 영달을 하고, 국가를 사랑한다고 국회의원에 선출되거나, 지혜가 있다고 해서 국왕의 고문들이 총애를 받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삶의 많은 부분을 여행하는 일에 바친 그대는, 그대의 조국이 저지른 많은 악덕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고 나는 믿고 싶습니다.


그대의 이야기와 내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종합해 보았을 때, 그대의 민족 대부분이 세상의 표면에 기어 다니게 된 생물 중 가장 유해하고 밉살스러우며, 작은 벌레들의 모임인 것으로 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166~167쪽)


그런 왕의 인내심도 때론 바닥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걸리버가 화약과 포탄에 대한 말을 꺼냈을 때. 왕의 환심을 사려는 소박한 마음에 적절한 재료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성벽을 무너뜨리고 불순분자들을 제압할 수 있는 대포를 만들어 바치겠다는 걸리버에게 왕은 노여움을 감추지 않고 말한다. 그처럼 무기력하고 천한 벌레가 어쩌면 그렇게 잔인한 생각을 할 수 있냐며, 또한 파괴적인 기계가 만들어 내는 피와 살육의 장면을 어떻게 그리 태연하게 이야기할 수 있냐며, 목숨이 아깝다면 다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다. 걸리버는 그런 왕의 반응이 이상하기만 하다.


편협한 원칙과 근시안적인 안목의 이상한 결과였다. 존경과 사랑과 숭배를 받을 수 있는 재능과 원대한 지혜와 깊은 학문을 갖춘 데다 훌륭한 통치력으로 국민에게 찬양받고 있는 국왕이, 이처럼 가엾고 불필요한 망설임 때문에(이러한 경우는 유럽에서 거의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국민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에 대한 절대적인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손안에 들어왔는데도 거절을 한 것이다. (170쪽)


하지만 왕을 설득할 수 있는 시간이 걸리버에게는 없었다. 어느 날, 걸리버의 집(이라기보다는 상자)을 독수리가 물고 날아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독수리는 거북이의 껍질을 깰 때 하는 것처럼 상자를 바위에 떨어뜨려 걸리버의 몸을 삼키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운명은 걸리버를 위해 더 많은 고난을 남겨두었으니,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다른 독수리들이 먹이를 빼앗으려 덤벼드는 바람에 상자는 바다에 떨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걸리버는 그곳을 지나던 배에 의해 구조된다.


마침내 자신과 같은 인간들을 만나게 된 걸리버. 그런 그가 처음 느낀 감정은 다름 아닌 놀람이었다. 이렇게 작은 사람들이 있다니, 그것도 이렇게 많이. 어느새 큰 사람들의 나라에 익숙해진 걸리버의 눈에 그들은 이제까지 보았던 것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고 형편없는 생물로 보일 뿐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마주치는 집과 나무, 가축 그리고 사람들이 너무 작아 릴리퍼트로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모든 것들이 브롭딩낵 국왕의 말처럼 나약하고 무기력한 주제에 밉살스러운 벌레처럼 여겨졌다. 동족 혐오. 큰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걸리버의 내부에서는 무엇인가가 영영 변해버렸고, 다시는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걸리버는 또 다시 바다를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프레시안 북스 2013. 5. 10.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510155756&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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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5-14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진짜 재미있겠는데요. 읽어봐야겠습니다.
아, 이거 딱 내 스타일이에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