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다시 한 번, 라블레의 실패한 농담 그리고 팡타그뤼엘의 거대한 입에 관하여



격주로 연재되는 이 코너도 어느덧 4장에 접어들었으니 꼬박 두 달 동안이나 라블레의 거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셈이다. 지겹다고? 나도 그렇다. 당신은 그저 한숨을 쉬며 창을 끄면 그만이겠지만, 나는 라블레에 대한 또 한 편의 글을 써야만 하는 입장이다.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 어쨌거나, 아직도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대고 있을 당신을 위한 마지막 요점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마침 적당한 구절이 있다.


모든 것이 미치광이 같은 소극이지만 라블레는 끊임없이 변하는 생각의 흐름, 문체와 지식의 모든 범주를 의도적으로 뒤죽박죽으로 혼성하는 기발한 생각으로 그것을 채우고 있다. (에리히 아우어바흐 <미메시스>(김우창.유종호 옮김, 민음사 펴냄) 373쪽)


말인즉슨,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이야기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당신 잘못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나의 잘못도 아니다. 전적으로 라블레의 잘못이다. 3장에서 우리는 “라블레는 재치있는 트윗으로 사회를 조롱하고 풍자하며 수많은 팔로워들을 거느리던 르네상스 시대의 파워 트위터리언에 불과한 걸까?”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지만, 만약 그가 오늘날의 글쟁이였다면 링크에 덧붙인 “쯧쯧쯧, 이런 게 글쟁이라고”,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바보가 여기 있네요” 같은 조롱과 함께 타임라인을 떠돌고 있을 게 분명하다. 놀랍지만 딱히 쓸모는 없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우리의 문해력은 나날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 세상의 평범한 이치다.


라블레는 바로 그 ‘뒤죽박죽’인 이야기를 통해 중세적 가치관을 폐기하려 한다. 


게다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라블레의 목적은 중세적 사고방식과 전면으로 상충된다. 이것은 개개 요소에조차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중세 후기의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지리적으로, 우주론적으로, 종교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일정한 뼈대 안에 한정되어 있다. 이들은 한 번에 사물의 한 국면만을 제시한다. 다양한 사물과 국면을 취급해야 할 때는 일반적인 질서라는 일정한 뼈대 속에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시도한다. (375쪽)


아우어바흐가 묘사하는 중세의 상황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일정한 뼈대 속에 사물의 다양한 국면을 욱여넣어 제시하는 것 — 이것은 이데올로기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수꼴’과 ‘좌좀’과 ‘깨시민’과 ‘진신류’ 들이 오늘도 하고 있는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을 ‘수꼴’과 ‘좌좀’과 ‘깨시민’과 ‘진신류’로 지칭하며 행해지는 일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러니 구태여 움베르토 에코의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라는 책 제목을 들먹일 이유도, 실은 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았다는 고백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신 얼마 전 소소한 화제가 되었던 한 칼럼을 떠올려보자. 정희진은 경향신문 칼럼(2013. 2. 15.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을 통해 “쉬운 글을 선호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쉬운 글은 내용이 쉬워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여서 쉬운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비슷한 이야기다. 물론 누군가는 그녀의 칼럼에 대해 “당신 글이야말로 이데올로기여서 불편하다”라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모든 칼은 그것을 휘두른 사람을 향해서도 겨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블레의 전략은 다르다.


그러나 라블레의 전체적인 노력은 사물이나 사물의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국면과의 희롱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완전한 혼란상을 띠고 있는 현상을 독자에게 보여 줌으로써 현상을 바라보는 일정한 습관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리하여 비록 위험을 무릅써야 하기는 하지만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세계의 큰 바다로 독자를 꼬여내는 데 힘쓴다. (<미메시스> 375쪽)


라블레는 내용이 아닌 형식, 차라리 ‘쓰기’ 자체를 통해 세계와 대립한다. 아우어바흐의 설명은 앞장에서 살펴본 바흐친의 주장을 조금 ‘쉽게’ 풀어쓴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 바흐친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어렵게 쓴 함량미달의 글쟁이인가? 혹은, 아우어바흐야말로 복잡할 수밖에 없는 내용을 일정한 뼈대에 억지로 욱여넣어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바꾼 위험한 글쟁이인가? 글쎄, 나는 별로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해야겠다. 혹시라도 궁금한 독자가 있다면 직접 알아보세요.


다만 분명한 것은 <미메시스>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아우어바흐가 모든 작품을 재현과 모방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팡타그뤼엘의 거대한 입과 그 속에 재현된 세상의 모습에 주목한다. 이런 이야기다.


팡타그뤼엘의 군대가 길을 가던 중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팡타그뤼엘은 혀를 내밀어 군대가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가려준다. 이때, 화자가 혀 위를 기어올라 입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산과 같은 거대한 바위(치아)들과, “큰 들판과 큰 숲들, 그리고 리옹이나 푸아티에보다 작지 않은 큰 도시들을” 본다. 깜짝 놀란 그가 양배추를 심고 있던 노인에게 묻는다.


“친구, 자네는 무엇을 하고 있나?”

— 양배추를 (그가 말했다) 심고 있습지요.

— 그런데 왜, 그리고 어떻게? 내가 말했다.

— 아, 나리, (그가 말했다) 누구나 절구처럼 무거운 불알을 가질 수 없듯이 모두 부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소인은 이렇게 이것들을 이곳 뒤에 있는 도시의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요.

— 예수님, 이럴 수가! (내가 말했다) 여기에 신세계가 있단 말인가?

— 이곳은 (그가 말했다) 전혀 새로운 곳이 아니랍니다. 그런데 사람들 말로 이곳 밖에 새로운 땅이 있는데 그곳에는 해와 달이 있고 멋진 일들이 잔뜩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곳이 더 오래되었지요.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472~473쪽)


“이곳은 전혀 새로운 곳이 아니랍니다”라는 영감의 말. 그것이 바로 아우어바흐가 하고 싶은 말이다. 참고로 “누구나 절구처럼 무거운 불알을 가질 수 없듯이 모두 부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라는 영감의 말. 그것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다.


이 고르지아(*입속 세상의 이름)의 세계에 관한 가장 놀랍고도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은 그것이 우리 세계와 전혀 다르지도 않고 도리어 자질구레한 세목에 있어서도 닮아 있다는 점이다. 그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음에도 우리 쪽 세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세계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다른 점에서는 무척 똑같다. 그리하여 라블레는 역할을 교환하는 기회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다시 말해서 배추 심는 농부를 외부 세계의 이방인을 유럽인다운 순박함으로 맞아들이는 토박이 유럽인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또 라블레는 일상생활의 사실적 장면을 전개하는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다. (…) 거대한 규모와 대담한 발견 여행이라는 뼈대 전체는 그저 우리에게 배추 심기에 종사하고 있는 투렌의 농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작동된 것처럼 보인다. (<미메시스> 369~370쪽)


이 자리에서 아우어바흐의 관점에 대해 길게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다. 공연히 서투른 이야기를 꺼내 선생님들을 화나게 하고 싶은 생각도 없거니와 21세기 한국에서는 별로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도록 하자. 아우어바흐의 지적처럼 입속 세계라는 환상적인 공간이 우리 세계와 다를 바 없는 곳이라는 사실은 분명 우리를 웃게 한다. 최소한 아우어바흐는 크게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우스꽝스러운 부분은 아니다. 이 에피소드의 핵심은 마지막, 다시 세상으로 나온 화자와 팡타그뤼엘의 대화에 있다.


그는 나를 보자 내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알코프리바스?”

내가 대답했다.

“전하의 목구멍에서입니다.

— 그러면 언제부터 거기 있었나? 그가 말했다.

— 전하께서 (내가 말했다) 알미로드인들을 향해 진군하셨을 때부터입니다.

— 지금으로부터 (그가 말했다) 여섯 달도 더 전이로군. 그러면 자네는 무엇을 먹고살았나? 무엇을 마셨는가?

내가 대답했다.

“전하, 전하와 같은 것이지요. 전하의 목구멍을 넘어오는 것 중에서 가장 맛있는 조각을 통행세로 징수했지요.

— 그랬군, 그런데 (그가 말했다) 자네는 어디에 똥을 쌌는가?

— 전하의 목구멍 속이랍니다. 내가 말했다.

— 하, 하, 자네는 재미있는 친구로군. (그가 말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딥소디인들의 나라를 모두 정복했다네. 자네에게 살미공댕의 영지를 하사하지.

— 대단히 감사합니다. (내가 말했다) 전하께서 제 공로보다 훨씬 큰 상을 내려주시다니.”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475~476쪽)


이 얼마나 감동적인 대화인가! 전쟁 기간 동안 말도 없이 사라진 부하다. 하지만 문책은커녕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묻고 있다. 나아가 똥은 어디에 쌌냐고 묻는 군주와 “전하의 목구멍 속이랍니다”라고 해맑게 답하는 신하의 모습에는 절로 눈물이 흐를 지경이다. 이것이야말로 싸는 동시에 먹는 것의 완벽한 구현이 아닌가? 심지어 팡타그뤼엘은 영지를 하사하는데, 그것은 바로 알코프리바스가 입속 세계에서 신선놀음 하는 동안 끝나버린 전쟁을 통해 정복한 땅이다.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작품의 클라이막스가 되었어야 마땅할 전쟁이 화자의 입속 여행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가르강튀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다소 지루한 전쟁 묘사와 대조를 이룬다. 목동과 빵과자 장수 들의 사소한 다툼이 전쟁으로 번지는 과정을 통해 라블레는 조금 더 직접적인 풍자를 노린다. 적국의 왕과 가신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림으로써 당대의 지배 계급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직접적인 풍자는 우습지 않다. 어쩌면 번역으로는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언어유희 때문일 수도, 단순한 분량 때문일 수도, 라블레와 우리 사이의 시차 탓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말해야겠다. 가르강튀아의 전쟁 이야기는 라블레의 실패한 농담이라고.


그렇다면 라블레는 왜? <팡타그뤼엘>에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근사한 방식으로 전쟁 장면을 생략한 그다. <가르강튀아>에서 또한 전쟁 장면 따위는 건너뛸 수 있었을 거란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나는 그것이 라블레의 신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작품을 통해 라블레는 자신이 그리는 세계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차원이 아닌) 구세계의 파괴가 필요했던 것이다. 파괴, 그것은 물론 전쟁이다. 그렇다면 그가 꿈꾸던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전쟁이 끝난 후, 부하들에게 상을 내리던 가르강튀아는 용맹한 수도사 장을 쇠이예의 수도원장으로 임명하려 한다. 하지만 장은 그 제안을 거절하는 대신 새로운 수도원을 세워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텔렘(* 주석에 따르면 “그리스어로 의지라는 뜻이다. 텔렘 수도원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최대한 보장하는 자발적인 수도의 장(場)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지방 전체에 “다른 교단들과는 정반대의 교단”이 세워지게 된다. 라블레는 특유의 장광설로 몇 장에 걸쳐 텔렘 수도원의 모습을 그리는데, 그중에서도 텔렘 수도사들의 생활방식에는 라블레의 위마니슴이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다.


그들의 모든 생활은 법이나 규정, 규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의사와 자유의지에 따라 관리되었다. 그들은 원할 때 침대에서 일어나,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길 때 먹고 마시고 일하고 잠을 잤다. 아무도 그들을 깨우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에게 먹거나 마시고, 무슨 일이거나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가르강튀아가 정해놓았던 것이다. 그들의 규칙이라고는 ‘원하는 바를 행하라’는 조항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는 자유로운 인간들에게는 천성적으로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하고 악을 멀리하도록 하는 본능이 있고 그들이 명예라고 부르는 자극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수치스러운 굴종과 강제에 의하여 억압받고 예속될 때, 그들에게 자유롭게 미덕을 추구하며 예속의 굴레를 떨쳐버리고 거역하게 하던 고상한 성향은 왜곡된다. 우리는 언제나 금지된 일을 시도하고 우리에게 거부된 것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254쪽)


무척 아름다운 이야기다. 하지만 지루하다. 라블레는 이어 수도원의 기초에서 발견되었다는 커다란 청동판에 씌어진 수수께끼를 옮기고 있는데, 그것은 신세계에 대한 노골적인 찬가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인가? 아마도. 유토피아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현실의 질서를 은폐하는 것일 테니까. ‘어디에도 없다(nowhere)’라는 그 단어의 뜻은 이제 너무 식상해서 싸이월드에나 가야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우리는 뒷목을 부여잡고 “라블레, 너 마저…”라고 뇌까리며 그의 책을 집어던져야 하는 것일까? 


설마. 


청동판에 적힌 수수께끼를 소리 내 읽은 가르강튀아에게 수도사가 묻는다. 


“전하의 견해로는 이 수수께끼가 무엇을 가리키고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뭐라니? (가르강튀아가 말했다) 성스러운 진리의 진행과 영속성을 말한 것이라오.

— 성 고드랑을 두고 말이지만, (수도사가 말했다) 제 해석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언자 메를랭의 문체입니다. 원하시는 만큼 심오한 알레고리와 의미를 부여하시고, 전하와 모두들 좋으실 대로 추론하십시오. 저로서는 모호한 말로 정구 경기를 묘사한 것 외에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들이란 시합을 주선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은 보통 친구 사이랍니다. 두 번 서비스를 넣은 다음에는 경기장 안에 있던 사람은 밖으로 나가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게 되지요. 먼젓번 사람에게 공이 선 위로 지나갔는지 아래로 지나갔는지를 알리도록 합니다. 홍수는 땀을 말하고, 라켓의 줄은 양이나 염소의 창자로 만들지요. 둥근 물체는 실뭉치나 공을 가리키는 것이고요. 경기가 끝난 다음 사람들은 환한 불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속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다음에는 보통 주연을 벌이는데, 승리한 사람들이 더 신나게 마시지요. 그러고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거지요!” (261~262쪽)


그렇다. 그 수수께끼는 사실 정구 경기의 모습을 장중한 문체로 묘사한 당대의 유행하던 수수께끼 시로, 라블레는 첫 두 행과 마지막 열 행을 추가하여 원래의 시와 다른 의미로 해석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 모두와 가르강튀아를 속인 후, 수도사 장으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해 우리에게 말하도록 한다. “원하시는 만큼 심오한 알레고리와 의미를 부여하시고, 전하와 모두들 좋으실 대로 추론하십시오.”


물론 그것은 단순히 마지막 수수께끼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라블레는 자신의 작품이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 설령 그것이 자기 자신의 신념일지라도. 그리하여 라블레의 실패한 농담은 이제 거대한 농담의 일부가 된다. 라블레는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라블레의 위대함이다. 그리고 라블레에 대한 찬사는, 얼마나 거창한 찬사이건 간에, 실패할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고전에 대한 글을 쓰는 즐거움이다.


<가르강튀아> 발표 십이 년 후 세상에 나온  <제3서>의 내용은 거인왕의 일대기였던 전작들과는 달리 팡타그뤼엘의 친구 파뉘르주가 결혼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며 다양한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어지는 <제4서>는 앞선 문답에서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파뉘르주가 팡타그뤼엘을 비롯한 패거리와 함께 ‘신성한 술병’(!)의 신탁을 듣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일종의 여행기다. 라블레가 세상을 떠난 후 출간된 <제5서>는 위작 논란이 끊이지 않는 작품인데, 아마 그 탓인지 국내에는 번역조차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마지막 권에서 일행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고, 여사제를 통해 신탁의 내용을 전해 듣는다. 여사제는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마셔라! Trinch”


그것이야말로 팡타그뤼엘리슴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는 이쯤에서 수다를 멈추고 잔을 채우는 것이 좋겠다. 아우어바흐 또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라블레의 숨은 의미, 즉 뼈의 골수에 천착하여 분명하고도 윤곽이 뚜렷한 교의를 찾아내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작품 속에 숨겨져 있으나 수많은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은 스스로 팡타그뤼엘리슴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지적인 태도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것과 관능적인 것을 동시에 이해하며 어떠한 삶의 가능성도 소홀히 하지 않는 삶의 파악이다. 그것을 더욱 상세히 서술한다는 것은 현명한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자신도 모르게 즉각 경쟁하는 처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라블레 자신이 항시 그것을 서술하고 있으며 우리보다 더 잘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미메시스> 383쪽)


그러니 이 글은 잊고 서점으로 달려가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을 읽어라. “그리고 원하시는 만큼 심오한 알레고리와 의미를 부여하시고, 모두들 좋으실 대로 추론하십시오.” 그것이 내가 짧지 않은 글을 읽어준 당신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이다. 그럼 그냥 그렇게 말하지 왜 이리 긴 헛소리를 늘어놓았느냐고? 앗, 이런, 어느새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끝나버린 모양이다. 나는 라블레를 따라 이렇게 말해야겠다.


안녕히 계시라, 여러분. 나를 용서하라. 그리고 내가 당신들의 잘못에 개의치 않는 만큼 내 잘못도 염두에 두지 말기를 바란다.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482쪽)


‘미친 거리의 전도사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웨일스의 밴드는 언젠가 이렇게 노래했다. 


난 그저 당신이 우리를 용서해주길 바라

하지만 모든 것은 계속되어야만 하지 


만약 당신에게 설명이 필요하다면

그때 모든 것은 계속되어야만 해!

(Manic Street Preachers ‐ ‘Everything Must Go’)
















2013. 2. 22. 프레시안북스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222113725&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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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3회로 끝낼 예정이었던 라블레를 4회로 끝내고, 오늘 마감이었던 돈 끼호떼 첫회를 넘겼다. 잊지 않고 서재에도 꼬박꼬박 올려두려고 했는데, 게으른 탓에 자꾸만 때를 놓치고 만다. 


원고를 넘기고 오랜 만에 냉장고 청소를 했다. 청소라기보다는 벌써 몇 년이나 냉장고에서 묵어가던 더는 먹지 않는 김치류를 치웠을 뿐이다. 어떤 김치에는 곰팡이가 피었고, 어떤 김치에서는 와인 냄새가 났다. 타자를 치는 손에서는 김치 냄새가 난다. 얼른 씻고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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