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라블레의 실패한 농담 그리고 팡타그뤼엘의 거대한 입에 관하여



그렇다면 라블레는 재치 있는 트윗으로 사회를 조롱하고 풍자하며 수많은 팔로워들을 거느리던 르네상스 시대의 파워 트위터리언에 불과한 걸까? 바흐친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라블레의 전략에서 풍자의 한계를 보는 대신 원대한 예술적 기획을 본다. 


사제와 수도승, 왕과 영주, 기사나 부유한 시민, 학자와 법률가의 언어, 즉 권력을 쥐고 있고 풍족한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언어에 대항하여 유쾌한 악한의 언어가 제시된다. 그리하여 이 언어는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서든 어떠한 파토스라도 희화적으로 재생시키지만 이럴 경우 언제나 그 언어를 미소나 가식을 통해 ‘입으로부터 떼어냄으로써’ 그 언어를 중립화하고 그것의 거짓됨을 조롱하며 그럼으로써 거짓말을 유쾌한 속임수로 바꾸어놓는다. 허위는 반어적 의식에 의해 조명되며 유쾌한 악한의 입을 통해 스스로를 패러디한다. (<장편소설과 민중언어>(전승희.서경희.박유미 옮김, 창비 펴냄) 232쪽)


바흐친의 독법 속에서 더 이상 라블레는 권력자의 발밑에 ‘콩알탄’을 던지며 낄낄대는 무해한 악동이 아니다. 우스꽝스러운 언어적 모험, 차라리 기행을 통해 라블레가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언어의 허위성이다.


우리는 그가 구문의 구조에 대한 패러디적 파괴를 통해 인간 언어 자체의 기만적 성격을 조롱하고 그럼으로써 많은 단어들의 논리적이고 표현적인 측면(예컨대 단정이나 설명 따위를 나타내는 측면)을 부조리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언어로부터의 등돌림(이는 물론 언어를 수단으로 한 것이지만)이라든가 이데올로기적 담론에 흔히 나타나는 의도의 직접적 표출이나 과도한 표현(지나치게 ‘무게’를 잡는 진지성)에 대한 불신, 모든 언어가 관습적이고 허위에 물들어 있으며 악의적으로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가정, 이 모든 것들이 라블레의 작품 속에서 산문에서 가능한 가장 순수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122쪽)


이제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단순히 라블레의 문장에서 드러나는 일차적인 의미가 아니다. 문장 뒤에 도사리고 있는 숨은 의미 따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며 문장을 쌓아가는 행위, 다시 말해 라블레의 ‘쓰기’ 자체가 문제다. 


바흐친에 따르면 “사물과 관념은 그들의 본성에 어긋나는 그릇된 위계적 관계로 결합되기도 하”며, “이러한 그릇된 결합은 학문적인 사고, 거짓된 신학적‧법적 궤변 및 궁극적으로는 언어 자체에 의해 강화된다”고 한다. 언어야말로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친 과오로 가득 차있다는 것이다. 바흐친의 라블레는 이 잘못된 결합을 끊어내고, 사물들을 해방시킨 후, 그들 각각에게 걸맞은 새로운 결합을 찾고자 한다 — 다름 아닌 언어를 통해서. “따라서 라블레에게 있어서는 낡은 세계상을 파괴하는 작업과 새로운 세계상을 건설하는 긍정적 작업이 서로 불가분으로 얽혀 있는 것이다.” (364쪽)


그렇다면 라블레가 제시하는 새로운 결합이란 무엇인가? 바흐친은 그것을 일곱 개의 시리즈로 분류한다. 


1. 해부학적·생리학적 측면에서 본 인간 육체의 시리즈

2. 의복의 시리즈

3. 음식의 시리즈

4. 음주와 취태(醉態)의 시리즈

5. 성(性)의 시리즈

6. 죽음의 시리즈

7. 배설의 시리즈 


동작그만,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같은데? 가슴 사이즈와 ‘식스팩’에 대한 지치지 않는 탐구(해부학적‧생리학적 측면에서 본 인간 육체의 시리즈),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옷차림에 대한 비아냥(의복의 시리즈), 때를 가리지 않고 올라오는 다양한 음식 사진과 주린 배를 절로 움켜쥐게 만드는 야식 타령(음식의 시리즈), 다음 날이면 지워지곤 하는 깊은 밤의 욕설(음주와 취태의 시리즈), 각종 ‘섹드립’(성의 시리즈)과 ‘똥드립’(배설의 시리즈)과 죽고 싶다는 토로와 죽여 버리겠다는 엄포(죽음의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이거, 이거 다 트위터 ‘드립’ 아녀? 자 모두들 보쇼. 바흐친이라는 이름으로 대충 퉁치고 넘어가겠다, 이거 아녀?


그럴 리가. 나는 지금 약을 파는 게 아니라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바흐친의 말에는, 관념과 관념 사이로 우아한 도약을 감행하는 그의 이론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사실에 내 돈 모두하고 손모가지를 건다(당신이 탐낼만한 재산과 손모가지는 아닐 거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그것을 차근차근 설명할 생각이 없다. 능력이 없다고 말해도 좋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바흐친이 40여 쪽에 걸쳐 풀어내는 녹록치 않은 이야기를 내가 무슨 수로 요약한단 말인가?


물론 나도 마음이 아프다. 어쩌면 나는 문제의 부분이 있는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365쪽에서 408쪽까지를 찬찬히 곱씹은 후, 잘 요리된 정보에 목마른 선량한 독자들을 위해 그 일을 해내야 했는지도 모른다. 나아가 바흐친의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이덕형.최건형 옮김, 아카넷 펴냄)마저 독파한 후, 레포트를 써야하지만 두꺼운 책을 읽을 시간은 없는 대학생들을 위해 그럴 듯한 요점 정리를 해두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모두 나의 불찰이다.


하지만 친구여, 생각해 보라. 일개 서평가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세상에 박사님들이 왜 필요하며 두꺼운 이론서들이 왜 필요하겠는가? 물론 내게도 직업윤리라는 게 있어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를 찾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절판되어 정가 35000원짜리 책이 중고가 64500원에 팔리는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나마 남아 있던 그 책 또한 이틀 후에 팔려버렸는데? 내가 이 글을 쓰고 얼마를 받는지 당신은 아는가? 도서관에 가면 되지 않느냐고? 이 추운 겨울에?


대신 나는 블라지미르 쁘로쁘의 <희극성과 웃음>(정막래 옮김, 나남 펴냄)이라는 정가 25000원짜리 책을 1%의 할인도 받지 않고 구입했고, 친절한 색인(학술서에 색인을 넣지 않는 출판사에 저주가 있을지어다)의 도움을 받아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웃음 뒤에는 절대로 폭력이 있을 수 없고 웃음은 장작더미를 쌓아올리지 않으며 위선과 기만은 절대로 웃는 법이 없이 근엄한 가면을 쓰고 있고 웃음은 교리를 만들지 않고 권위적이지 않으며 웃음이 자각하는 것은 공포가 아닌 힘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근엄함을 믿지 않고 축제날의 웃음을 믿었다(바흐찐, 107). (245쪽) (*주술관계가 조금 이상하지만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그렇지만 내가 이미 가지고 있던 정가 10000원짜리 구판 <장편소설과 민중언어>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고, 일곱 개의 시리즈와 관련된 부분도 아니니 나는 25000원을 고스란히 날린 꼴이 되었다. 언젠가 절판되어 비싼 값에 되팔 수 있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54500원 정도를 챙길 수도 있겠지. 물가인상률을 반영한다면 조금 더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만 기약할 수 없는 미래의 54500원보다는 눈앞의 25000원이 훨씬 절실한 법. 나는 묻고 싶다. 이건 도대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그러니 공연히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그만두고 라블레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채 해결되지 않은 부분들은 바흐친과 박사님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의 길을 가도록 하자.


낡은 세계상을 파괴하는 동시에 새로운 세계상을 건설하는 것 — 그것이 바로 라블레가 하는 일이다. 이 말이 너무 추상적이라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싸는 동시에 먹는 것 — 그것이 바로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을 통해 라블레가 하고 있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싸면서 책을 읽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일일 것이다.


우리는 앞서 가르강튀아의 출생으로 이어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탈장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것을 싸는 것의 환유라고 하자. 그렇다면 먹는 것의 환유는? 이쯤에서 팡타그뤼엘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물론 <가르강튀아>에도 탈장의 원인이 되었던 엄청난 양의 소 창자 요리를 비롯, 하정우의 ‘먹방’에 견줄만한 인상적인 장면들이 가득하지만, 순전히 진행상의 편의를 위해서다. 벌써 밤이 깊었고, 우리에게 허락된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먼저 ‘족보’를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팡타그뤼엘>은 라블레의 첫 번째 소설이다. 하지만 <팡타그뤼엘 연서>의 첫 번째 책은 아니다. <거대한 거인 가르강튀아의 위대하고도 지고한 평전>(혹은 <거대한 거인 가르강튀아의 놀라운 대연대기>)이라는 작자 미상의 대중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라블레가 먼저 가르강튀아의 아들 팡타그뤼엘이 등장하는 후속편을 쓰고, 2년이 지난 후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가르강튀아의 이야기를 다시 쓴 것이다. 이어지는 3서와 4서, 그리고 사후에 발표된 (위작 논란에 시달리는) 5서는 모두 팡타그뤼엘의 이야기이고, 따라서 아버지 가르강튀아의 이야기가 연서의 첫 번째 책이 되었다.


팡타그뤼엘은 원래 “술에 취해 잠든 사람들의 입에 소금을 뿌리고 다닌다고 알려진 전설에 나오는 작은 악마의 이름”이라고 한다. 라블레는 이것을 살짝 비틀어 팡타그뤼엘을 사람들에게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소개한다. 바로 이렇게.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 바드벡의 해산 중에 산파들이 아이를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을 때, 그녀의 배에서 먼저 각자 소금을 잔뜩 실은 노새 고삐를 잡은 예순여덟 명의 노새 몰이꾼들이 나왔고, 그다음으로 햄과 훈제한 소혀를 실은 아홉 마리의 단봉낙타와 작은 뱀장어들을 실은 일곱 마리의 쌍봉낙타, 그리고 스물다섯 수레분의 파와 마늘, 양파, 골파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를 보고 앞에 말한 산파들은 두려워했지만, 그중 몇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식량이군요. 우리가 전에는 찔끔찔끔 마실 수밖에 없었지만 이젠 실컷 마실 수 있겠어요. 이것들은 포도주를 당기게 하는 것이니까 좋은 징조예요.”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286쪽)


<팡타그뤼엘>은 <가르강튀아>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탄생과 성장, 전투와 승리라는 상승의 플롯을 따라 굴러가지만, 훨씬 느슨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지 웃기기 위해 쓴 에피소드들의 나열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고 할까. 특히 파뉘르주(팡타그뤼엘의 단짝이자 훗날 3서와 4서의 중심인물이 되는)가 저지르는 온갖 악행을 나열하는 장들은 별개의 피카레스크 소설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다. 하지만 그만큼 웃음의 순도는 높아서, 일곱 개의 시리즈가 끊임없이 변주되는 가운데 노골적인 음담패설(여성과 도끼가 등장하는 만국 공통의 이야기 포함)과 차라리 초현실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몸개그’들이 쉴 새 없이 펼쳐진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을 보라. 영국의 위대한 학자 토마스트가 파뉘르주와 논쟁을 하는 장면이다. 단, 그들은 말이 아닌 몸짓으로 논쟁을 하고 있는데, 영국인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왜냐하면 이 논제들은 매우 까다로운 것들이어서 사람의 말은 내가 원하는 만큼 그것을 설명해내는 데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그때 영국인은 다음과 같은 몸짓을 했다. 왼손을 활짝 펼치고 공중에 높이 쳐들었다가 네 손가락을 오므려 주먹을 쥐고 엄지손가락은 뻗어서 콧날 위에 갖다댔다. 그러고는 갑자기 오른손을 펴서 쳐들었다가 펼친 채로 내려 왼손 새끼손가락을 오므린 곳에 붙이고는 왼손의 네 손가락을 공중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반대로 오른손으로 왼손이 했던 동작을 반복하고, 왼손으로는 오른손이 했던 동작을 반복했다.


파뉘르주는 이에 놀라지 않고, 왼손으로 그의 거대한 바지 앞주머니를 공중으로 당겨 쳐들고, 오른손으로 그 안에서 흰 암소의 등살 한조각과 하나는 흑단, 하나는 브라질산 담홍색 목재로 만든 같은 모양의 나무토막 두 개를 꺼내서는 균형을 잘 잡아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맞부딪치게 해서 브르타뉴 지방의 문둥이들이 딱딱이로 내던 소리와 비슷하면서도 더 잘 울리고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영국인을 바라보며, 입 안에서는 혀를 오므려 신나게 흥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신학자들, 의사와 외과의사들은 이 몸짓을 보고 그가 영국인을 문둥이라고 추론했다고 생각했다.

판사들, 법률학자들, 교회법 학자들은 예전에 구세주께서 주장하셨듯이, 인간에게 있어서 일종의 지복은 문둥이가 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그가 내리려 한다고 생각했다. (396쪽)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같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우스타 쿄스케의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를 읽었으리라. 그리고 우스타 쿄스케는 라블레를 읽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에 내 여자친구 집에 있는, 그녀가 자신의 돈을 주고 구입한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 7권에서 15권까지를 걸 수도 있다. 어쨌거나 참 멋진 만화책 아닙니까.


어쩌면 당신은 웃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는 심각한 독자가 분명하군요. 훌륭합니다. 문득 ‘지나치게 무게를 잡는 진지성’이라는 바흐친의 표현이 떠오르지만 기분 탓이겠죠. 그런 당신을 위한 라블레의 첨언 : 


토마스트가 제기한 논제들의 해설과 그들이 토론할 때 했던 몸짓의 의미에 관해서는 그들이 직접 말했던 대로 여러분에게 설명할 생각이었지만, 사람들이 말하기를 토마스트가 이에 관한 커다란 책을 써서 런던에서 출판했고, 그 책에서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고 밝혔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으로서는 그 일에 손을 대지 않으련다. (403쪽)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라블레의 농담이야말로 서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16000원짜리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내가 왜 그것을 설명해야 하지? 그 덕에 나는 제목에서 예고한 라블레의 실패한 농담과 팡타그뤼엘의 거대한 입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는데? 이건 또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하지만 친구여, 오늘은, 오늘 단 하루만큼은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그만두기로 하자. 그리고 건배. 좋은 술과 안주로 몸을 따뜻하게 덥히고, 못다 한 약속은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자. 


“평화로이, 즐겁고, 건강하게, 언제나 좋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팡타그뤼엘리슴(팡타그뤼엘의 사상)이니까.

















2013. 2. 8. 프레시안북스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208125405&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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