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거리의 엉덩이에서 튀어나온 거인의 외침 그리고 그가 들려준 더럽고 새로운 이야기



라블레는 거리의 전도사였다. 원한다면 여기에 ‘미친’이라는 수식을 붙여도 좋다. 미친 거리의 전도사 — 제법 그럴듯한 호칭이다(그러니 여기서 라블레가 전도사가 아니라 프란체스코파의 수사였다는 적절한 지적은 하지 말기로 하자). 비슷한 이름을 가진 웨일즈의 한 밴드는 언젠가 이렇게 노래했다.


“사랑 따윈 논하지 않아, 우린 그저 취하고 싶을 뿐!”

(Manic Street Preachers, ‘A Design For Life’)


사랑 따윈 논하지 않고 그저 취하는 것. 그것이 바로 라블레가 추구하는 일이다.


사랑하는(*이것이 단지 수사적인 표현일 뿐이라는 것을 굳이 지적해야 할까? 이 또한 수사의문문일 뿐인데?) 그대들이여, 즐겨라. 그리고 허리에 좋게 몸을 편안히 하고 즐겁게 남은 부분을 읽도록 하라. 그리고 너희들, 당나귀 좆 같은 놈들아. 다리에 종양이 생겨 절름발이나 되어버려라!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나를 위하여 건배하는 것을 잊지 말라. 나도 즉석에서 축배를 들어 답례하겠다. (‘작가 서문’,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20쪽)


과연 도널드 서순이 그의 방대하고도 아름다운 다섯 권짜리 대작 <유럽문화사>(오숙은.이은진.정영목.한경희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에서 프랑스에 ‘국민시인’이 없는 이유를 분석하며 “라블레는 너무 상스럽고 분변학적(이라 국민시인이 될 수 없었다)”라고 말한 이유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는 또한 샹송가수들이 “라블레한테서는 외설적인 말놀이를 빌려왔다”고 언급하기도 하는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굳이 이 자리에 소개하는 것은 물론 내가 얼마전에 문제의 <유럽문화사> 전권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다. 적어도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무척 기쁘다.


한편 서순의 서술은 <세계문학의 구조>(조영일 지음, 도서출판b 펴냄)에 등장하는 ‘국민 작가’라는 개념을 둘러싼 조영일과 장정일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장정일은 서평을 통해 “조영일은 ‘국민 가수’ ‘국민 배우’ ‘국민 투수’에다 ‘국민 여동생’까지 있으니, ‘국민 작가’도 있는 줄 안다”고 조소했는데, 이건 사실 해당 논쟁의 매우 국지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니 이쯤에서 넘어가도록 하자.


<가르강튀아>의 주인공 가르강튀아의 출생 장면은 서순이 지적한 라블레의 ‘상스럽고 분변학적’인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때는 어느 봄날, 가르강튀아의 아버지 그랑구지에가 다스리는 유토피아에 잔치가 벌어진다. 그들은 ‘술을 더 잘 마실 수 있도록’ 36만7천14 마리의 소를 잡는데, 소 창자가 쉬이 상한다는 점을 고려해서 인근 주민들을 모두 모아 남김없이 먹어치우기로 결정한다. 알다시피 소 창자는 “누구나 손가락을 핥을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고, 가르강튀아의 어머니 가르가멜도 참 좋아하는데, 문제는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에 있다. 사려 깊은 남편인 그랑구지에는 아내의 건강을 위해 소식을 권한다.


“똥 껍데기를 먹으면 똥이 먹고 싶어진다오.”


하지만 자존감 충만한 신여성이었던 가르가멜은 남편의 충고를 따르는 대신 큰 통으로 열여섯 통, 중간 크기의 두 통하고 여섯 항아리 분량의 창자를 먹어치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약 5톤 분량의 창자를 뚝딱한 것이다. 세상에! 이토록 놀라운 인체의 신비를 라블레는 간단하게 논평한다. “얼마나 멋진 대변이 그녀 몸속에서 들끓었겠는가!”


아니나다를까, 저마다 양껏 먹고 마시며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가르가멜의 아랫배가 조금씩 아파오기 시작한다. 진통이 오는 걸까? 다시 한 번 다정한 말로 아내를 위로하는 그랑구지에. “암양처럼 용기를 가져요. 이 애를 얼른 낳아버리고 곧 다른 아이를 만듭시다.” 그런 남편에게 가르가멜 역시 살갑게 대꾸한다.


“아, 좋으실 대로 말씀하세요. 당신들 남자들이란! 그래요, 정말이지, 당신이 원하니 있는 힘을 다하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걸 잘라버렸다면 좋았을 것을!”


잠시 거세의 공포에 몸을 떨던 그랑구지에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 통증이 오면 두 손을 입에 대고 소리를 지르라고 이른 후 다시 즐거운 술자리로 돌아간다. 옛날 우리네 아버지들이 떠오르는 뭉클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얼마 후,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된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괴로워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즉시 사방에서 많은 산파들이 달려와서 밑을 만져보고, 나쁜 냄새가 나는 살덩어리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내장요리를 너무 많이 먹은 탓으로 (여러분이 항문에 붙은 창자라고 부르는) 직장이 늘어나며 그녀에게서 빠져버린 항문이었다. (46쪽)


세계문학사, 나아가 인류의 모든 예술 장르를 통틀어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탈장’ 장면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아직 그런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상상조차 하기 싫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산파 무리 중 “육십 년 이상 의술에 종사하며 솜씨를 인정받았던 더러운 차림새의 노파가 강력한 수렴제를 투여”했고, 그 결과 “모든 괄약근이 수축해서 닫혀버려 이로 물어 벌리기도 몹시 힘이 드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으니까. 그래도 탈장은 해결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곧이어 태어난 가르강튀아가 난생 처음으로 접한 광경이 제자리를 벗어난 어머니의 직장이 되는 상황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니까.


가르강튀아는 출생부터 남달랐다. 그는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대신 엉뚱하게도 “위쪽으로 솟아올라 공정맥으로 들어가서는 횡경막을 지나 (그 정맥이 둘로 나뉘는) 어깨 위까지 기어올라간 다음 왼쪽 길을 따라 왼쪽 귀로 나왔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술자리의 모든 사람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마실 것! 마실 것! 마실 것!”


물론 그가 목놓아 요구한 것이 어머니의 젖은 아니었다.


한편, 부어라 마셔라 흥겹게 놀고 있던 그랑구지에는 멀리서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돌연 복받치는 부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너 참 (목청이) 크구나!Que grand tu as!”라고 뇌까렸고, 바로 그것이 아이에게 가르강튀아(Gargantua)라는 이름이 붙여진 까닭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까닭이라고 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제2외국어로 중국어(첫 두 시험은 90점 이상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3년을 평균하면 40점을 넘지 않았다)를 배우고, 교양필수과목으로 초급일어(가타가나를 외우지 못해 D+를 받았고 재수강은 하지 않았다)를 수강한 내가 불어 발음을 알게 뭔가? 그렇다고 하니 그냥 그렇게 알 뿐이다.


<가르강튀아>는 이런 가르강튀아의 이야기다. 상스럽고 분변학적이며 우스꽝스럽고 또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이자, 중세 기사도 소설의 구조를 따라 주인공의 탄생부터 성장과 교육, 결정적인 전쟁(혹은 결투)에 승리한 후 마침내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상승 플롯의 이야기. 사실 주인공 또한 민간 설화 속의 주인공에서 빌려온 것으로, 당대에 이미 <거대한 거인 가르강튀아의 위대하고도 지고한 평전>이라는 작자 미상의 대중소설이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라블레 또한 서문을 통해 도용 아닌 도용을 흔쾌히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라블레의 작품을 단순한 답습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는 낡은 중세 기사도 소설의 형식을 비틀어 자신의 스타일로 전유한 것이다. “문화연구에서 전유는 어떤 형태의 문화자본을 인수하여 그 문화자본의 원(元) 소유자에게 적대적으로 만드는 행동을 가리킨다”라는 문학비평용어사전의 정의 그대로. 문학비평용어 따위 알고 싶지 않다면 국어사전을 찾아도 좋다. “~을 혼자 독차지하여 가지다”라는 풀이가 가리키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당대인들의 밤잠을 설치게 하던 기사도 소설이 아닌, 라블레가 독차지한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이야기니까. 비록 70년 후, 세르반테스와 돈 키호테와 산초 트리오에게 그들의 지분을 상당 부분 빼앗길 운명이긴 하지만.


라블레는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이 시대 속에서 소설을 과거의 희화적 개작, 즉 패러디의 장으로 삼음으로써 반소설anti-roman이라 불리워질 만한 문학적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프랑스 근대 여명기의 거인들 1:라블레>(이환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부 펴냄) 37쪽)


“이 아이를 보십시오. 이 아이는 아직 열두 살도 채 안 됐지만, 폐하께서 데리고 계신 전(前)시대의 공허한 말만 지껄이는 자들*과 오늘날의 젊은이들 사이의 차이를 충분히 알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87쪽)


(*역주에 따르면 “이 단어 mateologien는 그리스어를 전사한 것으로 신학자 théologiens를 암시하는 말장난이다.” 이런 말놀이는 라블레 문체의 또 다른 특징이다. 더럽기만 한 게 아니란 말이다. 물론 종종, 아니 자주, 더러운 말놀이를 즐기긴 하지만.)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수도사 출신의 의사이자 위마니슴 사상가이며 고위 관료와도 돈독한 친분을 나누던, 한 마디로 당대의 엘리트였던 라블레는 왜 이렇게 ‘상스러운’ 소설을 쓰게된 것일까? 대답은 바로 ‘거리’에 있다. 어쩌면 ‘미친’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 희대의 음악가인 모차르트 또한 사촌 누이에게 “잘 자요. 하지만 먼저 침대에 터져 나오도록 똥을 싸세요. 잘 자요, 내 사랑. 당신의 입속으로 당신의 똥꼬를 밀어넣어요” 같은 편지를 보내던 분변증(scatology) 환자가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하나의 작품을 단순한 정신건강의 소산으로, 다시 말해 병든 영혼의 배설물로 해석하는 건 재미없는 일이다. “일기는 일기장에 쓰세요”라는 댓글이 더는 재미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솔직히 좀 지겹지 않나?


“그런데 말씀입니다. (수도사가 말했다) 예쁘지도 착하지도 않은 여자는 무슨 소용이 있지요?

— 수녀원에 넣으면 되지. 가르강튀아가 말했다.

— 그렇지요. (수도사가 말했다) 그리고 속옷을 만드는 데 쓰지요.”

(238쪽)


만약 누군가 인터넷 게시판에 이런 글을 올린다면 “일기는 일기장에”라거나 “똥은 변기에” 같은 댓글을 달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런 댓글이 재치를 보증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물을지 모른다. “어라, 지난 주엔 ‘소설’이란 게 라블레의 엉덩이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 그게 그거 아냐?” 나는 이렇게 반박하겠다. 모든 텍스트에는 무릇 자기모순적인 부분이 있는 법이라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성경>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내가 방금 성호를 긋기 위해 잠시 타이핑을 멈췄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그리고 신께 맹세하는 바인데, 둘은 결코 같지 않다). 


그렇다, 라블레는 특유의 ‘상스럽고 분변학적’인 문체를 ‘거리’에서 빌려왔다. 


지배적인 문체는 뼈대 구실을 하는 그로테스크한 주제에 대응하는 그로테스크하고 희극적인 민중 문체인데 가장 정력적인 형태 속에 가장 강력한 표현이 드러나 있다. (…) 젊은 시절 프란체스코파 수사였던 라블레는 똑같은 샘으로부터(*거리 혹은 민중으로부터) 다른 누구보다도 ‘한결 순수하게’ 그것을 길어 올렸다. 그는 탁발승의 삶의 형식과 표현 형식을 그 원천에서 연구하였고 나름대로 독특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제 그는 그것을 떠나서 살 수가 없게 되었다. 비록 탁발수도회를 증오하기는 하였지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생생한 그들의 멋있고 소박한 문체는 그의 기질과 목적에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미메시스>(에리히 아우허바흐 지음, 김우창.유종호 옮김, 민음사 펴냄) 369쪽)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언어, 그 순박함과 유연성이 그 안에서 온갖 변신과 위장을 가능케 하는 언어, 그 풍요로움과 다양성이 세계의 모든 것을 담아 내는 언어 —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대학자가 되고도 남을 그는 터무니없게도 천박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 프랑스 근대 여명기의 거인들 1:라블레> 7쪽)


아무리 라블레라고 해도 이 더럽고 우스운 소설에 자신의 이름을 거는 일은 조금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라블레는 1532년에 발표한 첫 번째 소설인 <팡타그뤼엘>과 2년 후 발표한 <가르강튀아>를 알코프리바스 나지에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는 또한 아랍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알코프리바스의 직업을 (제5원소의 추출에 성공한) 연금술사라고 설정함으로써 작품에 신비한 분위기를 불어넣으려 한다. 하지만 480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의 시각에는 그저 희극적인 분위기를 배가시킬 뿐이다.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작품을 막 완성한 라블레에 앞에 나타날 수 있다면, 차라리 ‘지라르 드 풍자크’ 같은 귀족적인 이름을 권하는 게 어떨까 싶다(라블레는 두 소설이 모두 성공한 후 세번째 책부터는 라블레라는 본명을 사용한다. 물론 ‘의학박사’라고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는 건 어떨까. 라블레가 본명도 아닌 가명을 내세우면서까지 ‘상스러운’ 소설을 쓰고 또 발표한 목적은 무엇일까? 좋은 질문이다. 정말 좋은 질문이다. 비록 내가 던진 질문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좋은 걸 좋다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부족하고, 평소 그런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해온 나로서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차라리 비통한 심정으로, 이 자리를 빌려 내 작은 신념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음을 여러분께 밝히는 바다. 


아마 라블레의 심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앞서 우리는 라블레가 “세계와 인간의 발견”이라는 슬로건으로 요약할 수 있는 위마니슴의 대표적인 사상가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여러 현실적 이유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지만. 잠시 기억을 더듬어 고등학교 세계사 수업 시간을 떠올려보라. 


위마니슴은 중세의 신 중심적 세계관에 반기를 든 사상이다. 만약 라블레가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에 온다면, 유튜브에 올라온 중세 동영상을 보고 ‘싫어요’ 버튼을 눌렀을 거란 말이다. 어쩌면 어느 CF를 따라 “중세의 올가미! 중세의 덫! 중세의 감옥!”이라고 외쳤을 지도 모르지. 유행가나 음담패설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허섭스레기들을 작품 속에 끼워넣는 라블레의 솜씨를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을 일이다. 그렇기에 라블레는 자신이 만든 웃음 폭탄을 통해 낡은 가치관을 흔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나른한 국어시간에 그런 종류의 웃음을 가리키는 단어를 배웠다. 풍자, 혹은 해학, 혹은 골계미 같은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단어들을.


풍자를 몇 개의 범주로 분류하는 것은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그것들은 서로 교차하고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삶의 주체인 인간에게로 모아진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그의 삶의 실체는 무엇인가. 더 정확하게 묻자 — 그토록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장식된 외양 밑에 숨겨진 실체는 무엇인가. 풍자는 사물을 나타난 그대로 보기를 거부하는 시선에 의해 유도된다. 그것은 가시可視의 현상을 뚫고 진실에 육박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풍자의 최대의 효용은 바로 여기에 있다. 풍자적 웃음은 진실을 가로막는 위선, 기만, 가장의 두터운 벽을 허물어뜨리는 무기 — 그지없이 유연한, 그러나 놀랍도록 효율적인 무기이다. 이 웃음 자체가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눈 있는 자를 볼 수 있는 데까지 안내할 뿐이다. 풍자는 웃으면서 말한다 — 눈 있는 자들이여, 눈을 뜨고 보라. (< 프랑스 근대 여명기의 거인들 1:라블레> 154쪽)


눈 있는 자들이여, 눈을 뜨고 보라고?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영어 시간에 배웠던 “Wake up and smell the coffee!”(‘정신차리고 상황을 직시하라’는 뜻의 관용구)라는 표현을 비틀어 “Wake up and smell the shit!”이라고. 그것이야말로 ‘분변학적’인 문장들을 통해 라블레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봐, 일어나서 똥냄새 좀 맡아봐, 이게 세상이라고, 응? 정신 좀 차려! 어디서 구린내 안나?”


그렇기에 라블레의 소설 속에서 교황과 성직자, 왕과 판관, 부자와 관리, 과거의 위인과 당대의 유명 학자 등 모든 권력자들은 똥과 오줌을 뒤집어쓴 채 권력의 옷을 벗은 하나의 신체가, 기계를 연상시키는 하나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바로 그것이야말로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보편적인 요인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비극 작가는 주인공의 신체적인 측면에로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모든 요소를 피하려고 신경을 쓴다. 신체에 대한 배려가 끼어들면 희극성이 배어나올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뭘 마시지도, 먹지도, 몸을 따뜻하게 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가능한 한 그들은 어디 앉지도 않는다. 긴 독백을 하는 중에 앉는다는 것은 주인공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음을 상기하는 것이리라. 이따금씩 인간 심리에 밝은 면모를 보여주던 나폴레옹은 어디에 앉는다는 행위만으로도 비극은 희극으로 바뀌게 된다고 지적했었다." (<웃음>(정연복 옮김, 세계사 펴냄) 49쪽) 


물론 풍자가 만들어 내는 웃음에는 한계가 있다. “풍자는 빈정대는 웃음 뒤에 숨으며 대상과의 맞대결을 피한다.” 권력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분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정색하고 대응하기엔 쪽팔리기에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농담인 것이다. 안전하지만, 그만큼 위력은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라블레는 당대의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고지식한 교회에 의해 거푸 금서처분을 받기는 했지만) 큰 탈 없는 삶을 살 수 있었다. 라블레의 시대는 라블레가 생각했던 것만큼 멍청하고 경직된 사회는 아니었던 셈이다. 라블레에게는 잘 된 일이다. 국제행사 포스터에 쥐 그림 좀 그렸다고. ‘주적’이라는 나라의 트윗을 리트윗하며 장난 좀 쳤다고 사람을 구속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면, 밭에 나는 쇠고기라 불리며 흰 머리도 검게 만든다는 기적의 콩이 섞인 밥깨나 먹었을 테니까(네이버 댓글로 만족하는 흔한 네티즌이 되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아마 라블레라면 그런 상황에서도 이렇게 말했을 것 같긴 하다.


“똥이나 처먹여라!” (18쪽, 아니 19쪽)



프레시안북스 2013. 1. 25.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125154127&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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