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으로 가득 찬 고대의 바다를 상상해보자. 우리에게 익숙한 생물들과 진화의 갈림길에서 사라진 낯선 생물들이 함께 우글거리던 그곳에 한 무리의 원시 양서류가 등장한다. 바다에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웃들의 생각에 의문을 던진 그들은 육지를 꿈꿨고, 육지를 향해 무모한 첫 걸음을 내딛었다. 정확히 말하면 첫 지느러미라고 해야겠지만(그들에게는 아직 발이 없었다). 


그들은 곧장 한계에 부딪힌다. 그들의 몸은 육지의 조건을 견뎌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지상의 삶을 엿볼 수는 있으나, 그것을 온전히 누릴 수는 없다. 죽지 않기 위해 다시금 바다로 —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그곳으로 — 돌아갈 수밖에.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조롱이다. 하지만 그들은 또 다시 육지를 찾을 것이다. 실패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웃음거리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일단 육지를 의식한 이상 그것은 불가피하다. 더는 바다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다. 일상에 신물을 느낀 인간은 보다 높은 차원의 세계로 이동하려, “정신과 상상력의 창조자가 되”려 하지만 정신은 인간을 고갈시킨다. 책을 읽는 일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집중력을 잃은 채 같은 페이지를 맴도는 자신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볼 수 있는가. 글쓰기를 비롯한 다른 정신노동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일에서는 도무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괴롭다는 것을 알지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다. 다시, 또 다시, 그리고 다시. 원시 양서류와 현생 인류의 이 고달픈 왕복 운동을 가리켜 콜린 윌슨은 ‘아웃사이더 문제’라 부른다. 


‘아웃사이더’의 근본 문제는 일상의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며, 그 일상의 세계가 무언가 지루하고 불만족스럽다고 느끼는 데 있다. 마치 최면술에 걸린 사람이 톱밥을 계란이나 베이컨이라고 믿으면서 먹고 있는 것처럼. (<아웃사이더> 445쪽)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계란과 베이컨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설령 톱밥일지라도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달리 먹을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느 여름 오후 옅은 잠에서 깨어나 텅 빈 방을 둘러보며 낯선 비현실의 감각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세차게 젓거나, 세수를 하거나, 차가운 물을 마시며 현실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눈앞의 계란과 베이컨을 톱밥이라고 의심하며 살아가기란 힘든 노릇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아웃사이더다.


콜린 윌슨은 <아웃사이더>를 통해 인류의 역사에 등장한 아웃사이더들의 계보를 쓴다. 카뮈,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헤르만 헤세, 헤밍웨이, 반 고흐, 카프카 등 쟁쟁한 예술가들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그의 펜 앞에 불려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아웃사이더>는 일종의 문예비평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젊은 윌슨은 한 권의 책에 아웃사이더 문제에 관한 모든 것을 담으려 했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아웃사이더로서 해결해야 했던 질문, 즉 “어떻게 현실을 살 것인가?”의 답을 찾아야 했다. 독특한 성찰과 기이한 활기로 가득 찬 윌슨의 처녀작 <아웃사이더>는 그렇게 탄생했다. 


윌슨은 먼저 <지옥>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아웃사이더를 소개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다 할 재능도 없고 완수해야만 할 사명도 없으며, 반드시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될 감정도 없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그는 호텔에 머물며 옆방의 여인들을 훔쳐보는 것으로 소일한다. 그는 볼 필요가 없는 것,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그것은 그의 현실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는 좀처럼 현실로 돌아갈 수 없다. 너무 깊게, 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웃사이더의 첫번째 정의가 도출된다. “아웃사이더는 깨어나서 혼돈을 본 인간이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 등장하는 로캉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나는 완전한 고독 속에 살고 있다. 나는 누구와 얘기하는 일도 결코 없다. 나는 받는 것도 없고, 주는 것도 없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의미와 목적과 효용으로 이루어진 일상을 나름대로 살아간다. 구토가 그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는 세상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정직한 관찰자였고, 깨달음과 함께 구토가 시작된다. 그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그날그날의 사건에 휩쓸려 기계처럼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텅 빈 인간’, 바로 속물에 다름 아니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구토가 나온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깨달음이다. 


다음은 우리에게 친숙한 <이방인>, 뫼르소의 차례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눈물 흘리지 않고, 사랑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사람을 죽인 후에도 별다른 죄의식을 갖지 않는 인간이다. 대단한 악인이라서가 아니다. 단지 느끼지 못할 뿐이다. 뫼르소는 로캉탱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느낌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별다른 감흥도, 반성도 없는 삶. 그가 사형을 선고 받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은 존재한다. 소설의 마지막, 처형을 기다리던 뫼르소에게 찾아온 각성이 그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어머니를 생각하고, 어머니의 삶을 이해한다. 그 자신의 삶 역시 의미로 빛남을 느낀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닮아 마침내는 형제 같음을 느끼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의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윌슨에 따르면 자유란 비현실로부터의 해방에 불과하다. 그것은 단순히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의미의 강렬함’ 즉 살아남으려고 하는 의지를 인간에게 불러일으키게 하는 극한상황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처형을 기다리던 뫼르소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윌슨은 계속해서 말한다. “자신의 자유를 요구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돌연 위기가 찾아오고, 구토를 느끼고 재판과 처형을 받게 되거나 심지어는 하등동물(카프카의 <변신>)로까지 전락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어떻게 자유를 요구한단 말인가? 사르트르는 ‘앙가주망(사회참여)’을 주장한다. 세상에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 무엇이든 택해 자신을 던짐으로써 의미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헤밍웨이가 택했던 말초적인 자극들 — 전쟁에 참전하고, 권투 시합을 하고, 투우에 열광하는 — 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윌슨은 생각한다. 자유에는 자유의지가 전제되어야 하고, 의지에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동기란 곧 ‘신념’의 문제다. 


어떤 것이든 그것이 가능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 한, 그것을 성취할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념이란 무엇인가의 존재에 대한 것임에 틀림없다. 즉 그것은 현실적인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자유란 결국 현실적인 것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웃사이더’는 그 비현실감 때문에 근원에서부터 자유와 차단되어 있다. 비현실의 세계에서 자유를 행사하는 것은 낙하하면서 도약하는 것과 똑같이 불가능한 것이다. (73쪽)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처음과는 조금 다르다. 윌슨은 나선형 계단을 오르듯 또 다른 작품들을 경유하며 새로운 층위에서 문제를 바라본다. 


아웃사이더는 진보를 추구한다. 그것은 사회의 진보가 아닌 개개인의, 차라리 인류 전체의 진보다. 그는 평범한 인간의 조건을 벗어던지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환경에 얽매어 있다. 나무에 집을 짓고 사는 대신 아파트에 살며, 사냥을 하는 대신 직장에 나가 돈을 벌고 마트에서 장을 볼 뿐이다. 추위를 피해야 하고, 더위를 견디지 못하며, 허기와 졸음에, 그 밖의 모든 인간적인 본능에 무릎 꿇는 존재다. 그렇게 약한 존재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마찬가지이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라고? 아웃사이더는 당연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니, 당연함을 당연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윌슨은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인간의 약함을 깊이 명상하면 최후에는 반드시 ‘종교적인 사고’, 헤밍웨이의 소위 “잃을 수 없는 것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에 도달한다. 즉 단념과 규율의 논리로 발전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83쪽)


갑자기 튀어나온 종교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 <매트릭스>의 경우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매트릭스의 세계는 최면에 걸린 노예들의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톱밥을 계란이나 베이컨이라고 믿으면서 먹고 있는’ 세계다. 네오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였지만, 빨간 약을 먹은 후 현실을 마주한다. 다시 한 번, “아웃사이더는 깨어나서 혼돈을 본 인간이다.” 깨어난 그가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은 토하는 일이었다. 네오는 바로 아웃사이더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비현실의 감각을 버릴 수 없다. 네오는 자신이 사람들을 구원할 ‘그(The One)’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빨간약을 선택한 그는 현실을 보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유를 요구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해서 회의하고 번민할 뿐이다. “어떤 것이든 그것이 가능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 한, 그것을 성취할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마침내 그가 그것이 가능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믿는 순간, 자신의 자유를 온 몸으로 요구하는 순간, “잃을 수 없는 것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나약한 인간을 구원하는 신이 되었다(이제 그는 더 이상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구원이다. 물론 윌슨이 분석하고 있는 것은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가 아니고, 그가 요청하는 것도 인류의 구원이 아니다. 그것은 비현실과 자초한 무기력으로부터 아웃사이더 자신을 구원하는 일이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일이다. 윌슨은 어떤 질서의 개념을 인용하고 그것으로 사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생활은 겁쟁이의 생활이며, 거기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아웃사이더의 문제는 ‘인사이더’가 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아웃사이더는 아웃사이더로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자기를 실현함으로써 삶을 새롭게 발견(혹은 발명)하고, 또 구원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신과 감정과 육체를 조화시키며, 그런 조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현실을 살아야한다. 생각에 빠져 행동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것이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육체노동을 하며 남는 시간을 활용해 홀로 책을 써나간 스물네 살의 아웃사이더 콜린 윌슨이 우리들에게 하는 말이다. 아마 누구보다 그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아웃사이더>가 대단한 고전이라는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출간 50년이 넘은 지금도 그의 저작은 여전히 강렬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거장들의 소설이 있고, 그 속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젊은 작가의 열정이 있다. 어느새 나이를 먹어버린 내게 그의 책이 예전만큼 충격을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어린 시절 그의 책을 읽었던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콜린 윌슨은 처녀작 <아웃사이더>의 놀라운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웃사이더로 남았고, 평생에 걸쳐 아웃사이더 문제와 문학뿐 아니라 범죄와 불가사의와 신비사상 등을 연구하며 다양한 분야의 책을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돌아보는 <아웃사이더>의 마지막 부분은 새삼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한 사람이었다.


자기보존의 본능이 내면 확대의 고통에 반항하고, 정신적인 태만에 기울기 쉬운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파도같이 높아져가는 것을 하찮게 여기며, 자기의 눈으로 보고 자기의 손으로 만진 체험의 양을 한정시키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존재의 민감한 부분을 그것에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대상에게 드러내 보이며, 어떻게 하든지 전체로서 사물을 보려고 고투하는 것, 그것이 개인에게 맡겨진 문제다. 개인은 이 긴 노력을 아웃사이더로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성자(聖者)로서 마칠지도 모른다. (438쪽)


고교 독서평설 201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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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3-01-1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웃사이더 읽었을 때의 벅찼던 감동이 다시 느껴져요.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책인데 팝님의 소개를 따라가다보니 그래 이런 말이 있었지, 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아웃사이더야' 하면서 아웃사이더 패밀리를 결성해서 (실지로는) 먹자계를 만들었던 기억도 나고 그렇네요.
전 기존 <이방인>은 이제 다 읽고, 최근에 나온 신간인 그림이 있는 <이방인>을 읽고 있어요. 뫼르소는 여전히 내게 낯선 사람인 듯한데, 그림을 겸해서 보니 조금은 알 듯도 해요. 뫼르소를 이해하는데 위의 저 <아웃사이더>가 도움이 되겠어요. 많은 이사 덕에 저 책은 새로 사야 될 책이네요. 추천 꾸욱.

poptrash 2013-01-21 20:21   좋아요 0 | URL
비록 원고를 쓰기 위해 책을 다시 읽으며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받지 못했지만, 정말 그때의 기억은 생생하게 떠올랐어요. 어린 나이에 이런 글을 쓰다니, 콜린 윌슨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함께. 저도 <일러스트 이방인> 읽었습니다. 그림이 있고, 행갈이를 다르게 했을 뿐인데, 느낌이 정말 다르던데요 ㅎㅎ

2013-01-25 0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6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