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위로 재생시켜 놓은 음악파일 중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흘러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린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난 누구도 필요하지 않았어, 사랑은 그저 장난이었지,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가버렸네…”라는 가사를 가지고 있는 그 노래를. 에릭 칼멘이 작곡하고 브리짓 존스가 목 놓아 불렀던 노래의 제목은 '올 바이 마이셀프'. 라흐마니노프의 곡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노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대신 읽던 책을 잠시 내려놓았을 뿐이다.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을 때 나는 ‘모두에게 복된 새해 — 레이먼드 카버에게'라는 묘한 제목을 가진 단편을 (다시) 읽던 중이었고, 마침 한 등장인물이 “저도 말합니다. 날씨, 음식, 음악, 책 말합니다. 저는 라흐마니노프 좋아합니다.”라는 대사를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당신이 피아노를 조율하리라고도,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하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남편이 대꾸했다. 나 역시 그들이 라흐마니노프를 이야기하리라고도, 그 순간 라흐마니노프의 곡이 흘러나오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새해를 앞둔 마지막 날, 피아노를 조율하기 위해 아내의 친구가 집으로 찾아온다. 사트비르 싱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도인이다. 남편은 그의 방문이 달갑지 않다. 아내의 ‘대화 상대’가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싫고, 아내도 없는 집에서 낯선 외국인과 시간을 보내기도 싫지만, 그렇다고 매몰차게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 결국 그는 문을 열어 이방인을 받아들인다.


사내는 피아노를 조율하고, 남편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불편한 시간을 보낸다. 오랜 시간 방치한 피아노는 상태가 좋지 않다. 서툰 한국말로 사내가 묻는다. “이 피아노, 어떻게, 이렇게 왔습니다.” 피아노가 그의 집에 오기까지의 사연을 되짚는 남편. 어린 시절 체르니 40번에 들어갔지만 나오지는 못한 아내와, 아이가 치는 피아노 소리가 흐르는 가정을 상상하던 그 자신과,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그들 부부와 한 노인이 얽힌 복잡한 사연이다. 문득, 남편은 깨닫는다. 익숙하다는 핑계로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 않은 채 그저 습관처럼 아내를 대했던 자신을, 그런 자신 때문에 외로웠을 아내의 마음을. 이제 남편은 아내가 돌아오기를, 그들 모두에게 새로운 해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낯선 손님이 조율한 것은, 실은 남편의 마음이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의문은 남는다. 두 부분으로 나뉜 제목에서 ‘모두에게 복된 새해’는 그렇다 쳐도, ‘레이먼드 카버에게' 는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대답은 김연수가 번역한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대성당’에 있다. 


카버의 소설 역시 아내 친구의 방문으로 시작한다. 그는 맹인이고, 오래 전 아내가 그를 위해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하며 만난 사이였다. 그들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편지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지속해왔고, 아내를 잃고 여행을 떠난 맹인이 이제 그들의 집에 하룻밤을 묵으려 들른 것이다. 물론 남편에겐 그의 방문이 달가울 리 없다. 아내와 그가 계속해서 연락했다는 사실이 싫고, 낯선 맹인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기도 싫다.


마치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아내와는 달리 남편은 그와의 시간이 불편하기만 하다.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우며 잡담을 나눠보지만 불편함은 도무지 가시지 않는다. 결국 남편은 습관처럼 TV를 튼다. 아내가 눈살을 찌푸리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TV에서는 대성당을 다룬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손님에게 남편은 대성당을 설명하려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때 맹인이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대성당을 그려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남편이 펜을 잡자 맹인이 그의 손을 잡았고, 그들은 손을 맞잡은 채 대성당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림이 어느 정도 완성되자 맹인은 그에게 눈을 감아보라고 말한다. 남편은 눈을 감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는 순간적으로 맹인이 ‘보는 세계’를 ‘본’ 것이다. 그가 맹인과 함께 그린 것은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지레 포기한 타인의 세계였다. 그는 말한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어느덧 새해다. 지난 새해 다짐의 대부분을 지키지 못한 채 우리는 또 다시 나이를 먹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우리는 여전히 삶에 서툴다. 소중한 사람은 물론 많은 순간 자기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은 누구도 필요하지 않고, 사랑도 그저 장난이었던 그 시절로부터 한 치도 자라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런 우리에게 아직 늦지 않았다고, (음악과 그림이 있는 한)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고, 그러니 지레 겁먹고 문을 닫지 말라고 말하는 이 두 편의 소설은 퍽 위안이 된다. 하지만 이 글은 소설이 아니고, 나 역시 누구를 위로할 주제가 못 된다. 그러니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해야겠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


행복한 동행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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