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얼굴로 돌아보지 마

“정말로 내가 감동하는 책은 다 읽고 나면 그 작가가 친한 친구여서 전화를 걸고 싶을 때 언제나 걸 수 있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하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홀든 콜필드의 말이다. 홀든은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이고, “무릇 좋은 소설이란 여성들의 심금을 울려야 한다”는 명제에 걸맞게 <호밀밭>은 미국 여대생들에 의해 ‘금세기 100대 소설’로 뽑히기도 했다.

작가인 J. D. 샐린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소문이 있는데, 주로 ‘미국 여대생’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소설의 지나친 성공에 환멸을 느끼고 은둔생활을 하던 샐린저는 18세의 소녀 조이스 메이너드와 사랑에 빠진다. 그의 나이 53세, 편지를 주고받으며 시작된 관계였다. 그녀는 아버지뻘인 작가와의 사랑을 위해 예일대의 장학금까지 포기하지만, 자신의 여자에게도 따뜻하지 못했던 ‘차가운 도시 작가’의 변심으로 1년간의 동거는 파국을 맞는다. 아직 어린 나이의 그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이었을 것이다.

조이스는 그와의 사랑과 이별, 이어진 자신의 삶을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나며>라는 책에서 소상하게 그리고 있는데, 그 후로도 샐런저는 편지를 보내온 소녀들을 꾀어 ‘이러저러한’ 관계를 가졌다고 부연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교훈은 이렇다 : 작가에게 전화를 하는 것은 모르겠지만, 편지를 보낼 때는 인생을 걸어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작품을 읽고 작가라는 실제 인물에 대한 환상을 품어서는 곤란하다, 정도가 될까. 당연한 말씀이다. 진정 뛰어난 작품은 언제나 작가보다 위대하니까.

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책을 읽을 때의 우리는 언제고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는 소년소녀가 된다. 단 한 번의 근사한 미소에 인생을 거는 그들처럼, 작가가 빚어내는 인물에, 이야기에, 무엇보다 단어들의 짜릿한 연쇄에 혼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나는 커트 보네거트와 함께 담배를 피우고 싶다. 김수영과 쓴 술을 나누고 사르트르와 키를 재보고 싶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는 함께 포르노를 보고 싶은데,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함께라면 더욱 좋겠다. 김훈 선생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할 것 같지만 꼭 그러고 싶다는 건 아니다. 이처럼 작품에서 받은 이미지는 우리 머릿속에서 작가와 함께 얽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이 또한 당연한 말씀.

그래서 나는 요즘 한창훈 작가와 함께 싱싱한 회와 소주 한 잔이 먹고 싶다. 비린내 물씬 풍기는 바다와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집 <나는 여기가 좋다>를 읽은 것이다. 나는 그를 알지 못하고, 그저 친구를 꾀어 양식 광어나 먹을 뿐이지만. 그런데 웬걸, 출판사에서 그의 신작 에세이의 출간과 함께 ‘작가와 함께 바다낚시’ 이벤트를 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쩐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점점 더 과열되는 출판 마케팅을 보며 대개는 한숨을 쉬게 되지만, 이번 이벤트에는 혹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할인과 쿠폰, 증정품을 거친 마케팅은 점점 작가와의 친밀한 만남을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가겠지. 하지만 과연 그게 좋기만 한 일일까? 한창훈은 단편 ‘밤눈’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랑이 성공한 이유는 한마디로 룰을 지켰기 때문이요.”

--------------------------------

원래 결론은 그래서 니콜 크라우스를 만나고 싶어졌지만, 그래도 와타야 리사가 짱이다, 가 되려고 했는데 본의 아니게 시의 적절한 사회적인 메세지를 넣게 됨. 하 하 하 하 하 하. 마감 시간은 지켜야 하니까요.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10-11-08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작가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만나고 싶지 않다구요! 물론 조너선 사프런 포어에 대해서는 예외지만.

아, 팝님, 있잖아요,
제발, 제발,
와타야 리사를 만나고 싶다고 하지 말아요.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말은 정말 아주 미치게 질투를 불러일으킨다구요! 니콜 크라우스는 괜찮아요, 그렇지만 와타야 리사만은 제발요. 흑흑. 왜 다들 와타야 리사 예쁘다고 만나고 싶다고 하는거에요, 대체 왜요!!왜요!!

(이상 와타야 리사를 엄청나게 질투하는 이상한 1人)

poptrash 2010-11-08 09:48   좋아요 0 | URL
제가 몸담고 있는 모 친목단체(!?)에서 와타야 리사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프로젝트를 짜고 있었는데... 찾아 나서는 일을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desperately seeking Wataya Risa' 같은 제목으로 촬영도 하고. 만나도 못만나도 상관은 없지만 이왕 일본에 간김에 마지막 날은 천왕을 만나기로 했어요. 멤버 중의 한 명을 초대 여성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이므로 실현 가능성은 잘 모르겠지만, 만약 한다고 해도 다락방 님을 위해 R로 표기할게요!

하이드 2010-11-0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창훈 작가와 낚시를 하고, 광어를 낚아 (내가! 내가!) 싱싱한 '자연산' 광어를 회쳐서
한창훈 작가에게 첫 잔을 받고, 꼴딱꼴딱 원샷 하고, 한창훈 작가에게 잔을 돌려 막잔을 따랐다. 그 중간에 광어도 먹었다. 음.음.

아 .. 튀김 먹고 싶다.


하이드 2010-11-08 09:36   좋아요 0 | URL
근데, 그렇게 사람을 먼저 알게 되니깐, 책을 읽기가 어려워지는 부작용이 있어요.

poptrash 2010-11-08 09:49   좋아요 0 | URL
자연산 광어는 도대체 무슨 맛입니꾸아. ㅜ_ㅜ
책은 책이고 작가는 작가겠죠. 그저 자연산 광어가 부러울 뿐... 술이랑.

니나 2010-11-08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언젠가 페이퍼로 쓰고 싶지만
난 늘 이승우는 우리아빠 윤대녕은 우리엄마
그런 놀이를 해요.

poptrash 2010-11-09 08:40   좋아요 0 | URL
이승우 아빠에 윤대녕 엄마라.
어쩐지 하드보일드하잖아 이거...

양철나무꾼 2010-11-09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페이퍼를 보니까,<아름다운 거짓말>이 생각나네요.
우리나라에선 그닥이었었던 것 같은데,미국에선 님의 이 페이퍼들이랑 비슷한 관점에서 회자되더군요~^^

전 아주 좋았어요.

poptrash 2010-11-09 08:42   좋아요 0 | URL
24/7 이랑 아름다운 거짓말을 한 번 읽어보아야겠군요!

blanca 2010-11-10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영하랑 김연수랑 친구하고 싶었어요 ㅋㅋㅋ 로맹 가리랑 마이클 온다치의 쿨한 여친이 되어 보고 싶기도 하네요. 님 페이퍼 읽으니 갑자기 공상의 나락에 빠져듭니다. 가수 소이가 콜필드에게 전화하고 싶다고 했던 게 콜필드의 저 얘기에서 나왔군요. 읽고도 몰랐다는--;;

poptrash 2010-11-10 11:02   좋아요 0 | URL
로맹 가리의 쿨한 여친이라면 저도 땡기는 데요... 하지만 저는 남자니까 안되겠죠. 가수 소이라면 티티마 출신의 언니는 헤이라는 그 분이신가요. 처음에는 소희라고 보고 음, 소희가? 라고...